김동건(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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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전 1기 아나운서
{{{+1
김동건
金東鍵 | Kim Dong-geon


파일:김동건아나운서.png

성명
김동건 (金東鍵)
출생
1938년 11월 25일[1] (85세)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읍[2]
학력
경북대학교사범대학부설초등학교 (졸업)
경기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교육심리학과 / 학사)
현직
프리랜서 아나운서
파일:가요무대.png MC
경력
DBS 아나운서 (공채 / 1기)
TBC 아나운서
KBS 아나운서
KBS TV본부 국장대우 방송위원
연세대학교 농구후원회 회장
한국아나운서클럽 부회장
삼천리 사외이사
여성유권자연맹 홍보대사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
가족
형제 : 김동석
아내 : 김영진
아들 : 김주형

1. 개요
2. 생애
2.1. 경력
3. 여담
4. 출연 프로그램
5. 수상



1. 개요[편집]


어느덧 그렇게 되어가지고 58년째 아나운서를 하고 있습니다.

KBS에서 오랫동안 가요무대를 진행하고 있는 아나운서 김동건입니다.

2020년 9월 3일, 방송의 날 특집 다큐 인사이트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모던코리아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 인터뷰에서

대한민국아나운서.

DBS - TBC - KBS를 거쳐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2. 생애[편집]


1938년 11월 25일,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다. 8.15 광복 이후 월남하여 서울에서 성장했다. 서울수송초등학교에 다니던 중 6.25 전쟁으로 대구로 피난을 떠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3]로 전학하여 졸업했고, 이후 서울로 돌아온 후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고 경기고등학교연세대학교 교육심리학과를 졸업했다.


2.1. 경력[편집]


1963년 동아방송에 입사했고 이듬해 동양방송으로 이적했다가 1973년 다시 KBS로 옮겨 1993년에 프리랜서 선언을 할 때까지 KBS의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진행한 프로그램으로는 뉴스파노라마, 11시에 만납시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등이 있다.

김동건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프로그램은 월요일 밤 10시 KBS 1TV에서 방송 중인 "가요무대"를 꼽을 수 있다. 2003년부터 한동안 가요무대의 진행을 전인석 아나운서에게 넘겼다가, 2010년 5월 10일에 복귀했다. 가요무대의 주 시청층인 중장년 시청자들이 김동건의 복귀를 강력히 요구했던 까닭이다. 물론 그 기간 동안 방송을 쉰 것은 아니고 가요무대 1000회 특집(2006년 11월 6일 방영분) 때 출연했고 같은 KBS 1TV에서 '한국, 한국인'이라는 토크쇼를 진행했다. 이 프로그램은 방송시간대가 심야시간대였던데다가 재방송도 안 해서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 복귀한 뒤로 현재까지도 월요일 밤 10시에 하는 가요무대 진행을 맡고 있다. 현재 지상파 프로그램을 고정 진행하는 전/현직 아나운서 중 최고령/최선임이다.[4]

1985년부터 2002년까지 18년 동안 'KBS 가요대상' MC를 맡은 적이 있다. KBS의 대표 아나운서였기도 했지만 당시 KBS가 방영했던 3 대중음악 프로그램의 MC였어서 그에게 가요대상 MC 마이크가 주어졌다.[5] 참고로 당시에 가요톱10 진행을 맡았던 아나운서 손범수도 1993년부터 2001년, 2003년부터 2004년, 2007년 가요대상 MC를 맡았는데 1993년부터 9년 간 김동건과 호흡을 맞췄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에서 메인 MC 4명 중 한 사람이었으며 이 때문에 1985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당시에는 무대 진행MC이자 실향민의 한 사람으로서 평양을 방문했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진행하다가 충격으로 쓰러져 혼절한 출연자에게 응급처치를 하며 "이 무슨 비극입니까..." 하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현재도 방송자료 화면으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1983년 10월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당시 여의도광장에서 거행됐던 순국 외교사절 합동 국민장이 끝난 후에 열린 '북괴암살폭파만행규탄 궐기대회'의 진행자로 나선 적도 있다.

또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지상파 TV로 중계하던 때에는 KBS에서 무려 30년간이나 거의 전담으로 진행을 맡았던 경력이 있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진행은 이후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1994년과 1995년에 MBC에서 생중계할 때도 진행을 맡았다. 사실상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의 대명사다.

2022년 부로 데뷔 60년째를 기록한 아나운서 중에서도 현재까지도 최장수 방송활동을 하는 아나운서계의 거목, 대한민국 아나테이너의 살아 있는 원형 격인 인물이며, 그 유명한 아나테이너인 전현무, 이금희, 손범수, 김성주와도 경력이 30년 이상이나 차이가 나는 아나운서계의 거북이이다.[6]


3. 여담[편집]


  • 중후하고 안정된 이미지를 풍기는 베테랑 아나운서이고 이러한 이미지 덕에 1990년대 중반 쌍용그룹의 이미지 광고도 찍은 적이 있다.

  • 고령이 되기 이전에도 가발을 쓰고 있었다고 한다. 가끔씩 연예오락 프로그램에 나오는 KBS 아나운서 후배들이 고정 레퍼토리처럼 가발 비뚤게 쓴 아나운서의 에피소드를 얘기하는데, 그 에피소드의 주인공이다.

  • 상당한 동안이다. 1938년생으로 현재 만 85세며 꽤나 정정하고 목소리도 상대적으로 젊다. 게다가 몸무게도 대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거의 변화가 없다고 한다.

  • 실향민이기에 보수 성향이 좀 있다. 정치에 대해 크게 이야기 하진 않지만, 18대 대선 직전에 박근혜 후보가 약속을 잘 지키고 한결 같다고 우호적인 발언을 한 적이 있다.

  • 위의 보수 성향 탓인지 참여정부 초창기에 '코드 인사 논란'에 휘말린 적이 있다. 참여정부가 출범한 지 4개월이 지났을 시점, 18년 간 진행해온 가요무대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다음주부터 나오지 마라"는 방식으로 퇴출되었던 것이다. 평소에 정치 성향을 내보인 적은 없지만, 보수 인사들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코드 인사의 희생양이 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일었다.[7] 이후 이 논란에 대해서는 거의 함구했고, 2010년 다시 가요무대로 돌아왔을 때에도 과거 이야기는 할 필요 없다며 선을 그었다.

  • 1985년 평양 방문 당시, 친구에게 유서를 쓰고 떠났다고 한다. 당시 남북 간의 갈등이 어느 수준이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향이 평양인 어머니(1900년대생으로 당시 80대)가 자신의 북한행을 알고 건강을 해칠 것을 염려해 자신이 북한을 간 사흘 동안은 어머니 방의 텔레비전과 전화를 끊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평양 방문 후 북한도 사람이 사는 곳이기는 하구나 하고 느꼈다고 한다.

  • 30살 가량 차이나는 김병찬 전 아나운서의 의상을 여러차례 지적한 바도 있다. "진행할 때 선글라스도 쓰고, 노란색·주황색 양복도 입은 적 있다. 주목은 많이 받았지만, 정말 눈물 나게 혼났다." 사실 이건 세대차로 봐야한다

  • 1980년 언론통폐합에 따라 TBCKBS 2TV로 넘어간 후 최초의 쇼 프로그램인 버라이어티쇼 KBS 새가족을 방영하였는데 이 방송에서 KBS의 대표 아나운서 자격으로[9] MC를 맡았다.

  • 2020년부터 KBS 가요대상의 풀 영상들이 KBS 공식 유튜브 채널에 연도별로 스트리밍 및 업로드되었을 때, 라이브로 가요대상 스트리밍을 지켜보던 일부 시청자들이 김동건이 거의 빠지지 않고 MC로 너무 자주 나오는 모습을 보고 채팅창에 '동건옹', '또동건', '(이번에도) 동건할배', '가요무대 아저씨'를 비롯하여 '조용히 하세요', '저 아저씨는 맨날 조용히 하래', '콤푸타에 입력' 등의 우스갯소리로 언급하기도 했다.

  • 2020년 9월 3일 '방송의 날' 특집회차로 편성된 KBS 다큐멘터리 다큐인사이트 - 모던코리아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10] 편에서는 김동건 아나운서의 인터뷰를 토대로 그 시절 KBS의 영상을 입혀 KBS가 걸어온 영욕의 세월을 가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방송보기 방송을 보면 1970~1980년대 굵직한 한국 현대사의 순간마다 어김없이 이 분이 마이크를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1] 이 방송 인터뷰에서 김동건 본인 말로는 "무려 58년을 방송했다"고 한다. 모던코리아의 책임CP인 염지선 PD는 이후 페이스북에서 "K 공장의 포레스트 검프"라고 표현했다. 현실판 포레스트 검프처럼 온갖 현대사의 모멘트에 다 나타나는 인물이었으니 그런 별명이 붙을 만하다.

  • 2020년 9월 30일 추석특집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콘서트를 진행했다. 나훈아와 인터뷰를 주고 받는데 가장 인상깊은 노래를 '명자'로 꼽았다. 노래 내용이 이북 출신 피란민인 명자의 부모님께서 자신들의 부모님[12]을 평생 그리워하다 돌아가시는 내용으로, 김동건의 어머니 또한 당시 그의 나이 3세에 돌아가셔서 이후에 고향인 황해도에 못 찾아뵙고 있어 공감이 간다고 밝혔다. 여담으로 나훈아가 방송에 출연하지 않던 기간에도 사석에서 자주 만나던 인물 중 한 명이 김동건이라고 한다.


4. 출연 프로그램[편집]




5. 수상[편집]


  • 1979년: 한국방송대상 아나운서상
  • 1993년: 국민훈장 목련장
  • 1993년: 위암 장지연상
  • 1993년: 대통령 표창
  • 2001년: MBC 명예의 전당 방송인부문
  • 2013년: 한국아나운서연합회 한국아나운서대상 특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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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적상으로는 1939년생이나, 실제로는 1938년생이 맞다.[2]사리원시[3] 대구수성초등학교로 언급되는 경우도 있는데, 당시에는 수성초등학교 자리에 경북대 사범대 부설초등학교(당시에는 대구사범학교 부속초등학교)가 있었던 탓이다. 1952년에 봉산동으로 옮겨와 현재에 이르고 있다.[4] 비슷한 세대의 아나운서 황인용은 지상파 고정 프로그램이 없다.[5] 이 당시 시대상을 알 수 있는 부분으로, 김동건 아나운서가 1992년 가요대상을 진행하며 서태지와 아이들의 팬덤이 내지르는 함성소리에 어쩔 줄 몰라하는 장면이 있다. 팬덤 자체는 1980년대 소방차박남정김완선도 있었지만 연말 시상식 음향에 지장이 갈 정도로 강력한 화력을 보인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처음이었다. 이런 변화한 관객 반응은 이 다음 세대인 H.O.T.젝스키스, S.E.S., 핑클 등 1세대 아이돌 그룹이 등장하며 완전히 정착했다.[6] 과도한 서술이 아니다. 김동건과 함께 1960년대에 데뷔한 아나운서들은 이미 작고하거나, 건강상의 사유로 방송 일선에서 은퇴한 지 10년이 넘었고, 김동건조차도 80대라는 고령으로 2020년 나훈아 특집 콘서트 이후로는 가요무대 MC 활동 외에는 방송 활동을 거의 못 하고 있다.[7] 대표적인 보수 인사인 김동길 박사와 친분이 깊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기도 하다.[8]JTBC 뉴스룸의 전신이다.[9] 함께 진행한 이영혜 아나운서는 전날 TBC 석간[8]을 진행한 TBC의 대표 여자 아나운서였다.[10] KBS의 공식 슬로건 문구이자 로고송 가사다.[11] KBS의 주말 메인뉴스였던 뉴스파노라마 진행을 비롯해 1980년 언론통폐합 이후 첫 쇼 프로그램 진행, 1981년 국풍81 개막식 중계, 1983년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생방송, 1985년 남북 예술단 교환방문, 1986년 평화의 댐 건설 국민 성금 모금방송 등등 여러 중요 프로그램들의 진행을 맡았다.[12] 명자의 친조부모, 외조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