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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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110190.png

강릉시민축구단 No.
김동섭
金東燮 | Kim Dong-Seob

출생
1989년 3월 29일 (34세)
경기도 이천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포지션
스트라이커
신체
187cm, 80kg
학력
이천장호원초등학교 (1996~2000)
서울대동초등학교 (2001)
세일중학교 (2002~2004)
장훈고등학교 (2005~2007)
프로 입단
2007년 시미즈 S펄스
소속 구단
시미즈 S펄스 (2007~2010)
도쿠시마 보르티스 (2009~2010 / 임대)
광주 FC (2011~2012)
성남 FC (2013~2015)
부산 아이파크 (2015~2018)
안산-아산 무궁화 (2016~2017 / 군 복무)
서울 이랜드 FC (2019)
강릉시청 축구단 (2020)
창원시청 축구단 (2021)
강릉시민축구단 (2022)
국가대표
3경기 (대한민국 / 2013)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포지션은 공격수.


2. 클럽 경력[편집]



2.1. 유소년 시절[편집]


이천 장호원초등학교 재학 당시 전국대회에서 메달을 딸 정도로 촉망받는 육상 유망주였다고 한다. 그러나 6학년부터 스카웃을 받아 대동초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세일중학교 3학년에는 U-15팀에 뽑힐 정도로 축구에서도 촉망받는 유망주로 인정받으며 장훈고로 진학한다.

고등학교 시절 1학년부터 팀에서 주전으로 활약했고 일본에서 전지훈련 당시 J리그 팀들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특히, 2006년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시절, 전국고교축구선수권대회에서 결승전 1득점-1도움을 기록하는 등 대회 최우수선수상에 선정될 정도로 고교 시절 재능을 뽐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국대회 2관왕에 올려놓았을 정도. 이 때 활약으로 언론에서 주목받아 붙은 별명이 코리안 앙리.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대학은 물론, K리그와 J리그 여러 팀들이 스카웃 제의를 보냈고, 3학년 여름방학에 일본에 건너가 프로계약을 채결하게 된다.

2.2. J리그[편집]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인 2007년 여름, J리그 명문팀인 시미즈 S펄스에 입단했다. 하지만 프로의 벽은 용병 신분인 10대 선수에게 너무 높았는지, 2년 동안 경기에 거의 출전하지 못했다. 대신 연령별 대표팀에 꾸준히 차출되며 2008 AFC U-19 아시아선수권 예선에서 괌을 상대로 7골이나 넣는 등 경기 감각을 유지했다.

그러다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U-20 대표 선수로 2009년 FIFA U-20 월드컵을 앞두고 도쿠시마 보르티스에 임대되며 참가했지만, 이렇다할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그런데 팀은 정작 8강까지 올라가면서 일약 이름을 떨쳤으니... 일본에서 부진한 활약으로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차출되지 못했고, 혼자 생활하면서 외로움과 식사 등에서 여러 문제로 인해 국내 복귀를 타진하게 됐다.

2.3. 광주 FC[편집]


파일:external/pds.joins.com/NISI20120513_0006335232_web.jpg

결국 2011년 K리그 신인드래프트에 참가, 신생 광주 FC에 지명되면서 국내로 돌아오게 되었다.[1] 191cm의 박기동과 광주 FC의 장신 주전 투톱으로 출장했고, 이승기와 팀 공격을 이끌었다. 올림픽 대표팀에도 다시 돌아왔다. 지원이 충분치 않은 신생팀 사정에도 불구하고, 2011시즌 27경기에 나와 7골 2도움을 기록했다. 2012년에는 32경기 7골을 기록했으나 팀의 강등을 막지는 못했다. 그리고 오프시즌에 성남 일화로 이적했다.


2.4. 성남 FC[편집]


파일:external/img.sportalkorea.com/SK004_20130713_132601.jpg

성남 일화로 이적하면서 4-1-4-1원톱으로서 드디어 그의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시즌 초반에는 키만 멀대같이 커서 전봇대냐는 비아냥만 주구장창 들었는데 팀에 녹아들면서 넓은 활동량과 스피드, 올림픽 대표 김태환과의 콤비플레이 등 그의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전북전에서 시즌 첫 골과 어시스트를 작렬하더니 급기야 이어진 서울전에서는 2골을 작렬, 한때 강팀 킬러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결과적으로 시즌 14골 3도움을 기록. 나름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시즌 이후 시민구단으로 전환한 성남FC의 판매 0순위로 손에 꼽혔으나 가격차인지, 무능한 프런트 때문인지 결과적으로 성남에 잔류, 2014시즌도 함께 하게 되었다.

파일:external/www.kleague.com/_2014320201626.png

2014시즌이 되면서 굉장한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14라운드 기준으로 아직 한 골도 넣지 못했다. 이적 문제 때문에 시즌 전 동계 훈련에 불참하면서 폼이 급격히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일화가 축구단에서 손을 떼면서 성남 일화 천마에서 성남 FC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안익수 감독이 물러나고 박종환 감독이 온 것도 악재였다. 박종환 감독은 선수에게 허들을 제시하고 이를 넘어서도록 강하게 압박하는 스타일이다. 때문에 고정운처럼 미미했던 선수가 압박을 이겨내고 대박 포텐을 터뜨리는 경우도 많았지만, 내성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김동섭에겐 이런 지도 방식이 역효과를 불러왔다.

이후 박종환 감독이 폭력 사태로 물러나고, 후임 이상윤 감독대행은 월드컵 휴식기를 통해 김동섭의 폼을 끌어 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봤지만 여전히 침묵하면서 부진은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오죽하면 요새 폼이 성남팬들 사이에선 악명이 자자한 블라디미르 요반치치보다도 못하단 소리가 나올 지경.

결국 이상윤 감독대행이 뜬금없이 경질당하고 김학범 감독이 온 뒤에는 황의조와 로테이션으로 출장하고 있다.
10월 1일 K리그 클래식 29라운드 전남과 경기에서 결승골을 뽑아내며 리그 첫 골을 기록했다.
11월 23일 FA컵 결승 서울과의 경기에서 4-2-3-1 포메이션의 원톱으로 선발 출전해 120분을 소화한 후 승부차기에서 팀의 4번 키커로 나와 성공시키며 팀의 우승을 확정지었다.
2014시즌 최종 성적은 34경기 4득점.

2015시즌에도 부진이 이어지는 모습. 14라운드를 치르는 동안 3번의 선발, 1번의 교체투입으로 단 4경기를 소화했고 공격포인트는 기록하지 못했다.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에는 꾸준히 출전했지만 5라운드 이후부터 외국인 선수들의 컨디션이 점점 올라오며 밀려났다. 현재 리그에서 대기명단조차 들지 못하고 있는 상황. 6월 28일 부산 아이파크박용지와 트레이드 되었다는 기사가 나왔고 7월 7일에 오피셜이 떴다.


2.5. 부산 아이파크[편집]


파일:external/www.busanipark.com/292_1.jpg

이적 후에도 폼은 좋았지만 부상 때문에 중용되지 못하고 있다. 부산이 워낙 다급한 상황이기 때문에 즉시 전력감 아니면 기회를 주기도 어렵고... 팀이 챌린지로 떨어지며 결국 강등을 막지 못했다. 게다가 2016년 안산 무궁화로 입대를 가게 되면서 큰 전력 이탈이 생기게 되었다.


2.5.1. 안산 무궁화 (군 복무)[편집]


파일:external/www.asanfc.com/2u4AeP.png

무궁화 축구단에서는 2년간 40경기 18골 7도움을 기록하고, 2017년 9월 군 복무를 마치고 부산 아이파크에 복귀하여 7경기 4골을 기록하며 좋은 활약을 펼쳤다.


2.6. 서울 이랜드 FC[편집]


2019년 1월 K리그2 서울 이랜드 FC로 이적하였지만 부상 때문에 리그 단 한경기 출장에 그쳤다.


2.7. 강릉시청 축구단[편집]


2020년 대한민국 3부 축구리그인 K3리그 참가팀 강릉시청 축구단으로 이적하였다. 새 리그에서의 첫 시즌 기록은 리그 4경기 2골에 FA컵 1경기 1골, K3리그 챔피언십 2경기 출전. 준수한 활약으로 시즌을 마쳤다.


2.8. 창원시청 축구단[편집]


2021시즌을 앞두고 같은 리그의 창원시청 축구단으로 이적하였다. 성남 FC 시절 동료였던 김동희와 한솥밥을 먹게 된 건 덤. 2021시즌이 끝나고 계약만료로 창원을 떠났다.


2.9. 강릉시민축구단[편집]


2022시즌 여름이적시장 전까지 무소속으로 보냈다가 여름이적시장에서 다시 강릉시민축구단으로 영입 되었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601810_STD.jpg
그는 2004년 대한민국 U-15 대표팀에 발탁된 이래 2007년 대한민국 U-18 대표팀, 2009년 대한민국 U-20 대표까지 승승장구한 유망주였다.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런던 올림픽 대표팀의 물망에 올랐으나 탈락하는 불운을 겪었다. 성남 일화 천마로 이적하여 활발한 공격을 보여준 끝에 2013년 7월, 같은 감독의 A대표팀에 직행하여 2013년 동아시안컵에 출전하였다. 여기서도 소속팀에서처럼 원톱으로 뛰었지만, 4경기 동안 특별함을 보여주지를 못해서 결국 해외파 소집 요구가 드높아졌고,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대표팀 후보에서는 멀어졌고 이후로도 대표팀과는 인연이 없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187cm의 큰 키를 가졌으며 공중볼 경합에 능하다. 또, 초등학교 때 육상선수로 활동한 만큼 큰 키에 비해 주력도 상당히 빨라 측면에서 플레이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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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년만 더 뛰었다면, 해외에서 5년 선수 경력이 있기 때문에 자유 계약이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