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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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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傑志體育會


이름
김동진
金東進 | Kim Dong-Jin
출생
1982년 1월 29일 (42세)
경기도 동두천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183cm | 체중 74kg | A형
직업
축구선수 (수비수[1] / 은퇴)
축구코치
학력
동두천초 - 안양중 - 안양공고
병역
면제[2]
소속
선수
안양 LG 치타스/FC 서울 (2000~2006)
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 (2006~2010)
울산 현대 호랑이 (2010)
FC 서울 (2011)
항저우 뤼청 (2012~2013)
무앙통 유나이티드 FC (2014~2015)
서울 이랜드 FC (2016)
킷치 SC (2017~2018)
호이 킹 SA (2018 / 임대)
감독
킷치 SC (2019~2021 / 코치)
킷치 SC U-15 (2019~2021)
킷치 SC (2021~2022 / 감독대행)
킷치 SC (2022~ / 수석 코치)
국가대표
파일: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62경기 / 2골 (대한민국 / 2003~2010)
종교
개신교[3]

1. 개요
2. 클럽 경력
3. 국가대표 경력
4. 지도자 경력
5. 플레이 스타일
6. 대회 기록
7. 여담
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이영표, 김치우 등과 함께 한국의 왼쪽 풀백 자리를 풍족하게 만든 주인공이었다.

별명은 강철, 금빛 날개, 샴푸도둑, 스파이더맨 여친


2. 클럽 경력[편집]



2.1. 안양 LG 치타스/FC 서울[편집]


축구를 위해 안양중으로 전학오며 안양에 이사왔고, 안양공고 시절 김종필 감독 아래 기량이 만개했고 고교 3학년에는 주장으로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이후 2000 K리그 드래프트에서 안양의 우선지명을 받아 안양에 입단했다.

신인부터 등번호 4번을 받으며 기대를 모았지만 프로 3년차인 2002 시즌까지는 부상과 모친상 등 여러 요인이 겹치며 주전 경쟁에서 밀리고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다 2003 시즌부터 기량이 만개해 리그에서만 35경기를 소화하며 무려 5골을 기록했다.

2004년 서울로 연고지를 옮긴 팀에 잔류하며 꾸준히 주전으로 소화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이후에는 풀백으로 고정되었지만 K리그 시절에는 센터백, 윙백, 수비형 미드필더까지 가히 한국의 존 오셰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많은 포지션을 소화했다. 초기에는 적은 경기 수에 비해 잦은 포지션 변경으로 적응에 애를 먹었지만, 이를 좋은 피지컬과 뛰어난 공간 활용으로 극복하면서 K-리그에서 전도유망한 수비수로 성장했다.[4]


2.2. 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편집]


파일:attachment/Kim_Zenit.jpg

2006 독일 월드컵을 계기로 딕 아드보카트 감독의 눈에 들어 울산 현대이호와 함께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적했다. 이는 거스 히딩크 감독이 2002 한일 월드컵이 끝나고 이영표박지성을 데리고 PSV 에인트호번으로 이적한 것과 비슷한 그림인데, 자신이 대표팀 감독을 맡았을 때 지도한 측면 수비수와 미드필더를 유럽 클럽 감독으로 부임할 때 데리고 갔다는 점까지 흡사하다.

공교롭게도 김동진이 합류한 2006년 여름 제니트에는 전임 감독인 블라디미르 페트르옐라 감독이 그 해 겨울에 스카웃해 온 현영민이 후보 선수로 있었기 때문에 포지션이 겹치는 김동진과 경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드보카트 감독은 자신이 데려온 김동진을 아예 확고한 주전으로 중용했고 현영민은 1년 만에 한국으로 복귀해야 했다.

2007 시즌은 김동진이 전성기를 보낸 해라고 볼 수 있다. 제니트의 주전 선수로 뛰며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우승에 일조한 것에 더하여 시즌 최우수 왼쪽 풀백 2위로 선정되며 뛰어난 재능을 각인시켰다.

2007-08 시즌 UEFA 컵에서도 예선부터 16강 마르세유전 1차전까지는 주전 수비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이후 왼쪽 다리 부상을 당해 치료를 받았고 이후로는 출전하지 못했다. 그래도 레인저스 FC와의 UEFA 컵 결승전에서 아드보카트 감독의 배려로 종료 30초 전에 교체 투입되었고 결승 무대를 밟아봤다. 그리고 이 경기가 제니트의 승리로 끝나면서 UEFA컵 우승을 경험했다. 이호와 함께 차범근 이후 20여 년만에 UEFA컵 우승을 경험한 대한민국 선수가 되었다.

동료 이호가 후보 선수로 머무르다 한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팀에 남아 유럽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김동진마저 잦은 부상의 여파로 2008년부터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입지가 위태로워졌다. 아직 군문제도 해결하지 못했기에 이래저래 고민이 많다. 광주 상무 불사조 입단 가능 연령이 지나서 자칫하면 안산 경찰청에서 뛰게 될 판이다.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는 수밖에 방법이 없는데 그럴려면 일단 3장밖에 없는 와일드카드에 뽑혀야 한다.


2.3. 울산 현대[편집]


2010년 1월 말, 뇌혈류 장애로 팀 메디컬 테스트에서 탈락하면서 제니트에서 방출통보를 받았고 2010년 2월 K리그 울산 현대로의 이적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서울 시절 팀 후배로 자신에게 밀려 자리를 잡지 못했던 최재수에게 역으로 밀리며 주전 자리를 잡지 못했다.


2.4. FC 서울[편집]


2011년 다시 친정팀인 FC 서울로 복귀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서울에서도 아디현영민이라는 걸출한 경쟁자들이 버티고 있었고[5]


2.5. 항저우 뤼청[편집]


결국 로테이션으로 돌려지다 2012년 중국 항저우 뤼청으로 이적했다. 2013년까지 있었다.


2.6. 무앙통 유나이티드 FC[편집]


파일:external/www.seoulelandfc.com/%EC%84%A0%EC%88%98%ED%94%84%EB%A1%9C%ED%95%84%EC%9D%B4%EB%AF%B8%EC%A7%80%EB%B3%80%EA%B2%BD_63(1).jpg
[6]

파일:external/file.osen.co.kr/201602231924777773_56cc339a157b6.jpg
前 감독 마틴 레니와 함께.

2014년 2월 6일 무앙통 유나이티드 FC로 이적하여 2015년까지 뛰었다.


2.7. 서울 이랜드 FC[편집]


2016년 K리그 2부리그의 서울 이랜드 FC로 1년 계약으로 입단하며 다시 국내로 복귀했다. 한시즌 동안 팀의 베테랑 풀백으로 활약하며 시즌 34경기 1골 3도움을 기록하여 좋은활약을 펼치고, 시즌 종료 후에 이번엔 홍콩 프리미어 리그의 킷치 SC로의 이적이 거의 확정되었다는 소식이 떴다. 서울 이랜드 측에서는 당연히 베테랑으로서 좋은 활약을 펼쳐준 김동진을 붙들기 위해 협상을 먼저 시도해봤으나, 서로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해 결국 떠나보내게 되었다고 밝혔다.


2.8. 킷치 SC[편집]


이후 킷치에서 계속 활약을 보이다가 2018 시즌을 끝으로 이렇다 할 소식이 없었는데, 2019년 7월 1일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하였다. 이후 7월 24일에 킷치 SC와 맨체스터 시티의 친선경기에서 은퇴 경기를 가졌다. 김동진, 4만 관중 기립 박수와 펩 격려 받으며 은퇴식 영상


3. 국가대표 경력[편집]


U-20 대표팀에서는 윙어를 맡았으며 2001년 있었던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부상 재활 이후, 수비형 미드필더와 윙백으로의 포지션 변경이 되어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대표팀에서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였다. 2003년 올림픽 대표로 9월 17일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일본 올림픽 대표와 경기서 전반에만 멀티골을 터뜨리며 2:1의 승리에 기여했다. 2003년 12월 4일 홍콩과의 경기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예선 1차전 그리스전에서 골을 기록하고 3차전 말리전에서 조재진의 두 골을 어시스트하며 대표팀의 8강 진출을 이끌었다.

이후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되었으며, 2004년 12월 19일 부산에서 있었던 독일과의 친선전에서도 세계적인 골키퍼 올리버 칸을 상대로 환상적인 논스톱 중거리 슛으로 선제골을 기록하여 3대1 승리에 기여했고, 독일 월드컵 예선에서도 활약하게된다.[7] 또한 크로아티아전 장거리골은 그의 왼발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장면이다. 크로스 정확도나 왼발 한 방만 보자면 왼발이 약했던 이영표보다 크로스나 킥력이 좋았다.

또한 오프 더 볼 움직임과 공간 활용도가 좋아서 후방에서 순식간에 공격적인 침투를 가져 갈 수 있었고 오버래핑시 출발 타이밍이 좋아 오프사이드에 걸릴 위험도 적었다.

스피드도 빨라 공수 전환이 빨랐고 이를 통해 치달등을 활용한 돌파나 상대 윙어와의 경합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영표와 다른 대목이 이부분. 이영표가 협력 수비로 상대를 터치라인으로 밀어내는 수비를 한다면 김동진은 이보다 더 나은 신체 조건과 스피드를 활용해 상대 윙어와 적극적으로 1대1 수비를 붙었다. 또한 오프사이드 라인 맞추기등 기본 대목도 준수했다.

1 이운재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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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딕 아드보카트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스태프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홍명보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기동
[각주]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선 경고 누적으로 출장하지 못한 토고전을 제외한 2경기에 모두 풀타임 출전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대표팀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해 눈에 안 보인다는 의미인 닌동진이라는 굴욕적인 별명으로 불렸다. 게다가 당시 대표팀 감독들이 김동진을 왼쪽 풀백으로 활용하기 위해 같은 포지션에서 한국 축구 왼쪽 풀백 중 가장 이름값이 높았고 유럽에서 쾌조의 활약을 보여주던 이영표를 본 포지션이 아닌 오른쪽 풀백으로 돌리는 선수 기용을 해야 했다. 이 때 당시 다수의 축빠들에게 까임의 대상이 되었고 2006년 독일 월드컵이 끝난 이후에도 한동안 이러한 비난은 계속되었다.

이 기용에 대해서는 당시 오른쪽 풀백이 가능한 자원 중에서 이영표가 제일 나았기 때문에 김동진이 왼쪽 이영표가 오른쪽이었다는 의견[8] 왼쪽밖에 뛰지 못하는 김동진과 오른쪽도 가능한 이영표를 동시에 사용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는 의견, 그래도 이영표를 활용하고 오른쪽은 송종국이나 조원희를 활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게다가 2007년까지만 해도 러시아 리그에 대한 언론의 관심도가 사실상 전무했던 상황이었던지라 당시 유럽에 파견되었던 소수의 객원 기자들을 제외하고는 리그에서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던 김동진을 철저히 외면했으며, 이후 제니트가 러시아 리그 우승 가시권에 들기 시작할 때쯤에야 조금씩 관심을 갖는 정도가 되었다. 또, 제니트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대표팀에서의 경기력도 향상되었다.

1 이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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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코치
파일:미국 국기.svg 압신 고트비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홍명보 · 파일:브라질 국기.svg 코사



2007년 아시안컵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김치우가 주전 레프트백으로 출전했고, 바레인전 1경기만 출전했다.

이후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 와일드 카드로 출전하여 3차전 온두라스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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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허정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정해성
스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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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대표팀에 선발되었으나 벤치 신세였다. 오른쪽 풀백인 차두리오범석이 수비에서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며 김동진-이영표 라인을 재가동하자는 의견이 축구팬들 사이에서 제기되었으나 나이지리아전 교체로 잠깐 뛴 것을 제외하면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영표가 물러난 시점에서 차세대 왼쪽 풀백으로 꼽히던 그의 부진은 팬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주고있다.[9]


4. 지도자 경력[편집]


은퇴 후 킷치의 수비 코치 겸 유스 지도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2021년 돌연 킷치의 임시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기존 감독인 알렉스 추는 풋볼 디렉터직을 수행하다가 내년 AFC 챔피언스리그 기간에 다시 감독으로 복귀할 예정이라고 한다.~


5. 플레이 스타일[편집]


체격이 좋고 중앙수비수 경험도 있기에 대인방어 능력이 우수하다. 전성기 시절엔 평범한 기동력을 뛰어난 공간활용능력으로 보완했고 거기에 좋은 킥력과 크로스 정확도가 더해져 공격력은 대표팀 부동의 주전인 이영표보다 한 수 위로 평가받기도 했다.[10] 그러나 뇌혈류 장애로 인해 파주 NFC에서 졸도한 사건 이후로 폼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고 현재는 군면제급의 상태라고 한다. 그러니까 폭탄을 달고 축구를 하는 셈. 국대에서도 밀린건 이 영향이 매우 크다.

사실 어떻게 보면 한국 국대의 큰 비극이기도 한데, 김동진의 갑작스런 기량 저하와 이영표의 은퇴 이후 한국의 왼쪽 풀백 자리는 사실상 무주공산이 되어버렸고, 인재도 거의 나오지 않았기 때문.[11]


6. 대회 기록[편집]






7. 여담[편집]


  • 월드컵보다 올림픽에서 큰 족적을 남긴 선수다.[12]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선 조별리그 3경기와 8강전까지 총 4경기에 모두 풀타임으로 출전하였고 측면 수비수 임에도 1득점 2도움을 올렸다. 와일드카드로 나선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선 조별리그 3경기에 역시 모두 풀타임으로 출전하였고 1득점을 올렸다. 특히 올림픽 2회 대회 연속 득점은 대한민국 선수 중에서 이천수(2000-2004), 김동진(2004-2008), 박주영(2008-2012)만 가지고 있는 매우 희소가치가 있는 기록이다.

  • 안정환샴푸를 훔쳐 쓰고 죽어도 자기가 안 썼다고 우겼다 한다(...).[13]

  • 안양 서포터즈는 정조국과 함께 김동진을 엄청나게 싫어하는데, 이유는 안양 LG 치타스FC 서울로 연고 이전하던 때 선수단 중 이 선수가 연고 이전에 적극 찬성이라며 환영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정조국과는 달리 안양공고 출신으로 안양시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이영표와 포지션도 비슷하고, 이영표의 이적 이후 김동진이 잘해주기도 해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선수여서 안양 축구팬들의 마음의 상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 황인범의 루빈 카잔 이적에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 이적을 고민하던 황인범은 다방면으로 정보를 알아보던 중 러시아 리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김동진에게 문자로 도움을 구했는데, 놀라운 건 그 전까지 둘은 일면식도 없었다고. 그럼에도 김동진은 러시아 리그의 장단점을 비롯한 상세한 정보를 장문으로 보내주었고, 잘할 수 있을 것이란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황인범은 이 조언을 바탕으로 러시아 리그로 이적을 굳히게 되었다고 한다.

  • 김정우에 의하면 골 욕심이 많았다고 한다. 공격으로 나가면 잘 안 돌아왔다고. 올림픽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에서는 경기전부터 나 오늘 공격하니까 잘 커버해달라고 해서 후배들이 싫어했다고 한다(...)


8. 관련 문서[편집]



[1] 풀백, 센터백[2] 뇌혈류장애[3] 올림픽 축구 대표팀이 부르는 찬양앨범에도 참여하였다.[4] 단순한 멀티 플레이어와는 달리 수비에서의 중앙과 측면은 아주 다르다. 때문에 풀백과 센터백을 동시에 소화하기 위해선 뛰어난 공간 활용능력과 축구 IQ가 요구된다. 슈틸리케호에서 장현수를 보자.[5] 여담으로 현영민과는 제니트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적이 있다. 제니트 때는 현영민이 김동진에 밀렸으나 서울에서는 그 반대의 상황이 되었다.[6] 등번호 63번은 2016년에 태어난 자신의 아이와 함께 3명의 가족이 잘 지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정한 번호라고 밝혔다.[7] 참고로 이때 독일의 전력은 , 발락, , 클로제 등 최정예 멤버로 출전했으나, 이운재의 PK 선방과 이동국의 발리슛에 침몰당했다.[8] 간혹 "김동진이 이영표를 넘었다"는 반응이 대세였다고 언급하는 경우가 있는데, 검증되지 않은 내용이다. 지역방어 성향의 이영표 옆에 대인마크 성향의 중앙 수비수를 붙여두는 것은 축구의 흔한 패턴인데 그것으로 단순히 수비력에서 밀렸기 때문에 이영표가 우측으로 이동했다고 하는 것은 악질적인 어불성설이다. 사람들이 뒤늦게 김동진의 좌측 수비를 그리워했다는 논리를 반박하자면 이영표가 왼쪽 수비수로 복귀한 2010년 월드컵 예선, 본선에서 김동진을 왼쪽 수비 주전으로 그리워한 여론은 거의 없었다. 고질병이었던 오른쪽 풀백 자리에 차두리가 완벽하게 적응했기 때문이다.[9] 김동진뿐만 아니라 K리그 최고의 왼쪽 수비수로 꼽히던 장학영은 국대와는 전혀 인연이 없다가 2010년부터 공익근무에 들어갔고 2007년 아시안컵에서 오범석과 함께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기대를 모았던 김치우는 수비력 부족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실상 왼쪽 윙으로 전향했다. 장학영은 핌 베어백 감독이 국대로 호출했으나, 장학영은 부상이라 국가대표에 나갈수 없다며 차출을 고사했다. 그러고서 불과 4일뒤에 있었던 K리그 챔피언 결정전에 출전. 핌 베어벡을 엿먹였고, 이후 장학영은 국가대표와 인연이 멀어지게 된다. 소속팀에 충성심이 굉장히 강해 국대와 인연을 끊었었다. 그러다가 장학영은 선수 생활 말미에 주작 걸려서 결국 감옥행과 동시에 영구제명 당했다.[10] 이영표는 왼발 킥력이 약해서 신체능력이 정점이던 네덜란드 시절을 제외하면 공격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11] 이영표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옮겨오긴 했지만, 그가 은퇴한 이후 김진수, 박주호, 홍철 등이 불안 요소들이 많아서 현 국대의 약점으로 늘 지적받고 있다. 하지만 김진수와 홍철이 있는 왼쪽 풀백에 비해 오른쪽 풀백은 이용말고 안정적인 후계자가 없다. 김문환이 카타르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기에 기대해볼만하다.[12] 그러나 월드컵과 올림픽 모두 2회 출전으로 같다.[13] 채팅창에서 질문을 하자 안정환이 대답했는데, 꽃을 든 남자 샴푸였다고 한다. 안정환이 리즈 시절 때 광고한 그 샴푸 제품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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