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희(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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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내각 부총리
김락희
金洛姬 | Kim Rak-hui


파일:김락희 부총리.jpg

출생
1933년 11월 11일 평안남도 개천시[1]
사망
2013년 2월 17일 평양시
국적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정당

파일:조선로동당 한글.png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농업 테크노크라트

2. 생애[편집]


1933년 11월 11일 평남 개천에서 태어났다. 1945년부터 개천직포공장에서 직포공으로 일하다가 1949년 9월, 개천여중을 졸업, 개천고급중학교로 진학했으나 중퇴했다. 아버지는 리 인민위원회 위원장이고 모범농민이었는데 6.25 전쟁 중 아들과 함께 처참하게 살해됐다는 것이 북한의 주장이다. 6.25 전쟁 중에 빨치산으로 활동했다고 하며 북한의 설명에 따르면 1951년 3월부터 6.25 전쟁으로 인해 장정들이 온통 전쟁터에 나가있던 중 젊은 처녀인 김락희가 직접 소를 몰고 식량증산 운동에 앞장서서 '처녀보잡이'로 북한에서 유명해졌다. 1952년 1월, 모란봉지하극장에서 열린 농민열성자회에 참가하여 김일성을 마났고, 1952년 12월에 김일성이 직접 김락희에게 감사편지를 써서 보내주었고 전후 농업협동화가 시작되자 선전을 위해서 1953년 10월, 개천군 봉화협동농장 관리위원장에 임명하였다. 이때 강냉이 농사를 지어서 높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나는 김락희 동무를 잘 안다. 그런 동무들이 후방을 지키고 있었기에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라고 주접을 떨며 김락희를 추켜세웠고, 김락희는 김일성의 총애를 바탕으로 1957년 8월, 24세의 젊은 나이로 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58년 4월 16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로력영웅 칭호를 받았다. 이후 계속 승진하여 1965년 개천군 당위원장[2]을 지냈다. 조선대백과사전에 따르면 1970년에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보선, 1971년 자강도 농촌경리위원장, 1977년 황해북도 농촌경리위원장을 지냈다. 이후 김일성은 개천군 현지지도를 나갈 때마다 김락희를 만나주었다 카더라.

나이가 들어서인지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강등되었으며 1984년 개성시 농촌경리위원장에 임명, 여기서도 일을 잘했는지 1985년 1월 3일, 농업부문 일군들에게 주는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8년 평안남도 농촌경리위원장을 지냈다.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하지만 활동시기를 보면 알겠지만 이미 김정일 시기가 들어서면 나이가 70대가 다 되어서 일선에서 물러나 평안남도 농촌경리위원회 고문위원장으로 은퇴해서 손자손녀들이나 돌보며 6.25 전쟁 때 어떻게 식량 생산했는지 회고하는 다큐멘터리에나 출현하던 상황이었다. 김락희가 이때 다 은퇴한 상황인건 예술가, 기술자, 사망자만 소개하는 조선대백과사전에 소개됐다는 점에서 너무 명명백백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김정일이 김락희를 중용하였다. 김정일은 "김락희 동무는 우리 시대 여성 혁명가의 정형이다"라고 김락희를 띄워주었고 2005년 5월 김운기의 뒤를 이어 곡창지대인 황해남도의 책임비서로 삼았다. 이때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도 보선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2005년 10월, 연형묵 장의위원을 지냈다. 2009년 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도 재선되었다. 2009년 3월, 홍성남 장의위원, 2010년 4월, 김중린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러다가 2010년 6월, 12기 3차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영일(1944) 내각이 숙청되고 최영림 내각이 출범하면서 강능수, 리태남, 전하철, 조병주, 한광복과 함께 신임 내각 부총리에 임명되면서 로배권에게 황해남도 책임비서 자리를 물려주었다. 9월에 열린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10년 11월, 조명록 장의위원, 2011년 1월, 박정순 장의위원에 위촉되었다. 2011년 2월에는 로두철의 뒤를 이어 국가수의방역위원장에 임명되었다.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하자 장의위원에 위촉되었으며 2012년 2월 김정일훈장의 1차 수훈자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아마도 노환 때문인지 이때부터 공식 석상에서 사라져 두문불출하였으며 내각 부총리에서도 해임되었다. 아마도 2012년 5월의 최고인민회의 12기 5차 회의에서 해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내각 명예 참사를 지내다가 2013년 2월 17일에 사망했다. 김정은이 화환도 보내주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내각부총리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2016년 북한은 다큐멘터리 <어머니 당의 품> 제3부를 방영하여 11명의 사망한 당 엘리트들을 혁명전사로 칭송하였는데 김양건, 정춘실과 더불어 김락희 역시 명단에 올랐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정은은 '조선로동당의 강화발전과 사회주의 위업의 승리를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한 충직한 혁명동지'의 한 사람으로 허담, 연형묵, 김중린, 허정숙, 김국태, 김용순, 김양건, 전병호, 박송봉, 리찬선, 리제강, 리용철, 강량욱, 리종옥, 안달수와 함께 김락희를 언급하였다. 김락희를 기리는 소개편집물도 조선중앙텔레비죤에서 방영되었다.

3. 여담[편집]


아들 김인철은 현재 조선인민군 군관으로 복무하고 있다. 손자 김충성도 2023년 3월 16일자 뉴스에서 군관복을 입고 등장했다.

4. 참고문헌[편집]


  • 북한 다큐멘터리 <어머니 당의 품> 제3부(2016)
  • 조선대백과사전.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2020 북한 주요인사 인물정보』(서울: 통일부,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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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개천군[2] 이때까지만 해도 비서가 아니라 위원장이라 했다. 비서 직책은 1966년 2차 당대표자회에서 도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