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성(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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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성의 수상 경력 /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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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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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성
金明成

출생
1946년 9월 3일
경상남도 부산부
사망
2001년 7월 24일 (향년 54세)
경상남도 진주시 경상국립대학교병원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부민초 - 경남중 - 부산공고 - 동아대
가족
부인 안옥선, 슬하 2남
신체
177cm, 90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한국전력공사 야구단 (1966~1977)
병역
육군 야구단 (1968~1970)
지도자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1982~1983)
청보 핀토스 1군 수석·투수코치 (1986)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 1군 투수코치 (1987~1988)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1989~1990)
빙그레 이글스 1군 투수코치 (1991~1993)
LG 트윈스 1군 투수코치 (1994~1996)
롯데 자이언츠 1군 투수코치 (1997~1998)
롯데 자이언츠 감독대행 (1998)
롯데 자이언츠 감독 (1999~2001)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3.1. 롯데 감독 시절
3.1.1. 1999년
3.1.2. 2000년
3.1.3. 2001년
4. 평가
5. 롯데의 기일날 전적 부진
6. 역대 감독 성적



1. 개요[편집]


대한민국야구인이자 前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이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투수였다.

그를 조명하는 좋은 글. 사진자료가 많은 글.


2. 선수 경력[편집]


부산공고 시절 팀의 첫 우승을 이끌었던 선수였다. 당시 청룡기 MVP에 오르면서 맹활약했고, 그것이 현재까지 부산공고의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이었다. 이 때 같이 활약했던 선수가 OB 베어스의 전 감독이었던 이재우.

한국실업야구 시절 한국전력공사 야구단에 입단하였고, 육군야구단에서 군복무 중 1970년 실업 야구 리그 다승왕에 오를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다가, 1977년 은퇴하였다.


3. 지도자 경력[편집]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롯데 자이언츠의 투수코치로 부임해 팀을 이끌면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1986년부터 청보 핀토스의 수석코치 겸 투수코치로 영입되어 팀명이 태평양 돌핀스로 변경된 1988년까지 투수코치를 맡았다.[1] 이후 삼성 라이온즈, 빙그레 이글스,[2], LG 트윈스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했다.

특히 LG 투수코치 시절이던 1994년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 당시 김용수, 이상훈, 정삼흠, 김태원, 인현배, 차명석 등을 포함한 투수진을 잘 이끌어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3] LG 직전에 부임했던 빙그레 이글스에서도 정민철을 지도해서 명성을 얻었다. 그러다가 1997년부터 롯데 자이언츠에 복귀하여 무너졌던 롯데 마운드를 재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998년 시즌 도중 해임당한 김용희 감독을 대신하여 감독 대행을 맡아 무난하게 잔여 시즌을 이끌면서, 1998 시즌 후 정식 감독으로 승격하였다.


3.1. 롯데 감독 시절[편집]



3.1.1. 1999년[편집]


정식 감독으로서의 첫 시즌인 1999년, 롯데는 개막과 동시에 6연승을 질주하며 1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4] 이 시즌 롯데는 안정된 마운드와 막강한 타선을 앞세워 시즌 내내 전체 승률 1위를 유지했다. 문동환이 17승으로 제 몫을 다했고 주형광이 변함없이 맹위를 떨친 데다가 박석진이 11승을 거두면서 활약했다. 여기에 팀 주장이자 제 2의 전성기를 맞은 박정태, 특급 외국인 선수 펠릭스 호세, 기량이 정점에 오른 마해영의 공격력까지 가세하며 이상적인 투타밸런스를 갖췄다. 이 시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롯데 자이언츠/1999년 문서를 참조할 것.

시즌 마지막 경기인 두산전을 패하는 바람에 한 끗 차로 두산에 이은 전체 승률 2위 및 드림리그 2위로 정규시즌을 마무리했다. 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와 맞붙어 극적인 승부 끝에 4승 3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그러나 한국시리즈에서는 플레이오프에서 너무 힘을 많이 뺀 관계로 한화 이글스에게 패배, 준우승으로 만족해야 했다.


3.1.2. 2000년[편집]


2000년 시즌 매직리그 2위로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이라는 성과를 냈지만, 이마저도 매직리그에 약체 팀들이 집합해 있었다 보니 당시 양대리그제의 덕을 많이 봤다.[5] 실제로 전년도보다 약해진 전력 탓에 승률은 5할을 간신히 넘겼고, 결국 드림리그 3위이자 롯데보다 승률이 더 높았던 삼성 라이온즈와 준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다.[6][7] 결국 1승 2패로 패하여 일찌감치 가을야구를 마감했다.[8]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삼성 감독은 김명성의 전임이었던 김용희였다.[9]


3.1.3. 2001년[편집]


그리고 비극의 2001년 시즌. 구단 측에서 선수협 문제로 관계가 틀어진 마해영김주찬, 이계성[10]을 상대로 삼성 라이온즈에 보복 트레이드해 버렸고, 임수혁은 이미 2000년 시즌 초에 불의의 사고로 다시는 그라운드로 돌아오지 못했으며, 손민한이 드디어 가동되면서 힘을 보탰지만 나머지 투수진의 부상 이탈이 늘어나며 상황은 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하지만 4강과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던 상황. 2001 시즌은 유례없는 4위 싸움으로 치열했던 시즌이었다.[11] 매 게임 치열한 승부로 인해 김명성 감독의 스트레스는 계속 쌓이고 있었다.

2001년 7월 24일 휴식일에 경상남도 남해군으로 낚시를 떠나 친구를 만나고 오는 도중에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쓰려져 긴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54세로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타계했다. 사인은 스트레스성의 심장질환(심장마비)로 밝혀졌으며, 평소 흡연과 음주를 자주 즐긴 것이 화근이었다. 롯데 자이언츠는 갑자기 팀의 선장을 잃으면서 흔들렸고, 이후 자이언츠의 암흑기를 상징하는 8888577로 이어진다. 우용득 대행 체제에서 27승 22패를 해서 4위 싸움을 끌고 갔지만, 4위와 2게임차 꼴찌를 기록했다. 만일 김명성 감독이 갑작스레 타계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암흑기까지는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KBO 리그 역사상 시즌 도중 감독이 사망한 사상 초유의 사태에 결국 롯데 자이언츠KBO에 경기 연기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4. 평가[편집]


스포츠맨으로는 드물게 다례서예를 취미로 즐겼고,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 사건 당시 철수하는 선수들을 만류하면서 "게임은 치러야 한다. 너희들이 이러면 한국프로야구는 끝장이다"라고 설득했다는 일화, 심정수강민영의 투구에 얼굴을 맞아 입원했을 때 직접 심정수에게 찾아가 위로와 사죄의 말을 건넨 모습 등에서 온화한 덕장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투수코치로 명성을 날렸지만 타자를 보는 눈도 있어 차명주최기문의 트레이드를 주도해 성사시키기도 했다. 두 선수 모두 새 팀에서 기량이 만개한 윈-윈 트레이드 사례로 꼽힌다.

이처럼 뛰어난 투수 코치이자 지도자가 너무 갑작스레 타계한 것은 롯데 구단뿐만 아니라, 야구계 전체의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5. 롯데의 기일날 전적 부진[편집]


이상하게도 롯데는 김명성 감독 기일만 되면 번번이 패배하고 있다.
역대 기일날 전적
연도
주기
상대팀 (홈/원정)
경기 결과
비고
2002년
1
LG(홈)
6:3

2003년
2
현대(홈)
8:6

2004년
3
삼성(홈)
7:3

2005년
4
SK(홈)
9:0

2006년
5
경기없음(월요일)
2007년
6
KIA(원정)
2:7

2008년
7
우천취소(vs SK, 원정)
2009년
8
올스타 브레이크
2010년
9
올스타전
2011년
10
올스타 브레이크
2012년
11
한화(원정)
3:4

2013년
12
6:5

2014년
13
삼성(홈)
17:1

2015년
14
KIA(원정)
8:9

2016년
15
한화(홈)
8:1

2017년
16
경기없음(월요일)
[12]
2018년
17
NC(홈)
3:2

2019년
18
올스타 브레이크
2020년
19
키움(원정)
4:2

2021년
20
올림픽 브레이크
2022년
21
KIA(홈)
23:0

2023년
22
경기없음(월요일)
2024년
23
()



팀간 전적

전적
승률
키움 히어로즈
1승
1.000
LG, SSG(전신 SK 기록 포함.), 현대, NC
1패
.000
삼성 라이온즈
2패
KIA 타이거즈
3패
한화 이글스
1승 2패
.333
kt wiz
없음
.000
두산 베어스
통산 전적
2승 11패
.125

통산 전적이 2승 11패인데 2승 중 그 1승도 내용이 좋지 못하게 얻은 거여서 실질적으로는 1승에 가깝다고 봐야 할 지경이다.#
거기에 득실마진은 37득점 106실점으로 득실차가 -69일 정도로 부진하고 있으며, 특히 홈경기로만 한정시 승리없이 8연패에 16득점 81실점 -65로 더 심각하다.

심지어 21주기 경기였던 2022 시즌은 사직구장 개장이래 최다실점, 최다 점수차, 최다 피안타 2위의 치욕스러운 경기를 보여주었다.

2023년은 월요일이라서 경기가 없다.


6. 역대 감독 성적[편집]


역대 감독 전적
년도

경기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1998
롯데 자이언츠
71
30
1
40
8위[13]
-
1999
132
75
5
52
2위
2위
2000
133
65
4
64
2위
5위
2001
83
32
3
48
8위[14]
-
총계
419
202
13
204



[1] 청보 코치 첫 해에는 수석코치와 투수코치를 겸직했는데 이 당시 함께 호흡을 맞췄던 감독이 평소 가깝게 지내던 후배 허구연이었다. 허구연은 성적 부진으로 얼마 못가 잘렸지만 김명성은 후신 팀인 태평양에서까지 투수코치를 맡았다.[2] 빙그레 시절은 투수코치가 당시나 요즘으로서 보기 힘든 2명이 기용된 시기로 투수출신인 김영덕 감독이 좌완은 이선희 코치, 우완은 김명성 코치에게 맡기면서 맞춤형 지도를 추구했다.[3] 2012년에 부임한 차명석 이전까지 LG에서 김명성보다 좋은 성과를 올린 투수코치는 없었다.[4] 이 덕택에 김명성은 감독 데뷔전부터 최다연승 기록(6연승)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5] 실제로 현대, 삼성, 두산 등 강팀들이 모여있던 드림리그에 비해 매직리그는 약체팀 집합소라는 평가를 받았고, 시즌 초반부터 한화와 SK가 일찌감치 하위권으로 쳐졌다 보니 이 두 팀보다 그나마 전력이 나았던 LG와 롯데가 내내 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다못해 드림리그 3위 삼성의 승률(0.539)이 매직리그 1위 LG의 승률(0.515)보다 높은 기현상이 벌어지는 등 양대리그제의 단점이 드러났고, 결국 이듬해부터 다시 단일리그제로 환원하게 된다.[6] 당시 특정 리그 3위 팀이 다른 리그 2위 팀보다 승률이 높을 경우 와일드카드 결정전 비슷하게 3선 2승제로 준플레이오프를 갖는다는 규정이 있었다. 덕분에 2000년 시즌은 유일무이하게 8구단 체제에서 5개의 팀이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7] 단일리그 체제였다면 최종순위 5위에 해당되며, 만약 2000년 시즌이 단일리그로 진행됐다면 롯데의 비밀번호는 2000년부터 시작됐을 것이다.[8] 당시 롯데의 홈 구장이던 사직야구장이 보수공사에 들어감에 따라 홈 구장을 사용할 수 없어서 준플레이오프 1차전은 제2홈이었던 마산 야구장에서 경기를 해야 했다.[9] 김용희는 1998년 시즌 중 롯데 감독직에서 경질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정환 삼성 감독이 그를 수석코치로 불러들였고 1999년 1시즌을 수석코치로 보냈다. 그러다가 서정환이 1999년 플레이오프의 졸전 및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질되었는데, 이 때 삼성은 해태에서 김응용 감독을 영입해오려다가 김응용이 1시즌 더 해태 감독으로 남기로 결정하면서 1년간 땜빵 목적으로 김용희를 감독으로 승격시킨 것. 이후 김용희는 현대와의 PO에서 0승 4패로 시리즈 스윕을 당한 뒤 김응용이 삼성 감독으로 오는 게 확정되면서 자연스럽게 경질된다.[10] 아무런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소리소문없이 은퇴하였다. 그리고 심판으로 KBO 리그에 돌아와서, 오심 퍼레이드로 악명을 얻는 중. 인지도 면에선 김풍기, 강광회, 박근영에 밀리지만 나름 유명하다. 안경을 써서 시력이 안 좋아 그럴 수도 있다.[11] 최종 4위 한화와 최종 8위 롯데와의 승차는 겨우 2게임.[12] 이 해에는 기일 전날에 레일리의 완투승으로 이겼다.[13] 감독대행 시절[14] 7월 24일 경기 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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