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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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명시 선생.png

출생
1907년
대한제국 경상남도 창원부 외서면 동성리[1]
사망
1949년 10월 11일
본관
김녕 김씨
서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항일운동
2.3. 광복 이후
3. 서훈 과정
3.1. 서훈 논란의 결론: 유공자 지정
4. 대중매체
5. 기타
6.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항일운동가. 동방피압박민족반제자동맹' 결성. 1945년 12월 '조선부녀총동맹' 선전부 위원,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과 4월 서울지부 의장단에 이어, 1947년 6월 29일 '민주여성동맹' 대표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백마 탄 여장군', '조선의 잔 다르크'로 불린 인물. 사회주의 활동 때문에 서훈 과정에서 논란이 지속되어 독립유공자 지정 문제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유명했으나 2022년 건국훈장을 추서 받아서 독립유공자가 됐다.


2. 생애[편집]



2.1. 초년기[편집]


김명시는 1907년 경상남도 창원부 외서면 동성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일찍이 부친을 여의었고 생선행상을 한 어머니 김인석(金仁石)의 손에 길러졌다. 오빠 김형선, 남동생 김형윤이 있다. 김인석은 3.1 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의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지며, 오빠 김형선(金炯善)은 마산 일대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1924년 마산공립보통학교[2]를 졸업하고 경성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였다.


2.2. 항일운동[편집]


김명시는 1925년 7월 오빠 김형선이 활동하던 고려공산청년회에 입회했고, 10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 모스크바 청년유학생으로 뽑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했다.

1927년 6월 공산대학을 중퇴한 그녀는 상하이로 가서 중국공산청년단 상해한인지부에 가입해 조직부 겸 선전부의 책임과 지부 책임직을 맡아 활동했다. 그리고 그해 9월에는 상해한인청년동맹에 가입회 부인부(婦人部) 책임에 취임했으며, 1929년 10월에는 소련코민테른의 일국일당제를 관철하기 위해 홍남표와 함께 길림성 이층전자(二層甸子)로 가서 조선인 당원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사변을 단행하자, 김명시는 상해한인반제동맹을 조직했다. 이후 그녀는 1932년에 조선으로 돌아와 지하공작에 뛰어들었다. 그해 3월, 그녀는 중국공산당 본부의 지령을 받고 서울에 잠입한 뒤 인천에 거처를 마련하고 각종 전단을 배포했고, 인천 지역 여성노동자들에게 공산주의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이 발각된 직후인 1932년 5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1933년 12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언도받고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1939년에 만기 출옥했다.

안재성의 <박헌영 평전>의 주장에 따르면 감옥을 나온 김명시는 경성콤그룹의 군사협동작전 계획에 따라 중국으로 파견되었다.(다만 안재성의 평전은 안재성(작가)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 워낙 소설적 창작이 많아서 사료에 기반한 주장인지 소설인지 의문이다. 학술서나 논문에는 이런 얘기가 없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에 들어가 부녀복무대 지휘관을 맡았다. 그녀는 적후 공작을 전개하다가 옌안으로 들어갔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한 뒤에는 톈진베이징일본 점령지에 파견되어 김무정 장군의 지휘하에 유격전 및 민심 교란 작전을 수행했다. 당시 조선 의용군들은 남자 군인들과 같이 총을 쏘고 유격훈련도 받는 그녀를 "백마 탄 여장군"이라 불렀다고 한다.

2.3. 광복 이후[편집]


8.15 광복 후, 김명시는 오빠 김형선과 박헌영, 홍남표 등 화요계가 활동하고 있는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도착한 그녀는 언론을 통해 화북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활약상에 대해 알렸고, 조선부녀총동맹이 결성되자 선전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그녀에 대한 여론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1945년 12월 23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그녀에 대해 다루면서 기사 제목을 "조선의 잔 다르크 현대의 부랑(夫娘), 연안서 온 김명시 여장군 담(談)"으로 지었다. 〈독립신보〉 또한 그녀를 "백마 탄 여장군"이라고 일컬었으며, 〈신천지〉는 1946년 3월호에 '팔로군에 종군했던 김명시 여장군의 반생기'를 게재했다.[3]

이렇듯 여론의 호응을 얻어낸 김명시는 1947년 6월 전라도에서 발생한 백색테러 사건과 관련해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의 조사단원의 일원으로 활약했으며, 민주여성동맹 대표로서 미군정청을 방문하여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 중장에게 반탁시위항의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좌익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행되자 그녀는 종적을 감췄다.

실제 자료가 미비하지만 소설 <명시>의 작가 안재성에 따르면 1947년 전후에 화요파 일원으로 남로당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꽤 핵심적인 리더역할을 하다 1940년대 후반 남로당 인사들이 대거 구속될 즈음 투옥된 것으로 보인다.

1949년 10월 11일, 도하 일간지에 '북로당 정치위원' 김명시가 부평경찰서 유치장에서 목매 자살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며칠 후 내무부 장관 김효석은 "김명시가 자신의 상의를 찢어서 유치장 내 3척 높이의 수도관에 목을 매고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고문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주장하였다. 향년 42세. 그녀의 유해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김명시의 오빠이며 그녀와 평생 행보를 함께한 김형선은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 교통부 위원, 민전 중앙위원, 남로당 중앙감찰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다가 1950년 9월 북한으로 올라가던 중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3. 서훈 과정[편집]


열린사회희망연대는 2018년 12월에 창원시에 애국지사 명도석과 함께 김명시의 흉상을 마산 오동동 문화광장 부근에 세울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창원시는 "현재 창원시에는 국가보훈처에서 공훈을 인정한 독립유공자 106분이 있으며, 현재까지 동상을 건립한 분은 없다"며 "독립운동의 공훈 정도를 가려 선별적으로 흉상을 건립하는 것은 애로가 있고, 건립하고자 하면 주민공청회 등 지역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쳐 건립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열린사회희망연대 김영만 고문은 "서훈을 받지 않아도 흉상을 만들고 기념사업을 하는 지역이 많다. 대표적으로 김원봉 장군이 있고, 정률성 선생이 있다. 중국 해방군행진곡과 북한 조선인민해방군가를 지은 정률성 선생은 광주에 가면 흉상이 있고 거리 이름도 있다"며 "서훈과 상관없이 자기 고향에서 자랑스러우면 하면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2019년 1월 9일, 열린사회희망연대는 창원마산 정부경남지방종합청사 내 경남동부보훈지청에 김명시 장군의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서'를 제출했다.# 이 단체는 "비운의 여장군 김명시", "학살당한 평등주의자들", "여장군, 또는 혁명의 화신"이라는 제목의 관련 자료를 모아 함께 국가보훈처에 제출했다.

그러나 국가보훈처는 2019년 11월 15일 '사망 경위 등 광복 후 행적 불분명'이라는 사유로 김명시를 독립유공자 포상 대상에서 탈락시켰다는 공문을 열린사회희망연대에게 전달했다.# 국가보훈처는 1949년 김 장군 사망 당시 경찰이 김 장군 직책을 '북로당 정치위원'으로 발표한 것으로 보아 김 장군이 북한 정부 수립에 기여한 것으로 판단, 서훈 불가 판정을 할 수 있다고 열린사회희망연대에 전했다.

이에 열린사회희망연대는 "북한 정부 수립에 기여한 사람들을 모아둔 북한 신미리 애국열사릉 명단에 김 장군은 포함돼있지 않다"[4]국가보훈처에 김명시에 대한 독립유공자 공적 재심사를 요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3.1. 서훈 논란의 결론: 유공자 지정[편집]


국가보훈처는 김명시가 북로당 정치위원이었다는 기사가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2022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김명시를 유공자로 지정했다.


4. 대중매체[편집]


  • 안재성의 소설 <항일혁명전사 김명시>(<명시>의 개정판)


5. 기타[편집]


  • 2022년 8월 창원시에 있는 김명시 장군의 알림판과 기념벽화등 약 4곳에 회색 도료(락커)로 인해 훼손되었으며 현재 경찰 수사에 들어갔다. # 2022년 8월 26일 궁금한 이야기 Y에 방송되었다.


6.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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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창원시 마산합포구 동성동[2]성호초등학교[3] 참고로 이 기사를 쓴 이는 당시 서울신문사 기자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노천명이다.[4] 다만 신미리 애국열사릉에는 조선혁명군 사령 양세봉도 안장되어 있는 점을 보면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고 다 북한 정부 수립에 기여한 사람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양세봉은 생전 김일성과 안면이 있기는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고 무엇보다 북한 정권 수립 전에 죽었기에 그나마 부담이 덜했던 것도 있다. 참고로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된 사람들은 북한 정권의 기준에서 대성산혁명렬사릉에 안장된 사람들보다 격이 떨어진다고 본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