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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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화
金炳華 | Ким Пён Хва[1][2]


파일:김병화.jpg

출생
1905년 8월 6일
함경북도 경흥군
사망
1974년 5월 7일 (향년 68세)
소련 우즈베크 SSR 타슈켄트
(現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본관
청풍 김씨
주요 서훈
사회주의노력영웅 (2회)
레닌훈장 (4회)
노력적기훈장
존경징표훈장
10월혁명훈장

1. 개요
2. 생애
2.1. 출생에서 낙향까지
2.2. 소련의 농장 지도자
2.3. 사회주의노력영웅
3. 사후



1. 개요[편집]


고려인으로 소련 전역에 한국인의 근면성을 떨친 콜호스(집단농장) 지도자. 아직까지도 고려인에게 김병화는 전설로 기억되고 있다.

2. 생애[편집]



2.1. 출생에서 낙향까지[편집]


1905년 8월 6일 함경북도 경흥군의 빈농가에서 김치만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직후 부모님을 따라 러시아 프리모리예 지방 라즈돌나야 강[3] 부근 니콜스크우수리스키의 차피고우(Чапигоу)[4]로 이주했다. 부모님은 자기 땅 없이 연해주쿨라크(부농)에게 논을 빌려 소작을 지으면서 그럭저럭 벌어먹고 살았기에, 굶주림과 빈곤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다.

6살 때 아버지를 잃고 4명의 형제들과 아픈 어머니를 이끌어가야만 했던 그는 여름에는 잡초 뽑는 일로 품삯을 받아서 연명했고 겨울에는 새끼를 꼬아서 파는 것으로 변변찮은 수입을 얻어왔었다. 대부분의 돈은 식량을 사는데 쓰였으며 남는 돈은 거의 없었다고. 빈곤에서 벗어나기를 결심한 김병화는 지역의 학교에서 4년동안 배우기로 결심했다. 지식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충만한 김병화는 대학까지 갈 수 있었다.

러시아 내전이 발발했을 당시에는 일본 제국 간섭군을 맞이하여 파르티잔 활동을 하였으며, 후에 1927년 붉은 군대에 입대한다. 군생활을 잘하였는지 모스크바의 군사정치 학교까지 유학을 갔다 와서 1932년에 졸업한다.

그렇게 상승가도를 달리던 김병화는, 비록 고향땅 연해주는 아니지만 카잔이라는 곳에서 중대장을 맡아 중위 계급장까지 달면서 성공한 고려인의 전형을 보여주게 되었으나, 이오시프 스탈린연해주고려인들을 죄다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는 명령을 반포하고 고려인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1938년에 그는 한국인 민족주의 당 조직에 몸을 담았다는 말도 안 되는 소련 정부의 누명에 의하여 대숙청의 일환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1939년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런데 카잔에 있던 그의 원래 군부대는 이동하여 어쩔 수 없이 반강제적으로 제대하여 가족이 추방당한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현재 우즈베키스탄)으로 향했다. 이때 그의 계급은 대위였다.

2.2. 소련의 농장 지도자[편집]


김병화는 1939년 '새로운 여정'이라는 타슈켄트의 콜호스(집단농장)에 들어가 건설 관리직으로 일하였다. 당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맨 몸으로 아무런 시설도 없는 우즈베크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상태였으므로 간이 시설일지라도 주택의 건설은 매우 시급한 문제였다.[5] 김병화는 건설 자재, 차량, 기술자 등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거주지를 건설하는 것에 성공하였다. 그의 성실함에 주민들은 감동하였고 당 지도자들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1940년, 그는 그간의 업적을 인정받아 우즈베크의 북극성 콜호스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그는 연해주의 소작농이었던 경험과, 군대의 규율을 겸비하고 있던 북극성 콜호스 최적의 지도자였다. 그가 지도자로 부임한 첫 해부터 눈에 띄는 생산량 증가가 있었다.

당시 소련의 집단농장은 효율성이 떨어져서 80년대 말에도 4%의 자영지에서 25%의 식량을 생산하는 상황이 벌어질 정도였다. 얼추 추산해도 자영지의 효율이 7~8배 더 좋다는 뜻이다. 그러나 김병화가 운영하는 북극성 콜호스는 다른 콜호스와는 비교 자체를 거부하는 생산량을 보여주었다.

1940년대에, 농사일을 열심히 하는 것과는 별개로 김병화는 또 다른 사업을 진행했다. 바로 주택 만들기. 당시 북극성 콜호스의 한인들은 대부분 병영이나 간이 주택, 대피소 등에서 생활했다. 애초에 고려인이 중앙아시아의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내던져진 조건을 감안하면 이 정도도 호사이긴 하였지만 김병화는 만족할 수 없었다. 소련 정부는 대조국전쟁 중이라는 상황 속 버거운 국방비와 사회복지비로 인하여 안 그래도 예산이 후달렸던지라 지원을 해줄 수가 없었다. 결국 북극성 콜호스는 10~15 헥타르의 농지에서 쌀을 재배해 그 수익으로 주택과 여러 건물들을 지을 수 있었다. 이 때 주택과 발전소, 축산을 위한 외양간이나 헛간이 많이 건설되었고 1945년에는 집에서 살지 않는 농민이 없었다. 당시 40년대 초반이 대조국전쟁으로 북극성 콜호스는 물론이요, 소련 전역이 정신없던 때라는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과였다.

한편 독소전쟁이 벌어지자 우즈베크에서는 모금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김병화의 북극성 콜호스 및 다른 한인 콜호스가 큰 역할을 해주었다고 한다. 자신들을 고향 땅에서 내쫓고 머나먼 중앙아시아까지 보낸 스탈린이 아직도 정권을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금을 한 고려인들의 대인 정신, 또는 나라 잃고 울타리 잃은 주민이 어떻게 되는지 뼛속 깊이 체감한 고려인들이 썩은 울타리나마 보존하려고 발버둥치던 서러움을 엿볼 수 있다. 소련 당국에서도 고려인들이 이렇게 충성심과 새로운 현실에 적응해 나갈 의지를 보였으니 그나마 단계적으로 한국어 출판물, 학교도 허락해 주고 훈장도 준 것이다.

대조국전쟁이 끝나고 렌드리스도 끊겨 식량 사정이 많이 안 좋았을 때, 북극성 콜호스는 높은 생산성을 보여 소련의 식량 문제 해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북극성 콜호스는 사막이 많은 중앙아시아에서 를 재배하는 엄청난 근성을 가진 콜호스였는데, 이들은 잘 짜여진 노동 조직과 사회에 대한 의무감을 바탕으로 당시 소련 평균보다 훨씬 많은 식량생산을 기록했다. 소련에서는 헥타르 당 2.7톤~3.4톤이 목표라고 지시를 내려왔는데 콜호스의 몇몇 팀들이 헥타르 당 8톤을 생산해버린 것이다. 중요한 건 여기는 원래 낙후지역이라서 소련이 트랙터, 잡초제거기 같은 농기계는커녕 비료도 안 보내줬다는 사실이다.

고려인들의 근성으로 농장의 모든 지표는 상승곡선만을 그리고 있었다. 비단 북극성 콜호스뿐만 아니라 다른 고려인 콜호스도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50년대로 접어들자, 소련 농업부가 갑자기 북극성 콜호스에게 주요 작물을 목화로 바꾸라는 지시를 내렸다. 물론 그 전에도 목화 재배를 하고 있긴 했지만 소련은 계획경제국가이니 까라면 까야 해서 결국 재배하던 벼를 몽땅 갈아엎고 본격적으로 목화 재배를 시작하였다. 물론 결과는 엄청났다.

화학비료를 쓰기보다는 자연적 유기물질을 이용하여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방식을 선호하였던 고려인들은[6], 배수지와 삼림을 먼저 갖추는데 전력을 다한 후 본격적인 면화 생산을 시작하였다. 이번에 떨어진 목표량은 헥타르 당 2톤. 북극성 콜호스는 가볍게 목화 4.8톤을 찍어버려 생산량 두 배를 달성하였다.

그래서 스탈린이 사망한 해인 1953년에는 헥타르 당 5.2톤을 생산했고 전체 콜호스 계획의 132%를 달성하여 소련 전역에 그 위엄을 떨쳤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주변의 작은 농장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즉시 김병화 버프가 발동하여 생산량을 뻥튀기해주었다. 아훈바바예프의 쿠츨릭 콜호스가 1952년에 북극성 콜호스에 가입하자 헥타르 당 1.3톤이던 생산량이 다음 해에 2.47톤으로 증가했다.

또 소련의 7개년 계획이 진행되던 중에 4년만에 14% 초과 생산을 찍기도 하였다.

덕분에 북극성 콜호스는 소련에서 가장 높은 생산성을 자랑하는 콜호스가 되었으며, 농민들의 후생수준도 빠르게 올라갔다. 현대적인 문화 시설과 건물들이 계속 들어섰고, 학교, 병원, 보육원, 주택도 늘어났다. 여기에 콜호스에 1,000여 가구가 살았기 때문에 학교도 6개가 들어섰고, 우체국, 도서관, 미용실, 약국도 생겨났다. 그야말로 현실사회주의 농장의 최종테크. 경기장과 전국구로 유명한 한인 극장도 생겨났다. 또 당시 모든 가구에는 전기가 들어왔고 라디오도 있었다고 한다. 북극성 콜호스에서는 B등급 축구팀도 있었다고.[7]

2.3. 사회주의노력영웅[편집]


위에 열거한 여러가지 노력을 입증받아 김병화는 소련의 영웅 칭호 중에서 두 번째로 급이 높은[* 제일 급이 높은 건 소비에트 연방 영웅이지만 이건 사실상 무공훈장이라 수훈자는 거의 군인이다. 그렇기에 노력영웅은 민간인이 받을 수 있는 가장 급이 높은 훈장이다. 참고로 같은 고려인으로써 소련군 보병 연대 지휘관이었던 알렉산드르 민이 사후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추서 받았다.] 사회주의노력영웅을 무려 두 번이나 받았는데, 두 번 받은 사람이 소련 역사를 통틀어 205명임을 감안하면 놀라운 수준. 세 번 이상 받은 사람을 합쳐도 300명이 안된다. 게다가 우즈베키스탄에서 이 훈장을 세 번 받은 사람은 2명, 두 번 받은 사람은 3명이다. 사회주의노력영웅 말고도 다른 훈장을 많이 받았다. 김병화는 죽기 전까지 레닌훈장, 10월혁명훈장, 노력적기훈장, 존경징표훈장을 받았는데 이 훈장들의 훈격은 소련에서도 상위 클래스였다. 레닌훈장은 그 중에서도 4회 받았다.

이렇게 해서 1960년대에 사회주의노력영웅 훈장을 받은 이후 김병화는 우즈베키스탄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농업위원회의 위원으로 재임한 바 있다. 그리고 그의 주도로 북극성 콜호스는 우즈베크의 각종 건설 사업(운하 등)에서 노동력을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그는 정이 많았으며 매우 청렴하고 겸손하게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소련을 제2의 조국으로 생각하였다. 경직된 소련 체제와 달리 김병화는 대단히 환경에 적응이 빨랐고 사고가 유연했다고. 그는 34년 동안 콜호스 지도자로 재임했고 1974년에 죽었다. 타슈켄트에서는 그를 기려 김병화 거리를 만들어주었다. 죽기 전에 두 권의 저서를 남겼다. 목화 생산량 초과 달성의 경험(1953)과 풍요로 가는 길(1954)이 그것.

김병화 외에도 1950년대까지 우즈베크에서 콜호스 지도자로 높은 생산력을 보여준 공로로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고려인들로 폴리타젤 콜호스의 황만금, 프라우다 콜호스의 드미트리 킴, 드미트로프 콜호스의 안톤 초이, 스베르들로프 콜호스의 신종직이 있었다. 그 당시 이 칭호를 받은 이들이 소련 전체를 통틀어 200명 조금 넘는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고려인들의 저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3. 사후[편집]


그러나 김병화 사후 북극성 콜호스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잇따른 초과달성에 판단력이 흐려진 중앙정부가 진짜로 달성 불가능한 목표를 지시하기 시작했고 80년대부터 아랄해의 사막화가 심해짐에 따라 목화 생산량이 소련 평균보다 낮아졌다. 1991년에는 콜호스의 이름을 김병화 콜호스로 바꿨지만 안타깝게도 이름 버프는 없었다. 그래도 아직 김병화 콜호스는 더 이상 콜호스가 아니지만 타슈켄트 교외에 잔존해 있다.

김병화와 그의 동료 고려인의 노력으로 소련 내에서 고려인의 이미지는 매우 좋아졌으며, 비단 고려인 공동체뿐만이 아니라 우즈베키스탄인 전체의 이미지 향상에 크게 기여를 했다고 평가 받는다.

파일:external/www.kaltour.com/TAS19.jpg

농장 안에는 김병화 기념관도 있으니 우즈베키스탄에 가면 들를 수 있다.

파일:external/www.post-korea.com/2-5-woojuback7-2.jpg

파일:attachment/김병화/Exae.jpg

최근에 시온고 마을과 북극성 콜호스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새로 나왔다. 김병화 기념관 내부 모습과 현재 마을의 고려인들, 당시 발행되던 한글 신문인 레닌기치 기사 등도 나오니 참고하면 좋다. 김병화 기념관은 2편부터.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6 09:24:00에 나무위키 김병화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러시아어에는 'ㅕ' 발음과 받침 'ㅇ' 발음이 없으므로 각각 ё(ㅛ)와 н(ㄴ)으로 대체되었고, '화'는 ㅎ+ㅗ+ㅏ(hwa)로 분석되는데 러시아어에는 w 발음이 없고 대신 в(v)를 사용하므로 '화>후아>흐바'라는 결과가 나왔다. 실제로 러시아어의 в(v)는 '우'에 가깝게 발음되기도 한다. '프라우다'가 대표적인 예.[2] ё를 그냥 е로 써서 Ким Пен Хва(킴폔흐바, 킴폔화)라고 쓰기도 한다.[3] 중국식 명칭은 쑤이펀허(綏芬河).[4] 한자로 표기하면 梓皮溝. 중국어 지명을 러시아식으로 그대로 표기한 것인데 중소결렬 이후 소련 당국이 연해주 일대의 중국어, 만주어 지명을 대거 러시아식 지명으로 청산하면서 크로우놉카(Кроуновка)로 이름을 바뀌었다.[5] 카자흐로 이주한 사람들은 그나마 유목생활을 하는 부유한 카자흐인들이 제공한 임시주택에서 생활할 수 있었지만 우즈베크는 워낙 주민들이 가난해서 그렇지 못했다고 한다. 이주 초창기엔 땅굴집을 파서 생활했을 정도로 열악했다.[6] 과거 한반도에서 농사를 짓던 방식이다. 사실 중앙아시아는 물이 부족해서 그렇지 지력은 한반도보다 훨씬 좋아서 한반도에서 하던 노력의 절반 이하로도 몇 배의 수확량을 올려서 농사지을 맛이 났다고 한다[7] 소련의 축구 리그 체계는 50~60년대 기준으로 설명하면 소비에트 톱 리그라 불리는 클래스 A와 소비에트 1부 리그라 불리는 클래스 B로 분류된다. K리그로 치면 톱 리그가 K리그1, 1부 리그가 K리그2라고 생각하면 된다. 당시 클래스 A에는 소련 전체에서 16~18개 팀이 소속되어 있었다. 즉, 당시 김병화가 이끌던 콜호스에는 K리그2 급의 팀이 하나 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