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진(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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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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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군>
74 조성환 · 75 김한수 · 77 이승엽 [[감독#s-1.1|

]] · 78 세리자와
79 박정배 · 82 권명철 · 89 고토 · # 조웅천
# 김동한 · # 박흥식 · # 조인성 · # 가득염'''
<2군>
# 김지용 · 71 이도형 · 72 조경택 · 76 이정훈
80 김진수 · 84 김상진 · 88 정진호 · 91 이영수

<재활/잔류군>
86 강석천

<트레이닝>
1군 천종민 · 조광희 · 유종수
2군 87 이광우

{{{#ffffff 코칭스태프투수포수내야수외야수
군입대선수등록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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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진의 보유 기록 /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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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 기록
연속경기 완봉승
3경기 연속


파일:external/s20.postimg.org/OB1995.pn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5

{{{#fff [[OB 베어스|OB 베어스]] 등번호 61번}}}
결번

김상진
(1989~1998)


이경수
(1999~2000.7.15.)
{{{#fff [[삼성 라이온즈|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1번}}}
곽채진
(1997~1998)

김상진
(1999~2001)


브리또
(2002~2003)
{{{#fff [[SK 와이번스|SK 와이번스]] 등번호 31번}}}
브리또
(2000~2001)

김상진
(2002~2003)


브리또
(2004)
{{{#fff [[SK 와이번스|SK 와이번스]] 등번호 86번}}}
손상득
(2003~2004)

김상진
(2005~2016)


정수성
(2017~2020)
{{{#fff [[삼성 라이온즈|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80번}}}
김성래
(2011~2016)

김상진
(2017~2018)


황승현
(2020~)
{{{#fff [[두산 베어스|두산 베어스]] 등번호 84번}}}
조웅천
(2017~2019)

김상진
(2020~)


현역




파일:23김상진코치.png

두산 베어스 No.84
김상진
金尙珍 | Kim Sang-Jin

출생
1970년 3월 15일 (54세)
경상남도 마산시[1]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마산월포초 - 마산동중 - 청강고[2]
신체
182cm, 91kg, O형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9년 연습생 (OB)
1990년 2차 3라운드 (OB)[3]
소속팀
OB 베어스 (1989~1998)
삼성 라이온즈 (1999~2001)
SK 와이번스 (2002~2003)
지도자
SK 와이번스 1군 투수코치 (2005~2011)
SK 와이번스 2군 투수코치 (2012~2014)
SK 와이번스 1군 투수코치 (2015)[4]
SK 와이번스 재활코치 (2015)[5]
SK 와이번스 2군 투수코치 (2016)
삼성 라이온즈 1군 투수코치 (2017)
삼성 라이온즈 육성군 투수코치 (2018)
두산 베어스 2군 재활코치 (2020~2021)
두산 베어스 재활군 투수코치 (2022)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23~)
해설위원
MBC ESPN 야구 해설위원 (2004)
가족
아들 김웅(2002년생)

1. 개요
2. 선수 경력
2.4. 연도별 주요 성적
3. 지도자 경력
4. 여담
4.1. 저평가?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OB 베어스, 삼성 라이온즈, SK 와이번스 소속 투수이자 現 두산 베어스 2군 투수 코치.


2. 선수 경력[편집]



2.1. OB 베어스 시절[편집]



파일:20180406_batman.jpg




김상진의 투구폼

"암흑기의 우울한 나날이 이어지던 1991년, OB 베어스 팬들의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준 투수 한 명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두산 베어스 공식 홈페이지 <이재국의 베팬알백> 38편.


경상남도 창원 출신[6]으로 1989년 연습생으로 OB 베어스에 입단했으며, 이듬해 OB의 2차 3순위 지명을 받아 정식 선수가 되었다. 1991년부터 OB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 4년동안 10-11-11-14승을 올리면서 2년 연속 꼴찌로 추락했던 OB의 재건을 이끌었다. 특히 OB가 2번째 KS 우승을 차지한 1995년에는 17승(8완봉승 포함)[7] 7패 2.11의 ERA를 기록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다.

1995년에는 3경기 연속 완봉승[8], 12이닝 17탈삼진이라는 진기록을 달성했다. 12이닝 17K는 5월 23일 잠실 한화전에서 달성하였다. 영상. 공교롭게도 이 기록은 2010년 5월 11일 LG와의 경기에서 무려 정규이닝만에 17K를 잡아낸 류현진에 의해 재조명된다. 기사 하단 사실 저 때 투수교체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본인이 더 던지겠다고 자청했다고 한다.

외국인 선수제가 도입되기 전의 1990년대 한국프로야구는 토종 에이스들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삼성 김상엽, 한화 정민철, 현대 정민태, LG 이상훈, 해태 이대진, 롯데 주형광, 쌍방울 김원형과 같이 OB의 대표 에이스는 단연 김상진이었다.

그러나 1991~1995년까지 연평균 181.8이닝을 던진 혹사[9]로 구위가 서서히 하락하기 시작해 1996년부터는 잦은 부상에 시달렸으며, 이로인해 예전의 묵직한 강속구를 잃고 기교파로 변신했다.

전성기 김상진은 140km/h 후반대의 강속구와 커브를 주무기로 하는 올드스쿨 파워 피쳐에 가까운 스타일이었다. 특히 1995년의 포스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해서, 이 한 해만 놓고 보면 선동열이나 최동원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제구력도 준수한 편이라 피네스 피쳐로 변신한 후에도 꽤나 좋은 성적을 올렸다. 두산의 구단 역사를 놓고 보면 박철순 이후 최고의 투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선수였다.[10]


2.2. 삼성 라이온즈 시절[편집]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00819220224214A2.jpg


결국 1998 시즌 후 삼성 라이온즈에 현금 6억 5,000만 원에 현금 트레이드됐다.[11] 2년 연속 두자릿수 승수를 올리며 그럭저럭 활약했다.

이에 힘입어 2000년이 끝나고 FA 자격을 얻어 삼성과 3년 8억 5000만원에 재계약을 맺는다. 다만 성적을 보면 하락세가 보이는데, 1999년은 4점대 방어율을 찍었지만 해당 시즌이 워낙 타고투저였던 것도 있고 그나마 선발투수로 179이닝을 소화하면서 이닝을 많이 먹어줬지만, 2000년에는 12승에 3점대 방어율을 찍으며 겉으로는 평범해 보였으나 소화 이닝은 겨우 89이닝으로 100이닝도 못 찍었다. 다만 나이가 30대 초반으로 아직은 젊었기에 반등의 여지가 보였고, 전년도 FA 먹튀들인 김동수, 이강철보다 5천만원을 더 얹어줬다.[12][13]

그러나 노쇠화 및 부상이 겹치며 2001년에는 7점대의 평균자책점을 찍고 성적이 대폭 하락하였다. 당시 32세로 그리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었으나, 과거 OB 시절부터 혹사가 누적된 탓에 발생한 후유증이 하락세의 큰 이유였다.

한편 OB 베어스 항명파동의 주동자로 낙인찍혔던 탓인지, 김상진 외에도 이 사건에 관련된 OB 베어스 주축 선수들이 같은 시기 다른 팀으로 떠나야 했다.[14]


2.3. SK 와이번스 시절[편집]


파일:external/photo.isportskorea.com/20020903225549437.jpg

결국 2001 시즌 후 SK - 삼성 간의 2:6 대형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브리또, 오상민을 상대로 김동수, 김기태, 김태한, 이용훈, 정경배와 함께 SK 와이번스트레이드되었고[15], 그럭저럭 이닝을 먹어주며 4~5선발로 뛰었지만 전성기에 비해서 못 미치는 활약이었다. 결국 2003 시즌 후 FA 계약이 끝나자 SK에서 방출당하며 은퇴했다.[16]


2.4.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 붉은 글씨는 리그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역대기록
연도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89
OB
1군 기록 없음
1990
1991
32
151⅔
10
6
1
-
0.625
3.74
136
10
62
65
74
63
1.33
1992
33
168⅔
11
13
(공동 3위)
1
-
0.458
3.63
131
11
95
(4위)
96
79
68
1.30
1993
33
187⅓
(5위)
11
11
0
-
0.500
3.07
156
6
63
142
(3위)
75
64
1.13
1994
34
194
(4위)
14
10
7
-
0.583
2.37
(3위)
170
(5위)
4
52
148
(2위)
64
51
1.12
1995
27
209
(2위)
17
(2위)
7
0
-
0.708
(3위)
2.11
(3위)
174
(2위)
6
52
159
(3위)
58
49
1.04
1996
22
94
5
7
3
-
0.417
3.64
81
6
44
83
48
38
1.28
1997
24
136⅓
12
9
0
-
0.571
3.30
122
8
51
108
59
50
1.24
1998
27
141⅔
8
8
0
-
0.500
3.81
149
13
51
97
71
60
1.33
연도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9
삼성
31
179⅓
12
7
0
-
0.632
4.67
195
(2위)
22
64
136
104
(4위)
93
(4위)
1.42
2000
22
89
12
6
0
1
0.667
3.84
91
8
37
63
43
38
1.37
2001
16
30⅔
2
3
2
0
0.400
7.04
39
5
24
15
26
24
1.96
연도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2002
SK
32
116⅔
6
5
0
2
0.545
4.71
122
21
(공동 5위)
35
95
62
61
1.29
2003
26
89⅓
2
8
0
2
0.200
4.53
90
7
39
30
51
45
1.32
KBO 통산
(13시즌)
359
1787⅔
122
100
14
5
0.550
3.54
1656
127
679
1237
814
704
1.26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91년
3완투
1완봉
1992년
9완투
1완봉
1993년
7완투
2완봉
1994년
9완투
(공동 3위)
2완봉
1995년
13완투
(1위)
8완봉
(1위)[17]
1996년
2완투
0완봉
1997년
2완투
1완봉
1998년
3완투
2완봉
2000년
2완투
0완봉
KBO 통산
50완투
17완봉


3. 지도자 경력[편집]


은퇴 후 2004년에는 MBC ESPN에서 메이저리그 해설가로 1년 간 활동했다.[18]


3.1. SK 와이번스 시절[편집]


파일:external/www.sksports.net/20150606164453_1.jpg

2005년 자신이 은퇴했던 팀 SK 와이번스에서 투수코치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김성근 체제에서는 주로 1군 투수코치를 맡았다.

허나, 이만수 체제로 넘어오면서 2군 투수코치로 보직 변경되었다.

SK 투수코치 시절에는 꽤나 좋은 평가를 받았다. 깐깐하기로 소문난 SK 팬들도 김상진의 투수코치로서의 역량은 인정하는 편. 특히 1군 투수코치 시절 투수 교체 타이밍 및 적절한 투수 운용 능력과 2군 투수코치로 보직이 변경된 뒤에는 2군에서 서진용, 김주한, 김찬호 등 유망주들을 조용히 육성해 1군으로 올리는 등 능력만큼은 인정받았던 좋은 코치였다.

2015년부터 조웅천과 자리를 맞바꿔 오랜만에 1군 투수코치를 맡게 됐다. 시즌 초반에는 순항하는 듯 하다가, 중반 들어 SK 투수진이 부진하고 팀 순위가 쳐짐에 따라 불펜코치 김원형에게 메인 투수코치 자리를 넘기고 2군 투수코치로 이동했다. 이 때 김원형의 불펜코치 자리에는 김경태가 들어왔다. 이후에는 계속 2군에 있었다.

2016년 시즌 종료 후 김원형과 함께 SK 와이번스를 떠나는 게 확정되면서 11년간 역임해온 SK 코치직을 내려놓았다.


3.2. 삼성 라이온즈 시절[편집]


2016년 시즌 종료 후 김한수 감독 체제로 새롭게 출범한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코치로 합류하였다.[19] 기존 투수코치였던 김태한이 수석코치로 보직이 변경됨에 따라 삼성의 1군 투수코치를 맡게 됐다. 이로써 삼성에는 선수 시절이었던 2001년 이후 15년만에 돌아오게 됐다.

팀 순위는 최하위권인 가운데 감독과 수석코치가 투수 혹사나 보직 파괴 등으로 욕을 먹는 것과 달리, 메인 투수코치를 맡고 있음에도 투수진 운용에 대한 비판 여론은 적다. 애초에 김상진이 오기 전부터 삼성 투수진이 많이 약해져 있는 상태였던 데다, 과거 SK 시절 투수코치로서 명성이 높았고, 반대로 투수코치 시절 쌓여온 비토 여론이 상당한 김태한 수석코치가 있기 때문인 듯 하다.

2017년 시즌 후 1군 투수코치 자리에 오치아이 에이지가 영입됨에 따라 육성군 투수코치로 보직이 변경됐다.

이후 소식이 없다가 2018년 시즌 후 조용히 팀을 떠났다. 강기웅, 김재걸 등의 코치가 팀을 떠났을 때는 별도의 기사가 나온 것과 달리, 김상진에 대해서는 어떤 기사에도 언급되지 않았다.


3.3. 두산 베어스 시절[편집]



파일:batMan_OB-95_n.jpg


삼성에서 나온 후에는 1년간 야인으로 지내다가, 2020년 1월 14일 배영수, 공필성과 함께 두산 베어스의 코치로 영입되면서 무려 22년 만에 친정팀 베어스로 돌아오게 되었다.[20] 보직은 2군 재활코치.

이승진의 구속 상승을 이끌었고, 아리엘 미란다가 부상으로 이탈한 상황에서 긴급하게 선발 로테이션을 맡게 된 최승용 등 다른 투수들의 기량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키며 두산팬들 사이에서 뛰어난 육성 능력을 인정받고 있다. 이 때문에, 2021년 후반기 2군 투수들이 두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도록 한 숨겨진 원동력으로 꼽히고 있다.

2022시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정철원을 필승조로 발굴했고, 투구폼을 많이 바꾸지 않고도 리그 최고 수준의 불펜투수로 키워내는 데 성공했다. 22시즌 정철원은 두산 최고의 발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좋은 퍼포먼스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2022년 정철원은 신인왕이 되었다.

2023 시즌 역시 2군에서 투수를 육성하는 역할을 맡았다.


4. 여담[편집]


  • 선수 시절의 별명은 배트맨이었다. 금테 안경과 특유의 턱수염은 그의 트레이드마크.

  • 노안이다. 선수 시절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20대 중후반에도 금테 안경을 쓰고 수염이 덥수룩했던 선수였던지라 본의 아니게 양준혁, 이종범, 이상훈 등 비슷한 나이대의 선수들의 얼굴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나이가 들어 보였던 편이었다. 은퇴 후 2017년 현재도 같은 팀의 감독인 김한수보다 한 살 많은데 비해 얼굴은 서로 상당히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근 KUSF가 공개한 사진에 의하면 세련된 머리 스타일과 패션 센스를 자랑한다.

  • 김상진이 배팅볼 투수에서 2차 지명을 통해 OB의 정식 선수가 되고 첫 번째 맞이한 1990년 스프링 캠프 때 연습경기에 등판하여 스스로 연마한 너클볼 까지 구사하며 1이닝을 2탈삼진 무실점으로 막아내고 나름 만족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기가 끝난 후 그의 공을 받아준 OB 입단 동기지만 나이는 많던 선배 포수가 김상진에게 "넌 직구가 좋은데 왜 자꾸 너클볼을 던지냐? 너 같이 어린 친구가 벌써부터 너클볼 던지면 직구가 죽는다. 네 직구는 지금 힘도 있고 회전도 좋으니 자신있게 던져라. 너클볼은 나이 들고 던져도 되니까"라며 충언을 건넸다고 한다. 그 포수는 바로 두산 감독을 지낸 김태형 이었고, 국가대표 까지 지낸 선배 포수의 한마디에 김상진은 자신감을 얻고 대 투수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출처

  • OB 베어스에서 전성기를 보낼 때는 LG이상훈과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특히 양 팀의 에이스 맞대결이 있었을 때 잠실구장에서 열리는 경기의 입장권을 구하는 건 엄청나게 어려웠다고 한다. 하지만 상대전적은 이상훈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1995년에 이상훈이 20승을 기록했을 때 김상진과의 선발 맞대결에서 이상훈이 3경기 모두 이겼다.비록 개인 대결은 졌지만 팀은 최후에 웃었다 이 때 김상진은 이상훈과 경기에서 이기고 싶은 마음에 의욕이 앞서 경기를 많이 그르쳤다고 한다. 추가로 이상훈은 개인적으로는 많은 방황을 하며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력서'만 놓고 보면 야구 명문 학교인 서울고 - 고려대 라는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탄탄한 기본기로 승승장구한 선수였지만 자신은 밑바닥에서부터 성장해 올라갔던 터라 서로 운동한 배경이 달랐기 때문에 자격지심을 느껴 이기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이상훈과는 맞대결 종료 후 경기장 밖 사석에서 만나기도 하는 등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21]

  • 트레이드 마크인, 금테 안경과 특유의 턱수염을 지니고 있었으면서, 이상훈의 긴 머리가 부러웠는데 경기 후에 둘이 만나려고 하면 이상훈이 머리 손질을 오랫동안 했기 때문에 김상진이 항상 기다려야 했다고한다. 잠실 에이스 라이벌로 불렸지만 서로 친하게 지냈다.

  • 이름이 같은 해태 투수였던 김상진과도 현역 시절 2번이나 선발 맞대결했던 적이 있으나, 2번 모두 패배하였다.[22]

  •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한국시리즈에서도 김상진은 권명철과 함께 에이스였다. 그러나 에이스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는게 대체적인 평이다. 7차전 선발이었지만, 프로 입단부터 약점인 번트 수비가 발목을 잡았다. 3회초와 5회초에 투수앞 땅볼이후 1루 송구 에러하는 모습을 보이는등 그렇게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 결국 그 경기에서 김인식 감독이 투수를 권명철로 바꾼 이유도 가끔 나오던 번트 수비 후 악송구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6이닝 2실점으로 호투하여서 승리투수가 됐다.

  • 아들 김웅 군이 인천고등학교 야구부에 진학했다.[23] 부친과 같은 우완투수로, 중학야구의 에이스로 꼽힐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2020년 3학년 진학을 앞둔 아들이 자신의 롤 모델로 이정후를 꼽았다고 한다. “아들한테 이정후를 롤 모델로 꼽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이종범 대선배님이란 사실을 극복해낸 모습이 멋있어 보였다고 말하더라고요.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아들의 말에 저도 한 마디 보탰습니다. ‘야구인 김상진은 크게 두려울 게 없는데 김웅 아버지 김상진은 신경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 같다’라고요(웃음).” #


  • 1990년대 초반 김상진이 막 날개를 펴기 시작했을 때 당시 스포츠 신문에서는 심판[24]들이 꼽은 볼끝 좋은 두 투수가 김상진과 정민철이라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 특이하게도 현역 시절 거친 팀 순서와 지도자 시절 거친 팀 순서가 거꾸로다.

  • 아들이 인스타스토리로 연습경기에 아리엘 미란다가 나오자 기겁한 적이 있다(...).

  • 아들 김웅 군이 2년후인 2023 드래프트에서도 지명을 받지 못했으며, 인스타 스토리로 통해 수술소식을 알렸다.

  • 그의 인터뷰를 들어보면, OB, LG, SK 등 수도권 구단에 소속된 세월이 말해주듯 서울사투리에 가까운 표준 억양도 잘 구사하는 반면, 또 다른 인터뷰에서는 마산출신답게 동남 방언도 꽤나 남아있음을 알 수가 있다.




4.1. 저평가?[편집]


  • 2017년 기준 약 8~9년전 야구에 관심 갖기 시작한 두산 베어스 팬들 중 이 1995년 두번째 KS 우승 때와 암흑기의 에이스였던 김상진을 기억하는 팬들은 거의 없는 듯하다. SK 투수코치 시절 한때 두산과의 경기 중 투수를 교체하러 마운드에 오를 때 두산 팬들의 야유가 쏟아진 적도 있다.[25] OB 레전드인 줄 모르고 그냥 라이벌 팀 SK 코치라서... OB 올드 팬들은 물론 김상진을 아는 다른 팀 팬들마저도 이 광경을 보고 한숨을 쉰다. 두산에 코치로 돌아온 지금은 그런 거 없고, 올드팬, 뉴비팬 모두 뛰어난 육성능력으로 김상진 코치를 무한히 찬양하는 중인데 2022년 정철원 신인왕 수상 이후 평가가 더 올라갔다.

  • 의외로 묻혀서 그렇지, 통산 100승 이상 거둔 투수다.122승으로 KBO 리그 다승 10위. 다만 한용덕과 같이 골글이나 MVP 등의 기록이 없고, 개인 타이틀도 없다. 따라서 무관의 제왕. 덧붙여 한용덕 역시 연습생 출신으로, 우승반지는 하나라도 끼고 은퇴했다는 점도 같다.

5. 관련 문서[편집]


[1]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2]마산제일고등학교의 전신.[3] 1989년에 연습생 신분으로 입단하여 1990년 지명을 받음으로써 정식 선수가 되었다. 당시 마산에서 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아들이 정식 선수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해 우셨다고 한다. 구단에서 800만원 계약금을 수표로 받은 다음 은행으로 가 계약금을 모두 부모님께 드렸다고 한다.[4] ~8월 14일[5] 8월 15일~[6] 오래 전에 야구부가 없어진 청강고등학교(現 마산제일고등학교)를 나왔다.[7] 한 시즌 8완봉승은 1986년의 선동열과 타이 기록이며, 이 해 3경기 연속 완봉승을 기록했다. 하기룡, 이상군, 선동열, 송승준 등과 더불어 한국프로야구에서는 5명만 달성한 기록이다.[8] 이후 기록이 없다가 2009년 송승준이 14년만에 3연속 완봉승을 기록했다. 송삼봉이라는 별명은 그래서 생긴 것.[9] 통산 기록한 50완투 가운데 41완투가 1991~1995년 5시즌에 집중되어 있다.[10] 박철순계형철, 장호연, 김상진으로 이어진 베어스의 에이스 계보는 이후에도 박명환-리오스-니퍼트-린드블럼으로 이어진다.[11] 같은 시기에 삼성은 해태에 현금 18억 원과 간판 타자 양준혁을 내주면서까지 임창용을 영입하였고, 곧이어 쌍방울에 현금 20억 원과 양용모, 이계성을 내주고 김기태김현욱을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그 전해에 해태에서 4억 원에 조계현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한 것에 이은 현질이었다.[12] 다만 화폐가치가 급상승하던 시기라는 것을 감안하면 엇비슷한 수준.[13] 아이러니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삼성과 FA 계약을 체결한 김상진, 김동수, 이강철 셋 다 계약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모두 타 팀으로 트레이드된다. 그리고 김상진과 같이 FA 자격을 얻어 삼성과 재계약한 김기태 역시 계약기간 1년만에 김상진, 김동수와 묶여 SK로 트레이드된다.먹튀 수집 결론적으로 이 당시 우승에 목메던 삼성의 현질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14] 예시로 권명철 - 해태, 김상호 - LG 등[15] 사실상 FA 먹튀인 김동수와 먹튀기질이 보이던 김기태, 김상진, 여기에 내야자원 중복으로 써먹을 데가 없던 정경배와 재활하던 이용훈을 넘긴 것이다. 그리고 삼성이 받아온 선수는 좋은 모습을 보이던 브리또와 그럭저럭 던지던 좌완 오상민. SK는 선수층을 보강했고, 삼성은 외국인을 보강했다고 보면 된다.[16] 비슷한 시기 방출 통보를 받은 김태한과 위로할 겸 같이 술을 마시고 있는데, 전화로 방출 통보가 왔다고 한다. 그 전화를 받고 나서 김태한에게 자신도 위로해 달라고 말했다는 웃픈 상황이 되어 버렸다고.[17] 선동열의 86년 8완봉과 함께 유이한 한 시즌 최다 완봉이다. 그런데 선동열보다 경기수도, 이닝수도 더 적다.[18] 당시 MBC ESPN에서는 최태원을 해설가로 영입하려고 했으나, 최태원피츠버그 파이리츠로 지도자 연수를 떠나게 되자 김상진을 영입하였다.[19] 한편 같이 SK에서 나온 김원형 코치는 조원우 감독의 부름을 받고 롯데 자이언츠의 수석코치 겸 투수코치로 자리를 옮겼다.#[20] 김상진은 1998년까지 무려 두산으로 바뀌기 전인 전신 OB 베어스 이름일 때에만 뛰었다.[21] 여담으로 이상훈과는 말년에 같은 팀에서 뛸 뻔했는데 2003년 말 김상진이 SK에서 방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순철 감독과 갈등을 겪던 이상훈이 시즌 개막을 앞두고 LG에서 SK로 트레이드되면서 간발의 차이로 엇갈리고 말았다. 본인도 이에 대해 상당히 아쉬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상훈은 트레이드되고 얼마 후 은퇴했다는 것...[22] 하지만 불행하게도 해태 투수 김상진은 1999년에 위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23] 2021년에 드래프트 지명을 받지 못하고 강릉영동대로 진학.[24] 타자와 포수를 제외하고는 투수들의 구위를 가장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25] 한창 SK 와이번스두산 베어스가 서로 라이벌 구도를 달리고 있던 시절인 2007~2009년 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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