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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방탄소년단의 멤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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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작곡가, 피아니스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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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朝鮮貴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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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작
| 후작
| 백작
| 완순군 · 의양군 · 창산군 · 청풍군 · 박영효 · 윤택영
| 민영린 · 이완용 · 이지용[1]
| 자작
| 고영희 · 권중현 · 김성근 · 김윤식 · 민병석 · 민영규 · 민영소 · 민영휘 · 박제순 · 송병준 · 윤덕영 · 이근명 · 이근택 ·이기용 · 이병무 · 이완용[2] · 이용직 · 이재곤 · 이하영 · 임선준 · 조민희[3] · 조중응
| 남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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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작
| 백작
| 이달용 · 이덕용 · 이덕주 · 윤의섭 · 박찬범 · 이병길
| 고중덕 · 고흥겸 · 송종헌 · 이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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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작
| 후작
| 백작
| 이완용
| 고희경 · 송병준
| 반납
| 김석진 · 민영달 · 유길준 · 윤용구 · 이용구 · 조경호 · 조정구 · 조희연 · 한규설 · 홍순형
| [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2] 1872년생 이완용(李完鎔)으로 1858년생 이완용(李完用)과 동명이인임. [3] 1927년 파산자로 선고되어 조선귀족령 제8조 1항에 따라 1928년 2월 29일부로 자작의 예우가 정지되었지만 자식이었던 조중수에게 자작 작위가 승작됨.[4] 1919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협조해 습작 불능 처리됨.[5] 재산 분쟁으로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오등작 중 일제강점기 조선귀족에 공작은 없었으며, 그에 준하는 작위와 관련한 정보는 왕공족 문서 참고.※ 취소선 표시는 작위를 박탈당한 인물을 뜻함.
- 작위 박탈 사유 [ 펼치기 · 접기 ]
- 윤치호 : 1913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됨에 따라 작위 박탈
- 김사준 : 1915년, 조선보안법 위반 사건에 연루되어 작위 박탈. 신한혁명당의 간부 중 하나인 성낙형이 고종을 망명시키고자 했는데, 김사준이 이를 수락하고 실행에 옮기려다 일제에 발각되어 김사준을 비롯한 고종 망명 사건 관련자들 다수가 검거
- 김윤식 :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 박탈
- 이용직 :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 박탈
- 민영린 : 1919년, 아편 흡입죄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 김병익 : 1919년, 아편 흡입죄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 민태곤 : 1941년 12월, 도쿄에서 조선민족독립운동 사건으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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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奭鎭
1843 ~ 1910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대표적인 척화대신인
김상헌의 11대손이다.
1896년 특진관, 이어 비서원경·장례원경·귀족원경 등을 거쳐 판돈녕부사에 올랐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다음해 1월 22일 상소를 올려 오적신의 처형과 협박에 의한 조약은 공법상 무효임을 주장했다. 이어 매국노들과 같이 하늘로 머리를 들고 다닐 수도 없는데 하물며 그것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 열에 설 수 없다는 소를 올리고 의효전향관 자리를 물러났다. 1910년 한일합병이 된 뒤, 일제가 남작의 작위를 주어 회유하려 하자 9월 8일 아편을 먹고 자결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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