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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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교육자, 공무원, 정치인이다. 본관은 광산(光山)[2] , 호는 선산(宣山)이다.
친형인 김선적은 민족종교인 대종교의 지도자로 통일광복민족회의 회장을 역임했고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일체민주당 후보로 출마하다 중도 사퇴하였다.
2. 생애[편집]
1934년 1월 8일 충청북도 충주군 신니면에서 아버지 김일중(金日中, 1906. 10. 25 ~ ?)과 어머니 강릉 박씨(江陵 朴氏) 박선기(朴璿基)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음성중학교, 경동고등학교(8회)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3학년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가서 스태슨 대학교 정치학과, 아메리칸 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이후 웨슬리안 대학교, 켄터키 대학교에서 정치학과 교수를 역임하다가 1969년 귀국하여 과학기술처(현 미래창조과학부) 연구조정관으로 임명되어 공무원 경력을 시작하였다. 과학기술처,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등에서 근무하면서 상공부 차관, 중소기업은행장, 대한증권협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증권업협회장에서 물러난 후 정치권에 입문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시-중원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주공화당 이종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민주자유당 이종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충청북도 충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김선길에 대한 김종필의 신임은 깊었는데, 김선길이 학자와 관료, 금융인을 거친 경험을 높이 삼아서 그를 해양수산부장관직에 임명하였다. 1998년 3월부터 1999년 3월까지 해양수산부장관을 역임하였다가 1999년 한일어업협정이 타결되자 실무협상에서 쿼터를 확보하지 못한 사실이 드러나자 어민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정부의 무능력에 대한 비난 여론도 들끓는 등 여론이 악화되자 경질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천년민주당 이원성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2008년 향년 7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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