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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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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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체육훈장 수훈자
파일:체육훈장.png
연도
1975년
이름
김성근
분야
스포츠
사유
체육발전유공
체육훈장기린장(5등급)

김성근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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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두산 베어스 우승 엠블럼 V1.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1982


파일:SK 와이번스 우승 엠블럼 V1.svg파일:SK 와이번스 우승 엠블럼 V2.svg파일:SK 와이번스 우승 엠블럼 V3.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감독

2007
2008
2010

파일:한국-대만 클럽 챔피언쉽 2010_logo.png.png
한대 클럽 챔피언십
우승감독

2010

파일:KBO 리그 로고(1982~2012).svg KBO 포스트시즌
1986, 2007, 2008, 2010 최우수 감독상

파일:제일화재 프로야구대상.png 2007, 2008 제일화재 프로야구대상 프로감독상

파일:스포츠서울.png 2008 프로야구 스포츠토토 올해의 상 올해의 감독상

파일:자랑스런 한국인 대상.png 2010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스포츠부문)

파일:일구상 로고.jpg 2010 일구상 일구대상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2061801665_0.jpg 2012 카스포인트 레전드상

보유 기록
한국시리즈 최초 퇴장 감독[1]
2009 한국시리즈 5차전
단일 구단 최다 연승 감독
22연승(2009.08.25/문학 두산전 ~ 2010.03.03/잠실 LG전)[A]
단일 시즌 최다 연승 감독
19연승(2009.08.25/문학 두산전 ~ 2009.09.26/문학 두산전)[A]


김성근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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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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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 베어스 등번호 38번
팀 창단

김성근
(1982)


박해종
(1984~1985)
OB 베어스 등번호 52번
팀 창단

김성근
(1983)


허준
(1984~1989)
OB 베어스 등번호 81번
팀 창단

김성근
(1984~1988)


김인식
(1995~2003)
{{{#ff9933 [[태평양 돌핀스|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81번}}}
팀 창단

김성근
(1989~1990)


성기영
(1991~1993)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91번
팀 창단

김성근
(1991~1992)


이재현
(2007)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90번
팀 창단

김성근
(1995)


김성한
(2001~2004)
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91번
김인식
(1990~1992)

김성근
(1996~1999)


팀 해체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2번
서정환
(1998~1999)

김성근
(2000)


양일환
(2001~2008)
LG 트윈스 등번호 76번
천보성
(1993~1999)

김성근
(2001~2002)


유지현
(2007)
치바 롯데 마린즈 등번호 90번
에지리 료
(1995~1996)

김성근
(2005~2006)


타치바나 류지
(2007~2008)
SK 와이번스 등번호 38번
윤희상
(2004~2006)

김성근
(2007~2011)


오수호
(2014)
한화 이글스 등번호 38번
안영명
(2014)

김성근
(2015~2017)


안영명
(2018~2020)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등번호 71번
다니엘 알바레스
(2021)

김성근
(2022)


사이토 가즈미
(2023~)




파일:김성근 감독 2023.jpg

최강 몬스터즈 No.38


김성근
金星根 | Kim Sung-keun[1]

출생
1941년 10월 30일[2] (82세)
교토부 교토시 우쿄구
본적
경상남도 진양군 미천면[3]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4]
신체
180cm[5], 82kg, A형[6]
종교
무종교[7]
가족
아버지 김찬숙[8], 어머니 이계수
3남 4녀 중 여섯째
배우자 오효순
아들 김정준, 딸 2명
학력
교토시립 시조중학교[9] (졸업)
교토부립 가쓰라고등학교[10] (졸업)
동아대학교[11] (명예 학사)
포지션
투수, 1루수
투타
좌투좌타[12]
소속팀
교통부 (1961)
기업은행 (1962~1968)
지도자
[ 펼치기 · 접기 ]
마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1969~1970)
기업은행 투수코치 (1970~1971)
기업은행 감독 (1972~1975)
충암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1976~1979)
신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1979~1981)
OB 베어스 투수코치 (1982~1983)
OB 베어스 감독 (1984~1988)
태평양 돌핀스 감독 (1989~1990)
삼성 라이온즈 감독 (1991~1992)
해태 타이거즈 투수 인스트럭터 (1994)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 (1995)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1996~1999)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 (2000)
LG 트윈스 2군 감독 (2001)[1]
LG 트윈스 1군 수석코치 (2001)[2]
LG 트윈스 감독대행 (2001)[3]
LG 트윈스 감독 (2002)
치바 롯데 마린즈 1·2군 순회코치 (2005~2006)
SK 와이번스 감독 (2007~2011)
고양 원더스 감독 (2012~2014)
한화 이글스 감독 (2015~2017)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부 특별 어드바이저 (2022)

프런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코치 카운슬러 (2018~2021)
응원가
라나에로스포 - 사랑해 #[가사][13]
상훈
체육훈장 기린장

1. 개요
2. 학창시절 및 선수 시절
2.1. 일본에서의 초기 생활
2.2. 야구의 본격적인 시작, 재일동포 학생야구단과 대학 시절
2.3. 일본 사회인 야구 시절
2.4. 한국 실업야구 진출
2.5. 한국으로의 영주귀국
4. 은퇴 후
12. 미디어 활동
12.1. TV
12.2. 광고
12.3. 홍보대사
12.4. 저서
13. 발음/말투
14. 선수들이 말하는 김성근
15. 기타
16. 평가
16.1. 승리지상주의
16.2. 관련 어록
17. 역대 감독 성적
1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前 야구인.

前 KBO 리그 OB 베어스, 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LG 트윈스,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 감독이자 일본프로야구 치바 롯데 마린즈,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프런트 및 코치를 역임했다.

2022년 10월 16일, 50년의 다사다난 했던 코치, 감독 등 지도자 커리어를 접고 은퇴를 선언했다.[14] 지도자 은퇴를 선언했던 2022 시즌을 기준으로 80세(실제 만 나이로는 81세를 보름 앞둔 우리나이 82세), 일본프로야구 전체 구단 중 최고령 지도자였다.


2. 학창시절 및 선수 시절[편집]



파일:김성근 현역.jpg



2.1. 일본에서의 초기 생활[편집]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으나 상술한 대로 일본 국적이 아닌 한국 국적을 유지하였다. 이 때문에 재일교포로서 차별을 받았을 거라고 오인하지만, 정작 김성근 스스로는 이에 대해 부정하였다.[15]

김성근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초등학교 고학년때 싸움을 잘해서 이후로 괴롭힘을 당한 적이 없고, 싸움을 잘해서 중고교 시절 학교의 주류에 있었으며 세간에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조선인이라고 차별이나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한 번은 자신이 학생들을 주도해서 단체로 수업을 째고 도망가서 여선생이 울었다는 일화를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자신이 학교에서 주도적인, 이른바 인싸였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이 조선인 출신이라는 걸 아는 학생도 별로 없었지만, 안다고 해도 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고3 때 재일동포야구단에 포함되면서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전교생이 다 알게 되었지만 전혀 차별받거나 불편한 점은 없었다고 한다.


파일:김성근 가쓰라 고교 시절.jpg

일본 교토 가쓰라 고등학교 시절

김성근은 교토 헤이안고를 비롯한 지역 야구 명문고에 진학하지 못하고 공립고교인 교토 가쓰라고에 입학했다. 하지만 지역 야구 명문고에 진학하지 못한 것도 차별보다는 순전히 실력 문제였다고 스스로 인터뷰한 바 있다. 2011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성근은 그동안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나의 야구 실력은 평범했다. (실력이 부족해서) 교토의 야구 명문고인 헤이안(平安)고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라고 덤덤히 말했다. # 다만 차별보다는 집안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다는 이야기는 자주 나온다. 학비가 없어 큰형님만 대학을 졸업했고 고등학교까지 나온 것도 자신밖에 없었는데, 그나마도 우유 배달 등으로 학비를 충당하였다고 인터뷰한 바가 있다. 특히나 당시 야구 명문고들은 사립이었던 만큼, 확실한 실력을 보여주지 않는 한 학비를 내지 않고 갈 방법은 없었고 그 시절까지의 김성근은 스스로도 운동을 잘하는 편이 아니라고 말하던 시절이었다.

가쓰라고에도 야구부가 있긴 했지만 야구부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였다. 김성근의 자서전이나 인터뷰를 살펴보면 가쓰라고의 야구부는 운동부로서의 야구부가 아니라, 일반계 고등학교에 있는 방과후 특활반 개념의 야구부였음을 알 수 있다. 김성근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가쓰라고에서는 야구부라도 주5일 동안의 정규 수업에 모두 정상적으로 참여해야만 했고 주말에만 경기했다고 한다. 심지어 장비는 커녕, 훈련할 수 있는 운동장도 없었다. 포지션별로 선수조차 제대로 갖추어지 못해서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는 다른 운동부에서 선수를 꾸어와야 할 정도였다. 또 고교 시절 김성근은 항상 야구만을 생각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학교 특성상 수업도 들어야 했고 그 과정에서 틈틈이 축구, 마라톤, 수영 등 다양한 종목 또한 경험했다고 한다. 특히 축구부에서 수비수로 뛰었고, 그때 등번호까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야신'의 축구 실력은?.

"가쓰라 고등학교 때 감독이 일반 교사였는데 한 달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해서 배울 게 없었어요. 나머지는 내가 창조하고 창의해서 해야 했죠. 야구잡지에 나오는 선수들의 연속사진을 보고 흉내 내면서 배웠어요."

- 김성근 "野神을 만든 건 두번의 '神내림'… 눈이 확 뜨였죠"


훈련이라고는 돌멩이를 강에 던지는 것이 전부였다.

- 김성근이다: 감독으로 말할 수 없었던 못다한 인생 이야기


이 과정에서 김성근은 처음으로 투수를 하게 되었다. 본래 우익수였으나 고등학교 시절 3학년들이 졸업하고 던질 투수가 한 명밖에 남지 않게 되자 한번 나가서 던져보라고 시킨 것이 그 시작이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제대로 된) 투수가 아니었다고.

아무튼 이런 수준의 가쓰라고 야구부가 전국대회에 나가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고, 가쓰라고 야구부를 졸업하고 대학이나 프로로 진출하여 야구 생활을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성근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야구를 접어야할 운명인 듯 했다. 그런 김성근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나타났다.


2.2. 야구의 본격적인 시작, 재일동포 학생야구단과 대학 시절[편집]


고교 졸업반 시절인 1959년, 김성근은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에 포함되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당시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은 재일 대한야구협회에서 기획하였는데, 이 당시 재일 대한야구협회가 오사카에 있었기 때문에 오사카, 교토 지역 출신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서 가쓰라고교는 사실 별볼일 없는 팀이었지만, 김성근은 3학년 때 예선에서 나름 빼어난 활약을 하면서 여기에 포함될 수 있었다.[16] 이렇게 김성근은 1959년 제4회 재일동포학생야구단에 포함되어 처음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이 상황이 더욱 극적이었던 것은, 당시 김성근 가족의 상황 때문이었다. 김성근이 고3이었던 1959년, 김성근의 홀어머니는 북한의 재일교포 북송사업에 지원했고 김성근 가족은 곧 북한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만민이 평등하며 모두가 '이팝(쌀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을만큼 부유한 나라가 됐다"는 북한의 선전에 혹해서 김성근 가족도 북한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던 것. 북한으로 가기 위한 모든 서류절차를 마쳤고 만경봉호를 탈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김성근은 재일동포야구단으로 한국에 갔다왔던 것. 한국에 갔다온 김성근은 남한에서는 자신이 야구로 충분히 먹고 살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발견했을 것이다. 돌아오자마자 김성근은 어머니를 간절히 설득했다. "듣던 것과는 다릅니다. 한국이 사람 살 곳이 아니라는 말은 거짓말이었어요. 한국은 나름대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북한에는 야구가 없다는 점이 그가 절박하게 가족들을 설득하는 계기가 되었을 터. 결국 그의 설득으로 가족은 북한행을 포기하게 됐다. 북한이 지금 어떤 나라인지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가족을 살린 선택이 된 셈.

이듬해인 1960년 부산 동아대학교에 입학했다. 김성근은 1960년 5월에도 재일동포 야구팀에 참여했는데, 이때는 동아대 재학 중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성근은 동아대에서 일학년 과정도 다 마치지 못하고, 입학한 그해 가을 일본으로 돌아갔다. 동아대 재학 당시 언어불통 등으로 한국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고 한다.[17][18]

동아대에서 지낸 반년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 언어가 잘 통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19세의 청춘 김성근은 나름 애틋한 러브스토리를 만들기도 했다. 이영미 기자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동아대에 다닐 때 같은 학과에 김성근 본인을 좋아하는 여학생이 4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음식점, 제과점, 건축가 등 부유한 집안의 딸들이었다고. 안타깝게도 집에서 금은방을 운영하는 딸내미가 없었다나. 하지만 야구를 해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아까워. 그중에서 제과점 딸은 부산 하숙집에까지 찾아오곤 했었거든. 그런데 사실 그때는 다른 여자한테 눈이 팔렸었어. 6명의 친구들이 하숙집에서 함께 기거했는데 옆집에 아주 잘생긴 '식모'(살림 도우미)와 어떻게 하면 데이트 한번 해볼까가 관심의 대상이었지. 6명이 본의 아니게 라이벌 관계를 이룬 셈이야." 그 중에서 친구 한 명이 그 여자와 용두산 공원으로 데이트를 갔다왔다는 소리를 듣고 밤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속 쓰려 했다고. #


2.3. 일본 사회인 야구 시절[편집]


동아대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후, 김성근은 1961년초 같은 지역에 살던 재일 대한야구협회 최태환의 인맥으로 난카이 호크스 2군 캠프에서 테스트 받을 기회를 얻었다. 이때 김성근은 프로 2군 선수들과의 실력차를 절감했고, 그들의 훈련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부를 했다고 회고했다. 난카이 호크스 2군 테스트에 탈락한 후 김성근은 사회인 야구팀에서 자리를 얻기 위해 여러 팀에서 입단테스트를 받았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훗날 김성근은 자신이 충분히 실력은 있었지만 재일교포 차별 때문에 사회인 야구팀에서 번번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여기서는 두 가지 차원에서 볼 수 있는데, 야구를 비롯한 스포츠와 연예계는 실력제일주의 풍토로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이 상대적으로 덜하였고 실제로도 스포츠 분야에서 성공한 재일교포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거짓으로 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구단 오너가 협회 규정을 바꾸면서까지[19] 영입한 장훈의 예시로도 김성근의 주장을 쉽게 반박할 수 있다. 김일융의 경우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당시 일본인 학생만 드래프트에 참여 가능하다는 점을 악용해 다니던 고등학교를 중퇴시킨 후 그를 입단시킨 것이 논란이 되어 이후 국적을 불문하고 일본의 학교에 소속하는 선수는 모두 드래프트를 거쳐야 한다고 규정이 변경되었다.

하지만 이건 프로 차원의 이야기이고, 사회인 야구 수준에서는 분명히 차별이 존재했다. 즉 전체를 씹어먹을 정도의 선수라면 당연히 차별에서 열외였지만, 사회인 야구단 정도에서 어차피 충분한 인원이 있는 판에 굳이 당시 일본 입장에서는 실력이 애매한 재일교포를 받을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 즉 차별을 받았던 것도 맞지만 차별을 넘어설 정도의 실력이 없었던 것도 맞았다고 보는 편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앞서 본인 스스로 그닥 잘하는 선수는 아니라고 밝히기도 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여러차례 고배를 마신 끝에 김성근은 고향인 교토의 상호차량(相互車輛)에 취업하는데 성공했다. 이 상호차량 야구부는 사회인야구 2부리그라고 부를 수 있는 클럽팀인데, 일본 사회인 야구는 보통 생각하는 실업야구 개념의 회사등록팀이 있고, 이 밑의 단계인 클럽팀이 있으며, 그 아래 단계로 보통 일반적으로 돈 안받고 하는 동호인 야구인 쿠사야큐팀이 있다.

클럽팀은 일반적으로 오전근무만 하거나 아예 안하기도 하는 회사등록팀과는 달리 오전오후 회사 업무를 다 보고 남는 시간, 점심시간이나 주말에 훈련을 한다. 야구부 활동으로 월급이 나오며[20], 정식으로 일본야구연맹에 등록되어 도시대항전 등 실업야구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 즉 야구로 돈을 벌 수 있는 마지노선 개념의 팀으로 클럽팀에서도 프로지명자가 종종 나온다. 이런 클럽팀 출신으로 성공한 선수는 소프트뱅크 마무리 모리 유이토가 대표적이다.

물론 프로가 아닌 만큼 같은 클럽팀이라도 수준 차이가 상당하고 상호차량은 2004년 교토 사회인대회 이후 기록이 없어 수준이 아주 높은 팀은 아닌 것으로 보이나, 그래도 이 정도 팀은 기본적으로 비선출은 아예 받아주질 않는다. 즉 김성근이 이 시기 회사 동아리 활동이나 한 것은 아니고, 어느정도 제대로 야구를 배워 야구로 돈을 벌었다고는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완전 아마추어들이 하는 것은 한국 사회인 야구와 같은 개념의 팀인 쿠사야큐.

여튼 프로 지명을 노릴 정도로 수준이 아주 높은 팀은 아니었음은 분명하고, 점심시간 도중 작업복을 입고 캐치볼을 하는 정도가 훈련의 전부였던 정도로 열악한 곳이었던 것은 사실. 그리고 이후 김성근은 교토 상호차량에서 몇 개월 뛴 후 한국으로 건너가 교통부 실업팀에 입단하게 된다.

참고로 김성근 안티들은 김성근이 일본 사회인야구도 대단한 것처럼 얘기하곤 했다는데, 일례로 일본 사회인야구 출신 최일언이 OB에 영입되었을 때 김성근은 "최일언은 일본 사회인야구에서 정통파로 피칭을 배운 선수"라고 치켜 세운 바가 있다.#

하지만 80년대 당시 일본의 사회인야구는 KBO리그보다 두세 급 이상 수준이 높은 리그였다. 노모 히데오가 뛰던 리그가 80년대 일본 사회인 야구였으며, 당장 그 최일언만 해도 일본 프로팀을 노릴 수 있는 선수였고, OB에서 첫해부터 167이닝을 던지며 주축 선발투수로 활약했다. 지금도 일본 사회인야구는 대학졸업 후 프로로 권토중래를 노리는 인원들이 입단하는 리그로, 프로 상비군쯤 되는 리그다. 사회인야구 출신 드래프티들은 입단즉시 NPB 1군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는 경우가 많다. 즉, 일본 사회인야구 이야기는 김성근의 자기포장도 뭣도 아니고 팩트이다.


2.4. 한국 실업야구 진출[편집]



파일:김성근 1962년 국가대표.jpg

1962년 제4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 당시 모습

1961년 교토 상호차량 사회인야구팀에서 뛰고 있던 김성근은 재일교포 선배 배수찬의 도움으로 한국의 실업야구팀 교통부[21]에 입단하면서 한국 실업야구리그 선수생활을 시작한다. 이듬해인 1962년에는 새로 창단한 기업은행 야구단으로 이적했다.

실업야구가 처음으로 기록을 시작한 1964년, 김성근은 그해 페넌트레이스(실업야구 연맹전)에서 다승 공동 2위(20승 5패)를 기록했다. 다만 다승 공동 2위를 차지한 백수웅의 20승 4패에 승률에서 밀렸다. 앞선 1963년 11월 13일 대통령배 가을 리그 인천시청과의 경기에서는 볼넷 1개만을 내주며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것도 그의 선수생활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1961년에는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어 김응용, 백인천 등과 함께 제4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두는데 기여했다.

다만 1963년 재일교포 신용균김영덕이 전성기를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진출하여 리그 적응기를 거친 후 무서운 기세를 보이며 김성근의 입지가 위태롭게 되었다. 또 국내 선수들도 변화구를 배우며 실력이 일취월장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김성근이 활약하던 당시에는 팀도 많지 않았고 경기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리그 전체에 투수를 통틀어도 몇 명 안되던 시절이었다. 이 때문에 9경기 연속 완투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지나친 혹사[22]와 당시 잘못된 야구지식으로 인한 잘못된 어깨 관리 방법[23] 등으로 인하여 4년도 버티지 못하고, 1964년 시즌이 끝나고 만 22세의 나이에 투수를 포기하게 된다. 이후 타자로 전향하여 1루수로 뛰었지만, 어깨 문제로 1968년 결국 선수생활을 그만두게 된다.

현역 시절에는 좌완 정통파 투수였다. 정작 김성근 본인은 승승장구에서 자신의 현역시절 투구 폼 사진을 보더니 투구시 팔이 좀 더 높았으면 더 오래 선수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24] 동시에 MBC 스포츠의 재일교포 야구인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김성근은 "내가 한국에서 최초로 싱커를 던진 투수"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건 약간 복잡한 문제가 있기는 하다.[25]

즉, 나름 싱커는 개발된 지 10년 정도 된 최신 변화구였기에 김성근을 비롯한 재일교포 선수들이 가져온 선진 문물인데, 당시 지금같은 방송중계나 기록이 있던 것도 아니고, 누가 어느 경기에서 뭘 던졌네 하는 서로간의 구두 증언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즉 김성근 본인이 경기 도중 싱커를 구사했는데 다른 투수가 그걸 먼저 구사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자신이 최초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고 다른 선수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진짜 처음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고, 알 수도 없는 노릇. 어쨌든 최초로 싱커를 던진 몇 명의 투수 그룹에 속하는 것까지는 맞다고 볼 수 있다.


2.5. 한국으로의 영주귀국[편집]


1964년 12월, 김성근은 일본으로부터 더 이상 비자 갱신이 되지 않자, 일본 거주권을 포기하고 영주귀국을 결심한다. 이때 김성근은 홀어머니와 친척, 친구들과 모두 생이별하고 홀로 대한민국으로 영주귀국하며 많이 울었다고 밝혔다. 그때 김성근은 한국에서 야구로 인정받아 국가대표팀 감독까지 해보겠다는 의지로 눈물을 달랬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여기서 논란이 나오게 되는데, 김성근이 영주귀국한지 두달 후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면서, 가족들을 만나는 것에 전혀 지장이 없게 되었다. 김성근이 영주귀국을 결심했다는 1964년 12월은 한일 국교 정상화 추진을 제1의 국정 과제로 천명했던 사토 에이사쿠가 총리에 취임한지 한달 후였고 김성근이 영주귀국을 결심한지 두달 여만에 한일 국교 정상화 기본 합의가 이루어졌다. 즉 김성근이 영주귀국을 결심했다는 1964년 12월이면 이미 한일국교정상화 논의가 크게 진전되어 거의 기정사실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또 보자면, 사실 운동이나 열심히 하던 20대 운동선수가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질지 도사마냥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도 운동선수가 시사 등에 어두운 것은 일종의 클리셰 수준인데 그 시기에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또 기본 합의는 이루어졌어도 일본이 64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된 첫 해이고 한국은 해외여행이 자유롭지도 않았으니, 국교가 정상화되어도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이에 대해 김성근 본인도 인터뷰에서 본인이 영주귀국한 직후에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에 대해 "내 인생에 참 어려운 고비들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이상하게 잘 해결됐어. 참 운이 좋다고나 할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즉 김성근 본인의 말대로, 영주귀국을 결심했는데 마침 운좋게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고 왕래가 가능해졌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당대 시대상을 보면, 김성근의 가족도 처음에는 북한으로 가려고 했던 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재일교포는 총련계가 대다수였고 지금보다 훨씬 남북간 이념 대립이 격렬했던 그 시절, 재일교포는 거의 북한 간첩에 가까운 취급이었다. 즉, 자유화는 되었어도 조국을 찾아갔다가 간첩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나 고문을 당한 재일교포들이 수두룩할 정도로 국가에서 환영받는 존재도 아니었고 이렇다보니 출입국 관리를 까다롭게 했던 시기였다.

즉 말이 좋아 국교 정상화지 말 그대로 국가간에 국교만 정상화하겠다 정도고, 해외여행은 자유화되지도 않았다. 해외여행 허가 자체로도 까다로운데 간첩으로 의심받을 소지가 다분한 일본, 한국간 허가가 나올지, 또 몇 편 있지도 않을 뿐더러 당시로서는 엄청난 가격인 한일간 비행기, 배삯을 마련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라 국교 정상화 이후에조차도 정말 만나는 것 자체는 쉽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3. 지도자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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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은퇴 후[편집]



파일:김성근 2023 한국시리즈 직관.jpg


2022 한국시리즈 2차전에 박재홍 해설위원과 함께 인천 SSG 랜더스필드를 찾았다. 후문에 따르면 원래 김성근 전 감독이 시구, 박재홍 해설위원이 시타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이태원 압사 사고로 인해 취소되면서 대신 스카이박스에서 자리를 지켰다.

전날 중계를 통해 KS 1차전을 봤다는 김성근 전 감독은 "어제 집에서 봤는데 오늘 높은 곳에서 보니 야구가 새롭다. 더그아웃에서 보는 것이랑 위에서 보는 것이랑 완전히 다르다. 위에서 보니 긴장감 없이 편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또 "김강민은 많이 늙었더라. 살도 많이 쪘더라"며 웃어보인 뒤 "김강민이 (한국나이로) 41세더라.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선수도 모자란데 우리나라도 그런 선수를 많이 남겨놔야 한다. 자꾸 바꾸니까 수준이 떨어지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어 "지도자로 기분좋은 순간이 별로 없었지만 가르쳤던 선수가 좋아지고, 성장했을 때 기분이 좋다. 어제 김강민의 홈런을 보고 기분이 좋았다'며 "그런 홈런은 쌩쌩할 때도 못 치던 홈런이다. 어제는 깔끔하게 잘 쳤더라"고 흐뭇한 속내를 드러냈다.

김광현에 대해서는 "2007년 당시 김광현이 신인이어서 부담감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어제는 이겨야겠다는 의욕이 앞서면서 서두르는 것 같더라"며 "너무 오버페이스로 던져서 도중에 지친 것 같다"고 평가했다.


파일:최강야구 2023 배너.jpg


그리고 11월 7일 이승엽의 뒤를 이어, JTBC의 예능 프로그램인 최강야구의 팀인 최강 몬스터즈 2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26]

예능 출연 이후 여러 언론이나 팬들에게 주목을 받게 되자, 다시금 언론에 자주 비추고 있다. 한 인터뷰에서는 자신이 암을 3번이나 걸렸으나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참았다는 등 이야기를 했고, 본인은 물론 한화 이글스에게도 흑역사였던 한화 감독 시절의 질문을 받자 "모든 분야는 세대교체가 아니라 흐름 속에서 오고, 우리나라는 옆동네서 흉내내면 너도 나도 흉내낸다면서, 한화도 거기에 빠져들었다."고 두루뭉술하지만 결국에는 프런트 야구를 선언한 한화를 돌려까는 모습을 보였다. #

그리고 감독의 사명감으로서 말하길, 감독은 선수들이 돈을 잘 벌게 해주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추가로 선수들이 돈을 잘 벌게 하려면 그만큼 경기에서 이겨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송은범에게 34억을? 확실히 김성근이 여러 선수들의 복리후생(...)을 이뤼준 것은 사실이다. 김성근이 맡은 팀들은 전력 쥐어짜기를 하는 그의 성향상 은퇴를 앞둔 선수들도 여럿 영입하는 등으로 로스터를 꽉꽉 채우다 보니 선수단 연봉총액(페이롤) 1위도 여러 번 찍었다.[27]

최강 몬스터즈의 감독으로 부임한 후 JTBC에 타격훈련 후 "정근우 어디 갔어?"라는 말하거나, 22시즌 최종전인 두산전 패배 후 마지막 기념촬영에서는 남들 다 몬스터즈 시그니처 포즈를 취할때 시합 졌다며 눈밑에 갖다대 우는 제스처를 하는 등 의외의 예능감을 뽐내면서 팬들에게 재미를 주고 있고, 여러 언론에서도 꽤 나오면서, 다시금 팬들에게 이미지가 좋아지고 있다. 돈 받으니까 프로라던가, 스탭들의 일자리를 생각해서 책임감을 갖고 경기하라는 어록도 덤.[28] 또한 2022시즌 종료 후 팀 신인상을 받으며 전무후무한(?) 최고령 신인왕을 받는다.

한 기사에서는 "한국야구의 질적 저하는 독립 리그 등 아마야구와 프로야구가 구분되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피라미드 체제를 역피라미드 체제로 바꿔야 한다."면서 역피라미드론을 주창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서 독립 리그나 실업야구 리그와 같이 프로 리그 외의 리그를 활성화시키면, 프로 입단에 실패한 선수들이 이런 아마추어 리그를 통해 기량을 발전시켜서 프로 무대에 재도전할 환경을 더 용이하게 만들 수 있고, 이렇게 기량이 발전된 선수들을 프로 구단들이 영입하면 프로야구 전체적으로도 긍정적인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29][30]

이 외에도 다른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박용택, 정근우처럼 아직 현역으로 쓸 수 있는 선수들을 세대교체란 명분으로 한국 프로 구단들이 쉽게 버린다며 비판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31] 물론 은퇴라는 행위는 어찌됐든 간에 선수 개인이 구단과 협의를 해서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고, 이윤을 철저히 생각해야 하는 프로 구단의 내부 사정상 선수들에게 어쩔 수 없이 은퇴를 제안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 구단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해야 할 이유는 없다.[32]

2023년 11월 13일 LG 트윈스kt wiz의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김응용, 김인식 감독과 함께 시구를 하게 되었다. 시포는 각 감독의 애제자라고 볼 수 있는 박경완장채근, 홍성흔이 맡게 되었다. 이후 LG 트윈스가 kt wiz를 상대로 최종 스코어 6:2로 승리하면서 29년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아들인 김정준 수석코치도 2010년 한국시리즈 우승 이후로 13년만에 우승반지를 하나 더 추가하게 됐다.

5. 야구 스타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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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언론플레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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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구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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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김성근의 저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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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징크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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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야구계 인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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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별명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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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미디어 활동[편집]



12.1. TV[편집]


날짜
방송사
방송명
비고
1998년
9월 9일
파일:KBS전주 로고.svg
사람과 사람들 - 고독한 승부사 김성근
#
1999년
4월 22일
파일:KBS 로고(1984-2023).svg
현장르포 제3지대 - 9회말 투 아웃 김감독의 선택
#
2008년
3월 20일 ~ 10월 13일
파일:OBS경인TV 로고.svg
불타는 그라운드
고정출연
3월 25일
파일:KBS 로고(1984-2023).svg
단박 인터뷰
204회
2009년
4월 6일 ~ 11월 2일
파일:OBS경인TV 로고.svg
불타는 그라운드 시즌2
고정출연
2010년
1월 14일
파일:KBS 2TV 로고.svg
세대공감 토요일

3월 25일
파일:OBS경인TV 로고.svg
명불허전
10회
11월 9일
파일:KBS 2TV 로고.svg
김승우의 승승장구

2011년
2월 6일
파일:NHK BS HI LOGO.jpg
白球 - 選手たちは海を渡った[33]
#
3월 3일, 3월 10일
파일:KBS Prime 로고.svg
이금희의 특별한 만남
13회, 14회
9월 13일
파일:Mbclife.png
히스토리 후
52회
2012년
1월 3일
파일:TV CHOSUN 로고.svg
최박의 시사토크 판
19회
1월 22일
파일:KBS Prime 로고.svg
지식 기부 콘서트 N
29회
5월 19일, 5월 20일
파일:SBS 로고.svg
아이 러브 베이스볼 시즌4
37회, 38회
5월 27일
파일:SBS 로고.svg
SBS 스페셜 - 나는 산다, 김성근 "9회말까지 인생이다"
293회
5월 28일

야구 읽어주는 남자
32회
5월 29일

희망특강 파랑새
66회
6월 3일, 6월 10일
파일:KBS 로고(1984-2023).svg
한국 현대사 증언 TV 자서전
69회, 70회
7월 25일
파일:tvN 로고.svg
백지연의 피플INSIDE
215회
6월 17일

MBC 스폐셜 - 김성근과 고양원더스
569회
11월 22일

스타로드토크 명사십리

2013년
3월 30일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 - 야구의 신, 김성근 감독! 소년은 늙지 않는다
23회
6월 17일
파일:SBS ESPN 로고.svg
야구본색 - 그라운드의 지배자! 김성근 감독
5회
6월 26일
파일:EBS 로고.svg
지식채널e
1025회
7월 19일
파일:SBS ESPN 로고.svg
베이스볼 S

2014년
9월 14일
파일:KBS 2TV 로고.svg
다큐 3일 - 9회 말 2아웃, 한화 이글스 72시간
#
2015년
3월 7일
파일:대전MBC 로고.svg
특집다큐 꼴찌의 반격
#
2016년
3월 28일
파일:대전MBC 로고.svg
특집다큐 AGAIN 1999, 야신의 기적

2022년
11월 7일 ~ 2023년 2월 20일
파일:JTBC 로고.svg
최강야구 시즌1
고정출연
2023년
4월 10일 ~
파일:JTBC 로고.svg
최강야구 시즌2
고정출연
2월 8일
파일:tvN 로고.svg
유 퀴즈 온 더 블럭
180회


12.2. 광고[편집]


연도
기업명
브랜드명
비고
1990년
태평양화학
고려왕
#
2007년
아레나 코리아
2월호 표지모델
#
2011년
동서식품
핫초코 미떼
#
2012년
한국인삼공사
정관장
#
넷마블
마구:감독이되자
#
2013년
카카오
나는 김성근이다 for KAKAO
#
2014년
컴투스
컴투스프로야구 for 매니저
#
2015년
한화
한화 이글스
#


12.3. 홍보대사[편집]


위촉
기업/기관
직함
비고
2010년
12월 1일
고치현
관광 홍보대사

2012년
8월 17일
제25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홍보대사
#


12.4. 저서[편집]


파일:꼴찌를 일등으로.jpg
  • 《꼴찌를 일등으로》, 자음과모음, 2009년 7월 15일

파일:김성근이다.jpg
  • 《김성근이다》, 다산라이프, 2011년 12월 23일

파일:감독이란 무엇인가.jpg
  • 《감독이란 무엇인가》[34], 새잎, 2012년 10월 6일

파일: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jpg
  •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이와우, 2013년 3월 18일

파일:세월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jpg
  • 《세월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35], 페이퍼로드, 2014년 1월 15일


13. 발음/말투[편집]


김성근의 말투에 녹아 있는 일본식 억양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한국에 수십 년 동안 살았는데도 왜 일본식 발음을 고수하느냐는 것이다. 김성근의 발음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은 꽤 오래 전부터 있었다. 김응용 감독 등도 그러한 투의 말을 한 적이 있다. 특히 같은 재일교포 출신인 김영덕 감독이 거의 완벽한 억양과 발음으로 우리말을 구사하는 것과 대비되면서 더욱 까였다.[36] 1960년대 실업야구의 대표적인 재일교포 선수였던 배수찬도 한국어를 유창하게 했다. 김영덕 전 감독은 김성근과 같은 교토 출신으로 일본에서 8년간의 프로선수 생활을 마친 후 28세에야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반면 김성근은 18세에 동아대에 입학하면서 영구귀국했다.

김성근 감독팬들은 그의 일본식 발음의 원인이 고교 야구부 감독 시절 제자 뒤에 서 있다가 제자가 휘두른 방망이에 맞아 앞니가 모두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기 때문[37]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사건 때문에 발음이 불분명해졌고 그래서 더욱 일본어투로 들린다는 것이다. 감독팬들은 이 사건 때문에 김성근의 일본어 발음 역시 다소 부정확하다고 말하고 있다. 과거 SK 와이번스의 동계훈련을 일본의 어느 TV가 취재를 나간 적이 있었는데, 일본어로 말하는 김성근 감독의 인터뷰 부분도 자막 처리했다고 하니.

하지만 아래 내용들을 참고할 때, 김성근 감독의 발음이 이가 부러지는 사고 때문에 부정확해지고 일본식 발음으로 들린다는 감독팬들의 주장도 원인의 일부분 정도는 차지하지만, 주된 이유는 되지 못한다.

우선 앞서 감독팬들이 주장한 일본 방송 자막은 김성근의 발음이 부정확해서가 아니라 일본 방송사들은 원래 자막처리 엄청 자주 한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멀쩡한 일본어 발음에도 자막 처리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김성근은 나긋나긋한 교토 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일반 일본인이 듣기에도 다소 불분명하다고 느낄 수 있다.

또 김성근이 방망이에 맞아 이빨이 부러진 사건에 대해 살펴보면, 김성근 본인이 직접 언급한 적은 없고 이 사실이 처음 알려진 것은 충암고 시절 김성근의 앞니 세개를 부러뜨린 당사자인 성기완 씨가 2007년 뒤늦게 사연을 공개하면서 밝혀진 것이다. 사실 성기완 씨는 이빨 부러진 사건만 언급했지 그 사건이 김성근의 말투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또 김성근 본인도 이 사건 때문에 본인의 발음이 부정확해졌다고 말한 적은 없다.

정작 김성근 본인은 실업야구 시절 술을 많이 마셔서 술집에서 한국말을 배워서 한국어가 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로 노리타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이다.

"야구할 때는 괜찮았는데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없으니까 힘들었지. 혼자 이불 덮어쓰고 울 때도 많았고 몸이 아플 때 어디서도 도움을 받기 어려웠어. 외로울 때. 괴로울 때 술을 마셨어. 한국에 들어와 술을 배운거야. 한국말도 술집에서 조금씩 배운 것이었는데 그래서 발음이 아직도 잘 안되나봐." - 잡초승부사 김성근을 말한다 - 5. 반쪽발이로 살아간다는 것


1970년대 후반 KBS라디오 야구 해설을 맡은 적이 있으나 이때도 일본식 발음이 문제가 된 데다 중계 도중 일본어 표현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야구 팬들의 항의를 받고 달랑 한 경기 만에 하차하고 말았다.[38][39]

그 외에도 한국에 처음 와서 부산 동아대에 다녔고, 마산에서 정착하다 보니 한국말을 쓸 때 동남 방언이 약간 섞인 모습도 보인다.[40]

사실 언어 발음 습득은 감각의 문제라, 다른나라에서도 김성근만큼 해당 국가에 오래 살았어도 현지 발음을 완벽히 익히지 못하고 한국식 발음의 영어/일본어를 구사하는 교포들도 부지기수고, 반면 몇년만 살아도 현지인과 비슷해지는 케이스도 있는 등 개개인이 타고난 언어감각에 기대는 바가 커서 김성근이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려는 노력을 안 해서 그렇다고 보는 시각은 문제가 있다. 어휘력/언어구사력과 발음은 전혀 다른 영역으로 김영덕이 한국어 발음이 유창한 것은 그냥 김영덕이 언어감각을 타고난 것이다.

김성근의 한국어는 충분히 유창하다. 실제로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 중 정말로 한국어를 배울 의지 자체가 없어서 일이십년 살아도 한국어 몇마디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김성근은 그런 케이스는 아니기 때문에 그가 일본식 발음을 고집한다,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려고 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주장은 맞지 않다. 애초에 김성근의 발음에 약간 일본식 발음이 들리거나 해서 그렇지 선수단 내외에서 의사소통으로 문제된 적도 없고, 인터뷰에서나 실생활에서나 자기 할 말을 명확하게 잘 해내기 때문에 사실 문제 삼기엔 어렵다 볼 수 있다.

보통 야구팬들은 발음 개선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는다. 사실 그게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 "마, ~~~ 아닌가 시프요" 등 은 김성근만의 고유 말투로 보고 일종의 캐릭터성으로 잡아 패러디하곤 한다.

최강야구 출연 이후에는 김성근 감독 특유의 발음을 그대로 자막화하면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였으며, 선수단 대부분이 감독의 발음을 한 번에 못알아듣기 때문에 가장 익숙한 정근우"동시통역사" 역할을 해주고 있다. 여담으로, 주장 박용택 역시 김성근 감독을 잘 알기 때문에 대변인 역할을 해주면서 그의 발음 문제를 커버해주고 있다.[41] 정의윤의 별명이 정의용이 된 이유도 다 이것 때문이다.


14. 선수들이 말하는 김성근[편집]


송창식

김성근 전 감독님과 함께하면서 육체적으로 힘든 부분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래도 야구하면서 가장 즐거웠다. 그때 내가 아주 좋은 피칭을 한 것은 아니었어도 선수들이 다같이 해보자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때 야구장 나갔던 게 가장 재미있었다.
'김성근 감독이 원망스럽지 않았나'라는 질문을 던지자 송창식은 "많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했다"며 "아직 연락을 못 드렸는데, 조금 뒤 전화를 걸어 감사 인사를 드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주변에선 걱정을 많이 했는데, 정말 힘들 때는 조금 쉬고 싶다고 감독님께 말씀드린 뒤 며칠 쉬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권혁

“힘드냐는 질문은 그만했으면 좋겠다. 나는 행복하다.”
“누군가 날 믿어준다는 건 굉장히 기쁜 일이다.”

심수창

김성근이란? 혹독하지만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감독
선수들은 그때가 행복했다

배영수

한화에 새둥지 튼 배영수
우선협상 끝난 다음날 김성근감독의 전화
“날 인정해주셔서 눈물 참느라 힘들었어요”
배영수는 “감독님 때문에 한화를 선택했다. 변하고 싶었다. 현재 상황을 냉정하게 봤을 때 내 실력은 떨어진 것이 분명하다. 감독님과 함께 한다면 충분히 지금보다 2~3단계는 상승 효과를 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송은범

김성근 감독님과 한 팀에 있으면, 신체적으론 힘이 들지만 정신적으론 행복하다. 많은 사람들은 야구선수들이 육체적인 고통으로 힘들어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걸 알기 때문에 김성근 감독님과 다시 하고 싶었다. 행복하다

정우람

김성근 감독님은 제가 야구를 하면서 기술적인 측면보다도 ‘어떤 야구선수가 돼야 하는지, 그리고 내가 왜 야구를 해야 되는지’ 그런 생각을 하게끔 해주신 분이에요.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갖게 해주신 것과 제가 거기에 보답하고, 부합하는 것은 별개잖아요. 결국에는 말씀을 듣고 내 자신이 바뀌어야 하는 거니까요. 항상 생각하고 감독님 말씀을 새겨들으면서 어린 시절에 열심히 하고자 했던 게 지금의 저를 만드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김태균

은퇴 기자회견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지도자로 이정훈, 김인식, 김성근 전 감독을 꼽았다. 그중 김성근 전 감독을 떠올린 이유가 흥미로웠다. 김성근 전 감독에 대해 ‘내 자신을 안주하지 않게끔 이끌어주신 분’이라고 설명했다. 김 전 감독이 한화 감독으로 취임하는 자리에서 김태균 선수를 지목해 “앞으로 김태균은 당분간 3루에서 반 죽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타깃을 정하고 팀을 이끌었는데 그런 부분이 부담스럽지 않았나.
“취임식 때 감독님이 나를 지목해서 그런 말씀을 하실 때는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3년 여 동안 감독님과 함께 지내며 감독님의 진심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감독님은 앞에선 강하게 채찍질 하시지만 뒤에서는 선수들을 진심으로 따뜻하게 챙겨주신다. 그러니까 선수들이 (감독님을) 따르는 것이다.”

강경학

“김성근 감독님은 하늘의 선물”

김회성

김성근 감독님 시절에 훈련이 엄청 힘들었지만 경기에 많이 나갔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행복했다. 그때 당시는 너무 힘들었지만 김성근 감독님 덕분에 야구하면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겼다. 요즘 살이 쪘는데 감독님 만나서 다시 펑고를 받아야 할 것 같다(웃음). 모든 감독님, 코치님들께 감사하지만 김성근 감독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감독님께 새해 인사를 전화로 드렸는데 전력 분석 잘해보라고 격려를 해주셨다.

정근우

한화에서 김성근 감독을 다시 만났어요. 기분이 묘했을 텐데요.
“계속 이어져 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SK 때는 잘 몰랐는데 감독님이 SK를 나가신 후 제 타율이 2할대로 떨어지더라고요. 그냥 슬럼프의 시기인가보다 생각하고 넘겼는데 한화 와서 감독님 만난 후 타율이 3할대로 올라가는 거예요. 감독님이 한화를 떠나신 후 그제야 깨달았어요. 감독님은 선수들이 더 안 좋아지기 전에 빨리 붙잡아주는 분이구나 하는 사실을요. 그 덕분에 제가 그동안 결과를 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한편으로는 싫기도 했어요. 감독님이 나가신 후 또 슬럼프를 겪었거든요. 슬럼프가 길어지면서 벗어나려고 해도 잘 극복이 안 되더라고요. 누가 잡아줬으면 좋겠는데 팀에서는 알아서 잘 하겠지 하며 지켜보는 상황이라 저 혼자 발버둥 치면서 절망을 반복했습니다. 감독님이 계시는 동안 제 걸 제대로 만들어 놓지 못한 부분이 저를 힘들게 했던 셈이었죠.”
술 마시면 김성근 전 감독한테 전화를 자주 했다고요?
“목소리 듣고 싶어서요. 감독님이 그리웠습니다. 전화를 못 받으시면 다음날 꼭 전화를 해주세요. 전화해서 감독님이 “또 술 먹었냐”면서 “누구랑 먹었냐”고 물어보세요. 제가 “(박)재상이랑 먹었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면 “XXX들끼리 먹었구나”하시면서 껄껄 웃으세요. 그 한 마디 듣고 싶어서 전화드렸어요. 감독님이랑 통화하면서 힘내고 싶어서요. 선수들이랑 만나면 감독님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그러다 전화 버튼을 누르게 되고요. 전화를 받으실까, 안 받으실까 하면서 전화하다 안 받으면 애들한테 “야, 할배 전화 안 받는다”하면서 웃고.”
은사' 김성근 감독님과 어떤 얘기를 나눴나.
"시즌 종료 후 은퇴 결정에 대해 말씀드렸다. '왜 벌써 그만두느냐'고 하시더라. '이제 은퇴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 감독님 덕분에 잘 성장했고, 이 자리까지 온 것 같아 감사드린다'라고 인사했다."

신성현

"김성근 감독님, 예쁘게 봐주세요"
김 감독은 "트레이드된 신성현이 감독실로 인사를 왔다. 잘됐다고 했더니 '가기 싫어요'라고 하더라"며 "이 세계가 그런 세계 아닌가. 우리가 알게 된 것이 몇 년이냐. 5년이다. 처음으로 나한테 편하게 얘길 하더라. 예전 같으면 긴장해서 말 못했을텐데"라고 제자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던 순간을 떠올렸다.
신성현에게 김 감독은 은인과도 같다. 신성현은 2013년부터 2014년까지 고양 원더스에서 김 감독의 지도 아래 기량을 발전시켰다. 원더스 해체 후에는 무릎 부상으로 드래프트 참가가 무산됐지만 한화 사령탑으로 부임한 김 감독이 신성현을 육성선수로 영입했다.

이용규

올해로 프로 12년 차인 한화 이용규가 반성을 했다. 그는 "지금까지 나는 편하게 야구를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용규는 "이제는 김성근 감독님이 추구하는 야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런 이용규도 김성근 감독을 만나 '부족함'을 느꼈다. 이용규는 "훈련을 해도 해도 끝이 없더라. 근데, 해도 해도 부족한 부분이 보였다. 야구를 하면서 어느 순간 쉽게 생각했던 부분이 없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이 김 감독님을 만나 사라졌다"고 말했다.
깨달음도 얻었다. 이용규는 "김성근 감독님에게 야구라는 것은 그냥 흐르는 것이 없더라.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것이 감독님이다. 경기에서 한 구 한 구를 승부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신다"면서 "감독님의 그런 모습 때문에 팀 더그아웃 분위기도 달라졌다. 선수들의 집중도가 상당히 높아졌다. 1회부터 9회까지 단 한 순간도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다. 선수들 모두 소홀했던 것에 대해 반성한다. 감독님이 원하는 야구를 선수들도 알고 있다"고 전했다.

송신영

한화 이글스에서 만난 김성근 감독
송신영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은퇴를 준비했다고 말한다. 2015년 시즌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김성근 전 감독의 낙점을 받고 다시 한화로 방향을 틀었고, 이곳에서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보내게 된다. 송신영은 김성근 전 감독을 중앙고에서 처음 만났다고 회상한다.
“당시 인스트럭터 신분으로 감독님이 중앙고를 방문하셨다. 그때 내가 공 던지는 모습을 보고 감독님은 ‘야구 선수로서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셨고, 자격 없는 선수에게 커브 던지는 걸 알려주셨다. 직구와 슬라이더 밖에 던질 줄 모르던 내가 감독님 덕분에 커브를 배운 것이다. 그리고 한화에서 감독님으로 다시 만났을 때 내게 나이를 물어 보셨다. 한국 나이로 마흔 한 살이라고 말씀 드렸더니 감독님은 ‘대단하구나. 앞으로 네가 해오던 대로 훈련하고 몸 안 다치게 잘 만들어라’며 감동을 주셨다. 그때 야구 생활하면서 처음으로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감독님의 말씀이 고마운 나머지 잘 보이려고 오버 페이스하다 결국 부상을 입었고 한화에선 줄곧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사실 지난 시즌 마치고 감독님이 내게 코치를 권유하셨다. 미련 때문에 ‘1년만 더 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는데 감독님은 그대로 받아주시더라. 그때 느꼈다. 밖에서 감독님을 평가하는 것과 선수들이 감독님을 생각하는 마음에 왜 차이가 나는지를. 혹사, 퀵후크 등 논란이 끊이질 않았지만 투수들 대부분은 감독님의 상황과 결정을 이해했다. 물론 옛날 야구 방식을 고집하신 부분도 있다. 그래도 야구에 대한 열정과 선수를 챙기고 존중해주는 배려만큼은 김성근 감독님을 따라갈 지도자는 없다.”
송신영은 한화를 떠나면서 김성근 전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그는 “감독님 덕분에 2년 더 야구했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했고, 김 전 감독은 “이럴 줄 알았으면 넥센에서 은퇴하게 놔둘 걸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린 것 같다. 미안하다”며 송신영을 위로했다..


15. 기타[편집]


  • 데이터 야구의 선도자로 알려져 있는 부분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오히려 LG 시절 김성근 경질의 사유로 데이터 야구는 재미없다는 논의가 있었을 정도로 김성근의 데이터 야구는 야구계에서는 옹호자이든 반대자이든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는 사항이다. 다만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미신과 징크스에도 굉장히 민감한 이중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2009년 SK 연승 중 수염을 안 자른 일화도 유명하며, 양말 신는 순서까지 모두 징크스로 잡아놓는 것은 2000년대 기사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내용. 하단의 등번호 38번도 김동엽 전 감독 이야기도 있지만 38 광땡이라는 얘기도 나오는 부분. 옹호자들은 이 부분을 데이터 야구는 물론 이기기 위해서는 모든 부분까지 신경쓴다고 이야기하고, 반대자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전혀 맞지 않는 행보를 하는 이중적인 모습이라고 비판하는 부분이다.
  • 이종남 야구전문기자[42]가 쓴 기사를 배지헌 블로거가 발굴 해내어 옮겨 놓은 것이다. 김성근과 변도사 내용을 보면 도사에게 혹해 극기훈련을 가서 얼음물 입수를 했는데 그걸 지시한 김성근 본인은 쏙 빠져서 열외하다가 의사가 얼음물 찜질이 간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를(당연한 말이지만 아무 상관없다.) 해주니 김성근은 그날 이후 얼음물 입수 매니아가 되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들어 있다.
  • 선호하는 등번호 38번은 절친한 사이였던 김동엽 해태, MBC 감독의 등번호로 김동엽 전 감독이 작고한 후 그를 기리기 위해 달게 된 등번호이다.[43][44] 김동엽은 지금 김성근의 아내인 오효순씨를 소개시켜 줬을 정도로 인연이 깊었다. 여담으로 프로야구 출범 초기 코치와 감독 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쌍방울 감독 시절 91번을 달았던 것처럼 일반적으로 코칭스태프들이 즐겨 다는 70번대 이상 등번호를 달아왔으나 SK 감독 시절부터 최강 몬스터즈 감독을 맡고 있는 현재까지는 줄곧 38번을 달고 있다.
  • 야구에 김성근이 있다면 축구에는 주제 무리뉴가 있을 정도로 둘의 운영 스타일이라든가[45] 말하는 스타일이 닮은 편이다. 다만 무리뉴가 김성근보다는 좀 더 엘리트 코스였고 더 많은 클럽을 돌았으며 무엇보다 무리뉴는 선수들과 친밀하게 지내려 노력하는 감독이다.
  • 전권을 요구하거나 엄청난 훈련량, 정신력을 중시하고 별의별 이상한 규칙을 만드는 건 축구펠릭스 마가트와 공통점으로 꼽힌다. 다만 김성근이 베테랑을 선호하는 것과는 반대로 마가트는 유망주를 선호한다.
  • 일본에서 살던 때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가 워낙 을 좋아해서 항상 만취 상태로 집에 오기 일쑤였는데, 집으로 오는 길에 지나야 했던 넓은 기차 선로에서 그만 열차에 치이는 변을 당했고 시신도 수습하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김성근이 중학교 1학년에 재학중일 때 있었던 일이었고 아버지의 시신을 직접 보기까지 했는데,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 본인 외모 및 패션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하다. 그리고, 실제로 동나이대의 인물들의 외모나 패션을 생각하면 근거가 있다.[46] 젊었을 적 사진을 보면, 전형적인 상남자 스타일의 외모였으며, 여든이 가까운 나이에 여전히 푸쉬업을 그 자리에서 30개 넘게 하며, 지금도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펑고를 직접 때리는게 가능할 정도. 거기에 10년전까지만 해도 주로 입었던 사복 스타일이 청바지나 후드티를 비롯한 힙합패션이었을 정도고(...), 그게 아니더라도 언론에 비춰지는 김성근 감독의 사복 사진들을 보면, 수트든 캐쥬얼이든 그냥 옷을 잘 입는다. 여든이 넘은 현 시점에서도 후드티나 바람막이, 그리고 다양한 디자인의 운동화를 매칭하는 트렌디한 고프코어룩을 코디[47]하는 등 도저히 80대라 볼 수 없는 수준급 패션센스를 자랑한다.
  • 2007년 두산과의 한국시리즈 1차전을 마치고 상대 선발투수였던 리오스에 대해 '정상이 아니다. 9회까지 150㎞/h의 공을 던진다는 게 믿을 수 없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당시 기사를 읽은 두산 팬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야구 팬들은 노망이 났다는 둥 비난 일색이었고, 기자도 말하기가 껄끄러웠는지 단순한 흔들기 발언으로 치부하고 말았는데, 그 뒤 리오스는 일본으로 진출한 후 금지약물인 스타노조롤을 복용한 것이 밝혀져 김성근의 눈이 정확했다는 것이 밝혀졌으나 극성 안티세력들은 이에 대해서는 쉬쉬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되었다. 스타노조롤은 비정상적인 근육회복을 가능케하여 근실패이후 초인적인 회복속도를 보여주며 덕분에 웨이트 증량, 파워 및 민첩성 향상에 탁월한 효과를 가진 약물이며 이 약물이 성적형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빼박캔트. 사실 이미 시즌 중반, SK와의 경기에서 아버지의 장례 때문에 미국에 출국한 이후 당일 오전 바로 귀국해 완봉승을 거뒀기 때문에, 이 모습이 각인된 김성근 감독으로선 결국 약물 복용 의혹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야구 팬들은 장시간의 비행에도 선발 로테이션을 거르지 않은 리오스의 책임 정신과, 적지 않은 나이에도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준 기량에 혀를 내둘렀다. 약물 의혹뿐만 아니라 시즌 중 리오스의 투구 폼에서도 보크 의혹을 제기한 적도 있다. 이 점은 두산의 김경문 감독도 계속 지적했고 한국보다 보크 기준이 매우 까다로운 NPB에서 보크로 판정받으며 투구폼을 고쳤으나, 약물 복용이 들통나 시즌 절반도 못 뛰고 방출당했다.
  • 코나미컵, 아시안시리즈, 한일 프로야구 최강전 등을 출전하며 일본을 꺾고 우승해 아시아 최강팀이 되겠다고 우승 의지를 불태웠지만 3번 다 좌절됐다. 특히 2008년에는 대만의 퉁이 라이온스에게 홈런을 4방 맞고 10:4로 대패했다.
  • 오랫동안 지도자 생활을 한 덕에[48], 후배 지도자들에게 이런저런 지적질을 하고 한국 야구 전반에 대해 견해를 밝히는 인터뷰가 많다. 또한, 기본적으로 기행과 더불어 인터뷰 자체를 빼는 것 없이 매우 화끈하게 발언하기 때문에 자극적인 표제를 좋아하는 기자들에게는 최고의 소스 제공자. 모래알 드립 개미 드립 실패한 투수 등등 수도 없이 많다. 은어로 '앵물'이다.
  • 충암고 감독을 그만둔 후인 1979년에 신일고 감독을 하던 도중, 동양방송에서 야구해설을 맡기도 했는데, 해설 중에 일본어가 튀어나온다는 이유로 바로 해직. 승승장구에 출연해 당시 일화를 말했는데, 투수가 던진 공이 몸쪽으로 꽉차서 들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걸 보고는 이빠이(가득 차서) 들어왔어요!라고 말하고 다음 날 잘렸다고 한다. 결국 그 빈자리에 들어온 사람이 바로 하일성이었다.[49]
  • 2008년 SBS에서 베이징 올림픽 야구 중계방송의 해설위원을 하기도 했다. 이 당시에 칼같이 정확한 예상으로 또 화제가 되었다. 정확한 해설덕분인지 야구를 좀 좋아하는 사람들은 SBS로 놓고 보기도. 탁월한 야구 식견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특유의 웅얼거리는 말투 때문에 일반 시청자들은 그의 해설을 듣기 난감했다는 말도 있다. 지금도 간혹 여러 야구 커뮤니티에서 볼 수 있는 말투인 '마, ~~~하면 되지 시프요...'가 바로 여기서 나왔다.
  • 2013년 5월 17일 SBS ESPN에서 아들인 김정준 해설위원과 함께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KIA:LG 경기에 대한 부자(父子) 해설을 진행하였다. 1년 뒤 6월 7일에도 똑같은 구장에서 동일한 팀의 경기의 객원 해설을 하기도 했다.[50]
  • 2009년 10월 22일 KIA 타이거즈와 한국시리즈 5차전 때 경기 도중 선수단을 철수시킨 것으로 인해 한국시리즈 감독 퇴장 1호라는 흑역사를 기록했다. 이것은 2009시즌부터 신설된 '스피드업 규정'에 의한 것으로, 선수단 일부 혹은 전부 철수 시 감독은 즉시 퇴장당하게 되어 있다.
  • 한국시리즈 역사상 2번 있었던, 시리즈를 끝내는 9회말 홈런의 희생양이다. 2002년 LG 감독 당시 마해영의 백투백 홈런, 2009년 SK 감독 당시 나지완의 결승 솔로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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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던 시절에는 그가 직접 지은 책이나 그에 관한 책들도 많이 나왔다. 《야신 김성근, 꼴찌에서 일등으로》,[51]《9회말 리더십》, 《김성근이다》, 《9회말 리더십》,[52] 《김성근 그리고 SK 와이번스》,[53] 《세월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54]
  • 2010년 10월 30일, 뇌경색으로 쓰러진 김동재 KIA 수비코치를 돕기 위한 일구회 올스타와 천하무적 야구단과의 자선경기에 선발 투수로 등판했다. 무려 41년만의 등판. 포수석에서는 김경문 두산 감독이 그의 공을 받아 줬다.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한 타자만 잡고 안타 3개를 맞은 뒤[55] 2점을 주고 자진해서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 2010년 11월 9일 KBS 승승장구에 출연, 그의 야구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초대손님이 나오는데 그 사람은 하일성이었다. 김성근 감독은 중간중간 '이 사람 왜 불렀어?'라고 농조로 툴툴거렸다. 한편 이날 김성근 감독은 자신이 한국 신문에 최초로 연속사진을 도입하게끔 한 인물이라고 설명했으며, 선수시절로 돌아가면 이대호와 가장 붙어보고 싶다고도 밝혔다. 그 외 탐나는 선수로는 류현진봉중근을 꼽았다. 또한 자기가 이대호와 류현진을 맡게 되면 그들의 살을 뺄 것이라고 했다.[56]
  • 2010년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 스포츠 부문을 수상하였다. 스포츠 지도자로서는 최초라고 한다.
  • 2008년 9월 3일 김응용에 이어 2번째로 한국프로야구 감독 통산 1,000승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9년 5월 10일 김응용에 이어 2번째로 한국 프로야구 감독 통산 2,0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뒤이어 2011년 5월 4일, 대전 한화전에서 7대 4로 이기면서 또 김응용에 이어 역대 감독 중 두 번째로 1,200승을 달성하였다.
  • 2011년 8월 들어 재계약 문제로 구단과 충돌을 일으켰고, 결국 2011 시즌을 끝으로 물러나겠다는 기습 인터뷰를 했다. 당시 SK 팬들은 한마디로 패닉에 빠졌다. 배은망덕은 프런트 종특이라느니, 인천예수를 골고다 언덕으로 내몰았다느니, 신생 NC 다이노스 1기 팬 모집이니 뭐니 하며 허탈감과 분노를 표출했다. 이후, 전설이 된 그 사태로 이어졌다. 그러나 김성근 열풍이 식은 시점에서 찬찬히 살펴보면 이건 김성근이 조용히 떠나는 대신 작정하고 언플해서 구단과 이만수 감독을 한꺼번에 엿 먹인 것이었다. 제대로 엿을 먹은 SK 프런트는 인터뷰 발표 바로 다음날인 8월 18일자로 김성근을 경질했다.
  • 야구계 기담으로 김성근의 저주가 있다. 본래는 "김성근을 버리는 팀은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김성근 없으면 안된다)"는 의미였지만, 지금은 "김성근의 재임 시절 저지른 민폐질로 인해[57] 구단과 후임 감독들이 그 여파를 치우느라 고생한다"는 뜻으로 바뀌었다.
  • 야인이었던 2011년 11월, 동서식품의 핫초코 미떼 CF에 출연했다. 광고 내용은 야구시즌이 끝나 을씨년스러운 야구장[58] 관중석에서 김성근 감독이 보온병에 가져온 핫초코를 꼬마와 나누어 마시면서 '야구하고 싶다'는 꼬마의 말에 '나도요'라고 답했는데,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어째 서글프게 들린다는 평도 있었다. 이 때 꼬마가 "할아버지 야구 잘하세요?" 라고 묻자 김성근은 "쪼끔" 이라고 답했다. 그런데 광고 크리에이터가 SK 와이번스의 팬이어서 김성근 감독이 경질되자마자 가서 매달렸는데 계속 고사하는 것을 3달 동안 삼고초려해서 섭외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59] 여담으로 이 꼬마는 김성근 감독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했고, 신일고등학교 야구부를 거쳐 2023년 신인드래프트에서 NC 다이노스의 지명을 받았다. 이 꼬마가 신인드래프트에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김성근 감독은 이때의 인연을 상기시키면서, 시간을 내서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이후 2023년 2월, 유퀴즈에 출연한 김성근 감독과 목지훈 선수가 무려 12년만에 재회했고, 김성근은 목지훈에게 선물을 준비하고 손수 피칭지도를 했다. 녹화 이후 김 감독은 목지훈 선수와 목선수의 어머님과 함께 식사자리를 가졌다. # 여담으로 은퇴 후 출연중인 JTBC 최강야구 2023 시즌 시작을 앞두고 김성근 감독 버전의 티저영상이 공개되었는데, 해당 광고의 오마주로 보인다.
  • SK 감독 시절 올스타전에서 쇼맨쉽으로 몸무게 순으로 라인업을 짜곤 했다. 그 결과 통산 도루 9개인 이대호가 1번 타자 출장, 김동주가 2번 타자 출장. 이종욱, 박기혁같은 주력이 되는 타자들은 7, 8번으로 배치했다. 그리고 이대호는 기대에 부응하여 출루한 후 도루를 시도하다 도루사를 당했다. 다른 건 몰라도 팬들의 기대, 특히 재미만큼은 확실하게 부응했다.
  • 2012년 11월 22일, MBC 새 프로그램인 <스타로드토크 명사십리>에 첫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시작부터 예미넴 스타일로 등장. 초대 손님으로 장미란, 김재현, 마해영이 나왔으며 야구 시작할때부터 지금까지 전반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 고양 원더스의 구단주 허민이 김 감독의 생일선물로 S클래스선물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원더스를 이끌어준 전문가의 고마움과 함께 차 안에서 편안히 야구에 대해 전념하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한다. 근데 김성근 감독은 운전면허가 없다. 야구 외에 다른 일로는 시간을 좀처럼 쓰질 않아서 그렇다고 한다. LG 감독 시절에도 성동구 성수동 자택에서 지하철을 타고 잠실야구장을 오가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고양 때만 해도 70을 넘긴 고령이었으니 면허를 따기도 무리에, 운전기사를 고용하는 건 본인 성격에 더 안 맞았을 것이다.
  • 어느 야구 감독들이나 다 그렇지만, 서울특별시 이외 지역 연고팀의 감독을 맡을 경우 자신의 거주지를 연고지로 옮긴다. 다만, 김성근 본인 혼자만 살 집을 마련한다. 과거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시절에도 구단이 마련해 준 전주시 내 한 아파트에서 혼자 살았고,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에는 송도국제도시에 홀로 사는 자택이 있었다. 마지막 프로 커리어였던 한화 이글스 감독 재임 때도 대전광역시 내에 따로 집을 마련해서 살았다고 한다. 여러 팀을 전전하며 혼자 살아온 이력이 어마어마하기에 웬만한 살림은 본인이 다 할 정도라고 한다. 물론 부인 오효순 씨가 주기적으로 김성근이 사는 집에 와서 살림을 대신 하고 가며, 시즌이 끝나고 동계훈련 출발 전까지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 자택으로 돌아가서 생활한다고 한다. 참고로 성수동 자택은 삼성 라이온즈 감독 취임 직후(1990년 12월)에 마련한 것이라고 한다.[60]
  • 2011 시즌 종료 후 스토브리그 때 한 LG 트윈스 팬이 김성근 감독의 LG 복귀한다고 터트린 거짓 루머 때문에 야구 팬덤 한정 '포도주스'라는 은어가 생겼다. 자세한 것은 포도주스 문서 내의 해당 항목 참조.
  • 연습량이 어마어마한 감독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 감독의 입에서 "너는 그만 연습해도 된다"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악바리였던 선수가 최동수였다. 일례로 최동수는 하룻밤에 스윙을 5,000개씩 했고, 스윙이 끝나고 나면 배트를 쥔 손가락이 펴지지 않아 남이 손가락들을 펴 줘야 배트를 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김성근 감독도 손수 최동수의 손을 펴 주었으며, 이에 최동수는 2001년부터 김성근 감독을 통해 프로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하게 된다. 최동수 본인의 말에 의하면 매일 화장실 변기를 붙들고 피를 토하던 시절이었다고. 2010년 최동수가 LG에서 SK에 트레이드되었을 때 오히려 최동수는 김성근 감독과 함께할 수 있게 되어 기뻐하기도 했다. 이진영 역시 신인 시절 너무 힘들어서 울면서 공을 받았다는 사례도 잘 알려져 있다. 류택현은 김성근 감독을 통해 커브를 전수받아 2001년부터 중간계투로 뒤늦게나마 두각을 드러냈다. 물론 이런 과한 연습량과 혹사에 망가진 선수가 한 둘이 아니나, 결국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빛을 본 선수도 꽤 있었다.
  • 2013년 7월 18일 SBS ESPN 베이스볼 S돌직구라는 코너에 출연해서 9개 구단을 평가하였다.
  •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하다. 김정준에 대한 평가는 '아버지가 잘생겼다' 였으며 본인의 자서전에서도 본인의 젊은 시절 외모가 상당했다는 내용이 꽤 자주 언급된다. 물론 젊은시절 사진이 꽤 남자다운 매력이 있는데다 당시에는 180cm가 넘는 장신은 드문 편이었으니 자부심을 가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 자서전에선 자신의 아내와 딸들에 대해서도 상당히 예쁘다고 언급하는데(과거 결혼사진을 보면 김성근 감독의 아내는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한 미인이다) 가족들의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한 모양. 이것이 김성근 감독의 신혼때 사진이라고 한다.
  • 최훈이 한때 김성근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 정우람 혹사 문제로 글과 카툰을 올렸다 논란이 된 적이 있었으나 논란의 발단이 된 카툰 1 2 카툰 2. 이쪽은 논란이 가라앉은 다음에 올라왔다. 경질사태 이후에는 삼국전투기삼국전투기 외전에서 SK 프론트를 비꼬고 김성근 감독이 직언을 하나 쫒겨나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 하지만 이는 한화 감독 부임전 이야기로 김성근이 쌍팔년도 야구를 시작한 2015년부터는 가장 앞장서서 김성근을 비판하고 있다. 2015년의 '이저씨'라는 만화와 2016년 414 대첩 이후 올라온 프로야구카툰은 이례적일 정도로 특정인을 비판하는 카툰이다.
  • 2014년 9월 25일에는 JTBC 뉴스룸 목요 인터뷰, SBS 나이트라인 초대석에 각각 출연하여 고양 원더스 해체하면서 소감 인터뷰를 했다. JTBC 인터뷰, SBS 인터뷰 이후 10월 27일 한화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다시 한 번 JTBC 뉴스룸 손석희 앵커와 전화로 인터뷰를 했다. JTBC 2차 인터뷰
  •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내정되면서 사실상 최초로 팬들의 강력 요구에 의해서 임명된 감독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한화 이글스 프런트는 김응용 감독과 계약이 끝난 후 차기 감독에 김성근 감독을 임명할 생각이 없었다. 이런 프런트의 의중을 알게 된 팬들은 이에 반발. 아고라에 청원하고, 유튜브 동영상을 제작하고, 팬들이 단체로 한화 이글스 홍보팀에 수백통의 전화를 걸고, 심지어 한화 본사에까지 전화를 걸어 그 전화가 회장 비서실까지 닿았다고 할 정도였다. 본사 1인 시위는 덤. 평소 신문을 보는 김승연 한화 구단주가 이를 모를리 없었고, 결국 구단 프런트에 김 감독 임명을 지시했다고 한다.
  • 2004년 이치로를 예로 들며 이승엽 및 메이저리그 진출자들을 비판하는 인터뷰를 했다.
  • 김성근이 한미일 야구를 비교하는 인터뷰
  • 2015년 4월 2일, 김성근 감독과 고양 원더스 선수들을 그린 파울볼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되었다. 마지막에 하송 원더스 단장이 눈물의 해체 선언 때 등장하지만, 정작 구단주인 허민은 한 번도 안 나온다. 그리고 고양 원더스가 후에 외국인 선수들만을 엄청나게 기용해 왔다는 게 알려졌는데, 외국인 선수들이 플레이하는 모습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데럴 마데이의 혹사와 같은 어두운 면을 다루지 않는 등 논란이 많은 영화이다. 이로 인해 안티 김성근 성향이 강한 자들은 이 영화를 김성근을 치켜세우려고 만든 프로파간다 영화라고 비꼰다. 설재훈과 안형권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며, 원더스 해체 후 각각 SK와 롯데에 육성선수로 입단했지만 설재훈은 2015시즌 도중, 안형권은 시즌 종료 후 정리되었다.
  • 2015년 5월 4일에는 김성근 감독의 SK 시절 용병술을 주제로 손자병법과 삼국지를 비교한 야구병법 택재의 기술이 SBS 스포츠+에서 방영되었다. 영상 물론 지금 보면 웃기지도 않은 헛소리.
  • 한화그룹 광고에 출연했다.
  • 2015년 디시인사이드에 갤러리가 생겼다.
  • 2012년 10월 14일 고양 원더스 감독 재직 중 같은 연고지를 쓰고 있는 농구단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의 홈 개막전에서 시투를 했던 적이 있다.
  • 노장 선수들의 복리후생에 앞장서는 감독이다. 노장 선수들을 영입하는 강박증 덕분이다. 물론 김성근 본인의 돈이 아닌 구단 돈이 나가는 일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넥센에서 혹시 포텐이 터질까하고 박병호 덤으로 데리고 왔던 심수창. 결국 2009년 이후 부진이 쭉 이어지며 보호명단 제외, 롯데에서 혹시나 하고 데리고 갔으나 역시나 부진. 그럼에도 자신만만하게 FA를 신청했다가 미아가 되었지만 우리 감독님께서 선수의 생계를 위해 13억이라는 거금을 주고 데리고 왔다. 그나마 이 쪽은 전천후 스윙맨으로 굴려 혹사당한 탓에 막바지 무너지긴 했지만 나름 혜자 계약으로 볼 수도 있는 반면, SK 시절 애제자라고 하는 송은범을 거금 34억을 주고 데려왔지만 성적은 시궁창. 정작 이 쪽은 김성근이 짤리고 투심을 장착하자 날아다니며 현재까지 나름 잘 던지고 있다. 이 선수들 FA 총액이 47억인데 한물 간 두 선수를 위해 거금을 한화라는 기업을 압박해 내놓게 하다니 노장 선수 사랑은 정말 대단한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2년 동안 김태균 조인성을 제외하고 자기가 원하는 선수를 거금을 주고 데려왔다. 정우람은 90억, 권혁은 32억, 배영수는 21억, 로저스는 22억 그러나 현재 정우람은 개점휴업상태이고 배영수는 삼성을 나오면서 멋지게 입을 털고 마운드에서도 탈탈 털렸다. 권혁은 김 감독의 총알받이가 되고 휴식 대신 뺨 툭툭을 통해 힘을 얻고 있다. 사실 김성근이 영입하는 베테랑 선수들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편인데, 조인성 같이 효과를 톡톡히 본 베테랑이 있는 반면[61] 권용관 같이 오래 기용하면 안 될 선수를 풀타임으로 기용하다[62] 성적도 나락으로 쳐박게 되었다.
  • 2017년 한화 이글스 감독 해고 직후, 신일고 시절 지도한 제자가 울산공고 감독을 맡고 있자, 울산광역시로 내려갔다.[63] 그리고 울산공고 야구부를 매일 오후 찾아와 지도한다는 기사가 뉴스에 떴다.
  • 축구감독 김호와 상당히 흡사한 점이 많은데 둘 다 과거에는 명장으로 추앙받았으나 대전광역시를 연고지로 한 스포츠팀 감독을 맡은뒤 명장이라는 이미지에 가려졌던 어두웠던 이면이 드러나면서 추락했다.
  • 한화 감독 해임 이후 박한 평가를 받다가, 2019년 후반기에 롯데 자이언츠 감독이 공석이 되면서 커뮤니티들에서는 차기 롯데 감독으로 추천받는 감독 1순위로 되고 있다. 물론 노리타들의 개입이 있었겠으나, 프로팀이 맞나 싶을 정도의 실책과 수비를 보여주어 한화와 꼴찌를 다퉜는데, 김성근 전 감독이 수비 중심의 야구로 유명했고 해이해진 팀 기강과 정신력을 잡아줄 최적의 인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전례로 봤을 때 김성근의 야구관이 롯데 프런트와 상극이라 감독으로 선임되어도 잦은 마찰이 예상된다. 이후 키움 히어로즈 수석코치였던 허문회가 차기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롯데 감독 떡밥은 종결.
  • 말년에 부동산 대박이 났는데, 김성근 감독이 약 30년 정도 거주한 집이 성수동 재개발계획 부지에 포함되어 있어 결국 자택을 건설사에 135억 원에 매각해 부동산 대박이 났다. 이 한 방으로 한평생 야구 감독해서 번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이 와중에 건설사에서 집을 빨리 안 파는 김성근을 압박하기 위해 김성근이 알박기를 한다는 식의 기사를 내서 압박하는 촌극이 있기도 했다. 김성근 측은 성수동에 계속 살고 싶은데 마땅한 매물이 없어서 이사를 못 가고 있으며 일 때문에 한국과 일본을 오가느라 건설사 사람과 만날 시간이 없어 협상이 늦어진 것이라고 해명. 상식적으로 30년동안 알박기를 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므로 여론은 김성근의 손을 들어주었다.
  • 여튼 이런 압박이 효과가 있었는지 결국 상술한 대로 135억원에 집을 팔긴 팔았다. 이후 2020년에 성수동1가에 위치한 배우 이시영이 내놓은 건물을 80억원[64]을 주고 2동을 구매하여 1동은 아내 명의로 두었고 1동은 본인 명의로 두었다. 부인 오효순 씨가 주도해서 구입했다고 하는데 2010년대 후반 수익형 부동산의 트렌드인 꼬마빌딩을 구입한 걸 보니 부인은 꽤 재테크 잘 아는 복부인인 듯. 김성근은 과거 강연을 다니던 시절 강연으로 60억을 벌어 소득세로만 3억을 냈을 정도로 SK 감독 이후에 많은 재산을 벌었다.
  • 야구감독으로서는 드물게 전용 응원가가 있었다. # 원곡은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 원래 좋아하던 음악이었다는 듯.
    • 이 응원가는 여러 인터넷 방송에서 도네이션 밈으로 사용되고 있다. 도네받은 영상이 잘 나가다가 갑자기 위 응원가가 나오는 게(통칭 변화구) 주 패턴인데, 원래는 트위치 스트리머 케인[65]의 방송과 골수 한화팬으로 유명하던 매직박 방송 정도에서나 쓰이던 밈이었으나 2020년 후반기 들어 케인과 친분이 있거나 한화를 응원하는 스트리머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추세다. 이 응원가가 도네로 재생되는 경우 스트리머를 불문하고 채팅창이 "ㅖㅖㅖㅖㅖㅖ"로 도배된다.
    • 심지어 같은 한화 소속의 스포츠단인 한화생명e스포츠의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2021년 롤드컵 진출 기념으로 데프트 버전도 만들었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다.#
  • 2021년 본인과 전성기를 같이 보냈던 SK 와이번스신세계그룹에 인수되는 것에 대해 "삶의 일부분이 없어진 느낌"이라고 말하면서 충격을 많이 받았다고 밝혔다. 비록 SK와의 마지막은 좋지 않았지만 본인에게 영광을 안겨준 팀이고, 당연히 좋은 추억도 많이 남겼을 터인데 그 야구단이 없어진다는 게 못내 아쉬웠던 듯하다. 더불어 경영상 위기도 없는 모기업이 너무 쉽게 바로 매각을 결정하는 걸 보면서 기업이 야구라는 스포츠로 쌓아온 과정을 너무 경시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와 더불어 야구단은 모기업에 의존하지 않고 자생을 해야 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 그러나 삼성 라이온즈의 사례를 보면 아직까지 스포츠팀의 자립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2022년 11월 은퇴 이후 인터뷰에서 10여년간 암에 세 번이나 걸렸으나 팀과 주변을 위해 알리지 않았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한화 시절 경기중 급작스런 컨디션 악화로 덕아웃을 떠나거나 출근을 못 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암이었다면 그런 급작스런 이상이 설명이 되는 부분.[66] 공과를 떠나 노구를 이끌고 건강까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지휘봉을 놓지 않았다는 점은 경이로운 대목. 물론 뇌경색 이후 여러가지 문제가 생겨 롯데 시절 최악의 평가를 받은 백인천도 있지만[67], 김성근은 비슷한 나이에도 꽤 정정한 편이기도 하다.
  • 근성론 강조, 혹독한 훈련, 선수 혹사 등 특유의 지도 스타일이 야구팬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한테도 컬트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인터넷상에서 자주 소환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주로 야구선수가 사건사고를 일으키거나 국가대표팀이나 특정 팀이 부진한 성적을 올리면 사람들이 농담식으로든, 진지한 의견이든, 푸념식이든 지금 이 상황에서는 김성근 감독이 필요하다면서 의견을 제시한다.

15.1. 악성 팬덤[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노리타(김성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6. 평가[편집]



파일:김성근 프로 감독 경력.jpg

한국프로야구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공과 과가 갈리며 사람마다 다른 평가를 내리는 인물로, 그 누구보다 명암이 뚜렷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KBO 리그를 통틀어 남긴 족적이 매우 크기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20세기까지의 올드스쿨 스타일을 상징하는 감독[68]으로 평가된다.

OB, 태평양, 삼성, 쌍방울, LG, SK, 한화 총 7개팀의 감독을 맡았다. 그러나 각 팀 별로 받은 평가가 천차만별이라는 점도 흥미로운 점이다. 태평양, 쌍방울, LG, SK, 고양 시절에는 신구조화가 일어날 정도로 선수풀도 어느정도 있어서 좋은 평가를 받아서 한때 김응용이 지어준 '야신'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으나 삼성 시절에는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과 선수풀도 충분한 삼성에서 선수단 불화, 이중오더로 나락을 갔고 리빌딩의 대가로 추앙받아 부임한 한화 시절에는 리빌딩 하랬더니 노장 선호와 투수 혹사로 리빌딩 따위는 내팽개치고[69] 선수단을 쑥대밭으로 만들 정도로 나쁜 점이 부각되며 팀 팬들에게 매우 나쁜 평가를 받고 세이콘, 살완마라는 부정적인 별명으로 불리는 것에서 김성근의 평가가 얼마나 갈리는 지 알 수 있다.

초창기 프로야구 시절부터 불펜을 중심으로 한 야구를 구사했고 이는 2000년대 후반 SK 감독시절 이른바 '벌떼야구'로 불리기도 했다. 감독 커리어 전반기에는 태평양, 쌍방울을 맡아 특유의 쥐어짜기식 혹사 운영으로 하위권이었던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는데 성공하여 하위권 팀의 성적을 끌어올리는데 능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OB, 삼성 등 강팀을 맡고도 성적을 내는데 실패하기도 했다. 특히 쌍방울 시절은 가난하고 힘든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고 하위권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다는 점에서 그의 개인 팬들에 의해 '김성근의 쌍방울 신화'로 포장되기도 했다. 그러나 쌍방울이 무척 가난했다는 김성근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당시 쌍방울은 오히려 선수 연봉 총액 1위 구단이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지기도 했다. 재임 기간 동안 마른 수건 쥐어짜듯이 선수들을 혹사시키기 때문에 그가 퇴임한 후 예외없이 암흑기에 빠져들었다. 2002년 LG가 정규순위 4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해 3위, 2위를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포스트시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기 전까지 OB, 태평양, 삼성, 쌍방울을 거치는 동안 포스트시즌만 나가면 번번히 탈락했기[70] 때문에 단기전에 약한 감독, 새가슴 감독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페넌트레이스와 포스트시즌 모두 뛰어난 성적을 거두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투수 운영 방식과 단기전 승부사 기질을 가진 명감독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SK 시절 거둔 뛰어난 성적 덕분에 이면의 모든 부정적인 면들이 가려진 채, '야신'이라고 불리며 야구계 안팎에서 추앙받으며 수많은 기업과 대학을 비롯해 심지어 청와대에서까지 초청받아 리더십과 성공론, 인생론에 대한 강연을 했다. 또한 그를 추종하는 팬덤이 생겨나기도 했다.

긍정적으로는 승부사 기질을 통하여 팀의 전력을 짜내는 방식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과거부터 이런 윈나우식 운영으로 약팀을 맡아 호성적을 낸 경험이 꽤 있었으며, 언론플레이를 통한 좋은 이미지와 더불어 매우 높은 현장 평가를 통하여 30년동안 한국프로야구의 각종 팀들의 감독을 맡았다. 그의 전성기인 SK 와이번스 시절에는 스타 선수를 발굴하는 안목으로 김광현, 최정, 정근우, 김강민, 박정권 등의 스타 선수를 발굴하였고 이후 왕조를 창건하기까지 했으며, 정신력을 강조하는 야구로 다른 많은 야구인들에게 귀감이 되었다.[71]

그러나 현재의 야구팬들 다수는 김성근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는데, 그 시발점이 된 것은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다시 야구계에 복귀하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부터다. 이전부터도 김성근에 대해서는 실적 이면에 스타일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있어왔는데, 이 시기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 온갖 비매너 플레이, 꼼수, 편법, 심리적 도발을 동원하는 비열하고 더러운 야구, 팀을 철저하게 쥐어짜서 거덜내는 운영 스타일, 선수를 소모품으로 여기고 단조"투수는 던질수록 강해진다"는 자기합리화 야구철학으로 인한 선수들의 혹사와 그로 인한 부상,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식의 좋지 않은 언행으로 끊임없이 상대팀을 도발하고 흔들기, 프런트의 권한을 전부 가져가 자기 양껏 운용하면서도 항상 프런트와 마찰을 빚는 독선적이고 모난 성격, 심한 뒤끝으로 팀을 떠난 후 자신이 몸담았던 팀을 극렬히 비난하는 행태 등으로 야구계 안팎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그런 와중에도 계속된 언플로 그는 항상 프런트라는 기득권에게 쫒겨나는 강직한 야구인으로 포장되었다. 김성근이 경질되고 난 후 팀은 혹사로 망가진 선수들과 은퇴할 시기가 지난 노장들만 남은 황폐한 상황이 된다. 유망주들은 트레이드로 유출되어 키울만한 자원도 없다. 게다가 밖에서는 김성근이 끊임없이 팀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팀을 더 흔들어 놓는 상황이다. 김성근의 후임 감독들[72]은 이렇게 어려운 암흑기 상황의 팀을 맡아 이끌게 되고, 당연히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렵다. 그러면 김성근의 추종자들은 "거봐라 역시 김성근 아니면 안된다"는 식으로 언플을 했다. 물론 김성근이 2017년 한화에서 물러난 직후 2018년 후임 감독으로 한용덕이 오자마자 10년 동안 꼴찌와 하위권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한화가 11년만에 단숨에 포스트시즌까지 진출했고, 이후 추종자들은 많이 없어졌다. 물론 남은 추종자들이 한용덕의 가을야구 진출을 보고 김성근의 유산덕이다라고 포장하는건 덤이다.

김성근은 그가 활동하던 20세기식 야구관을 타협하지 않으려 하였으며, 이러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점 때문에 위에서 전력 짜내기의 연장선으로 현대야구에서 용납되지 않는 투수 혹사가 발생하였고, 이 과정에서 한화 이글스의 살려조를 포함하여 박정현, 이동현, 전병두 등 여러 선수들의 커리어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 또한 좋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계속된 언론플레이로 인하여 팬들에게 인식이 매우 나빠졌다. 올드스쿨 스타일 감독의 대표주자답게 스타 선수들을 발굴하는 안목은 높았지만 스스로 시스템을 만들어서 유망주를 육성하지는 못했으며, 투수 혹사 성향과 겹쳐져 김성근의 부임 이후 팀들의 성적이 나빠지는 현상인 김성근의 저주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특유의 승리지상주의 매니징 스타일로 인하여 타 팀 팬들에게 여러 비매너 논란과 구설을 만든 것도 그의 평가 하락에 한몫했으며 결국 구시대적 야구관을 통하여 성적을 내지 못한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이후 과거의 명성을 잃고 평가가 폭락하였다. 이후 타협하지 않는 스타일의 연장선으로 프런트와의 갈등을 빚으며 결국 한화 이글스의 감독을 불명예스럽게 사퇴하였다.

한화 감독에 부임하면서 그 동안 가려져 있던 김성근 야구의 문제점들인 비열하다 못해 추악한 야구, 살려조로 대표되는 혹사, 마구잡이식 기용, 쥐어짜기 운용, 구시대적 훈련 방법 등 그동안 가려져 있었던 추잡하고 역겨운 민낯짝이 완전히 드러나면서 지금까지도 야빠들의 무수한 비난을 받고 있다. 또한 그간 묻혀있던 김성근의 각종 어두웠던 과거 행적들이 속속 다시 밝혀지게 되었다. 동시에 그동안 저평가되어있던 후임 지도자들에 대한 재평가도 이뤄지고 있다. 이는 아래 두 인용문으로 잘 설명된다.

"LG 김성근 감독이 워낙 잘했어요 '신이 아닌가' 그렇게 느낄 정도로" - 김응용


사실 이것은 김응용 당시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김성근을 이긴 뒤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김응용은 패자를 배려하기 위해 한 말이라고 밝혔지만,김응용 본인의 의도와 다르게 이 말은 김성근 팬들에게 윤색되어 김성근을 추앙하기 위해 오랫 동안 인용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실제로 후속 인터뷰로 "그 신도 여러 가지의 이 있잖아요."라는 후세에 재평가되는 희대의 명언을 남기며 본인을 더 띄우기 위한 의도의 인터뷰였다. 김성근 팬들이 주장하는 야신이라는 단어는 김응용 감독에게 더 어울리는데 말이다. 사실 그 김응용도 한화에서의 행보는 심각하기 그지 없긴 했다.

그리고 이후...

'김성근 야구'는 몰인간적이고 폭압적이다. 그리고 비민주적이다. 자율화와 인간 중심이란 우리 사회의 소중한 가치를 그는 송두리째 부정했다. … 그는 한국 야구를 황폐화시켰고, 리그가 지향해야 할 가치관을 흔들어 놓았다. 그는 독단적이고 획일적이고 강압적이다. 한국 야구에 더 이상의 불행이 있어서는 안 된다.

[김대호의 야구생각] '김성근 야구'의 실패가 주는 교훈


이 두 기사에서 설명하는 김성근이라는 인물은 모두 동일 인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2002년에 김성근을 바라보는 시선과 2016년에 김성근을 바라보는 시선이 확연히 바뀐 셈이다. 선수를 몰아붙여 선수에게 내재된 잠재력을 극대화 시켜주는 능수능란하고 성실한 지도자라는 긍정적 평가와 승부에 지나치게 집착하느라 선수를 혹사시키고 황폐화시키는 강압적 꼰대라는 부정적 평가를 동시에 받았던 것이다. 김성근 감독과 당시 한화 이글스의 팀컬러가 상극이었다는 후일의 평가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렇게 한국에서 이미지가 매우 나빠졌지만 야구에 대한 열정으로 계속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고 싶었던 김성근은 결국 본인이 가장 익숙하게 느끼는 일본프로야구에서 1군 코치[73]까지 부임하였으며, 80세가 다 되어가는 말년까지 현역 지도자로 활동하였다.[74] 이러한 면모를 통하여 현재는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상당수의 현대야구팬들에게조차도 야구에 대한 열정 하나만큼은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점 때문인지 그와 함께한 거의 대부분의 야구인들, 특히나 그를 거치며 선수 생활에 악영향을 받은 선수들도 그에 대하여 좋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75]

2022년 프로리그 지도자로서는 완전히 은퇴했고, 이 해 하반기에 JTBC의 프로그램인 최강야구최강 몬스터즈 2대 감독을 맡으면서 다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이 아니라 다큐가 될 것이라는 우려와는 달리, 기존의 진지한 분위기에서 많이 벗어나 의외의 예능감과 함께 편안하면서도 프로다운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76] 최근에는 야구와 선수들을 대하는 진지한 모습[77] 으로 인해 시청자들에게 예능의 즐거움만이 아닌 현실이면서도 드라마 같은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는 호평도 생겨났다. 선수들이 존경하는 감독상, 사회에서 존경받을 수 있는 웃어른은 어떤 모습인가를 보여준다는 측면이 있다.


16.1. 승리지상주의[편집]


김성근의 매니징 스타일을 요약하자면 승리지상주의 야구라고 볼 수 있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어떠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다. 명성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도구로 사용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이러한 행태 때문에 온갖 구설수와 비판에 시달리면서, 더욱 성적에 집착했다.

과거에는 이러한 방식이 꽤 잘 통용되던 시기도 있었다. 김성근이 한국으로 영주귀국한 1960년대에는 인기에 힘입어 실업리그가 출범은 했지만 명색이 돈 받고 야구한다는 선수들이 변화구는 구경도 못 해본 선수가 태반에, 체계적인 몸관리 등도 제대로 모르던 때였다. 그 시절 김성근이 일본에서 배워온 방식은 무식하게 많은 훈련량으로 밀어붙이는, 지금 와서 보면 주먹구구나 다름없는 방식이었으나 그마저도 못 되던 프로 이전 실업야구 수준에서 당시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혁신적이었고, 덕분에 실업 시절 명선수로서 다승왕, 국가대표로 이름을 날렸으며 감독으로서도 초창기 프로야구판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혹사 감독이지만, 이건 딱히 김성근만 그런 게 아니라 그 때는 정말 누구나 다 그랬다. 장명부가 427이닝 30승을 거둔 게 프로야구 2년차고, 최동원이 한국시리즈 7경기 중 5경기에 올라온 게 3년차였다. 미국이나 일본이라고 다를 것도 없는 게 저 당시 에이스인 이나오 카즈히사, 게일로드 페리같은 선수들은 지금 와선 상상도 할 수 없는 300이닝을 척척 먹어줬고[78], 마지막 이닝만 책임지는 전문 마무리 투수가 최초로 등장한 것이 당시 한국프로야구 출범 7년차였던 1988년의 데니스 에커슬리이었을 정도로 마무리 투수가 3~4이닝 이상을 책임지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다. 또한 그 당시에는 스포츠 의학, 관리같은 개념도 없었고 애초에 한국에서는 프로스포츠로 평생을 먹고 살 돈을 번다는 개념이 희박해서 젊었을 때 잠깐 하다가 금방 은퇴하고 소속팀 모기업에 취직하거나, 모아둔 연봉으로 가게를 열어 자영업을 하거나 하는 그런 시절이었기에 관리를 하는 방법도 몰랐고, 할 필요조차도 없었다.

김성근처럼 선수를 굴렸다간 30대 찍기도 전에 은퇴하게 되지만 그 땐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은퇴하는 게 당연한 것이었기에 당시 기준으로는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샌디 코팩스를 최연소 명예의 전당 헌액자로 만든 월터 올스턴,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를 3일 텀으로 6번씩 완투를 시킨 토미 라소다같은 감독이 메이저리그 명감독으로 칭송받던 시절이었다. 그땐 누구나 애초에 선수를 제대로 휴식을 주어가며 관리를 해 본 적이 없고, 그래야 할 필요도 몰랐으며 그게 문제인지도 몰랐다. 야구가 아니라도 당시 노동자들은 일주일에 하루도 휴일이 없이 달에 2일 혹은 아예 못 쉬거나 일일 근로시간이 14~15시간을 넘기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심지어 그게 불법도 아니었다. 당시 노동자들은 발암물질인 석면을 뭔지도 모르고 마스크도 없이 일하면서 마구 흡입해댔고, 야구도 그런 것이었다. 물론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모두 터무니없는 일들이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다. 어떤 사람의 행적은 반드시 그 사람이 살아온 시대적 배경과 함께 평가되어야 한다. 지금 기준으로 그 당시의 김성근을 평가하는 것은 베이브 루스타이 콥 같은 100년 전의 위대한 선수들을 변화구도 커브 한 종류밖에 없었던 시대에서 활동한 주제에 전설 대접 받는 범부, 세종대왕을 민주주의도 모르는 구시대적 왕조 체제 하의 독재자라고 평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에 태어나서 그들의 시대에 최고가 된 그들을 세상은 아무도 무시하지 않는다.

그 시대에 김성근의 방식은 몸관리는 커녕 프로의식이 덜 정착되어 그냥 타고난 재능으로 야구를 하며 남는 시간에 술 먹고 노는데 정신이 팔려 있던 많은 선수들에게는 필요한 것이기까지 했는데, 이것은 사실 지금도 어느 정도 해당되는 얘기다. 손민한이 임페리얼 위스키에 떡이 돼서 토하고 나가 완봉했다는 이야기가 그리 먼 옛날이 아니고, 선수들이 경기 끝나고 숙소에서 술마시다 코로나 집단 감염 사태를 터뜨린 게 2021년이었다. 지금도 한국 야구선수들은 철저한 몸관리는 커녕 흡연자 수도 적지 않다. 지옥훈련이 지나치면 그것도 문제가 되지만, 어느 정도는 훈련과 몸관리를 철저히 해 줘야 제 기량을 낼 수 있는데, 과거 실업야구 시절부터 현재까지도 한국야구계는 훈련을 지나치게 해서 문제라기보다는 훈련을 너무 적게 해서 문제라고 평가받는 여론이 많았다.

그러나 시대는 진보하면서 90년대의 라루사이즘, 00년대에 화두가 된 스포츠 과학 등 과학이 진보하며 스포츠에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으며 스포츠 외적으로도 인권의식이 상승하였고 오히려 시대착오적 혹사보다는 적당한 휴식과 회복, 관리가 선수의 능력을 더욱 끌어내준다는 사실을 발견해내고 각종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되었으나 김성근은 시대의 변화를 거부했다.

한화 이글스 시절 권혁이나 각종 살려조의 투구는 김성근이 젊은 시절을 보낸 70~80년대 기준으로 보면 별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2010년대에는 야구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시대에 뒤쳐진 터무니 없는 행위여서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김성근이 사이코패스거나 뿌리까지 악인이여서 그런 기용을 한 게 아니다. 김성근 본인도 그런 혹사와 관리 소홀로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지만 그땐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본인이 젊었을 때 당연했던 것을 나이를 먹어서도 계속 했고 그냥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 구시대 야구인이었을 뿐이다.

아직 아마추어리즘과 적은 경기수, 미국이나 일본보다 발전이 늦고 최신메타의 도입이 늦은 한국 프로야구 환경 등 김성근에게 유리한 조건이 충분히 남아있던 SK 시절까지는 전임 감독이 물려준 풍부한 선수팜, 본인의 강훈련, 모기업의 대대적인 지원 등 여러가지 요소가 겹쳐 '야신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대단한 실적을 낼 수 있었다. 사실 대략 SK 때부터 혹사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며 시대와 조금씩 어긋나는 감이 있었으나, 김성근에게 유리했던 외적 조건을 바탕으로 결과적으로 좋은 성적을 냈기 때문에 이를 커버할 수 있었다고 봐야겠다.

그러나 김성근이 현장을 떠나 있던 대략 5년간 프로야구에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김성근식 불펜 짜먹기 야구는 이미 시대에 뒤쳐져 있었다. 특히 신구단 창단이 매우 크게 작용했는데, 그전까지는 1년 133경기라는 상대적으로 적은 경기수로 불펜을 막 짜먹어도 그럭저럭 팀을 유지할 수 있었다. 김성근의 혹사를 대표하는 선수들을 자세히 보면 망가진 선수는 대부분 1년에 한 명이지, 여러 명이 동시다발적으로 망가진 경우는 한화 시절 정도밖에 없다. 1년에 한 명 정도만 작살나게 기용하면 성적도 낼 수 있고 불펜에서 1년 반짝하는 정도의 자원은 매년 나오기에 또 내년이면 다른 노예가 등장해서 그럭저럭 팀 전체의 전력은 유지가 되는 것이다.[79] 개중에는 정우람처럼 롱런하는 특이한 노예가 나오기도 했고. 1년에 한둘쯤 망가지는 선수는 나오지만 팀 전체의 투수력이 동시다발적으로 망가지지는 않았기에 혹사라는 비판은 일각에서 나와도 팀의 전체적인 전력은 유지하고 있었고, 어찌 됐건 팀 성적은 좋았으니 주류 여론이 되지는 못했다. 이것이 김성근의 SK 시절이었다.

그러나 한화 시절은 이미 10구단 체제로 들어서서 1군 출전가능 로스터 수는 일본보다 1명 적은데도 일본보다 많아진 경기수, 늘어난 팀 숫자로 인해 줄어든 투수 인재풀, 돌아온 빅볼메타로 인해 힘들어진 '지키는 야구', 기후변화로 폭염의 증가와 장마철에 우천으로 인한 휴식 확보가 예전보다 안 되는 등 온갖 조건이 다 김성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더이상 필승조 한 명을 불펜 노예로 쓰는 정도로는 시즌을 이끌어나갈 수가 없게 되었고, 3~4명을 동시에 망가지도록 기용해야 할 정도로 김성근식 야구는 힘들어졌다. 이렇게 되면 투수력이 시즌 후 회복이 되어서 김성근 물러날 때 정도까지는 어찌어찌 투수력이 유지되는 노예 1명 체제 때와는 다르게 팀의 투수력이 1년 정도로는 회복이 힘들 정도로 빠르게 망가진다.

선동열 등 비슷한 불펜야구를 하던 감독들은 잘리거나 은퇴해서 뒷전으로 물러나고 새로운 메타에 맞는 젊은 감독들이 나타나거나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김성근은 자신의 옛날 방식을 고수했고, 결국 성적도 명분도 둘 다 잃은 채 잘리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80]

결국 현역 시절에는 명선수로, 감독 시절에는 명감독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변화를 거부하고 자신의 옛날 방식을 고집하다가, 비슷한 길을 걸었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오명을 뒤집어쓰고 물러나게 되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 비결을 옳은 것이라고 믿고, 자신을 잘 바꾸려 하지 않아서 점점 시대의 변화에 도태되기 시작하고, 또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방식대로 성공한 사람들이 등장하며 사라져 간다. 김성근도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2021년에도 '타협을 하면 안된다', '한계를 넘어야 한다', '시대는 변해도 조직이 룰을 바꾸면 안된다'고 이야기했는데, 이 점에서 김성근은 결코 자신의 철학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물론 초,중,고 야구부에서 최고의 선수들만 모은 엘리트 선수들을 통제하려면 이러한 에고가 필요하기도 했고, 김성근을 겪었던 선수들 중에는 김성근을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선수들은 많다. 객관적으로 그러한 훈련과 기용이 선수의 기량을 향상시키고, 오랜 선수 생활을 보장해줬는지와는 별개로 말이다. 김성근은 무자비한 훈련과 혹사, 그리고 꼼수를 성과로 합리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역으로 한화 이글스에서 그 성과가 무너졌을 때 김성근을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야구 내적인 평가와 별개로 프로야구 선수의 팬 서비스를 중요하게 여겼다. 프로선수는 팬 서비스보다 성적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졌던 시대에도 이미 김성근은 팬 서비스를 소홀히 할 경우에 벌금을 내는 내규를 선수단에게 지키게 하는 등 팬 서비스에 대해 선수들에게 철저히 교육시켰다.

그리고 야구팬들의 평가 외로 선수들의 평가는 희한할 만큼 높다. 어느 정도 립서비스는 필요한 언론 인터뷰는 차치하더라도 한때 김성근 감독 밑에서 뛴 박현준LG 트윈스 갤러리에서 썰을 풀었을 때도 선수로 거쳐가면 존경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추켜세우는 등[81] 팬들의 평가와는 별개로 야구선수들에게 인망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화 부임 초창기인 2015년 전반기까지는 야구 팬들 사이에서 '야신' 등 극도의 신격화가 성행했다면, 이후 약 7년간은 극도의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한 점. 김성근의 감독 스타일과 전술은 말년까지 거의 변화가 없었다는 점에서 한국 프로야구의 환경 변화나 그의 극단적인 명암을 상징하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바꿔 생각하면 한국 야구팬들의 냄비근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2018년 이후 계속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간간히 인터뷰하는 걸 제외하면 논란이 줄어들었고 나이가 나이인지라 앞으로 새로운 감독직을 수락할 가능성도 적어 보이며, 한화 감독에서 경질된 지 시간이 흐르면서 한화 시절 응원가가 재발굴되고 김성근의 철학의 밈화[82] 등으로 여론이 많이 완화된 것도 없지 않아 있다. 물론 당연히 감독으로서의 평가는 여전히 심하게 호불호가 갈려 농담으로라도 김성근 복귀를 말하는 순간 팬들의 뭇매를 맞을 수 있었다. '감독'으로서의 김성근보단 '밈'으로서의 김성근이 대세가 된 셈.

어찌보면 대한민국의 6.25 전쟁 이후 노력, 혹사에 대한 각 세대별 가치관, 변화하는 시대와 그에 따른 갈등을 야구로써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 김성근이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야구 뿐만 아니라 60~70년대는 모든 분야에서 무조건 혹사시켜가면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일을 하면 성공할 수 있었던 시대였고, 그것이 80년대까지 쭉 이어져 오다가 1997년 외환위기로 전환점을 맞게 되고 역성장이 이어지며 공부, 노력에 올인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성공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고, 가치관의 다양화 및 구세대간의 갈등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16.2. 관련 어록[편집]


김성근의 예고된 몰락, 적폐가 되어버린 '야신' 신화

단순히 성적 부진만 아니라 김성근 부임 이후 끊임없이 거론된 선수 혹사 논란,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팀 운영, 구단과의 마찰 등으로 수많은 구설수를 초래했고 한때 든든한 우군이었던 팬들과 구단조차도 질린 나머지 잇달아 등을 돌리게 했다.

김성근에게 야구를 바라보는 기준이란, 철저히 자기 자신의 주관적 신념과 경험에만 의지하고 있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독선과 불통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야구는 냉정하게 말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김성근만의 야구에 가깝다. 투수 운용 패턴이나 훈련과 휴식의 구분, 혹사의 개념 등 어떤 측면에서 봐도 원칙이나 일관성을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야구다.

김성근 야구에 대한 모든 판단의 옳고 그름, 타당성과 개연성을 가늠할 수 있는 절대 기준은 오로지 '김성근 그 자체' 밖에 없었다. 불펜투수를 매일 연투시키고, 돌아가면서 부상자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유망주들은 트레이드로 유출되어 미래마저 암울해지는 부작용이 아무리 심각해도 김성근이 그렇게 해야 했다고 믿는다면 그런 것이다.

철저하게 눈앞의 효율성만 강조하여 선수들을 소모품처럼 다루는 야구는 뒤로 갈수록 혹사와 부상 논란, 팀의 노쇠화 같은 많은 부작용을 양산하기 일쑤였다. 선수들의 보이지 않는 희생이나 구단의 지원·시스템같이 조직을 지탱하는 다양한 구성 요소들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고 오직 김성근 덕분에 성공했다는 잘못된 환상이 퍼진 것도 갈등을 유발하며 '김성근 리더십'의 공과에 대한 객관적인 조명을 흐리게 만들었다.

김성근은 자신을 둘러싼 비판 여론이 나올 때마다 '핍박받는 아웃사이더'나 '소신 있는 리더'라는 이미지로 스스로를 포장하며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을 적으로 돌려 내부를 결속시키는 방식을 고수했다. 수많은 인터뷰나 자서전 등을 통하여 자신의 업적을 미화하는 데도 열을 올렸다. 말 그대로 1970~80년대에나 통하던 낡은 성공 방식이나 언론플레이를 21세기에도 그대로 답습하려다가 역풍을 맞고 몰락했다는 점에서 마치 몇몇 정치인들 혹은 우리 현대사의 데자뷔를 보는 듯 묘한 느낌까지 든다.

한화도 김성근과의 불편한 동거에 우여곡절 끝에 마침표를 찍기는 했지만, 시련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결별과정이 매끄럽지 않았던 만큼 김성근 전 감독이나 그를 추종하는 팬들이 당분간 외부에서 구단을 비난하며 갈등을 일으키는 구도가 형성될 수도 있다. 2011년 SK 시절에도 당시 이만수 후임 감독과 구단 프런트는 김성근 측의 악의적인 여론몰이에 꽤 오랫동안 적지 않은 고통을 받아야 했다. 당시 폭도로 돌변한 일부 극성팬들이 홈구장에 방화를 저지르고 난동을 부리는 불상사도 있었다. 이번에도 김성근의 사퇴가 알려지면서 박종훈 단장을 비롯한 한화 구단 관계자들이 일부 극성팬들로부터 집중적인 비난의 타깃이 되고 있어서 주의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김성근 전 감독이 망가뜨린 유망주 육성 시스템과 1군 라인업의 고령화, 고비용 저효율의 선수단 구조를 개편하고 팀을 재건하려면 후임 감독이 누가 되든지 당분간 고생이 불가피하다. 지난해까지 9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던 한화로서는 당분간 암흑기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김성근은 드디어 떠났지만, 한화가 구시대의 적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직도 험난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김성근을 무너뜨린 것은 그 자신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화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최근 몇 개월간 얻어 먹은 술의 일정 부분을 한화팬에게 얻어먹었기에 오히려 한화를 저주하면 안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내년 시즌 한화가 부진했으면 좋겠다.

이런 방식으로 한화가 성공을 거둔다면, '김성근식 성공법' '이글스식 성공법' 등이 판치면서 이미 야근, 주말근무가 당연한 나라에 정신나간 일들이 당연스럽게 받아지는 날이 오게 될 거란 걱정이 들기 때문이다. 거기에 직장에서 머리까지 빡빡 밀고 다니라고 한다면…

"꼴찌가 어디서 놀아" 지옥훈련 부추기는 폭력적 한국인, 2014년 12월 4일, ㅍㅍㅅㅅ



17. 역대 감독 성적[편집]


역대 감독 전적
연도

경기



정규리그
최종순위
1984
OB 베어스
100
58
41
1
1위/6팀[83]
3위/6팀[84]
1985
110
51
57
2
4위/6팀[85]
4위/6팀[86]
1986
108
56
48
4
4위/7팀[87]
4위/7팀[88]
1987
108
55
52
1
4위/7팀[89]
4위/7팀[90]
1988
108
54
52
2
5위/7팀[91]
5위/7팀
통산
534
274
250
10
­
연도

경기



정규리그
최종순위
1989
태평양 돌핀스
120
62
54
4
3위/7팀
3위/7팀[92]
1990
120
58
59
3
5위/7팀
5위/7팀
통산
240
120
113
7
­
연도

경기수



정규리그
최종순위
1991
삼성 라이온즈
126
70
55
1
3위/8팀
3위/8팀[93]
1992
126
67
57
2
4위/8팀
4위/8팀[94]
통산
252
137
112
3
­
연도

경기



정규리그
최종순위
1996
쌍방울 레이더스
126
70
54
2
2위/8팀
3위/8팀[95]
1997
126
71
53
2
3위/8팀
3위/8팀[96]
1998
126
58
66
2
6위/8팀
6위/8팀
1999
81
17
59
5
8위/8팀[97]
-
통산
459
216
232
11
­
연도

경기



정규리그
최종순위
2001
LG 트윈스
98
49
42
7
6위/8팀
6위/8팀
2002
133
66
61
6
4위/8팀
준우승/8팀[98]
통산
231
115
103
13
­
연도

경기



정규리그
최종순위
2007
SK 와이번스
126
73
48
5
1위/8팀
우승/8팀
2008
126
83
43
0
1위/8팀
우승/8팀
2009
133
80
47
6
2위/8팀
준우승/8팀
2010
133
84
47
2
1위/8팀
우승/8팀
2011
93
52
41
0
3위/8팀[99]
-
통산
611
372
232
13
­
연도
소속팀
경기



정규시즌
최종순위
2015
한화 이글스
144
68
76
0
6위/10팀
6위/10팀
2016
132[100]
64
65
3
7위/10팀
7위/10팀
2017
43
18
25
0
9위/10팀[101]
-
통산
319
150
166
3
­
총계
2646
1384
1202
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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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명은 가네바야시 세이콘(かねばやし せいこん, 金林星根, 김림성근). 지바 롯데 마린즈 / 소프트뱅크 코치 등 일본에서 지도자로 재임 중이던 시기에는 일본명 대신 한국명인 金星根을 사용했다.[2] 쇼와 17년, 또는 황기 2602년. 호적상 생일은 1942년 12월 13일생이다.[3]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4] 1964년 12월에 영주 귀국했다. 일본 출생이긴 하지만 재일교포이며 일본 국적을 가진 적이 없다.[5] 나이를 먹은 지금은 신장이 꽤 줄은 듯 하다. # 영상에서 175cm인 유희관보다 살짝 작은듯 보이나 이는 선수 스파이크와 감독의 운동화 차이 및 자세를 바탕으로 감안하면 비슷하거나 좀 더 크고, 172cm인 정근우보다 더 큰 걸 보면 현재 신장은 175cm~177cm 사이인 듯. 박정진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얼마 전인 한화 시절에는 진짜로 180cm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추간판탈출증 수술 이후 키가 줄은 듯 하다.[6] zum 프로필 기준[7] #[8] 김성근이 중학교 1학년 때 별세했다.[9] 京都市立四条中學校.[10] 京都府立桂高等學校.[11] 60학번. 1학년 2학기 도중에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2011년 동아대로부터 명예 학위를 취득했다.[12] 최강야구에서 선발 라인업 작성할 때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도 왼손잡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최강야구 뿐만 아니라 프로팀 감독 할때도 종종 포착되었다.[가사] 한~화의~ 김~성근~ 감독님 사~랑해~ 예예예 예예예 (X7) 예~ 한화의~ 김성근~ 감독님 사~랑해~[13] 2015 시즌 전반기에만 잠시 사용된 응원가인데, 인터넷 방송인 케인의 밈이 되면서 다른 의미로 유명해졌다. 한화의 김성근 감독님 사랑해 문서 참조.[14] 은퇴기사[15] 기존 글에서는 김성근을 언론에서 소개할 때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고 그 때문에 노력했다고 썼다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이는 재일교포 출신 야구인들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주로 쓰였던 말이고 김성근을 지목하여 서술한 적은 없다. 오히려 김성근 스스로도 그렇고 관련 기사들도 김성근은 상대적으로 그 중에선 차별을 받지 않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기존 서술의 "김 감독은 일본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 이기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그때부터 독기를 품고 이기기 위해 노력했다."라는 말도 이런 기사 내에서 나오는 말. #[16] 기존 서술에서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이 야구 비명문고 학생들로 구성되었다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정확히는 조금이라도 고시엔 출전 가능성이 있는 경우 제외한 것이고, 명문고여도 고시엔 출전 가능성이 없는 사람은 차출되었다. 그런 이유로 차출되었던 대표적인 인물이 오사카 나니와 상고의 4번타자였으나 나니와 상고 폭력 사태 가담 누명을 쓰고 고시엔 출전이 좌절되었던 장훈.[17] 프로 용병도 아니고 대학을 다니며 한국어를 배우지도 않았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일본이나 미국과는 달리 운동만 시키는 한국의 운동부 환경에서는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당시에는 실업과 대학리그가 사실상 프로리그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지금보다도 그런 경향이 더 심했다.[18] 지금이야 나이가 들어서 더 심하지만 사실 이전에도 한국어 발음은 부정확했다.NHK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왔을 때 일본어를 더 유창하게 쓰기도 했다.[19] 태어날 당시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던 외국인 선수(장훈이 태어날 당시엔 한국일본의 식민지였으니 장훈도 일본 국적을 가지게 된다)도 일본인 선수로 대우하도록 바꿨다.[20] 팀에 따라 오히려 활동비를 내야 하는 경우도 있긴 한데, 사회인 클럽팀이 본격적인 프로진출 교두보가 되고 컨소시엄팀까지 등장한 이후 이야기지 김성근 시절은 그런 거 없었고 100% 월급을 받으면서 선수생활 했다.[21]국토교통부의 전신.[22] 나중에는 전등을 키는 것조차 어깨가 안움직여서 힘들었다고 한다.[23] 당시 투수들은 경기 후 아이싱은커녕 오히려 뜨거운 걸 어깨에 대고 있었다고 한다.[24] 참고로 들고 온 사진은 대한민국 최초의 연속사진이라고 한다.[25] 박영길재일동포 출신인 신용균이 최초로 싱커를 던졌다고 증언했고, 김영덕은 한국야구위원회와 대한야구협회가 공동출판한 "한국야구사"에서 본인이 한국에서 최초로 슬라이더를 던진 인물로 기록된 것을 스스로 부인하면서, 신용균이 최초로 슬라이더를 던졌으며, 김영덕 본인은 싱커를 처음으로 던졌다고 말했다. 일단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싱커 자체가 없었다. 싱커를 처음으로 던진 투수는 47년 데뷔한 커트 시몬스인데, 이 선수의 본격적인 커리어는 한국전쟁 이후다.[26] 인터뷰에 의하면 처음에는 예능을 가장해 재미를 올리고자 하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해 감독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JTBC 측에서 후쿠오카로 최강야구 영상을 담은 비디오를 보냈는데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가 아닌 실제 프로야구처럼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에 감명받아 해볼 만하겠다고 판단해 수락했다고 한다. 그리고, 프로그램의 총연출인 장시원 PD가 지인을 통해 직접 후쿠오카로 날아가 상황 설명을 하고 간곡히 설득하였으며, 김성근 감독이 스케줄 차 한국에 입국했을 때 그의 승낙을 받아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전적과 개인자료를 넘겼다고. 김성근 안티들이 나무위키로 백날 까내려봐야 그들과는 다르게 80살이 넘어도 찾아주는 사람이 있는 게 유머...라기 보단 네타성이 강하면서 방송에 고정적으로 출연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없기 때문이다. 백인천은 비슷한 나이지만 뇌출혈로 거동이 불편하며, 김응용의 경우 지도자를 은퇴한지 10년쯤 지났으며, 다른 사람들은 현업 복귀 가능성을 염두에 두거나 아마추어 지도자 내지 해설진에 한 자리씩 있거나 개인 생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27] 단 김성근이 감독을 맡았던 팀 중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던 SK 와이번스SK 왕조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막강하여 2000년대 후반 최강팀으로 자리잡아 한국시리즈 3회 우승, 1회 준우승의 엄청난 커리어를 기록하여 이전 전임 조범현 감독의 시기에 비해 높은 성적을 낸 선수들이 월등히 많았기에 팀 페이롤이 올라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거기에 한국시리즈 우승이면, 우승 프리미엄은 그 어떤 구단이든 붙여준다. 결국 김성근의 말처럼 성적이 결국 연봉으로 직결되는 것이고, 그만큼 성적을 잘 내어서 SK선수들의 연봉이 올라갔으니 맞는 말 한 셈이다. 실제로 대체선수의 표본으로 평가되는 조동화가 억대 연봉을 받은 것이 좋은 예시이다. 오히려 김성근과 페이롤을 엮으려면 1990년대 중후반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시절을 예시로 드는게 적절하다. 흔히 김성근 재임 시절 쌍방울이 모기업 지원을 거의 받지 않는 대표적인 스몰마켓 팀인데다 없는 전력을 어떻게든 쥐어짜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외인구단의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김성근 재임 2년차인 1997년 쌍방울은 오히려 팀 페이롤 1위였다. 즉, 당시 한국시리즈 우승팀이던 해태 타이거즈는 물론이고 자금력이 풍부한 대기업을 모기업으로 둔 삼성 라이온즈, 현대 유니콘스보다도 페이롤이 높았다는 것. 다만 김성근 부임 전 당시 쌍방울은 가을야구는 커녕 하위권을 전전했던 약팀이었고 김성근을 감독으로 앉힘과 동시에 확실한 성과를 내기 위해서 지원을 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28] 그리고, 스탭들과 출연진에게도 진지함이 아닌 웃음을 보여주는 경우도 많은데, 위의 프로필 사진을 새로 촬영하고 스탭들이 이를 김성근에게 문자로 보여주자 "잘 생기게 나왔다고" 좋아했으며, 최강 몬스터즈의 신입 선수들을 뽑은 이유도 "투수들이 머리가 큰데 얘도 머리가 크네" 등의 예능적 요소도 많이 보여준다.[29] 실제로 프로 구단들은 매년 하는 신인 드래프트만으로는 선수층을 두텁게 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버려진 옥석을 다시 재감정하고자 독립리그 및 아마야구 팀에도 스카우트를 보내 가능성이 있는 선수가 있다면 프로 계약을 맺고 입단시킨 뒤 성장세를 보기도 한다. 이렇게 입단한 선수들 중에는 1군에서도 출전을 많이 하는 이들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윤대경윤산흠 등이 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일본프로야구를 보면, 매년 정규 드래프트에서 독립리그 출신, 사회인야구 출신들이 여럿 뽑히고 시즌 중 독립 리그에서의 영입도 한국보다 굉장히 활발하다. 김성근 감독은 우리도 지금처럼 고작 1~2명만 영입하지 말고, 일본처럼 적극적으로 선수를 영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아마야구는 열악한 지원과 재정 탓에 소속 선수들이 프로 무대에 진출하는 것은 소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정도로 힘들다. 연천 미라클도 예산 부족으로 매우 허덕이는 추세고, 송진우가 감독으로 있었던 스코어본 하이에나들 구단도 2020년에 창단했다가 1년만에 예산 문제로 해체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입단 희망자는 많고 오히려 회비를 내야하는 환경임에도 이런 특성 때문에 정원이 남을 정도다. 이렇게 기반이 제대로 안 된 독립 리그 팀에서는 좋은 선수를 키워내기 힘드니, 김성근 감독은 제대로 선수를 키워낼 환경이 갖추어진 프로의 문호를 더 넓힌 뒤, 프로 팀에서 독립 리그 소속 선수들을 구제하고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찬반은 개인의 자유겠지만 나름 근거도 확실하니 한번쯤은 생각해 볼 만한 주장이다. 다만 이렇게 독립 리그에서 프로 리그로 진출하는 데 성공한 선수들 중에는 프로에서도 성공하는 사례도 몇 있지만, 대부분은 버티지 못하고 1~2년 안에 정리되는 게 현실이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기량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30] 다만 이 문제는 한국과 일본의 선수층의 양적 차이나 복잡한 문제가 있다. 우선 단순하게 생각해도 인구도 적은데다가 야구선수를 하는 비율도 한국이 훨씬 적다. 그런데도 팀수는 오히려 kbo가 npb보다 2팀 적을뿐이다. 그렇기에 일본만큼 가려진 옥석이 있을 확률도 작다. 더 암울한 점은 대학생 조차 드래프트에서 뽑지않아 규정으로 한팀당 한명씩은 뽑게하여 겨우 대학리그를 유지시키는 마당이다. 물론 과거에는 한국도 일본처럼 고졸이 바로 프로에 가기보다 대학에 가는걸 선호하던 시절도 있었다. 다만 팀 숫자가 늘어나다보니 고졸로 가도 1군에 기회가 비교적 쉽게 찾아온다. 거기다가 한국 선수들은 군대를 가야하다보니 대졸에 미필인 경우 사실상 지명받는게 불가능하다. 대졸이나 독립야구 2,3년 뛴뒤 군대를 갔다오면 남들 슬슬 fa가 다가올 떄 이제 입단하는 셈이기 떄문이다. [31] 일본프로야구와 비교하면 실제로 연봉을 깎으면 아직 좀 더 뛸만하고, 선수 본인들도 현역 연장을 원하는데도 나이 많은 선수들에 대한 대우가 박한 경향이 있다. 굳이 50대까지 뛴 산신령 야마모토 마사까지 안 가도 30대 후반, 40대 베테랑 선수가 한국보다 확실히 많다. 2022 시즌 기준 한국 최고령은 82년생인 이대호, 김강민, 오승환 등이었지만, 일본은 1977년생인 후쿠도메와 1979년생 노우미에다가 한국 최연장인 1982년생 이상인 선수는 10명이 넘는다. 물론 미국에도 50대까지 뛴 선수는 많다. 훌리오 프랑코, 제이미 모이어도 그러하다. 나이가 많아도 쓸 수 있는 자원이라면 어떻게든 끌어다 쓰는 일본에 비해 훨씬 선수풀이 얇으면서도 나이많은 선수를 적극적으로 기용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모기업의 펫스포츠인 영향이 큰데, 구단이 모기업의 광고판 역할을 하는 특성상 나이든 선수는 연봉만 많이 먹고 기업이 구단 운영을 통해 얻고자 하는 젊고 활기찬 이미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32] 실제로 야구선수로서 50대까지 뛰었던 선수들이나 1970년대생 선수들이 프로로 뛰는 이유는 그만큼 재능이 있고, 자기 관리를 철저히 했기 때문이다. 장원삼처럼 제구가 날리는 것도 아니거니와, 여러 구종을 장착해 롱런하는 선수가 많기 때문이다. 그 매덕스도 부상 하나 없이 3000이닝 이상을 먹은 이유는 원체 매덕스의 투구폼이 뛰어났기 때문이기도 하고. 모이어는 몸관리를 굉장히 열심히 했고, 사첼은 데뷔가 늦었다 뿐이지 역시나 몸관리가 뛰어났고, 프랑코는 이 분야 최강자이다. 나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 최소 50대 중반에 메이저에서 3할을 치고 있었다는 게 정설이며, 60대에 나이에 독립리그 등에서 선수로 3할을 치기도 했었다. 노미 아츠시는 플레잉코치를 하던 도중, 본인의 몸이 올라오지 않아 결국 선수 은퇴를 선언했고, 후쿠도메 코스케는 사실상 말년을 보냈다는 게 정설. 물론 한국에서는 어쩔수 없는게 최근에만 봐도 박수칠때 은퇴한 이대호와 꾸준히 버티지만 부진하는 오승환의 사례가 있다. 물론 구단에서 말년에도 계속 뛸 수 있게 프런트와 현장에서 특급대우를 해주는 것은 오승환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물론 삼성의 암울한 불펜 사정도 큰 몫을 한다.[33] 백구, 선수들은 바다를 건넜다.[34] 김인식, 손윤, 유효상 공동 저자.[35] 김운경, 이영만, 김봉석, 권태호 등 공동 저자.[36] 단, 말년에는 연로한 탓에 일본어투도 많이 느껴지고 말 자체도 어눌해졌다.[37] 이때 선수들을 모아놓고 '내가 한눈을 팔아 이렇게 되었으니 너희들도 정신 똑바로 차려라'라고 훈계를 한 뒤 병원으로 갔다고 한다.[38] 이후 김성근의 후임 해설자가 바로 하일성.[39] 타자가 가라스윙(헛스윙)를 했어요, 바깥쪽 직구가 이빠이(꽉차게) 들어왔어요 등의 표현을 2000년대 이후까지도 썼다고 한다.[40] 그의 본적은 경상남도 진주다.[41] 박용택의 발음 자체가 워낙 또렷하고 좋은 편이기 때문에 김성근 감독의 말을 대변해주게 된 셈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특타 1번이 되었다고.[42] 1세대 야구 전문 기자. 아래 링크 기사의 본문 역시도 과거 김성근 태평양 돌핀스 시절의 기사를 그대로 퍼온 것이다.[43] 이북 황해도 출신인 김동엽 감독이 38번을 달게 된 이유는 한국전쟁 시절 38선을 월남해서 남한에 정착했다는 이유로 달게 된 등번호라고 한다. 자세한 건 김동엽 항목 참조.[44] 우연의 일치로 동명이인인 1990년생 삼성 외야수 김동엽도 등번호 38번을 달고 있다.[45] 무리뉴는 첼시 FC 감독으로 돌아오면서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에게 전권을 요구했고 김성근 역시 한화 이글스 감독을 할 때 전권을 요구했었다. 또한 주전 혹사도 심하다.[46] 특히 야구계는 운동선수들이 많음을 감안하더라도 유독 패션 테러리스트들이 많기에 더더욱.[47] 물론, 상의는 최강야구의 트레이닝 유니폼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저 후드티를 입은게 김성근 감독말고 없다.[48] KBS에서 언제 마지막으로 피서를 갔냐는 질문에 1978년이라고 대답하면서 이제는 야구장이 피서지라고 대답했을 정도다.[49] 1970년대와 2000년대의 반일감정 차이를 고려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1970년대는 왜색이 진하다는 이유로 모든 일본 매체의 수입이 금지되던 시절이었고, 백인천의 요시는 2000년대 이승엽이 출전하는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 중계방송에서 나온다.[50] 나지완 타석 때, 자신이 감독으로 있어서 통한의 준우승을 당했던 2009년 한국시리즈 끝내기를 SBS Sports에서 틀어 버렸다. 중계를 보던 야구팬들은 단체로 빵 터졌다.[51] 국방부 진중문고로 지정된 적이 있었다![52] 김인식 전 감독과 같이 저술한 책이다.[53] 아들 김정준 해설위원이 직접 쓴 책이다.[54] 하지만 김성근은 많은 선수들의 팔을 소모품처럼 갈아버리고 트레이드 처분해버렸다.[55] 선두타자 김창열에게 기습번트를 맞고 출루를 허용했다. 그리고 이 광경을 본 다른 천무단 선수들은 김창열에게 '왜 그랬냐'고 투정을 부렸다.[56] 하지만 무턱대고 체중을 감량해 버리는것도 좋지 않은게, 그 선수의 신체 피지컬이나 밸런스 등이 한번에 무너져 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메이져리그의 사바시아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물론 둘 다 비시즌에 감량을 엄청 하는 편이지만, 시즌 중에는 여러가지 이유로 다시 살이 찌기 때문에 관리 차원에서 비시즌에 빼는 것이다.[57] 가령 혹사로 인해 부상병동에 오르는 선수들이 많아진다던지, 임기 내 성적을 최대한 내야 하기 때문에 유망주를 즉전감 노장선수와 트레이드한다던지, 본인 임기 내에 최대한 많이 써먹기 위해 어린 선수들의 군 입대를 막은 결과 30살이 다 돼서 공익근무로 군 문제를 해결하는 바람에 제대 후 실전감각이 죽어 있다던지, 또 많은 선수 영입을 요청하는 바람에 구단 연봉총액이 급상승해 버렸다.[58] 수원야구장 으로 추정된다.[59] 한때 음치가수 컨셉으로 이름을 알렸던 이재수가 이 광고를 패러디하였는데 패러디에서 나온 꼬마 이름에 이만수 감독의 이름을 갖다붙여서 디스하였다.[60] 1999년 10월에 한 번 압류된 적도 있었으나 다시 되찾았다.[61] 특히 이 쪽은 유망주 정범모의 성장을 염두에 두고 영입한 선수였으나 1년만에 정범모의 성장이 되돌아가면서 조인성이 2015년 혹사로 굴려지다 16년부터 나락으로 떨어지는 원흉을 제공했다.[62] 권용관은 딱 2013년 LG때처럼 기용해야 하는 선수였다. 그보다 약간 더 나올 순 있어도 100경기 넘게 선발로 나와선 안 될 선수였다.[63] 일부 커뮤니티에서 울산에 김성근이 사퇴 직후 나타났다는 썰이 있었다.[64] 매입 당시 이시영 소유의 건물은 23억, 남편 소유의 건물은 17억이었으며 김성근은 2동에 각 20억을 더 얹어 구매했다.이시영 부부는 40억의 이익을 본 셈.[65] 과거 방송에서 김성근 감독 부임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적이 있다. 이 때문에 도네이션 합성에 김성근이 이용되기 시작했다. 정작 부임하고 나서 선수들을 혹사시키고 성적도 안 좋았기에 현재 케인은 김성근을 싫어하므로 김성근 도네를 보면 정색한다.[66] 실제 2007년 한국시리즈 우승 인터뷰 당시 쌍방울 감독 시절 구단에도 알리지 않은 채 신장암 수술을 하였다고 밝혔다. 이후 암은 아니지만 한화 감독 시절 추간판탈출증 증세로 수술로 인하여 감독직을 잠시 비우기도 하였다. 이후 수술 후 다시 감독직에 복귀하여 팀을 이끌었다.[67] 롯데 시절 백인천이 한 행동의 원인에는 구단과의 심한 불화가 원인으로 꼽히지만, 뇌졸중으로 인한 지능이나 기억력 감퇴도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의견도 많다.[68] 올드스쿨 스몰볼 스타일과 정신력을 강조하는 야구, 투수 혹사 등 여러가지 면에서 올드스쿨 KBO 리그의 전형을 보여주는 감독이다.[69] 사실 선임 자체가 잘못된 게 김성근은 리빌딩에 적합한 인물이 절대 아니고 오히려 윈나우형 감독이다.[70] 1986년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패하여 최종 4위, 1987년 플레이오프에서 해태에 패하여 최종 4위, 1989년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을 꺾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해태에 패하여 최종 3위, 1991년 준플레이오프에서 롯데를 꺾고 플레이오프에 올랐으나 빙그레에 패하여 최종 3위, 1992년 준플레이오프에서 롯데에 패하여 최종 4위, 1996년 플레이오프에서 현대에 패하여 최종 3위, 1997년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패했으나, 삼성이 플레이오프에서 LG에 지면서 최종 3위.[71] 특히 김성근이 SK 감독을 맡았던 시기가 2008 베이징올림픽, 2009 WBC 등으로 야구에 대한 인기도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SK 왕조시기를 구축한 강팀으로서도 더더욱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었다.[72] OB 베어스의 이광환, 삼성 라이온즈의 우용득, SK 와이번스의 이만수, 한화 이글스의 한용덕.[73] 정확히는 1군 코치 + 감독과 다른 코치에게 어드바이저 역할까지 겸했다.[74] 사실 일본에서 김성근의 스타일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시엔 내내 에이스를 투입시키거나, 완투를 바라며 6선발체제를 굴리는 등, 일본도 이전보다는 낫지만 투수혹사는 엄청나다.물론 그렇다고 한화시절 김성근 처럼 선발투수를 불펜에 투입시켰다가 불펜으로 뛴 투수를 다음날 선발 예고시키지 않는다...[75] 사실 투수 혹사도 당하는 투수 입장에서 '기회 부여'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꽤 많기 때문에 김성근 말고도 의외로 혹사당하여 커리어가 망가진 선수들이 혹사 감독을 옹호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당장 혹사가 직접적으로 커리어에 영향을 미친 전병두, 송창식 같은 케이스가 대표적.[76] 부임할때부터 원래는 감독직 다시는 맡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 팀은 은퇴 팀이고 대부분이 은퇴 선수이기 때문에 이 선수들과는 즐겁게 야구할 수 있겠다라고 말했으며, 프로리그 감독때 보여줬던 승리를 위해서라면 선수혹사같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은 덜 보여주고 있다. 다만 매 시즌 10경기마다 승률 7할 미달시 선수방출, 매 시즌 전 경기 승률 7할 미달성시 프로그램 폐지라는 강력한 미션이 걸려있는 프로다 보니까 훈련과 분석은 꾸준히 진행중에 있다.[77] 시즌2 경북고와 상대시 경기 전에 경북고 감독이 경북고의 유망주 임종성(야구선수)를 봐달라고 부탁했고, 김성근은 흔쾌히 수락하면서 임종성을 관찰 후 단점을 지적하고 직접 배트를 휘두르는 시범까지 보이면서 약 40분가량 개인 레슨을 해주었고, 임종성 선수는 이후 청룡기 4강때 2024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이자, 최강야구 타선을 만났다면 침묵시키는 황준서를 상대로 2타점 3루타를 치는 결과를 냈으며 두산 베어스에 입단했다.[78] 일본이나 미국이나 마지막 시즌 300이닝 투수가 한국프로야구 초창기인 1980년대에 나왔다.[79] 실제로, 그 유명한 SK 시절 김성근의 혹사로 탈이 난 선수는 전병두, 채병용, 고효준, 송은범, 김광현 정도고 장기 이탈자는 전병두와 김광현 2명이다. 채병용과 고효준은 각각 인대, 뼛조각 제거 수술 받고 공익 근무하러가서 사람들이 잘 모르고(채병용은 김성근의 전임 강병철과 조범현도 혹사시켜서 묻힌 감도 있다.) 송은범은 데드암과 잔부상, 그로 인한 극심한 기량 하락은 있었지만 큰 부상은 없었다. 사실 정우람도 다른 투수 같으면 망가지도록 기용하긴 했는데 운 좋게 역대급 내구성을 타고나 FA까지 무난히 먹었다.[80] 그나마 이런 소위 말하는 옛날식 불펜야구를 하던 감독들 중 오래 버틴 쪽이 김경문인데, 김경문은 오히려 타격면에서는 김성근이랑 정반대로 당시 메타에 딱 맞는 빅볼야구를 해왔고, 투수진도 거의 김성근 살려조급 혹사를 했음에도 김진성, 원종현, 이민호 등이 상식을 뛰어넘는 내구성을 보여주며 그냥 우연히(...) 오래 버텨준 덕에 김성근보다는 좀 더 성적을 내며 오래 감독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81] 심지어 박현준은 김성근 감독과의 불화설로 인해 트레이드되었고, 경기 중 김성근 감독을 도발하려고 로진을 과하게 불어대기까지 했던 인물이다.[82] 지옥 펑고, ~은 ~할 수록 강해진다 등[83]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2위. 전·후기 리그 통합 승률 1위[84] 전후기 모두 2위에 그쳤기 때문에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여 최종 순위는 3위[85]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5위[86] 삼성 라이온즈가 전·후기 통합우승을 달성하며 한국시리즈 자체가 열리지 않았다.[87] 전기리그 5위, 후기리그 1위[88]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패배[89]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5위[90] 플레이오프에서 해태에 패배[91]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5위[92] 플레이오프에서 해태에 패배[93] 플레이오프에서 빙그레에 패배[94] 준플레이오프에서 롯데에 패배[95] 플레이오프에서 현대에 패배. 심지어 2승을 한 뒤 3연패 당하면서 KBO 포스트시즌 사상 처음으로 리버스 스윕을 당했다.[96]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패배[97] 김성근 경질 당시 쌍방울 레이더스는 승률 0.224로 8위였으며,
시즌 종료 후 쌍방울은 김성근 경질 당시와 똑같은 0.224의 승률로 8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98] 커리어 사상 처음으로 플레이오프를 통과한 것이 이 해의 일이다.[99] 경질 당시[100] 허리 디스크 수술로 12경기 김광수 대행 체제[101] 경질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