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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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래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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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1.svg
KBO 리그
우승반지

1985

파일:SK 와이번스 우승 엠블럼 V2.svg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5.svg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6.svg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7.svg파일:삼성 라이온즈 우승 엠블럼 V8.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2008
2011
2012
2013
2014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93 KBO 리그 MVP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87,1993 KBO 리그 홈런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93 KBO 리그 타점왕

파일:KBO 리그 로고(엠블럼/영문, 2013~2021).svg
1988 KBO 리그 출루율왕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5번
김성철
(1982)

김성래
(1984~1996)


김한수
(1997~2008)
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9번
윤재호
(1994~1996)

김성래
(1997~1999)


팀 해체
SK 와이번스 등번호 9번
팀 창단

김성래
(2000)


곽국희
(2001~2003)
SK 와이번스 등번호 79번
박상열
(2000)

김성래
(2001~2009)


한혁수
(2012~2013)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80번
오오시오
(2006~2009)

김성래
(2011~2016)


김상진
(2017~2018)
한화 이글스 등번호 70번
이정훈
(2015~2016)

김성래
(2017~2020)


로사도
(2021~2023)




파일:/image/109/2010/12/02/201012021216771377_1.jpg

김성래
金聲來 | Sung-rae Kim

출생
1961년 12월 3일 (62세)
경상북도 의성군[1]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대구옥산초 - 경운중 - 경북고 - 연세대
신체
184cm, 84kg
포지션
1루수, 2루수, 3루수[2], 유격수[3], 외야수[4]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4년 1차 지명 (삼성)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1984~1996)
쌍방울 레이더스 (1997~1999)
SK 와이번스 (2000)
지도자
SK 와이번스 1군 타격코치 (2001~2005)[5]
SK 와이번스 2군 타격코치 (2005)[6]
SK 와이번스 1군 타격코치 (2006)[7]
SK 와이번스 2군 타격코치 (2006~2008)[8]
SK 와이번스 1군 타격코치 (2008~2009)[9]
SK 와이번스 2군 타격코치 (2009)[10]
SK 와이번스 1군 타격코치 (2009)[11]
SK 와이번스 2군 타격코치 (2009)[12]
오릭스 버팔로스 2군 타격코치 (2010, 연수)
삼성 라이온즈 1군 타격코치 (2011)
삼성 라이온즈 1군 수석·타격코치 (2012)
삼성 라이온즈 1군 수석코치 (2013~2016)
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17~2019)
한화 이글스 1군 타격코치 (2020)[13]
한화 이글스 육성군 타격코치 (2020)[14]
한화 이글스 2군 타격코치 (2020)[15]
한양대학교 야구부 인스트럭터 (2021~)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코치 (2007)
본관
강릉 김씨[16]
가족
배우자 김춘련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평가
3. 지도자 경력
3.1. SK 시절 (2001 ~ 2009)
3.2. 오릭스 시절 (2010)
3.3. 삼성 시절 (2011 ~ 2016)
3.4. 한화 시절 (2017~2020)
4. 연도별 주요 성적
5. 기타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111041032761006120.jpg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SK 와이번스에서 뛰었던 前 야구선수. 현역시절 주 포지션은 2루수1루수이며, 등번호는 5번(삼성) - 9번(쌍방울, SK)을 달았으며 삼성의 5번 계보는 김성래-김한수-조동찬-구자욱으로 이어진다


2. 선수 경력[편집]







파일:이만수 - 장효조 - 김성래.jpg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1984년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을 받았지만, 원래는 실업팀인 한일은행에 입단하려고 했었다. 연세대학교 시절 주 포지션이 유격수였는데, 당시 삼성 라이온즈의 주전 유격수는 서정환을 밀어내고 KBO 리그 첫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한 오대석이었기 때문. 그러나 어머니가 위암 판정을 받자, 그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17]

1985년 김영덕 감독의 포지션 전향 지시에 따라 유격수에서 2루수로 활동하게 되었다.[18] 1987년 22홈런을 기록하면서 2루수 포지션 최초로 홈런왕을 차지한다.[19] 1988년에는 김상훈과 타격왕 경쟁을 벌일 정도로 페이스가 좋았으나, 1988년 9월 6일 해태전에서 김성한과 부딪혀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중상으로 하락세를 걸었다. 게다가, 1989년에는 역대 최고의 2루수로 평가를 받은 후배 강기웅[20]이 입단하면서 입지가 더 줄게 되었다.

무릎 수술을 받고 좌익수로 자리를 옮긴 1992년 0.292의 타율을 기록했고, 1루수로 변경한 이듬해인 1993년에는 타율 0.300, 28홈런, 91타점으로 홈런왕, 타점왕 그리고 MVP를 수상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28홈런이 이승엽이나 심정수 그리고 타이론 우즈에 비하면 부족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 해 롯데 자이언츠의 팀 홈런은 29개였다.[21] 즉 이 해 김성래의 홈런 수는 롯데 자이언츠 전체 홈런 수와 고작 1개의 차이만을 보였던 것이다.[22] 이 해는 성적도 성적이지만, 클러치 히터로서의 능력 또한 대단했다.[23]

내야수로서의 수비 능력도 출중한 편이라, 당시엔 매우 큰 키였던 185cm의 장신을 이용한 높은 공의 점프 캐치는 물론 낮은 공 처리에도 매우 능숙했다. 당시 1루수에서 다리를 찢는 학다리 수비로 유명했던 OB 베어스신경식과 함께 꺽다리 내야수로 자주 비교되었다. 2루수 수비로는 후배 유격수 류중일과 호흡을 잘 맞췄다. 그러나, 둘이 같이 선수로 있을 땐 팀 우승은 정작 못해봤다. 그리고, 강기웅이 2루수로 들어오자마자 코너 내야나 외야로 가면서 류중일의 1차 키스톤 콤비는 해체 되었고, 이후 강기웅과 2차 키스톤 수비를 결성했다. 그리고 1987년 한국시리즈, 1990년 한국시리즈, 1993년 한국시리즈 나가서 모두 만 깠다.[24]

30대 후반에 접어들자 팀에서는 은퇴와 함께 코치 연수를 할 것을 권했지만 김성래는 선수로 남길 원해 1996 시즌 후 삼성에서 방출되어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쌍방울 레이더스로 이적했다. 쌍방울에서는 지명타자, 1루수, 그리고 3루수로도 뛰었고 김광림과 함께 팀의 최고참으로 뛰었다.

1999년 말 쌍방울이 해체되고 쌍방울 선수들을 모아 창단한 신생 구단 SK 와이번스 소속이 되며 2000년 시즌 리그 차고령 선수이자 최고령 타자로 뛰었지만[25][26] 2000 시즌 SK 유니폼을 입고 개인 통산 1,000안타를 달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해태에서 이호준성영재와의 트레이드로 입단한 후에는 자리를 완전히 잃었고 2000년 8월 11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SK 와이번스의 첫 은퇴식을 치른 선수가 바로 김성래이다. 은퇴식은 동년 8월 13일 열렸다.

한편, 1997년 쌍방울로 떠난 그의 등번호 5번은 3루수 김한수가 물려받아 그 번호의 빈자리를 메웠다.[27]


2.1. 평가[편집]


선수 시절 통산 타출갭 1할, 홈런왕을 2번이나 했을 정도로 타격지표도 좋았고, 내야 유틸리티 플레이어로도 쓸 수 있었을 정도로 수비력도 뛰어난 선수였지만 의외로 저평가를 받는다. 2루수로 뛰면서 홈런왕을 했는데[28] 이는 KBO리그 역사상 정상급의 2루수로 꼽히는 홍현우, 박정태 등도 달성하지 못한 기록이다.

저평가를 받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내야 유틸리티로 활동한 게 컸다. 유격수로 시작해서 주 포지션이었던 2루수를 포함해 내야 전 포지션에서 활동하였고, 외야수로도 뛰었던 시즌이 있었으니 어느 포지션의 레전드로 낙점할지 참 애매하다는 것이다. 비슷하게는 2루수-3루수로 활동했던 홍현우가 있다[29]. 이외에도 한창이던 1988년에 입은 부상으로 몇 시즌을 날려먹은 것도 타격이 컸다.

게다가 당대 홈런왕 치고는 인기도 많지 못한 편이었다. 팬이 생길만 하면 발생하던 부상으로 인해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결과적으로 홈런왕을 차지했던 다른 타자들(예: 이만수, 김성한, 장종훈)을 넘어설 정도의 인상을 남기기에는 역부족이었던 성적이기 때문. 헐크, 오리궁둥이, 연습벌레 등 무언가 스토리를 가지고, 꾸준히 활약했던 선수들에 비해, 김성래는 꾸준히 선수로 뛰지를 못했다.


3. 지도자 경력[편집]



3.1. SK 시절 (2001 ~ 2009)[편집]


은퇴 후 곧바로 SK 와이번스의 타격코치로 선임되면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타격 부분을 맡아 강병철, 조범현 감독 시절에는 1군 타격코치를, 김성근 감독 시절에는 주로 2군 타격코치를 맡았다. 한편 SK 타격코치 시절 2008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면서 1985년 통합우승을 제외하고 선수 시절 껴보지 못했던 한국시리즈 우승반지를 코치가 되고 나서야 처음으로 껴보게 되었다.


3.2. 오릭스 시절 (2010)[편집]


2009 시즌 후 SK 코치직에서 물러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3.3. 삼성 시절 (2011 ~ 2016)[편집]


오릭스에서 1년간 코치 연수를 받은 뒤 귀국했고, 2011 시즌 LG 트윈스의 코치로 활동할 예정이라는 기사가 있었으나 오보로 밝혀졌다. 타네다 히토시가 2010 시즌 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옮기자 삼성 라이온즈에서 그를 타격코치로 영입하면서 # 15년 만에 친정 팀 삼성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1 시즌 전에는 류중일의 부름을 받아 김용국이 돌아왔고, 시즌 중에는 강기웅이 2군 타격코치로 합류하여 삼성의 레전드들이 코치진에 모두 모였다.

2011 시즌 초반만 해도 코치로서 존재감이 거의 없다시피해 팬들의 의구심을 샀지만, 사실 그동안 경산에서 선수들과 같이 합숙하며 선수들의 타격 훈련을 도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리고 6월 들어 김상수, 이영욱, 최형우의 타격감이 잇따라 폭발하며 1위까지 탈환.

2012 시즌 부로 수석코치로 승격되었으나, 김한수 타격코치가 코치로서 경력이 짧아 타격코치를 겸임했다. 이후 2013년부터는 수석코치만 전담하게 되었다.

2016 시즌, 삼성 라이온즈가 순식간에 하위권으로 떨어졌는데도 주전들을 대체할 선수가 나오지 않는 등 왕조라는 타이틀에 가려져서 드러나지 않았던 여러 가지 문제가 드러나며 그동안 대체 뭘 했냐고 류중일 감독, 장태수 2군 감독, 양일환 2군 투수코치와 함께 팬들에게 까이는 빈도가 늘어났고, 결국 시즌 후 강성우, 김용국과 함께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아 팀을 떠났다.

이후, 이우선 코치의 인스타에 류중일 전 감독과 같이 찍힌 근황 사진이 올라왔다. 코멘트에 의하면 건강히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3.4. 한화 시절 (2017~2020)[편집]


삼성과 재계약에 실패한 뒤 한화 이글스의 코치로 영입되었다. # 보직은 2군 타격코치로, 김성근 감독도 김성래 코치의 영입을 반겼다고 한다.

한화에서의 평가는 굉장히 좋은 편이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대단히 강조하는데, 이는 본인이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효과를 많이 보았기 때문인 듯하다. 김성근 감독 체제에서 기술 훈련에 비중을 많이 두고 훈련을 하면서 웨이트 트레이닝의 비중이 줄어드는 바람에 한 시즌 DL 30회라는 끔찍한 결과가 나왔는데 2군에서 김성래 주도로 웨이트를 강조하는 훈련을 하니 팬들은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훈련법 뿐만 아니라 2군에서 올라오는 유망주들의 스윙이 매우 적극적으로 변했다는 눈에 보이는 성과 또한 있었다 스윙에 자신감이 붙었다는 것이다. 일명 '자기스윙'을 하는 모습을 보고 팬들의 반응은 무조건 연장계약을 하자는 반응.

2017 시즌이 끝나고 LG 트윈스에 새로 부임한 류중일 감독을 따라 LG 코치로 갈 거라는 소문이 돌면서 팬들의 우려를 샀으나, 결국 한화 이글스에 잔류하면서 한화 팬들이 쾌재를 부르고 있다.

2018 시즌, 2군에서 콜업되어 올라오는 선수들 대부분이 맹활약하면서 도대체 서산에서 어떤 마술을 부리는지 모두가 놀라워하고 있다. 특히 영원히 잉여로 남을 것이라고 비관했던 강경학이 2루수 자리에서 빛과 법전이라 불릴 정도로[30] 된 것을 보고 당장 1군 코치로 올려야 한다는 팬들의 아우성이 빗발치고 있다. (투수들 역시 서산에 다녀오면 구속이 늘어난 상태로 올라와 정민태 2군 투수코치에도 찬사가 이어졌다.[31]) 2군 코칭 스태프들이 한화 이글스의 상승세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한용덕 감독도 인터뷰에서 감사를 표했다.

2019 시즌을 끝으로 타나베 노리오 1군 타격코치가 세이부로 복귀[32]하면서 2020 시즌부터 1군 타격코치를 맡게 되었다. 후술할 듯이 술을 좋아하는 성격과 2군 생활이 잘 맞는데다 육성 관련 보직을 선호하던 성향을 보였기에 1군으로 올라오기는 바랐으나 그것이 현실화되리라곤 기대하지 않았던 팬들이 환호했다.

1군으로 올라온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타격에 정답은 없다”며 선수에게 코치의 색을 입히는 스타일이 이닌 선수 개개인이 지닌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을 찾도록 도와주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아마 이러한 코칭 스타일 덕분에 2018 시즌 2군에서 올라온 선수들의 스윙에 자신감이 드러났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오프시즌마다 타 팀에서 러브콜이 있었지만 한화에서 성과를 내고 싶어 잔류해왔음이 알려져 팬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그러나 정작 1군 타격코치를 맡은 2020 시즌, 한화 1군의 타격이 매우 답답한 모습을 보이는 상황인지라 평이 매우 나빠졌다. 결국 6월 6일 장종훈, 정민태, 정현석 코치와 함께 1군에서 말소되었다.

2020 시즌 후 재계약이 불발되면서 4년 만에 한화를 떠났다. 이후 2021년부터 한양대학교 야구부의 인스트럭터로 활동 중이다.


4.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4
삼성
39
59
.186
11
2
0
1
3
6
0
9
.271
.294
1985
103
300
.283
85
16
0
13
51
40
5
54
.467
.393
1986
102
344
.288
99
22
(3위)
1
8
48
47
3
41
.427
.362
1987
99
344
.332
(4위)
111
11
1
22
(1위)
70
(3위)
59
(2위)
2
48
.569
(2위)
.413
(3위)
1988
96
314
.350
(2위)
110
18
2
10
54
54
7
65
.516
(5위)
.459
(1위)
1989
39
77
.247
19
3
0
2
13
7
0
8
.364
.314
1990
54
141
.199
28
3
0
6
20
20
0
21
.348
.302
1991
30
51
.157
8
1
0
3
5
7
0
14
.353
.328
1992
86
226
.292
66
13
0
11
50
31
1
37
.496
.392
1993
124
436
.300
(5위)
131
(3위)
18
2
28
(1위)
91
(1위)
64
(4위)
2
74
.544
(2위)
.395
(3위)
1994
105
276
.246
68
10
1
14
43
39
3
70
.442
.395
1995
44
124
.258
32
4
0
3
17
13
0
17
.363
.345
1996
22
37
.162
6
2
0
1
3
5
0
5
.297
.262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97
쌍방울
99
266
.256
68
14
0
9
45
27
0
42
.410
.348
1998
93
238
.231
55
14
3
5
26
21
0
30
.378
.314
1999
113
346
.272
94
19
0
9
48
43
1
51
.405
.363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0
SK
29
64
.266
17
0
0
2
8
7
0
11
.359
.373
KBO 통산
(17시즌)
1277
3633
.277
1008
170
10
147
595
490
24
597
.451
.376


5. 기타[편집]


  • 뛰어난 성적을 올렸지만, 부상 때문에 한 포지션에서 오래도록 활약하지 못해 각 포지션의 역대 최고 선수 선정 경쟁에서 이래저래 밀린다. 2루수로서는 롯데의 박정태와 현역인 정근우에 밀리고, 1루수에는 팀 후배이자 사상 최강의 홈런왕이 있다. 게다가 삼성만으로 한정해도 다르지 않은 것이, 1루수는 이승엽이 독보적이고 2루수 쪽은 김성래보다 강기웅의 인기가 더 높기 때문. 특히나 류중일-김성래의 키스톤 콤비보다 류중일-강기웅키스톤 콤비가 더 유명한 탓도 있다.[33] 그리고 최근에는 한시즌에도 야마이코 나바로에 비해 존재감이 부족하다.


  • 삼성 수석코치 시절이던 2013년 11월, 그 해 유독 부진해 이제 은퇴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왔던 이승엽을 보고 내년 시즌 충분히 부활할 수 있으며 30홈런과 홈런왕도 가능할 것이라는 인터뷰를 남겼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4년, 이승엽은 비록 홈런왕은 하지 못했지만 마흔을 코앞에 둔 나이에 실제로 30홈런을 기록하면서 김성래의 예측은 현실이 됐다.

  • 야구계의 소문난 주당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허구연이 밝히기를, "술을 정말 좋아한다. 술만 줄였어도 성적이 훨씬 좋아졌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

  • 어울리진 않지만 옛 별명은 꺼벙이로 길창덕 화백의 만화의 꺼벙이에서 따왔다.

  • 다리가 길다고 한다.

  • 경북 의성에서 태어난 탓에 많은 당시 이웃 주민들이 의성 김씨 본관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았다.[34]

  • 연세대학교 야구부 2년 후배인 까치 김정수에게 유독 강했다. 전설의 타이거즈에 김정수가 출연하여 밝힌 일화로, 껄끄러운 승부를 피하기 위해 김정수가 포수 최해식에게 "해식아 보내불자"라는 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은 김성래는 격분했다. 김정수는 보내불자라는 뜻이 고의4구였는데 하필 제구력이 똥망인 김정수가 헤드샷을 시전했고 결국 해태와 삼성은 벤치 클리어링을 했다. 김성래는 김정수에게 안 따지고 포수 최해식에게 달려들자 최해식은 "내가 만만하요?"하면서 맞섰다고. 근데 그 헤드샷 이후로 김성래가 김정수를 잘 공력하지 못했다고 한다.


6. 관련 문서[편집]



[1] 고향은 의성군이고, 학창 시절은 대구에서 보냈다.[2]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에는 유격수 빼고 내야를 거의 다 봤다고 할 정도.[3] 삼성 라이온즈 데뷔 시절인 84년 초반 ~ 85년 초에 잠시 겸업. 아래 선수 경력을 참고하도록 한다.[4] 외야 수비는 삼성시절의 김기태 쯤은 아니여도 그냥저냥 할 수비였다. 그리고 말년에는 쌍방울-SK로 이적을 하여 유격수와 포수를 제외한 내야 전 포지션을 선발/백업을 하였다.[5] ~5월 26일[6] 5월 27일~[7] ~6월 19일[8] 2006년 6월 20일~2008년 7월[9] 2008년 8월~2009년 4월 15일[10] 4월 16일~7월 6일[11] 7월 7일~7월 15일[12] 7월 16일~[13] ~6월 5일[14] 6월 6일~7월 24일[15] 7월 25일~[16] 40세손 'O來' 항렬로, 한때 SK 코칭스태프로 같이 일했던 7살 연하 김경기 코치의 손자뻘이고, 개그맨 김학래와는 같은 항렬이다. 김경문 전 감독은 4대 위.[17] 그러나 어머니는 결국 수술도 받아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비슷한 사례로는 롯데 염종석이 노점상을 하던 어머니의 사고 치료비 마련을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저가의 계약금만 받고서 프로에 입단했다.[18] 그래도 간혹 필요할 때는 유격수 수비를 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86년 한국시리즈.[19] 2루수 홈런왕은 장종훈의 유격수 홈런왕 기록과 함께 엄청난 기록이라 볼 수 있다. 2루수/유격수 홈런왕은 2023년 현재까지도 김성래와 장종훈이 각 포지션의 유일한 기록이다.[20] 근데, 강기웅도 수비 도중에 다치며 결국 삼성에서 필요없다 라는 식으로. 아예 전력 외에로 넣을정도로 이후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된다는 소식에 결국 자진 은퇴를 했다. 하지만, 2011년 친정팀인 삼성 라이온즈의 신임 류중일 감독이 강기웅의 복귀를 추진하고자 2군 코치로 선임한다.[21] 다만 이 시기 롯데가 비록 팀 홈런수는 적었을지언정 남두오성의 활약과 함께 0.289의 팀 타율을 자랑하는 소총타선으로 명망이 높았다. 직전 시즌인 1992 시즌의 한국시리즈 우승팀은 다름 아닌 롯데이기도 하다. 이 기록은 극단적인 타고투저 현상이 일어난 2014년 이전까지 역대 3번째로 높은 팀 타율이었다. 여담으로, 1위는 1987년 삼성의 0.300, 2위는 1999년 롯데의 0.291[22]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홈런왕의 홈런 개수와 팀홈런 꼴찌의 개수 차이가 1자리 수인 경우가 딱 두 번 있었는데 두 번 다 김성래가 홈런왕이었다.[23] 강병규의 호투로 9회말 2사까지 1-0으로 뒤지고 있다가 정영규와의 연속타자 홈런으로 이긴 경기(9회 2사에서 연속타자 홈런으로 마무리된 국내 최초 사례)와, 3-0으로 지고 있다가 9회말 끝내기 3점 홈런을 친 경기는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24] 김성래는 그나마 통합우승 경력이 있다. 류중일은 선수 시절 우승이 없다. 위에 언급한대로 준우승만 3차례나 경험해 보다가 은퇴 후 삼성 코치가 된 2002년 한국시리즈로 우승을 맛본다.[25] 당시 투타 더불어서 리그 최고령 선수는 김성래보다 한 살 많던 LG 트윈스김용수였다.[26] 물론 진짜 최고령 타자는 삼성 외국인타자였던 훌리오 프랑코였지만, 이 사람은 KBO 등록상 김성래와 같은 1961년생이었다. 실제로는 1956년생이라는 말도 있고 호적상으로는 1958년생이다. 자세한 내용은 훌리오 프랑코 참조.[27] 심지어 응원가마저 김성래의 것을 물려받았다.[28] 2루수 역시 유격수처럼 수비부담이 큰 편이라 거포가 들어가는 일은 드물다. 메이저리그에서도 2루수 출신 거포는 로저스 혼스비, 라인 샌버그 등의 소수만 있을 뿐이다.[29] 흔히 홍현우를 3루수로 기억하지만, 프로 초기에는 2루수로 뛰었고 중반에는 수비에서 노쇠화가 보인 한대화의 3루 보조로도 종종 투입되었다. 한대화가 떠난 직후인 1994~1998년 3루수로 출장했고, 1999년에 잠시 2루수로 뛰었다.[30] 강경학의 응원가 가사 중 ‘삐까뻔적’을 비틀어 만들어진 별명이다.[31] 정민태 코치는 2019 시즌 도중 송진우 코치와 자리를 맞바꾸어 1군으로 올라왔다.[32] 애초부터 세이부 라이온즈 소속을 유지한 채로 한화 이글스에 임대된 신분이었기에 한 시즌 이상 팀에 남아있기를 기대할 수 없었다. 연봉도 세이부가 지불하고 한화가 일부를 보조하는 식으로 지급되었다.[33] 개개의 성적이 아닌 두 선수를 하나의 콤비으로 봤을 때는 KBO 리그 전체로 따져도 류중일-강기웅을 능가하는 키스톤 콤비가 없다. 이것은 타 팀 팬들도 인정하는 부분. 그나마 박진만-박종호 키스톤이 이 콤비에 맞설 만하다는 의견도 많지만, 그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 역시 강기웅-류중일보다 한 수 아래라는 건 인정하는 분위기다. 대신 김성래가 뛰던 시기 유격수 주전은 다름아닌, 오대석, 정진호, 배대웅 등등 그런 선수들과 호흡을 거의 나누다 싶이 했다.[34] 무려 의성 김씨 항렬 37세손에 'O來' 항렬' 존재되기 때문에 흔히 오해받거나 혼돈되기 십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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