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한 구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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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전개
3. 사건 이후



1. 개요[편집]


2002년 8월 17일 당시 KIA 타이거즈 감독이었던 김성한이 2군 포수 김지영을 구타한 사건.


2. 전개[편집]


당시 KIA 타이거즈는 4연패를 당한 상황이었고 이에 1군과 2군의 선수 전원에 대한 특별훈련이 실시되었는데 이때 2군 소속의 포수 김지영이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 헤매던 것을 김성한 감독이 발견했다.

이에 김성한 감독은 '똑바로 하라'고 외치며 방망이로 머리를 쳤고[1] 김지영은 헬멧을 쓰고 있었으나 충격흡수 장치가 없어 머리 윗부분이 깨지며 피를 흘렸으며 곧바로 구단 지정병원인 한국병원에서 6바늘을 꿰맸다.[2]

전치 2주 진단을 받고 통원치료를 했던 김지영은 사건으로부터 한 달이 지난 이달 17일 시야 흐림과 목 통증 등 후유증으로 선수생활을 할 수 없다며 2억원의 합의금을 요구했으나 김성한 감독과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김성한 감독은 파문이 확산되자 구단 홈페이지에서 "모든 것은 저의 잘못과 불찰"이라면서도 "선수들의 헬멧을 치는 것은 체벌이라기 보다는 지도자가 독려하는 애정의 한 표현이고 훈련이나 경기에 집중하라는 의미"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기아 선수들도 "선수의 헬멧을 때린 것은 훈련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상적인 행위로 김 감독의 행위는 고의성이 담긴 것이 아니다"는 요지의 글을 구단 홈페이지에 게재했다.[3]

이에 분노한 김지영의 아내가 인터넷에 사건 관련 내용을 폭로했지만 KIA 타이거즈 측은 보상급으로 1년치 연봉인 2000만원을 제시한 뒤 방출을 할 의사를 밝혔다. 이런 대응 방식에 분노한 네티즌들은 스포츠 신문과 KBO에 이 일에 대해 다룰 것을 요구했고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KIA 타이거즈는 김지영의 설득에 나섰지만 김성한 감독은 사과를 끝까지 거부했고 KIA 타이거즈도 포스트시즌이 시작되자마자 김지영에게 보상금을 지불한 후 방출을 선언하였다.

이후 김성한 감독은 재계약에 성공했지만 2004 시즌 성적 부진을 이유로 감독직에서 끌려내려왔고 구타 문제로 인해 한동안 야구계 활동을 접었다.


3. 사건 이후[편집]


이 사건으로부터 1년 후인 2003년 7월에 두산에서 KIA로 트레이드된 최용호는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잠적 소동을 일으켰다.

이호성 살인 사건 이후 이러한 체육계의 악습이 원인이란 분석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호성도 해태-KIA에 속해 있었던 전직 선수다.[4]

김성한은 2009년 천하무적 야구단의 감독 겸 조언자로 복귀했는데 프로야구로의 복귀는 어렵다는 전망이 많았으나 2012년 10월이 되어서야 한화 이글스의 수석코치로 야구계에 복귀했다.

여담이지만 대표적인 스파르타 성향이었던 김응용 당시 삼성 라이온즈 고문이자 전 해태 타이거즈 감독이 2011년에 한 인터뷰에서 "나는 누구처럼 선수 때려서 해골 깨지게 하는 짓까지는 안 했다."는 말로 이 사건을 은근슬쩍 꼬집었다.[5]

2018년 김성한은 진천선수촌장으로 내정되었으나 철회되었는데 이는 프로 선수 출신이 아마추어 선수를 관장하는 촌장이 되는 것에 대한 불만족도 있었지만 이 사건이 재조명되면서 철회됐다는 것이 사실상 정설이다.[6]

그리고 감독이 선수를 구타하는 악습은 18년이 지나도록 하나도 개선되지 않아 결국 2020년 6월 26일 여자 트라이애슬론최숙현 선수가 자살로 22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심지어 가해 감독과 선수들은 재판석에서 유족들의 면전에 '죽은 건 안타까운데 우리가 사과할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는 망언을 퍼부어 온 국민을 공분하게 하였다.

2022년 7월 전설의 타이거즈에 김성한과 구한성이 출연하자 어느 시청자가 김성한이 감독을 맡았던 시절 논란이 많았던 국토대장정에 대해 질문할 때 김성한이 이 사건을 다시 꺼냈는데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구타 사건의 원인이 있다고만 간략히 언급했다.
[1] 김지영 측은 방망이로 3회 연속 내리쳤다고 주장했다.[2] 중상이라고 표현한 곳도 있지만 병원 진단은 전치 2주다.[3] 그만큼 기아가 해태 시절의 빡센 군기가 당시까지도 강하게 남아 있었다는 빼도박도 못할 증거다. 1994년에 당시 OB 베어스 감독이었던 윤동균의 체벌 위협에 주축 선수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생각해 보자. 실제로 김성한 구타 사건 이후 1년 이내에 기아로 트레이드된 선수들은 팀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팀을 패배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거나, 잠적 소동을 일으켰다.[4] 해태 타이거즈군기반장 계보는 김일권 - 김성한 - 이순철 - 송유석 - 이호성으로 이어졌다.[5] 사실 김응용도 해태 감독 시절에 승리투수 요건을 갖췄음에도 방수원을 조기강판시키거나 한대화를 발로 걷어차는 모습을 보이면서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한대화는 이후 선수에서 은퇴하고 나서도 김응용이 사장으로 있었던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로 부임하는 등 자신이 재기한 이유에 대해 김응용의 감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김응용의 팔순연 때 방수원과 한대화를 불러서 당시의 행동을 후회하는 발언을 하였지만 선수를 때려서 해골 깨지게 하는 짓까지는 안 했으니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외국인 선수에게 헤드락을 걸어본 게 전부다 한대화나 김성한이나 프로 데뷔 이후 김응룡 밑에서 선수-코치 생활까지 줄줄이 했지만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던 한대화와 달리 김성한이 문제였을 뿐.[6] 더군다나 김성한이 진천선수촌장으로 내정된 시기는 2019년 체육계 성추문 폭로사건으로 대한민국 스포츠계가 제대로 뒤집어졌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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