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애(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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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순애.jpg
성명
김순애(金淳愛)
생몰
1889년 5월 12일 ~ 1976년 5월 17일
본관
광산 김씨
출생지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독립운동에 뛰어들다
2.3. 대한애국부인회
2.4. 대한민국 임시정부
2.5. 해방 이후
3. 가족 관계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편집]



2.1. 초년기[편집]


김순애는 1889년 5월 12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소래 마을(송천리)에서 아버지 김성섬(金聖蟾)과 어머니 안성은(安聖恩)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광산 김씨로, 서울의 양반 명문가였지만 고조부때 소래 마을로 낙향한 이후 가축 사육과 황무지 개간으로 소유지를 넓혔으며, 김성섬 대에 이르러 만석꾼의 대지주가 되었다. 이후 소래 마을은 이 집안을 김참판댁이라 불렀다. 또한 1884년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피신한 개신교도 서상륜이 한국 최초의 교회를 설립했을 때, 김순애의 집안 전체가 개신교를 받아들여 독실한 신자들이 되었고, 마을에 소래교회와 학교를 설립하여 지역교육활동에 앞장섰다.

김순애 역시 기독교 신앙을 배경으로 자랐지만 여섯 살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 밑에서 성장했다. 그녀는 집안에서 세운 소래학교에 입학해 신식교육을 받았다. 이때 그녀의 조카이자 일제 강점기 시기 독립운동의 동지가 될 김마리아도 이 학교에서 공부했다. 당시 한국 최초의 교회가 세워진 소래 마을은 선교사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던 곳으로, 언더우드 선교사를 비롯한 서양 선교사들이 이 마을을 자주 방문해 주민들을 지도하곤 했다. 특히 김순애의 셋째 오빠 김필순은 총명하고 적극적이어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주목을 받았고, 언더우드의 권유로 서울에 유학가서 배재학당에 입학해 새로운 서구 문물과 신앙 교육을 체득했다.

김필순은 배재학당을 졸업한 뒤 1899년 제중원의학교(濟衆院醫學校)[1]로 진학해 그곳에서 의학 공부를 하면서 새록스 교수의 조수 겸 통역으로 일했으며 에비슨 교수를 도와 해부학 교과서를 번역했고, 외과총론, 화학, 해부생리학, 내과학 등 많은 의학서적을 우리 말로 번역했다. 또한 그는 김순애의 둘째 오빠 김윤오와 함께 김형제상회를 경영해 가족의 생계를 이끌었다. 1901년, 김필순은 서울 생활이 자리잡자 어머니와 동생들을 모두 서울로 이주시켰다. 이때 김필순과 의형제를 맺은 안창호는 김형제상회 상층에 마련된 사무실에서 활동했고, 차이석, 안태국 등이 이곳에서 안창호를 도우며 사무를 보았다.

김순애는 이러한 집안 분위기에서 일찍이 민족과 나라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며 성장했다. 그녀는 상경 후 연동여자중학교에 입학했다. 연동여학교는 정신여학교의 전신으로, 1887년 미국 장로교의 여선교사 애니 앨러스가 재중원 사택에서 여학생 교육을 위해 시작한 학교였다. 이후 1895년 종로 4가로 이전했고, 1903년에는 교명을 연동여자중학교로 변경했다. 이 학교는 1907년 제1회 졸업생을 시작으로 많은 여성 민족운동가를 배출하는 민족적인 여학교로 발전했으며, 1909년에 정신여자중학교로 인가되었다. 김순애는 이 곳에서 성경, 한문, 역사, 지리, 산술, 도화, 습자, 체조, 음악, 가사, 위생 등 다양한 근대 과목을 공부했다. 특히 교사 김원근에게 한국 역사를 배우면서 민족의식이 투철한 그에게서 애국정신을 습득했다.

연동여자중학교는 당시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운영되던 교육기관이어서 학비나 생활비를 받지 않았고 학생 전원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것을 학교방침으로 삼았다. 하지만 오빠 김필순은 자기 집안 아이들이 외국인의 동정을 받으며 무료로 교육받는 것은 민족의 긍지에 허물이 된다고 여기고 한 사람당 80원씩 학비를 계산해서 지불했다. 김순애는 1909년 6월 3회 졸업생으로서 연동여자중학교를 졸업했다. 이 무렵, 그녀는 평생의 반려자가 될 김규식과 만났다. 당시 김규식은 미국 유학 후 귀국한 뒤 새문안교회에서 언더우드의 조수로 일하고 있었고 같은 교회에 다니던 김필순과 절친한 사이였다. 1906년 무렵에 김규식과의 혼담이 있었지만, 김순애가 결혼보다는 공부에 더 뜻을 두고 있어서 성사되지 않았다고 한다.

김순애는 1909년 부산 초량소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그녀가 어떤 연고로 부산 지역의 교사로 오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는 한일병합 후 학교에서 한국사 교육이 금지된 상황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하숙집에서 학생들에게 비밀리에 한국역사와 지리를 가르쳤다. 그러다가 105인 사건으로 오빠 김필순이 체포될 위기에 몰리자, 김필순은 검거를 피해 서간도 통화현으로 피신하여 그곳에 병원을 개업했다. 김순애는 오빠를 뒤따라 1912년 6월 어머니와 김필순의 가족을 데리고 통화현으로 망명했다.


2.2. 독립운동에 뛰어들다[편집]


김순애와 가족들이 망명한 통화현에는 이회영 등이 건설하고 있던 조선 독립군 기지와 조선인촌이 있었다. 김필순은 이 곳에서 병원을 열고 모든 수입의 대부분을 독립군의 군자금이나 이회영의 신흥강습소의 운영자금으로 제공했다. 그러나 일제의 압박이 거세지자,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북으로 이동했다가 1916년 내몽골 근처 치치하얼에 정착했다. 김필순은 이곳에서 병원을 개설하고 땅을 구입해 조선인촌 건설에 착수했다.

김순애는 이러한 오빠의 사업에 힘을 보탰다. 그녀는 치치하얼에서 늘 말을 타고 조선인촌의 농토를 둘러보곤 했다. 그러면서 공부에 전념해 사립 명덕여자중학교에 입학해 중국어와 영어를 배웠고, 다양한 과목을 수학하며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았다. 또한 그녀는 오빠의 심부름을 도맡아 때로는 행상 차림으로, 떄로는 하인이나 어리숙한 중국 시골아낙 복장으로 돈이나 편지를 감추고 서병호나 김규식에게 전하곤 했다.

이렇듯 김순애는 오빠의 연락책으로 김규식과 자주 접하면서 차츰 그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사실 그녀는 고된 시집살이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독신주의를 고집했다. 그러나 병석에 있던 어머니 안씨가 "너를 시집보내지 않으면 내가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고 애원하자, 그녀는 김규식과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김규식은 첫 아내와 사별한 처지였는데, 김필순의 소개로 김순애와 만나 1918년 12월 말 난징의 어느 선교사 댁에서 김순애와 결혼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혼례를 치른 지 불과 십여 일만에 상하이로 갔다가 이듬해 1월 말 김규식이 파리 강화 회의에 가서 파리 장서를 전달하고자 중국을 떠나면서 헤어졌다.

김순애는 훗날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간단한 혼인서약과 사진 한 장으로 대신한 결혼이지만, 남편이 떠나기 전 2주간은 단 한 번의 합방도 못할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고 회고했다. 남편은 외교특사의 계획과 준비로, 자신은 낮에는 신한청년당 일에 전념했고 밤에는 프랑스에 갈 남편의 의복 바느질로 매일 밤을 꼬박세웠다고 한다.[2] 이후 김순애는 2월 중순경 신한청년당의 서병호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 대표파견건과 국내 독립운동의 궐기 독려를 위해 상하이를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김순애는 부산에서 조카 김마리아를 만나 상하이 지역의 활동을 알리고 각자 활동을 위해 다시 헤어졌다.

김순애는 대구 지역을 담당하여 백남채 등 기독교 인사들과 만난 뒤 광주를 거쳐 2월 24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그녀는 서울에서 김필순이 근무했던 제중원의학교에 환자로 가장하여 들어간 뒤 간호원의 도움으로 함태영 목사와 비밀리에 접촉하고 상하이 독립운동 상황과 김규식의 파리 강화회의 파견 및 지원 요구 등 당의 지령을 전달했다. 함태영은 서울에서도 이미 거족적 독립선언대회가 추진되고 있음을 알려주고, 서울은 위험하니 즉시 평양으로 가서 상하이 및 파리 강화회의 파견에 대한 내용을 보고하라고 알렸다. 이에 따라 평양으로 간 그녀는 김애희와 비밀리에 만나서 평양에 있는 민족대표들에게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을 알렸다. 그 후 속히 평양을 탈출하라는 주변의 권고에 따라 3.1 운동에는 가담하지 못하고 2월 28일에 국내를 떠나 만주로 향했다.

김순애는 치치하얼로 돌아간 뒤 헤이룽장 국립여자사범학교의 학감으로 취직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한인 동포들을 규합하여 만세시위운동을 계획, 추진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본영사관에 연행되어 취조받았다. 그들은 남편의 행방을 묻고 독립운동 상황에 대한 것을 취조했다. 이에 김순애는 밤을 샌 취조를 받으면서도 중국어로 취조 내용을 모두 부인하고 자신은 평범한 중국 여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일본 영사는 원하는 답변을 들을 수 없음을 알고 중국 경찰에 넘겼고, 김순애는 중국 관헌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로 탈출해 위기를 모면했다.


2.3. 대한애국부인회[편집]


상하이에 도착한 김순애는 1919년 4월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여성들을 모아 대한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부인회 대표로 선출되었다. 출범 직후 다수의 여성들이 가담해 6월 경에는 회원수가 60여 명으로 확대되었고, 적십자회를 조직하고 적십자 활동을 위한 연습 준비에 착수하는 등 비교적 원활한 운영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들은 국내외의 여러 지역에서 애국부인회 뿐만 아니라 적십자회까지 조직되어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다양한 부인회와 연계해 여성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19년 6월, 김순애는 상하이 애국부인회 회장으로서 교민간의 친목과 정보 교환 및 출판 활동을 목적으로 국내 및 각지 애국부인회에 서신을 보내 앞으로 통신과 연락을 취해 상호 이익과 도움을 주자고 권했다.

그해 9월, 애국부인회의 부서 및 역원이 선정되어 회장, 부회장 외 총무, 서기, 회계, 출판부, 교제, 사찰 등의 부서를 두었다. 김순애는 조직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회장 직에 이화숙을 선임하고 자신은 집사장을 맡아 뒤에서 후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대한애국부인회는 상하이 임정 및 임정의 중요 인맥과 유기적인 연관을 가지고 임정의 외곽지원단체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임정의 요원으로서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활동을 비밀리에 행하고, 상해에서는 부녀자들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업들을 추진했다.

대한애국부인회의 출범은 이후 해외 각지의 애국부인회 조직으로 이어져 해외 여성역량의 결집이란 성과를 거두었다. 1919년 9월 훈춘에서 대한애국부인회, 1921년 3월에는 천진에서 애국부인회가 조직되었고, 뒤이어 간도부인애국회 등이 차례로 조직되었다. 또한 대한애국부인회는 독립자금 모금 및 공채소화를 통해 임시정부재정을 조달하고, 군무부의 의용병을 권유하는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그리고 망명지사나 독립군의 편의를 제공했으며, 독립전쟁준비를 위해 적십자회의 간호부 양성에도 힘을 더했다. 또한 독립운동 관련 사진첩을 만들어 세계에 보내 지지기반을 확보하고 독립운동사료나 선전자료 수집에 종사했으며, 한국지도 및 태극기를 제작하여 보급하고 임시정부의 회의장을 준비하는 등 애국심을 고취하고 임시정부활동을 선전하는 대중계몽 사업도 추진했다.

대한애국부인회는 교육 역시 중시하여 정애경, 김연실 등 회원들이 인성학교 교사로서 구국교육의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회원들은 자신들이 제작한 자수 제품을 수집하여 임시정부에 헌납했고, 외국인들이 이 제품을 상당한 가격에 매입해 임정 경비에 보탬이 되었다. 그 밖에도 필요한 재정확보를 위해 1922년 4월 유료 가무극대 연주회를 개최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다.

김순애는 유능한 외교관 역할도 도맡았다. 그녀는 애국부인회 회장 김원경, 김연실 등과 함께 1920년 3월 8일부터 4월 3일까지 7회에 걸쳐 상하이의 남녀학교를 돌면서 한중문제란 주제로 연설해 중국 청년들에게 한국을 이해시키는 데 기여했다. 당시 순회강연회의 주제는 '국적을 대함은 군기재정에만 아니오 교육에 있다', '대한적십자사 선전연설', '여자청년회의 직책', '한국독립과 세계평화의 관계와 한중 양국의 병진할 필요', '한국독립운동에서 치열한 학생 활동', '일화배척이 중국에서 실패한 이유', '한국독립운동과 인민의 만행' 등이었다.

<독립신문>에 따르면, 김순애는 5회 강연에서 자신이 9년 전에 조국을 떠나 중국에 입국한 이유와 한중 관계에 대해 연설하면서 "9년 전에 중국에 와서 일천만 한국 여자를 대하여 한중 양국의 제휴를 도모한다."고 말하자 회중이 박수를 보내며 그녀를 동포로 인정했다고 한다. 또한 6회 강연에서 김순애가 "한국독립운동에 학생의 활동이 치열하였음을 말하고 일화배척이 시베리아에서는 성공되고 중국에서 실패한 원인을 언급"하자, 청중이 눈물을 흘리고 굳게 결심을 가지기를 약속하고 중화민국과 대한민국의 만세를 합창한 후 학생 일동이 여사를 동포로 인정한다고 화답했다고 한다. 또한 김순애는 순회강연회에서 당의 기관지인 <한한청년> 120여 권을 판매해 자신이 속한 신한청년당의 선전에도 일조했다.

1922년 3월 28일, 김익상과 오성륜(吳成崙)이 일본군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암살하려 했다가 영국 여성 스나이더 부인이 애먼 총탄에 맞아 즉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임정의 입장이 곤란해졌는데, 김순애가 이를 수습하기 위해 앞장섰다. 그녀는 진심으로 깊은 애도를 담은 기념품과 위로의 편지를 스나이더 부인의 남편에게 보냈다. 그 진정성을 받아들인 남편은 애국부인회에게 호의와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으며, 일본 당국에게 김익상, 오성륜에게 선처를 베풀 것을 요청했다.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때 김순애는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파견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독립운동의 최고 영도기관을 재창출하자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확대 개편하자는 개조파로 나뉘어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신한청년당은 개조론을 지지했고, 대한애국부인회 역시 개조론을 지지했다. 그런데 신한청년당원이자 김순애의 남편인 김규식은 창조론을 주장해 신한청년당과 대립된 위치에 섰다. 이로 인해 김순애는 남편과 자신이 속한 조직의 입장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김순애는 석상에 서서 창조론과 개조론에 관해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통일하려고 선서한 일이 장쾌하다. 목적은 같으나 방법이 다르다. 나는 계통을 주장하려다가 창조라도 할까 하였다. 개조도 어렵고 창조도 어렵지만 딴 기관을 또 세우면 좋겠다.


그녀는 이 발언 후 창조파를 지지한 것으로 간주되어 애국부인회의 결정에 따라 대표직을 상실했다. 결국 이 회의는 독립운동세력의 화합과 통합을 이끌어내지 못한 채 서로 상처만 남기고 끝났고, 이후 상하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2.4. 대한민국 임시정부[편집]


김순애는 대한애국부인회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에서 활약했다. 1920년 1월 상하이에서 의용단이 결성되었을 때 유일한 여성 발기인으로서 참여하여 남녀를 불문하고 독립군이 되어서 국사에 따를 것을 서약했다. 그리고 1919년 8월 손정도, 서병호, 안창호 등이 내무부의 승인을 얻어 대한적십자회를 재건했을 때, 김순애는 대한적십자회의 회원이 되어 활동했고 이사 직을 맡기도 했다. 1920년 11월에는 상해대한거류민단 의원으로 피선되었고, 국민대표회의 이후 임시정부의 활동이 침체해 가는 상황에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자들의 옷 세탁을 도맡아 하고, 삯바느질도 하고, 하숙도 치고, 와이셔츠 공장도 경영하면서 임시정부의 명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벌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다.

1926년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제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을 때, 김순애는 금보연 등과 함께 정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리고 1930년 8월 16일 김두봉의 부인 조봉원(趙鳳元)과 임시정부 외무장 오영선의 부인 오의순 등과 함께 상하이 한인여자청년동맹을 결성했다. 상하이 한인여자청년동맹은 상하이 한인애국부인회의 정체된 활동 상태를 비판, 반성하고 보다 급진적인 활동 노선을 추구했다. 이후 상하이 한인애국부인회와 상하이 한인여자청년동맹이 서로 마찰을 빛었다가 김구 등의 중재를 통해 상하이한인애국부인회는 비교적 연장자를, 상하이 한인여자청년동맹은 16세 이상 28세 이하 연소자를 조직원으로 하도록 합의했다. 당시 김순애는 42세였지만 상하이 한인애국부인회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상하이 한인여자청년동맹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녀는 이 단체에서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측면 지원하면서 3.1운동 기념일에 항일 격문과 전단을 제작, 살포하는 등의 활동을 주도했다.

1932년 4월 2일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로 일제의 임시정부에 대한 추적이 심화되자, 임시정부와 요인들은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抗州), 전장(鎭江), 창사(長沙), 광둥(廣東), 류저우(柳州), 치장(綦江) 등지를 유랑했다. 그러다가 1940년 9월 충칭에 안착한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상의 주의와 이념이 다른 조직들을 통합하는 통일전선운동을 추진했다. 김순애는 여기에 호응하여 1943년 1월 말 대한애국부인회를 재결성하였고 그해 2월 23일에 각계 각파 부인 50여 명과 함께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개최해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현 정국은 전세계 반 파시스트 대전의 최후 승리와 우리 원수 일본 제국주의의 결정적 패망이 우리 눈앞에 박도하고 있는 위대한 역사적 신시기이다. (중략) 애국부인회는 25년 전 3.1 혁명의 위대한 유혈투쟁 중에서 탄생한 우리 역사상 신기인인 부인의 혁명단체였고 또 민족정기의 뿌리다. (중략) 지금 세계 30여개 동맹국이 모두 우리의 우군이 되어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있는 이 시기에 충칭의 혁명 여성들은 당파나 사상을 넘어 일치단혈하여 애국부인회를 재건립하여 국내와 세계 만방의 애국 여성이 총단결하여 대한독립과 민족해방을 완성하자.

대한애국부인회 재건대회 재건선언 中


국내외의 부녀는 총단결하여 전민족해방운동을 추진하되 남녀 간에 평등한 권리와 지위를 향유하는 민주주의 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여하고, 전민족 해방 운동을 총영도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옹호하며, 세계 반 시스트 부녀의 국제적 단결을 공고히 하여 전 세계 여성과 전 인류의 영원한 화평 행복을 위한 공동 분투를 하자.

대한애국부인회 재건대회 7개 강령 中


재건 애국부인회는 김순애 주석을 비롯하여 부주석 방순희, 서무부 주임 최소정, 조직부 주임 연미당, 훈련부 주임 정정화, 선전부 주임 김윤택, 사교부 주임 권기옥, 재무부 주임 강영파 등이 간부로 선출되었다. 주석에 김순애가 추대된 것은 남편 김규식이 한국 독립당계와 민족혁명당계를 아우르는 역할을 담당했듯이 그녀도 각 당 여성들의 통합을 상징하는 인물이자 여성독립운동계 원로의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애국부인회는 음력 정월 초하루 교포의 망명 생활을 위로하기 위해 다과회와 여흥을 주최했다. 또한 중국 중앙방송국을 통해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동포 여성들과 국내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광파 방송을 해 애국부인회 선전 활동을 벌였다. 또한 위문금품을 거두어 광복군을 위문했고, 1945년 봄 임시정부가 싱가포르 포로수용소에서 인계해온 한국 위안부 여성들 10여 명을 위로하고 계몽 교육해 조국 광복운동에 종사하게 했으며, 해외 각지의 한국여성단체들과의 긴밀한 연대를 구축해 임시 정부에 대한 지지 및 성원을 확대하는 데 일조했다.

1943년 5월 5일, 한국애국부인회는 중국에서 활동 중인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무정부주의연맹, 한국청년회와 함께 재중국자유한인대회를 개최하여 한국의 완전 독립을 주장했다. 이 대회는 영국과 미국의 지도자가 워싱턴 회담에서 전후에 한국을 독립시키기 전에 국제 감시 보호하에 두기로 합의했다는 신문 보도가 있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이때 김순애는 주석단으로 추대되어 한국민족의 독립, 민족국가의 건설 등을 골자로 하는 4개항의 재중국한인대회 선언 발표에 한 몫했다. 또한 대회 주석단의 명의로 각지 동포에게 보내는 공개 서신을 통해 부당한 언론 탄압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할 것을 호소했다. 아울러 각 지방 동지와 동포들에게 보내는 공개장 채택, 발표에도 관여했다.

친애하는 동지 동포 여러분! 우리들은 실로 각 동맹국의 원조를 필요로 한다. 이 위에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 민족의 공고한 단결과 자력갱생이다. 이러한 역량을 가져야만 완전 독립과 철저한 해방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일어서라! 우리 임시정부의 깃발 아래로 어느 한 사람이나 한 단체라도 모두 모이라! 그리하여 승리적인 전도(前途)를 향하여 용감히 전진하자!

재중자유한인대회, '각 지방 동지와 동포들에게 보내는 공개장'



2.5. 해방 이후[편집]


8.15 광복 이후, 김순애는 1945년 11월 임정요인 1차 환국 때 김구, 김규식, 이시영, 김상덕, 엄항섭, 유동열 등과 함께 한국에 귀환했다. 이후 그녀는 1946년부터 1962년까지 모교인 정신여자중·고등학교 재단 이사장과 이사 등으로 활약하면서 여성교육에 공헌했다. 또한 1949년 8월 2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남편 김규식이 6.25 전쟁 때 북한군에게 의해 납북되자, 그녀는 정계를 은퇴하고 남편의 생사를 알아보기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만년에는 서울에서 손자 김건필의 집에 머물다가 1976년 5월 17일 병사했다. 향년 87세.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순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3. 가족 관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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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2월 결혼식 때 김규식과 김순애

  • 김규식(1881~1950): 김순애의 남편.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총장,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부주석을 역임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 김필순(1878~1919): 김순애의 오빠. 제중원의학교를 졸업한 후 의사로서 한인들을 치료하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벌였으나 1919년 일본의 특무요원에게 독살당했다. 197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김필례(1891~1983): 김순애의 여동생. 1907년 서울 연동여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해 1916년 동경여자학원을 졸업했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가서 석사학위를 받고 김활란 등과 함께 YMCA를 창설했으며, 1927년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를 조직했다. 해방 후에는 정신여자중학교 교장 및 이사장을 맡았다. 1972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 서병호(1885~1972): 김순애의 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 제헌의정원 내무위원을 맡았고 남화학원 등 여러 교육시설을 세워 한인을 대상으로 교육사업에 힘썼다. 해방 후 교육 활동에 전념했고 6.25 전쟁 이후의 재난, 기근 구호 사업에 참여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김마리아(1892~1944): 김순애의 종고모. 대한민국 임시정부 황해도 대의원을 맡았고, 1923년 미국으로 유학해 파크 대학교시카고 대학교에서 공부해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재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가 1933년 귀국 후 신학 교육에 힘썼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김염(1910~1983): 김필순의 아들, 김순애의 조카. 1930년대 중국에서 '황제'로 불릴 정도로 이름을 날린 영화 배우. 1934년 상하이 영화잡지 《전성》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배우, 가장 친구로 사귀고 싶은 배우, 가장 인기가 있는 배우 부문 1위를 차지했다.

[1] 세브란스의과대학의 전신[2] 출처: 박규원, <상하이 올드데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