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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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승학 선생.jpg

이명
김탁(金鐸)
자 / 호
우경(愚卿) / 희산(希山)
본관
배천 김씨(白川 金氏)
출생
1881년 7월 12일
평안도 의주부 피현면 마산동
(현 평안북도 피현군 광리)
사망
1964년 12월 17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자택#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4묘역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수훈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독립운동가.


2. 생애[편집]


1881년 평안도 의주부 피현면 마산동(현 평안북도 피현군 광리)에서 배천 김씨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김덕린과 모친 강릉 최씨 사이의 2남 3녀 중 장남이었다. 1904년 경의문대[1]에 응시해 합격하였고 한성고등사법학교에서 서양 학문을 접하였다. 1907년 정미 7조약이 체결된 후부터 본격적으로 배일 운동에 나섰다가 3개월간 복역하였고, 신민회에 가입하였다. 이후 의주 극명학교의 교감이 되었는데, 1909년 순종 황제가 신의주를 방문하자 그를 맞이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장기 게양 거부 운동을 벌이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심한 고문을 받았다. 안중근이토 히로부미 저격 의거가 있은 후 일경들의 취조가 심해지자 1910년 2월, 이름을 김탁(金鐸)으로 개명한 뒤 만주로 건너가 항일 투쟁에 나섰다.

군사 훈련을 받아 의병단에서 활동하던 그는 1919년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였고, 그 국내 지부 설립을 주도하여 국내로 잠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연통제 기관과 독립단 지단 52곳을 조직한 그는 1920년에는 상하이로 건너가 안창호와 향후 노선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대한독립단, 대한청년단연합회, 의용단이 임시정부 군무부 직할 광복군사령부로 개편되었고 김승학은 군정국장 겸 군기국장이 되었다. 비밀리에 상하이에서 무기를 구매한 김승학은 국경 부근 일본 주재소 습격을 이끌었으나 1920년 간도 참변과 내분으로 인한 광복군 정부의 붕괴 후 1921년 상하이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임싱부에서 그는 독립신문을 복간시켜 그 사장이 되었고, 이르쿠츠크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였다. 1922년 복귀한 후에는 대종교에 입교하여 자주적 역사서인 신단민사를 출간하였고, 이를 북간도의 여러 중학교 교재로 보급하였다.

1923년에는 여운형 등과 함께 관동대지진 한인 학살을 규탄하는 관동진재 한인학살 경고서를 작성하였고 이듬해 임시정부 학무부 차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26년 참의부 참의장으로 임명되어 3부 통합 운동을 주도하였다. 따라서 길림에서 신민부김좌진, 정의부지청천 등과 모여 통합 회의를 벌였으나 참의부에서 내분이 벌어져 심용준이 국민부를 세웠기에 무산되었다. 1929년 김승학은 환인현 와니전자에서 일경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았고, 1930년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아 평양 암정 형무소에 복역하였다. 1934년 출소한 그는 다시 만주로 넘어가 무순에 있던 비밀 자료를 찾고 김구에게 청년들을 보내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이후 의주로 돌아온 김승학은 지청천의 추천으로 광복군 국내 제1지대의 참모장이 되어 제2지대 설립을 위해 만월대에 군영을 두고 훈련했지만 미군정에 의해 해산되었고, 독립신문 역시 폐간 조치되었다.

1947년 김승학은 김성수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었고, 이듬해 친일파 군상을 작성하였다. 하지만 1949년 김구가 암살당하자 정계 활동에 회의를 품고 은퇴하여 숙원 사업이던 독립운동사 편찬에 전념하였다. 그러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통영 욕지도로 피난했다가 부산 부산진구 화엄사에 초가 삼간을 세워 석암이라 명명하고 일대의 60대 노인들을 모아 대동노인회를 조직하였다. 1953년에는 애국동지원호회 산하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위원장이 되어 1956년 대표 문일민의 명의로 한국독립운동사를 간행하였다. 다만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집필에 전념하여 1964년 마침내 독립운동사를 완성하였다. 다만 출간되기 직전인 같은해 12월 17일에 숨을 거두었다. 향년 84였고, 장례는 일주일 후 서울 시청 광장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은 바 있고, 묘소는 고양시에 있다가 2012년 국립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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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균관 내사성이 문제를 내어 각 도에 하달한 뒤 관찰사가 전국 유생에게 그에 대한 문대를 해 올리게 하고, 그 중 일정한 수를 뽑아 서울에 소집하여 재차 시험을 치고 최종 합격자에게 직함을 주는 제도. 1894년 갑오개혁이 시행될 때 도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