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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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2. 생애[편집]


1932년 8월 22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항일빨치산 김철의 아들이라고 한다. 나중에 로병대회에 꼬박꼬박 초대되는 것을 보아서 6.25 전쟁에 참전했던 것이 분명하다. 만경대혁명학원 학생들이 6.25 전쟁 중에 김일성 친위중대로 복무했었는데, 그때 김시학도 같이 복무했을 것으로 보인다. 만경대혁명학원, 김일성종합대학 특설학부를 거쳐 모스크바대학으로 유학했다. 귀국 후 1956년 11월, 작가동맹 외국문학분과 위원을 맡았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당 부장에 임명되었다. 1970~1972년 사이에 사로청 중앙위원장을 지냈으나 1972년 12월에 해임,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1973년에 중앙방송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동하였다. 1973년 7월, 조선체육지도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75년 11월, 기자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파키스탄,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불가리아, 일본, 중국 등을 방문하면서 외국과의 방송분야 협력을 확대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 다시 당 부장에 임명되었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현성일은 그가 간부부장을 한 적이 있다고 기록했다. 1981년 10월, 중앙방송위원장에서 해임, 청년사업부 부장을 하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처음부터 여기에 임명되었던 것인지는 불명. 1982년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1982년 4월, 김일성 칠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3년 9월, 김일대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3년 12월, 중앙위원회 행정 및 소조사업부 부장을 맡았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84년 3월, 김일 장의위원, 1984년 11월, 김만금 장의위원, 1986년 4월, 김좌혁 장의위원, 1987년 8월, 리진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2년 6월, 조직지도부 부부장을 맡은 것이 확인되었으며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맡았다. 1996년 당 신소실 부장을 하다가 1998년, 림수만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개성시 책임비서로 이동했다. 그해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2003년 9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대의원 자격심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일의 측근 출신으로, 승마를 아주 잘 했다고 한다. 고급간부임에도 거만하지 않고 언제나 편하게 대해줘서 인상 깊었다고 쓰고 있는데 그가 수영할 때면 장성택이 몰래 접근해서 수영복 팬티를 벗겨버리는 장난을 치곤 했다고.

2004년에 개성시 책임비서직을 내려놓고 김일성고급당학교장으로 이동했다. 2009년 4월, 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대의원자격심사위원으로 재선되었다. 2010년 3월, 차용명에게 김일성고급당학교장 자리를 물려주었으며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가 개최되면서 중앙위원회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은퇴한 것으로 보이며 10년 동안 두문불출하였다. 그러다가 2017년, 만경대혁명학원 창립 70주년을 기념하여 국가선물관 관장 직함으로 나타나 만경대혁명학원에서 김일성에게 입은 은혜를 칭송하였으며 2018년, 5차 로병대회, 2020년 6차 로병대회 주석단에도 초대되면서 잘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2021년 7월, 7차 로병대회에도 주석단에 등장하여 김정은의 환대를 받았다.

2022년 7월, 8차 로병대회 주석단에 등장하였다. 10월 16일, 만경대혁명학원 창립 75주년을 기념하여 조선의 오늘 사이트에 <우리는 혁명학원졸업생들이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 "나는 백두의 혈통을 이어받은 만경대의 아들답게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경애하는 원수님의 령도에 충직하며 자식들도 대를 이어 주체혁명위업수행에 모든것을 다 바치도록 하겠다."라고 아첨하였다. 2023년 7월 27일, 조국해방전쟁승리 70돐 기념보고대회에 참석했으며 열병식에서 행진했다.

3. 여담[편집]


김성애의 사촌이라는 얘기가 있지만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으로 이를 극복했다 카더라.

4. 참고문헌[편집]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북한의 주요인물 2011(서울: 통일부, 2011)
  • 현성일, 북한의 국가전략과 파워엘리트: 간부정책을 중심으로(서울: 선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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