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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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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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회휘장.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경남 통영군 을)
제2대
이채오

제3대
김영삼


선거구 개편
진석중[A]
파일:국회휘장.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경남 부산시 서구 갑)
제4대
이상룡

제5대
김영삼


선거구 개편
김영삼[B]
파일:국회휘장.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부산 서구)
선거구 개편
김영삼
김동욱[C]

제6-8대
김영삼


선거구 통합
김영삼
박찬종
파일:국회휘장.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부산 서구·동구)
선거구 개편
김영삼
김승목[D]

제9-10대
김영삼
[E]
박찬종

선거구 개편
왕상은[F]
안건일[F]
곽정출[G]
서석재[G]
파일:국회휘장.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부산 서구)
선거구 분리
곽정출[H]
서석재[H]

제13대
김영삼


제14대
곽정출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김영삼
金泳三 | Kim Young-sam


파일:Kim_Young-sam_presidential_portrait.jpg

출생
1927년 12월 20일[1][2]
경상남도 통영군 장목면 외포리 1383-3
(현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 옥포대첩로 743-1)
사망
2015년 11월 22일 (향년 88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사저
서울특별시 동작구 매봉로2가길 11 (상도동)[3]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김영삼대통령묘소
재임기간
제14대 대통령
1993년 2월 25일 ~ 1998년 2월 24일
서명
파일:김영삼 서명.svg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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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김녕 김씨[1]
부모
아버지 김홍조, 어머니 박부련[2]
형제자매
여동생 김호금, 김호아, 김호임, 김두선, 김두아
배우자
손명순
자녀
아들 김은철, 김현철, 김상만[3]
딸 김혜영, 김혜정, 김혜숙
학력
장목보통학교 외포간이학교 (4학년 수료)[4]
장목심상소학교 (졸업)
통영중학교[5] (전학)
경남공립중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철학 / 학사)
병역
파일:대한민국 육군기.svg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제대 (학도병 / 국방부 본청 정훈국)[6]
종교
개신교 (예장합동)[7]
신체
168cm, 63kg, AB형
의원 선수
9
의원 대수
3, 5(민), 6, 7, 8, 9, 10, 13, 14
약칭
YS

거산(巨山)[8]



파일:김영삼대통령초상화.png

공식 초상화
1. 개요
2. 약력
5. 사상과 신념
5.1. 세계화
5.2. 자유민주주의적 가치관
5.3. 대북관
5.3.1. 한반도 평화와 남북 협력의 4대 원칙 제시
5.3.2. 6.25 전쟁 만주 폭격 발언
5.4. 종교
7. 여담
7.1. 개관
7.2. 그의 인기
7.3. 한자 선호파
7.4. 인재 발굴
7.5. 각종 타이틀
8. 어록
8.1. 제14대 대통령 취임사
9. 묘소
10. 가족 관계
11. 대중매체에서
12. 수상 내역
13. 선거 이력
14. 소속 정당
15. 둘러보기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취임 선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


2. 약력[편집]


  • 1938.3. 장목공립보통학교[5] 외포간이학교 4학년 수료
  • 1938.4. 장목공립심상소학교 5학년 편입
  • 1940.3. 장목공립보통학교 졸업
  • 1941. 통영공립중학교 퇴학[6]
  • 1947.8. 경남중학교[7] 졸업
  • 1950.5.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무소속 장택상 후보 선거운동원
  • 1951.2. 국방부 정훈국 대북방송 담당원
  • 1951. 장택상 국회부의장 비서관
  • 1951.9. 서울대학교 철학 학사
  • 1952.5. 국무총리실 인사비서관 (장택상 국무총리)
  • 1954.4. 제3대 민의원의원 선거 후보 (자유당, 경남 23[8])
  • 1954.5. 제3대 민의원의원 (초선)
  • 1955.4. 민주당 창당발기위원[9]
  • 1958.4. 제4대 민의원의원 선거 후보 (민주당, 경남 2[10], 낙선)
  • 1960.6. 제5대 민의원의원 선거 후보 (민주당, 경남 2)
  • 1960.7. 제5대 민의원의원 (재선)
  • 1961.2. 신민당 원내부총무
  • 1963.5. 민정당 대변인
  • 1963.10. 제6대 국회의원 선거 후보 (민정당, 부산 3)
  • 1963.12. 제6대 국회의원 (3선)
  • 1965.6. 민중당 원내총무
  • 1967.5. 제7대 국회의원 선거 후보 (신민당, 부산 3)
  • 1967.7. 제7대 국회의원 (4선)
  • 1969.5. 신민당 원내총무
  • 1970.7. 제7대 대통령 선거 신민당 경선 후보 (낙선)
  • 1971.4. 제8대 국회의원 선거 후보 (신민당, 부산 3)
  • 1971.7. 제8대 국회의원 (5선)
  • 1973.1. 제9대 국회의원 선거 후보 (신민당, 부산 2[11])
  • 1973.3. 제9대 국회의원 (6선)
  • 1976.5. 신민당 총재 경선 후보 (낙선)
  • 1978.11.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후보 (신민당, 부산 2)
  • 1979.3. 제10대 국회의원 (7선)
  • 1979.5. 신민당 총재
  • 1983. 민주화추진협의회 발기인
  • 1985.1. 신한민주당 창당발기인
  • 1987.5. 통일민주당 창당발기인
  • 1987.5.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고문
  • 1987.11. 제13대 대통령 선거 후보 (통일민주당, 낙선)
  • 1988.3.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후보 (통일민주당, 부산 서구)
  • 1988.5. 제13대 국회의원 (8선)
  • 1990.5.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12]
  • 1992.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후보 (민주자유당, 전국구 1번)
  • 1992.5. 제14대 대통령 선거 후보 (민주자유당)
  • 1992.5. 제14대 국회의원 (9선, 역대 최다선)
  • 1992.8. 민주자유당 총재
  • 1993.2.25.~1998.2.24.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
  • 1993.2. 무궁화대훈장 수훈
  • 1993.12. 해리먼 민주주의상 수상
  • 1995.2. 민주자유당 총재 연임
  • 1995.10. 미국 유엔협회 세계지도자상 수상
  • 1995.12. 마틴 루터 킹센터 비폭력평화상 수상
  • 1995.12. 신한국당 총재[13]
  • 1999.6.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
  • 2002.4. 일본 와세다대학 특명 교수
  • 2003.9. 자유북한방송 방송위원회 명예위원장
  • 2006.6. 원광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
  • 2008.5. 한국티볼협회 총재
  • 2009.5.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 고문
  • 2011.1. 제3회 대한민국 법률대상 입법부문 수상
  • 2011.7. 범국민 안보공감 캠페인 명예위원장


3. 일생[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영삼/일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국회부의장국무총리를 역임한 정치인 장택상비서로 일하다가,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국회의원 당선 당시 만 26세 5개월로, 현재까지도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기록되고 있다.[14]

자유당에서 정치를 시작했으나, 1954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이 통과되자 이에 반발하여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이후 제3공화국~제5공화국 치하에선 군사정권에 맞선 대표적인 야당 지도자 중 한명으로 같은 당 동지였던 김대중 등과 함께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87년 6.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진 후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와 끝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갈라서게 되었다.

이후 1990년 3당 합당으로 노태우, 김종필 등과 단일화를 하면서 오늘날 한국 보수정당 뿌리의 한축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김대중 후보를 꺾고 대통령당선되었다. 김영삼이 이끌었던 정부를 문민정부라고 칭하는데, 이는 지난 30여년 동안 이어져온 군인 출신 대통령이 아닌 '민간인 출신 대통령에 의한 정부'라는 뜻이다.[15]

퇴임 후 상도동 자택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2015년 11월 22일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패혈증과 급성 심부전증으로 사망했다. 사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3.1. 문민정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문민정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문민정부/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사상과 신념[편집]



5.1. 세계화[편집]


1994년 말 문민정부가 내놓은 사실상의 정부 정책 캐치프레이즈가 바로 세계화(Segyehwa)였다. 김영삼 대통령이 1994년 APEC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방문 중 발표했다고 해서 '시드니 선언'으로도 불린다. 다들 Globalization(Globalisation)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라고 발표하며, Segyehwa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당시 정부에서도 저 표현을 썼다.

그 해 11월 17일, 기자간담회에서 수행기자들에게 '세계화 구상'을 발표했는데, "21세기를 준비하기 위한 종합적인 국가개혁의 방향으로 세계화 전략을 추진하겠다"는 의도였다고 한다. 당시 김영삼은 밖에 나와서 두루 살피다 보니 우리가 우물 안의 개구리가 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정부와 민간이 협력해서 세계화를 해야 하며 곧 다음 세대를 위한 세계화 정책을 구체화 해서 장기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러한 국정기조로 우루과이 라운드(UR), 세계무역기구(WTO)와 선진국 경제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등을 추진하며 신자유주의 체제로 급속히 편입됐다고 평가받는다. 한승수 전 부총리는 "김 대통령 재임 중에 우리나라 경제가 많이 개방되었고 OECD에 가입한 것은 치적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반면 대외환경에 대한 이해 부족과 취약했던 대응능력으로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가 촉발됐다는 점은 오점으로 지적되고 있다.[16]


5.2. 자유민주주의적 가치관[편집]


"공산주의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가장 강한 무기는 자유의 유보가 아니라 자유의 신장이며 인권의 탄압이 아니라 인권의 보장이고 언론의 통제가 아니라 자유언론의 창달이며 민주체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

김영삼의 정치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독재에 대한 평생의 분노다. 그는 1990년 3당 합당으로 보수 세력에 편입된 이후에도 군부독재 세력을 혐오해 그를 따르던 민주계를 이끌고 초기 신한국당에서 군부 기반의 민정계들을 견제하고, 이후 하나회와 두 전직 대통령까지 숙청해 한국 보수 세력의 DNA 자체를 바꾸고자 노력하였다.[17]

경제면에 있어서도 군사정권과의 결별을 시행했다. 대통령 취임 후 과거 박정희 정권부터 이어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종식하고[18], 관 주도 경제정책을 이끈 '경제기획원'을 해체했다. 그 대신 진짜 경제적 자유주의에 좀 더 근접한 규제완화, 경제정의 실현 등을 골자로 한 "신경제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김영삼은 냉전 시절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개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탄압하는 체제라고 비판적으로 보아, 자유가 없는 세계가 잘못하면 공산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운동권 출신들을 영입하는 등[19] 인재 확보를 겸한 포용 행보를 보이면서도 극단적인 운동권과는 선을 그었는데, 예를 들어 극좌 성향 대학생 단체인 한총련에 대해 임기 당시 통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5.3. 대북관[편집]


김영삼 정권 시절 정부는 군부정권 시절 닥치고 반공식의 색깔론은 지양하면서도, 김영삼 개인의 직설적인 성격과 겹쳐져 북한에 정신 좀 차리라는 식의 할 말은 하는 스타일에 가까웠다. 한편, 정책적으로는 한반도 평화와 남북 협력 4대 원칙을 제시하고 심지어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 뻔도 했는 등 실용주의 기조 역시 이어갔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김영삼은 사실상 대한민국의 불문헌법인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른 동맹도 중요한 한편, 북한도 우리 민족임을 강조하며 반공구호를 조금 약하게 만들었다. 실제 군부정권 시절식의 반공기조는 약해져, 90년대 초반까지 공공장소에 비일비재하던 반공구호는 1991년을 전후하여 국제사회의 탈냉전시기와 더불어 죄다 없어지고, 반공교육도 공교육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던 게 이 시기이다. 대북 경수로 사업(KEDO)[20]비전향 장기수의 첫 송환이 이루어진 시기도 이때이다. 심지어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수도 있었고 실제 일정까지 잡혀있는 상황이었으나, 회담을 앞두고 김일성이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무산된 바 있었다. 이 일은 김영삼 전 대통령 본인도 매우 아쉬웠다고 고백한 바 있다. 1996년 신년연설에선 "북한 경제난의 근본원인은 과다한 군사비와 공산주의 경제체제의 비능률에 있다. 북한이 동족을 위협하는 군사력 유지에 모든 국력을 쏟아넣으면서 구호를 바라는 것은 민족에 대한 배신이며 죄악이다. 북한이 화해와 협력이라는 세계적인 추세를 직시하고 對南 자세를 바꿀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한국 보수세력의 주요 대북 담론 중 하나였던 북한 붕괴론이 등장한 건 김영삼 정부 시기라고들 한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정부 당국자들은 북한 붕괴를 기정사실화 했다고 한다. 당시 정종욱 안보보좌관은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앤서니 레이크)에게 "북한이 6개월 내지 2년 안에 붕괴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두 개의 한국』의 저자 오버도프가 전했으며, 갈루치·위트·폰먼의 공동 저서 『북핵 위기의 전말』에서는 “김영삼 대통령은 ‘김정일의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 상태도 정상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였던 이원종 전 정무수석은 "YS는 김일성의 건강이 나쁘다는 정보부의 보고를 워낙 많이 들어서 사실 북한의 붕괴를 기대하고 있었다. 김일성이 죽으면 북한은 무너진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8월 “남북의 체제 경쟁은 끝났다”며 “언제 갑자기 통일이 눈앞에 닥쳐올지 모른다”고 말해 북한의 붕괴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 # #

이후 2003년 대북송금 특검 당시에는 "어떠한 이유로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이적행위로 국민을 핵위기 속으로 몰아넣은 김대중씨는 마땅히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하며, 사법처리돼야 한다."고 말했으며, 2004년에는 "북한은 인권이 없는 나라다. 김정일을 제거하지 않으면 북한에 자유를 가져올 수 없다. 북한 정권과 대화를 통해서 뭔가를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김정일 멸망 이외에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한반도에) 평화는 없다. 북한에선 56년동안 김일성 김정일 두 사람이 정권을 잡아오지 않았느냐. 그런 독재정권이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 2006년에는 "다 죽어가는 김정일 독재정권을 우리 국민의 세금으로 지금까지 연명시킨 것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저지른 역사적 죄악이다."고 말했다.##


5.3.1. 한반도 평화와 남북 협력의 4대 원칙 제시[편집]


파일:DN19970046-00_01073905.jpg

1997년 8월 15일, 광복절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통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평화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 원칙으로 무력포기와 상호존중, 신뢰구축 그리고 상호 협력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날 광복절 경축식 연설에서 이같이 강조하면서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를 위해 북한에 경제 전반을 회생시킬 수 있는 민족개발 공동계획을 남북대화를 통해 추진하자고 말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어 우리는 북한이 변화의 길로 나온다면 얼마든지 협력할 의지와 능력이 있다고 강조하고 북한 당국의 호응을 촉구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한반도 평화와 남북 협력의 4대 원칙 제시.


5.3.2. 6.25 전쟁 만주 폭격 발언[편집]


1996년 6월 24일 전방부대를 시찰한 자리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북한은 세계의 모든 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지만 마지막으로 도울 수 있는 나라는 동족인 우리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6.25 당시에 만주를 폭격했으면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고 발언하여 당시 여야간 극한 언쟁이 오가기도 했다.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정동영 전 대변인은 해당 발언에 대해 국가안보를 해치고 4자회담[21] 성사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면서 "국가이익을 현저하게 해칠 우려가 있는 발언을 한 것은 대통령의 직무와 관련해 탄핵소추도 가능한 발언이라고 본다"는 논평을 냈고,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측에서는 "대통령 자신이 북을 자극하여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는 논평을 냈다. 집권당인 신한국당의 김철 전 대변인은 "어느 쪽의 안보를 지키려는 정당인지 의심이 들 정도라는 점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새정치국민회의는 북한에 대해 그렇게 미안하고 조심스러운지 묻고 싶다"는 논평을 냈다.[22]

당시 공방의 발단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지난 24일 중부전선 시찰 당시 발언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심각한 북한 상황과 한국전쟁의 참상을 회고하고 당시 맥아더 장군이 주장했던 만주폭격이 가능했더라면 이미 통일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면서 철저한 안보태세를 당부했다. 그러자 새정치국민회의 측은 어제와 오늘 잇따라 비난공세에 나섰고 신한국당 측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양쪽 공방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발언이 과연 우리 국민의 안보의식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줬다.

새정치국민회의 정동영 전 대변인은 만주북폭 지지 발언은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중대한 발언이라고 규정을 했다. 그러자 신한국당 김철 전 대변인은 전방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과거 통일의 기회를 아쉬워하면서 젊은 세대들에게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이같은 회상을 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는 논평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비호했다. 또 이번 발언이 한중 수교 이후 관계가 개선되어가던 당시 한중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도 논란이 됐다. 정동영 전 대변인은 한중 우호에 악영향을 초래하고 간접적으로 외환위기를 불러올 수도 있는 중대한 발언이라고 논평했고, 신한국당의 김철 대변인은 반세기전의 전쟁 상황을 기준한 대통령의 발언이 어떻게 해서 현재의 한중 한러 관계에 영향을 준다는 얘기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논평을 냈다.

새정치국민회의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전국민한테 이 발언을 해명해야 한다고 촉구했고 신한국당은 당시 공산당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이 맥아더의 주장을 지지했으며 지금도 대다수 국민들이 그대로 했다면 통일이 됐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면서 새정치국민회의가 6.25에 대한 기본적 이해도 결여되어 있을 뿐 아니라 어느쪽 안보를 지키려는 정당인지 의심이 들 정도라고 반박했다.[23][24][25]


5.4. 종교[편집]


김영삼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일찍이 할아버지 김동옥의 대에 장로회를 받아들이고 대대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1975년 손세일과의 접견에서 국민이면 누구나 모든 문제에 참여해야 된다며, 종교인의 현실 참여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피력하였다. 그런데 그 방법을 어디까지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한정하였다. 2015년 그의 사후에도 종교적 예식에 맞추어 장례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6.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영삼/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여담[편집]



7.1. 개관[편집]


  • 역대 대통령 중 보수계 정당민주당계 정당에 모두 몸을 담아본 유일한 인물이다.[26] 크게 보면 커리어를 보수정당→민주당계 정당→보수정당[27]으로 정리할 수 있는데, 저 두 번의 진영 변경이 모두 당시 정치사의 중요한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는 게 포인트다.[28] 그래서 지금도 좌우 양쪽에서 욕을 먹을 때도 칭찬을 받을 때도 있는 참 아이러니한 대통령이다.[29] 어쨌든 이런 역사 탓에 YS의 후신으로 불리는 세력은 보수정당과 민주당 양쪽에 존재한다. 그뿐 아니라 2002년, 2007년에 각각 당선된 민주당계 대통령, 보수당계 대통령이 시초는 YS키즈라고 불리는 김영삼 라인 출신들이었다는 재미있는 역사도 만들었다.[30][31]

  • 정치 인생의 대부분을 박정희 - 전두환 등 군사 독재 정권과 맞서 싸우는 일에 써왔던 인물이라 그런지 육사군인들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것 같다. 대통령 퇴임 후 일본 언론[32] 등과의 인터뷰에서 "육사는 다른 공부는 안 하고 사람 죽이는 것만 배우지 않습니까?", "육사는 바보들의 모임"[33], "박정희는 총 맞아도 싼 인물"[34] 등 과격한 발언들을 아끼지 않았다. 후술되어있듯 "전두환은 대통령도 아니데이"라는 발언도 한 것 보면 군부 출신 대통령에 반감이 무척 많았던 대통령이었다.

  • 존경하는 인물로는 한국 사람 중에서는 성격이라든가 지도력이라든가 정치가로서 조병옥을 지목한 바 있고, 외국 사람으로서는 전직 미국 대통령인 존 F. 케네디를 지목한 바 있다. 특히 케네디는, 자신이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구태 정치인으로 찍혀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케네디 대통령이 군사정권의 행보에 태클을 걸면서 빨리 이들을 석방해야 된다는 성명을 발표, 실제 미국의 눈치를 봤는지 재판도 안끝났는데 도중에 석방된 일화를 거론하며 은연중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 민주화 운동의 일환으로 단식 투쟁하던 시기와 관련해 김영삼 보름달 사건이라는 유명한 도시전설이 전해진다. 그리고 보름달 사건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또다른 도시전설이 있었는데 바로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김영삼이 노태우의 집무실에 쳐들어가 막말을 퍼부었다는 루머가 있었다. 다만 훗날 노태우는 회고록을 통해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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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법에 따르지 않고 독창적인 글씨체를 구사했다고 한다. ‘大道無門’(대도무문)은 그의 필체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붓만 왔다 갔다 한 듯 필획이 약하다는 평. 여백을 거의 두지 않고 굵은 체로 종이 전체를 메우고 있는 것에서 ‘통 큰’ 사람임을 드러낸다고 한다. 또한 글씨 속도가 매우 빠른 편이라 실제로도 일을 빠르게 결정하고 좌고우면하지 않았을 성격으로 보인다고 한다. 글씨의 기교가 거의 없고 정확한 정사각형 형태로 쓰고 있는 것은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고 올곧은 사람임을 드러낸다는 분석이다. 나름 마니아층이 있어서 그의 글씨는 한 점당 300~400만 원까지 꾸준히 경매에 낙찰된다고 한다. 최고 기록은 560만 원이었다.


  • 2022년, 민주화 이후 역대 대선후보 신뢰도 여론조사에서 보수정당 인물 중 1등을 차지했다.# 재미있는건 2050·중도·진보 지지층에선 1등을 한 반면, 60대 이상·보수 지지층에선 윤석열에 밀려 1등을 하지 못했다는건데, 이걸 보면 김영삼 대통령 호감층이 진영을 넘어 꽤나 넓게 분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퇴임 후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총 5번 대만을 찾았다. 대만을 방문하여 천수이볜 당시 총통과 면담하고 대학에서 강연을 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의 대만 방문은 단순한 외유일 뿐만 아니라 1992년 단교 이후 끊겼던 한국-대만 직항을 되살리고자 한 것이기도 했는데관련 기사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 때인 2003년에 성사되었다. 또한 재임 중인 1993년 대만대표부를 개설했다. 중국은 김영삼의 대만 방문에 불편한 기색을 보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관련 기사

  • 다만 재임 중의 대중국 외교는 괜찮은 편이었고, 특히 취임 직후인 1993년 4월 중국 허난 성 안양시 화현의 시골 마을에 사는 소년[35] 저우샤오화(周少華)로부터 참외 씨앗 66개가[36] 동봉된 취임 축하 편지를 받은 뒤 1994년 3월 방중 때와 8월 청와대에서 만나는 등의 훈훈한 일화도 있었다. 방중 당시 한국 방문 당시. 여담으로 저우샤오화의 고향인 화현 마을은 중국 내에서도 매우 낙후된 시골 마을이었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보도되면서 한중 우호를 상징하는 곳으로 급부상하여 허난 성 정부가 학교를 아예 새로 지어주고 아스팔트 도로까지 대거 포장해주는가 하면 가정 형편이 어려운 저우샤오화의 집에 특별 식량 및 한국 방문시 입을 의류를 지원하기까지 했다고 한다.[37]

  • 일제강점기 말기 창씨개명한 일본식 이름은 '가네무라 코유(金村康右)'이다. 심지어 일본 언론과 인터뷰를 보면 알겠지만 일본어도 제법 한다. 하지만 오늘날 그의 일본식 이름을 아는 대중은 매우 드문 편인데, 이는 박정희, 김대중의 일본식 이름인 다까기 마사오, 도요타 다이쥬가 넷상에서 안티들의 공격 소재로 심심찮게 이용되는 것과 달리, 김영삼의 일본식 이름은 언급이 거의 되지 않기 때문도 있을 것이다.

  • 김영삼의 아버지 김홍조(金洪祚, 1911~2008, 향년 98세)와 김영삼 본인(향년 87세)은 모두 80이 넘게 살았다. 최초로 아버지가 아들의 대통령 취임식을 본 사례다.[38] 이범숙(李範淑, 1876~1969, 향년 94세, 윤보선의 어머니), 김태향(金泰香, 1910~1999, 향년 90세, 노태우의 어머니), 강한옥(姜韓玉, 1928~2019, 문재인의 어머니)은 어머니가 아들의 대통령 취임식을 본 사례다. 매일 아침 조깅과 배드민턴을 하면서 젊은이 같은 건강함, 활력을 유지하였으며, 대통령 시절 국빈이 방문해서 청와대에 머물면 같이 조깅을 하기도 했다. 지미 카터빌 클린턴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주화 투쟁을 하던 1980년대에는 가택 연금 해제 후 민주 산악회를 조직해, 민주화 동지들이 건강을 유지하고 뜻을 모으는데도 도움되는 일석이조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39] 이런 철저한 관리 덕분에 단식 투쟁 후에도 회복이 빠른 편이었으며 만 87세까지 장수하였다.[40] 김영삼은 생전에 질산 테러 및 조폭, 경찰들과 부딪히며 위험한 고비를 수차례 넘겼으나, 심적으로 움츠러들지 않고 다음 날 김대중과 함께 국회에 등원해 여권의 잘못을 지적하는 배짱을 발하였는데, 이러한 기백 저변에는 타고난 건강 체질 + 철저한 관리 + 용기가 있었던 것이다.

  • 선친 김홍조는 거제도에서 멸치 어업을 했다.[41][42] 그냥 동네 어민 수준이 아니라, 어선 수십여 척에 멸치 가공 공장을 여러 개 갖춘 업계의 큰손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김영삼은 야당 정치인 시절부터 주요 정치인들과 재야민주화운동가들에게 명절 때마다 꾸준히 멸치 박스를 선물로 보냈다. 이때문에 정치인과 재야인사들 중에 YS 멸치 혹은 민주멸치를 받은 사람이 허다했다. 김종필이 김영삼을 조문하면서 이 멸치 박스 이야기를 언급했는데, 김영삼은 여당, 야당, 정치적 대립 관계 여부를 신경 쓰지 않고 설 선물로 멸치를 보냈다고 한다. 지금도 깨끗한 멸치는 귀한 선물이지만 당시엔 꽤나 이색적인 선물이었다. 그런데 김영삼 재임 시절인 1995년에는 멸치 가격이 급등해서 큰 난리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당시에는 '김영삼이 아버지 돈 벌게 해주려고 멸치값을 올렸다'라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물론 이 멸치값 급등 자체는 김영삼과는 무관하고, 실제로는 씨프린스호 기름유출 사고 등으로 멸치 어획량이 크게 감소한 탓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야당에서는 정부의 물가정책을 질타하고, 김영삼 정부에서 긴급 대책 자료를 만들고 멸치를 긴급 수입하는 등의 소동이 있었다.

  • 박근혜와 함께 금수저 출신 대통령으로도 자주 언급된다. 바꿔 말하면 한국에선 부잣집 출신 대통령은 이 둘뿐이고[43] 나머지 대통령들은 대부분 서민층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이런 부유한 집안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김영삼은 학생 때 전쟁에 징병되어 군복무를 수행했다. 더군다나 YS는 집안의 하나뿐인 외동아들이었다. 집안의 대를 이어줄 아들을 낳는데 집착했던 과거에 외동아들이 군대에 끌려간다는 것은 부모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같은 일이었을 것이다.[44] 또한 그 많은 재산을 민주화 운동하는데 많이 털어부었기에 금수저에 대한 반감이 강한 유권자들에게도 인정받았다.

  • 2022년 전까진 유일한 서울대학교 출신 대통령이기도 했지만[45], 2022년 서울대 출신인 윤석열이 취임하며 이 기록은 깨졌다.

  • 김영삼이 빌 클린턴을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대뜸 "Who are you!"(너 누구야!) 라고 인사를 건넸다. 화들짝 놀란 통역관이 대통령이 "How are you?"(잘 지냈어?)를 잘못 말한 줄 알고 정정했는데 나중에 왜 그러셨냐고 물어보니 경상도에선 반가운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면 "이게 누꼬?" 라고 인사한다며 그래서 Who are you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46] 그러나 통역관이 영남 방언을 모르자 "배아라(배워라)"라고 돌직구를 날리기도 했다. 그 외에도 YS 관련 유머를 보면 이 영남 방언과 관련된 유머가 많으며 실제 사례도 적지 않다.

  • YS 시리즈 내용 中에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빌 클린턴과 만나서 빌이 "I'm Hillary's husband." 라고 하자, 김영삼이 그걸 'nice to meet you' 비스무리한 인사말로 알아듣고 "Me too." (사실은 nice to meet you too 또는 you too 라고 해야 맞은 문법) 라고 답변했다는 유머가 있다. 한때 이 일화가 사실인 것처럼 항간에 퍼졌지만, 사실 이건 일본의 전 총리 모리 요시로의 일화를 차용한 것이다. 근데 나중에 일본 모리 요시로 전 총리의 일화가 구설수에 오르자, 한 일본측 관계자들은 "한국의 어느 대통령의 일화가 와전된 것."이라 해명하려 했다고 하니 뭔가 양쪽이 떠넘기기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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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칼국수를 매우 좋아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칼국수 집 단골이었다. 단골 국숫집으로 알려진 모 점포에 매년 연하장을 보낼 만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2013년 뇌졸중 증세가 악화되기 직전에는 고생 많이 했다고 따로 돈을 주고 갔는데, 이게 마지막 만남이었다고. 대통령 재직 당시에도 칼국수가 청와대 주력 메뉴로 완전히 자리잡은 바 있었다. 이 시절 청와대에 초청받은 손님들은 꼭 칼국수를 대접받았으며, 때문에 면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니은 초청받기를 꺼렸고, 또 국수의 특성상 먹어도 밥보단 배가 빨리 꺼지는 편이라 YS와 함께 칼국수를 먹었던 사람들 중에는 식사가 끝나면 몰래 다른 식당에 가서 또 식사를 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는 후문이 전해지기도 했다.[47] 나중에 문재인 전 대통령청와대에서 곰탕을 메뉴로 내놓은 부분을 이와 관련해서 개그로 연결시키기도 했다. "청와대에서 칼국수 먹고 나온 사람들은 다 배고파서 곰탕집에 모여서 2차를 했는데, 그런 일이 없도록 곰탕을 차렸습니다!" 라고 페북에 적은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당시를 겪은 사람들에게는 감회가 남다르다고 한다.

김영삼 관련 유머에도 칼국수가 단골로 등장한다. 당시 유행하던 김영삼 시리즈에는 칼국수 관련 유머가 하나씩은 들어 있었다. 임기 말에 터진 IMF 사태로 인해 인기가 바닥을 찍었을 땐 '먹으면 먹을수록 머리가 나빠지는 음식'이라는 조롱도 돈 적이 있었다. <고바우 영감> 만평에서 자꾸 먹으면 머리가 나빠진다면서 '4년 동안의 임상 실험 결과'라고 확인사살을 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 원래 김영삼은 서울대 출신이지만 머리 나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보니 더더욱 그랬다. 칼국수 애호에 대해서도 '일부러 청렴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조작한 거 아니냐'라는 비난도 없지 않았다. 물론 이런 이미지 구축의 의도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김영삼이 칼국수를 좋아한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김영삼의 단골 칼국수 식당들마다 김영삼이 남긴 휘호나 기념사진들이 걸려 있을 정도. 다만 김영삼이 생전에 가장 즐겼던 칼국수멸치 육수나 바지락으로 국물을 낸 해물 칼국수가 아니라 쇠고기사골 육수로 끓인 형태의 안동식 칼국수, 일명 안동국시로, 시중에서 먹으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해물 칼국수에 비해 좀 더 비싼 물건이다. 그렇다고 아주 사치스러운 음식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고, 보통 서울 시내의 매장에서 한 그릇에 1만 원 안팎 수준으로 판매하는 편이니 일반인들도 쉽게 먹을 만한 가격대이다. 즉 일반인들이 먹는 음식 중에서 좀 비싼 물건 정도다. # 따라서 결론을 내리자면 '이미지 메이킹을 할 필요가 있었는데 마침 좋은 소재가 김영삼 본인에게 있었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스케일은 다르지만, 이명박은 배고픕니다를 비롯한 각종 이명박의 먹방처럼 이해하면 될 듯 하다.

당시 청와대칼국수 대접에 대해 정치적인 전략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는데, 3당 합당 이전까지는 김영삼을 열렬히 지지했다고 밝힌 시사평론가 이동형은 팟캐스트 이이제이 김영삼 편에서 "김영삼은 거제시의 아버지 선단에서 잡은 멸치를 자주 선물로 보냈다. 멸치라는 게 금방 먹는 것도 아니고 두고두고 먹는 식재료이기 때문에 선물받은 사람은 먹을 때마다 YS를 생각하게 된다. 칼국수 육수 또한 멸치로 우려내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이유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낸 바 있다. 다만 YS 임기 당시 청와대에서 나왔던 칼국수는 당연히 평소 대통령이 선호하는 안동식 칼국수, 즉 '육수를 멸치로 우려내지 않은 칼국수'였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진짜 저런 의도가 있었을지는 미지수.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단골로 찾아 안동국시를 즐겼던 곳 중 한 곳인 성북구 성북동의 '국시집'이라는 음식점은 역사성을 인정받아 김영삼 사망 한 달 뒤인 2015년 12월에 서울특별시 미래유산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기사. 그 외에도 서민 음식을 많이 좋아했다고 하며 설렁탕을 먹는 사진이 사후 포털에 올라온 적도 있었다. 신사동에 위치한 '봉희설렁탕'(새절역 인근)이라는 음식점 역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단골 식당 중 한 곳이었다고 한다.

김영삼이 칼국수를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을 때 당시의 대학가에서는 YS를 폄하할 때 칼국수가 아니라 차라리 보름달빵을 먹으라는 대자보가 돌기도 했다고 한다. 그 외 김영삼의 정치적 정적이던 박철언의 처제이자 올림픽 탁구 금메달리스트기도 했던 현정화인터뷰에서 "땀 흘려 뛰고 온 운동 선수들한테 칼국수가 뭡니까?"라고 툴툴거린 적도 있었다.

5월 5일 어린이날에 초등학생을 청와대에 초청하여 간담회를 가지던 중 한 초등학생이 YS에게 "청와대에서 매일 칼국수를 드시냐?" 고 물으니 "매일 먹는 건 아니고 자주 먹는다" 고 답하자 그 초등학생이 "그러면 우리도 청와대 칼국수를 먹어볼 수 있느냐?"고 다시 물어보니 "먹게 해주겠다"고 흔쾌히 답하였다. 그러자 다시 초등학생이 "정말이냐?" 고 물어보니 YS가 껄껄 웃으면서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거짓말을 해서야 되겠느냐?" 고 답하자 초등학생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후 그 초등학생들이 진짜 청와대 칼국수를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는 보도자료가 나오지 않아 확인이 불가하다.

  • 그의 딸 김혜영(김현철의 누나)이 배우 이덕화와 국민학교 6학년때 같은 반이었다. 이덕화에게 김영삼은 친구의 아버지인 셈. 그 인연으로 이덕화는 1992년 대선 때 김영삼을 공개 지지하기도 했고 유세에도 참여했으며, 1996년 총선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남궁진과 맞붙어 단 1,400여 표 차이라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낙선하였다. 이때 선거자금으로 돈 엄청 까먹었다고. 이 때의 경험이 상당히 뼈아팠는지 이후 이덕화는 단순한 지지 선언 정도를 제외하면 정계에는 관여하지 않고 있다. 헌데 공교롭게도 이덕화는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김영삼의 평생의 숙적 중 한 사람인 전두환 역할을 맡은 바 있다. 물론 해당 드라마가 전두환 까는 내용도 많은걸 고려하면..


  • 김영삼이 평소 가장 아꼈던 차남 김현철은 아이러니하게도 YS 정권 당시 한보 스캔들 여파로 구속당한 이후 사실상 정계에서 퇴출되었지만 꾸준히 재기를 노렸는데, 원랜 무소속으로라도 부친의 고향이기도 한 거제시 지역구에 여러차례 출마하려 했으나 당시 한나라당 내부 사정 등으로 이를 무르고 공천 결과를 기다렸으나, 과거 구속 전례 등 공천받기엔 워낙 여건이 좋지 않아 결국 공천을 못 받았고 2012년에도 새누리당 소속으로 공천받지 못하자 결국 당시 당권을 잡고 있던 박근혜에 대한 악감정도 있고 해서인지 당을 탈당했다. 이후 연장선상인지 2012년 대선에선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고, 2014년 하반기 재보궐선거에는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를 시사한 적도 있었으나 여론의 반발 등으로 성사되진 못했다. 2016년 총선에서도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출마할 가능성이 점쳐졌고, 이에 대해 구체적인 기사도 나왔으나, 2015년 말 부친의 사망 후 충격 때문에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부친의 기념사업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다만 제19대 대통령 선거 때도 김현철은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고, 이후 더불어민주당에도 입당해 당원이 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에서도 찬밥 신세가 이어지자[48] "이 당에선 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며 탈당했고, 이후 보수당이 수구화되면 부친의 간판은 떼라는둥 정치적 훈수 행보를 이어가다 2022년에는 윤석열을 지지하는 행보도 보인다.[49] 대선 이후엔 YS가 철거한 조선총독관저를 윤석열 정부가 복원하려 한다는 기사가 뜨자 이에 절대 반대하기도 했다.

  • 전국 각지의 관공서에 사진이 걸린 마지막 대통령이기도 하다. 1993년 취임 당시부터 걸렸던 사진은 이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근엄하게 입을 굳게 닫은 사진이었으나, 1994년부터 국민들에게 친근히 다가가기 위해서 맨 위의 사진처럼 웃는 사진으로 바뀌었다.[50] 그러고 나서 후임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권위주의 타파라는 이유로 재외공관 등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통령 사진을 걸지 않기로 하면서 이 관행은 사라지게 된다.

  • 관공서 대통령 사진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에 대한 경칭인 '각하'가 쓰인 마지막 대통령이기도 하다. 역시 김대중 전 대통령부터 '대통령님'이란 호칭으로 바뀌었다.[51]

  • 상도동에 장기간 거주했다. 김영삼계를 지칭하는 상도동계라는 명칭도 여기서 비롯됐다. 1960년대에는 상도동이 영등포구에 속해 있어서 영등포구로 주민 등록이 되어 있다가 1973년, 관악구가 영등포구에서 분구되고 상도동도 관악구에 편입되면서 관악구로 주민등록이 이전되었다가 1980년, 동작구가 관악구에서 또 분구되고 상도동도 동작구로 편입된 이후 서거할 때까지 동작구로 주민등록이 되어있었다.

  • 김두한 전 의원과 같은 시기에 정치 생활을 했고 그와 같은 당이었던 적도(자유당, 신민당)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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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김두한, 두 번째가 김영삼.
야인시대에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등장했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김두한이 3김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궁금해하기도 했다.[52] 위의 사진은 국회의원 야구대회 사진이고, 김영삼이 나중에 퇴임 후 2010년대에 김두한 이야기를 인터뷰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야인시대에서 나왔던 것처럼 김두한은 부하들 끼니를 챙겨주고자 김영삼을 포함한 동료 의원들에게 돈을 빌리곤 했고, 김영삼은 김두한을 '머리랑 언변은 좋은데 글은 못 읽는 사람' 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김두한 의원은 자신에게 온 편지들을 읽을 줄을 몰라 김영삼을 찾아와서 좀 읽어달라고 한 적도 많았다고 하는데, 이는 평소 김두한에게 "이렇게 작고 예쁜 손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느냐?"며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는 김영삼에게 호감을 느낀 김두한이 YS를 만나고자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 인재를 판단하는 통찰력 및 안목이라는 혜안 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고, 동지이자 맞수인 김대중보다 다른건 몰라도 이 방면에서는 한 수 위였다. 3김이 한국 정치 무대에서 퇴장한 뒤 한국 정치를 좌우해온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김영삼의 손을 잡고 정계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노무현이명박. 또한 이회창, 손학규, 이재오, 정의화, 김영춘, 박형준, 안희정, 이광재, 심재철, 최기선, 박재호[53] 등의 인재를 발굴해 내었는데, 알다시피 노무현과 이명박은 대통령까지 되어 치적을 남겼고, 이회창 또한 3 대선에서 존재감을 보였으며, 손학규 또한 경기도지사와 민주당 당대표를 역임했다. 이재오는 이명박 정부 시절 이명박의 왼팔 역할을 했고, 정의화는 18대 국회에서 부의장을, 19대 국회에서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안희정 또한 노무현의 측근에서 노무현을 보좌하다가 이후 충남지사가 됐으며, 민주당의 유력 대선 주자로 떠오르기도 했다. 김영춘 역시 문재인 정부에서 해수부 장관직을 수행하였다. 최기선도 인천시장을 두번이나 역임했다. 박재호는 3전 4기 끝에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현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당시 변호사였던 문재인박원순의 발탁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당시엔 이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어 김영삼의 영입 제안을 거절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도 나중에 대통령과 서울시장이 되면서 정치적 거물이 되었다.

  • 이명박 정부 시절 이명박이 정운찬을 국무총리로 임명하면서 중용했는데, 이 시기에 정운찬과도 상당히 친해졌다.

  • 5공 때 가택연금을 당하던 시절 상도동 옆집에 살던 당시 국민학생인 이규희와 친해졌다. 당시 10살이던 이규희씨는 운동 중인 김영삼에게 인사하고, 김영삼이 나올 수 없으니 이규희가 놀러 가며 김영삼이 이규희를 '꼬마동지'라 부르고 자신은 '대장동지'라 하며 친해졌다. 이규희가 부모님이 해준 음식을 들고 가기도 하고, 김영삼도 아버지 김홍조 옹이 보낸 멸치를 나눠주기도 했다. 서슬퍼른 5공 경찰들도 10살 꼬마는 수색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일하게 김영삼의 집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던 사람이었기에, 이를 이용해 김영삼의 편지를 숨겨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에는 이 시절 이야기들을 『꼬마동지 대장동지』라는 책으로 내고, 이 때 인세로 심장병에 걸린 어린이의 수술을 도왔다. 결혼 후 한 때 미국으로 떠났다 상도동의 그 집으로 돌아오고, 어머니가 되어 아들을 데리고 김영삼을 만나기도 하고, 김영삼의 사망 후 빈소도 방문하였다.[54] 관련기사

  • 상기했던 2003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일본에 대한 감정과는 별개로, 통역 없이 일본어로 인터뷰를 진행했을 정도로 일본어 실력이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영삼이 어린 시절을 보낸 당시의 시대를 생각해 보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다.[55] 처음에는 약간 머뭇거리는 듯한 말투였으나, 인터뷰가 진행될 수록 예전의 감을 찾아가는지 현지인과 별 다를 것 없는 억양을 보였다.


  • 알고보면 전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과 유사한 점이 많다. 우선 자연인으로서의 프로필만 보더라도, 두 사람 다 유복한 집안 출신이며, 키가 168cm에, 체중 또한 63kg이랑 62kg으로 거의 비슷하다. 둘 다 각각 6.25 전쟁보어 전쟁에 참전한 참전용사들이며, 결혼했을 당시 아내의 나이도 22살, 23살로 거의 비슷하며, 아내와 총 5명의 자식을 낳았다는 점에도 동일하다. 성격적으로 보더라도 둘 다 배포와 통이 크고, 한량아적 성격과 유머 감각, 다혈질이라는 점도 매우 유사하다. 정치인으로서 볼 경우, 두 사람 모두 보수주의 정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자유주의 정당으로 옮겨가서 활동했다가, 다시 보수 정당으로 돌아와서 정부 수반의 자리에 오른다. 정부 수반의 자리에 오른 나이도 만 66세로 동일하다. 자유주의 정당에서 활동한 이력 때문인지, 두 사람 모두 보수정당 내 온건파라고 할 수 있는 자유보수주의, 보수자유주의 성향이라는 것도 유사하다. 또 소속 정당 내 소수파로서, 각각 당 내 다수파인 민정계, 화독파와 대립했다. 심지어 김영삼과 처칠이 대립했던 당 내 다수파인 민정계와 화독파 또한 각각 국가주의, 군국주의적 성향을 띠는 정치세력과, 그런 정치세력집권한 나라에 유화적인 정치세력이라는 점에서 연계되는 부분이 있다. 또 극우의 입김이 강한 이웃 나라에 대해 매우 강경했다는 것도 유사하다. 정부수반으로서의 첫[56] 임기가 5년 정도였다는 것도 동일하고, 심지어 정부수반으로 취임하고 5년 후에 치러진 정부수반 선출 선거에서 승리한 제1야당이 사실상 거의 처음으로 안정적인 집권에 성공했다는 점도 동일하다.[57]


7.2. 그의 인기[편집]


집권 초반[58]에는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도입, 부정부패 사정[59] 및 공직자 재산 공개 제도화[60] 등으로 초반 지지율이 90%를 상회했었다. 이러다보니 집권 첫 해인 1993년에는 방송국 코미디 프로에서 뜬금없이 도우미 복장[61]을 한 김영삼 전 대통령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했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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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그를 소재로 한 유머집 YS는 못말려도 발간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원래 이 'YS는 못말려' 시리즈는 유머 1번지 작가 출신인 장덕균이 세간에 떠돌던 유머를 모으고 그 자신도 여러 개를 창작하여 1993년 대전 엑스포에 맞추어 펴낸 것이다. 상단 사진의 2권은 장덕균이 아닌 다른 편집자가 PC통신 유머를 끌어모아 엮어낸 것이다.[63] 그와 관련된 여러 유머 시리즈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다시 회자되기도 했다.

김영삼을 주인공으로 한 무협소설도 나왔다. 그것도 팬픽처럼 대충 쓴 게 아니라 무협 1세대 작가 중 손꼽히는 사마달이 쓴 작품으로 전 12권 분량의 대하소설이다. 대도무문 문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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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그 외에도 심지어 PC용 게임(메인 게임은 퍼즐, 보스전은 대전 액션 게임형식이라기엔 스트리트 파이터 2를 베낀 수준)까지 등장할 정도였으며 양종철이 김용삼 역으로 나온 정치풍자 코미디 영화 YS!안녕하십니까? 도 있다.

물론 단순히 인기가 많았기 때문만은 아니고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김영삼 본인이 자신을 소재로 한 풍자작품 등을 만드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농담이 아니라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만 해도 풍자 한번 잘못하면 코렁탕을 먹을 수 있던 시대였기도 했고. 전임인 노태우는 그래도 물태우라는 별명도 쓰였듯 6월 항쟁의 결과로 제도적 민주화가 이뤄졌기에 이전 정권들보단 많이 유연해졌지만 노태우 역시 근본은 군인 출신이었고, 전두환과 달리 자신을 비판했다고 잡아가서 고문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노태우 정권 때는 너무 심한 풍자를 할 경우 고발하여 조사하거나 하는 경우는 있었다고 한다. 김형곤 문서의 방귀개그 문단으로.

다만 'YS는 못말려'를 비롯하여 당시 나온 풍자작품들의 경우 김영삼을 희화화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고, 김영삼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위 대도무문만 해도 사상 초유의 가상정치무협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왔지만 주인공 곡운성(김영삼을 모티브로 한 인물)은 부정적인 면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인간형이다. 이런 점은 시대적 한계로 볼 수도 있다.


7.3. 한자 선호파[편집]


한글로만 된 신문은 읽지도 않아요.[65]

[66]

- 월간조선 2001년 2월호 내용 중 조갑제 편집장과의 상도동 사저 인터뷰에서[67]

사적으로 한자 선호자로 알려져 있어서 친필 사인에도 한글 대신 한자로 사인을 하는 편이었다.[68] 하도 많이 뿌려대서 '영삼시계'란 별명을 갖고 있는 청와대 기념품 시계에도 김영삼은 한자로 사인했고 이 사인이 널리 알려져 있다. 또 상기했듯 신문을 읽을 때도 한글로 된 신문은 보지도 읽지도 않는다고 인터뷰한 바 있다.

또한 퇴임 후에도 한자교육은 국민들의 인식능력이 향상된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면서, 한자 선호에 대한 애정과 자신감을 보이기도 하였고, 한자교육 강연회에도 곧잘 참석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하였다. 다만 같이 3김으로 묶여있던 김대중김종필도 평소에 국한문혼용체로 글을 썼던 것을 보면 사상이나 신념의 문제라기보다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국한문혼용체를 쓰던 것이 당연시되었던 시대에 정치활동을 한데다가, 사회전반적으로도 한문학 지식을 가진 인재를 높게 평가하던 시절에 교육받고 활동했던지라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즉, 세대차인 것. 막말로 지금 세대 중에서도 한자교육을 실컷 받았는데 사회에서 점차 효용 가치가 떨어진다면 공부한게 억울해서라도(...) 한자 병용하자고 주장할 법 하다.


7.4. 인재 발굴[편집]


1968년에는 정치학을 지망하던 서석재를 발탁하여 자신의 비서로 채용하여 정계에 입문시켰고 1970년에는 서울대학교 운동권 출신 김덕룡을 발굴하여 정계에 데뷔시켰다. 1971년 유신 선포 이후에는 김동영, 최형우도 측근으로 발탁하였다. 이들은 김영삼의 최측근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김동영과 최형우의 활동은 두드러져 '좌동영 우형우'라는 별칭이 생겼다. 그의 휘하에는 수많은 반군정, 반독재 성향의 정치 지망생들이 모였다.

1988년에는 인권 변호사로 이름이 알려지던 노무현을 발탁하여 정계에 입문시켰고, 안희정 또한 김영삼 측의 통일민주당 보좌관으로 근무했었다. 문재인도 김영삼에 의해 영입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하는 과정에서, 노무현과 안희정은 김영삼과 갈라섰다. 1992년 이명박을 민자당으로 픽업해온 것도 김영삼 본인이었고, 1993년에 권좌를 차지한 뒤부터는 이재오, 손학규, 이회창, 심재철, 박형준, 김문수 등 여러 사람을 민자당 및 신한국당에 넣었다. 홍준표, 이인제, 홍사덕 등도 그가 픽업했다. 이와 같은 인물들을 주축으로 역사상 가장 성공한 개혁 공천으로 평가 받는 95년 공천을 통해 사실상 보수 내부에 새로운 분위기를 불어넣었고, 한국의 보수주의 사상이 단순히 반공 안보만을 울부짖던 수준에서 벗어나 시장주의, 자유주의, 세계화를 지향하는 안티테제적 이념을 주입시켰다.

즉, 과장 좀 섞어 민주당으로 넘어간 인재들까지 포함해보면 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는 그냥 본인이 발탁한 인재들이 민주당계, 보수정당계 가릴 것 없이 정계를 좌지우지하다시피 했고, 2010년대에도 YS키즈들의 영향력이 계파 수준에서 상당히 남아있다 2020년대 들어서야 겨우 퇴장하는 모양새니 어찌보면 본인 정계 은퇴 후에도 거의 한국 정치사 30여년을 설계해놓고 간 셈이다.[69]


7.5. 각종 타이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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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규하 이후 12년 만에, 민주화 이후 5년 만에 등장한 문민 출신 대통령
  • 삼김 중에 최초의 대통령
  • 최초의 김씨 대통령.
  • 유일하게 전직 대통령을 2명씩이나 구속한 대통령[70]
  • 김종필, 박준규와 더불어 역대 최다선 국회의원(9선)
  •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만 25세 5개월)[71]
  • 유일하게 국회에서 제명당한 국회의원
  • 최초로 대선 낙선 이후 당선된 대통령
  • 최초로 동향인 영부인을 둔 대통령[72][73]
  • 가장 많은 당적으로 선거에 당선된 대통령[74]
  • 최초로 전임자보다 연장자인 대통령[75]
  • 유일하게 임기 후에 부친상을 당한 대통령
  • 최초의 서울대학교 출신 대통령[76]
  • 최초로 군내 사조직을 실각시킨 문민 출신 대통령[77]
  • 대한민국에서 사형을 집행한 마지막 대통령
  • 가장 많은 6명의 자녀를 둔 대통령[78]
  • 생일이 가장 늦은(12월 20일) 대통령[79]
  • 최초로 국가장이 치러진 대통령
  • 보수정당 출신 대통령 중 유일하게 낙선 기록이 있는 대통령
  • 국민의힘 계열 대통령 중 유일하게 사망 시점까지 전직 대통령 예우가 제공된 대통령[80]

8. 어록[편집]


YS는 특유의 거침없는 성격과 직설적 화법으로 유명했다. 거물 정치인 치고 YS에게 비판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언론 등에서 언급된 주요 어록을 정리. 위의 일생 파트에서 언급이 된 어록들도 존재한다.

어제 한잠도 자지 못하고 여러가지 정신적으로 피로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김영삼이가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81]

바른 길, 정의에 입각한 일, 진리를 위한 길, 자유를 위하는 일이면 싸우렵니다. 싸우다가 쓰러질지언정 싸우렵니다.

1969년 6월 23일 초산테러 당시 국회연설 中


아무리 닭의 모가지를 비틀지라도 새벽이 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82]

1979년 10월 4일, 국회의원 제명 직후


나를 해외로 보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를 시체로 만든 뒤에 해외로 부치면 된다.

1983년 5월 29일,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 단식농성 후


날 감금할 수는 있어. 힘으로. 이런 식으로 힘으로 막을 수는 있어. 그러나 내가 가려고 하는 민주주의의 길은 말이야. 내 양심은, 마음은 전두환이가 뺏지를 못해! 영상

1985년 2월 8일 상도동 자택 앞에서[83]


헵상은 겔렐되었다. (협상은 결렬되었다.)

1987년 6월 24일, 전두환 전 대통령과 회담을 가진 후 했던 말. 김영삼이 어떤 인물인가를 단적으로 가장 잘 보여준 말이다.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전두환과 회담을 가지며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후 문을 박차고 나오며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로 저런 말을 했다고. 이에 대해선 유시민 작가의 '나의 한국현대사'에 나와 있다.


선거혁명을 통한 민주화가 내 지론이었으나, 이 정권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젯밤과 오늘 내내 생각한 끝에 이 정권을 완전히 타도할 것을 결심했다. 나는 박정희 정권을 타도시킨 사람이다. 기필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타도할 것이다.

1987년 대통령 선거 직후 기자회견에서


아주 악재만 아니면, 정치인이 언론에 다양하게 노출되는 게 나쁜 일만은 아니다.

야당 총재 시절, 여권에서 일부 언론을 통해 공격을 시도하자 했던 말.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기자들과 자주 모임을 가지면서 이야기를 화통하게 경청, 이들 대부분을 우군으로 끌어들이는 수완을 발휘한다. 훗날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이 "YS를 대통령으로 만든건 언론"(16:24초부터)이라 평했을만큼 YS의 친화력이 십분 발휘된 것.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

3당 합당


오늘 탄생되는 정부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불타는 열망과 거룩한 희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제14대 대통령 취임사 中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제14대 대통령 취임사 中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고통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나는 대통령인 나 자신이 솔선해야 한다는 각오 아래 오늘 나의 재산을 공개하는 바이다.

1993년 첫 국무회의 中, 이후 공직자 재산공개 시행


가 짖어도 기차는 달릴 수밖에 없다.[84]

하나회 척결 당시 하나회의 반발에 일침을 놓으며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지 않고는 이 땅의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가 없습니다.

금융실명제 긴급 명령 담화문 中


그래서 이번에 그 버르장머리를 기어이 고쳐놔야겠다.

1995년 한중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 일본 정치인의 거듭된 망언을 언급하며 영상 이에 일본에서는 '버르장머리'라는 한국어 단어 자체가 해석이 안 돼서 당황했었다는 후문이 있다.


부익부 빈익빈, 정경유착의 왜곡된 경제구조와 오늘의 경제위기도 박정희의 잘못된 정책에 기인한 바가 크다.

1999년 5월 퇴임 후 첫 성명서에서


나도 전에 초산테러 등 테러를 많이 받은 사람이라 이번 일에 큰 충격을 받았다.

2006년 박근혜가 커터칼 테러를 당하자 문병을 간 자리에서[85]


정치도, 대통령도 그 모두가 인간이 되고 난 뒤의 일입니다. 먼저 인간이 돼야 합니다.

2007년 발언. 출처 2015.11.22. 사망일 SBS 뉴스


만약 내가 하나회를 깨끗이 청산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다.

2008년 우석대학교 초청 강연 中[86]


김대중 대통령하고 나하고 관계는 6대 국회부터 동지적인 관계에 있었고, 오랜 동지적인 관계로 있었지만, 경쟁 관계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입니다. (기자들이 두 분이 화해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냐고 묻자) 아 그렇게 봐도 좋죠. 이제 그럴 때가 된 것도 아닙니까?

2009년 8월 10일, 병상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문병하며[87]


전두화이는 와 불렀노? 대통령도 아이데이. 죽어도 국립묘지 몬 간다.

2010년 이명박 전 대통령전직 대통령들을 청와대에 초청한 자리에서. 참고로 이어진 오찬에서 전두환와인을 찾자, "니는 청와대에 술 처무러 왔나?"라면서 다시 한 번 면박을 주었고, 이에 화가 난 전두환은 일찍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말이 좋아 전직 대통령들을 초청한 자리였지만, 2010년 당시 생존해 있던 전직 대통령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세 명 뿐이었고, 노태우는 이미 건강이 악화되어 참석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으므로 결국 초청이 가능한 전직 대통령은 앙숙인 전두환, 김영삼 둘 뿐이었다. 그러니 저런 사단이 안날 턱이.. 당시 청와대에서는 화기애애했다는 식의 브리핑을 내놨지만# 그거야 그냥 하는 소리고 실제로는 저런 사단이 났었다. 김영삼 특유의 깡따구와 함께, 재임 중 5.18 특별법을 제정하여 전두환을 단죄하였으며 퇴임 이후에도 결코 학살군사 반란수괴를 용서할 수 없다는 의지가 잘 드러나는 대목.


그건 사자도 아니다. 칠푼이다.

2012년 상도동 자택을 예방한 김문수경기도지사를 만난 자리에서.



8.1. 제14대 대통령 취임사[편집]



친애하는 7천만 국내외 동포 여러분, 노태우 대통령을 비롯한 전직 대통령,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내외 귀빈 여러분.

오늘 우리는 그렇게도 애타게 바라던 문민 민주주의의 시대를 열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을 맞이하기 위해 3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마침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이 땅에 세웠습니다. 오늘 탄생되는 정부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불타는 열망과 거룩한 희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저 자신의 열정과 고난이 배어 있는 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오늘 저는 벅찬 감회를 억누를 길이 없습니다. 우리 국민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저는 국민 여러분들에게 뜨거운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또한 험난했던 민주화의 도정에서 오늘을 보지 못하고, 애석하게 먼저 가신 분들의 숭고한 희생 앞에 국민과 더불어 머리를 숙입니다.

국민 여러분. 저는 14대 대통령 취임에 즈음하여, 새로운 조국건설에 대한 시대적 소명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 이 땅은 지층 깊은 곳으로부터 봄기운이 약동하고 있습니다. 지난날 우리 민족에게는 번성했던 여름도, 움츠렸던 겨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민족진운의 새봄이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결단, 새로운 출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신한국 창조의 꿈을 가슴 깊이 품고 있습니다. 신한국은 보다 자유롭고 성숙한 민주사회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사회입니다. 더불어 풍요롭게 사는 공동체입니다. 문화의 삶, 인간의 품위가 존중되는 나라입니다. 갈라진 민족이 하나되어 평화롭게 사는 통일조국입니다. 새로운 문명의 중심에 우뚝 서서,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진보에 기여하는 나라입니다. 누구나 신바람나게 일할 수 있는 사회, 우리 후손들이 이 땅에 태어난 것을 자랑으로 여길 수 있는 나라, 그것이 바로 신한국입니다. 우리 모두 이 꿈을 가집시다. 우리는 일찍이 식민지와 전쟁의 폐허에서 기적을 이루어 낸 민족입니다. 우리 다시 세계를 향해 힘차게 웅비해 나갑시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그러나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여건은 우리에게 결코 유리하지만은 않습니다. 냉전시대의 종식과 함께 세계는 실리에 따라 적과 동지가 뒤바뀌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경제전쟁, 기술전쟁의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변화하는 세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선진국의 문턱에서 주저앉고 말 것입니다. 도약하지 않으면 낙오할 것입니다. 그것은 엄숙한 민족생존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신한국을 향해 달릴 수 있는 체력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한국병을 앓고 있습니다. 한때 세계인의 부러움을 샀던 우리의 근면성과 창의성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전도된 가치관으로 우리 사회는 흔들리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국민은 자신감을 잃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위기가 있다면 그것은 외부의 도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번지고 있는 이 정신적 패배주의입니다.

이대로는 안됩니다. 새로워져야 합니다. 좌절과 침체를 딛고 용기와 희망의 시대를 열어야 합니다. 폐쇄와 경직에서 개방과 활력의 시대로, 갈등과 대립에서 대화와 협력의 시대로 바꾸어야 합니다. 불신의 사회에서 신뢰의 사회로, 나만을 앞세우는 사회에서 더불어 사는 사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변화와 개혁의 방향입니다. 제도만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행동양식까지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변화와 개혁을 회피한다면, 우리는 역사로부터 외면당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개혁은 먼저 세 가지 당면과제의 실천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첫째는 부정부패의 척결입니다. 둘째는 경제를 살리는 일입니다. 셋째는 국가기강을 바로 잡는 일입니다.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는 안으로 나라를 좀먹는 가장 무서운 적입니다. 부정부패의 척결에는 성역이 있을 수 없습니다. 결코 성역은 없을 것입니다. 단호하게 끊을 것은 끊고, 도려낼 것은 도려내야 합니다. 이제 곧 위로부터의 개혁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 모두가 스스로 깨끗해지려는 노력없이 부정부패는 근절되지 않습니다. 깨끗한 사회의 실현은 국민 여러분의 손에 의해서만 완성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경제의 활력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정부는 규제와 보호 대신에 자율과 경쟁을 보장할 것입니다. 민간의 창의를 존중할 것입니다. 정부가 먼저 허리띠를 졸라맬 것입니다. 국민은 더 절약하고 더 저축해야 합니다. 사치와 낭비는 추방돼야 합니다. 근로자는 더 열심히 땀 흘려 일해야 합니다. 기업은 대담한 기술혁신으로 국제경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정부와 국민, 근로자와 기업, 모두가 신바람나게 일함으로써만 우리는 경제를 살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주창하는 신경제입니다.

국민 여러분. 흐트러지고 있는 국가기강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부정한 수단으로 권력이 생길 때, 국가의 정통성이 유린되고 법질서가 무너지게 됩니다. 목적을 위해서 절차가 무시되는 편법주의가 판을 치게 됩니다. 이 땅에 다시는 정치적 밤은 없을 것입니다. 또 우리 사회에 있어야 할 권위를 다시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자유는 공동체를 위한 자유여야 합니다. 백범 선생의 말처럼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꽃을 심는 자유여야 합니다. 땅에 떨어진 도덕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의 교육은 미래를 준비하는 과학기술교육과 함께 사람다운 사람,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인간교육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교육입니다.

국민 여러분. 오늘부터 정부가 달라질 것입니다. 이제 청와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국가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일터가 될 것입니다. 청와대는 바로 국민 여러분의 친근한 이웃이 될 것입니다. 저는 국민이 일하는 현장, 기쁨과 고통이 있는 현장에 함께 있을 것입니다. 국민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할 것입니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고통은 나눌수록 작아지기 때문입니다.

정치 역시 달라져야 합니다. 정치를 위한 정치가 아니라 국민에게 희망과 행복을 안겨 주는 생활정치여야 합니다. 국민의 불편을 덜어 주는 정치, 국민의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정치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정부가 달라지고, 정치가 달라질 때, 변화와 개혁을 통한 살아 있는 안정이 이 땅에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정의와 화해로 새시대의 문을 활짝 열어 나갑시다. 지난날 우리는 계층으로 찢기우고, 지역으로 대립되고, 세대로 갈라지고, 이념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벽은 허물어야 합니다. 한은 풀어야만 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그늘 속에 살아온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은 위로받아야 합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더 많이 양보해야 합니다. 힘있는 사람은 더 큰 것을 양보해야 합니다. 너무나 성급하게 내 몫만을 요구하지 맙시다. 먼저 우리 공동체 전체를 생각합시다. 그리고 우리가 더 많은 몫을 갖기 위하여 더 큰 떡을 만듭시다.

7천만 국내외 동포 여러분. 저는 역사와 민족이 저에게 맡겨준 책무를 다하여 민족의 화해와 통일에 전심전력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상적인 통일 지상주의가 아닙니다. 통일에 대한 국민적 합의입니다. 김일성 주석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 협력할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안됩니다.

세계는 대결이 아니라 평화와 협력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민족과 국가 사이에도 다양한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념이나 어떤 사상도 민족보다 더 큰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합니다.

김 주석이 참으로 민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리고 남북한 동포의 진정한 화해와 통일을 원한다면, 이를 논의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 어디서라도 만날 수 있습니다. 따뜻한 봄날 한라산 기슭에서도 좋고, 여름날 백두산 천지 못가에서도 좋습니다. 거기서 가슴을 터놓고 민족의 장래를 의논해 봅시다. 그때 우리는 같은 민족이라는 원점에 서서 모든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 도처에서 민족의 긍지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5백만 해외 동포 여러분, 금세기안에 조국은 통일되어, 자유와 평화의 고향땅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국내외에서 힘을 합하여 세계 속에서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자랑스런 한민족 시대를 열어 나갑시다.

국민 여러분. 신한국의 창조는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많은 신한국인이 참석했습니다. 땀흘려 일하는 근로자, 새로운 작물로 소득을 올리는 농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 연구에 몰두하는 과학도, 시장개척에 동분서주하는 회사원, 신제품 개발에 성공한 중소 기업인, 그리고 밤새워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 자리에는 또 묵묵히 국민에게 봉사하는 공직자도 있습니다.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들이야말로 신한국 창조의 주역이요 주인입니다.

특히 이 땅의 젊은이 여러분. 세계를, 그리고 미래를 바라봅시다. 방관에서 참여로, 비난에서 창조의 길로 나갑시다. 미래는 여러분의 것이며, 신한국은 바로 여러분의 세상입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 모두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가집시다. 신한국을 창조합시다. 신한국의 창조는 대통령 한 사람이나 정부의 힘만으로 이룩될 수 없습니다. 신한국으로 가는 길에는 너와 내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모두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한국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내와 시간이 필요합니다. 눈물과 땀이 필요합니다. 고통이 따릅니다. 우리 다 함께 고통을 분담합시다. 우리는 해낼 수 있습니다. 반드시 해내야만 합니다.

자, 우리 모두 희망과 꿈을 안고 새롭게 출발합시다.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힘차게 함께 달려갑시다.

감사합니다.

1993년 2월 25일 대한민국 대통령 김영삼



9. 묘소[편집]


파일:KakaoTalk_20211225_174625590.png
김영삼 전 대통령 묘소.
사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으며 묘소는 역대 대통령 중에서는 가장 마지막으로 서울현충원 내에 조성되었다.


10. 가족 관계[편집]


  • 아버지 : 김홍조 (1911년 ~ 2008년)
  • 어머니 : 박부련 (1907년 ~ 1960년)[88]
    • 여동생 : 김호금 (1932년 ~ )
      • 매제 : 김상기 (1925년 ~ 2003년)
    • 여동생 : 김호아 (1934년 ~ )
      • 매제 : 김영모
    • 여동생 : 김호임 (1936년 ~ )
      • 매제 : 김상한 (1934년 ~ )
    • 여동생 : 김두선 (1938년 ~ )
      • 매제 : 최영욱 (1933년 ~ )
    • 여동생 : 김두아 (1940년 ~ )
      • 매제 : 김창원 (1936년 ~ )

  • 배우자 : 손명순 (1929년 ~ )
    • 장녀 : 김혜영 (1952년 ~ )[89]
      • 사위 : 이창해 (1948년 ~ )
    • 차녀 : 김혜정 (1954년 ~ )
      • 사위 : 송영석 (1950년 ~ )
    • 장남 : 김은철 (1956년 ~ )
      • 며느리 : 황경미 (1958년 ~ )
    • 차남 : 김현철 (1959년 ~ )
      • 며느리 : 김정현[90] (1960년 ~ )
    • 3녀 : 김혜숙 (1961년~ )
      • 사위 : 이병로 (1959년 ~ )
    • 3남(혼외자): 김상만[91] (1959년 ~ )


11. 대중매체에서[편집]


한국 현대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인데다가 민주화 개막 이후 첫 민간인 대통령이다보니 대중매체에서의 등장도 비교적 잦은 편이었다. 다만 대부분의 작품이 제1공화국이나 군사정권이 배경이라 야당 정치인으로 등장한다.

파일:KimYS.jpg
(길용우가 연기한 김영삼)
파일:KimYS-Y.jpg
(야인시대|정명준이 연기한 김영삼)
파일:KimYS-5.jpg
(김용건이 연기한 김영삼)

  • 제2공화국(MBC, 1989) - 길용우
  • 제3공화국(MBC, 1993) - 길용우
  • 무풍지대(KBS, 1989) - 이인철[92]
  • 코리아게이트(SBS, 1995) - 이영하
  • 제4공화국(MBC, 1995) - 임동진[93]
  • 삼김시대(SBS, 1998) - 길용우
  • 야인시대(SBS, 2002) - 정명준[94]
  • 영웅시대(MBC, 2004) - 정명준
  • 제5공화국(MBC, 2005) - 김용건
  • 격동 50년(MBC 라디오) - 성우 탁재인, 이상훈
  • 그 사람 노무현 (팟캐스트) - 성우 오인성
  • 국가부도의 날(영화) - 이호재[95]
  • 킹메이커 - 유재명[96]
  • 둘리의 배낭여행[97] - 제1편 미국 편에서 이름이 잠깐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서울특별시김포국제공항에서 뉴욕JFK 국제공항으로 비행하는 여객기조카와 함께 탑승한 고길동이, 성난 승무원 한 명[98]과 승객들이 던진 물품들을 두 손으로 막을 때인데,[99] 잘 보면 '영' 자는 돌돌 만 인쇄물 두 장에 가려진 상태로 표기되었음을[100] 확인할 수 있다.


12. 수상 내역[편집]


  • 1993년 해리먼 민주주의상
  • 1994년 비폭력평화상
  • 1995년 UN협회 세계지도자상
  • 1995년 마틴 루터 킹센터 비폭력평화상
  • 1996년 제1회 루스벨트 국제장애인상
  • 2011년 제3회 대한민국법률대상 입법부문


13.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23[101]


20,770 (44.77%)
당선 (1위)
초선[102]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2[103]


18,862 (42.98%)
낙선 (2위)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29,754 (66.87%)
당선 (1위)
재선[104]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3[105]

[[민정당|
]]

39,946 (41.65%)
3선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신민당(1967년)|
파일:신민당 벽보글씨.svg
]]

61,957 (59.23%)
4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74,589 (63.17%)
5선[106]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2[107]
83,661 (40.39%)
6선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137,826 (53.77%)
7선[108]
1987
제13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통일민주당|
파일:통일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6,337,581 (28.03%)
낙선 (2위)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72,599 (66.48%)
당선 (1위)
8선[109]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7,923,718 (38.49%)
당선 (1번)
9선[110]
제14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9,977,332 (41.96%)
당선 (1위)
[111]

역대 선거 벽보[112]

[ 펼치기 · 접기 ]

파일:ECM0120060001_0101S-1.png


파일:ECM0120060004_0094S-1.png

7대 총선
8대 총선

파일:ECM0120060012_0059S-1.png


파일:ECM0120060032_0109S-1.png

9대 총선
10대 총선

파일:ECM0120060283_0003S-1.png


파일:ECM0120060065_0011S-1.png

13대 대선
13대 총선

파일:filewastooigsoIcaptured.png

14대 대선


만 26세 5개월로 역대 최연소 의원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선거 이력이 긴 것은 라이벌 DJ도 마찬가지지만, 선거 이력의 절반이 낙선인 김대중과 달리 낙선 전력이 딱 2번 뿐이다. 박준규, 김종필과 함께 9선 의원이란 어마어마한 기록도 가지고 있는데, 사실 나머지 두 사람이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정계 활동을 10여년 정도 더 한걸 감안하면[113] 대단하긴 하다.


1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1954
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1954 - 1955
사사오입 개헌에 대한 반발로 자유당 탈당


1955 - 1960
창당

[[무소속|
무소속
]]

1960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신민당(1960년)|
파일:신민당1960글자.png
]]

1960 - 1961
창당

[[무소속|
무소속
]]

1961 - 1963
5·16 군사정변으로 인한 정당 해산

[[민정당|
]]

1963 - 1965
입당

1965 - 1967
합당[114]

1967 - 1969
합당[115]

1969
자진 정당 해산

1969 - 1980
정당 재등록

1980 - 1986
정당 해산

1986 - 1987
입당

1987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1987 - 1990
창당

1990 - 1995
합당[116]

1995 - 1997
당명 변경

1997 - 2015
탈당[117]
정계 은퇴
사망


15. 둘러보기[편집]





























[1] 호적에는 1929년 1월 14일로 기재되어 있다. 김영삼이 출생한 시대인 1920년대영아사망률이 매우 높았던 시절이라 일부러 호적에 이름을 늦게 올리는 경우가 많았기에 크게 이상하게 여길 일은 아니다.[2] 묘비에는 호적 상 음력 생일인 1928년 12월 4일생으로 기록되어있다.[3] 1969년부터 살았던 생전 거주지로 아버지가 사준 마지막 집이라고 한다. (상도동계의 뜻이 바로 이 집이다.)[4] 사실 김영삼의 경우는 한글 서명보다 한자 서명이 압도적으로 유명하다. 그 이유는 바로 영삼시계 때문이었다.[5] 현 장목초등학교.[6] 1988년 명예 졸업.[7]경남고등학교. 문재인 전 대통령의 모교이기도 하다.[8]거제시, 통영시 일대.[9] 1954.11. 사사오입 개헌에 반대하여 자유당 탈당.[10]부산광역시 서구 일대.[11] 현 부산광역시 서구, 동구 일대.[12] 당시 총재노태우 전 대통령.[13] 1997.11. 총재직 사퇴, 신한국당 탈당. 2주 차이로 한나라당에 따라가지 않았다.[14] 대한민국 정계에서 김종필, 박준규와 함께 단 3명뿐인 9선 국회의원이다.[15] 실제 집권 기간 하나회 척결 등 반민주 세력 척결에 공을 들였다. 즉, 보수정당 출신 대통령임과 동시에 정치 인생이나 행적 다수는 민주계 거물로 지낸 복합적인 면모를 지닌 대통령이다.[16] 김영삼 前대통령 서거, 경제분야 성과와 과오.[17] 이런 점은 이후 독재자들을 용서하고 정적들도 포용한 김대중과 오히려 비교되는 지점이다. 실제 90년대 김대중이 구 독재 세력을 품으려 하자, 이들을 미화한다며 시국선언까지 낭독했을 정도였다. 한국 정치사에서 이정도로 독재자를 싫어하고 평생 립서비스조차 안한 대통령이 현 보수정당의 시초라는게 어찌보면 현대사의 아이러니.[18] 물론 엄밀히 따지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이미 장면 내각 시절부터 준비하던 것이긴 했다.[19] 이재오가 대표적이다.[20] KEDO는 소위 통미봉남(코리아패싱)의 대표적 사례로 일컬어진다. KEDO는 한국을 제외한 '북미 제네바 합의'에서 도출된 것으로서, 한국의 자발적 의지없이, 비용에 대한 협상도 없이 그 사업에 막대한 비용을 청구받게 되었다. 오히려 대화가 없어서 생긴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북미 제네바 합의' 에서는 북한 측에 건설에 40억 달러 이상이 필요한 100㎿ 용량의 원자력발전소 2기 건설과 산업용 중유 50만 톤 제공하기로 합의.[21] 기존의 북미간 핵협상(예: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에서 중국대한민국을 포함시킨 4(2+2)자간의 회담을 말한다. 미 국무장관 키신저가 제안했으며, 해당 발언 2개월전인 1996년 4월 김영삼 전 대통령과 미국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한․미 공동발표문’을 통해 4자회담 개최를 공식 제의했다. 4자회담[22] 여야, 김 대통령의 6.25 만주 폭격 발언 놓고 치열한 성명전[23] 김영삼 전 대통령의 6.25 만주폭격주장 회고 관련 안보논쟁 가열 1996.6.26 kbs뉴스[24] 김영삼 전 대통령 만주폭격 발언 일파만파[25] 여야 만주폭격 공방[26] 1980년대 그가 소속한 민주당인 통일민주당은 합당 후에는 현재 보수정당의 뿌리 중 하나가 되었지만, 정작 당시엔 민주당계로 분류되었고 심지어 김대중, 노무현도 통민당에 있던 시절이 있었다. 민주당이 두개로 갈라져 그 중 하나가 보수정당이 된 복잡한 역사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27] 다만 그가 처음 정치를 시작한 자유당은 점점 타락하다 4.19 혁명으로 망했기에, 1990년대 민주자유당과 계보가 직접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사실 YS가 사사오입에 반발해 7개월만에 자유당을 탈당해서 기간도 짧긴 했다.) 이념적으로도 사실 군부 색채가 일부 끼어든 민주자유당은 (점차 우경화되긴 하지만) 자유당과 결이 다르다. 이는 일반인들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모두 독재자로 싸잡아 보지만, 일부 학자들은 민간인 출신 이승만과 군인 출신 박정희, 전두환은 좀 구분지어 보기도 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을듯.[28] 첫 번째 진영 변경은 사사오입 개헌에 항의하는 뜻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두 번째 진영 변경은 본인이 주체가 된 3당 합당이다.[29] 주로 민주 진영에선 민주화 운동의 대부 중 한명으로 치켜세우고 특히 진중한 김대중과 비교되는 김영삼 특유의 강단을 높게 평하는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이런 점은 오히려 극우 측에선 김영삼 보수 대통령 아니라고 자기부정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연출하며, 반대로 김영삼의 대표적 과오라 할 수 있는 IMF 사태에 있어서도 서로 민주당 쁘락치다 vs 보수정당 대통령이라고 욕하거나 아니면 군부독재 시절 이미 쌓여왔던 적폐가 이때 재수없게 터진 것일 뿐이라는 쉴드를 좌우 양쪽에서 쳐주는 등(실제 IMF 이전까지의 경제 성과는 괜찮은 편이었다) 참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어찌됐든 군인 출신 대통령의 시대를 마치고 본격적인 (실권을 가진) '문민 대통령'의 시대를 연 인물이라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 적지 않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임은 분명하다.[30] 때문에 사실 YS부터 DJ, 노무현, MB까지 20년을 민주계 정권으로 따로 보는 시각도 일부 있다.[31] 참고로 YS의 라이벌이자 동료였던 DJ 직계 라인들 중에선 대통령 당선자가 한명도 없는데, 2007년 대선 낙선(정동영) 혹은 2022년 경선 낙선(이낙연) 정도가 전부였다. 물론 노무현의 경우는 정확히 따지면 YS키즈였다가 삼당합당 이후 민주당으로 넘어가 DJ키즈도 된 YS+DJ퓨전키즈라고 보는게 더 정확하긴 하다만.[32] 영상.[33] 다만 김영삼이 육사 자체를 마냥 안좋게만 본건 아니라, 대통령 시절엔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축사자로 가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잘못된 것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국군의 명예와 영광을 되찾아 주는 일에 앞장설 것을 여러분에게 다짐합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34] 여담으로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일본육사(편입) 출신이다. 다만 여기서 한 발언은 육사와는 관련이 없고, 독재자 박정희가 10.26 사건으로 암살당했을 때 죽어도 싸다고 느낀 소회를 말한 것.[35] 1982년생으로 당시 만 11세가 될 무렵이었다.[36] 취임 년도 김영삼의 만 나이에 맞춘 것.[37] 다만 이후의 근황은 2003년 11월에 한 번 나왔고 이후의 소식은 알 수 없다.[38] 2022년 5월 10일에 윤기중이 아들인 윤석열의 대통령 취임식을 보게 되면서 두번째 사례가 되었다.[39] 당시 중앙정보부나 안기부 등의 도청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추측도 있다. 건물 안이나 평지에 비해 미행이 붙거나 전자 도청을 하기가 어려운 높은 산에서 정치 전략을 짜기 위해 등산을 자주 하였다는 것이다.[40] 교통사고로 무릎이 불편하게 된 DJ은 몸 운신이 비교적 편한 수영을 택했으며 또한 부인인 이희호가 헌신적으로 음식 내조를 해주었다는 후문이 있다.[41] 영화 투캅스 2에서도 이와 관련된 대화가 나온다. 이제 더 이상 대놓고 지역 유지들에게 보호세를 걷을 수 없게 되어 툴툴거리는 강형사(박중훈)를 파트너인 이형사(김보성)가 "용기를 내십쇼. 대통령도 월급받으면서 일하는 세상인데요"라 위로하자, 강형사는 "마! 대통령은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멸치어장이라도 있지"라고 되받아치고 이형사가 전혀 몰랐다는 듯이 "멸치어장이요?"라 반문하자 "넌 신문도 안 보냐?"라고 한심해하는 강형사에게 이형사는 "전 가쉽란은 안 읽습니다"라고 대꾸한다.[42] 김경진(소설가)의 첫 군사소설 동해에서도 짤막하게 나오는데, 그 유명한 멸치어장 소유자를 장문휴의 함장이 떠올리는 대목이 등장한다.[43] 물론 박근혜는 원래부터 금수저는 아니었고, 부친이 대통령+독재자 크리를 타면서 엄청난 재산을 축적하게 된다. 육영재단 항목도 참조. 결국 부친이 멸치 사업을 한 민간인 출신 진짜 금수저는 김영삼 뿐이라는 소리.[44] 그래서 1980년대까지는 조건(삼대독자)을 총족시켜야했지만 외동아들일 경우에는 일종의 병역특례를 받을 수 있었다.[45] 김영삼이 기득권층과 타협하지 않고 여러 개혁을 성공시킨 이유로 그의 무대포 성격에 비유해 "무식하니 용감했다"는 평을 쓰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 김영삼의 이미지와 달리 학력은 초엘리트였다.(...)[46] 영어에도 거의 똑같은 표현이 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look who it is!" 라며 못 알아보겠다는 척을 하는 것.[47] 김대중 전 대통령도 야당 총재 시절 영수회담을 하면서 칼국수를 대접받았는데, 한그릇으로 성이 차지 않아 회담을 마치고 나서 돌아와 당사 지하 식당으로 내려가 혼자서 해물탕 3인분을 해치우고서야 포만감을 느꼈다고 한다. 물론 이건 일반인 수준을 넘은 대식가긴 하다만. 사실 대식가 이명박에 가려져서 그렇지 DJ도 미식가+대식가 기질이 상당했다고 한다. 다만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식사량을 많이 줄였다고.[48] 애초에 냉정하게 보면 과거 스캔들을 일으켜 대중의 공분을 산 당사자를 다시 정치판에 공천한다는 것 자체가 법 논리를 떠나 이미지도 중요한 정치판에선 쉽게 할 수 있는게 아니다. 차라리 본인 대신 자식을 정치판에 밀고 본인은 킹메이커나 하는게 더 나았을듯.[49] 2021년 국민의힘 입당 직전 윤석열이 김영삼도서관을 찾아 김현철과 대담한 바 있다.[50] 파일:김영삼 관공서사진.jpg 참고로 이 사진이 기존의 근엄하게 입을 굳게 닫은 사진에서 웃는 사진으로 바뀐 1995년 ~ 1996년경에 실제로 관공서에 걸렸던 사진이다.#[51] 원래 노태우 전 대통령 때부터 "'각하' 대신 '대통령님'이라 호칭하자"는 말이 나왔고 그래서 공식적으로는 각하란 말이 사용되지 않았지만, 관습이란게 은근 무서워서 여전히 비공식적으로 대통령을 대면할 땐 각하란 호칭이 김영삼 전 대통령 때까지 사용되었다.[52] 야인시대에서는 자유당 정부 시절 젊은 YS가 유진산, 조병옥, 김두한 및 야당 의원들과 함께 원탁에 앉아 시국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53] 김영춘, 박재호, 최기선은 상도동계 직계 인물이다.[54] 다만 정재계의 쟁쟁한 인사들이 모인 자리다 보니 불편해서 오래 있진 못했다고 한다.[55] 당장 김영삼 뿐만 아니라 김대중, 김종필 등도 그 당시에 태어나서 일본어에 상당히 능숙했다.[56] 김영삼은 단임제 국가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인만큼 당연히 첫 임기밖에 없지만, 처칠은 두번째 임기도 재임했다.[57] 물론 영국은 노동당이 그렇다는거고, 노동당에 지지층 내주고 몰락하기 이전 20세기 초까지 보수당과 경쟁한 자유당은 이미 여러번 집권 경험이 있었다.[58] 임기 2년 차 4분기부터는 직무수행 평가에서 긍정 비율이 30%대로 떨어진데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 후에도 41% 밖에 얻지 못했기 때문에 중반도 인기가 없었다고 봐야 한다.[59] 사회 곳곳에 부정과 부패가 만연화되어 있던 상황이라 사회 전방위로 하루가 멀다하고 비리로 잡혀가고, 공직을 사퇴하는 기사가 1면을 장식했다. 공직자의 의심스러운 과다한 재산, 율곡 사업과 같은 방위 사업의 비리, 사행산업과 연관된 검경 등. 이러한 부정부패 관련 기사가 1면을 차지하는 것은 9월말까지 지속된다.[60] 이전 버전에 있던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는 집권 3년차 시점이라 초기도 아니었고, 지지율도 많이 떨어진 상태라 제외한다.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시점에는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지방선거의 참패로 인기가 많이 떨어져 있던 시기다. 갤럽 자료에 의하면 1995년 3분기의 업무수행에 관한 긍정 지지율은 29%다.해당 그래프[61] 지금은 널리 쓰이게 된 단어가 되었고 어떤 판촉행사의 행사 진행자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지만, 도우미는 원래 93 대전 엑스포 행사의 접객원으로 새로 창설한 단어였다. 방송에서 엑스포의 상징 중 하나로 굉장히 많은 홍보를 했다.[62] 참고로 이 코너가 등장한 당시 MBC 토요일 저녁 6시대의 코미디 프로그램은 후대의 무한도전-1박2일 같은 양강구도가 아니라 아예 MBC의 독주시대였으며 기본적으로 시청률 40%는 깔고 가던 시대였다.[63] 저자의 말로는 노태우 정권 당시 노태우를 주인공으로 한 풍자 유머집을 냈다가 안기부에 끌려가서 심문을 당했다고 한다. 고문이나 밤샘 조사 같은건 없었지만, 출판사까지 압력이 들어가서 광고도 못하고 증쇄도 못했다고 한다.[64] 위 사진의 인물들은 시계 방향으로 사담 후세인, 보리스 옐친, 빌 클린턴, 호소카와 모리히로, 덩샤오핑, 프랑수아 미테랑, 마거릿 대처.[65] 당시 한글로만 기사를 싣던 신문으로는 한겨레신문 등이 있었다. 다만 한겨레신문 창간 초기에는 김영삼이 대표적인 야당 정치인이던 시절이었고, 상당수 언론의 친정부적인 색채가 빠졌다고는 하지만 뒷돈을 받는 등 이런저런 거래를 했던 것은 여전해서 진보언론이 생기는 것이 김영삼 입장에서 나쁘지는 않았기에 직접 한겨레 신문의 주식을 사는 등 후원을 했다. 다만 오래가지 않아 3당 합당으로 틀어졌다.[66]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문민정부 때 신문의 순한글화가 진행되었다. 이유인 즉슨, 신문 인쇄의 전산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세로쓰기-국한문혼용체를 유지하기보다는 가로쓰기-한글전용으로 신문인쇄하는 것이 비용절감에 유용한데다가 편집이 간편해지기도 하고, 정부 시책으로 한글전용을 밀어붙이면서 세월이 지나고 세대가 바뀌면서 이들이 본격적으로 사회진입을 할 무렵이 되어 수요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67] 재미있는건 조갑제는 김영삼 생전에는 '좌파숙주'라면서 그를 비난한 인물이란 점이다.# 그러나 YS 사망 후 조문할 때에는 김영삼이 독재와 싸운 챔피언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68] 이는 정적이기도 했던 박정희가 한자 사인을 쓰다가 한글 사인으로 바꾼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69] 물론 더 정확하게 따지면 민주당계는 친노 이후 친문 등으로 이어지면서 사실상 YS계 수준을 뛰어넘은 독자적인 세력이 된 상태고, 보수정당 쪽도 친이 세력이 쇠락한 이후부턴 계보도적으로 확실히 이어지는 구심점은 없는 상태지만 이념적으로는 온건~개혁 보수쪽에 걸쳐있긴 하다.[70] 박근혜황교안 권한대행 체제였던 2017년 3월 31일 구속되었으며, 문재인 정부에서 구속된 대통령은 이명박 1명이다.[71] 2022년부터 대통령을 제외한 공직선거 출마 연령 하한선이 만 18세로 완화된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시행됨에 따라 이 타이틀은 깨질 가능성이 커졌다.[72]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고향경상남도 통영시(현 거제시)인데, 손명순 여사의 고향 또한 경상남도 김해시로, 같은 경남 지역 출신이다.[73] 두번째는 노무현 전 대통령. 경상남도 김해시 출신이며, 아내인 권양숙 여사는 경상남도 창원시 출신으로 역시 같은 경남 지역 출신이다. 여담으로 손명순 여사와 권양숙 여사는 초등학교 동문이다.[74] 6개의 당적을 가지고 총선과 대선에서 당선되었다. 6개의 당적은 문재인 전 대통령과 동률이지만, 문재인 전 대통령의 역대 당적 중에서 당선된 당적은 민주통합당더불어민주당 2개 뿐이다.[75] 2호는 1927년생인 전임자 김영삼 전 대통령보다 연장자인 1924년생인 김대중 전 대통령. 3호는 1946년생인 전임자 노무현 전 대통령보다 연장자인 1941년생인 이명박 전 대통령.[76] 두 번째는 윤석열. 김영삼은 철학과 출신이고 윤석열은 법과대학 출신이다.[77] 실제로 김영삼 덕분에 대다수 하나회 간부들이 정치적인 실각을 겪고, 하나회 숙군 덕에 그들이 날뛰지 못해 최종적으로 김현집, 최익봉 둘 정도만 남게 되었다. 한명은 불미스러운 사건, 그리고 한명은 임기를 못 채우고 예편하면서 하나회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후 몇 년 뒤 2017년을 기점으로 우병우, 김관진 등이 키워 주었던 알자회 출신들은 문재인 정권에서는 대다수가 강제 전역되어 실각했고 사실상 회장이나 마찬가지였던 조현천 장군은 미국에서 잠적한 상태로 사실상 국내의 군내 사조직들은 뿌리가 끊긴 상태이다. 이 점에선 김영삼의 공이 큰 셈. 거기다 동향 인생후배인 김진영 전 육군참모총장 역시 그대로 숙청되었다. 당시 항상 언급되는 타이틀 중 하나인 지연조차 개의치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78] 혼외자식 하나를 빼더라도 여전히 5명으로 최다다.[79] 17대 대통령 이명박과는 생일이 하루 차이고, 20대 대통령 윤석열과는 이틀 차이가 난다.[80] 이승만은 법률이 없어 예우 자체가 없었고(애초에 계보부터 안이어진다), 박정희는 임기 중 사망(여기도 법적 처분이 안내려졌다 뿐이지 엄밀히 따지면 쿠데타로 예우 박탈이다),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는 실형 선고 등으로 예우 박탈. 무소속이나 민주당 계열에서는 사망한 전직 대통령 전원이 예우를 끝까지 받았으므로 국민의힘 계열에서 사망 시점까지 예우를 받은 대통령은 김영삼이 유일하다. 윤석열이 임기 만료 후 사망까지 예우가 제공된다면 유일 타이틀이 깨지게 된다.[81] 연설을 들어보면 '끊어지는 한'으로 들린다.[82] 원본을 들어보면 비틀지라도베틀지라도로 들린다. 김영삼 특유의 발음.[83] 이 날은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 이후 미국의 구명으로 망명 중이던 김대중이 귀국하는 날이었고, 김영삼은 김포공항으로 김대중을 마중 나가려 했으나 이미 경찰 병력이 집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경찰들에게 일갈하던 중 나온 명언이다.[84] 본래는 투르크의 속담을 일부 변형한 것이다. #[85] 당사자나 어법이나, 김영삼 본인이 박근혜를 보는 시선을 생각해보면 이건 위로가 아니라 면전에서 대놓고 놀리는 수준이다.[86] 실제 김영삼이 신한국을 열겠다는 본인 말마따나 노빠꾸 개혁과 군부 숙청을 단행하며 초석을 다져놨기에, 이후 김대중, 노무현이 그 위에 뼈대를 세울 수 있었다.[87] 다만 안타깝게도 이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미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것이 두 사람 생전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참고로 YS가 DJ와 결별 이후 사이가 나쁠 땐 모진 말도 제법 했고 그런 말들도 어록이라면 어록이지만, 사실 이런 마지막 순간을 놓고 보면 진의가 왜곡될 소지가 있기에 다른 정치인에 대한 어록과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88] 박부련 사후 김홍조는 새 아내를 2번 들였다. 최남순(1925년 ~ 1971년)과 이수남 (1924년 ~ 2012년).[89] 배우 이덕화와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이다.[90] 김웅세 전 롯데물산/호텔롯데 월드사업부 대표의 장녀이다.[91] 김현철보다 2일 늦게 태어났다.[92] 이후 같은 작가가 쓴 야인시대에서는 이기붕 역할로 출연한다. 사실 여기 있는 김영삼을 연기한 배우들 중 외모만으로는 가장 김영삼과 닮았다. 김영삼의 아들 김현철이랑 더 닮았다. 그렇지만 김영삼 부자는 노태우 부자만큼이나 싱크로율 높은 부자로 유명하기 때문에 김영삼보다 김현철과 더 닮았다고 한들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93] 공교롭게도 이후 제5공화국에서는 김대중 역을 맡았다. 김대중 역할이 임팩트가 더 센 탓에 묻힌감이 있다. 원래는 길용우를 캐스팅하려고 했으나, 길용우 본인이 사양하면서 제작진이 임동진을 삼고초려해 캐스팅했다고 한다. 관련 뉴스[94] CJ ENM 4기 성우로, 성우 외에도 각종 촬영물에 단역으로 종종 활동했으며 정치 초년병 시절의 젊은 김영삼 역할을 맡아 특유의 말투까지 훌륭하게 재현해냈다.[95] 얼굴이 안 나오는 캐릭터로 딱 한 장면만, 그나마 얼굴이 나오는 부분도 초점이 흐리게 처리된다. 엔딩 크레딧에서는 YS로 표기.[96] 김영삼을 모티브로 한 김영호라는 가명으로 등장한다.[97] 1995년에 기획·제작된 영어 교육용 애니메이션[98] 다른 한 명은 이륙 전에 승객들에게 저녁 인사(Hello. Good evening.)를 하고 더 등장하지 않는다.[99] 창문 쪽에 앉은 이상한 승객 한 명이 승객들에게 제공하는 사탕을 모두 먹어버리고, 희동이에게 초콜릿을 주려던 승무원의 궁둥이를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이 사단이 난 것이다.[100] 한 장에는 '김' 자만, 다른 한 장에는 '삼'자만 큼지막하게 적혀 있다.[101] 통영군 을.[102]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 (만 26세 5개월)
1955년 자유당 탈당, 민주당 입당. (사사오입 개헌 반대)
[103] 부산시 서구 갑.[104] 1961.5.16. 자격정지. (5.16 군사정변)[105] 서구.[106] 1972.10.17. 자격박탈. (10월 유신)[107] 서구, 동구.[108] 1979.10.4. 제명. (김영삼 제명 파동)[109] 1990년 민주자유당 합류. (3당 합당)[110] 최다 국회의원 당선. (9선)
1992.10.13. 의원직 사퇴. (14대 대선 출마)
[111] 1997.11.7. 신한국당 탈당.[112] 제 3, 4, 5, 6대 국회의원 선거벽보는 확인 되지 않는다. 심지어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정보도서관에서 김영삼으로 검색했을 시 7대 이전의 것도 확인할 수 없다. 이는 김대중도 마찬가지.[113] 특히 김종필은 10선 의원이 되려고 부단히 용을 썼지만 결국 실패했다.[114] 민주당과 신설 합당.[115] 신한당과 신설 합당.[116]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117] 11월 7일 탈당했다. 2주 차이로 한나라당에 따라가지 않은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