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일(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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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대 광복회 회장
김영일
金永逸


파일:김영일(1925).jpg


효운(曉雲)
본관
상산 김씨[1]
출생
1925년 9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달면 육성동[2]
(현 평안북도 정주시 오성리)
사망
2011년 2월 28일 (향년 85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분당제생병원
학력
오산중학교 (5학년 / 중퇴)
국민대학교 (행정학 / 학사)
복무
대한민국 육군
기간
1949년 ~ 1979년
임관
육군사관학교 (8기 특별4반[3])
최종계급
소장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330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3. 상훈
4.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군인.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편집]


김영일은 1925년 9월 1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달면 육성동(현 정주시 오성리)에서 태어났다. 정주 오산중학교 5학년 재학 중이던 1943년 4월경, 오산중학교 동창생들과 집단으로 탈출하여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작요원이던 조병걸(趙炳傑)을 만나 그의 지도를 받고 한국광복군 화북지대에 공작대원으로 입대하였고, 장쑤성 쉬저우시에서 합법적 거점을 이용하여 애국청년 포섭공작 활동에 진력하였다.

1944년 6월부터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창설기간요원으로서 항일무장투쟁을 벌이는 한편, 박상기, 문수열(文洙烈), 한이윤과 한국광복군 기관지 『빛』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홍보활동과 동지 모집 및 호송, 연락장교 등으로 활약했다. 1945년 5월에는 섬서성 시안시에서 한·미 합동군사작전의 일환으로서 국내 진공작전을 위한 미군 OSS 특수 훈련 무전반에서 훈련을 받던 중 8.15 광복을 맞아 귀국했다.

귀국 후 1946년 9월 장호강 등과 함께 국민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수학하다가, 1949년 2월 21일 육군사관학교 8기(특별4반)으로 입교해 군인의 길을 걸었다. 같은 해 4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위에 임관한 그는 이듬해인 1950년 발발한 6.25 전쟁에도 참전했다. 이후 군 복무 중이던 1966년 국민대학교를 졸업했으며, 군문에서는 1966년 대한민국 육군본부 군수참모부 기획처장으로 있으면서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제1야전군사령부 군수참모, 1969년 주월남(駐越南) 제100군수사령부(십자성부대) 사령관, 1970년 제25보병사단장, 육군본부 비서실장, 제3군수지원사령부 사령관을 거쳐 1976년 육군대학 총장 등을 역임하고 1979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예편 후 한국비료 상임감사를 지내다가 1980년 한국해외개발공사 사장에 취임했으며, 이후 광복군동지회 회장, 광복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2008년 6월에는 제18대 광복회장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2011년 3.1절을 하루 앞둔 2월 28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 분당제생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2011년 3월 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안장되었다.

3. 상훈[편집]



  • 1951년 은성화랑훈장
  • 1953년 미국 동성훈장
  • 1969년 충무무공훈장
  • 1970년 을지무공훈장
  • 1971년 미국 육군공로훈장
  • 1977년 건국포장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4. 여담[편집]


  •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할 당시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의 낡은 판잣집에서 부모와 부인 신금화 여사, 아들 김훈, 딸 김모란, 김수선, 김수련 등 4남매까지 가족 8명이 사는 사실이 알려져 '하꼬방[4] 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2008년 6월 광복회장에 선출된 뒤에도 행사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매일 설렁탕햄버거 등 5000원 이하의 점심식사를 했다고 하며, 고인은 당시 "좋은 것 먹자 하면 한도 끝도 없다. 한 푼이라도 아껴서 광복회원들을 위해 써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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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상산 김씨 집성촌이다.[3] #[4] 판잣집이라는 뜻의 속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