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채(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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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2. 생애[편집]


1923년 7월 22일에 태어났다. 해방 이후 평양혁명자유자녀학원을 졸업한 것을 보면 항일 빨치산 2세대로 보인다. 이후 김책공대를 거쳐서 한동안은 공업 테크노크라트로 일했다. 1962년 남포통신기계공장 지배인, 1965년 평양전기공장 지배인을 거쳐 1967년에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고 1971년 6월 26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박영순의 뒤를 이어 내각 체신상에 임명되었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5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정무원이 설치되면서 기존 체신성은 교통성과 통합되어 교통체신위원회가 되었고 현무광이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김영채는 그 산하의 체신부장으로 계속 사업했다.

이후 1976년 체신부가 다시 독립된 이후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가 출범하면서 정무원 체신부장에 임명되었다. 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이 발표되지 않아서 확인은 할 수 없어도 정무원 명단에 있는 걸 봐서는 대의원에 재선되었음이 확실하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당중앙위원회로 옮겨서 1988년 9월 13일, 체신부장에서 해임되어 김창호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뜬금포로 간부부장에 임명되었다. 1990년 5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92년 간부부 제1부부장에 임명되었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2년 4월,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5년 신소실 제1부부장에 임명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이 직책을 역임하였다.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8년 9월 5일에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는 부고를 발표, "지방과 중앙의 행정경제기관들과 당중앙위원회의 중요한 직책에서 다년간 사업하면서 당의 경제정책을 관철하며 당대렬을 튼튼히 꾸리고 인민대중을 당의두리에 굳게 묶어세우기 위하여 적극 노력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김정일이 화환을 보내주었으며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당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직함으로 안장되었다.

3. 참고문헌[편집]


  • 현성일, 북한의 국가전략과 파워엘리트: 간부정책을 중심으로(서울: 선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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