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환(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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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의 수상 및 영예 /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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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kt 소닉붐 코치
SUWON kt SONICBOOM

파일:김영환2023-24.png

김영환
金榮煥 | Young-Hwan Kim

출생
1984년 7월 5일 (39세)
경상남도 창원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195cm[1]체중 95kg
직업
농구선수(스몰 포워드, 슈팅 가드[2] / 은퇴)
농구코치
학력
김해 동광초등학교 (졸업)
임호중학교 (졸업)
김해 가야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졸업)
프로입단
2007년 드래프트 (1라운드 8순위, 대구 오리온스[3])
병역
상무 농구단 (2010~2012)
소속
선수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 (2007)[4]
부산 KTF 매직윙스-kt 소닉붐 (2007~2012)
창원 LG 세이커스 (2012~2017)
부산-수원 kt 소닉붐 (2017~2023)

코치
수원 kt 소닉붐 (2023~ )
가족관계
아내, 1남 1녀
장녀 김채은 (2012년생)
장남 김승휘 (2015년생)
SNS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
2. 선수 시절
3. 지도자 시절
4. 플레이 스타일
5. 시즌별 성적
6. 여담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한국의 前 농구 선수이며 현재 수원 kt 소닉붐의 코치를 맡고 있다.

그의 선수 커리어를 보자면 소리 없는 강자라고 부를 만 하지만, 정작 소속팀 팬들에게는 까이는 때가 많았던 저평가의 아이콘이자 투명라인이었다.

LG 이적 이후 스타 플레이어로 성장한 이후 kt 복귀 이후에는 팀의 살림꾼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고 인생슛 하나로 인해 선수생활 후기부터 은퇴 시까지 그 누구보다 뜨거운 환호를 받는 선수였다.

추가로 주장직을 오랫동안 맡은 선수 중 하나다.

2. 선수 시절[편집]



2.1. 프로 지명 전[편집]


김해가야고 시절 득점기계로 명성을 날리고 양희종과 포워드 라이벌이었다. 2002년 고등학교 최고 랭킹을 놓고 경쟁을 했다. 양희종이 1위였고 김영환은 2위였다. 그리고, 고려대학교 농구부에 진학을 하게 된다. 고려대 진학 후 선배인 김동욱과 함께 고려대의 주포로 명성을 날렸던 선수다. 2005년 정기전에서 2001년 모교 대선배였던 오용준백인선이 활약한 이후 4년만에 승리의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당시 김일두 선배와 양우섭 후배와 함께 활약을 했다. 이외 동기로 신제록차재영 그리고 이영현[5]이 해당된다. 2005 이즈미르 하계 유니버시아드에서 대표팀 기수를 맡은 경력도 있다.

파일:오리온스 김진 감독 김영환 선수.jpg [6]

황금 세대로 불린 2007년 드래프트에서 한 때 로터리픽으로도 고려되었지만, 결국 1라운드 8순위로 대구 오리온스가 아닌 전자랜드 블랙슬래머에 입단하게 되었다. [7] 지명순번이 밀린 이유는 부상. 대학 초년 시절부터 달고 다닌 무릎 부상으로 인해 그에 대한 평가는 많이 낮아진 것이 사실.

결국 프로 데뷔를 앞두고 김영환은 전자랜드 블랙슬래머가 주도한 2:2 트레이드의 대상자가 되어 KTF 매직윙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이한권이홍수가 전자랜드로 갔고, 김영환과 박세원에 현금을 얹는 트레이드를 통해 KTF로 또 이적을 했다.


2.2. 부산 KTF 매직윙스-부산 kt 소닉붐 1기 시절[편집]


KBL에 오리온스가 아닌 KTF 매직윙스에서의 데뷔는 김영환에게는 제법 기회가 되었는데, 신인으로 데뷔 시즌에 49경기를 뛰면서 평균 8.3득점이라는 괜찮은 활약을 보이면서 포워드들이 많던 KTF에서도 가능성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 놈의 무릎이 또 말썽을 일으키면서 2008-09 시즌을 앞두고 무릎 수술을 받아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2009-10 시즌에는 다시 무릎 부상에서 회복하면서 신인 시절처럼 평균 8.2 득점을 넣으면서 벤치에서 활약하며 팀이 40승을 거두면서 정규시즌 2위를 차지하는데 한 몫 거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무릎 문제 때문에 면제가 나올줄 알았던 군 문제가 결국 면제에 실패하면서, 결국 상무에 입대하게 되어 공백을 가졌다. 하필 입대한 후 창단 처음으로 정규리그 우승을 하였다. 물론 4강에서는 아쉽게 떨어지긴 했지만 그리고 2011-12 시즌 막판 전역해서 팀에 합류했지만 전혀 활약하지 못하면서 팀은 4강 PO에서 탈락.

그리고 표명일의 은퇴 이후 포인트 가드가 보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부산 kt 소닉붐전창진 감독은 강동희의 송도고 후배인 김현중을 영입하기 위해 트레이드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대구 동양 오리온스 시절 잠시 인사드렸던 대스승이신 김진 감독이 있는 창원 LG 세이커스와 2012-2013 시즌을 앞두고 2:2 트레이드가 성사되었다. 김영환과 양우섭은 LG로 떠나고 김현중과 오용준은 kt로 이적했다. 양우섭을 제외하면 모두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멤버들이다.


2.3. 창원 LG 세이커스 시절[편집]


파일:김영환 12-13 시즌.jpg

파일:김영환 13-14 시즌.jpg

파일:김영환 LG 버저비터.jpg

파일:LG 김진 감독님과 주장 김영환 선수.jpg

KBL 대표명장인 김진 감독의 부름을 받고 고양 오리온스가 아닌 창원 LG 세이커스로 이적하게 된 김영환은 LG 세이커스로 트레이드 이적 이후 비교적 젊은 선수들이 많은 팀 특성으로 인해 바로 부산 kt 소닉붐의 맞트레이드 대상이었던 김현중의 후임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김현중의 트레이드 이후는 전형수가 임시 대행체제로 주장직을 맡았다.

이 트레이드는 일단 2012-13 시즌 초반에는 LG의 완승으로 끝나게 된다. 트레이드 멤버 중 김영환은 예상치도 못하게 미쳐버린 것. 과거 모교 농구부 시절 특히 고연전에서 골밑슛을 놓쳤던 흑역사와 KTF 루키 시절 골밑 대신 외곽에서 활약한 점에 이어 kt 시절 상무 입대 전후로 적응을 못한점을 보면 엄청난 변화다. 상무 입대로 인해 기량을 향상한게 큰 요인이 되었다. 추가로 김병철에게 주장을 주면서 정규리그 MVP를 만들었던 김진 감독의 책임감도 한 몫을 했다. LG 데뷔 게임이자 홈 개막전에서 3점슛 3개 포함 31득점을 올리더니 에이스로 등극하면서 평균 득점 15점을 기록하면서 팀을 떠난 귀화 출신 팀 득점왕 출신이었던 문태영의 공백을 그럭저럭 메우는 정도로 활약하고 있다. 한 마디로 팀의 주포. 반대로 맞트레이드 되었던 김현중은 이미 심리적인 스트레스 속에 부진을 거듭하면서 2군으로 내려간 상황이었다. 이 시즌에 김영환은 외국인까지 나선 외곽포 경쟁에서 2012-2013 시즌 3점슛 성공 전체 1위를 기록한 뒤 2012-2013 시즌 3점슛왕에 오르면서 스타플레이어로 성장하게 된다.

2013-14 시즌에는 팀이 정상도전을 선언하면서 FA로 영입한 귀화 최고 슈터인 문태종의 영입과 고질적인 무릎부상으로 인해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문태종의 백업 역할도 잘 못할 정도로 폼이 좋지 않아 출장시간을 잘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그 직전 시즌에 출전시간을 많이 보장받았을때 잘 터지다가 문태종 영입으로 출전시간이 줄어들다 보니 다시 폼이 죽은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간혹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LG의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에 공헌하게 된다. 시즌 후 FA인 상황이라 조심스럽게 이적도 점쳐지고 있었지만 결국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과 함께 5년간 3억 5천으로 재계약을 맺는데 성공하며 팀에 남으면서 주장직도 계속해서 맡게 된다.

2014-15 시즌에도 역시나 베스트 보다는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하는 경우가 더 많지만 기승호의 장기 부상과 문태종의 아시안게임 출전으로 인한 체력 문제와 시즌 초반의 컨디션 난조에 김종규까지 부상으로 빠지면서 문태종이 대신 4번 포지션을 보는 경우가 많아지며[8] 직전 시즌 대비 출전시간이 더 늘어나서인지 상당히 양호한 활약을 보여주는 중. 팀은 죽을 맛인데 개인적으로 출전 시간 보장과 함께 활약이 늘어나는 아이러니

심지어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와의 6강 플레이오프에서는 매치업 문제로 인해 양우섭의 자리를 대신해서 슈팅 가드를 보는 올어라운드 모드가 나오기도 했으며 오리온과의 최종 5차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팀의 2년 연속 4강을 올렸다. 하지만, 정상도전에는 실패하게 된다.

2015-16 시즌에는 문태종의 FA 오리온 이적과 김시래의 상무 입대로 인해 팀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결국 주장직을 맡으면서 주포로 나서고 전반적으로 부상과 도박 등으로 쑥대밭이 된 LG의 엔트리에서 사람다운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가끔씩 정줄 놓은 플레이를 보이면서 LG 팬들의 호불호를 남기기도 했다. 에어볼이 한두개도 아니고 여러개가 나와 평생 먹지 못할 비난을 먹는 안타까움도 보여주었다. 그래도 시즌 전체적으로는 3점슛 성공률 40%를 넘겼다.

2016년 2월 14일 서울 삼성과의 홈경기에서 버저비터 3점슛을 성공시켜 팀의 95-94 역전승을 이끌냈다. 사이드에서 한상혁의 패스를 받자마자 이관희 위에다 페이드어웨이 3점슛을 시도했고 이게 그대로 클린으로 들어갔다. 슛 성공 후 두 손을 위로 든 채 코트를 거니는 모습에 팬들은 소름이 돋는다는 평을 내렸다. 이 승리로 LG는 4연패에서 벗어났고 삼성을 상대로 한 홈 8연승을 이어갔다.

2016-17 시즌 초반, 꾸준히 두자리수 득점을 올려주며 제 몫을 해주는가 싶었으나, 3점슛이 영 터지지 않는다. 급기야 2라운드 들어 3점슛 22개 연속 실패라는 진기록(?)을 남겼다.

파일:kimyounghwan.jpg
하지만, 12월 18일 서울 삼성과의 홈경기에서 두번째로 던진 3점슛이 링을 통과했다! 김영환은 이 날 3점슛 2개 포함 21득점으로 제임스 메이스와 함께 팀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LG는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을 이끌었던 주장을 3점슛을 못넣은 댓가로 소리없이 보내려 했다.


2.4. 부산 kt 소닉붐/수원 kt 소닉붐 2기 시절[편집]



2.4.1. 16 -17 후반기[편집]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201702041424382252_1_99_20170204142506.jpg
2017년 1월 31일 LG가 2017-2018 KBL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을 kt 소닉붐에 넘기는 대가로 KTF/kt의 11년 프랜차이즈 스타 슈터였던 조성민과 맞트레이드되었다. 김영환은 이로써 5년만에 자리를 잡지 못했던 친정인 kt에 복귀하게 된다.

당시 반응은 엇갈렸다. LG 팬은 3점슛 22개를 넣지 못한 주장에 원망을 표시하더니 조성민이라는 슈터에 열광했다. 반대로, 프랜차이즈 스타를 토사구팽한 kt 팬은 구단에 강한 시위를 하더니 돌아온 리더에 야유까지 했다.

트레이드 이후 2경기에서 평득 13점 이라는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팀이 전통적으로 높이와 골밑이 약한 kt라 조성민의 소년가장 자리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반대로 조성민은 팀을 옮기자마자 웃음꽃이 활짝 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트레이드는 2017년 10월 23일 빛을 발한다. 조성민과의 트레이드 때 받아온 2017-2018 KBL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이 LG가 1라운드 2픽에 당첨되면서 kt는 1픽, 2픽을 모두 손에 넣는 쾌거를 이룬다. 조동현 감독은 김영환을 복덩이라 칭하고 있을 정도다. 1·2순위 지명권 거머쥔 조동현 감독 “영환아 네가 복덩이구나”

2017년 2월 24일 친정팀 창원 LG와의 원정경기에서 2.4초를 남기고 메이스기승호의 실린더 빗장수비를 뚫고 던진 하드터프 왼손 더블클러치 3점 뱅크 스카이 훅슛[* 시즌 후 KBL 시상식을 중계하던 MBC Sports+는 더블 클러치 스카이 3점 훅슛 버저비터라는 자막을 내보냈다.] 이 버저비터로 인정되면서, 경기 내내 꾸준한 활약을 이어갔던 조성민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가 싶었지만 이 역대급 굿바이 3점 한 방으로 트레이드 매치의 승자는 결국 김영환이 되었다. 카림 압둘자바+스테판 커리? 이 버저비터로 인하여 플레이오프 진출을 명분으로 김영환 자신을 트레이드 시킨 창원 LG 세이커스에게 제대로 비수를 꽂은 격이 되었다. 아울러 각각 6강 진출, 리빌딩의 상이한 목적으로 추진된 조성민-김영환 트레이드 이후 부산 kt 소닉붐은 박상오의 부상으로 생긴 3번 포지션의 공백을 말끔하게 메우면서 상승세를 탔다. 10승도 불가능 해보였던 팀이 아직 5라운드가 끝나지도 않은 현재 5라운드 성적이 5승 3패다. 반면 LG는 이 버저비터 한방 이후 5연패에 빠지게 되면서 끝내 2년 연속 플레이오프 탈락과 함께 자신을 만들어주었던 스승인 김진 감독은 끝내 물러나는 비극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2월 25일 현재 이 슛은 반응만 봐서는 KBL 20년 역사상 최고의 버저비터 아니냐, NBA 버저비터와 합쳐도 최상위권 버저비터라는 등 폭발적인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몇몇 농구 커뮤니티에서는 2015-16 시즌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VS 오클라호마시티 썬더 경기에서 커리가 보여준 버저비터에도 비견될만 하다고 본다. 네이버 영상 댓글, 기사를 보면 카림 압둘 영환, NBA의 김영환 커리라는 등의 개드립이 속출하기까지 했다.

그 이후에도 팀내 최다득점 1, 2위를 다툴 정도로 팀에서 원하는 역할을 차고 넘치게 수행해주고 있다. 3월 3일 홈경기에서는 3쿼터까지 24득점을 쓸어담으면서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최창진을 필두로 눈이 썩는 플레이를 연이어 보여준 팀 동료들의 개삽질에 힘입어 SK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양심이 있으면 이재도 빼고 전부 줄빠따 맞자

3월 17일 LG와의 홈경기에서는 23득점 7리바 8어시라는 트리플더블에 준하는 활약을 하며 친정팀 LG에게 또다시 한 번 패배를 안겼다. KT는 이날 3쿼터 막판부터 약 10분간 외국인 선수 없이[9] 경기를 치루다가 결국 승리를 했는데 이로인해 시즌 막판까지 플옵 진출 싸움을 벌이던 LG는 치명타를 입게 되었고 결국 LG는 6강 진출에 실패하게 된다.. 친정팀에 대한 복수? 에이 친정은 kt인데 동현콘한테 선물 준거지

KBL 시상식에서 상기한 2월 24일의 경이적인 버저비터 슛으로 2016~2017 시즌 Shot Of The Season 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10]


2.4.2. 2017-18 시즌[편집]


2017-18 시즌 미디어데이 때 친정이었던 LG는 팀 역대 최다 최장수였으나 2년간 성적부진으로 떠나게 된 김진 감독의 후임으로 팀내 슈퍼스타 출신이었던 모교 대선배인 현주엽 감독이 부임하게 된다. 그리고, 현주엽은 미디어데이에서 김영환에게 질문을 하게 된다. 그 버저비터 때문인지 친정에 다시 와주면 안 되냐는 질문에 무릎이 아파 그냥 남겠다는 인터뷰를 했다.[11] kt가 시즌 초반부터 패배를 거듭하여 꼴찌에 머무는 와중 웬델 맥키네스, 허훈 등과 더불어 그나마 사람 구실을 하는 kt 선수 중 1명이었다. [12]

그러다가 3라운드 이후부터 체력이 떨어진 탓인지[13] 패배 신기록을 쌓고 있는 팀과 함께 무너지면서 팬들의 주요 비난 타겟이 되고 말았다.[14] 그러다가 2018년 1월 10일 서울 삼성과의 원정경기에서 4쿼터 종료 직전 동점 3점슛을 터뜨리는 등 18득점을 올려 팀의 12연패 행진 마감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이 와중에도 삼성에게만큼은 강하다 농구판 삼나쌩

2월 13일, SK와의 경기에서 팀내 최다득점인 무려 26득점을 올렸으나 팀은 111점을 내주면서 패배(...).

한편 올 시즌부터 종합운동장역에 도착했을 때 안내 방송을 하고 있다.

2월 15일 LG전에서 정규리그 3점슛 500개를 달성하였다. KBL 통산 35호.


2.4.3. 2018-19 시즌[편집]


파일:김영환 KT 선수.jpg

청주 KB 스타즈에서 변연하강아정으로 양궁농구를 선보였던 서동철 감독의 부임과 함께 새로운 동기부여를 얻게 되었다.

올해도 팀의 최고참으로서 상당히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그 중 허훈과 함께 마커스 랜드리와의 투맨 게임은 kt가 자주 쓰는 가장 좋은 공격 옵션 중 하나이다.

12월 31일 농구영신 경기에서 자신이 몸담았던 친정팀인 창원 LG 세이커스와의 창원 어웨이에서 친정팀을 울리는 맹활약을 펼치면서 아직도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1월 13일 전주 KCC 이지스와의 경기에서 시즌 최다득인 23점을 올리면서 팀의 승리의 주역 중 하나로 활약했다.

팀은 전창진 감독과 조성민 선수 시절이었던 13-14 시즌 이후 무려 5년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된다.

이 시절 양홍석 선수가 급성장하고 허훈 선수도 여전했지만 실질적인 공은 김영환 선수라는 평이 크다.

하지만 창원 LG 세이커스와의 18-19 시즌 6강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자유투를 흘리고 패스 아웃도 이상하게 하는 등 부진을 면치 못하면서 허훈과 양홍석이 깨어나면서 최종 5차전까지 가는 명승부 중의 명승부 끝에 선전했으나 6강전 탈락의 비극이 되고 말았다. 특히 1차전 마커스 랜드리와의 패스아웃은 두고두고 회자가 되고 있었고 자신이 한 때 몸담았던 인기팀을 끝내 넘지 못하면서 안타까움을 전했다. 농구영신 승리때와는 180도 달랐다. 그나마 맞트레이드 대상이었던 1년 선배인 조성민은 1차전에서 살아난 강병현과 함께 4-5차전에 살아나면서 체면치레는 했지만.. .

농구영신 때 김영환 선수는 부산 사직 홈에서 응원을 받지 못해 속상했는데 그것도 18-19 시즌 후반기에 겨우 맏았지만 원조 인기팀의 벽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선전한 18-19 시즌의 평과 함께 더 좋게 다가올 19-20 시즌이 다가오고 있었다.


2.4.4. 2019-20 시즌[편집]


파일:KT 서동철 감독님과 주장 김영환 선수.jpg

지난 시즌까지 달았던 주장직을 김우람에게 넘겨줬었지만 김우람이 연습경기 도중 십자인대 부상 재발로 사실상 시즌 아웃 되면서 서동철 감독님은 다시 주장직을 면담에서 요청했으며 본인도 서 감독님과 팀을 위해 재수락을 했다.

팀 사정상 젊은 선수단 위주로 구심점이 많지 못하면서 부담감이 있기도 했다.

19-20 시즌 홈 개막전에서 모처럼 많은 관중이 부산 사직을 찾았지만 팀은 우승후보이자 통신라이벌인 서울 SK 나이츠에 석패하고 심지어 1 라운드 창원 LG 세이커스 어웨이 경기에서 허훈 선수가 이 경기에 이어 다음날 원주 DB 프로미와의 부산 사직 홈 경기에서 인생경기를 펼쳤지만 연패에 시달렸다.

18-19 시즌 선전으로 인해 부산 사직에 모처럼 팬들이 많이와서 그런지 부담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초반에 상당히 부진하는 했다. 특히 10월 20일 경기에서 88-84로 뒤지던 상황에서 마지막 공격을 전개할때 클러치 패스미스를 저지르면서 팬들의 비난을 받았다. 한 때, 연속경기 출장기록이 중단되는 아픔이 있었다.

10월 26일 경기에서는 14P, 3리바운드, 3어시스트로 오랫만에 좋은 활약을 하며 팀에 활력을 주었다.

11월 6일 LG전은 결장했는데 이로인해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이 281경기에서 끊겼다.

12월 1일 SK전에서 15득점 2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맹활약해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12월 3일 삼성전에서도 15득점 5리바운드 2어시스트로 활약하며 점점 활약이 괜찮아지고 있다.

12월 6일 삼성전에서 11득점 2리바운드 2어시스트를 기록해 팀의 승리를 도왔다.

올시즌 독특한 기록이 있는데 김영환이 10득점 이상 기록한 경기에서 팀은 전승중이다.

12월 8일 모비스전에서 11득점 2리바운드 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다섯 경기 연속으로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고 있으며 팀은 5연승을 달리고 있다.

12월 11일 SK전에서 통산 500경기를 기록했다. 상대가 추격해올 때마다 석점 슛을 터트리며 14득점 4리바운드 4어시스트를 기록해 팀내에서 세번째로 많은 득점을 기록했다.

12월 14일 LG전에서 12득점 5리바운드 2어시스트 2스틸을 기록하며 7경기 연속 두자릿수 득점을 터트려 팀의 7연승을 이끌고 있다.

12월 17일 KGC전에서 9득점 10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연속경기 두자릿수 득점 행진이 끊겼고 팀의 연승도 끊겼다.

12월 10일 KCC전에서 13득점 2리바운드 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팀은 라건아에게 결승 득점을 헌납하며 패해 김영환 두자릿수 득점=팀의 승리라는 공식은 깨졌다.

12월 28일 오리온전에서 13득점 6리바운드를 기록했지만 팀은 연패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12월 31일 LG와의 농구영신 매치에서 21득점 2리바운드 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시즌 첫 20득점을 돌파하며 매우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팀도 연패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1월 8일 전자랜드전에서 11득점 4리바운드 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월 24일 모비스전에서 11득점 4리바운드 1어시스트를 기록해 팀의 승리에 일조했다.

1월 26일 KCC전에서 20득점 4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허훈과 함께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1월 29일 삼성전에서 석점 슛 여섯개를 터트리면서 27득점 6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해 트리플더블을 기록한 앨런과 함께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2월 1일 전자랜드전에서 20득점 4어시스트 3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맹횔약했지만 팀은 졌다.

2월 7일 DB전에서 11득점 2리바운드 5어시스트흘 기록하며 팀의 DB전 연패탈출에 기여했다.

2월 9일 인삼공사전에서 24득점 5리바운드를 기록했지만 경기 막판 몇번의 실수로 팀의 승리를 날려먹을뻔했다.

2월 27일 SK전에서 10득점 3리바운드 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월 29일 KCC전에서 11득점 4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시즌 최종 기록은 42경기, 9.1득점 3.3리바운드, 2.0어시스트를 기록하면서 시즌 초반의 부진을 딛고 일어나며 준수한 기록을 남겼다.

여담으로 14-15 시즌부터 꾸준히 빠짐없이 출장 했는데 1경기 결장하였다.

어떻게 보면 kt 재복귀 이후 회춘에 눈을 뜨게 되었다.

KBL 역대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이 281경기에서 마치는 안타까움이 들었지만 서동철 감독은 영건팀에서 고생하는 김영환 선수의 부담을 덜기위해 결정했는데 당시 굉장히 미안히했다.

그 아픔 속에 이제부터 시작된 일명 나이와 시간을 거꾸로 먹는 선수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비결은 바로 철저한 자기관리였다.

농구인생은 마치 김영환처럼이라는 어록이 이 시기부터 생기기도 했다.

35세 이후 FA로 풀렸는데 총액 4억 2천에 재계약을 했다. 이 계약조건은 농구기자와 농구팬들간의 갑론을박까지 있었다. 하지만, 허훈과 양홍석이 어린걸 보면 구심점이라는 부분을 볼 때 적정계약이라는 평도 있었다.

참고로 팀후배로 KBL 정규리그 MVP가 된 허훈은 3년차 최고치인 총액 3억 4천에 계약했다.


2.4.5. 2020-21 시즌[편집]


주장직을 다시 내려놓게 되었는데 프랜차이즈 빅맨인 김현민 선수가 맡게 되었다. 그 동안 주장을 오래했는데 모처럼 마음의 짐을 내려놓게 되었다. 주장직을 내려놓았음에도 36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철인 또는 금강불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철저한 자기관리로 현재도 kt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

더 중요한 건 고려대 농구부의 대선배인 오용준 선수가 14-15 시즌 이후 5년만에 팀에 돌아온 소식이다. 고려대 농구부 재학 시절 6달 정도 호흡을 했는데 프로 말년에 kt에서 함께하게 되었다. 주장을 내려놓는 부분보다 의지할 선배가 있는 사실에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보란듯이 회춘의 농구인생을 새로 쓰고 있다.

한 때 한국나이 37에 덩크를 터트리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스승인 서동철 감독님께서 KB 스타즈 감독 재임 시절 변연하 선수에 대한 신뢰와 함께 회춘을 유도했는데 이 페이스가 나온 것이다. 당시 출전시간도 선수층이 두텁지 못한 WKBL의 현주소를 보면 40분 중 33분 이상의 혹사가 있었다. 사실 서동철 감독은 자신의 만들어준 김진 감독보다 혹사지수가 높으면서 KBL 팬들에게 비판받는 흑역사가 있다. 그만큼, 서동철 감독도 김영환 선수를 신뢰하는 것으로 보는게 맞을듯.

10월 13일 DB전에서 16득점 3리바운드 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허훈이 빠진 팀에서 좋은 활약을 했다.

10월 18일 삼성전에서 18득점 5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김민욱과 함께 국내선수 가운데 가장 좋은 활약을 했다.

10월 22일 KGC전에서 13득점 8리바운드를 기록했다.

10월 27일 전자랜드전에서 13득점 2리바운드를 기록했다.

10월 31일 모비스전에서 15득점 3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1월 2일 KCC전에서 12득점 1리바운드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1월 8일 SK전에서 16득점 3리바운드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1월 12일 KGC전에서 16득점 4리바운드 6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1월 14일 LG전에서 11득점 5리바운드 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연승에 일조했다.

11월 15일 삼성전에서 4쿼터 결정적인 3점슛 2개 포함 18득점 2리바운드 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3연승을 이끌었다.

11월 19일 DB전에서 14득점 1리바운드 4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2월 5일 모비스전에서 중간중간 석점을 터트리며 경기를 접전으로 이끌며 14득점 4리바운드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2월 12일 LG전에서 25득점 3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양홍석과 함께 LG를 침몰시키고 팀은 7연패 후 7연승을 기록했다. 이에 꼴갤 유동닉 중에서는 이대호와 비교하며 김영환을 찬양하는 댓글이 오르기도 했다.

12월 15일 전자랜드전에서 팀 구성원 가운데 가장 꾸준한 모습을 보여주며 18득점 4리바운드 3어시스트를 기록했으나, 경기에는 패배하면서 7연승이 끊어졌다.

12월 20일 모비스전에서 4쿼터 2점차로 쫒기는 살얼음판의 리드 상황속 5초 남기고 경기에 쐐기를 박아버리는 커리어 1호 투핸드 덩크슛[15] 보여주는 등 매쿼터 꾸준한 모습을 보이며 16득점 5리바운드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올스타전이 열리지 못해서 이 해의 덩크 콘테스트는 올스타 브레이크 이전의 경기에서 나온 덩크슛을 후보에 올려놓아 투표하는 형식으로 진행했는데 이 덩크슛으로 김영환이 덩크왕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다.

12월 27일 SK전에서 4쿼터 이전까지 꾸준한 활약을 해주었고, 4쿼터에는 최준용과의 충돌 이후 5점을 몰아넣으며 동점을 만든데 이어 결정적 스틸까지 만들어내며 팀의 승리의 주역에 섰다.

12월 29일 DB전에서 1쿼터에만 14점을 기록하고, 이후 팀의 위기마다 중요한 득점을 만들어내며 28득점 3리바운드 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월 2일 삼성전에서 11득점을 기록해 이전 경기에 비해 부진했고 팀도 패했다.

1월 3일 오리온전에서 12득점 5리바운드 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월 16일 KGC전에서 모처럼 괜찮은 슛감을 보여주며 15득점 7리바운드를 기록했다.

1월 23일 전자랜드전에서 13득점 1리바운드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월 24일 LG전에서 18득점 6리바운드로 또한번 친정팀을 상대로 좋은 활약을 했다.

1월 26일 모비스전에서 11득점 1리바운드 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월 30일 SK전에서 15득점 6리바운드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월 5일 KGC전에서 23득점 3리바운드 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허훈과 함께 팀을 견인했지만 팀은 연장 접전 승부 끝 패했다.

2월 7일 SK전에서 통산 700번째 석점을 집어넣는 등 13득점 3리바운드를 기록했다.

2월 24일 모비스전에서 10득점 4리바운드 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월 27일 LG전에서 14득점 3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월 28일 전자랜드전에서 14득점 4리바운드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월 2일 삼성전에서 꾸준하게 제몫을 하며 13득점 4리바운드 4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월 8일 KCC전에서 1쿼터에만 13득점을 기록하면서 초반 접전 흐름에 크게 기여했고 이후로도 꾸준히 득점을 쌓으며 22득점 3리바운드 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월 13일 KGC전에서 경기를 끝내는 점퍼를 던지는 등 17득점 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월 14일 LG전에서 17득점 3리바운드 4어시스트로 준수한 활약을 했으나 중요한 순간에 석점이 너무 들어가지 않으며 팀의 패배에 일조했다.

3월 16일 오리온전에서 10득점 3리바운드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3월 29일 SK전에서 12득점 3리바운드 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4월 4일 KCC전에서 24득점 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6강 플레이오프 1차전 KGC전에서 14득점 2리바운드 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차전 KGC전에서 15득점 2리바운드 2어시스트를 기록하기는 했으나 중요한 순간 오픈 석점 두개를 놓쳐 추격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2020-21 시즌 평균 출장시간이 무려 31분 40초(...)로 팀내 출장시간 2위를 기록했다.


2.4.6. 2021-22 시즌[편집]


21-22시즌 원조 원 클럽맨이었던 김현민이 부상을 당하면서 다시 주장을 맡게 되었다. 그동안 경상권 팀인 LG, kt에서만 뛰었지만 올시즌은 팀이 연고지를 옮기는 바람에 수도권에서 뛰는 첫 시즌이 되었다.

미디어에서도 그 동안 경상권에 정이 들었는데 원치 않은 이별에 아쉬움을 금지 못했다.

추가로 선배인 오용준은 적응하지 못하면서 자신이 데뷔했던 팀이지만 이미 연고이전 경험이 있는 오리온 오리온스로 이적을 했으나 또 다른 대선배로 삼성 썬더스의 간판이었던 김동욱을 만나면서 부담을 한시름 덜게 되었다.

이미 김동욱 선배와 모교에서 한솥밥을 먹은지라 마지막 불꽃은 여전하리라 예상된다. 은퇴 이전 KBL 파이널 진출 그 이상을 목표로 수원에서 새출발을 하게 된다.

21 KBL 드래프트에서 현 대표팀 출신 센터이자 모교 후배인 하윤기 선수를 만나게 되면서 정상도전에 대한 강한 동기부여를 얻게 된다. 허훈 선수의 절정과 양홍석 선수의 성장세가 있을 때 마지막 기회로 평가를 받고 있다.

10월 14일 가스공사전에서 17득점 4리바운드 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0월 23일 SK전에서 14득점 4리바운드를 기록했다.

10월 30일 KCC전에서 2쿼터, 엄청난 거리에서의 롱슛이 들어가며 버저비터를 기록했고, 이후 3쿼터에도 미들샷으로 버저비터를 만들어내며 두 쿼터 연속 버저비터라는 진기록을 만들어냈다. 이 외에도 알토란 같은 활약을 보여주며 이날 김영환은 11득점 2리바운드 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1월 3일 오리온전에서 상대의 가드와의 미스매치를 놓치지 않고 포스트업으로 적극적으로 공략하며 16득점 3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1월 7일 KCC전에서 10득점 3리바운드 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1월 19일 삼성전에서 14득점 9리바운드 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KBS 스포츠 뉴스에서는 형제 야구인 kt wiz가 KBO 데뷔 7년만에 KBO 통합우승에 성공하게 된다. [16] 모교 대선배인 김동욱 선수는 오리온 시절 후배 이승현 선수와 함께 15-16 KBL PO 우승을 했는데 이제 그 기운을 김영환 선수가 받길 기도하고 있다. 팀kt의 챔피언 반지를 얻길 희망하고 있다. 자신은 박경수 선수[17]의 수비투혼과 목발 세레머니와 유한준 선수의 우승 이후 은퇴라는 꿈을 그리고 있다.

12월 12일 LG전에서 12득점 2리바운드를 기록했다.

12월 14일 삼성전에서 11득점 2리바운드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2월 23일 KCC전에서 11득점 1리바운드 1어시스트를 기록했다.

12월 26일 SK전에서 10득점 2리바운드 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반환점을 돈 현재 20분 가량을 소화하면서 평균 7.0득점 2.0리바운드 1.3어시스트를 기록중이다. 지난 시즌에 비하면 두터워진 뎁스로 선발 라인업에서 내려오는 등 출전시간이 줄었지만, 벤치에서 출격해 준수한 경기력을 보여주는 중이다.

1월 8일 KCC전에서 10득점 6리바운드 3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월 13일 KCC전에서 15득점 2리바운드 6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4.7. 2022-23 시즌[편집]


데뷔 후 세번째로 가장 적은 경기인 40경기에 출전했으며 시즌 후 은퇴를 선언했다.


3. 지도자 시절[편집]



3.1. 수원 kt 소닉붐 코치[편집]


은퇴 후 팀의 새로운 코치로 선임되었다.

4. 플레이 스타일[편집]


그다지 임팩트가 뛰어나진 않지만 꾸준히 10 득점을 찍어주는 올어라운드 포워드다.

스타일은 피터팬이라 불렸던 슈팅 가드의 레전드인 김병철과 비슷하다.

거기다 투맨게임도 잘해주며 시야도 괜찮은 편이라 LG 시절과 kt 복귀 이후 경기 당 3~4개 가량의 어시스트도 기록 할 정도로 공격에서 다재다능함을 유감없이 뽐내고 있는 중. 대학시절 슈터롤을 담당했기에 슛은 말할 필요가 없고, BQ와 전술 이해도가 높아 코트 밸런스를 잡아주고 공수 성공률을 높이는데 크게 공헌하고 있으며, 준수한 피지컬과 그에 의한 순간적인 돌파가 뛰어난데다 고교 시절 센터를 본 경험도 있어 포스트업 능력까지 모두 갖추고 있다. 정리하자면 3점슛, 미들슛, BQ, 전술 이해도, 포스트업, 돌파 등 모든 면에서 큰 임팩트는 없어도 어느 한 부분 부족한 것이 없으며, 이 모든 능력이 어정쩡한 트위너가 아니라, 모두 평균 이상의 능력을 갖췄다. 과거에는 위에 서술한 것처럼 존재감이 썩 크진 않아 임팩트가 적었으나, 이제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역대급 버저비터로 자신을 트레이드시킨 팀의 멘탈을 날려버리고, 버저비터의 비하인드 스토리, kt의 시즌 후반 돌풍을 이끈 주역으로 인기도 높아지는 중이다.

한편 자기관리도 매우 뛰어난 편으로, 아마시절부터 지속된 무릎부상으로 고생했던 프로 초창기를 제외한다면 30분 내외의 출장시간으로도 꼬박꼬박 출장을 할만큼 몸관리를 매우 잘하는 편이다. 2017시즌을 앞두고 시작한 자율 훈련 점검에서 새파란 후배들을 제끼고 1등을 차지했을 정도.[18] 김태술, 양희종[19] 같은 드래프트 동기나 동년배 후배선수들이 노쇠화로 인해 조금씩 결장하는 것과는 달리 2014~15시즌부터는 전 경기 출장을 찍을 정도로[20] 내구성도 꽤 훌륭하다. 이 때문에 팀의 전체 시즌 계획을 꾸리는 측면에서 생각해볼 때 큰 도움이 되는 선수이다.

클러치 상황에도 대단히 강하다. 2017년 11월 15일 6연패 탈출 경기에서도 막판 현대모비스의 거센 추격을 받자 연속으로 3점슛 2방을 꽂아넣었고, 2016-17 시즌에 기록한 역대급 버저비터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외에도, 유투브에서 나오는 극적인 버저비터 장면을 보면 김영환의 얼굴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부산 kt로 복귀하자마자 패배의식에 절어있었던 선수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경기 분위기를 조율하는 등 침착한 경기운영 능력도 가지고 있다.

아쉬운 점으로는 슛터치의 기복과 대학 시절의 무릎 부상으로 인한 운동능력의 저하.

정작 2013-2014 시즌 창원 LG 세이커스의 정규리그 우승 시절 주장이었으나 그해 무릎부상으로 부진했고 문태종이 더 부각된 흑역사가 있었다.

KBL 데뷔 이후로 운동 능력이 평균 이하였던 적은 없지만, 대학 초년 시절 덩크를 팡팡 꽂던 것에 비하면 많이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21][22]


5. 시즌별 성적[편집]


역대 성적
시즌
소속팀
경기수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락슛
야투율(%)
3점슛(%)
자유투(%)
PER
2007-08
부산 KTF
49
8.3
2.04
0.86
0.69
0.20
52.55
38.95
73.87
16.45
2008-09
16
4.88
2.19
0.81
0.25
0.13
40.79
21.05
70.59
11.33
2009-10
부산 kt
51
8.16
2.06
2.02
0.47
0.12
54.61
36.76
79.78
15.07
2010-11
군복무(상무 농구단)
2011-12
5
2.40
1.20
1.40
0.00
0.20
27.78
0.00
100.00
6.80
시즌
소속팀
경기수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락슛
야투율(%)
3점슛(%)
자유투(%)
PER
2012-13
창원 LG
44
13.0
3.2
2.8
1.2
0.2
39.32
32.03
76.19
13.16
2013-14
45
3.5
1.2
0.6
0.2
0.0
35.00
25.56
75.00
9.84
2014-15
54
10.2
3.3
1.5
0.6
0.2
44.42
35.75
73.08
12.97
2015-16
54
11.3
3.8
2.5
0.9
0.1
44.22
40.16
73.74
15.17
시즌
소속팀
경기수
득점
리바운드
어시스트
스틸
블락슛
야투율(%)
3점슛(%)
자유투(%)
PER
2016-17
LG / kt
54
11.0
3.7
3.6
1.0
0.1
40.30
27.08
75.40
13.96
2017-18
부산 kt / 수원 kt
54
9.6
3.2
2.3
0.6
0.1
43.72
35.44
74.11
13.59
2018-19
54
8.7
4.1
2.4
0.8
0.2
45.5
33.3
72.8
13.94
2019-20
42
9.1
3.3
2.0
0.8
0.1
42.1
34.5
73.9
13.37
2020-21
53
12.4
3.2
2.3
0.6
0.2
47.0
39.2
81.0
15.19
2021-22









KBL 통산
(13시즌)
575
9.43
3.0
2.06
0.7
0.14
53.3
34.2
75.4
13.14


6. 여담[편집]



  • 표정과 말투가 무뚝뚝한 면이 있고 낯을 가리는 성격이지만, 팬 서비스가 좋아 사인과 사진 요청에 잘 응해주는 편이다. 특히 초등학생 팬들에게 잘 해주며 이들은 아예 삼촌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래서 초등학생 시절부터 김영환을 따르던 팬은 김영환을 따라 팀을 옮기는 팬들도 있다고 한다.

  • 왼손잡이 선수인데 우상인 허재도 왼손잡이인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허재의 차남인 허훈을 팀 후배로 만나게 된다.

  • 자신과 같은 왼손잡이인 모교 대선배로 알려진 오용준 선수에 대해 6개월간 지도를 받았다. 당시 대선배라 말을 못 꺼낸 썰이 있었다. 07-08 시즌 KBL에 데뷔했을 때 대선배인 오용준 앞에서 과감하게 슈팅을 올라간 모습이 영상에 나와있다.

  • KBL에서 처음 데뷔할 때 당시 추일승 감독은 무릎부상에 대해서 수술을 받을수 있도록 배려를 했고, 결국 독일 레버쿠젠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재활에 전념했다.

  • 자신을 지도했던 김진 감독에 대해서 깊은 존경심을 표시했다. 지도했던 전창진 감독은 김병철 이후 스타라 했다. 하지만, 전창진은 이 떡밥을 고려대-삼성전자 대선배인 김진에게 넘겼다. 이후 김진 감독의 주장학개론 속에 급성장했다. 이 영향은 향후 서동철 감독을 통해 회춘의 영향이 되었다. 김진 감독은 김병철 선수와 김영환 선수가 부진할 때 기록지까지 보여주면서 야단을 치는 등 주장으로서의 책임감을 주었다.

  • 13-14 시즌 몸담았던 창원 LG 세이커스의 창단 첫 KBL 정규리그 우승 때 무릎부상을 당하면서 공헌도가 떨어진 큰 흑역사가 있었다. 본인은 벤치에서 보면서 팀의 승리와 함께 기뻐했으나 속은 아니었을지도 모른ㄷ. 사실 무릎 연골이 좋지 못했는데 이건 축구로 보면 모교 1년 후배인 박주영과 평행이론이다.

  • 미디어에 잘 응해주는 KBL 스타플레이어 중 하나다. 특히 샤론박이라는 별명이 있는 박지영 아나운서와도 케미가 상당하다.

  • 자기관리가 정말 철저하다. 시즌 중에는 술을 안먹고 탄산음료도 멀리하면서 매일 아침마다 운동을 한다고.

  • 유명한 별명은 탈모신. 허나 탈모가 일어날 조짐이 보여지면서부터 관리를 해서 많이 벗겨지지는 않았다. 덕분에 그 별명은 후배이자 kt의 프랜차이즈인 김현민에게 넘어갔다.

  • 친정팀 LG와 삼성을 상대로 강하다. 특히 삼성 팬들은 김영환만 보면 이를 가는 수준이고 친정인 LG 팬들조차 떠난 주장에 냉철한 일부 극성팬이었었다. 공교롭게도 호흡을 맞추었던 김시래는 삼성으로 가게 되었다.

  • kt 2기 시절 띠동갑 후배인 박준영을 만나게 된다. 모교 후배로도 알려졌다. 하지만, 별명은 변거박이다. 그러나, 주장으로서 열심히 훈련하는데도 좋은 경기력이 나오지 않을 때 많이 안타까워 했다. 3년차 때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그나마 그 아픔을 극복하고있다.

  • MBC 스포츠뉴스에서 방송될 때 "나이를 거꾸로 먹는 선수"라는 히트를 치기도 했다. 자신도 비결은 늦잠을 자지 않은걸 말했다.

  • 21-22 시즌을 앞두고 팀이 부산광역시에서 수원시연고이전을 할 때 굉장히 속상해 했다. 부산 사직에서 추억이 많은데 안타까워 했다고...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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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6 11:50:14에 나무위키 김영환(농구)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2021년 6월 측정결과 195.4cm가 나왔다. 말년인데도 드래프트 당시(192.5cm)보다 키가 더 커지자 본인도 인스타그램을 통해 당혹감을 표출했다.#[2] LG 시절에는 김시래가 없을 때 슈팅 가드를 맡았으며 kt 시절에는 허훈과 함께할 때 간간히 슈팅 가드를 맡았다.[3] 사전의 지명권 트레이드로 실제로는 전자랜드에 입단 이후 부산 KTF 매직윙스로 트레이드 .[4] 지명 이후 비시즌인 2007년 6월에 트레이드되며 전자랜드 소속 출전 기록은 없음.[5] 인지도가 낮은 농구인이다. KBL 드래프트에 지명되지 못했지만 김진 감독님께서 정들었던 동양 오리온스/오리온스를 떠나면서 SK 나이츠로 이적한 뒤 2군(현 KBL D리그) 드래프트로 지명했다. 포지션은 포워드였다. 은퇴 이후 WKBL KB 스타즈 코치로 활약했다.[6] 표정을 보면 김진 당시 오리온스 감독은 2007 KBL 드래프트 지명권을 전자랜드 블랙슬래머에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바뀐 구단 단장이 추진하면서 김영환을 잃게 되었다. 이 시절 평소 코트의 신사 혹은 코트의 스님이라는 긍정적인 별명이 있었는데 거꾸로 되었다. 그만큼 화가 난 상태였다. 대신 바꾸어서 말하면 김영환에 대한 신뢰가 큰 것이다. 바뀐 선수가 바로 귀화 출신으로 연세대 출신 빅맨이었던 이동준이었다. 김영환은 이후 전자랜드와 KTF의 트레이드가 추가로 나오면서 데뷔 때 이적만 2번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김진 감독은 오리온스 구단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며 SK 나이츠 감독으로 이적하게 되었다. 표정을 보시면 알겠지만 그만큼 김영환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강했다. 이 시절 김 감독은 평소 신사와는 다르게 무언가 좋지 못해서 안타까움을 전했다. 사실 동양 오리온스의 창단멤버로 11년간 코치-감독을 했지만 자신도 변화를 통해 이적으로 도전했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12-13 시즌 LG 세이커스 감독 시절 트레이드를 통해 kt 소닉붐과의 조성민이 포함(향후 2017 KBL 드래프트 지명권으로 허훈과 양홍석)된 충격의 트레이드 이전까지 4년반을 스승과 제자로 함께했다.[7] 원래 8순위는 대구 오리온스의 몫이었지만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와의 트레이드로 함께하지 못했다.[8] 이로 인하여 동 포지션 경쟁자던 두 선수가 나름 공존해서 함께 출전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9] 좋은 모습을 보이던 리온 윌리엄스가 파울트러블에 걸려서 벤치에 들어갔는데 조동현 감독은 라킴 잭슨이 지역방어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 그를 코트에 내보내지 않는 과감한 도박을 감행했다.[10] 여담으로 김영환은 몇번 연습삼아 비슷한 자세로 슛을 던져봤지만 림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고 한다.[11] 김영환 선수가 성실하고 팀 플레이를 잘해주는 선수라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선수는 kt 선수로 그냥 있겠다는 뜻이다. 실제로 현주엽은 강훈련 신봉자로 인해 무릎 연골이 좋지 못했던 김영환 선수가 있었으면 오래 못갔을지도 몰랐다. 조성민 선수가 다치면서 에이징커브가 온 것을 보면 대표이며 친분이 있는 강병현 선수조차 고전할 정도면 에이징커브는 그만큼 무섭다. 만약이지만 강성에 강훈련 신봉자인 현주엽이 김영환을 지도하면 오래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12] 조동현 감독도 주장인 김영환 선수에게 징징 끌려다녔다.[13] 일단 본인은 체력이 아닌 자신의 경기 운영의 문제라는 의견을 내놓았다.18-01-10 마이데일리[14] 사실 팀내 연봉도 1위인데다 주장직을 맡고 있는 베테랑인 점을 감안하면 팬들의 비판은 필연적이었다.[15] 이 날 경기는 유독 판정불만이 많았는데 그 판정에 대한 불만을 보여준 분노의 덩크라는 카더라가 돈다(...).[16] 역대 KBO 데뷔팀 최단기록 우승이다.[17] 공교롭게도 LG 세이커스의 형제인 LG 트윈스 출신이다.[18] 김영환과 박상오, 이광재를 제외한다면 스쿼드의 평균 나이가 어린 편에 속한다.[19] 사실 양희종은 수비의 중요성 때문에 최근에도 국대에 계속 차출되는 선수라, 국대만 나가지 않았어도 김영환처럼 연속경기 출장은 꾸준히 찍어줬을거란 의견이 많다.[20] 하단의 성적표 참조.[21] 사실 본인 말로는 현재도 덩크 자체는 너끈히 가능하다 한다. 부상이 있었다고는 해도 원래의 운동능력이 남아 있고 키가 작지 않으며 자기관리를 매우 잘 했으니 당연한 걸지도. 그리고 2020년 12월 20일 모비스전에서 37세의 나이로 투핸드 덩크슛을 성공시키며 자신의 말을 증명했다.[22] 김해가야고 농구부 시절에 몸풀기로 원맨 엘리웁 덩크나 리버스 덩크 정도는 손쉽게 할 정도로 점프력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