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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범(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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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 북한의 사회주의 운동가.
2. 일생[편집]
북한 조선노동당의 초대 당수(조선노동당의 전신인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책임비서)를 지냈던 인물이다. 소련 모스크바에 유학가서 공산주의를 공부하고 평안도 지역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벌이다 몇차례 구속되는 등 평안도 지역에서는 가장 거물급 공산주의자였고 이에 따라 해방 후에 조선공산당 평남도당 책임비서가 될 수 있었다. 이후 1945년 10월 10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설립된 이후에는 책임비서직까지 올랐다.[1] 1945년 12월 17일 김일성이 북조선분국의 제1책임비서로 선출되면서 김용범은 제2책임비서 직을 맡게 되었다.[2] 1946년 8월 북조선로동당이 창당된 이후에는 초대 중앙위원회 검열위원장[3] 직을 맡았으나 1947년 9월, 위암으로 사망했다.
김용범 외에 북한 지역을 대표하는 국내 공산주의자로는 현준혁도 있었지만 그가 1945년 9월 3일 일찍 암살된 이후로는 김용범이 북한 지역 공산당을 이끌게 되었다. 신탁통치 문제 이전까지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주의 진영과 심하게 대립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현준혁에 비해서는 연대에 소극적이었고 또한 소련 유학 경험 등 해방 이전부터 소련과 연계가 있었기 때문에 친소련 성향이 강했다. 또한 박헌영 계열과는 연계가 없이 평양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했기 때문에 박헌영이 아닌 김일성의 독자적인 조선공산당 북조선북국 설립 방안을 지지하면서 김일성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북한 극초기에는 김일성보다도 높은 직위에 있었던 인물이지만 김일성과 라이벌 관계였다기보다는 오히려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밀어주었다. 북한내 국내파 토착 공산주의자들 중 오기섭과 같은 인물들은 김일성을 견제하고 박헌영의 서울 중앙당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지만 김용범은 아내 박정애와 함께 주로 김일성을 지지하고 그와 협력하는 입장이었다.
이 때문에 김용범은 사후에도 북한에서 좋은 대접을 받아서 애국열사릉에 안장되고 1951년 평양에 김용범혁명유자녀초등학원이 세워졌다. 그의 아내 박정애도 숙청된 적이 있기는 하지만 김일성에게 충성하며 말년을 편하게 살다가 애국렬사릉에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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