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원 연쇄살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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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거된 범인 김용원

1. 개요
2. 사건 내용
3. 출소 후
4. 1차 살인
5. 2차 살인
6. 수사
7. 3차 살인
8. 검거
9. 또 다른 살인 사건
10. 김용원의 생애
11. 재판
12. 여담
13. 둘러보기



1. 개요[편집]


“그냥 나를 죽은 사람으로 생각해라. 나를 잊고 다른 사람 만나 행복하게 잘 살라”는 말만을 전했다고 한다. 차마 약혼녀에게는 자신이 살인범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던 것이다. (중략)

김씨의 가족들은 애초 김씨와의 면회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미 오래전부터 연을 끊고 지내온 가족들이 김씨를 이미 ‘버린 자식’으로 여겼기 때문(중략)

김용원 검거 뒤 인터뷰.관련 기사


2005년 6월 11일 MBC 뉴스데스크 - 1, 2차 살인사건 현장검증
2005년 6월 14일 MBC 뉴스데스크 - 3차 살인사건 현장검증

1994년 4월, 그리고 2005년 3월부터 6월까지 불과 3개월 간 충청북도 괴산군, 진천군, 청주시 일대에서 연쇄살인범 김용원(당시 39세)이 남성 1명, 여성 3명을 살해한 사건. 청주판 유영철 사건이라고 불릴 만큼 잔혹한 연쇄살인으로 당시 청주 일대에 큰 충격을 주었다.

범인이 저지른 사건 중에서 1994년의 사건은 증거불충분으로 기소되지 못하였고 2005년에 저지른 살인 3건으로 기소되어 재판 끝에 대한민국의 61번째 사형수로서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1]


2. 사건 내용[편집]


1994년 4월 충북 괴산군 괴산읍 서부리의 한 당구장에서 자신에게 반말을 한다는 이유로 시비가 붙은 지씨(당시 27세)를 때려 숨지게 한 뒤 농로에 시신을 유기하여 시신이 발견되자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온 것을 느껴 곧바로 성폭행을 저질러 3년 6개월간 교도소에 복역하는 바람에 이 사건은 안타깝게 기소하지 못했다.

2005년 3월 중순 충북 청주시 사창동에 위치한 김용원의 집에서 동거하고 있던 내연녀 성씨(당시 43세)와 같이 술을 마시다 사소한 말다툼으로 성씨가 자신의 뺨을 때리자 이에 격분해 목을 졸라 살해한 후 인근 야산에 시신유기하였다.

동년 6월 3일 충북 청주시 봉명동에서 김용원의 두번째 내연녀 박씨(당시 48세)가 운영하던 호프집에서 중국에 있는 조선족 약혼녀에게 국제전화로 통화하다 박씨가 너무 오래 통화한다고 핀잔하자 이에 격분한 김용원은 만취 상태에서 박씨의 호프집에 있던 휴대용 가스버너로 수차례 머리를 내리쳐 살해하고 수표 10만을 훔쳐 강도살인으로 위장하였다.

이틀 뒤인 6월 5일 충북 진천군에 위치한 김용원의 친한 후배 최씨(당시 31세)의 시골 집에서 오후 6시 30분쯤 김용원은 평소에 알고 지내던 최씨의 딸 최양(당시 13세·초등학교 6학년)을 꾀어내 자신의 승용차로 데리고 나가 성폭행하자 최양의 "아빠한테 이르겠다."는 말에 격분하여 최양을 목 졸라 살해한 뒤 인근 야산에 암매장했다.



3. 출소 후[편집]


2004년 3월 김용원은 특수절도 혐의로 복역 후 출소하였고 2005년부터 중국을 오가며 밀수업을 하다가 중국에서 한 조선족 여성을 사귀게 되었고 그해 4월 이 여성과는 이미 중국에서 예식까지 올렸다. 그해 7월에는 한국에서 정식으로 결혼할 예정이었다.[2]

그러나 결혼을 앞둔 상태에서도 그의 옆에는 항상 내연녀가 있었다.


4. 1차 살인[편집]


김용원은 2005년 3월 중순 충북 청주시 사창동의 자신의 원룸에서 동거하던 내연녀 성씨(43)와 같이 술을 마시다 사소한 말다툼으로 자신이 무시당한다고 느끼고 성씨가 자신의 뺨까지 때리자 이에 격분해 목을 졸라 살해하였다.[3]

살인 이후 김용원은 성씨의 시신을 두고 4일간 술을 마시며 지내다가 고향 후배 A씨에게 자기가 사람을 죽였다며 시체를 유기해 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A씨는 김용원의 부탁을 거절했으며 자수할 것을 권하였다.

결국 김용원은 후배 A씨에게 자신의 범행 사실을 비밀로 지켜 줄 것을 당부하며 사체를 이불로 싸고 자신의 화물차로 이동하여 충북 청원군[4] 내수읍 뒷산에 암매장하였다.


5. 2차 살인[편집]


김용원은 성씨를 살해한 뒤에도 또 다른 내연녀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2005년 6월 3일 오전 2시 조선족 약혼녀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릴 7월을 한 달 앞두고 충북 청주시 봉명동의 한 호프집에서 내연녀 박씨(48)와 자신의 후배 B씨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 호프집 또한 내연녀 박씨가 운영하던 호프집이었다.

김용원은 내연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박씨 앞에서 중국에 있는 조선족 약혼녀와 국제전화를 하고 있었다.[5] 보다못한 박씨가 왜이렇게 통화를 오래 하냐고 크게 나무라자 이에 격분하여 김용원은 후배 B씨를 먼저 돌려보낸 후 만취 상태에서 호프 주방에 있는 휴대용 가스버너로 수십 차례 박씨의 머리를 내리쳐 살해했다.

범행 후 김용원은 강도살인으로 위장하기 위해 카운터에 있는 10만원권 수표 4장을 훔치고 현장에서 빠져나왔다.[6]


6. 수사[편집]


2005년 6월 3일 오전 10시경[7] 청주시 흥덕구에 위치한 한 호프집에서 여주인 박씨가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즉시 초동수사에 들어갔다. 다음은 이 사건을 담당한 차상학 경정[A]의 설명이다.

찍한 상태로 널브러져 있는 사체가 사건 당시의 참혹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박 여인은 둔탁한 둔기로 가격당한 듯 머리 부분이 심하게 함몰돼 있었는데 어찌나 를 많이 흘렸던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사체의 상태로 보아 사건은 전날 새벽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됐다. 처음에는 강도사건일 거라 생각했다. 손님을 가장한 강도 말이다. 하지만 단순 강도사건으로 보기에는 사체의 상태가 너무 끔찍했다. 피해자의 현금이 없어졌는지는 확인이 불가능했지만 가게 카운터에 현금이 남아 있던 것으로 보아 돈을 노린 강도의 소행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또 현장 분위기도 일반적인 강도사건과는 사뭇 달랐다. 그동안의 수사경험상 면식범의 소행일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8]

수사팀은 휴대폰 통화기록 등을 통해 먼저 박 여인의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수사를 진행했다.”


수사팀은 호프집 여주인 박씨의 주변인물을 조사하여 박씨와 사건이 일어난 시점까지 자주 연락하고 지내 온 인물을 찾았는데 수사팀의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은 김용원(당시 39세)밖에 없었다. 주변에 따르면 김용원은 평소 박씨의 주점에 수시로 드나들며 박씨와 무척 가깝게 지내온 사이였다. 사건 당일뿐 아니라 평소에도 박 여인과 자주 통화를 했던 점으로 미루어보면 단순히 주점 주인과 손님의 관계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았다. 거기다가 당시 경찰은 김용원이 박씨 살인사건이 일어난 후 행방이 묘연해지자 그가 유력한 용의자라고 판단했다.

이렇게 쉽게 사건이 풀리는 듯하였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김용원의 연쇄살인 행각이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수사팀은 김용원의 주변 인물을 수사하던 도중 1차 살인사건에서 김용원으로부터 시신 유기를 도와달라고 권유받은 고향후배 A씨로부터 뜻밖의 제보를 받았다. 박씨 살인 사건을 조사하던 중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성씨 살인 사건까지 제보를 받게 된 것이다. 게다가 A씨는 김용원이 성씨 살인사건뿐만 아니라 1994년 4월에 발생했던 지씨(당시 27세)를 살인했다는 사실을 술자리에서 자주 들었다는 추가 제보까지 했다.

경찰은 김용원이 단순히 우발적인 살인범이 아닌 연쇄살인범이라고 판단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7. 3차 살인[편집]


김용원은 경찰을 피해 도피 행각을 벌이던 와중에도 또 한 차례 살인을 저질렀다. 2005년 6월 5일 오후 6시 30분경 김용원은 친한 후배 최씨(당시 31세)의 충북 진천군 시골 집에 찾아갔다. 그리고 최씨의 딸 최양(13·초등학교 6년)을 꾀어내 자신의 승용차로 데리고 나가 성폭행했다.[9] 이때도 김용원은 술에 취한 상태였다. 성폭행 후 최양이 자신의 아버지한테 성폭행 사실을 알리겠다고 하자 김용원은 최양을 잔혹하게 목 졸라 살해하였다.[10] 살해 후 자신의 승용차에 시신을 싣고 인근 축산 농가에 있던 삽을 훔쳐 충북 진천군의 백곡저수지 근처 한 교회의 건물 부근에 풀이 우거지고 약간 패여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암매장하였다. 김용원은 최양의 시체를 묻은 뒤 나뭇가지로 덮어 두었다.

김용원은 최양을 살해하고 난 뒤 다시 술을 사 들고 후배 최씨의 집에 찾아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최씨와 술을 마셨다. 또 다음 날 "같이 최양을 찾아보자."며 최씨와 함께 인근 마을 일대를 뒤지기도 했다. 수사관계자들은 "김용원이 박씨와 최양을 이틀에 걸쳐 살해한 후 태연히 행동한 것을 보면 과연 그가 정상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인지 의심스럽다."고 혀를 내둘렀다.

결국 최모씨가 딸의 실종으로부터 5일 후인 2005년 6월 10일 실종 신고하였으며[11] 경찰은 김용원을 검거한 뒤 그가 최모씨와 어울리며 최모씨 집에 자주 가는 정황을 포착하고 경찰조사에서 김용원을 상대로 이 살인사 건을 가지고 강하게 추궁하자 끝내 자신의 범행 시간대 알리바이를 제대로 대지 못하고 담당 형사에게 자백하고 말았다.


8. 검거[편집]


당시 청주서부경찰서 강력1팀 형사들은 김용원의 주변인물을 파악해 그가 청주의 한 재개발 구역의 폐가에서 은신했음을 알았다. 청주의 한 폐가에서 김용원의 여권, 결혼증명서, 결혼 예정이었던 조선족 여성의 사진, 중국 도피에 필요한 물품과 도피 중에 끓여 먹었던 라면냄비, 소주병 등을 발견하였다.[12]

경찰은 연쇄살인이란 강력범죄를 저지른 김용원이 도피하면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만약 그가 생활비가 떨어지게 되면 그의 친인척이나 가족을 찾게 될 것이라고 판단해 그의 가족과 친인척들을 탐문수사하여 그가 방문할 만한 장소마다 형사들이 잠복근무를 하며 그가 갈 만한 여러 곳 중 한 곳이라도 오길 기다렸다. 마침내 김용원은 2005년 6월 10일 3차 살인을 저지른 지 5일 후 도피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외사촌형을 만나러 가다가 충북 청원군 내수읍에서 잠복 중이던 경찰에 의해 검거됐다. 당시 그는 자신의 범행 일체를 부인했으나 경찰의 집요한 추궁에 결국 자신의 범행을 털어놨다.

한 수사관은 “김씨가 계속해서 자신의 범행을 부인했으나 증거와 정황을 들이대니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범행을 자백했다”고 전했다. 김씨는 자백 전 주변을 정리하려는 듯 중국에 있는 조선족 약혼녀와의 통화와 가족들과의 면회를 요구하기도 했다.

김씨는 약혼녀와의 통화에서 안부를 전하며 “그냥 나를 죽은 사람으로 생각해라. 나를 잊고 다른 사람 만나 행복하게 잘 살라”는 말만을 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용원의 가족들은 애초 김용원과 면회를 거절했다고 한다. 성인이 돼 집을 떠난 후 고향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던 김용원이 살인자가 되어 나타난 것이 달갑지도 않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연을 끊고 지내온 가족들이 김용원을 이미 ‘버린 자식’으로 여겼기 때문. 경찰의 설득으로 어렵게 가족들과 면회한 김씨는 “죄송하다”는 말만 되뇌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김용원의 연쇄살인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9. 또 다른 살인 사건[편집]


김용원을 체포한 경찰은 지난 1994년 괴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지씨(당시 27세) 사건도 김용원(당시 28세)이 범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였으나 김용원은 살인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였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지난 1994년 4월 괴산군 괴산읍 서부리의 한 당구장에서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지씨가 반말을 한다는 이유로 둔기로 때리고 목졸라 살해한 후 농수로에 사체를 버린 혐의가 있었다. 해당 사건에서 용의선상에서 배제되기 위해 특수강간을 저질러 일부러 교도소에 수감되었다.[13]

검거후에도 김용원은 이 사건에 대해서는 경찰 ,검사, 판사 앞에서 끝까지 부인했다. 하지만 1994년 당시 김용원이 유력한 용의자로 수사선상에 올랐던 점과 그 사건 직후 바로 다른 범행으로 자신의 살인 범행을 은폐하려던 의도가 있었다는 점, 평소에 술자리에서 지씨 살인 사건을 본인 입으로 주변인들에게 말하고 다녔던 정황으로 보아 김용원의 범행이 유력했으나 기소에는 실패했으니 공식적으로 이 사건은 유력한 범인이 존재하지만 미제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당시 청주서부경찰서에서도 이 사건이 김용원이 저지른 범행임을 확신하고 1994년 당시 이 사건을 조사했던 괴산경찰서로부터 자료를 넘겨 받으면서 추가 건으로 기소하려고 노력했으나 2005년 당시 기준으로 11년이나 지난 사건이라 확실한 증거를 모으는 데 실패하여 결국 이 사건은 기소하지 못했고 2005년 3월부터 6월까지 벌어진 부녀자 3명 연쇄살인 사건에 대해서만 기소했고 재판부에 최종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994년 4월에 저지른 범행 외에도 그를 검거한 차상학 경정[A]의 말에 의하면 김용원이 또 다른 여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고 한다.[14]

2년 전 ‘살인기계'를 간신히 멈추게 하는 데엔 성공했지만 차 팀장은 이 사건을 해결한 후에도 오랫동안 미련이 남아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성 여인 같은 케이스가 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김상철[15]

과 알고 지내던 여성들 중 행적이 묘연한 여성이 또 있을지 압니까. 특정한 직업이나 거주지가 없는 여성들은 가족들과도 연락을 끊고 지내는 경우가 허다해요. 변을 당해도 생사조차 확인하기 힘들죠. 김씨 휴대폰에 저장된 여성들, 주변의 여성들을 상대로 일일이 안부를 확인하고 싶었는데 여건상 그걸 못했어요.”

검거 뒤 인터뷰관련 기사



10. 김용원의 생애[편집]


충북의 한 농가에서 1966년(추정)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김용원은 가정불화로 인해 어릴 적부터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등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족간의 대화는 없었고 어린 김용원은 폭력에 시달리며 성장했다. 김용원의 아버지는 난폭하고 음주벽이 심해 김용원의 어머니와 자식들에게 폭력을 휘둘렀으며 김용원의 형도 아버지의 폭력성에 물들었다. 그의 형은 김용원과 9살 차이였으며 어린 김용원에게 폭력과 학대를 가했기 때문에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자신이 잘못이라도 하면 가차없이 돌아오는 폭력과 이로 인한 수치심 때문에 김용원은 일찌감치 '빨리 어른이 돼 가정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소원을 품었다.

한 수사관계자는 "가족들에게 정을 느끼지 못한 김용원이 어릴 적 유일한 꿈이 '빨리 스무 살이 돼 집을 떠나는 것'이었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이 같은 가정환경 속에서 김용원은 고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문제아로 자라면서 어린 나이부터 소년원, 교도소를 수시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노동에 종사하던 그는 20살 때 자신의 바람대로 집에서 '독립'했다. 독립 후 방위병으로 근무하였고 전역 후 섬유회사, 목공소 등에서 근무하기도 하였으며 가구대리점 등에서 차량을 운전하기도 하였고 이 무렵에 친구의 소개로 한 지하수 개발 업체에서 근무하였다.[16]

그러나 가정을 떠나서도 김용원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다. 처음 만난 그의 첫사랑을 자신과 가장 친한 친구에게 빼앗겼다. 한 수사관계자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사랑했던 여자가 자신을 버리고 자신과 가장 친했던 친구에게 갔을 때 김용원이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김용원은 여자에게 묘한 증오심을 품었다.

첫사랑과 헤어진 직후 김용원은 18세였던 1984년 12월 강간치상죄 및 특수절도죄로 처음 철창 신세를 지면서 범죄의 세계로 빠져들었다.[17] 이후
  • 1988년 1월 4일 육군군법회의에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죄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18]
  • 1989년 4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같은 죄로 징역 1년 6개월
  • 1992년 11월 3일 청주지방법원에서 절도죄로 징역 10개월
  • 1994년 9월 2일 대전고등법원에서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특수강간)죄로 징역 6년[19]
  • 2001년 5월 9일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에서 특수절도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야간·공동상해)죄 등으로 징역 3년을 각 선고받았고

일련의 사건을 저지르고 나서 2004년 3월에 형기를 마치고 다시 세상에 나왔다. 이리하여 김용원은 특수강간, 폭력, 특수절도 등의 죄목으로 도합 약 13년이나 감옥살이를 해 온 것이다.

막상 출소는 했지만 범죄자에게 마땅한 일거리는 없었다. 김용원은 운수회사에서 잠시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2005년 연초부터 중국을 오가며 비아그라, 장뇌삼 등을 밀수하며 지냈다. 그러다 2005년 4월 중국에서 한 조선족 여성을 사귀면서부터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를 씻고 새로운 삶을 꿈꾸기도 했다. 이 조선족 여성과는 이미 중국에서 예식까지 올렸고 2005년 7월에 한국에서 정식으로 결혼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 조선족과 약혼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명의 내연녀가 있었으며 자신의 손으로 피해자 두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했고 자신의 후배 딸의 생명도 빼앗아갔다. 한 수사관은 "불우한 성장으로 인한 애정결핍과 첫사랑에 대한 배신감이 겹쳐 김용원에게는 일반인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여성편력과 여성에 대한 증오심이 있었다. 정에 굶주렸던 김용원이 어찌 보면 여성들을 통해 과거를 보상받고 싶어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주변 사람들은 김용원이 평소에는 점잖고 온순한 사람이나 술만 먹으면 난폭해진다고 증언했는데 과연 출소한 지 1년 만에 사소한 이유로 사람 셋을 죽인 자가 정말 단지 술만 안 마시면 조용한 사람일까? 일단 전부 사소한 말다툼으로 아무렇지 않게 살해한 점, 자신이 친한 후배의 초등학생 딸에게 욕정을 느껴 평소에는 성추행, 성폭행을 일삼다가 수배된 와중에도 결국 살인을 한 점, 살인한 직후에 태연하게 술까지 마시고 사체와 4일 동안 자신의 원룸에서 지내다가 친한 고향후배에게 시신유기를 도와달라고 요청한 점, 술을 마실 때마다 자신의 살인 사건을 무용담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닌 점을 보면[20] 단순히 술 때문에 이렇게 끔찍한 살인범이 되었다고는 그 누구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21]

그는 결국 정두영, 유영철, 정남규처럼 불우한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지탄받을 만한 흉악범이 되는 흔한 케이스가 되고 말았다.[22]

11. 재판[편집]


원심 판결문은 다음과 같다.

피고가 전과 8범에 지난 1989년부터 16년 동안 모두 4차례의 실형을 선고 받아 11년을 교도소에서 보냈으나 전혀 교화되지 않았으며, 출소 이후에도 짧은 기간에 3명의 목숨을[23]

사소한 동기로 살해 한 점 등에 비춰 개선과 교화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판단해 사형을 선고한다.


2005년 9월 1심에서 청주지방법원 제3형사부(재판장 한주한 부장판사)는 피고 김용원에게 사형을 선고하였으며 김용원은 이에 항소하였다.

2005년 12월 2심에서 대전지방법원은 항소를 기각하고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에 김용원은 대법원에 뻔뻔하게도 음주에 의한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이유로 상고하였으나 다음해인 2006년 3월,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대로 피의자 김용원에게 사형을 확정지었다.해당기사(판결문)[24]

그러나 대한민국1997년부로 사형 집행을 하지 않기 때문에 사형은 아직까지 집행되지 않고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만 하고 있다.


12. 여담[편집]


김용원의 사형 판결을 확정시킨 4명의 대법관 중 한 명이 이른바 김영란법으로 유명한 대한민국 최초 여성 대법관김영란이다. 그녀는 2004년 대법관 후보 시절에는 사형제 폐지를 주장했으나# 대법관에 임명되자마자 바로 극형을 확정시킬 정도였으니 김용원의 죄질이 얼마나 불량했는지 알 수 있다.

연쇄살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청주 시민들 사이에서도 점점 잊혀지는 사건이다.

2008년 tvN에서 방영된 범죄의 재구성(tvN) 8화 청주 내연녀 연쇄살인사건 편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다만 실제 내용과 프로그램에서 재구성한 내용이 일부분 차이가 있다.

용감한 형사들 6회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다. 워낙 범행 내용이 악질적이라 MC들과 권일용 교수조차도 "여태까지 별별 범죄자를 다 봤지만 진짜 나쁜 놈이다"라며 분통을 터트렸을 정도.[25] 추가로 이 프로그램에 당시 김용원을 검거했던 형사들(차상학 경정, 이찬호 경감)도 출연했는데 사형수로 오랫동안 복역한 김용원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13.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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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처음 경찰에 신고가 접수된 2차 사건인 청주시 봉명동 호프집 여주인 박씨(48) 살인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청주시 사창동 내연녀 살인사건, 충북 진천군 초등생 강간살해 후 암매장 사건이 드러난 것이다.[2] 즉 김용원은 결혼을 1달 남기고 연쇄살인마가 된 것이다.[3] 피해자 내연녀 성씨 같은 경우 김용원과 동거하기 전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으며 그녀 주변에 김용원 외에는 가족이나 지인 등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실종 신고조차도 접수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김용원이 살해하고도 바로 검거되지 못했던 것이다. 김용원이 술자리에서 떠들고 다녀서 이것을 들은 고향 후배 A씨가 경찰에 제보하지 않았더라면 이 사건은 김용원 혼자만 아는 영원한 비밀로 묻혔을지도 모른다.[4] 당시에는 소재지가 청원군이었으나 2014년에 청원군이 청주시와 통합하면서 청주시의 읍면지역이 되었다.[5] 그것도 김용원 본인의 핸드폰이 아니라 박씨 가게의 전화기국제전화를 하니 이것이 갈등을 폭발시키는 촉매가 된 것이다.[6] 그러나 박씨 살인 후 피해자의 혈흔이 묻은 자신의 족적을 호프집에 고스란히 남기고 현장을 떠난 바람에 오히려 결정적인 증거만 남기고 말았다.[7] 2차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 8시간 지난 후였다.[A] A B 당시 청주서부경찰서 강력1팀 형사, 현 충청북도경찰청 안보수사1대장.[8] 아무리 여성 혼자 운영하는 가게들 대상으로 강도살인을 한다 해도 보통은 범인들이 흉기를 미리 준비해서 가거나, 자신의 완력으로 제압만 하고 금품을 갈취하거나, 범행에 쓸 만한 흉기를 현장에서 찾아서 저지르지 김용원처럼 두개골이 함몰될 만큼 집중적으로 가격하진 않는다. 강도에게는 최종 목적은 금품이기 때문에 피해자의 저항을 제어할 정도만 폭력을 사용하고 최대한 자신의 증거를 남기지 않고 목적을 달성한뒤 빨리 현장을 빠져나가는 편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강도에 의한 살인사건치고 필요이상의 과다한 공격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주로 면식범에 의한 살해현장에서 피해자의 얼굴 주변을 참혹하게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공격하는 경우가 많아 경찰은 이 사건을 면식범의 소행으로 보고 박씨의 주변인물부터 조사한 것이다.[9] 사실 이전에도 김용원은 최씨에게 수 차례 접근해 최양을 수 차례 성추행, 성폭행한 전력이 있었다. 김용원은 최양에게 범행을 저지를 때마다 현금 1만 원을 주면서 비밀을 지켜줄 것을 강요하였다. 당시 최양은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관계로 가정에서 가족에게 보살핌을 받기보다는 아동보호시설에 있는 기간이 많았는데 해당 아동보호시설 교사들이 최양의 온몸 곳곳에 상처가 나 있고 소변장애가 있는 등 성폭행의 정황은 발견하였으나 당시 법망의 미비, 남의 가정이라도 발생한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인식의 부재(아동의 부모에게 상담을 의뢰해서 신고를 유도하도록 설득하는 게 전부였다.) 등으로 추가 피해를 막지는 못했다.관련 기사 현재는 관련 법령과 제도 등이 개정되어 아동보호시설이나 학교 교사는 아동학대 신고 의무자이므로 담당 선생님이 아동학대 흔적을 발견했는데도 무시하고 신고하지 않으면 처벌받는다.[10] 김용원은 평소에 최양이 자신의 말을 잘 듣는다고 본인 딴에는 생각해 왔던 모양. 그러나 그날따라 최양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말을 듣지 않아 수배로 인해 극도로 스트레스에 달한 상태에서 분노가 극에 치달아 이성적인 판단은 애초에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사실 애초에 자제력이란 것이 없는 인물이었다.) 최양이 아버지에게 자신의 범행 사실을 말하게 된다면 금방 검거될 게 뻔했고 그렇게 영원히 교도소에서 못 나오게 될 게 분명했다.(강간, 절도, 강도 등으로 이미 전과 8범에 11년 동안 교도소에 수감된 전과자인데 살인죄까지 추가되면...) 거기다 경찰의 수사로부터 도피하려면 자신과 신뢰가 돈독한 지인의 도움이 절실한데 후배 최씨까지 자신에게 등을 돌려 버린다면 결과는 명약관화였다. 결국 김용원은 극도의 불안감과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어린 최양을 살해하였다.[11] 김용원도 이날 잠복근무 중이던 경찰에 검거되었다.[12] 최대한 주변 친척,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서 충분한 도피자금을 모으는 데 시간을 벌기 위해 폐가를 은신처로 정한 모양이다.[13] 예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저질렀던 강력범죄의 용의선상에서 빠지기 위해서 범죄자들이 자주 쓰던 수법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경찰 행정시스템의 한계 때문에 드들강 여고생 살인 사건처럼 수배 중인 범인이 다른 죄목으로 검찰에 기소되고 재판에 넘겨져서 교도소에 뻔히 있는데도 범인을 검거하지 못한 사건들이 많았다.[14] 실제로 경찰조사를 받을 때도 "한 번 살인해 보니 두번째부터는 너무 쉬웠다"고 진술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경찰에서도 김용원을 상대로 여죄를 계속 추궁했던 것이다.[15] 이 기사에서는 가명을 사용했다.[16] 이때 김용원은 운전 기능을 익혔으며 살해 후 시신을 유기하는 데 이용하였다.[17] 이때는 소년부로 송치되었다.[18] 방위병으로 근무하면서도 절도죄를 저질렀을 정도로 도벽이 심각하였다.[19] 이것이 충북 괴산군에서 지씨(당시 27세)를 살해한 혐의로 조사받던 도중 범죄를 저질러서 수사선상에서 벗어난 사건이다. 충북지방신문 기사에서는 3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고 나와 있는 데 반해 판결문에서는 6년형을 받았다고 나와 있다. 이는 정확한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20] 김용원은 사회화가 전혀 안 된 자다. 특히 자신의 범행을 떠들어댄 일의 경우 지인들이 그대로 신고할 가능성이 있고 행여나 지인들과 관계가 틀어지면 자신이 떠들어댄 범행이 알려질 우려가 더더욱 큰데도 불구하고 떠들고 다녔다.(실제로 자신의 범죄 행위를 술김에 떠들어댔다가 그대로 지인들의 신고가 들어가서 내막이 드러난 사례들이 종종 있었는가 하면 해외에선 자신의 범행을 가족한테 털어놓은 뒤 지인의 집에 숨었으나 자기 가족들이 신고하는 바람에 체포된 사례도 있다.) 김용원은 평소에 아무런 계획이나 대책도 없이 즉흥적이고 단편적으로 살아 왔고 그저 닥쳐오는 대로 혹은 자신이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이미 몸에 습관으로 밴 것이다. 만약 주변인들이 자신의 약점으로 압박하거나 통제하려고 든다면 언제든지 또다시 살인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김용원의 검거가 더 늦었더라면 피해자는 계속 늘어났을 수도 있었다.[21] 애초에 자존감이 낮았던 그는 고향 후배, 내연녀 등 지인 사이에서 자신이 우두머리의 위치에서 남을 통제하는 것이 즐거움이자 삶의 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항상 만나면 술자리를 가지고 술에 취해 기분이 좋으면 자신의 살인을 이야기하는 등 허세를 부리다가 반대로 타인이 조금이라도 기분 나쁜 말을 자신에게 하기라도 하면 바로 격분하여 화를 참지 못하고 폭력과 살인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김용원에 희생된 피해자들이 김용원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자신보다 물리적으로 약한 여성, 여아인 것으로 보아 자신보다 완력이 약한 상대나 한국의 정서상 수직관계에서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대상들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하는 것은 단 한 마디도 용납하지 못했던 것이다.[22] 이들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비면식 관계인 사람들 상대로 살인을 저지른 정두영, 유영철, 정남규와 달리 김용원은 자신과 애인 관계 혹은 후배의 가족관계 등 면식 상대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물론 살인은 비인륜적인 강력범죄란 사실은 똑같지만 말이다.[23] 비록 출소 전이긴 하지만 1994년 4월 괴산군 지씨(당시 27세) 살인 사건은 김용원이 검거된 시점인 2005년으로부터 11년이나 지난 사건이다 보니 당시 경찰은 증거 확보가 매우 어려웠으며 안타깝게도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기소하지 못하였고 2005년에 벌어진 3명의 살인 사건만 기소하여 법원에 인정받았다. 김용원이 자백한(비공식 포함) 살인 사건은 사실 총 4건인 셈이다.[24] 통상적으로 대한민국의 사형수들이 논현동 묻지마 방화 살인사건의 피의자 정상진처럼 항소 혹은 상고를 포기하지 않은 이상은 구속된 후 대법원의 판결을 받기까지의 기간이 1년 혹은 1년 이상인 데 반해 이례적으로 김용원은 구속된 지 9개월만에 대법원에서 최종 사형 확정 판결을 받았다.[25] 권일용 교수는 김용원의 범행을 보면서 '울분이 치솟는다'고 비판했으며 특히 후배의 딸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사건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아예 MC진들 사이에서 대놓고 "이거 그냥 욕하고 삐 처리해 버릴까?"라는 멘트가 나오기까지 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