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현(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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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씨돌.jpg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제주도 장애인 자활 시설 건립 추진
2.3. 파라과이 교민회 총무
2.4. 1년만의 귀국
2.6. 6.10 민주 항쟁과 의문사 진상규명 결의대회
2.7. 자연인 '씨돌'의 삶
2.9. 그 외 사회운동
2.10. 방송에 알려지다
2.11. 2019년, 세상에 널리 알려지다
3. 저서


1. 개요[편집]


人間(인간으로서 당연한 일.

"자신에게 전혀 도움되지 않는데, 왜 그런 삶을 사셨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 [1]


삼풍백화점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애썼던 자연인 '씨돌'은 자식을 잃은 부모님들의 지팡이이자 방패가 되주었으며, 정연관 상병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낸 청년 '요한'이였습니다. 자신만을 위해 싸우는 세상에서 억울하고 서러운 이들을 위해 앞장섰고, 꺼져가는 생명에 가슴 아파하며 대참사의 현장에 뛰어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어디에나 있었지만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SBS 스페셜 '요한, 씨돌, 용현 세 삶을 산 남자' 클로징 멘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요한복음 1장 5절[2]

1953년 2월 8일생. 대한민국의 환경농업인이자 민주화 및 사회운동가. 사회운동을 했었던 시기에는 세례명요한으로, 이후 강원도에 자리를 잡은 후에는 김씨돌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고 김용현이라는 본명보다 이 이름이 더 유명하다. 종교는 천주교이다.


2. 생애[편집]



2.1. 어린 시절[편집]


만 11살이던 1964년에 부모를 여의고 대구SOS어린이마을[3]에 위탁됐다. 마침 1964년 한국에 비유럽권 국가로는 처음으로 SOS어린이마을이 생겼고 그중 대구에 처음 어린이마을이 만들어졌다. 김용현은 그렇게 만들어진 SOS어린이마을에 처음 위탁된 아동이었다.

대구중앙고등학교를 다녔다. 1.21 사태 이후 고등학교 과목에 교련이 추가되면서 당시 전국적으로 이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벌어졌는데, 김용현은 이때 학생부 간부로서 교련 반대시위 주동자로 연행된 적도 있었다.

고교 졸업 후 한 섬유회사에 취업해 3년간 경리를 맡았는데, 직원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과 당시 회사 임원의 횡령 비리를 알게 되면서 그러한 사회 부조리를 없애고자 법조인이 되기 위해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그러나 1981년 사법시험 면접 탈락 사건 이후 자신도 시위 및 연행 경력 때문에 불합격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사법시험을 포기했다.


2.2. 제주도 장애인 자활 시설 건립 추진[편집]


사실상 법조인이 되기가 불가능해지면서 김용현은 그대로 사법고시를 포기하고 1982년 제주도로 건너가 장애인 자활 시설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천막으로 임시건물을 지은 것을 시작으로 제대로 된 건물을 지으려고 했으나, 건물이 지어지기 전에 당시 제주도에 있었던 간첩 조작사건[4]에 연루됐다. 당시 제주 보안대에서는 장애인 자활 시설을 짓는 데에 조총련계 자금이 유입된 게 아닌지 의심했었고, 별안간 간첩으로 몰린 김용현은 제주 보안대에 끌려가 고문받았다.

시간이 지나 2005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생기면서 김용현은 이 당시 제주도 보안대에서 당했던 피해에 대해 호소했지만 2007년 각하 결정이 내려졌다. 정확하게는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탓에 각하된 것이었는데, 당시 과거사위 조사관 중에는 국정원에서 파견된 직원이 1명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 조사관이 김용현의 사건을 담당했다고 한다. 또한 각하 결정 이후 뇌졸중 초기 증상으로 입원한 적이 있는데, 보안대에 끌려가 고문을 받은 게 원인이라는 분석이다.


2.3. 파라과이 교민회 총무[편집]


제주 보안대에서 겨우 풀려난 후 상심한 김용현은 한국을 떠나 아무런 연고도 없던 지구 반대편 파라과이로 이민을 갔다. 1986년 파라과이로 건너가 교민회 총무를 맡은 그는 총무로서 민원실을 만들어서 한인 교민들의 민원을 해결했고, 먹을 물이 없는 파라과이 현지인들을 위해 우물을 파기도 했고, 교민들을 상대로 장애인 성금 모금에도 앞장섰다.[5]

1986년 그 해는 유독 파라과이로 이민 온 사람들이 많아서 교민 간의 갈등도 잦아 다들 교민회 활동을 꺼리는 가운데, 그는 월급도 박봉이고 일도 많은 교민회 총무 일을 도맡아 했다. 교민회 민원실 의자에 앉아 쪽잠을 잤을 정도였다고. 한편 당시 파라과이 역시 독재정권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정권에 맞서 수녀들이 농토를 현지 주민들에 돌려달라는 시위를 하다가 군인들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다. 파라과이 정권에서는 본보기로 삼기 위해 수녀들의 시신을 그대로 방치하라고 군인들에게 명령했지만 김용현이 수녀들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한다. 그는 30여년이 흐른 후에도 이때 일을 회상하면서 수녀님이 너무 불쌍했다며 펑펑 울었다.


2.4. 1년만의 귀국[편집]


그러다가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소식을 접하고 김용현은 그 즉시 귀국했다. 이후 청년들의 의문사 진상규명 활동을 시작했다. 원래 박종철과는 일면식도 없었지만 이를 계기로 박종철의 아버지 박정기 씨와는 오랜 기간 인연을 이어갔다.

늘 요한 씨만 생각나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숙제가 남고 있으니 마음 같아서는 금방이라도 한번 가보고 싶을 때가 많지요. (중략) 강원도에서 만날 날이 있기를 기대해 보면서 소식을 전합니다.

박정기 씨가 1998년 김용현에게 보낸 편지 중



2.5. 정연관 상병 구타 사망사건[편집]


1987년, 정연관 상병이 부대 내에서 사망했다. 군 내부에서는 사인을 훈련 중 급사로 밝혔다. 수상한 점은 많지만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할 수 없는 가족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김용현이 가족들의 집을 방문했다. 서슬 퍼런 보안부대의 감시를 피해 담을 넘으며 집을 방문한 그는 아들이 훈련 중 급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바로 군 내 부정투표로 인해 발생한 구타가 사인이였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처음으로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게 된 선거였다. 군 내에서도 부재자 투표를 진행했는데, 문제는 대놓고 여당을 찍으라고 압박을 주거나 비밀투표를 보장하지 않고 이 나라처럼 감독관이 보는 앞에서 도장을 찍는 등 윗선에서 대놓고 여당을 밀어줄 것을 강요하고 있었는데 정연관 상병은 이에 굴하지 않고 야당에 투표를 해버렸다. 이에 중대장이 선임들을 불러 야당 표가 나왔다고 꾸짖었고, 선임들이 군기훈련을 준다고 정연관 상병을 구타해 결국 사망에 이른 것. 김용현은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을 뿐만 아니라 구타를 한 선임들의 증언을 녹취하면서까지 증거자료를 모았다.

또한 가족들과 함께 13대 국회의원이였던 이철용, 최규하 전 대통령,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대중, 노무현 변호사와 접촉을 진행하면서 정연관 상병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자 했다. 하지만 진상규명은 쉽지 않았다. 이 부정투표를 인정하면 노태우의 대통령 당선이 무효화가 될 수 있기에 여당에서 필사적으로 진상규명을 방해했다.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 소속의 이상득 의원[6]'그 자리에 있던 사람도 아니였고, 당신이랑 직접 관련이 있는 사람도 아니지 않느냐?'며 논점을 흐리며 방해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김용현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진실을 밝히려고 했고 17년이 흐른 2004년 7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정연관 상병이 야당에 투표했다는 이유로 구타를 당해 사망한 것이 마침내 인정되었다. 이 때 김용현이 수집한 자료들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정연관 상병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김용현. 그러나 그는 정연관 상병의 어머니를 찾아가 한 번 포옹을 한 뒤 자취를 감추었다. 갑자기 아무 말 없이 사라져버려 유족들은 그렇게 고생했는데 우리가 아무 보상도 해준 게 없으니 섭섭해서 떠난 게 아닌가 하는 오해도 했다고 한다.


2.6. 6.10 민주 항쟁과 의문사 진상규명 결의대회[편집]


요한 선생님은 우리들이 아무것도 몰랐을 때, 투쟁 현장의 제일 앞에서 우리들을 인도한 사람이에요.

배은심 여사[7]


파일:김씨돌 반대 시위.png

87년 6월 뉴스위크, 타임지 어깨동무 사진 앞줄 맨 오른쪽 남색 상의, 안경 = 나, 김용현

1987년 6월 29일, 타임지에 실린 최루탄 반대 시위 사진에서 자신의 위치를 설명


6월 항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가 최루탄 반대 시위에서 연좌농성 맨 앞줄에 앉아 다른 시위대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모습이 외신기자의 사진에 찍혀 타임지, 뉴스위크에 실리기도 했다. 맨 앞줄에 있는 모습이 실려 있다. 이후 노태우가 당선은 되지만 곳곳에서 부정 투표 관련 문제가 터져 나오자 민정당의 부정선거를 알리는 대자보를 곳곳에 붙이며 투쟁했고, 대선 당시에도 성당 지하실에 컴퓨터를 쌓아두고 '공정선거감시단'을 스스로 결성해 실시간으로 감시를 했을 정도로 민주화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후 의문사 진상규명 결의대회가 벌어졌고, 억울하게 자식들을 잃은 부모들을 위해 항상 시위대 선두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그런 행동으로 인해 경찰들의 과잉 폭력 진압으로 온몸을 짓밟히고 경찰에게 고문 및 가혹행위, 미행을 당했다. 고문가혹행위로 인해 김용현의 몸은 돌아올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부상을 당할 정도로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김용현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이 때 민주화 운동의 한 축이였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김승훈 신부와도 인연이 있었다. 수배령이 내려져 있는 김용현을 김승훈 신부가 받아줬고, 김용현은 그를 보필하면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이후 김승훈 신부에게 세례를 받아 '요한'이란 세례명을 받았고 이는 가명으로 쓰이며 그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이후 강원도에 정착해서도 정선의 공소에 종종 나왔다고 한다.


2.7. 자연인 '씨돌'의 삶[편집]


파일:김씨돌_자연인.jpg

그는 1980-1990년대 민주화 운동 시절 목숨을 희생한 친구들에게 세속에서 살아가는 건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 속세를 떠나고 자연을 택했다. 그가 선택한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해발 800미터에 있는 오지 중의 오지[8]인 산골, 봉화치 마을로 들어가 자연인의 삶을 시작한 것.

그야말로 그는 자연인 그 자체였는데, 아름드리 소나무를 껴안으며 나무의 숨소리를 느끼기도 하고, 길을 가다 갑자기 황토구덩이에 머리를 묻고 흙의 향을 맡기도 하고, 연못에서 낚시를 하다가 옷을 홀랑 벗고 알몸으로 수영을 하거나 심지어 알몸으로 등산을(!) 하기도 했다. 여름뿐 아니라 겨울에도. 심지어 그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온 방송국에서 찾아왔을 때도 카메라가 앞에 있건 말건 신경도 안 썼다. 결국 제작진들은 모자이크 처리를 해야 했다(...)

평소에는 늘 웃는 얼굴에 거의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이지만 드물게 화낼 때가 바로 옹달샘에 누군가 쓰레기를 버리고 갔을 때, 이웃 주민이 제초제를 뿌리려고 하면 도롱뇽이 죽는다고 주지 말라고 막을 때 등 자연에 해가 되는 것을 볼 때였다.
인근 사람이 '그 아저씨는 모든 것이 다 친구'라고 말할 정도로 동물들을 아꼈다. 옹달샘에 도롱뇽이 한 마리만 보인다면서 외로울 것 같다고 어디선가 한 마리를 더 데려다가 넣어주고는 '예쁘다, 예쁘다'하고 속삭이거나, 추운 겨울에 겨울잠 자는 뱀이 놀란다며 아궁이에 불을 때지 않거나, 겨우내 지친 고라니들이 사냥꾼에게 잡힐까봐 빗자루를 들고 산속으로 들어가서 눈 위에 찍힌 발자국들을 쓸어 지우고 다니기도 했다. 한겨울 동트기 전이면 안 그래도 추운 겨울 산속인데다 새벽이라 어마어마하게 추운데도 험한 산 깊은 곳으로 가방을 싸들고 들어가서 야생동물들이 겨울을 날 먹이를 두고 오곤 했다. 굳이 새벽에 하는 이유는 동물들이 인기척에 놀라거나, 도망가다가 다칠까봐.

그 먹이들은 자급자족으로 직접 키운 과일, 채소, 곡식들로, 잡초를 뽑지도 비료를 주지도 않고 모든 풀을 같이 키웠다. 동물이나 곤충들이 갉아먹어도 쫓아내지 않고 오히려 맛있게 먹으라고 내버려둔 채, 먹고 남은 것들만 수확했다. 흙도, 잡초도, 벌레도 모두 생명이니 해쳐서는 안 되며, 그렇게 해야 자연산, 자연의 질서라면서. 일명 '저절로 농법'. 쟁기질을 하지 않아도 지렁이가 밭을 일구고, 농약 대신 거미가 해충을 처리해준다는 것이다. 산길에서 뱀을 맞닥뜨리고는 자기 밭에 풀어주기도 하고, 땅속에서 지렁이를 발견하고는 덕분에 수확물을 얻을 수 있다며 큰절을 올리기도 했다. 이러니 집과 밭은 겉보기에는 폐가와 버려진 땅 같고[9] 늘 볼품없는 크기와 모양의 열매만 나왔지만 불만 없이 수확하고, 지인들과 나누어 먹었다. 농사지을 씨앗을 사는 종묘 가게 주인에게 나눠주면서 농작물을 씨앗으로 물물교환하고, 참여연대에도 일부 농산물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갑자기 시골 마을에 나타나 정착한 외지 사람에 범상치 않은 모습(머리칼과 수염은 덥수룩하고, 오래되어 낡은 옷차림에 신발도 잘 안 신고, 여름에는 옷을 제대로 입지도 않고, 정선 5일장에 갈 때면 20세기에 지게를 짊어지고 왕복 3시간 거리를 걸어다니고, 과거에 대해 물으면 웃으며 말을 아끼거나 엉뚱한 이야기를 하고, 그러면서도 아는 것이 많고 소양이 풍부하다는 것이 느껴지는 등...)이다보니 사람들은 그를 수상히 여기기도 했다.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돈다거나, 경찰에 잡혀가서 조사를 받고 나왔다카더라는 등...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사람들과 가까워져갔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인으로 살면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으니...

2.8.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편집]


1995년 6월 29일, 대한민국의 비극 중 하나인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 강원도의 자연인 김씨돌로 살던 그는 서울로 향해 다시 김요한이란 이름으로 구조 활동을 했다. 붕괴 사고 민간구조단[10]장인 고진광 씨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11]

김용현은 붕괴 현장에서 많이 울면서도 사람을 열성적으로 구조하려고 애썼고, 임산부 사망자의 시신이 무너진 구조물에 깔려서 한쪽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수습하기 힘들 상황이 되자 결사 반대하고는 혼자서 쉬지 않고 고인의 다리를 짓누르는 구조물을 해체하기를 만 하루, 마침내 온전한 모습으로 시신을 수습하는 데 성공해냈다.
4일째 날에는 그때까지 살아있던 22세의 여성 이모 씨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구조 영상에서도 "산소호흡기! 산소호흡기 가져와!"라는 그의 다급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구출한 이모 씨는 병원으로 옮겨진 후 사망했다. 김용현은 그냥 넘어가지 않고, 언론사에 칼럼을 보내고 서울특별시 소방본부장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이런 비극이 없어야 한다고 대책을 요구했고, 소방본부장은 7월 10일 김용현에게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며 회신을 보내기도 했다. 이후 사고가 수습이 되고, 기자들이 영웅인 민간구조대원들을 인터뷰하려고 했는데 이때 김용현만은 취재를 거절했고, "전 괜찮아요."라는 말과 함께 또 다시 홀연히 사라졌다.


2.9. 그 외 사회운동[편집]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벌어졌던 구미 산동 골프장 사태 때 당시 골프장 건설 반대 운동을 펼치던 농민들을 도왔다. 당시 아무도 농민들의 편에 서지 않았을 때 직접 야당 의원도 초청했고 정치권에서 관심을 가지면서 언론에서도 무분별한 산지 개발과 그에 따른 환경오염을 문제삼으며, 6년이 넘게 논쟁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결국 산동 골프장은 건설됐다.

봉화치에 있는 남산 산불감시 초소에서 매일 9시간 씩 산불 감시 요원 일을 오랫동안 하기도 했다. 늦은 밤까지 자발적으로 야근을 하기도 했는데, 산불감시원들은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GPS를 늘 갖고 다니기에 그의 위치가 산 정상에서 꿈쩍하지 않는 것을 본 관계자들이 처음엔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잔뜩 걱정하기도 했고 그만 내려오라고 말린 적도 있었지만 아무도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진심으로 산을 지키려는 그의 마을을 안 동료들은 그를 존경했고 '산신령'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이로 인해 30년간 봉화치는 산불에 매우 취약한 강원도에 위치한 산임에도 산불 피해가 없었고, 산림청으로부터 표창상을 받기도 했다.

이후에도 1997년 우리밀 살리기 운동, 1999년 영월댐 건설 저지 운동 등에 참여했다.

1999년에는 정선군 일대에 토종벌이 단체로 폐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도 김용현은 농민들을 대신해 직접 찾아다니며 직접 사건을 조사하고, 보고서를 직접 작성했다. 기관에서 소나무 해충을 막기 위해 헬기로 한 방제작업이 원인 같다는 추론을 내놓고, 헬기 기종과 약품 등을 방대하게 조사했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 컴퓨터 사용도 대중적이지 않았던 그때에 말이다.
그는 농민들의 피해 발생 지역을 직접 그림으로 그리고 구체적인 농가 피해 내역과 함께 탄원서를 작성해서 지자체와 관계기관 측에 문제를 제기하고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렇게 발로 뛰며 자료를 수집하고 전문가들의 자문을 얻어 지자체에 문제제기를 하면서 무려 2년 동안이나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농민들을 대신해 각종 언론들을 찾아다니며 대책을 요구하는 인터뷰도 했다. 의혹을 제기하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직접적인 연관성을 밝힐 수 없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이제 강원도 정선의 한봉은 과거에 비해 극히 미미한 규모만 남아,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는 실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농민들은 그때 자신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준 유일한 사람이 김용현이었고, 정말로 고마웠기에 이 것만으로도 만족했다고 한다.


2.10. 방송에 알려지다[편집]


그 때는 자연인이라는 말을 잘 몰랐던 시절이라, 김씨돌 씨야말로 지금 생각해보면 원조 자연인이다.

임성훈

2012년, 산불감시원 활동을 하던 그를 본 소방관이 보통사람 같지 않은 그의 모습을 보고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에 제보하면서 그는 방송에 모습을 드러내며 주목받았다. 갑자기 옷을 훌렁훌렁 벗는 모습, 산에 있는 지렁이를 먹는 모습이 나와 괴짜인가 싶었지만 그의 아픈 과거가 밝혀지고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모습, 그리고 진정으로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며 직접 재배한 작물들을 매년 참여연대에 기부하고 물욕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돈을 갖는 게 무섭다'며 자신이 살던 집을 사후 기증하겠다는(이건 참여연대 쪽에서 정중히 사양했지만) 등 아낌없이 나누는 모습은 큰 반향을 일으켰고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때 일로 당시 PD였던 이큰별과도 인연을 맺고 자주 교류했다고 한다. 이큰별 왈 그의 인간적인 매력에 촬영 당시부터 출연자와 담당PD를 넘어 인간 대 인간으로 교감하는 시간을 보냈고, 어느 순간은 카메라가 돌아가는 것이 크게 중요치 않게 느껴지는 때도 있었다고. 그는 휴가 때면 김용현을 방문하곤 했다.[12]

내가 생각하는 씨돌 아저씨의 최대 매력은 '자연인이지만, 꼭 그것에만 매몰되지 않는 사람'이란 것입니다. 혁명가 체 게바라가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되 현실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합니다."고 했던 것처럼, 씨돌 아저씨는 생명과 자연을 오롯이 존중하되 현실적 삶을 배척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서 소박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아저씨가 '공자 왈 맹자 왈'하며 자신이 추구하는 사상을 가르치려 했다거나 문명에 대한 배타적인 자세만을 보여주었다면, 저는 그 오랜 시간 동안 무언가에 홀린 듯 아저씨와의 인연을 이어가진 못했을 것입니다.

(중략)

진심으로 자연과 생명을 배려하는 삶의 태도에서 자연스러운 인간미를 풍기는 진정한 '참사람'이었습니다.(중략)

제 마음속에서 언제나 가장 맨 앞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그 흔한 휴대전화조차 없는 사람, 바로 '씨돌 아저씨'였습니다.

이큰별, 단행본 <요한, 씨돌 용현>에서.


세상에 이런 일이 외에도 JTBC 오감도, KBS 남자의 자격, MBN 나는 자연인이다에도 출연하며 사람들에게 얼굴을 알린다.

그런데 2016년 가을 이후, 그는 갑자기 집을 비우고 다시 사라져 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던 와중, 2019년 SBS 스페셜에서 그의 현황을 찾아다니다 마침내 그를 찾게 되었다.

그런데...


2.11. 2019년, 세상에 널리 알려지다[편집]



SBS 스페셜에서 그를 찾은 건 다른 곳이 아니라 어느 요양원이었다. 또한 예전의 활동적이고 밝은 모습은 어디가고 휠체어에 앉아 몸을 가누지 못 하는 모습이였다.

사실 과거의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그의 몸상태는 말이 아니였는데 비교적 멀쩡하던 시절에도 다리와 허리가 좋지 않아 발바닥을 지압해 고통을 줄이려고 맨발로 걸어다녔고, 잠을 잘 때는 솔잎을 방에다 깔고 잠을 청할 정도였다. 이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혈압이 높았는데, 갑작스럽게 뇌출혈이 터져 쓰러졌다. 안타깝게도 사람의 손길이 뻗지 않는 오지에서 살고 있었기에 뇌출혈을 일으킨 후 한참 지난 뒤에야 지나가던 등산인에게 발견되어 병원에 후송되었다. 갑자기 쓰러져 실려가는 바람에 이웃에게조차 알리지 못한 것.

그나마 등산객에게 발견되어 더 늦기 전에 치료를 받았으니 살 수 있었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어서 왼손을 제외하고 온 몸이 마비가 되었으며 언어장애로 인해 의사소통도 20%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몸의 상태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져 의사도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남은 평생을 장애인으로 살아야 하는 상황이고,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왼손으로 오른쪽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재활 치료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밝혔다. 복지사가 손톱을 깎아주려고 해도 후유증으로 인한 통증 때문에 손을 심하게 떨어 결국 손톱도 깎지 못 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파일:김씨돌_상봉.jpg

파일:김씨돌3.png
또한 정연관 상병의 유족들과의 상봉도 이루어졌다. 김용현은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며 반대했지만, 유족들이 그에게 감사를 표하기도 전에 홀연히 사라져 15년 동안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 크기에 PD가 만남을 주선했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뒤 다시 나타나지 않았기에 유족들은 그가 정연관 상병을 잊은 것인지,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못한 것이 서운해서 떠난 것인지 오해하기도 했지만 이 날 상봉으로 그런 오해는 싹 사라졌다. 김용현은 불편한 몸으로 유족들을 만나자 대성통곡을 했고, 그를 침착하게 만나려고 한 유족들도 그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참지 못 하고 쏟아내는 장면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게 했다. 후에 유족들과 김용현과 함께 정연관 상병의 영정을 들고 다같이 사진을 찍었다.[13][14]

파일:김씨돌 주먹.png
이렇다 할 소득도 없어 기초수급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으며 재활 치료를 받을 여건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나마 신부와 수녀들의 도움으로 치료는 받고 있지만 그 이상의 재활 치료는 아직 못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대학교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지만 서울권 명문 사립대에 재학하고 있던 엘리트였기에 만약 이런 길을 걷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어렵게 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후회하거나 자신의 현재 삶을 개탄하지 않았다. 당신에게 전혀 도움되지 않는데, 왜 그렇게 어렵게 살아왔느냐는 PD의 질문에 한 말이....

노트 위에 거침없이 적어 내려간 말은 당시 인터뷰 현장에 있던 전 스텝들을 당황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머리를 한 대 맞기라도 한 듯,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人間(인간으로서 당연한 일.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들을 우리는 얼마나 모른 척 지나쳤던가. 얼마나 까맣게 잊은 채 살고 있었던가. 알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요한, 씨돌, 용현> 단행본 227쪽. 다큐멘터리에서 나레이션을 맡은 류수영도 녹음 중 이 부분에서 멍해지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치는 NG를 냈다고 한다.


또한, 인터뷰를 끝내고 멀어지는 카메라를 향해 유일하게 쓸 수 있는 왼손으로 힘겹지만 힘차게 주먹을 들어올리며 진정한 의인의 모습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2019년 9월, SBS 세상에 이런일이의 유튜브 채널 '우와한 비디오'에서 김용현의 근황을 다뤘다. #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후원이 이어졌으며, 이전에는 요양원에서 단순 요양만 받는 수준이었다면 이후에는 재활 전문 치료병원에서 재활을 받고 있다고 알렸다. 연하장애[15] 때문에 음식을 먹는 것은 고사하고 침도 제대로 삼키지 못 해 질질 흘리는 심각한 상태였으며, 연하치료와 더불어 노래치료를 통해 아직은 부족하지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등, 재활 효과가 좋다고 한다. SBS 스페셜 촬영 당시에는 말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2019년 12월에 SBS 스페셜에서 김용현에 대해 다시 다뤘다.

3. 저서[편집]


  • <오! 도라지꽃>(2005) - 산문집 겸 시집. 일종의 산중일기이다.
  • <청숫잔 맑은 물에>(2019) - 산중일기 2권
  • <그대 풀잎 비비는 소리 들었는가>(2019) - 시집

김용현은 산속에 살면서 틈틈이 글을 썼고, 평소 필기구를 사가던 읍내 문구사 주인인 지인이 이를 종이값만 받고 타이핑해 주었다. 이를 출판사에 보내 마침내 출판에 성공했다고 한다. 그가 쓴 전체 글의 양은 2천 페이지가 넘지만 겨우 정리한 것이라고.
출판사 대표 장종권 시인은 글이 워낙 방대한데다가 필체를 알아보기 어렵고, 자신의 독특한 표현법으로 글을 쓰다보니 그의 생각이나 삶을 이해하지 못하면 전혀 엉뚱한 해석이 되기 때문에 여간 까다로운 작업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가 원고를 보낼 때마다 본인이 직접 재배한 채소나 산불감시 활동을 하며 받은 많지 않은 급여의 일부, 감사하다는 편지를 꼬박꼬박 첨부하는 것에 그 정성을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고.

장종권은 그의 글을 '막 쏟아내는 글', 하고 싶은 말을 마구 뱉어내느라 투박하지만 위선이나 꾸밈이 없다고 평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독자가 어떤 글을 읽고싶어 하는지, 어떤 글을 써야 잘 팔리는지를 고민하며 쓰게 될 때가 많지만 '김씨돌의 글'에서는 글을 잘 쓰겠다거나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글을 쓰겠다는 의도 자체가 보이지 않아서, 본인의 주장과 생각이 뚜렷하다는 것이다. 문명생활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들을 느끼는 사람의, 두고두고 음미하면서 봐야 하는 글이라고.

그의 시는 자연에 관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고, 자신이 젊은 시절 참여하기도 했던 민주화운동에 관한 것도 있다.
와! 아름답다. 우와! 막 쏟아진다.
깜깜한 세상을 밝힌,
아! 소리 없이 착한 사람들.
와! 사무친 별, 꽃이여.
새벽 별 반짝이는, 인간미 넘치는
건강한 꿈나라를 엎드려 두 손 모아 비나이다.
저 별들처럼 가리지 말고 만납시다.
야호~야호~

미발표 자서전도 있다고 한다. 800쪽에 달하는 분량인데, 스스로 평생의 일을 자신이 직접 기록한 글을 제본 형태로 묶어놓은 책을 2012년 인연을 맺어왔던 이큰별 PD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가 정식 출판을 원한다는 것을 안 이큰별은 이곳저곳 출판사를 찾아다녔지만 결과는 모두 좌절. 결국 혼자 책을 읽으면서 낯설고 이해하기 힘든 내용, 생경한 단어들이 등장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해서 신화나 전설 같은 글을 쓴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는 7년 후 SBS 스페셜을 만들며 조사를 샅샅이 하고 나서야 그 모든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신화와 전설 속의 사람과 사건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을 취재를 통해 실제 눈앞에 마주했던 그 감정은 평생 잊을 수 없는 보석 같은 순간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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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면 답장이다. 人間 부분은 속자로 쓰였다.[2] 김용현의 세례명 '요한'과 그의 삶에 가장 잘 어울리는 성경 구절.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의 가사 첫 줄도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SBS 스페셜에도 등장했다[3] 평범한 보육원이 아니라, 수도자처럼 평생 결혼하지 않기로 서약한 여성들이 일반적인 보모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엄마라 불리며 친어머니처럼 아이들을 돌보는 곳이다.[4] 처음에는 제주도 간첩사건으로 알려졌으나, 추후 정권에서 조작한 사건이었다는 게 드러났다.[5] '뗄레똔'이라는, 파라과이 현지에서 장애인을 상대로 한 모금 활동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교민들은 자기 먹고 살기 바쁜 터라 김용현이 나서기 전까지 남을 돕는다는 생각을 거의 못했었다고 한다.[6] 이명박의 친형이다.[7] 이한열 열사의 생모[8] 워낙 인적 드문 산속에 숨어있다보니, 한국전쟁 때도 북한군이 못 찾아서(!) 피해를 안 입었다고 한다. 원래부터 사람 수가 적은 마을이었지만 현재는 단 3가구만 남았을 정도.[9] 그래서 세상에 이런일이에서 찾아왔을 때 제작진들이 사람이 안 사는 곳 같아서 그냥 발을 디뎠다가 멀쩡한 남의 밭을 망치냐며 혼났다고 한다.[10]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장비나 기술을 갖고 있으며 아무런 대가도 받지도 바라지도 않고, 그저 사람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온 이들로 이루어졌다. 참고로 세월호 참사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잠수사들 역시 아무 대가도 약속받지 않고 몸이 망가질 정도로 헌신했다. 이런 분들에게 1구당 500만원을 받는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사망사고 책임을 묻다니 정말 나쁜놈들이야 씨돌 본인도 세월호 때도 마음같아서는 팽목항에 가고 싶었다고 말할 정도. 하지만 그때는 나이도 많고 건강이 좋지 않아 가지 못했다고 한다.[11] 삼풍백화점에 도착한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으며, 사건 발생 다음 날(6월 30일)에 도착해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강원도에서 오느라 늦었고, 아직 구조할 사람이 더 필요할까 해서 왔다'고 답변해서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12] 한번은 바다를 본 지 20년이 넘었다는 그를 위해 그날로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를 보러 갔다고 한다. 대게를 대접했는데 그는 이번에도 한입 먹어보고는 벌떡 일어나 "너무 다셔서(달아서) 감사합니다!"라고 외치고 큰절을 하는 기행(?)을 해서 모두 크게 웃었다고 한다. 또 같이 찜질방에도 자주 가고.[13] 그나마 밝은 표정의 김용현과는 대비되게 유족들의 표정은 매우 어두운 것을 넘어 거의 울기 직전인 걸 볼 수 있다. 17년 동안 친족도 아니면서 정연관 상병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려고 고군분투 했는데, 어렵게 15년 만에 만나 감사를 표하려고 했는데 현재 그가 건강하지 못하게 지내고 있는 걸 보면 유족들의 표정도 어두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14] 유족들도 상당히 놀란 듯하다. 그를 보자마자 (몸 상태가) 왜 이러느냐는 말을 반복했고, 정연관 상병의 친형도 김용현을 상봉했지만 감정을 주체하지 못 하고 밖에서 "나도 만나고 싶었는데 저 모습일 줄은 진짜 상상도 못 했다... 진짜 상상도 못 한 일이야... 왜 저래 도대체가..."라며 눈물을 흘리며 슬퍼했다. 몇 년 전 방송에 나온 그를 우연히 보고 반가웠었다고 하는데(방송사에 연락해보고 싶었지만 다시 연락하는 것이 부담을 줄까봐 마음을 접었다고), 얼마나 지났다고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있으니 더욱 안타까워했다. 방송사 제작진들은, 재회를 손꼽아 기다리는 유족들(어머니는 다리가 불편해서 밖에 잘 나가지도 않는데 집에서 가깝지도 않은, 잘한다고 유명한 미용실에 물어물어 다녀와 특별히 파마를 할 정도였다. 만나기 직전에는 하느님께 기도를 할 정도였고.) 의 모습을 보면서 현재 김용현의 상태를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고.[15] 음식을 삼키는 기능에 문제가 생긴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