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환(1932)

덤프버전 :


파일:정부상징.svg
파일:부총리 겸.svg>
파일:기획재정부장관.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 펼치기 · 접기 ]
재무부장관 (1948~1994)

초대
김도연
제2대
최순주
제3대
백두진
제4대
박희현
제5대
이중재


제6대
김현철
제7대
인태식
제8대
김현철
제9대
송인상
제10대
윤호병


장도영 내각


송요찬 내각


박정희 내각

제11대
김영선
제12대
백선진
제13대
김유택
제14대
천병규
제15대
김세련

김현철 내각


제16대
황종률
제17대
박동규
제18대
이정환
제19대
홍승희
제20대
김정렴

제21대
김학렬
제22대
서봉균
제23대
황종률
제24대
남덕우
제25대
김용환


제26대
김원기
제27대
이승윤
제28대
나웅배
제29대
강경식
제30대
김만제



제31대
정인용
제32대
사공일
제33대
이규성
제34대
정영의
제35대
이용만

제36대
홍재형
제37대
박재윤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1961~1994)

송요찬 내각


박정희 내각


김현철 내각

초대
김유택
제2대
송요찬
제3대
김현철
제4대
김유택
제5대
유창순

김현철 내각


제6대
원용석
제7대
김유택
제8대
장기영
제9대
박충훈
제10대
김학렬

제11대
태완선
제12대
남덕우
제13대
신현확
제14대
이한빈
제15대
김원기


제16대
신병현
제17대
김준성
제18대
서석준
제19대
신병현
제20대
김만제


제21대
정인용
제22대
나웅배
제23대
조순
제24대
이승윤
제25대
최각규

제26대
이경식
제27대
정재석
제28대
홍재형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 (1994~1998)

초대
홍재형
제2대
나웅배
제3대
한승수
제4대
강경식
제5대
임창열

재정경제부장관 (1998~2001)

초대
이규성
제2대
강봉균
제3대
이헌재
제4대
진념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 (2001~2008)


초대
진념
제2대
전윤철
제3대
김진표

제4대
이헌재
제5대
한덕수
제6대
권오규

기획예산처장관 (1999~2008)


초대
진념
제2대
전윤철
제3대
장승우
제4대
박봉흠
제5대
김병일

제6대
변양균
제7대
장병완

기획재정부장관 (2008~2013)


초대
강만수
제2대
윤증현
제3대
박재완
제4대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 (2013~현재)


초대
현오석
제2대
최경환
제3대
유일호
제4대
김동연
제5대
홍남기

제6대
추경호
임시정부 재무부장




김용환 관련 틀
[ 펼치기 · 접기 ]


파일:신민주공화당 심볼.svg 파일:신민주공화당 글자.svg 정책위원회 의장
창당

초대
김용환


해산
(민주자유당에 흡수합당.)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아이콘.svg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사무총장
초대
조부영

제2대
김용환

제3대
강창희




대한민국 제26대 재무부장관
김용환
金龍煥 | Kim Yong-hwan


파일:58af17ed-9d3f-4b54-b5d5-fc5706e9faa8.jpg

출생
1932년 2월 5일
충청남도 보령군
(現 충청남도 보령시)
사망
2017년 4월 7일 (향년 85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본관
경주 김씨 #

정암(靜巖)
재임기간
제2대 기획재정부 차관보
1968년 5월 28일 ~ 1968년 8월 19일
제6대 농림부 농정차관보
1968년 8월 20일 ~ 1970년 12월 31일
제22대 상공부 차관
1972년 3월 7일 ~ 1972년 8월 2일
제24대 재무부 차관
1972년 8월 3일 ~ 1973년 5월 3일
제3대 경제제1수석비서관
1973년 8월 14일 ~ 1974년 9월 18일
제25대 재무부 장관
1974년 9월 18일 ~ 1978년 12월 22일

[ 펼치기 · 접기 ]
배우자
나춘구
자녀
2남
학력
남포국민학교 (졸업)
공주중학교 (졸업)
공주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병역
병역면제 (질병)
신체
160㎝, 58㎏
의원 선수
4
의원 대수
13, 14, 15, 16
약력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 객원 연구원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 객원 연구원
재무부 이재국장
재무부 세정차관보
농림부 농정차관보
대통령 비서실 외자담당비서관
상공부 차관
제24대 재무부 차관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 기획단장
대통령 비서실 경제담당비서관
제26대 재무부 장관
인하대학교 행정학과 초빙교수
한양대학교 행정학과 초빙교수
신민주공화당 정책위원회 의장
아시아태평양경제연구소 회장
제13대 국회의원 (충청남도 대천·보령 / 신민주공화당)
민주자유당 정책위원회 위원장
제14대 국회의원 (충청남도 대천·보령 / 민주자유당)
자유민주연합 부총재
제15대 국회의원 (충청남도 보령 / 자유민주연합)
자유민주연합 부총재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위원장
자유민주연합 수석부총재
희망의 한국신당 부총재 취임
희망의 한국신당 대표 총재 취임
제16대 국회의원 (충청남도 보령·서천 / 희망의 한국신당)
한나라당 국가혁신위원회 위원장
한나라당 지도위원회 위원장
한나라당 상임고문
새누리당 상임고문
자유한국당 상임고문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여담
5. 선거 이력
6. 소속 정당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경제관료, 정치인.


2. 생애[편집]


1932년 충청남도 보령군에서 태어났다. 공주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으며, 제7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면서 관료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박정희 정부 때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재무부(현 기획재정부)장관 등을 지냈다.

오늘날까지도 "고리대금업 단속"이란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과 VS "헌법에 보장된 사유재산권 침해", 재벌감싸기의 부정적인 시각으로 평가가 극명히 나뉘는 초법적인 대통령령1972년8.3 사채동결조치 (긴급명령 15호)[1] 추진자로써 언론에 오르내리며 구설수에 올랐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김용환을 젊고 유능한 관료로 크게 신뢰하였다고 한다. 이 8.3 사채 동결 조치에 대한 평가는 지금까지도 관점에 따라서 크게 엇갈리는데, 자세한 내용은 검색을 권한다.

이후 제13대, 14대, 15대, 16대 국회의원(신민주공화당, 민주자유당, 통일국민당, 신민당, 자유민주연합, 희망의한국신당, 한나라당)을 지냈다.

1996년 10월 자민련 사무총장으로 김종필 총재를 대리해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와 만나서 양당간 공조방안을 처음 의논하였다. 이후 자민련과 국민회의는 합동 의원총회, 보궐선거 후보 단일화 등으로 협력관계를 다져가면서 결국 15대 대선을 앞둔 1997년 10월 대선후보 단일화와 당선후 국정 공동운영, 1999년 말까지 내각제 개헌 완료를 내용으로 하는 DJP연합을 합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용환은 새정치국민회의 한광옥 부총재와 막후협상을 통해서 DJP연합을 성사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2]

대선에서 승리한 직후에는 비상경제대책위원장을 맡아서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재무부 관료였으나 오랜 기간 야인으로 머물고 있던 이헌재를 다시 불러들여서 신설된 금융감독위원장(현 금융위원회)에 앉히기도 하였다.

내각제 개헌을 조건으로 DJP연합에 앞장섰지만, 개헌시한이었던 1999년 김대중-김종필 양김 회동 끝에 내각제 개헌 연기 선언이 나오자, 이에 반발해서 자민련을 탈당하였다. 이때부터 명백한 반DJ, 반JP 노선을 걷는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하나회 출신인 허화평 등과 함께 희망의한국신당을 창당하였으나, 막상 허화평은 민주국민당으로 가버렸고(...) 본인은 고향인 충청남도 서천군·보령시 선거구에서 홀로 당선되었다.[3] 그러나 1인 정당의 한계를 느끼고는 2001년 한국신당을 해산하고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부총재가 되었다.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에 대한 대응책으로 한나라당 서청원 대표가 이회창-김종필 연대를 추진하자, 격렬하게 반발해서 무산시키기도 하였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는 일찌감치 불출마를 선언하였다.

2015년부터 병환으로 거동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박근혜 대통령 탄핵까지 지켜본 후 2017년 4월 7일 향년 8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3. 평가[편집]


별명이 꾀돌이였다. 그러나 말년(2010년대)의 김용환 본인은 이 별명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자기가 나이 80 넘어서까지 꾀돌이(또는 박근혜판 최시중[4]) 소리를 들어야겠냐면서(...)

DJP연합 초창기부터 정권 초기의 중요한 시기까지 김용환의 일처리를 지켜본 김대중은 2009년 세상을 떠나기 전 완성된 자서전에서 김용환의 인재보는 안목을 다루는데 지면을 할애하였다. 당시 경제, 복지, 산업 관련 분야를 담당할 국무위원은 자민련에서 추천한 인재들이 입각했는데, 김용환의 추천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경제위기를 헤쳐나가는데 중요한 몫을 담당했던 데서 비롯된 찬사일 것으로 추정.

반면에 금융권을 틀어쥐고 한국경제를 쥐락펴락한다는 재무부 출신 경제관료 인맥 즉 모피아(Mopia) 그룹의 시초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김용환은 1970년대 재무부 장관으로 특혜적 정책금융을 법률적으로 제도화, 정권이 금융권을 통제하고, 그 금융권을 통해서 재벌을 관리하는 관치경제 시스템을 공고히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모피아 인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5] 2000년대 들어서 언론에선 보통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를 모피아 인맥의 대부로 지칭하는데, 공직에서 물러난 후 오랜기간 변방을 떠돌던 이헌재를 김대중 정부 출범과 함께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시켜 준것도 김용환이다.


4. 여담[편집]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의원을 적극 지지하였다. 18대 대선 정국에서도 강창희와 함께 박근혜 대통령의 원로자문단 격인 "7인회" 멤버이자 새누리당 상임 고문으로 있었다.[6] 그러나 당선 직후 최태민의 그림자(= 최순실 국정 농단)에서 벗어나라 라는 발언을 했고 그 이후 박근혜의 눈 밖으로 멀어졌다고 한다. 사실 김용환 뿐만 아니라 이외에도 나라를 잘 이끌어가자는 인물의 가치있는 비판 및 발언조차 박근혜는 멀리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용환은 박근혜가 '임기를 다 마칠 수 있을 지 모르겠다.'라는 발언을 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죽기 몇개월 전, 한 측근이 병상에 누워있던 김 전 의원에게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전하자 김 전 의원은 “거 봐, 내 말 안 들어서 그렇게 됐잖아”라며 한숨을 쉬었다고 한다. #

김종필과의 관계는 김대중과 김상현의 관계와 비슷하다. 김대중의 측근이었던 김상현처럼 김종필의 측근이었으나, 둘 다 권노갑, 한화갑같은 가신관계는 아니고 약간 독자적인 정치노선을 밟으며 본인들이 모시던 정치 지도자와 결별과 재결합을 반복하다 끝내 화해하지 못한 채로 정치 활동을 마감했다. 김종필과 다르게 김영삼 후보를 대통령으로 지지하기를 거부하며 민자당을 탈당했다가 자민련 창당으로 재결합했으나, 김종필이 이후 내각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자민련을 나가 한국신당을 창당했고, 이후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JP와 김용환의 불신의 싹은 1999년의 내각제 공약 파행이 아니라, 이미 1997년 당시 JP가 DJP를 연기하며 자신을 패싱하고 안기부장 권영해를 통해 YS와 끝까지 (긴급명령을 포함한) 내각제 직거래를 하려고 했었다는 이종찬의 해석이다. 김용환의 이탈은 내각제에 대한 소신보다는, JP가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라면 내각제 역시 수단일 뿐이라는 불신이 있어서 결국 반JP의 길로 가게 되었다는 것. #

재무부 장관시절 유명한 재일 야쿠자이자 기업가였던 정건영에 대한 외환은행의 추가 대출지원을 단호하게 거절한 적이 있다. 그래서 한동안 일본에는 가지도 않았다고.[7]

보령시·서천군에서 19~21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태흠 충청남도지사가 그의 보좌관 출신이다.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대천·보령

[[신민주공화당|
파일:신민주공화당 글자.svg
]]

39,072 (57.46%)
당선 (1위)
초선[8]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44,246 (69.54%)
재선[9]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보령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36,945 (70.27%)
3선[10]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보령·서천

파일:희망의한국신당 흰색 로고타입.svg

35,125 (38.66%)
4선[11]

역대 선거 벽보

[ 펼치기 · 접기 ]

파일:김용환13대.jpg


파일:김용환14대.jpg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대천·보령)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대천·보령)

파일:김용환15대.jpg


파일:김용환16대.jpg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보령)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보령·서천)


6.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신민주공화당|
파일:신민주공화당 글자.svg
]]

1987 - 1990
정계 입문[12]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0 - 1992
합당[13]

[[무소속|
무소속
]]

1992
탈당

파일:새한국당 글자.svg

1992
입당

[[무소속|
무소속
]]

1992
통일국민당 합류를 위한 탈당

[[통일국민당|
파일:통일국민당 글자.svg
]]

1992 - 1994
입당

파일:신민당(1994년) 흰색 로고타입.svg

1994 - 1995
당명 변경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1995 - 1999
합당[14]

[[무소속|
무소속
]]

1999 - 2000
탈당

파일:희망의한국신당 흰색 로고타입.svg

2000 - 2001
창당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svg

2001 - 2012
합당[15]
정계 은퇴

[[새누리당|
파일:새누리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2 - 2017
당명 변경

[[자유한국당|
파일:자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17
당명 변경
별세



7. 둘러보기[편집]



>

{{{#!wiki style="border-top: 0px none; border-left: 10px solid #DAA520; border-right: 10px solid #DAA520; text-align: center; margin: -6px -11px; padding: 7px; min-height: 34px"
[ 펼치기 · 접기 ]

||<tablewidth=100%><tablecolor=#373a3c,#dddddd><tablebgcolor=#003764><width=30%><rowbgcolor=#575757> 직위 || 명단 ||
|| 경제기획원장관 ||<colbgcolor=#ffffff,#1f2024> 태완선남덕우신현확 ||
|| 국토통일원장관 || 김영선김용식신도성유상근이용희 ||
|| 외무부장관 || 김용식김동조박동진 ||
|| 내무부장관 || 김현옥홍성철박경원김치열구자춘 ||
|| 재무부장관 || 남덕우김용환김원기 ||
|| 법무부장관 || 신직수이봉성황산덕이선중김치열 ||
|| 국방부장관 || 유재흥서종철노재현 ||
|| 문교부장관 || 민관식유기춘황산덕박찬현 ||
|| 농수산부장관 || 김보현정소영최각규장덕진이희일 ||
|| 상공부장관 || 이낙선장예준최각규 ||
|| 건설부장관 || 장예준이낙선김재규신형식고재일 ||
|| 보건사회부장관 || 이경호고재필신현확홍성철 ||
|| 교통부장관 || 김신최경록민병권황인성 ||
|| 체신부장관 || 신상철문형태장승태박원근이재설 ||
|| 문화공보부장관 || 윤주영이원경김성진 ||
|| 총무처장관 || 서일교심흥선심의환 ||
|| 과학기술처장관 || 최형섭최종완 ||









[1]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기업과 사채권자의 모든 채권채무 관계는 72년 8월3일을 기준으로 무효화 한다. 둘째, 정부가 2000억원을 마련해 기업이 은행에서 빌린 단기고리 대출금의 일부를 연리 8% 장기저리 대출(3년간 거치据置 후 5년에 걸쳐 분할상환)로 전환하도록 지원한다. 셋째, 월 3.84%, 연 46%에 달하는 사채 이율을 월 1.35%, 연 16.2%로 낮춘다. 서울대 경제학부 이준구 교수의 평설.[2]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97> DJP연합의 대선 승리. [3] 차마 스스로를 총재라고 하기는 뭐했는지, 직함은 대표라고 칭했다. 애초에 1인 총재 정치를 배격한다는 구호를 내세웠기에, 7인 이내 위원으로 구성되는 중앙집행위원회를 두고 연장자가 의장직을 맡도록 하는 당헌, 당규를 마련했다. 하지만 중앙집행위 위원이라곤 김용환과 허화평 단 둘 뿐이었다(...) 1인 총재 정치를 배격해 1인 정당이 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2000년대에 당 최고직위에 총재라는 직함을 쓰지 않은 첫 정당으로, 열린우리당한나라당이 2004년 총재 직함을 없애면서 이런 흐름이 주류로 이어지게 되었다.[4] 초대 방통위 위원장. MB의 멘토였다. 애초에 방통위 자체가 최시중을 위하여 만들어준 부총리급 자리나 다름 없었다.[5] 위에서 언급되었던 8.3 사채 동결 조치를 통해서 당시 무리한 중화학공업화와 오일쇼크로 인해서 망해가던 대기업들이 정권의 특혜금융으로 일제히 살아나게 되었고, 이들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재벌들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재벌들은 문제가 생겨도 모두 정권이 특혜금융으로 살려준다는 인식(모럴 해저드)을 가지게 되면서, 미래 전망이나 수익성 등은 신경쓰지 않고 분야를 가리지 않고 공격적인 확장(문어발 경영, 방만 경영)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도저히 정권에서 막아줄 수 없는 규모까지 커지면서 일이 터진게 1997년 외환위기...[6] 대표 진박이었던 이한구새누리당 원내대표와는 동서 지간이다.[7] 당시 나이는 만 44세였는데, 이 때문에 정건영이 누구인지 잘 몰랐다는 후일담이 있다.[8] 1991년 3당합당[9] 1992년 탈당, 자유민주연합 합류[10] 1999년 탈당, 한국신당 창당[11] 2001년 정당 해산 및 한나라당 합류[12] #[13]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14] 자유민주연합과 신설 합당[15] 해산과 동시에 한나라당에 일괄 합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