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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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고려시대의 문신. 대다수 고려 초중기 인물처럼 생몰연도가 불확실하며 단편적인 기록만 있다. 김원충은 고려왕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고, 이천 서씨, 안산 김씨, 인천 이씨와도 매우 가까워 그야말로 혈연의 중심에 서 있었다.
현종 ~ 문종 시기의 문벌귀족이며 시호가 예종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류인저와 같다.
2. 생애[편집]
정종 2년인 1036년 진봉사(進奉使)[3] 겸 고주사(告奏使)[4] 로 황해 연안을 따라 북송에 가다가 황해도 옹진현에서 배가 파손되는 사고가 일어나는데, 김원충은 무사히 살아서 돌아온다. 정종 4년인 1038년에는 거란에 조공품을 바치고 거란 연호를 받아 돌아온다.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지내다가 정종 6년인 1040년에 딸이 정종의 왕비가 되는데, 그가 바로 용절덕비(容節德妃, ?~1102)이다. 문종 원년인 1047년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 平章事)에 임명되고, 문종 3년인 1049년에는 다른 딸이 문종과 혼인해 인목덕비(仁穆德妃, ?~1094)가 된다. 이듬해인 문종 4년년 1050년 문하시랑 평장사 판상서 형부사(門下侍郞 平章事 判尙書 刑部事)에 오른다. 수태위 문하시중(守太尉 門下侍中)에 오르고 난 후 물러난 것으로 보이며, 죽은 뒤에는 정종의 묘정에 배향된다.
3. 가족관계[편집]
김원충의 본관은 경주인데, 혈족으로 여겨지는 김지우의 묘지명에 상세한 가계가 나온다. 김지우는 신라 원성왕의 후손으로 원성왕 → 김예[5] → 김인윤[6] → 김신웅[7] → 김인위[8] → 김원황 → 김경용 → 김인규 → 김지우 순이다. 그런데 김원충은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9] 를 지냈다는 김인위의 아들이자 김원황의 형제[10] 로 추정되며, 이를 따른다면 그는 원성왕의 후손이 된다. 김인위의 아들 김원정과 김원황은 모두 원(元) 자 돌림 이름을 가졌고, 딸들이 모두 왕실이나 문벌귀족과 혼인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 문하시중(門下侍中) 김원정의 딸은 서눌의 후손과 혼인했다. 김원정의 10대손 김균(金稛)은 고려 말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개국공신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
- 김원황의 첫째 딸 낙랑군대부인(樂浪郡大夫人)은 수원 최씨 최사위의 손자와 혼인했고, 둘째 딸은 낙랑국대부인(樂浪國大夫人)은 정주 류씨 유홍과 혼인했다.
- 김원충은 여자 형제도 있었는데, 바로 원순숙비(元順淑妃)와 계림국대부인(鷄林國大夫人)이다. 원순숙비는 현종의 후궁으로 덕종의 제1비 경성왕후를 낳았다. 계림국대부인은 이자연과 혼인해 문종의 비인 인예왕후, 인절현비(仁節賢妃), 인경현비(仁敬賢妃)를 낳았다.
- 김원충의 딸은 정종의 후궁 용절덕비(容節德妃)와 문종의 후궁 인목덕비(仁穆德妃)이다.
이렇듯 김원충은 고려 최고위층 관료였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 형제가 모두 고위직을 역임했고 누나, 조카, 자식들이 모두 왕실 및 문벌귀족 가문과 연을 맺으면서 가문의 세력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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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종의 후궁[2] 문종의 후궁[3] 조공 사절[4] 고하고 아뢰는 목적의 사절[5] 대광(大匡) 품계를 가졌다고 한다.[6] 신흥사 공신당에 초상화가 올라간 삼한공신이다. 고려 개국공신에 등재되어 있다.[7] 경주 김씨 족보에는 김순웅으로 등재되어있는데, 장군공파의 파조라 한다.[8] 현종의 후비 원순숙비의 아버지이자 이자겸의 할아버지 이자연의 장인이다.[9] 고려 최고위 정부기관인 중서문하성의 차관[10] 김원충은 1036년에 이미 종3품의 상서우승 벼슬을 가지고 있었는데 비슷한 시기인 1034년에 김원정은 종6품 감찰어사(監察御史)에 임명되면서 관계(官界)에 진출했다. 따라서 김원충이 김원정의 형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김원황은 1057년에 정3품 공부상서로 임명되는데, 이보다 7년 앞선 1050년에 김원충이 정2품 문하시랑평장사로 승진하였다. 한편 김원정은 1052년에 종2품의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임명되었으므로, 형제의 서순이 김원충 - 김원정 - 김원황 순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