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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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장군을 암살했던 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김봉환 문서
1. 개요[편집]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표방했지만 북한을 왕조와 다를 바 없는 3대 세습 독재국가로 만든 장본인으로서, 생전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등을 지냈다.
해방 이전에는 항일운동을 했으며 소련군 소속 군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소련에 의해서 선택되어 한반도 삼팔선 이북을 통치하는 지도자로 옹립되었으며,[5] 북한정권 수립 직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에 올랐다. 8월 종파사건(1956년)과 박금철·리효순 사건(1967년 / 갑산파 숙청 사건) 등을 통해 정적들을 모조리 제거한 이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에 올라서 스스로 신이 되었다. 북한의 1인 독재 체제, 세습 독재 체제를 수립했으며 1994년 사망하며 그의 장남 김정일에게 권력이 승계되었다. 사후에도 영생불멸의 위대한 수령으로 숭배되고 있으며 사실상 영구적인 맹목적 숭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희생과 비극을 초래하였다. 이 때문에 남북한의 화해·재통일 및 북한의 정상국가화는 기약하기 어려워졌으며 한반도 평화통일은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한반도를 황폐화하고 많은 한국인들을 죽이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잃도록 했으며 세계적인 냉전이 공고화되는데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아울러 폭압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여 권력유지를 위해서 무자비한 학살과 인권 탄압을 자행하였다.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무시하고 폐쇄적인 국정 운영을 해서 20세기 말에 이르러러서는 북한을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최빈국 및 독재국가로 만들었다.
2. 생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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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4월 15일 평양부에서 태어났다. 당시 평양과 중국을 오가며, 어린 시절을 보내다 중국 길림 육문중학교 재학 중이던 1920년대 말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당했다. 1930년대에는 중국 공산당 밑에서 만주 지역의 여러 무장항일투쟁에 참여하였으며, 여기서 훗날 친위 부대격으로 활동하여 김일성 체제 성립과 유지에 큰 기여를 한 충성도 높은 빨치산 출신 동료들을 얻게 되었다. 일본의 탄압을 피해 1940년 소련으로 월경해 소련군에 입대했고 1945년 소련군과 함께 한반도에 돌아왔다.
광복 이후 자신들을 지지할 것으로 믿던 소련 군부에 의해 북한의 최고권력자로 등극하자 폭력적인 토지개혁으로 갈등을 조장하여 더 공고한 권력을 추구하였다. 6.25 전쟁을 일으켜 남북분단을 고착화시키고 다수의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등 전쟁범죄를 일으켰으며 이후 8월 종파사건, 갑산파 숙청 사건 등을 통해서 중국과 소련과 연계가 깊었던 반대파를 숙청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여 1972년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채택과 함께 마침내 유일집권 체제를 완성했다.
전후 한반도 북부의 공업 기반과 사회주의권의 원조를 바탕으로 중화학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통해 성공적인 전후복구를 마치고 1950 - 60년대에는 대한민국보다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애초 계획경제의 한계, 지나친 자립 노선, 과도한 국방비, 미흡한 경공업 따위의 까닭이 맞물려 차츰 남한에 비해 경제 성장이 밀리게 되었다. 소련과 중국의 대립 와중에 독자노선과 병영국가화에 몰두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다른 제2세계 국가들과 동떨어진 길로 빠져들면서 자연스레 공산주의로의 이행이란 목표도 허울 좋은 집권 명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1980년대 말 중국의 개혁개방과 동구권 국가들의 연쇄 붕괴에도 꿋꿋이 정권을 유지했으나, 차츰 정권 유지가 쉽지 않다는 현실 인식 하에 미국과 대한민국 등 국가들과 대화 통로를 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던 중 1994년 7월 8일 새벽 2시 평양 집무실에서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사망했다. 향년 82세.
"인민들에게 고깃국과 이밥을 먹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말을 50여 년간의 집권 기간 동안 입에 달고 살았지만, 그 약속이 실현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그의 사후 북한은 아예 대다수의 인민이 굶주림과 아사(餓死) 위기에 노출된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사망 직후 김씨일가 신격화 차원에서 그의 사체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 방부처리(엠버밍)한 뒤 금수산태양궁전에 박제되었고, 그의 장남 김정일은 김일성을 '영원한 주석' 등으로 떠받들며 주석직을 영구 결번 시켰다. 현재까지도 북한의 국가수반의 직책명으로 주석이 사용된 것은 김일성 이후로 단 한 명도 없다.
2.1. 사망[편집]
자세한 내용은 김일성/사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성격[편집]
3.1. 끝없는 권력욕[편집]
김일성은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고학력인 중졸[6][7] 이었다. 하지만 권력을 그 어떤 나랏일보다 중요시하는 태도와 함께, 전문적인 능력은 부족했다는 평가. 연구자들은 그가 공산주의 사상을 거의 이해하지 않았거나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고 본다. 남북통일을 위해 사회주의를 연구한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산주의자를 높게 평가해야 한다면서도 그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독재자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유고슬라비아를 이끈 초졸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 같이 학력이 낮아도 추후 사회주의로 나라를 이끌고자 하면 그럭저럭 사회주의 이념으로 나라가 굴러가나 김일성은 티토보다 학력이 높았어도 그렇지 못했다.[8] 중국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안 것을 감안하면 '학습능력' 자체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소련의 군대에서 복무했을 때도 몸은 허약하나 두뇌가 명석하다는 평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 외교적으로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완은 있었다.
하지만 진짜 권력만을 추구하는 그의 성향 때문에 군사적 수완 같은 다른 능력은 부족했다. 권력욕이 너무 강하여 성급하게 일을 벌이다가 망할 뻔한 사건이 6.25 전쟁이다. 박헌영의 부추김이 있었다고 하나 김일성은 전쟁을 통해서 통일은 못하나 국체를 보전하는 현재와 같은 상황이 되면 박헌영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울 계획도 있었고, 정전 후 실제로 이를 시행하였다. 심지어 전쟁을 처음 제안한 것은 김일성이 맞다. #
정부 수립 초기에는 농민의 지지를 얻고자 토지개혁을 통해 북한 농민들에게 땅을 주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사회주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둘러댔다. 토지의 국유화를 북한 주민이 싫어할 것을 예측하여 일단 눈속임을 한 후 실행 여건이 갖추어진 후 실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북한식 토지개혁은 땅이 포함되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반대하는 사회주의의 취지에 어긋나기도 했다. 그러면서 농민과 노동자의 증오와 피해의식을 부추겨 북한의 지주나 종교인, '반동'으로 일컬어진 학생세력 등을 숙청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 그 뒤 북한에서 권력 기반을 키우는데 집중하다가 더 많은 권력을 얻을 조건이 성숙했다고 성급하게 판단하여 6.25전쟁을 일으킨다.
김일성은 인천 상륙작전으로 군세를 잃고 평양마저 함락 당한 끝에 강계까지 도망쳤는데 만약 펑더화이와 쑹스룬 등이 이끄는 중공군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완벽하게 망할 뻔했다.[9] 사실 낙동강까지 밀어붙였던 전쟁 초반에도 소련의 지원과 전쟁을 예측하지 못하고 대비를 못한 남한의 실책이 겹친 덕에 운좋게 이겼을 뿐이다. 그것도 한국 전쟁 시기 북한편에서 뛰어난 군공을 세운 것은 그의 파벌이 아니라 김일성이 나중에 8월 종파 사건으로 숙청시킨 김무정 같은 연안파였다.
김일성은 점령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현지인의 민심을 얻는 것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개념을 무시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 인민군은 점령지에서 학살과 전쟁 범죄를 자행하고 인력과 자원을 징발하여 그나마 있던 민심마저 잃어버렸다. 이에 스탈린은 "김일성 동무는 그런 멍청한 짓을 금지시키지 않고 뭐하고 있어?"라고 화를 냈고 마오쩌둥조차 어리석다고 김일성을 비판했다.[10][11] 권력을 지켜줄 세력만 자신을 지지한다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행동을 보였는데, 머슴이나 고용농 등에게 빼앗은 땅을 넘겨주며 농민위원장 등으로 출세시키는 일을 하였다. 그런 이유로 수많은 북한인들이 김일성의 실체를 깨닫고 6.25 전쟁 당시 월남했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굳이 실제로 잘 대해주는 식으로 민심을 얻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반발하면 충성파가 이들을 잘 숙청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이론 중 독재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이념을 받아들이는 데는 아주 적극적이었다. 전후 권력 기반이 확고하지 않을 때는 레닌주의를 지지하는 태도를 취했는데,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뿐 아니라 레닌의 전위당 이론을 통해 모든 정치적 권력이 관료화된 전위당인 노동당에 집중되어 사회의 전 구조가 수직적 통제 하에 들어있어야 하며, 모든 권력이 1인과 일당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설파하였다. 전쟁이 멈추자 주었던 땅도 다 뺏고 사회주의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체제는 권력을 지켜줄 수 있는 사회주의의 일부만 빌려온 것이었다. 권력 기반을 더 갖추자 소련의 사상을 갖다 버리고 주체사상을 주장하였다. 세종대왕, 이순신 같은 민족의 영웅조차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격하되고, 일체의 개인의 권리를 추구하지 말도록 하고 자신이 만든 '근로단체' 같은 조직 이외의 동창회와 같은 모임도 금지했다.
김일성은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에 도무지 공산주의라고는 볼 수 없는 요소들을 너무나도 많이 이식하였다. 가령 초강성 민족주의[12] 와 지나친 반외세 경향을 강조한다거나[13] , 핵심계층-동요계층-적대계층이라는 신분제 사회를 만들어 놓거나[14] , 족벌 세습을 당연시한 것 등이 그것이다.
그와 그의 수하들이 주체사상이라는, 카를 마르크스나 블라디미르 레닌이 들었다가는 무덤에서 뛰쳐나올 법한 사이비 공산주의, 사적 소유가 철폐되고 경제가 국유화된 '노동자 국가'라는 이념에 전혀 어울리지 않고, 오히려 생산력의 부족과 풀뿌리 민주주의의 부재로 인한 '기형적 노동자 국가'에 어울릴 법한 사상을 만든 것도 그가 공산주의에 무관심했기에 때문으로 볼 수 있다.[15] 과거 1990년대 주사파들이 불법 월북을 통해 김일성을 만나 주체사상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했지만, 김일성 본인은 주체사상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이 없었으며, 오히려 남한의 추종자들이 설파하는 주체사상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는 주체사상 자체가 (여느 설정놀음이 그렇듯이) 그때그때 필요한 대로 끌어다 붙여서 만든 결과 모순과 왜곡으로 가득찬 설정인 데다, 애당초 김일성 본인이 사상 자체에 별 관심을 갖고 있지 못했던 이유가 크다.[16]
다만, 6.25 전쟁이 끝난 뒤 박헌영, 김무정, 최창익 등 수많은 경쟁자들을 숙청하고 최용건을 바지사장으로 만들어 온갖 권력을 휘둘러댄 것으로 볼 때, 권모술수 하나만은 천재적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군인으로서는 무능한 정치군인에 불과했어도 정치적으로는 쓸데없는 쪽으로 꽤 수완이 있었던 셈이다. 비록 많은 사람의 민심을 얻는 사람이 훌륭한 지도자라는 도덕과 상식에는 어긋났지만, 사회적으로 멸시받던 머슴이나 돈이 없는 사람, 교육을 못 받은 사람 등의 서러움과 권력과 인정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여 적어도 자신에게 힘을 합쳐 대드는 것은 어렵게 할 수 있었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지지해 줄 세력을 찾는 능력도 뛰어났다. 6.25전쟁 당시에도 남한에서도 인민군이 점령하던 자리에는 머슴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 남이 가진 땅은 내 땅이 된다며 좋아했고, 남에게 상전 노릇을 하려고 했다고 하는 경험담이 곳곳에 있다.
이들이 새로운 '엘리트'가 되어 김일성 가문의 권력을 유지시킨다는 종국적 목표는 유지할 수 있었고, 한국 전쟁 이후의 고난, 동유럽 혁명, 탈냉전 같은 체제 위기에도 이들은 배신하지 않았다. 자기보다 국력이 강한 중국과 소련의 간섭을 남들은 관찰하지 못하는 빈틈을 보아 물리치다 못해 조종을 하였으며,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세습을 한다는 사회주의자라면 누구도 해낼 수 없을 것이라던 일을 해내고, 방호산 같은 인물이 여러 명 나왔다면 진짜 적화통일이 가능했을지도 모르며, 한국 정치에까지 북한의 힘을 빌어서라도 상대를 이기고 싶다는 권력욕을 자극하여 내분을 일으킨 '지능'은 어떻게보면 높다고 할 수 있었지만, 하필 그 지능이란 것이 얼마나 상대를 자신의 욕구에 맞게 잘 조종하고, 언제 상대를 공격하며, 거짓말을 가장 그럴 듯하게 할 것이냐에 관련된 것이었기에 역사적인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인물이 한반도가 아니라 국력이 더 강한 곳에서 태어났다면 세계는 지금보다 훨씬 어두운 모습이었을 것이다.[17]
굉장히 머리가 좋았던 예시로, 1940~1945년 88여단에 김일성이 복무하였을 때, 김일성 대대장의 연락군관이 부대의 규율을 어기고 후임격인 유성철을 깨워 깨워 급식부로 가서 김일성이 먹을 연어를 타오라고 한 심부름을 거부한 적 있었다. 여기에 군대 회의장소가 변경되었는데, 그 장소를 물어도 가르쳐주지 않아서 김일성에게 이실직고하니 김일성이 '무슨 심부름을 그따위로 하느냐'며 화를 내고, 유성철 역시 기분이 나빠 '중대장이 안가르쳐 주는 것을 어떻게 하겠소. 내가 뭘 잘못했소?'라고 반박하며 밖으로 나와 버린 일이 있었다. 유성철은 훗날 북한군 작전국장으로 복무하기는 했으나 이윽고 숙청을 피하여 목숨을 연명해야 했다. 북한 정권이 세워지고 나서 문일이라는 동료에게 김일성이 이 두 가지 일로 악감정을 품고 있다고 전했고, 그는 숙청을 피해 1959년에 소련의 타슈켄트로 탈북을 하게 된 것이다. # 김일성은 자신이 시킨 심부름을 거부한 일을 그 일로부터 최소 14년 뒤인 1959년까지 기억하여 '갑질을 못한 원한'을 갚았다는 뜻이다. # 스탈린도 이렇게 기억력이 좋았다고 하지만, 스탈린은 시베리아에서 탈출할 때 잠깐 태워준 마부도 기억해뒀다 보답한 일도 있었다고 하나, 김일성은 자기 위의 여단장인 저우바오중이나 소련인 장교들에게는 순종적이고 다정다감했었지만 부하들에게는 엄격하고 차가웠다.
사실 민족주의자이기는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반미, 반일이라는 일관된 개념은 있었고 우방이라 할 수 있는 소련, 중국에 대해서도 어느 한쪽에 끌려다니지 않는 등거리 외교를 펼치며 나름 독자성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민족주의는 일제에 대한 해방을 원했던 북한 주민의 소망을 악용하고, 권력 유지에 방해가 되는 외부의 간섭[18] 을 피하는 용도에 국한된 것이었다.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되기 전에는 독립운동으로 중국 공산당의 눈에 들어 중국의 안도현장이 되기를 꿈꾸던 인물이었으며, 스스로 '안도 사람'[19] 이라고 하였다. 건국 초창기에는 조만식 같은 민족주의자를 탄압하며 소련에 아부했고, 민족 문화를 '봉건주의'로 탄압하기도 했다. 당시 북한에는 스탈린 초상화를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소련군에 있어 박헌영보다 믿음직스럽기에 최고지도자가 된 것이다. 한복을 입는 모습이 제대로 포착되지 않는 것이 김구를 싫어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특히 해방 직후에는 오기섭 같은 좌익 독립운동가 출신과도 싸우고는 했는데, 소련의 제도를 본받고 노동자의 역량을 키워야 하고 민족 반역자를 최대한 배격하여야 한다는 다른 공산주의자와 달리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라면 친일파, 지주라도 '교양하고 개조'하면 된다고 주장하며 세력을 불렸다. # 이는 '통일전선론'이라고 하여 지금도 어느 정도 유효한 내용이다.
음력설은 한국 전쟁의 정전 이후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는 아예 명절이 아니었고, 추석은 1972년부터 '민족 최대 명절' 김일성 생일보다 격이 낮은 명절이 되었다. # 판소리, 전통 음식, 사투리 같은 민족 유산도 훼손되거나 사라졌다. 친일파라도 자신에게 아부하면 '탄백작업'에서 보듯 혜택을 주고, 김원봉 같은 좌익 독립운동가도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되면 숙청시켰다. 특히 일본 제국이 미국과 대응한다며 '귀축영미' 구호를 내세우며 조선인을 착취한 것은 절대로 주민에게 알리지 않는다.
심지어 그 아들 김정일은 일본 군가인 라바울 속요를 즐겨불렀다고 한다. 70년대부터 초상화 검열 정책이 도입되더니 80년대에는 아예 일본 천황 마냥 초상화가 불에 타면 목숨을 버리고 초상화를 구하라는 지시가 내려온다. # 순수한 민족주의라기보다는 더 많은 권력을 위해 민족주의를 방패막이로 삼은 것에 가깝다.
이보다 더한 좌파 계열의 전체주의 독재권력자는 아예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경제성장 자체를 부정했던[20] 폴 포트와 선군정치라는 해괴한 개념을 만들어낸 김일성 본인의 아들 김정일 정도 밖에 없다. 다만 폴 포트처럼 정치의 진면목을 밝힌 것과 다르게 김일성은 이밥에 고기국 기와집에서 비단옷 같은 기만으로 통치를 해왔다는 면에서는 더 간사한 면도 있다. 결국 그의 주체사상은 지적으로 조악한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전체주의 + 군국주의 + 파시즘 등등 인류 역사에서 등장한 모든 사상들 가운데 자기네들 독재권력 유지에 유리한 것들만 다 뽑아내 섞어놓아 그 자신과 후손들을 신으로 숭배하는 극악무도한 사이비 종교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3.2. 무능한 전쟁광[편집]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 '인류 역사에 일찌기 없던 특출한 군사사상과 전략전술, 영군술로 무패백승을 펼치며 한 세대에 두 제국주의를 이긴 명장'[21] 이라고 허위 날조하고 있으나, 실제 김일성의 군사적 능력은 매우 형편없었다. 실제로도 김일성이 직접 지휘해서 승리한 전투는 도저히 질 수 없는, 옆집 할머니, 아니 지나가던 어린애가 지휘해도 이길수 있었을 압도적인 물량 차가 났던 전투인 보천보 전투나[22] 6.25 전쟁 중의 오산 전투 정도였다.
6.25 전쟁을 일으켰을 때에도 탱크를 보병과 똑같이 운영하여 탱크들이 보병의 이동속도에 발을 맞추어 천천히 진격해야 했고, 당연히 국군과 UN군에게 밀려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해야 했다. 빨치산 경험만 있었지 기갑부대 운영 경험이 전혀 없었기에 이런 멍청한 전략을 짰던 것이다. #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으로 UN군이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자 북한군에게 총 후퇴 명령을 하달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평양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자" 고 라디오 방송을 내보낸 뒤 평양시를 떠나 덕천시로 도주했고 한국군과 UN군이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하자, 피신 장소였던 덕천시를 떠나 강계시를 임시수도로 정하고 그곳의 지하 동굴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남조선 해방을 호언장담했던 그는 스탈린으로부터 책임추궁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림은이 당시 김일성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얘기를 전하는 바에 따르면, 김일성은 완전히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으며 시베리아 유배형을 면치 못하리라고 자포자기하고 있었다고 한다.[23]
이 때문에 6.25 전쟁 중 자꾸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는 김일성에게 펑더화이는 "당신은 요행만 믿고 전쟁을 일으켰나!"라고 맹비난하였고 그래도 정신 못 차린 김일성은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의 반격으로 북한군과 중국 인민지원군이 주도하던 전세가 다시 밀리게 되자 북한군의 손실을 최소화하려고 중공군과 상의도 없이 멋대로 북한군 병력을 후퇴시켰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유엔군이 중공군을 기습하여 중공군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고, 이 때문에 펑더화이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홍콩 유력지 "명보"에 따르면 분노한 펑더화이가 김일성의 뺨을 쳤고 그 탓에 김일성이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했다고 한다.[24] 실제로도 펑더화이는 북한군이 벌이는 대대적인 양민학살과 조직적인 약탈, 그리고 그로 인한 한국인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김일성을 불신하였다고 한다. 비록 삼대기율 팔항주의는 일부 과장되었다는 평가가 있고 중공군도 잔혹하기는 매한가지였다지만, 적어도 그런 '삼대기율 팔항주의'라는 허물이라도 있던 중공군은 북한군만큼 막나가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6.25 전쟁에서 김일성은 시비만 걸어놓고 정작 진짜 싸움은 펑더화이와 쑹스룬에게 죄다 떠넘겼다. 즉, 6.25 전쟁에서 김일성은 전세에 기여한 것이 거의 없다. 전쟁 초반의 선전은 6사단장 방호산 등의 활약과 전쟁 경험이 많았던 조선족 부대인 조선의용군의 도움으로 달성한 것이고, 후반의 반격은 펑더화이와 쑹스룬이 지휘한 중국 인민지원군이 주도한 것이다.
게다가 1960년대 이후, 한국과의 군비경쟁에서 우위를 가지기 위해 국가 예산의 30%를 군비에 지출시키고 100만이 넘는 젊은 인력들을 군대에 10년 이상 징집시키면서 북한 경제에 큰 주름을 가져다 주었다. 국부의 상당수가 지출 대비 경제적 효과 창출 효과가 매우 제한적인 군대에 투자된 것은 물론이고 젊은 노동 인구들이 10년 이상 군대에 강제로 복무하게 되면서 북한 경제의 생산성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 외에 그의 군사적 실책에 대해서는 4대 군사노선 참고.
그리고 6.25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허락받으러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갔는데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하여 반대했지만, 김일성은 끈질기게 스탈린을 설득하며 전쟁을 부추겼고, 결국 스탈린은 무려 48번씩이나 거절한 끝에 6.25 전쟁을 허락하고 말았다. 북한이 이 전대미문의 동족상잔의 비극을 미국과 이승만 정권이 북한을 침략해 일어난 '민족해방전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소리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셈.
이렇게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은 북한 경제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쳤다. 전쟁 이전의 북한은 원산이나 청진 등에 공업단지가 꽤 많이 조성되어 있어서, 이것만 열심히 굴렸어도 북한은 동독같이 공산주의 국가 치고는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가 될 수 있었겠지만, 김일성이 무리한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한국을 구하려는 일념에 참전한 미군이 원산 등의 지역에 대규모 함포사격과 무차별 폭격을 가하는 바람에 그 많던 공업단지를 깡그리 잃었으며, 북한에게도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나마 소련과 동구권의 지원을 받아 70년대 초중반까지는 국부에 한정해서는 남한보다 더 잘사는 나라로 남아 있었지만, 70년대 이전에도 전쟁으로 이한 후유증이나 그 후유증을 극복한 뒤의 배급제로 특권층을 제외하고는 삶의 질이 남한보다 뒤쳐지는 경우도 많았으며, 남한의 기적적인 경제성장과 북한의 온갖 경제 실책들로 이제는 북한이 극빈국인데 한국이 선진국인 정반대 포지션이 되었다.
3.3. 무자비한 숙청[편집]
종파분자와 계급의 원수는 그가 누구이건 3대에 걸쳐서 씨를 없애야 한다.
김일성의 반대파 숙청은 6.25 전쟁이 한창이었을 때도 어김이 없었다. 전쟁 초기 김일성은 잦은 전술적 실패와 자신의 오류를 부하에게 전가하면서 처형을 명령하거나 강등시키는 등 반대파를 숙청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자신의 잘못을 상대에게 뒤집어 씌웠다. 1950년 6월 28일 인민군 제 3, 4사단은 남진하여 서울을 점령했는데 제1사단장 최광의 진군이 문제가 됐다. 전쟁이 시작되자 제1사단은 고랑포를 거쳐 임진강에 도착했으나 한국군 제1사단의 조직적인 거센 저항에 직면하여 진군이 타 사단에 비해 지연됐다. 당시 고랑포 → 임진강 → 문산 → 서울로 진군 경로를 하달한 이는 전쟁 계획을 세우고 지침을 내렸던 최고 사령관 김일성이었다. 임진강에 도달한 제1사단장 최광은 예하 연대를 장악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전투를 지속하고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을 보고받은 김일성은 전선사령관 김책에게 최광을 체포하여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김일성은 제1사단의 부진한 진격에 대단히 신경질적이었으며 자신의 계획이 잘못된 점에 대해서는 일절 반성이 없었다. 김일성의 작전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던 사례는 북한군 제2군단의 수원 점령 실패에서도 나타났다. 북한군의 제1차 작전에서 6월 28일까지 서울을 점령한다는 작전 임무는 제1군단에 의해 성공적으로 달성됐으나 제2군단이 같은 날까지 수원을 점령한다는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써 6월 28일까지 한국군의 주력을 수원에서 포위하여 섬멸한다는 김일성의 작전 목표는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됐다. 김일성은 수원 점령에 실패한 인민군 제2군단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문책의 칼날을 들이댔다. 제2군단장이던 소장 김광협을 제2군단 참모장으로 좌천시켰고 참모장이던 최인은 보직 해임시켰으며 예하의 제2사단장과 제12사단장도 보직 해임과 동시에 대좌로 강등시키는 치욕적인 문책 인사를 단행했다. 이때 소장이던 최현은 제2사단장으로 임명됐다.
김일성의 책임전가성 문책은 전쟁 후에 더욱 잔인하게 나타났다. 전 주소 북한대사 리상조와 소련 유학생 허웅배(1928~1997)[26] 의 김일성 정전[27] 에 따르면 6.25 전쟁에서의 무참한 패배는 김일성으로 하여금 '피의 숙청'을 단행케 한 계기가 됐다. 자신의 전략이 없음으로 인해 패배한 전쟁의 책임을 군사령관에게 전가하고 개인 독재의 길을 여는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 김일성의 숙청은 그 잔인함에 있어 이오시프 스탈린을 능가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림은 자신이 희생의 직전까지 갔는데 그에 따르면 6.25 전쟁 당시 장군 중 95%에 해당하는 70여 명이 학살 내지 처형되고 당·정·군의 간부급 20만 명이 숙청됐다.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된 사람들을 합하면 희생자 수는 무려 수백만 명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출처]
김일성은 항상 눈엣가시로 생각하던 연안파의 거두 김무정을 낙동강 전선에서의 패배와 평양 방어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씌워서 중공군이 참전하기 직전에 숙청해버렸다. 김일성이 김무정을 밀어내는 과정은 하나의 블랙 코미디였는데 김무정이 평양 방어는 무리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억지로 평양 방어를 떠맡겼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평양이 함락당하자 방어사령관이 책임져야 한다고 하면서 김무정을 실각시켰다.
6.25 전쟁에 대한 피해와 책임을 자신이 지게 될까 두려웠던 김일성은 자신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기 위한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다. 여기에 대상으로 떠오른게 박헌영과 남로당파였다. 김일성 정권은 한참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1년 이미 박헌영을 체포하고 권력의 핵심부에서 남로당파 간부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결국 박헌영은 6.25 전쟁 책임론에 휩싸여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53년 3월에 체포당하는데 당시 체포당한 이유는 '리승엽이 미군과 비밀리에 내통한 간첩 의혹'에 연루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리승엽은 6.25 전쟁 때 인민군 서울 점령 치하 때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을 상대로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인물이었는데 휴전 직후 미국 스파이, 반당종파분자 등의 죄목을 뒤집어쓰고 당에서 제명당하고 직위에서 해임당했다. 1955년 12월 15일 박헌영은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고 결국 사형 판결을 받았으며 재판 직후 증인으로 나와있던 리강국 등 주요 남로당계 간부들은 즉결 처형당했다.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내다 김일성으로부터 신변 위협을 느껴 소련으로 망명한 박길룡에 따르면 박헌영은 7월 19일에 처형당했다고 한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세운 꼭두각시답게 김일성 역시 스탈린식 개인 숭배를 자신에게도 적용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후원자였던 스탈린이 죽고 흐루쇼프에 의해 스탈린의 신격화가 중지되었다. 한편 김일성이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 신나게 써먹었다가 갖다버린 연안계와 소련계 정치인들은 자신의 자리를 갑산파, 심지어 혁명을 한 적도 없는 김영주같은 낙하산들이 채우고 완장질을 하는 현실에 기가 막혀서 김일성에게 이를 시정해줄 것을 수차례 강력히 요구하였다. 후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김일성은 자신의 인사정책에 대한 항의가 들어오자 이들을 조금 승진시켜줌으로 달래려 했다.
하지만 그간 김일성의 토사구팽과 무도한 정치에 질려있던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서휘, 리필규 등은 조선로동당 8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을 정면으로 비판하여 그의 정치를 시정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그와 맞서게 된다. 그러나 알려진 것과 달리 소련은 헝가리와 폴란드와 소동 때문에 북한의 지도부 교체가 가져올 혼란을 두려워해 이를 지지하지 않았고, 중국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파악도 못했으며 이들 8월 그룹조차도 김일성은 젊고 능력 있는 지도자이기 때문에 맑시즘을 잘 배운 자기들이 옆에서 지도하면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헛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렇지만 산전수전 다 겪어본 김일성은 잔혹하게 이들의 항명을 진압한다. 서휘, 윤공흠, 리필규는 출당 조치되고 최창익과 박창옥의 당직과 당적은 모두 박탈되었으며 동시에 최창익과 박창옥은 내각 부수상직 등의 정부 직위도 박탈되었다. 반대파의 완전한 제거를 위하여 '반종파투쟁'을 강도 높게 추진하였고 1957년 여름까지 200여 명의 반대파 인사들이 '종파주의자'라는 명목으로 체포했다. 이것이 1956년 8월 종파 사건으로 이 사건으로 연안파와 소련파가 숙청되었다. 이후 1958~1959년까지 1957년 8월 선출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중 무려 1/4가 숙청되었다고 한다.[28]
북한의 악명 높은 정치범수용소도 8월 종파 사건 이후 처음으로 등장하였다고 하는데 8월 종파 사건으로 인해 발생한 막대한 수의 반대파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정치범수용소가 만들어졌고 지속적으로 그 규모가 확대된 것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후 1958년 1차 당대표자회를 열어 반대파들에게 동정적이었던 김두봉, 박의완, 오기섭 등도 모조리 숙청하는 등 북한에서 김일성 친위세력을 제외한 세력은 거의 씨가 마르고 만다.
최후의 분파였던 갑산파는 1967년 경제건설 노선에서 김일성과 이견을 보이다가 결국 숙청되고 만다. 대표적인 예가 김일성의 심복이었던 김광협으로 이러한 숙청은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김원봉 등 월북한 인물들도 숙청했다.
3.4. 인간관계[편집]
자세한 내용은 김일성/인간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평가[편집]
4.1. 독립운동가로서의 평가[편집]
보천보 전투는 본인의 이름을 날린 시초였다. 비록 날렸다는 것이 그의 본모습 이상으로 나이가 지긋한 을지문덕 같은 노련한 장군이 거사를 벌인다고 과대포장되어 김일성에게는 운이 좋은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좌파 독립운동가는 김원봉, 이관술 같은 사람이나 온건한 좌파는 여운형이나 조봉암이 일반적으로 높게 평가받는다. 해방정국에서는 앞서 언급한 오기섭처럼 그보다 좌파 사상이나 민족주의에 완고한 독립운동가도 많았으나, 그는 친일파라도 교양을 하면 된다면서 자신에게 아부하는 경우에는 권력 강화를 위해 친일 행적을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아예 정준택 같이 친일 부르주아라며 추방당한 사람을 김일성이 직접 복권시키기도 할 정도였다.
예를 들면 남한으로 피난을 온 사람이나 인민군의 점령을 받은 사람도 기억하는, 북한에서는 국가 정도로 중요한 '김일성장군의 노래'의 작사가(리찬/이찬)의 이름도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와 있다. 더 와닿는 예시로는 드라마 야인시대로 유명해진 북한 공훈배우 심영이 있는데, 아예 대놓고 일제강점기에 《망루의 결사대》라고 하여 비적과 일본군이 싸우는 활극을 찍은 바가 있다. 김일성이나 그의 동료가 될 수 있던 만주 항일 빨치산을 비하하는 표현 중 하나가 마적, 비적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알 수 있다. 그의 일제강점기의 행적은 북한 측은 공적을 부풀려 통치의 정당성을 얻는 메커니즘의 가장 핵심이기에 과장이 심하고, 남한에도 김일성 가짜설처럼 아예 그의 독립운동을 했다는 게 가짜라며 김일성의 독립운동을 완전히 부정하고 깎아내리는 시각도 많아 정확히 평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물론 김일성 가짜설은 현재 거짓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평가에 전혀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 애초에 고국의 독립을 전적으로 주도한 진짜 독립영웅이었던 아메드 세쿠 투레와 로버트 무가베,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도 고국의 지도자가 되고는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나라를 파탄내며 이전의 명성을 다 말아먹은 마당에[29] 이들과 비교하지 않아도 고국의 독립에 기여한 게 전혀 없던 김일성이 독립운동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의 악행들에 면죄부를 줄 리는 전혀 없다. 애초에 독립영웅이 권력을 잡은 후 잔혹한 독재자로 전락하는 것은 아프리카, 동남아 지역에서 매우 흔해빠진 일이다.
4.2. 지도자로서의 평가[편집]
지도자로써의 나라를 올바르게 이끌 능력은 매우 부족하고 권력만을 탐한 잘못된 지도자이자 겉으로는 인민공화국을 표방하지만, 북한을 왕조와 다를 바 없는 3대 세습 독재국가로 만든 장본인이다. 불행히도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능력만 세계의 독재자 중에서도 특히 뛰어났다.[30] 김일성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등의 직책을 지냈는데, 당 총비서 직책이 곧 최고지도자임을 의미하므로 사실상 압도적 전제권력을 지닌 독재자라고 할 수 있다.[31]
집권 초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을 지냈으며, 8월 종파사건(1956년)과 갑산파 숙청 사건 (1967년)[32] 등을 통해 정적들을 모조리 숙청한 이후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에 올라서 스스로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 북한의 1인 세습독재 체제를 수립해서 1970년대부터 김정일에게 권력을 서서히 이양해나갔으며, 1994년 사망하며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하였다. 사후에도 평양정권 주도 하에 '영생불멸의 위대한 수령'으로 숭배되고 있으며 다른 공산주의·사회주의 국가 지도자들과는 달리 영구적인 맹목적 숭배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분단을 경험했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전쟁을 일으켜 최소 360만 명의 사람들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6.25 전쟁은 김일성이라는 일개인이 결심만 안 했다면 충분히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김일성의 북한은 평화적인 통일 노력을 모두 거절하고 전쟁준비만 했다. 베트남도 전쟁으로 적화통일을 이루긴 했지만 일단 공격을 북베트남이 했음을 숨긴 것도 아니고, 실제 자신의 공적이 있는 호찌민의 지지가 남북베트남 모두 압도적이어서 남베트남 정부의 주민 지지가 낮아 평화적으로 통일을 추진해도 적화가 될 공산이 있었다. 물론 호찌민도 전쟁으로 통일을 한 것에 대해서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33]
존 에버라드 전 평양주재 영국대사의 의견에 따르면 한반도의 통일 여건은 똑같이 분단되었지만 좌우의 합의로 통일을 이룬 오스트리아보다 유리했다고 주장한다. 미소의 대립이 유럽에서 더 치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일성은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지원을 적화통일을 위한 것으로 이용했고, 이들을 끈질기게 설득시켜 남침에 대한 '승인'을 받아낸다.[34] # 마오쩌둥조차 처음엔 전쟁을 거절했다가 스탈린의 승낙을 보고 자신도 동의하고, 국제연합군에게 밀리자 중국인민지원군을 파병하였다. # 이로써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의 중화민국을 공격할 기회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심지어 1965년과 1975년에 김일성은 다시 남침을 시도하려고 했으나 불행 중 다행히도 두 차례 모두 중화인민공화국 지도부의 만류로 실현되지 못했다. ##
6.25 전쟁 과정에서 남한도 보도연맹 학살 사건 등 엄청난 규모의 학살을 저지르고[35][36] 미군의 폭격 역시 만만치 않은 인명, 재산적 피해를 야기했다는 것만큼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긴 하지만, 애초에 김일성이 6.25 전쟁을 추진하지만 않았어도 동족이 서로를 의심하게 하면서 수백만 명이 전쟁의 포화 속에 목숨을 잃는 모든 일은 없었을 것이며,[37][38] 후술하듯 전쟁과는 완전히 무관한 내치에서의 행적만 따져도 김일성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꼽히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원래 김일성 계파는 소수에 불과한 세력이었다. 평안도는 조만식을 위시한 온건한 우익이 득세하고, 함경도는 좌익이 우세하였으나 오기섭 같은 공산주의자의 역할이 컸고 소련에 아부하는 척하던 김일성의 태도와 다르게 민족주의적으로 외세에 겉으로도 아부하려고 들지 않아[39] 함흥에서는 시위하다 총맞고 숨진 학생들도 있었다. # 소련군이 북한에 들어서며 해방 직후 정치 활동을 하던 공산당 입맛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밀어내고, 거기에 김일성의 계파가 섞여 있던 것이다. 해방 직후까지 북한에 거주하던 한국 민주화 운동가 함석헌은 광복이 된 직후에는 '무식 유식 잘살고 못 살고 없이 나라 위해서라면 눈알이라도 빼서 바칠 심정이었습니다.'라고 하였다. # 오죽하면 소작인들이 지주와 친해서 소련군도 일부 공산주의자조차 '지주를 모욕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평가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사이가 좋은 사람들을 인민의 적으로 선전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도 하였다. #
그러나 큰 형님인 소련에 대한 아부하는 식의 쇼와, 인간이라면 예상 못할 뻔뻔한 사기행각과 질투심을 위주로 한[40] 탐욕을 부추기는 방식을 위주로 하는 악랄한 세력확장을 통해 자신이 절대권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도덕적으로 못할 행동을 한다고 하여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도 종종 있었지만, 이미 뒤에서 그런 행동을 하도록 뒤에서 권력을 갖추어놓은 뒤였다. 김일성이 없었어도 북한이 이렇게 됐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처음에 북한의 정치권에 뛰어든 사람들은 비록 오랜 식민통치로 협의의 기술이 부족하거나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와 비슷하게 독재자 기질이 있는 사람들은 있을 망정 거짓말과 탐욕으로 일관하여 정치를 하려던 것이 아니라, 그나마 매력적인 정치이론을 들고 나오려고 하거나 잘못된 신념이든 그렇지 않든 어떤 신념은 있는 사람들이었다.
김일성은 해방전을 자신이 주도했다는 역사 왜곡[41] 과 허황된 날조들에 기반한 개인숭배 등 숱한 거짓말, 자신의 반대파에게 가혹한 행위를 일삼는 사람에게 출세를 시켜주기 등의 수단과 함께 사회주의를 구실로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장악하여 주민들을 충성도에 따른 배급에 길들여서 절대 권력을 얻었는데,[42] 이는 배급이 예고없이 끊겨 일어난 비극인 90년대의 대기근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외부에서는 마치 사이비 종교 같은 우상화와 요람에서 무덤까지 지속되는 가스라이팅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으나, 사실은 김일성 일가에 반대하는 사람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헐뜯기만 해도 출세할 수 있는 금전적 보상이 따르는 권력의 단맛에 길들여 일반 주민을 노골적으로 탄압할 수 있는 친위대를 구성한 것이 더 무서운 것이다.[43] 그의 주체사상은 조악하고 모순이 심한 내용이었기에[44] 마오주의는커녕 호자주의 수준의 파급력도 국제적으로 미치지 못하였고, 일찍이 소련 등지에서 비웃음거리가 되어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의 증언처럼 소련 국민들이 북한의 선전매체들을 개그 잡지라며 일부러 구독해 읽었을 정도였다. #
대신에 구미가 당기는 사상을 내세우기 보다는 권력의 속성을 이용하여 도덕성이나 협동심을 무력화시키는 일을 잘하던 인물이었다. 가장 권력에 갈증을 느끼기 쉬운 머슴 같은 '노동계급'이라고 이름 붙인 하류층을 포섭하여 농민위원장 같은 높은 자리나 경찰에 해당하는 보안원 같은 자리로 출세시키는 등 이쪽으로 매우 지능적이고 교활한 행보를 보였다. 오늘날로 따지면 젠더 갈등, 노사 갈등 같은 것[45] 을 만들면서[46] 거짓 정보와 상황을 흐리게 보이게 하는 수단으로 상대를 악마화시켜 죄책감을 없애고, 특정 계층에게 높은 자리를 안겨주고 재산도 두둑하게 챙겨주면서[47] 이 상황이 아니면 남들 위에서 군림할 수 없다는 쾌락과, 이 상황이 아니면 권력과 재산을 잃을 것이라는 공포심[48] 을 통해 증오를 부추기는 무서운 전략인 것이다. 황순원과 같은 남한으로 피난을 온 고향이 북한 땅인 소설가는 카인의 후예 같은 작품에서 이런 상황을 묘사하며 사랑이 필요하다며 이런 상황을 끔찍하게 여기기도 했다.
해방되자마자 소련 몰래 지방의 당조직 착수·노동계급속에서의 새로운 인재발굴(지지세력 확보), 기술자·전문가 발굴 및 추천(무력 확보) 같은 적극적인 세력 확장을 하는 등 처음부터 권력을 추구하는 능력은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인물이었다. # 6.25 전쟁 때도 인민군 점령지에서 이것 때문에 신분이 아예 거꾸로 되고 벼락출세하게 된 사람들은 기세등등하게 그 앞잡이를 한 경우가 많았다. 김일성과 정실 관계가 있던 강량욱 목사 같은 경우 북조선임시인민위 서기장[49] 같은 권력의 유혹에 빠져 신앙을 저버리고 북한에서 개신교인을 탄압하는데 앞장서기도 할 정도였다. # 그가 자신의 수족이 될 인물을 찾고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과정은 정말로 일반인은 생각할 수 없는 노련함과 수치를 모르는 대담성[50] 과 잔학성을 띤 것이었다.
심지어 김일성에게 이를 가는 사람들조차 그가 '사회주의자', '친 소련파'라고 믿어 김일성에게 속아넘어가는 바람에 진짜 사회주의자가 김일성의 정체를 모르고 그에게 협조를 한다든가, 남한에서는 소련이 속고 있음을 주장하여 북한을 견제한다는 카드가 잘 나오지 못할 지경이었다.
소련군을 따라 1945년 9월21일 원산에 상륙, 한달 후인 10월14일 평양 시민환영대회에서 명실상부한 집권자로 부상할 때까지 김일성은 주로 소련 점령군 고위층과 긴밀히 협력, 때로는 향연을 베풀면서[51]
정치상황에 복잡한 논리로 대응하는 남로당 박헌영 연안파 김두봉 또는 소련파 허가이에 비해 군대전우의 단순 충성논리로 소련 점령군에 협조했다.따라서 보다 통제하기 쉬운[52]
김일성을 소련 점령군 사령부는 대권주자로 점찍어 스탈린의 오른팔인 즈다노브 정치국원에게 직접 연결시켜 어렵지 않게 북한지도자로 옹립한 것이다.만주 항일빨치산과 하바로프스크 88여단에서 같이 근무한 25명 정도의 김일성 직계 빨치산은 김일성이 소련군 비호속에 정권을 장악할 수 있게한 전위 세력이었다. 이들은 안길 서철 임춘추 이동화를 제외하고는 거의 무학,국민학교 중퇴 정도로 김일성과는 이념적 갈등이 있을 수 없고 도전세력이 될 수 없으며 흩어지면 생존 불가능한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김일성의 수족처럼 움직이는 행동집단이 됐다. 그들은 정권장악 후에도 당,안전기관,군대에서 반대파를 암살하는 폭력집단으로 행세했다. 결국 김일성 정권은 소련군의 지원과 그의 소수 빨치산 부하의 테러와 감시, 그리고 적시에 반대파를 제거하는 기민한 술책발휘로 이루어진 원천적 군사정부 성격이었다.
김일성은 소련군의 방조속에 이들 빨치산 요원을 동원, 전쟁 전에는 조만식[53]
, 전쟁 중에는 박헌영, 전쟁 후 50년대 중반기에는 연안파, 60년대 초에는 소련파[54] 를 상호이간, 개인별로는 파격적 승진과 보직으로 환심을 사고 방심하는 순간 전격적으로 숙청, 제거하는 기민한 정치술수를 과시했다.
북한 당국의 경제 정책이 이상하다는 건 많은 사람들이 느끼며 아예 어떻게든 이를 어기며 사는 사람들이 과반 이상이다. 다만 북한을 빠져나와야 알 수 있는 군사력 강화로 미국은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통일도 이루어낼 수 있어 부강해진다는 식의 주장은 깬 사람 정도나 믿지 않는다. 그렇지만 후자의 경우에도 무기를 아무리 만들어도 나라 경제가 나아지지 않으니 믿지 않는 사람들이 느는 추세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주민들이 우상화 선전은 안 믿어도 북한 당국의 행태에 따르는 사람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서 기인한다. 남한에서도 약간의 거짓말과 푼돈에 북한에 기밀을 빼돌리는 장교도 있으나, 훗날 김일성의 통치술을 전수받은 김정일의 요리사가 된 후지모토 겐지 같은 선진국 일본 출신조차 '자신이 일본에서 평생을 초밥 요리사로 일했다고 벤츠를 몰아볼 수 있었겠는가'라며 북한에 충성하게 될 정도였다.
천리마 운동 같이 북한이 김일성의 리더십으로 60년대 즈음에 잘 살았다더라라는 주장도 많이 퍼져 있으나, 그건 국부를 김일성의 무리들이 다 가져가고 일반 주민들에게는 겨우 연명할 정도의 물질적인 보상만을 제공하여, 한민족 중 가장 키가 컸던 함경도 출신이 많은 탈북자들의 키를 재보아도 남성은 해방 이후 출생자부터 평균 키가 남한 주민보다도 작았다는 것이라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여성도 늦어도 60년대부터 밀린다. # 정신력이 부족하다며 일반 주민들을 갈구면서[55] 그들이 만들어낸 몫을 저들이 다 가져간 것뿐이지, 일제강점기 이후로 90년대 대량 기근 사태인 고난의 행군기까지 북한 주민들의 평균키가 아예 안 자랐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들이 다 가져가 놓고서는 그 지위를 유지하고자 외부에다가는 평양 중심 같은 잘 사는 모델만 보여주고,[56] 북한 주민에게도 남조선 등이 뼈빠지게 가난하다고 거짓말을 지속적으로 주입하고[57] 외부 접촉을 광적으로 차단한 덕에 저 당시는 진실은 김일성 측근만 알고 북한 일반인과 북한 밖의 모든 인사들이 이런 사정을 알지 못했다.
주민을 직접 탄압하는 국가보위성 출신 중 중앙에 가까운 경우나 같은 경우나 다른 이유로 중앙에 가까울수록 정말로 탈북을 해도 북한에서 누리는 권세는 못 누리고 심지어 북한에서 사는 것보다 가난하게 살 수 있다. 가장 노골적으로 주민을 탄압하는 김일성의 최측근들은 남한에서 태어났으면 중산층에도 편입되지 못할 사람들이 많았다. 김일성 동료의 지인의 아들인 현철해 같은 경우도 나이를 속여가며 소위로 입대하며 김일성에게 아부하더니 지방간, 고지혈증, 당뇨 같은 질환[58] 으로 호사스럽게 먹다가 죽었다. 물론 일반 주민들의 정신을 최대한 조종하고자 하였으나, 인간은 자신의 본능에 거스르는 세뇌가 불가능하여 외부에 대한 인식을 속이는 방식으로만 주민 세뇌가 가능한 터라 외부 정보를 접하는 순간 김만철 일가의 사례처럼 바로 김일성 가문에 깊은 배신을 느꼈다. 다만 저렇게 외부 정보를 극단적으로 차단시키면서 외지인들이 듣기엔 터무니없기 그지없는 김일성의 말이 거짓말인 것을 알든 모르든[59] 그를 근거로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조직을 실제로 구축한 것이 더 경악스러운 것이다. 이렇듯 김일성은 조직을 다루며 보신을 하는 능력은 수준급이었으며, 고위 간부조차 김일성의 계획을 잘 모르거나 속는 등 가면을 쓰는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또한 김일성은 권력유지를 위해서 "독초는 적시에 제거하고 뿌리째 뽑아 버려야 한다."라는 말을 남기며 북한 체제에 조금만 거슬리면 그 사람의 3대에 연좌제를 적용해[60] 지옥과도 같은 정치범수용소에 가두고 쥐어짜면서 학살하는 것은 물론이고[61] 단체생활을 통해 국민들이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만들어[62] 국민들이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도록 한 데다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며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국민들을 3개의 계급으로 나눠 카스트와 같은 전근대적인 신분제를 20세기에 구축하는 등[63] 46년간 집권하면서 무자비한 학살과 인권 탄압을 자행하며 폭압적인 정치체제를 구축했다. 더욱이 김일성은 사회주의가 반대하는, 자신의 자손에 대한 권력 세습[64] 에 수십년간 공을 들여 이런 실태가 영구적으로 유지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극단적인 권력지향성과 더불어 비도덕적이며 비열한 일을 많이 했다. 자본가들의 투자를 받을 때는 온갖 좋은 약속을 다 하지만 일단 투자를 받은 후에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70년대에 빼앗은 스웨덴 볼보 자동차가 아직도 시골길을 달리고 있다고 하며, 스웨덴의 채무국 가운데 채무 이행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나라는 북한 뿐이라고 한다.[65] 심지어 소련과 중국의 빚을 제때에 갚지 않는 일조차 흔했다. 1980년대에 조국의 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마음으로 재일동포들은 북한에 투자하였지만 자기들이 이를 가로채고 투자금도 거의 돌려주지 않았다. #
게다가 외부 교류를 통해 자신에게 반하는 뜻이 생기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해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 아니라 양국의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도 38선을 막아 남한에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만나지도 못하게 했고,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전쟁이 멎고 30년이 지나서 김일성 생전 단 한 번 실시하여 남북 도합 100명만 만나게 하였다. 남한만 해도 실향민 약 140만 명 정도의 인원은 죽기 전까지도 고향 땅을 밟을 수 없었고, 이산가족은 1971년 기준으로 당시 남북한 인구의 1/5에 달하는 총 천만 명은 된다고 평가받았을 정도다.[66] #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프로그램에서는 김일성에게 복수를 해야되겠다며 군대에 말뚝을 박은 사람도 나왔고, 김일성에게 가능한 욕을 다 퍼붓는 등 한맺힌 절규가 잇따랐다. 그나마 김정일 시대가 되어 가족을 만난 경우도 있었으나 3만 명도 되지 못했다. 당시 만난 사람들조차 교도소 면회하는 사람마냥 감시받아야 하여 오히려 상봉 후 우울증에 시달린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 2021년까지도 남한에서 이산가족 찾기를 신청하여 적극적으로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사람 중에서도 80%는 가족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67] 세습을 가장 반대하는 사회주의를 거스르면서 자기 자식도 폭군으로 키웠지만, 정작 혈육을 다른 나라보다도 중시하던 한국인에게 죄값을 계산하기도 힘든 행위를 하던 것이다.
더욱이 김일성은 권력을 얻는데 쓰던 거짓말을 숨기기 위해 변화하는 국제정세조차 무시한 채 해외 정보를 철저히 차단하고는 "세상에 부럼없어라"와 같은 선전 문구들을 동원해 국민들에게 북한이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라고 세뇌시키면서 국정 운영도 폐쇄적으로 해서[68] 그가 죽을 무렵에는 북한을 명실상부 세계 최악의 독재국가로 만든 것은 물론이고[69] 경제 수준마저 한강의 기적으로 선진국 문턱까지 솟아오른 남한과는 정반대로 북한을 최빈국 문턱 수준으로까지 후퇴시켰다. 비록 북한의 세계 최빈국화는 김정일 시기에 들어와서야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북한의 최빈국화는 김일성 체제에 기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김일성을 북한을 세계 최빈국으로 만든 장본인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70]
그럼에도 김일성이 워낙 국가를 폐쇄적으로 운영하고 국민들을 세뇌시킨 나머지 김일성의 집권기에는 많은 북한 주민들이 자신이 노예화되고 국가 상황이 나빠진 줄도 몰랐다.[71] 남한에 가족이 있던 사람들, 기독교 같은 종교를 믿었던 사람들[72] 등 분명 속앓이를 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지만 그 불만은 드러낼 수조차 없었다. 이 때문에 남북한의 화해·재통일 및 북한의 정상국가화가 기약 없이 보류되고 영원히 없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되었다.
명색이 갈라진 한반도의 북쪽의 지도자였으면서 통치기간 내내 한국과 세계에 적대 위주의 태도만 고집했으며, 전쟁은 비롯하여 군사적 도발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후계자들까지도 그런 입장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가 워낙 말이 통하지 않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해방정국에서 김구, 김규식, 여운형 등의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들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소 간의 갈등 심화와 좌우 사이의 새 나라의 정치적·경제적 방향성에 대한 대립 때문에 어려웠던 것도 있었지만 정부 수립 이후에도, 전쟁이 없은 채 국내 정치인들 간에 타협이 어느 정도 되었다면 분단이 실제 역사만큼 길어지거나 남북 관계가 실제 역사만큼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전후 긴 세월에 걸쳐 남북한의 청년들이 군대에 징집되어 그들의 시간을 잃어 온 것까지 이 모두가 김일성과 그 자신이 만들어 놓은 폭압적인 체제로부터 비롯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그의 아들과 손자인 김정일과 김정은은 모두 김일성이 닦아놓은 기반과 정책 위에서 권력을 세습받아 잔혹한 학정과 대외 도발, 국민 세뇌, 우상화, 사치를 벌이고 무능한 경제정책과 대북제재 자초로 경제를 후퇴시키는 것인 만큼 김일성 한 명만 아니었어도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와 그로 인한 모든 비극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북한이 지금처럼 세계적 경제대국들이 즐비한 동아시아의 유일무이한 극빈국이자[73] 2차 대전 후 최악의 독재국가 중 하나가 될 일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김일성은 전술한 것처럼 반세기 동안 집권하며 만행들을 저질러왔음에도 고국 내부에서는 사후 30년이나 된 현재까지도 그 어떠한 비판조차 허용되지 않은 채 계속되어 마치 신인 것처럼 숭배되고 있으니 더욱 통탄할 일이다.
전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극악한 독재자로 여겨지지만,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남북 분단 및 고착화 + 6.25 전쟁 + 수많은 이산가족 양산 + 남북 간의 대립 + 남한 반공주의의 극단화[74] + 남북한 징병제 + 북한의 인권탄압 + 북한의 최빈국화'의 책임을 혼자 전적으로 가진 원흉으로서 이완용도 능가하는 한민족 역사상 최악의 인물임과 동시에 한민족의 반역자로 영구적으로 비판받는 악인으로 여겨지고 있다.[75] 그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지 않은 한국인들도 그를 아돌프 히틀러나 폴 포트도 능가하는 악마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악행들을 수도 없이 저질러왔지만, 특히나 6.25 전쟁을 직접 겪었던 대한민국의 1940년대생 이전 노인 세대들은 김일성에 대한 차원을 달리하는 분노를 가지고 있다. 김일성이 야기한 6.25 전쟁으로 인하여 직접 가족이 죽거나 이별하고 김일성의 군대로 인해 재산도 빼앗기고[76] 김일성이 점령지에서의 권력 강화를 위해 재산과 권력에 대한 피해 의식을 기반으로 부추기던 질투심과 증오로 인해[77] 마을 사람들이 서로 죽이는 싸움을 하는 등 비극을 겪고, 나라가 3년 만에 세계 최빈국으로 초토화되는 꼴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김일성의 생전에는 인터넷이 요즘과 비교하면 없다시피했기에 김일성의 만행이 해외에 그렇게까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고, 이 때문에 해외에서는 오히려 아들인 김정일은커녕 손자인 김정은에게도 악명이 밀린다.
정치적 측면에서 좌우파 모두에게도 평가가 매우 좋지 않다. 좌파에게서는 세습과 계급적 착취나 앞뒤를 안 가리는 권력욕[78][79] 으로 비판받는다.[80] 또한 민족주의자에게도 자국민 인권 탄압과 6.25 전쟁 개전으로 비판받는다.
4.3. 세계사적 평가와 여파[편집]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지 고작 5년 후에 김일성이 불법 남침 결정을 일으킴으로써 초래한 비극은 비단 한민족만의 비극이 아니다. 이는 세계사적으로도 큰 상흔을 남긴 비극이기도 하다.
1950년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제1세계와 제2세계 간의 대립은 베를린 봉쇄 등으로 인해 물밑에서부터 서서히 가시화되고는 있으나 본격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일성의 침략전쟁과 그들을 적극 지원하는 공산권의 모습은 자유 진영의 위기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는 다시 2차 대전 이후 일어났던 평화적 세계 질서 구축을 위한 노력을 전부 허사로 만들었다. 내부 단속이라는 미명 하에 적대감과 극단주의가 양 진영 내부에 팽배했다. 소련의 경우 군대를 동원해 동독과 폴란드,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운동을 폭압적으로 진압하였으며 미국에서는 매카시즘으로 인한 마녀사냥이 횡행했다. 6.25 전쟁으로 인해 냉전이 발발했음이 명백히 각인되었고, 세계는 다시 한 번 전쟁의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또한 김일성의 행동은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 청산을 심각하게 방해했다. 공산권의 침략에 대한 공포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며 그 방파제로서의 독일과 일본의 재건이 우선시되었으며, 때문에 1950년을 기점으로 2차 대전의 전후 처리는 매우 졸속으로 진행되었다. 좌파 세력의 위협이 가시화된 상황에서 어쨌든 주축이 제거된 추축국 잔여 세력은 명령에 따르기만 했다는 참작 사항이 존재하면서 자유주의 우파 서방 세력과 똑같은 반공 보수라는 공통분모가 있기에 손을 잡을 만했기 때문이다. 가령 반인륜 범죄의 책임을 지고 완전히 해체되었던 독일군은 6.25 전쟁을 계기로 독일의 방위 필요성이 대두되어 부활하였다. 홀로코스트에 가담하며 전쟁 범죄를 저질렀던 구 국방군 인사들 역시, 공산 국가들과 싸운 경험을 제공하는 댓가로 사면받았다. 같은 이유로 일본의 정상국가화 역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2차 대전 당시 침략전쟁에 가담했던 많은 일본 정계 인사들과 전범기업들은 연합군의 처벌을 피해 살아남았다. 오히려 그들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쟁특수를 톡톡히 누리기까지 했다. 거기다가 실제로는 개인적으로 뼛속까지 반일이었던 이승만조차도 친일파들을 숙청하지 않고 중용했을 정도로 1950년대 당시 레드 콤플렉스는 심각했다.[81]
때문에 북한에서 독립운동가이자 파시스트로부터의 해방자라고 평가하는 김일성이 같은 민족 수십만 명의 핏값으로 살려낸 구 추축국 인사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한둘이 아니다. 그들은 목숨을 구한 것을 넘어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기까지 했으며, 그 여파는 현재까지도 대안 우파, 네오 나치, 일본 우파, 넷우익 그리고 뉴라이트라는 암적 존재로 자리잡았다.[82][83] 반대로 김일성의 침략전쟁으로 인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기회를 잃어버린 2차 대전의 피해자들은 그보다 몇 배 이상으로 많다.
게다가 동아시아의 주류 좌파 정당의 성향이 북한의 영향으로 NL, 일본 신좌파처럼 권위주의적이고 반서방적, 반지성적으로밖에 나아갈 수 없게 만들었고 그 여파로 동아시아가 우파 강세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한국의 민주당에게도 영향을 미쳐 김대중, 노무현이 미국 민주당처럼 중도주의적으로 지지자들을 이끌려는 노력들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었다.[84]
5. 여담[편집]
-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金聖柱)였으나 1929년에 김일성(金日星)으로 개명하였다. 1935년에는 한자 표기를 金日成으로 변경했다.[85] 북한식의 변형된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쓰면 Kim Il Sŏng이 되고 기존 매큔 - 라이샤워 표기법으로는 Kim Ilsŏng이 되겠으나, Kim Il Sung은 당사자가 쓰던 표기가 굳어진 것으로 보아 그대로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어의 라틴문자 표기법 참고. 한어병음로는 Jīn Rìchéng(진르청. 항일 투쟁 시기에 알려진 '진지첸' 등의 표기로도 알려져 있다.), 러시아어로는 Ким Ир Сен(킴이르센)[86] . 소련 체류 시절에는 러시아식 이름[87] 도 있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 6.25 전쟁을 일으키긴 했으나, 자신이 적대하던 대한민국의 이승만과는, 의외로 별 접점은 커녕 한번도 대면한 적이 없다. 애초에 광복 이전까지 둘은 별 접점이 있을법한 인생사를 살아오지 않았으며,[88] 이승만은 김구와 달리 김일성이 협상이 통하지 않는 인물임을 간파했기 때문에 그를 만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휴전 협정에도 반대했기 때문에 판문점 휴전 협정장에도 찾아가지 않아 평생 김일성과 대면하지 않았다. 다만 서로에게 있어 적국의 수장인 만큼 연설로는 서로를 매국노, 반역자라고 비난했다.[89]
- 자신의 손자 김정은처럼 상당히 어린 나이에 일국의 지도자가 되었다. 처음 북한의 지도자가 된 시점에서는 35세였고, 북한 임시정부 시절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바지사장을 내세웠었다. 한국전쟁을 일으켰을땐 고작 40세였다. 최용건이나 김두봉 같은 자신의 바지사장들에 비해서도 한참 어린 나이였다. 남쪽의 이승만이 한국전쟁 당시 70대였으므로, 거의 아버지와 늦둥이 아들의 나이차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렇게 나이가 어린 상태에서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에 후술할 김일성 가짜설이 도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 김일성의 가족관계와 출신성분을 생각하면, 정말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라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래서 북한이 정말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였다면, 김씨조선의 집안은 가장 먼저 숙청을 당해야 할 입장이었다. 물론, 북한은 지금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국가도 아니고 그 놈의 엉터리 주체사상으로 만들어진 전제군주제 국가나 다름없는데, 현재 북한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도 헌법에서 제외하고 금지시켜버린 국가라서 자본론이나 공산당 선언을 주장하면 정치범으로 숙청되어버린다. 그래서 북한이 극좌계열처럼 보이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극좌성향도 아니다. 오히려 파시즘의 근원인 제3의 위치와 매우 흡사하다. 그래서, 김씨조선 집안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이론에 의하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태생부터 출신성분에서 무조건 걸러내야 하고 박멸해야 되는 타도의 대상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아래의 내용같은 공산주의 유머도 있다.
제목 : 당신은 주체조선에 어울리지 않소.
"동무의 집안은?"
"계급주의의 개였군. 동무의 조부는?"
"리조시대에 지방관을 하댔지요."
"봉건잔재의 끄나풀이구만기래, 동무의 부친은 무엇을 하댔소?"
"한약방을 운영하는 의사였다오."[90]
"인텔리 분자였구만. 집안에서 믿는 종교 같은 것은 있소?"
"이거이거, 종교까지 믿다니! 네놈 집안은 완전히 반동 놈의 집구석이구만! 이런 반동 놈! 어디 잘난 이름이나 한번 들어보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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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략 1970년대에 김정일은 기쁨조를 만들어 김일성의 비위를 맞추고[92] 자기 세력을 확보하였다. 안에 행복조, 만족조, 가무조가 있는데 그 중에서 만족조는 성적으로 만족을 주는 조이다. 이것도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는다고 하는데 기쁨조를 하다가 퇴직한 사람은 고급 아파트에 들어가게 해준다. 그러나 기쁨조를 나올 때 내부에서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 못하게 각서를 쓰게 한다고 한다. 김일성의 경호원을 1년 6개월 했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기쁨조는 1975년도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처음에는 인민국협조단에서 18명 정도를 뽑았는데 실력보다는 예쁘기만 했으면 됐다고 한다. 북한에는 '음팔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음팔이가 스트립쇼를 하면 김일성이 좋아했다고 한다. 김정일이 자기 아버지에게만 여자를 안겨주기에는 부러웠는지 예술단에서 예쁜 사람들만 뽑아 김정일 주위를 빙빙 돌게 만들었다고 한다. 김일성도 살아있을 때부터 기쁨조를 신명나게 즐겼다는 이야기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똑같이 1971년 득남을 했는데 김일성은 김현, 김정일은 김정남을 각각 얻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진짜 종요처럼 75살에 김백연을 득녀했다.
- 북한 사람들은 키가 무려 193cm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 키는 177-180cm 정도 된다.[93] 말년에는 173cm까지 줄었다. 177cm면 2022년 한국 기준으로도 평균 이상이며, 영양이 부족한 북한 기준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장신이다. 더불어 1930~1950년대 기준으로는 세계 기준으로도 꽤나 큰 편이었다. 서로 비슷한 키도 아니고 아래 쪽에서 올려다보면 상대방의 키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들고 김일성은 키에 비례해 덩치도 제법 되기 때문에 키가 작은 옛날 북한 사람들이 보기에 얼핏 그렇게 보였던 것 같다. 김일성이 청년기였던 1930년대 한반도의 20대 남성 평균 신장이 163~164cm이었음을 감안[94] 하면 현재 한국 평균 키로 환산하면 188~190cm이 된다. 즉 체감상으로는 실제보다 더 크게 보였기에 저런 소문이 돌았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에 김일성과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만난 사진이 있었는데 티토와 약간의 차이가 날 정도였다. 티토의 추정 키는 대략 172cm 정도로 추측된다.
- 탈북자의 증언에 의하면 김일성 같은 후덕한 얼굴이 북한 기준으로는 잘생긴 외모다. 김일성과 관련된 모든 것을 신격화하는 북한이 김일성의 외모까지 찬양한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95] 의외로 젊었을 적 외모는 남한 기준으로도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긴 하다.[96] 다만 북한은 젊은 김일성의 얼굴에 대해서도 '출중한' '준수하고 환한' '수려한'은 기본에 심지어는 "얼굴은 태양이요, 몸매는 산악인 듯 근엄한데 안광에는 천 리도 순간에 뚫을 듯한 영채가 뿜어 나왔다"는 등의 심하게 과장된 평가를 남겼다.(...)[97] 김일성 본인은 이러한 외모에 자신이 있었는지 아니면 카리스마를 과시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항상 전면에 나서는 것을 좋아했고 이는 그의 아들 김정일이 결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정치 기반 확립과 숙청을 감행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김정일은 언제나 인민복 차림인데 김일성은 정장을 좋아했다는 것도 특이하다. 물론 이상의 사항은 어디까지나 1947년 이후 살이 찌기 전의 이야기. 45년에 처음 북한에 들어왔을때는 마르고 날씬한 체형이었으나 2년 사이에 폭식을 했는지 급격히 비만 체형이 되었으며, 턱선이 무너졌고 결국 혹까지 생겨나고 말았다.
- 흔히 김정은이 살찐 것이 할아버지의 이미지를 차용하기 위해서라는 설이 알려져 있는데 2020년 기준 김정은의 비만도는 김일성이 가장 뚱뚱했던 시절보다 심각하게 더 쪄 있다. 처음에는 따라한거라고 해도 김정은의 경우는 생활 습관 자체가 잘못된 것에 가깝다. 김정일의 이복동생 김평일이 내외적으로 김일성을 닮았다고 한다. 1946년 북조선로동당 당수 취임 즈음 때까지는 날씬한 모습이 유지됐지만 1947년부터 투실투실해진 것을 보면 2년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기록영화에 남은 생전 김일성의 목소리는 상당히 걸걸했다. 이는 김일성의 나이 때문만은 아니었으며, 젊은 시절에 기록된 몇 안 되는 육성 녹음을 들어 봐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손자인 김정은의 목소리와 상당히 비슷하게 들리기도 하는데, 이는 김정은이 집권 초기부터 김일성의 이미지를 의도적으로 벤치마킹했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에서는 이런 김일성의 목소리를 '친근한 음성'으로 선전한다.[98]
- 1994년 지미 카터를 만나고 정확히 14일 후 김일성은 사망했는데 1994년 당시 칠순이었던 지미 카터는 28년이 지난 지금도 멀쩡히 살아있다. 참고로 한국 한정으로 지미 카터는 그가 만난 독재자들이 얼마 가지 않아서 권력을 잃거나 사망한다는 징크스가 있다고 여겨져 농담삼아 '독재자 킬러'라는 별명이 있다.[99] 그런데 김일성의 경우 정말로 지미 카터 때문에 사망한 것이라는 진지한 분석들이 있기는 하다. 지미 카터가 주선한 북미 대화 및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다가 과로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고 이 때문에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주장들이 있다.
- 자신의 성씨와 조상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전주 김씨로, 6.25 전쟁 중에 전주 김씨 족보를 구하려고 무진 애를 쓰기도 했다. 한 일본 기자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이 전주 김씨 족보와 조상의 영정을 모셔놓고 향을 피우는 방을 따로 마련해 놓은걸 봤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 때문에 전주에서는 전주 김씨의 시조 김태서의 묘가 전주 모악산에 있기 때문에 북한과 전쟁이 나도 전주는 안전할 거라는 이야기를 우스개소리로 하고는 하지만 정작 6.25 전쟁 개전 초기(9월)에 전주에서도 학살이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의 본가인 전주 김씨 시조는 사실 경주 김씨의 일파[100] 인 김태서로서 그 후손 전주 김씨는 몽골 침입 당시 경주를 떠나 이주한 방계이며 한동안 전주에 있다가 평양으로 이주했다.[101] 즉 근원적인 조상은 신라 쪽으로 닿는다. 하지만 김일성의 집안이 정말 전주 김씨인지를 교차검증할 만한 자료가 마땅치 않다. 1915년 전주 김씨 대동보가 편찬되었으나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소실되었으며 김일성 일가가 살았던 평안남도 대동군 일대가 누락되었다. 따라서 문서로써 김일성 일가가 확실히 전주 김씨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으며 실제로 전주 김씨들은 김일성과 종친이라는 이유로 분단 이후 상당한 세월을 눈치보면서 살았어야만 했다. 실향민+전주 김씨 콤보인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으며 이런 이유로 모국을 떠난 이민 1세대들도 있다. 일반 북한 주민들은 계속된 국가의 통제로 인해 지금은 자신의 본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주민들이 많다고 한다.[102]
- 목 뒤에는 혹이 있었으며, 살이 꽤나 쪄 있어 반공 애니메이션에서는 주로 돼지로 묘사되었다. 김씨 일가를 돼지로 묘사하는 것은 이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심지어 똘이 장군에서는 인간의 형상을 한 돼지로 등장해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는데, 김일성 본인은 이 콤플렉스를 거론하는 것을 무척이나 기분 나쁘게 여겼으며 이것에 관해 논하는 것을 금지하하였고, 만약에 논할 경우엔 정치범수용소로 끌고 갔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북한측에서 찍은 사진 중엔 김일성의 혹이 찍힌 경우가 매우 드물다고 한다. 1988년 북한 정권 수립 40주년 기념 행사 때 프랑스 취재진이 녹화한 영상에 그의 혹이 드러난다. 20초 부근 참고.[103] 김일성의 혹은 지방종으로 추정되는데 외과 수술을 통해 조기에 절제할 수도 있었으나, 치료 시기를 놓쳤고 고령이 된 후라 수술을 하면 건강에 타격이 가기에 그냥 방치해 둘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 사이에 혹은 더 커졌다. 정원식 전 국무총리가 남북고위급회담 차 방북했을 때, 김일성을 예방한 적이 있는데 당시 내외통신(현 연합뉴스) 기자에 의해 혹이 선명하게 찍힌 사진도 있다. #
- 위의 이유로 김일성에게는 목 뒤의 혹과 사실상 왕국이나 다름없는 북한의 삼대세습 정치체제를 로마 황제식으로 비꼰 '혹부리우스'라는 별명이 생겨나게 된다. 아들 김정일은 머리 모양을 따서 '뽀그리우스'.
- 김일성의 전직 주치의가 <신율의 시사열차>에 출연하여 "김일성이 젊은 청년 피 뽑아 한 달에 한 번씩 피갈이를 했다."라고 증언했다. 이 피갈이의 부작용으로 목 뒤에 혹이 생겼다는 것이다. 20대 내내 김일성에게 피를 헌납한 청년들은 죽기 일보 직전인 사람과 같을 정도로 폭삭 늙었다고 전한다. 실제 나이는 20대인데 외모는 70대처럼 변했다는 것이다.[104]
- 빨치산 시절부터 자신을 지지해 준 김책을 존경하였다고 한다.[105] 그래서인지 원래 소련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김일성으로 내세우려던 것은 김책이었다는 카더라도 있다. 그가 죽고 나자 함경북도 성진을 '김책'으로 바꾸고 공업대학을 만들 때 그의 이름을 붙여서 '김책공업종합대학'이라고 짓기도 했다.
- 해방되자마자 계속 T-34-85를 모으고 있었다. 주로 소련에게서 공여받았으며 김일성이 탱크를 꾸준히 모은 이유는 뻔했다. 그리고 약 5년간 전차를 모은 김일성은 그 전차를 이용해 3년간 한반도를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다.
- 자신의 카리스마를 대중들에게 드러내는 걸 좋아한 나머지 1946년부터 1994년 사망한 해까지 육성으로 신년사를 내보냈다. 예외적으로 1966년과 1970년에는 신년사 대신 로동신문 사설로 대체했다. 반대로 비밀주의를 표방하던 김정일 때에는 신년사 없이 공동사설이 신년사를 대체하다가[106] 2013년에 김정은이 부활시켰다.
- 그의 주장이 지금까지도 정치에까지 미치는 남북한 언어에 중대한 혼란과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국 교과서조차 그의 주장을 검증하지 않고 인용하는 바람에 셀 수 없이 많은 오해가 생겨났다.
- 북한에서는 표준 규범인 문화어가 '수령님께서 몸소 쓰시는 영광스러운 언어'라면서 김일성이 과거에 말한 '지주놈의 상통'(면상), '자본가놈이 뒈졌다', '대가리를 돌로 까부신다'와 같은 온갖 각종 욕설이 난무한 막말도 문화어라면서 대놓고 교과서에 실어놓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라고. 그러나 타국에서는 보기 힘든 유례 없는 일인데, 아무리 도널드 트럼프나 로드리고 두테르테, 훈 센과 같은 정치인들이 막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북한에 비하면 상당히 양반이며 적어도 미국이나 필리핀, 캄보디아는 대놓고 교과서나 언론에서 상스러운 욕설을 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불분명하나, 일각에서는 1967년 김일성이 "전투적 화법을 사용하라"고 지시한 것을 시초로 보기도 한다.
- 그런데 이것도 지도자의 품격에 따라 달라져서, 김정일 때는 더 심해졌다고 한다. 북한을 외부에서 대하는 입장에서는 대단히 주목을 받던 표현이지만, 김일성 일가를 찬양할 때도 당연히 '전투적 화법'을 사용할 수는 없으니 부드러움을 넘어 낯간지러운 표현도 많이 쓰인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예 이들에게 쓰이는 높임말이 구분되어 '몸소', '서거', '가르쳐주다', '사랑', '선물' 같은 표현을 이 지도자의 행동을 대상으로 주로 쓰게 하였다.
- 더 심한 것은 분단 전 조선어학회 등이 욕까지도 서울 방언에 기반해 설정한 결과를 반영한 이 표준어[107] 를, 아예 평양말이라면서 거짓말을 하면서 서울말은 오염되었다는 식으로 대결을 부추긴 것이다. 김일성은 평양말이란 평안도 사투리가 아니라는 빨간 것을 파란 것이라고 주장하는 궤변[108] 을 섞어가며 문화어에서 서울 방언에 유래한 요소가 많음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세뇌하면서 '평양문화어'라는 주장을 세뇌시켰다. 일반인의 양심으로 생각하기에는 너무 뻔뻔하고 끈질긴 거짓말이기 때문에 지금도 '평양말'이 서울말과 비슷한 것인지 등을 헷갈려하는 사람들이 한국에 많으며, 그 손자 김정은도 '평양'이라는 타이틀에 매우 집착하여 평양문화어보호법으로 일반 직책에 '님'을 붙이는 사람 등을[109] 거의 비유적 표현이 아니고 공개처형까지 지시하며 사실상 죽음에 이르도록 하고 있다.
- 북한 당국이 자신이 남한보다 민족어를 지킨다는 것도 김일성의 거짓말이다. 외래어 순화의 수준은 사실 통계적으로 분석하면 남한에 가까웠지만, 여기다가 북한에서는 민족의 언어 문화를 발전시킨 사람의 공적을 숨기거나 폄하하기 때문이다. 현 북한에서의 역사교육에서 한글 창조를 세종대왕이 아니라, 김일성이 완성했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실제로 탈북민 유튜버 놀새나라TV 에서 역사시간에서 배우기를 세종대왕님이 조선글을 창조하시다 그만 눈이 멀어버렸다. 그래서 우리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가 조선글을 완성하였다. 라고 배웠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에는 한글날이 조선글날이라는 이름으로 있긴 하지만, 찬밥 대접을 받고 있다.[112][113] 그런데, 북한 사람들은 이걸 실제로 믿는다. [114]
- 애초에 북한은 TV가 2016년까지 지방은 조선중앙TV 한 채널이 끝이었고, 평양은 약간 풀어주는 대신 더 심하게 세뇌교육을 시켜버리니 진짜로 믿는것. 다만 지역마다 배우는건 좀 다른 모양이다. 인터넷에 유출된 교과서에 따르면 세종대왕이 인민의 요구를 악용하여 한글을 창제했다고 주장한다.
- 분단 전 민족 언어문화를 발전시킨 사람 중 김소월 등 한 단원 정도로 남한에서 유명한 사람의 작품[110] 이 2010년대 교과서에 실려 있다. 그렇지만 60년대 후반 도서정리사업 때 그의 시가 유행하고 있었는데도 그 시집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 북한에서 외래어도 많이 쓰인다. 영어 fund에서 유래한 '몫', '할당량' 등을 뜻하는 '폰드(뽄뜨로 아는 사람이 많다.)' 같은 남한도 안쓰는 표현이 쓰이고, 중국에서 순화해서 쓰는 텔레비전, 컴퓨터, 마우스, 미사일 같은 표현도 북한은 '텔레비죤', '콤퓨터', '마우스', '미싸일'로 부른다. 심지어 잔을 외래어로 부르면 남한은 영어에서 유래한 '컵'이라고 하지만, 북한은 일본어에서 유래한 '고뿌'를 쓴다. 테제라는 단어도 남한보다 인지도가 높다. 그러나 세뇌 교육 탓에 북한에서 온 사람들은 어느 게 순우리말이고 어느 게 외래어, 한자어인지를 잘 구분 못한다. 심지어 아빠트(아파트)가 외래어인지도 모르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이것 때문에 남한에와서도 자신들이 외래어를 많이 쓴다는 것을 모르고, 남한의 새 문물을 보고서는 남한의 동조[111] 와 더불어 '남한말이 정말로 영어, 일본어에 오염되었다'며 세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런 사실을 알면 북한에서 온 사람들도 적잖이 충격을 받는다.
- 따라서 언어순화 운동 관련 주제에 대해 한국 정치에 가장 큰 혼란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군정 하에서 '혼다데', '하꼬' 같은 말이 거의 잊혀질 정도로 언어순화 운동이 강력히 추진되고 박정희 정부도 심지어 음악 그룹 이름까지 순화시키려고 할 정도였지만, 김일성이 언어 순화를 철저히 했다는 정치선전 때문에 기존 보수 우파가 갑자기 자신의 업적을 잊거나 부정하고, 일부 진보 진영에서는 우파를 욕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언어순화를 북한처럼 철저히 하자고 주장하는 혼란이 빚어진 것이다.
- 해방 이후에는 남측의 정적들에게 죽을 위기를 몇 차례 넘겼다. 1946년 3월 1일 3.1절 기념연설을 하던 도중 백의사에게 암살 당할 뻔했다. 수류탄을 암살자가 던졌는데, 그 자리에 있던 소련군 장교 노비첸코가 되집어던져 암살을 모면했으나, 그 장교는 가까이서 터진 수류탄 덕에 팔 하나와 여러 곳을 다치고 의병제대했다. 소련군정문서 1946년 4월 6일자에 의하면, 이승만과 김구는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한 테러단을 파견했다고 한다. 그전에 북한으로 파견된 테러분자들이 김일성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는 소식도 보도된 바 있다. 자동차에 수류탄이 투척되었는데 자동차는 어떤 파손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 테러분자들은 이승만이 조만식에게 보내는 것으로 보이는 추천장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승만과 김구는 파쇼테러단이라고 비난 받았다. 김일성이 권력을 확실히 잡은 1950년대 후반에서야 비로소 이 장교를 손수 찾아가 고마워했고, 북한에서 따로 연금과 여러 가지를 제공하여 은혜를 보답했다고 한다. 심지어 기념영화까지 나왔으며, 죽을 때도 북한에서 장례비를 지원했다.
- 소 뒷걸음질로 쥐 잡는 격으로 여러 사람과 나라들을 살리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자면 박정희[115] , 장제스와 중화민국[116] , 요시다 시게루[117] 와 일본[118] 등이 있다.
- 김정일이 실권을 쥐게 된 1980년대 이후로는 외교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고, 유년기부터 항일투쟁과 해방 시기까지의 활동을 다룬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등의 저서를 집필했다. 하지만 이 회고록은 자기 입맛에 맞게 항일운동사를 마구 뜯어고치고 윤색해 북한 외부에서는 역사 왜곡 서적으로 비판받는다.
- 평소 집무실에서 틈틈이 책을 읽는 취미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특히 좋아했던 책은 역사책과 문학책이었으며, 심지어는 남한에서 발간된 책까지도 읽었다.[119] 실제 1989년 소설가 황석영이 문익환 목사 일행과 방북하여 주석궁에 갔을 때는 황석영의 여러 소설을 감명 깊게 읽었다면서 한동안 그와 책 내용을 두고 토론까지 했을 정도라 한다. 문익환 목사는 성경책을 보여줬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별 감흥이 없었던 것 같다.
- 김일성은 시와 노래를 좋아해서, 지은 노래와 시가 몇 십 편에 이른다. 가장 유명한 노래는 '조선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일제 강점기 때 동북항일연군이 부르던 것을 1993년에 보천보전자악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수 전혜영이 다시 복원했다. 김일성이 좋아하는 노래는 사향가와 자장가이다. 사향가는 내용이 고향에 대해 묘사한 것으로서, 그의 조모인 리보익의 애창가였다. 김정일도 어린 시절에 그녀가 부르는 사향가를 들으며 자랐다고 한다. 또 자연을 노래한 시는《묘향산 가을날에》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의 내용은 평안북도 묘향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으로 국제친선전람관 내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김정일의 50회 생일을 맞이하여 '백두광명성찬가'라는 한시를 짓기도 했는데, 양강도 삼지연군 화강암 비석에 새겨져 있다. 1992년 80세의 김일성이 사향가를 부르는 영상도 남아 있다. 들어보면 나이를 감안해도 굉장한 음치다.
- 서예 활동을 많이 했다. 북한의 공공건물에는 김일성의 친필이 있는 간판이 있는 것을 꽤 볼 수 있다. 김일성의 친필비는 개성에 있으며, 인민들이 살고 있는 주택에도 현판을 제작해서 나누어 주기도 했다. 김일성의 친필이 걸려 있는 건물로는 대동강여관과 김형직사범대학, 그리고 북한의 종합대학 중 하나인 김책공업종합대학 등이 있다.
- 북한 원의 인물이다. 북한 원 2기 3차 시리즈 100원권 지폐에는 '혁명의 영재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 영웅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라는 기나긴 수식어가 붙어 있다.
- 김일성의 장례식에 당시에는 북한의 인민들이 총동원되어 매일 생화를 들고 김일성의 동상을 찾았고 이로 인해 북한에 꽃이란 꽃은 모조리 팔려버리는 상황이 발생되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김일성 사망 당시에만 해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날에는 김일성 동상이나 초상화 앞에 꽃다발을 갖다 놓는 관례가 있었고 이 시기를 이용하여 짬짬이 꽃장사에 나서는 장사꾼들이 있었는데, 김일성의 장례기간 동안마다 이 사람들은 말 그대로 떼돈을 벌었다. 그래서 평소에는 북한 돈으로 5원밖에 안 하던 생화 한송이의 가격이 김일성 장례기간 동안 10배 가까이 오른 50원까지 거의 인플레이션 급으로 올랐을 정도다. 심지어 그 가격에도 꽃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일시적으로 종이로 만든 조화가 김일성 동상앞에 놓이기도 했다.
- 러시아 신문에서는 김일성이 너무 오랫동안 중국에서 살아 온 탓에 북한공산당 창건대회 때 그는 한국어로 된 연설문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김일성의 첫 연설이 처참했던 것은 사실인데, 사실 이건 김일성의 탓이 아니라 연설문을 소련군 장교가 러시아어로 써주고 고려인 2세가[120] 조선어로 번역해서 문법이나 어휘가 조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도 만주 동만특위 단장 통창잉(童長榮)의 연설[121] 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 인사들의 여러 연설로부터 적당히 짜깁기한 것이었다.
-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거리가 캄보디아의 프놈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모잠비크의 마푸투 등에 있다. 특히 다마스쿠스에는 김일성의 이름을 딴 김일성 공원도 있는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다 친북 성향인 나라들이다.
- "스탈린은 내 친구요."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 납북된 신상옥과의 대화 도중 고려연방제의 국호 후보에 대해 언급하면서 신라를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을 때 외세의 힘을 빌렸다는 점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박정희의 신라 계승 정신도 좋지 않게 보았다. 위 발언에서는 '우리가'라고 하여 고구려를 망하게 한 계파를 '우리'라고 주장한다고 적혀 있지만, '우리', '그'라는 군말이라 신라가 외세의 힘을 빌려 통일시켰다고 하여 나쁘게 본 것으로 묘사된 경우도 있다. # 아이러니한 것은 김일성 본인이 신라의 혈통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인데 김일성의 성씨인 전주 김씨는 경주 김씨의 분파로,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후손들이다. 김태서는 전주 김씨의 시조인데 원래 경주 김씨였던 인물이 전주로 건너와서 분점을 낸 것이다.
- 북한 정권도 초창기에는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했기에 김일성과 태극기가 나란히 있는 사진들이 있다. 심지어는 위의 사진처럼 김일성이 태극기에 경의를 표하고, 애국가를 부르는 영상도 있다. 지금 와서 보면 매우 어색한 모습이기도 하다.
- 장성택의 길이라는 책에 의하면 김일성은 자신의 건강이 예전만 못하다고 느끼던 시점에 자신이 가장 믿는 측근 10명을 불러 모은 뒤 손잡이가 은으로 되어 있는 권총 열 자루를 꺼내어 각자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그리고 엄중한 태도로 그들에게 후계와 체제 문제에 대한 중대한 발언을 남겼다. 그 발언은 "만약 자신이 죽은 후 후계자인 아들이 자신의 노선에서 일탈해 함부로 체제 개혁에 손을 댄다면, 누구라도 바로 이 총으로 그를 사살하라"는 명령이었다 한다.
- 2023년에도 그와 같은 고향 출신의 실향민인 김형석 씨가 존재한다. 북한에서 1947년까지 살다가 하나 둘씩 조용히 주변 인물이 잡혀가는 것을 보고 월남한 것이다. 김일성은 아이 때부터 골목대장의 성격을 가졌으며, 지식보다는 의지가 강하고, 목적의식이 강했던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를 젖 먹여 키운 할머니가 김일성에 의해 자식을 잃기도 했다고 한다. 그 할머니가 '그놈, 내 아들 두 놈 다 잡아 죽일 줄 알았더라면 그때 젖꼭지로 콧구멍을 막아서 죽이는 건데 못했다'라고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
- 어려서 중국인 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중국어는 대단히 능통했다. 영상으로 보다시피, 김일성은 한국어 억양이 약간 섞인 중국어 동북방언 억양으로 말했는데, 이는 그가 지린성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기 때문이다. 펑더화이 역시 김일성이 지린성 억양을 썼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 외에 월어를 비롯한 여러 지방의 중국어 방언도 수준급으로 구사할 줄 알아서 통역 없이 회담이 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러시아어는 30대 되어서 배우긴 했지만 소련에서 몇년 살았기 때문에 통역 없이도 그런대로 의사소통을 하는 수준은 되었으나 중국어만큼 유창하진 못했고 이 때문에 고려인 출신의 유성철, 문일 등 러시아어 통역을 데리고 다녀야 했다.
- 북한 주민들은 무조건 김일성을 신으로 모시며, 탈북한 사람도 김일성을 존경한다는 설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나, 불행 중 다행히도 이는 북한 당국의 선전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 현 시점에서는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당장 6.25 전쟁 직후에도 전쟁으로 가난해졌으나 너무 감시가 삼엄하고 밀고자에게 대가를 잘 주어서 불만이 진압당한 것이며, 김일성이 독재 체제를 완전히 구축하기도 전인 6.25 이전에도 김일성이 학창 시절에 2차례나 살인을 저질렀다는(#) 소문이 CIA 보고서에도 기록되었을 정도로 널리 퍼졌던만큼 당대 북한에서도 김일성에 대한 불만이 암암리에 퍼져 있었을 것임을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출생한 북한 주민은 김정은을 아버지 원수님으로 김정일을 할아버지 대원수님으로 불러야 한다면 김일성에 대해서는 증조 할아버지로 불러야 맞지 않냐며 비꼬면서 자신에게 해준 것도 없는 옛날 할아버지 정도로 여기기도 한다. # 이미 도시에서는 김일성 동상 근처에서 북한 당국 입장에서는 '불경스럽게' 데이트를 하기도 하며 언론 뿐만 아니라 강나라 씨 같은 탈북자도 증언한 바 있다. 20대의 부모 세대라면 좀 존경심이 있을 수는 있지만 바깥 세계를 경험하거나 김만철의 사례 같은 것을 접하면 바로 증오로 바뀐다.[122] 애시당초에 정치적 통제의 일환으로 조직생활을 강요한 장본인이 김일성인데, 이런 것이 굶주림보다 끔찍하다고 증언하는 경우도 많다. 북한 밖에서도 김일성을 진심으로 존경할 부류는 높은 정치적 지위를 북한 체제에서 누릴 수 있는 경우, 아니면 이런 월북 사건의 당사자처럼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경우밖에 없다. 북한의 구세대들이 김일성 시대를 그리워한다고 하는 경우도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인들이 전두환이 집권한 1980년대를 경제적 호황기로써 그리워한다는 뉘앙스에 더 가깝다.[123]
- 의외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한국전쟁 당시 미공군의 무차별 폭격은 일반민중 뿐 아니라 당 간부를 가리지 않았는데, 김일성 또한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전쟁 당시 김일성은 미군의 폭격으로 최소 2번 이상은 목숨을 잃을 뻔했다. 1951년부터 휴전 때까지 김일성은 평안남도 강동군 시정면 곤지리의 전선사령부에서 지냈는데, 1951년 7월 29일 미군 전투기의 기총사격으로 그가 앉아있던 곳에서 불과 1m 지점에 총알이 박혔으며, 8월 4일에는 사령부 뒤뜰에서 500kg짜리 폭탄이 떨어졌으나 불발이어서 살아남은 일도 있었다. 당시 김일성이 머무는 동안에 전선사령부에 떨어진 미군 폭탄이 무려 149개라는 점에서, 김일성 또한 미군의 폭격에서 생명을 보장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일성 또한 북한 인민들 처럼 미군 폭격의 공포를 직접 체험한 것. 물론 6.25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 김일성인 만큼 김일성이 폭격으로 죽을 뻔했던 것은 사실상 김일성 본인의 업보이며, 무엇보다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미군의 폭격에 무고한 한반도 주민들이 살상당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 1983년 2월 14일자 뉴욕 트리뷴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평양에 들른 한 쿠바인 기자는 김일성과 회견하고는 원숭이가 제 아무리 높은 왕좌에 앉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기껏해야 원숭이의 왕좌라는 내용의 중국 속담을 떠올렸으며, 4시간 30분 동안 '사상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론가로서 모든 인민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는 김일성의 사상을 듣고는 '도저히 필설로 묘사할 수 없는 경험'이었다며 김일성을 '정신분열적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묘사했다.[126] 이후 그 기자는 6개월 뒤 하노이에서 돌아가는 길에 잠시 평양에 들렀다가 쿠바 대사관에서 실수로 김일성의 사진이 있는 신문으로 빈 병과 깡통을 쌌는데, 대사관에 있던 북한인 직원이 이를 보고 밀고하였고, 그 기자는 다음날 외교부에 호출되고는 '위대한 지도자' '민족의 아버지'의 사진이 실린 신문지로 폐품을 싼 '대역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북한에서 추방되었다고 한다.[127] 즉, 김일성은 같은 공산권 국가 사람에게도 정신 질환자 취급을 받을 정도였던 셈이다.
-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 4월 15일 바로 그 날에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가 일어났으며, 4월 15일은 킬링필드의 주동자 폴 포트가 사망한 날짜이기도 하다.
-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의 간판 보스인 베가의 별명 중 하나이다.
5.1. 독재자들의 우상[편집]
생전에 우상화를 통해 전국민의 '존경'[128] 을 받은 것과 동시에 짐승만도 못한 만행들과 거짓말로 점철된 삶을 살면서도 반세기 가까이 집권하며 절대권력과 최고급 저택, 최고급 음식, 여성 편력, 장수 등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누렸고 죽은 후에도 그의 후손들이 3대째 권력을 세습받으며 대대로 나라를 통치하고 고국에서 비판 여론 하나 없이 무한한 '숭배'를 받고 있다 보니 많은 독재자들이 그를 존경하며 모방하기도 했다. 2차 대전 후 집권한 독재자 중 마오쩌둥과 함께 가장 많은 독재자들에게 영감을 준 독재자이자 사실상 독재자들의 아이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하술하듯 북한을 제외하면 현존하는 최악의 독재국가들인 투르크메니스탄과 에리트레아도 다 북한을 모방하며 독재 체제를 확립할 정도였다.
그러나 하단의 독재자중 장기집권을 이어가거나 천수를 누린 독재자는 그리 많지 않으며 대다수가 김일성의 독재를 어설프게 따라하다가 처형이나 실각 등의 방식으로 몰락했다.
-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루마니아): 김일성을 모방한 우상화 정책을 펼친 것으로 유명하며, 심지어 아들 니쿠에게 권력을 세습하려는 시도까지 했으나, 김일성과 다르게 1인 독재를 확립할만한 정치공학적인 능력이 부족했고, 민중봉기로 정권이 붕괴할 모든 여지를 제거하지 못해 끝내 아내인 엘레나 차우셰스쿠와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영상 참조[129]
- 로버트 무가베(짐바브웨): 구쿠라훈디 학살 때 북한의 지원을 받은 제5여단을 쓸 정도였고, 고위 공무원들은 대통령의 사상을 알기 위해 주체사상을 공부하거나 아예 주체사상을 신봉하기까지 했다는 말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주체사상에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 국민들이 쫄쫄 굶는 와중에도 김일성에 버금가는 초호화 생일파티를 벌인 것으로도 유명하며, 잠재력이 풍부하던 나라의 경제를 전란 하나없이 미스터리에 가까운 수준으로 망가뜨린 것[130] 역시 북한과 유사하다. 그러나 그 역시 자신만의 1인 독재 체제를 확립하지 못했으며 군부를 적으로 돌린데다[131] 국민 절반이상이 그를 싫어했으며, 독재자 자리를 물려받을 기반조차 없는 아내 그레이스 무가베에게 별다른 준비도 없이 세습하려다가 에머슨 음낭가과가 일으킨 쿠데타에 당해서 결국 실각을 당해 가택연금 상태로 지내다가 싱가포르에서 사망했다.
-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적도 기니): 김일성을 '형님'이라고 부르고 축출되기 직전에 자식 3명을 북한에 보낼 정도로 사로 친하게 지냈으며, 본인도 적도 기니의 독립 1년 후인 1969년에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생긴 북한 주재 적도 기니 대사관을 통해 북한의 통치 수법을 익혀가며 자신의 독재 기법을 확립해[132][133] 북한도 뺨치는 학정을 저지르며 인구의 최소 절반에 달하는 인명 피해를 입혔다.[134] #
-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에리트레아): 북한 체제에 감명을 받아 이를 모방한 체제[135] 를 자국에 구축하며 에리트레아를 아프리카 최악의 독재국가로 만들었으며, 이들중 유일하게 현재까지도 집권 중이다.
- 하페즈 알아사드(시리아): 김일성을 만나고 그를 모방한 우상화 정책을 실시하기도 햇으며,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에게 권력을 세습했고, 이 영향으로 시리아는 대표적인 친북 국가로 알려져 있다.
- 시아드 바레(소말리아): 그가 롤모델로 삼은 두 인물이 바로 가말 압델 나세르와 김일성이다. 덤으로 바레 시절 소말리아가 숨 막힐 정도로 매우 촘촘한 감시 체제를 유지했던 것도 북한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 폴 포트(캄보디아): 김일성을 존경했는지 여부는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136] 키우 삼판 주석이 "우리는 모두 앙카르(크메르 루주 수뇌부)의 보호를 받는 커다란 가족입니다."라고 사회주의 대가정론을 연상시키는 말을 하기도 한 것과[137] 집단농장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생활총화를 실시한 것[138] , 극단적인 민족주의 강조 등으로 미루어볼 때 북한 체제를 접하고 이에 감명을 받아 자신들의 체제에 적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북한 이상으로 말도 안되게 극단적인 통치를 일삼았으며, 난데없이 베트남을 침공하는 무리수를 두는 바람에 배트남의 반격에 당해 5년도 못가 정권을 상실한채 10년넘게 정글에서 게릴라전이나 하는 신세로 전락했다가 캄보디아의 신 정권에게 체포당했다.
-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에티오피아): 1982년 평양을 방문했을 때 본 국경절 행사에 감명을 받아 1984년 집권 10주년을 맞이해 당시 가치로만 1억 달러를 들인 대규모 행사를 열었는데, 행사를 기획, 감독한 사람들이 북한의 고문들이었다. 문제는 행사에 마련한 예산이 해외의 기근[* 1983~1985년까지 에티오피아 북부에서는 30만~120만 명이 사망한 대기근이 발생했는데, 이는 라이브 에이드와 We Are the World 공연에도 큰 영향을 줄 정도로 국제적으로 파장이 엄청나게 컸다.] 원조금을 횡령하며 마련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 모부투 세세 세코(자이르[139] ): 표면적으로는 반공을 내세웠는데도 1974년에 방북했을 적에 북한의 우상화에 깊은 감명을 받아 김일성과 유사한 방식으로 자신을 우상화했으며, 그가 내세운 이념인 '모부투주의'도 주체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투르크메니스탄): 집권 직후 북한을 방문해 북한의 1인 독재와 우상화 수법을 배워 자신의 독재 체제 확립에 이용했다. 세습 독재에는 실패했으나, 천수를 누리다 갔다.
5.2. 사치 생활[편집]
아들과 손자의 사치와 미식가 행각이 너무 유명해서 가려진 감이 없지는 않지만, 김일성도 경악스러운 수준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140] 북한에서는 김일성에 대해 '자신에 대한 그 어떤 특혜와 특전도 허용하지 않고 언제나 인민들과 같이 겸허하고 소박하게 생활했다'고 선전을 하고 있으나 김일성의 실제 생활은 '겸허함', '소박함'이라는 단어 자체를 떠올릴 수 없을 수준으로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사실 북한은 원래 김일성의 휴양을 위해 각지 명승지에 소규모 특각을 건설하다가 1950년대 말부터 그 규모를 크게 늘려 '특각'이란 이름으로 전용 별장을 대대적으로 건립했다고 한다.[141] 김일성 부자는 풍광 좋은 곳을 골라 중앙당 8국의 전담하에 'OO공사' 라는 명칭으로 전용별장을 짓도록 했는데, 건축 공사는 호흡과 생체리듬에 최적이라는 해발 500m 지대, 경승지 등 자연적 입지조건은 물론 신선한 외부공기의 실내 유입장치 등 건강을 고려한 설계 등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다.[143] 이러한 별장들은 전부 군대를 동원해 지었으며, 해외 건축가를 비싼 돈을 주고 초빙하여 설계를 맡겼다고 한다.
물론 공사는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며 내부공사 때부터 일정 구역별로 호위총국 초소를 설치하는가 하면 호위총국 발행 비표를 지급하여 방 또는 층 등 지정된 담당 작업구역만 출입하도록 하고 있고, 도배, 실내장식 등 마무리공사는 아예 중앙당 8국에서 전담토록 조치했다고 한다. #
김일성이 1년에 자모산 별장[144] 에서 보내는 시간만 한 달이 넘었으며, 문에는 상아로 만든 1회용 손잡이[145] 가 있었고, 초소구역 안에 사냥구역을 만들고는 그 근처에 콩과 옥수수 밭을 만들고는 일부러 수확하지 않아 동물들이 풍요롭게 먹을 수 있도록 했으며, 이런 별장들 안에서 1년의 절반 이상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김일성은 '아미산 대표부'라는 부서를 해외의 유명 도시에 두고는 이 지구상에 있는 최고라는 물건이란 물건을 수입하게 했으며, 프랑스제 헤네시 코냑, 싱싱한 잉어회[146] , 원숭이골[147] 을 좋아했고, 이러한 사치품과 해외 식료품 구매 자금은 중앙당 39호실이 마약 수출과 골동품, 금을 밀매하는 식으로 마련했다고 한다.
1974년부터 1985년까지 압록강변에 위치한, 평안북도 창성군 약수리에 있는 창성특각의 경비대원으로 근무했던 박수철(1959년생)의 말에 따르면, 창성특각은 주변에 수풍호와 원시림이 펼쳐 있고 곰, 멧돼지, 꿩 등 동·식물이 많이 서식하는 최고의 명승지에 있었으며, 김일성이 갈 때마다 늘 반나체 차림의 여간호사가 수행했고, 특각에는 아름다운 처녀 관리원 10여명을 배치해 김일성을 즐겁게 해 주었다고 한다.[148] 그리고 김일성은 5~7월마다 매년 한 차례씩 40일 동안 창성특각에 머무르며 사냥과 수영, 산보, 낚시, 호수 유람을 즐겼으며, 별장 내에서는 링컨 컨티넨탈을 타고 다녔다고 한다. 게다가 수영장은 날씨가 좋을 때는 지붕과 담이 자동으로 걷히는 (당시로써는) 최신식이었고 밤에는 불을 밝힌 채 구소련의 노래를 배경으로 정원에서 노래와 춤 잔치가 벌어졌으며, 특각에는 오락실, 음악실, 연회실, 어린이용 놀이방,[149] 광물표본실 등이 갖춰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별장에서 김일성 경비는 호위총국[150] 소관으로 상주 경비대원은 140명이었고 김일성이 특각에 올 때는 기동대원 500여명이 따로 따라 붙었으며,[151] 그 외에도 창성특각은 야산특각과 고산특각, 수영장, 산책로, 선착장, 동·식물원 등의 시설들도 있었으며, 방사선 차단을 위해 지붕에 납이 씌워져 있었다고 한다. #
또 북한군 대좌(한국으로 치면 대령) 출신이자 북한의 전직 해외 군수담당 조달요원이었던 김정률[152][153] 이 2010년에 오스트리아에서 출판한, 김일성 부자의 사치 생활을 폭로한 책 '독재자를 위하여'[154] 에 따르면 김일성은 외국 음식만을 먹었고, 북한의 요리사들을 유명 요리학교 3곳과 오스트리아의 유명 레스토랑에 보내 직접 '가장 좋은 요리법'을 배우게 하기도 했으며,[155][156] 오스트리아 빈에는 외국 음식 공급을 전담하는 수행원까지 있었고, 그가 가진 수십 채의 초대형 저택들은 모두 커다란 샹들리에[157] 와 비단 벽지, 비단 양탄자, 값 비싼 타일, 조명, 위생 설비, 고급 가구들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하고, 이 빌라 가운데 몇 채는 지하에 건설돼 있었으며 핵 공격에도 견뎌낼 수 있는 환기 시스템을 갖춘 곳도 있었다고 설명했다.[158] 덤으로 김일성의 동굴형 주거 복합 건물 최소 2개에는 원자력 방사선을 막아 주는 통풍 설비[159] 도 설치되었다고 한다. 김일성 일가의 별장들은 거의 '오스트리아식' 주택들이었으며, 벽과 천장들을 제외하고는 수없이 많은 '메이드 인 오스트리아' 제품이 설치되었다는데, 실제로 김일성의 별장 내부는 문들과 알루미늄 창문들, 녹슬지 않는 특수 수도관[160] 이 다 오스트리아산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일성은 '자본주의 자가용'인 방탄 메르세데스 600을 위시한 수백 대의 벤츠와 포드, 캐딜락, 시트로엥 등 호화 차량을 상당수 보유하고 있던[161] 자동차 애호가였으며, 크고 육중한 리무진을 좋아했고, 1990년대 초에 벤츠 200 북한판 버전을 만들라고 지시하기도 했으며,[162] 틈만 나면 차 안에 침대를 설치하거나 '절대로 소음이 없는 운행'을 하도록 요구해야 해서 김정률 등은 김일성의 차를 수리하기 위해 차를 부품별로 해체해 수리했다고 한다. 경비행기 수집을 즐겼다고 한다. 그리고 미녀들이 쌀 알갱이를 일일이 검사하고 기차 여승무원으로써 김일성에게 차와 음식을 접대하는 것도 김일성 시절부터 있던 일이며, 물론 김정률 등 김일성의 보좌관들도 독일제 냉장고와 일제 TV 등을 사들였다. #1 #2 #3 다만 후지모토 겐지의 김정일의 생활 폭로의 임팩트가 너무 컸다 보니 국내에서 김정률의 책의 인지도는 낮다.
심지어 김일성 장수연구소로 알려진 기초의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1998년에 탈북한 한의사 석영환(1964~)이 2004년에 출판한 책 '김일성 장수건강법'에 따르면 김일성이 쓰던 이불은 70만 마리의 참새의 턱 밑 잔털을 모아 만든 것이었으며,[163] 침대에는 각 신체 부위가 닿는 곳마다 몸에 좋은 약재를 넣어 놓았고, 베개는 32가지 한약재가 들어간 '신선베개'를 사용한 데다가 딱딱한 시멘트 바닥을 밟고 다니면 뇌와 관절에 충격이 가해져 수명이 짧아진다는 연구 결과를 반영해 별장의 바닥엔 반드시 푹신한 카펫을 깔았다고 한다.[164] 더욱이 김일성이 먹는 사과도 그냥 사과가 아닌, 사과 뿌리 부근에 겨울에는 누런 강아지를, 봄에는 개구리를 묻어 양분으로 삼게 한 특별 사과였다고 한다. #
다만 아들인 김정일의 매우 사치스러운 식습관이 세부적인 부분까지 잘 알려진 것에 비해 김일성의 식습관은 알려진 부분이 많지 않다.[165] 김일성의 경우 상술한 것처럼 진귀한 음식을 먹었다는 증언도 있는 데 반해 된장과 같이 콩으로 만든 음식, 개고기, 고래고기, 평양냉면, 삼삼탕[166] 을 자주 먹었다는 식의 증언도 있는 등 교차검증이 잘 안되는 편이다. 다만 적어도 육식 위주로 식사를 했다는 것과[167] 확실히 김정일에 비해 소박한 입맛이었던 것만큼은 확실한데, 성장 배경과 젊은 시절 행적을 보면 적어도 아들처럼 산해진미를 맛보면서 자랐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때문에 집권 이후, 박정희처럼 농촌을 방문하면 농부들과 어울려 소박한 세참을 아무 거리낌없이 먹기도 하는 모습 등도 보였다.[168]
6. 가족 관계[편집]
김일성은 김태서가 시조인 전주 김씨의 후손이다.
- 8대 조부: 김계상
- 8대 조모: ???
- 7대 조부: 김차형 (1699년 - 1768년)
- 7대 조모: 나씨 (1703년 - 1744년)
- 6대 조부: 김욱 (1728년 - 1813년)
- 6대 조모: 도민숙 (1735년 - 1811년)
- 현조부: 김민수 (1770년 - 1854년)
- 현조모: 고송희 (1772년 - 1832년)
- 고조부: 김송령 (1810년 - 1899년)
- 고조모: 나현직 (1811년 - 1897년)
- 증조부: 김응우 (1848년 - 1878년): 북한에서는 그가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민중들을 선동하여 제너럴 셔먼호를 공격하게 이끈 주동자라고 선전하고 있지만 이건 역사왜곡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 사건의 총책임자는 어디까지나 당시 평안감사 박규수와 철산부사 백낙연이었고, 행동대장 역할을 맡은 사람은 퇴역 장교 출신의 박춘권이었다. 물론 당시 기록 그 어디에도 김응우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사건 당시 김응우는 21세의 햇병아리 묘지기였을 뿐이지만 박규수(1807 - 1877)는 이미 60을 바라보는 노회한 고위 관료였다. 누가 이 사건을 주도했을지는 뻔한 일.
- 증조모: 리씨 (???? - ????)
- 조부: 김보현 (1871년 8월 19일 - 1955년 9월 2일)
- 조모: 리보익 (1876년 5월 31일 - 1959년 10월 18일)
- 부친: 김형직 (1894년 7월 10일 - 1926년 6월 5일): 개신교 미션스쿨인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동문들과 '민족주의'단체인 조선국민회 결성에 참여했다. 아들과 달리, 이 단체의 목표는 일종의 준비론에 가까웠다고 한다. 충격적인 사실은, 그는 자신의 아들과 달리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고, 훗날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암살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거점으로 온갖 고초를 겪으며 항일운동에 앞장섰다.
- 외조부: 강돈욱(1871년 2월 3일 - 1943년 11월 14일)
- 외조모: 위돈신
- 모친: 강반석 (1892년 4월 2일 - 1932년 7월 31일): 만약 베드로를 떠올린다면 맞다. 장로회 장로 강돈욱의 차녀로, 그녀 본인 역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참고로 숙부인 강량욱은 장로회의 목사였다.[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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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처: 김혜순, 김일성이 만주에 있던 시절 여자라 정식 혼인관계였는지는 불확실하나 1940년 일본군에 체포되면서 조선족 순사와 재혼하고 자연스레 헤어짐. -
정처: 김정숙 (1917년 12월 24일 - 1949년 9월 22일) 본래 회령지역 지주에게 첩으로 팔렸다가 탈출하여 김일성의 부하 지갑룡의 아내로 1933년부터 1940년까지 6년간 있다가 지갑룡이 생사 불명일때 김일성이 데려다 살다가 김정일을 낳으면서 아내로 격상되었다. 참고로 김혜순이 있을때도 김일성과 불륜 사이였고 생사불명이던 지갑룡은 멀쩡히 살아있었다고.. - 후처 김성애 (1928년 - 2014년) (추정) 타자수 출신으로 김정숙이 김정일을 임신중에 불륜으로 간통해서 김정숙이냐 나냐 선택하라고 김일성에게 요구 했고, 김정숙이 난산으로 위험할때 치료를 거부하고 사실상 자살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 형제
- 자식
- 김정일 (1941년 - 2011년)
- 김만일 (1944년 - 1947년): 3살 때 김일성 관저에 있는 연못 근처에서 놀고 있다가 그 연못에 빠져 익사했다.
- 김경희 (1946년 - )
- 김평일 (1954년 - )
- 김영일 (1955년 - 2000년)
- 김현 (1971년 - ): 김일성과 제갈씨에게서 태어온 사생아다. 북한 당국에서 존재를 철저히 숨겼지만 북한에서 넘어온 이한영이 자신의 수기를 통해 김현의 존재를 알렸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2001년 자신의 이복형인 김정일에게 처형당했다. 사람들의 추측으로 정통성을 위한 조치라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김현은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과 동갑이다. 그런데 2015년에는 처형당하지 않고 살아있으며 외교관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 김백연 (1987년 - ): 위에 나온 김송죽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아버지와의 나이차가 참으로 장대하며 동년배 내지는 1살 연하로 확정된 김여정의 고모다.
김일성 집안은 본디 개신교 집안이었다. 어머니 강반석이 장로회 장로 강돈욱의 딸이었다. 하지만 김일성 회고록인 세기와 더불어에서 부모가 기독교인임을 부정하고 김형직은 무신론자. 어머니 강반석은 삼촌어머니 현씨와 교회를 다녔지만 예수를 믿지 않았다며 기독교인 집안임을 부정한다. 김일성은 교회에 나가기 싫어했고 아버지가 안나가도 된다고 맞장구를 쳤으며 강반석은 심심해서 나간거라고 애써 기독교의 영향을 부정하며, 오히려 자기가 기독교인물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김일성은 독립운동가인 손정도 목사와의 인연을 친아버지처럼 여겼다고 과시했는데 이 사람은 대한민국 해군 초대 참모총장 손원일의 부친이다. 세기와 더불어에서 손정도 목사가 아들처럼 돌봐주었다고 했지만 손 목사 가정에선 이를 부정한다. 그저 안면만 있는 사이이며 손원일 제독과는 학년이 많이 차이나서 알지도 못했을 거라고. 다만 손목사가 김일성이 길림시절 다른 어려운 조선 청년들을 도와 주었을 수도 있고, 만년의 김일성이가 손 목사를 장문에 걸쳐 칭송했기 때문에 이런 인연으로 손제독의 형 손원태 박사는 미국 거주중에 김일성 에게 초청받기도 하고 사망 시 조문차 방문하고 방문기간에 생일을 맞은 손원태 박사의 생일잔치를 김정일이 직접 차려 주기도 했다.
북한이 1946년에 내놓은 공식 김일성 전기인 한설야의 인간 김일성에 따르면 1930년대에 한영애란 여자와 하얼빈에서 살림을 차린 적이 있었으나 난리통에 헤어졌고 이후 최희숙[171] 이란 여자와 살림을 차렸으나 일본인들이 김일성을 홧병 걸려 죽게 하려고 사로잡아서 눈알과 심장을 뽑아 죽였다고 김일성은 주장했는데 소련에 의해 우상화된 김일성의 전기인만큼 신뢰성은 낮다. 한영애는 김일성이 한반도 이북의 수괴가 되자 6·25전쟁 도중에 김일성을 다시 만나기 위해 이동하다가 공습으로 죽었다 한다. 이후 최희숙의 친구인 '키도 작고 얼굴도 못난' 여자인 김정숙과 결혼했다고 김일성은 구술하고 있는데 이후 이 한설야의 <인간 김일성>은 철저히 말소되었고, 그나마 연재처였던 정로 신문은 1999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책자 형식으로 편찬하여 통일부 북한자료센터에 비치중이니 큰맘 먹고 서초 국립중앙도서관 5층까지 가서 뒤져봐야 한다.
7. 소속 정당[편집]
8. 어록[편집]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1권, 제 1 장 비운이 드리운 나라에서
사령관님, 우리 항일 빨찌산도 해방전에 참전한 것으로 해 주십시오.
1945년 9월 하순,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군사위원회 위원 니콜라이 레베데프 장군을 처음 만나서 한 요청. # 이 요청은 그가 거절했지만 김일성이 권력을 얻고 난 후 김일성 자신이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끌고 한반도로 진공해 일본군을 몰아내고 북한을 해방시켰다는 황당한 역사왜곡이 이어졌다.
임금이 일제 때보다 높은 데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을 강요하여 나섰습니다.
1945년 12월 17일, '직업 동맹에 대한 지도에 관하여' 중. 평양 사동에서의 노동자의 동맹파업을 비난하며. 일제강점기에 일제에 대항하며 키운 노동자의 저항 역량은 김일성이 조선직업총동맹 같은 단체에 노동자들을 강제로 가입시키고 통제하여 없애버렸다.
조국통일이란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 소련에 가서 스탈린 동지를 만나 조선인민군의 공격허가를 받아오라.
1950년경, 6·25 직전 평양주재 소련대사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실린 김일성의 발언. #
국제정세도 우리에게 유리합니다. 제2차세계대전후 국제반동세력은 심히 약화된 반면에 국제민주력량은 급속히 장성강화되였습니다. 특히 작년에 중국혁명이 승리함으로써 세계의 정치적력량관계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중국혁명의 승리로 국제민주력량은 더욱 강화되였으며 국제반동세력은 심히 약화되였습니다. 중국혁명의 승리는 리승만괴뢰도당에게도 심대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지금 장개석도당은 리승만괴뢰도당을 도와줄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쏘련과 중국을 비롯한 세계의 수많은 나라 인민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을 받고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 개전 당시 김일성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비상회의에서 한 연설 《결정적인 반공격[174]
으로 무력침범자들을 소탕하자》에서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너도 책임이 있어!
1950년 11월 7일 피난 당시 만포진에 있는 소련 대사관 파티에서 만취한 김일성이 박헌영 부수상과 전쟁에 대한 이견으로 언쟁할 때 대리석으로 된 잉크병을 박헌영에게 던지며.
우리 인민군대는 전투를 계속하면서 부득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다. 인민군은 마지막 피 한 방울을 다 흘릴 때까지 용감히 싸우라.
10월 10일 한국군과 UN군이 파죽지세로 평양으로 진격해 오자 평양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기 전에 한 라디오 방송.[175]
천리마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인민은 쌀밥에 고깃국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겁니다.
남조선 인민들은 스스로 해방 투쟁을 할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무장공비를 지속적으로 침투시켜서 해방구를 만들고 봉기를 시켜야 한다.
사람이 건전한 인격을 갖추려면 다면적인 지식을 섭취해야 하지 않습니까. 학교당국은 어째서 새것을 한창 섭취해야 할 청년들에게서 세계적으로 공인된 선진사상을 연구할 권리마저 빼앗습니까. 맑스나 레닌의 저작들이 보통책방에까지 흘러나와 글을 아는 사람이면 다 읽는 판인데 유독 화성의숙에서만은 어째서 그런 책들을 못읽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2장 제3절 타도제국주의동맹.
우리가 해방직후에 조선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고 떠들었다면 누가 그것을 인정하였겠는가? 인민들은 우리의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사회주의란 것은 한 이부자리를 쓰고 살며 한 가마 밥을 먹고 사는 것이라고 까지 악선전하였기 때문입니다.[177]
이 모든 것을 고려하지 않고, 그때에 우리가 사회주의 구호를 들었다면 인민들은 무서워했을 것이며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회주의 혁명의 현단계에 있어서 당 및 국가사업의 몇가지 문제들에 대하여(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한 결론, 1955년 4월 4일) #
해방직후에 있은 일을 한가지 이야기하겠습니다. (중략) 나는 그때 청년들에게 우리가 나가는 길은 (중략) 조선식민주주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군중속에서 누군가 불쑥 《장군님도 공산주의자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자신이 공산주의자라는것을 숨기지 않았습니다.[178]
1974년 12월 1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근로자》 8페이지에서
소련을 모델로 삼는 것이 이 나라의 생활수준을 높일 수 있는지는 젼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김일성은 자기 백성들을 너무 잘 먹이는 것을 경계한 것처럼 보인다. 1977년, 동독의 에리히 호네커[179]
와 만났을때 그는 "생활수준이 높아질수록 인민들은 사상적으로 더 나태해지고 행동은 더 산만해진다"[180] 고 말했다. 이것은 베른트 쉐퍼가 말했듯이 "어떤 동독 지도자 입에 올렸을 경우 무사하지 못했을" 발언이었다. 발라즈스 스잘론타이는[181] "김일성은 일관되게 정권의 사회 통제력을 약화시키는 경제적 '조정' 보다 그렇지 않은 것을 선호했다"고 지적한다.
B.R. 마이어스 저, '왜 북한은 극우의 나라인가'중에서-
우리 행성에서 핵무기가 있는 한 핵전쟁의 위협은 가셔질 수 없으며, 인류는 항시적인 핵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핵무기의 시험과 생산, 배치를 금지하고 지금 있는 핵무기들을 축감하며 나아가서 모든 핵무기를 완전히 없애버려야 합니다.
남조선에서 미국 놈들을 몰아내야 하겠는데, 그놈들은 절대로 그냥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언젠가는 미국놈들과 다시 한번 꼭 벌여야 한다는 각오를 가지고 전쟁 준비를 다그쳐야 합니다. 동무들은 하루 빨리 핵무기와 장거리 탄도 미사일을 자체 생산할 수 있도록 적극 개발해야 합니다.
위에서는 모든 핵무기를 완전히 없애버려야 한다매
지금 일꾼들은 마치도 리순신(이순신) 장군을 우리 시대의 영웅보다 더 나은 위대한 인물로 묘사하려 하고 있다. 조국해방전쟁(6.25 전쟁) 때 희생된 사람들 가운데는 리순신보다 나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우리 일꾼들은 그런 사람들이 많은데도 리순신 장군만 자꾸 내세우고 있다.[182]
1967년, 김일성저작집에서 #
노동자들에게 생활에 빈 짬을 주지 말라.
중앙일보의 1995년 보도에서. 인민이 짬을 가지면 딴 생각을 품게 되므로 인민에게 끊임없는 사상교육을 해야 한다는 기조라고 한다. # 실제로 자는 시간을 포함하여 8시간만 쉬고 나머지 16시간은 일하면서 사상교육 받으라는 내용의 저 기사에서 언급되는 사회주의로동법 제33조는 지금도 여기서 검색하면 나온다.
내가 죽으면 나의 혁명동지들이 묻혀있는 대성산혁명렬사릉에 묻어달라. 그곳에서 내 옛 동지들과 함께하고 싶다.
1994년, 죽음을 몇 달 앞두고 아들 김정일에게 유언처럼 남긴 당부. 그러나 김정일은 이 유언을 무시했고, 체제 선전을 위해 아버지의 시신을 엠버밍했다.
남조선 당국자들은 우리의 호의를 무시하고 민족 단합이 아닌 외세와의 야합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소위 자신들을 문민정부라 칭하지만 역대 군부독재 정권과 조금도 다를바 없습니다! 있지도 않은 핵 문제를 물고 늘어지며 갈등을 충돌(동)질 하는 건 미국입니다![183]
1994년 생전 마지막 신년사 중.
동무들이 당의 결정을 아는가? 농사제일주의, 경공업제일주의, 무역제일주의, 세가지 제일주의인데 화학비료는 남흥화학하고 흥남화학을 생산정상화하도록 만들라. 비료만 생산정상화하라.
금년에 비날론은 계획된 대로 하고 명년에는 5만톤 만부하를 걸어야 돼. 그 다음에 세멘트를 우리가 정상화해야 돼. 세멘트를. 세멘트가 1 200만톤이란 말이야. 세멘트를. 난 세멘트를 만부하 역시 걸라는 게다.
허구 배무이(선박건조)를 많이 해야 돼. 배무이. 배무이, 그전에 내가 말한것을 백척을 맨들라(만들어라). 그 다음에는 전기를 앞세워야 돼. 내가 늘상 말하는것 같이 전력, 철도, 이거는 어떤고 하니 인민경제의 선행관(앞세워야 할 부문)이라고.
금속문제를 마저 해결해야 되겠어. 금속은 지금 어떤고 하니 우리가 구체적대책을 세워야 한다, 전기하고 금속만 풀면 우리 나라에서는 잘 살수 있다고, 우리가.
내가 이번에 카터 보고 회담할 때 지금 유엔에서 제재하겠다 하는데, 하려면 해라. 이때까지 우리는 제재받고 살았지 제재 안 받고 산적이 없다. 다 제재한다고 우리를. 일본놈들도 제재하지, 당신들도 다 제재하지. 우리 제재 받고 살았다. 제재받고도 이만큼 살아나가는데, 제재하려면 더 똑똑히 해라. 우리 못살 거 뭐이가? 그랬더니 '제재 취소하겠다.' 그래. 취소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나도 마찬가지다. 못사는가 봐라. 우린 더 잘산다.
1994년 7월 6일 생전 마지막 지시 中#(02:13부터)
9. 대중매체에서[편집]
9.1. 대한민국[편집]
1980년대 중반까지 김일성의 사진은 한국의 방송에서 거의 표현되지 않았다. 김일성을 묘사할 때에는 대부분 캐리캐처의 형태로 등장했으며 브리태니커나 뉴스위크지에서 김일성의 사진이 나올 경우 먹지로 처리하거나 찢어버려서 수입되었으며 해외 제작 6.25 전쟁 다큐멘터리의 경우 김일성의 육성 부분은 묵음으로 처리했다. 이런 것들이 풀린 시기는 1988 서울 올림픽 전후.
- 1961년작 영화 《붉은 두목》에서는 배우 백송(본명 김정순)이 연기했다.
- 1982년 KBS1 반공드라마 《지금 평양에선》에서는 손과 입만 나오는 걸로 처리되었으며, 영상자료실에 테이프가 많지 않아 배우는 불명이다. 문오장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있으나 그가 출연한 KBS2 토크쇼 《밤과 음악사이》 자료화면에 따르면 그는 김철만 역도 맡은 것으로 나온다.
- 1990년 KBS 실록대하드라마 《여명의 그날》에서는 배우 전광렬이 연기했다. <TV가이드> 1990년 10권 25호 기사 '탤런트 전광렬 북한 김일성역 최초로 맡았다(강기석 기자)'에 따르면 전광렬 본인은 1990년 6월 중순에 급히 만나자는 연락을 받아 방송사에 간 후, 담당 연출자인 이녹영 PD로부터 김일성 역을 맡는 게 어떠냐는 제의를 받자 막상 당황했지만, 이녹영 PD와 김교식 작가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받은 뒤에야 해당 인물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솟았다고 전했고, "김일성 연기로 화제를 모은 배우가 아닌, 극중 캐릭터를 소화해낸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하며 <지금 평양에선>의 김정일(김병기 분)과 같은 식상한 북한 캐릭터 연기를 지양하겠다고도 했다. 이녹영 PD 측도 "전광렬은 175cm짜리 키와 특유의 얼굴이 김일성의 30대 모습과 닮은 점이 있다"고 하며 과거 반공 드라마처럼 희화적인 모습을 지닌 배우를 쓰지 않고 외모가 비슷하며 비중있는 역을 소화해낼 만한 인재를 찾고자 TV는 물론, 연극, 영화계까지 뒤지고서야 전광렬을 찍은 거라고 한다.[184] 그러나 해당 작품은 외압성 조기 종영으로 끝났는데, 외압을 받은 이유는 김일성 미화 논란 때문이었다. 김일성은 처음에는 이상을 가진 항일 투사였으나 점차 권력을 장악하며 독재자로 타락하는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그런데 전광렬은 기존의 '혹부리 돼지' 이미지와는 다른 샤프한 미남이었고, 방영 당시에는 3당합당 이후의 여대야소 정국인데다 김일성 가짜설이 아직 대세여서, 김일성의 인간적인 모습을 묘사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든 경직된 시기였다. 드라마에서 박정희의 모습도 일본군 신분으로 비밀 광복군 활동을 하는 모습으로 나왔다.영상
- 1992년에 김진명이 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소설)에서 북한의 주석으로 등장한다. 남한 특사와 목욕탕 회담까지 할 정도로 정정하고 대국적인 인물로 나온다.
- 1993년 남파간첩 출신 귀순자 이항구[185] 가 <소설 김일성>을 출간하였다.
- 1995년 MBC 8.15 특집극 《최승희》에서는 배우 오현섭이 연기했다.
- 1998년 불교만화가로 유명한 최병용 화백이 그린 삼성초등학습백과 한국현대사편에서 데라우치 마사타케에 이은 주요 악역으로 등장. 스탈린에게 형님이라고 아부하면서 6.25 전쟁을 일으키면서 부산에서 생일 기념 미역국을 먹겠다고 주접을 떨다가 유엔군 개입으로 개박살나고 모택동에게 살려달라고 울며불며 빌어 중공군을 데려와 살아남는다.
- 굽시니스트의 2차 세계대전 만화에 코믹하고 무능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웹버전과 출판버전 둘 다 나오는데 웹버전은 지프차 타고 전장에서 도망치다가 홍범도 장군한테 관광당하는 내용이며, 출판버전은 독일군 포로로 잡혔는데 자신이 북쪽의 실권자라면서 "살려주면 후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허풍을 친다. 홍범도 장군이 구해주면서 페어로 다니는데, 마지막에 홍범도가 버려진 정교회의 성당에서 봉인이 풀린 라스푸틴의 고환을 재봉인하기 위해 김일성의 목 뒤에 고환을 박아버려 혹이 생긴다. 시간이 흘러 김일성이 죽기 직전 김정일에게 자신이 친모임을 고백한다.스스로 모태신앙이라고 자부해서 공산주의자인데도 기독교와 인연이 깊다.
-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대체역사소설에서는 중일전쟁이나 독소전쟁 대목에서 짤막하게 나오는 경우가 많다. (보통 현대 한국인 출신인) 주인공이 손을 써서 영문도 모르고 살해당하거나 혹은 주인공으로 인한 역사개변으로 원역사에서의 여러 가지 기회가 사라져서 어디 빌붙을 데도 없는 한심한 꼬락서니가 되는 경우가 많다. 주로 웃음벨로 활용되는 편.
-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 : 간도특설대가 더 빠르게 만들어지면서 마적으로 토벌당해 사살된다.
- 한국 독립 전쟁 : 일본군에게 정보를 누설하여 일본군이 홍범도를 죽이게 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지나가던 일본인 포로를 풀어주고 홍범도 위치에 대한 떡밥을 쥐어줘서 홍범도를 어떻게든 일본군 손에 죽이려고 발악한다. 무다구치 렌야에게 잡혀 고문당한다.
- 고종, 군밤의 왕 : 주인공이 미래를 생각하여 김일성과 마오쩌둥을 경고하는 발언을 했는데 작중 사탕 달라는 5살 어린애 모습으로 등장한다.아들 김정일이 영화감독이 된거 생각해보면 그냥 평범한 삶을 산듯하다.
- 조선, 혁명의 시대 : 대한제국이 존재하는 세계관이라서 그런지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로 나오며 펠릭스 유수포프 공작에게 러시아 정교의 축복을 받으며 목사가 될것이라는 암시가 있다.[187]
- THE LAST EMPIRE에서는 무자비한 대한제국군 장교로서 몽골을 점령하고 지배한 것으로 나왔으나 패치이후 김경천으로 변경되었다.
9.2. 외국 작품[편집]
외국 작품에는 특이하게도 밈처럼 취급되어 한국이 나오면 자주 언급된다. 오죽하면 카이저라이히 제작진들은 김일성은 뭐하고 있냐는 질문에 알거없다면서 대신에 다른 김씨인 김구, 김원봉, 김석원, 김홍일이 대신 등장한다며 제발 그만 찾으라고 할정도다.
- 스웨덴에서 제작된 2차세계대전 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는 공산 한국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188]
- The Red Order: First Days of Eurasia에서는 조선인민공화국에서 소련의 사주를 받고 쿠데타를 준비중 부하인 박정희[189] 가 통수를 치는 바람에 제주도로 도망가다 잡혀서 죽는다. 이때문에 4.3사건이 벌어지고 조선인민공화국 정치가 크게 흔들리게 된다.
- 스웨덴 작품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서도 잠시등장하여 주인공에게 속은 김정일을 때린다.
-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는 아무르 지역에서 동북항일연군을 이끌고 있으며 일본군의 추적을 받지만 놀랍게도 끝까지 살아남는다.
- Equestria at War에서는 킴볼 바킹선[192] 이라는 이름으로 패러디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을 모티브로한 나라인 그리포니아 제국의 제후국중 브론즈힐 백국의 좌익지도자로 등장하는데 여기서도 주체 사상을 설파하지만 특이하게도 고향인 브론즈힐 백국이 찐 근왕파들만 모인곳이라서 자신이 아니라 황태자인 그로버 6세[193] 가 수령이 되어야 한다는 근왕공산주의[194] 를 설파하며 자신은 섭정으로 그로버6세를 주체사상을 구현할 지도자로서 교육하고 놀랍게도 때가 돼서 순순히 권력을 이양하고 물러난다. 현실 인물과 달리 그로버6세가 살아있다면 황제를 구하려다가 갈비뼈가 부서져도 충성을 다하는 충신으로 등장한다. 만약 그로버6세가 죽는다면 아예 도시하나를 그로버6세의 무덤으로 만들고 영구보존시키는 미치광이 근왕파 컨셉.#
9.3. 북한[편집]
북한 영화에서 김일성을 다룬 유명한 작품 중엔 1980~1987년까지 만든 연작영화 <조선의 별>, 1985년작 북-소 합작영화 <영원한 전우> 등이 있는데, 상당수 내용은 김일성의 항일 무장투쟁과 정권 수립 준비과정 등이며 1993년까지 관련 영화들은 김정일이 만든 '백두산 영화창작단'이 제작했다. 의외로 김정일이나 김정은과 외모가 비슷한 배우가 젊은 날의 김일성으로 나오는데, 대표적인 예가 배우 강덕이다.
김일성 역할을 한 배우는 '1호 공훈배우' 대우를 받으면서 평생 그것만 해야 하고 대단히 경호를 잘 해주는데, 김일성 가족 역을 한 배우들도 마찬가지다.[195] 2012년 러시아 방송에서 한 의사가 김일성 배역 연기를 위해 성형수술도 했다고 한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박정희 전문 배우로 유명한 재일교포 출신의 배우도 이 정도 대우를 받지만 그 사람은 다른 역도 꽤 나왔다.(이하 2014년 KBS2 《남북의 창》 보도내용 참고)
10. 별명 및 호칭[편집]
10.1. 부정적 호칭[편집]
이하 내용은 1994년 7월 11일 한국경제신문 기사와 12일 한국일보 기사를 참고함.
- 남한
- 북한: 일반 주민들 관점의 경우, 특히 김일성이 완전히 북한을 장악하지 못한 해방정국 시기에는 쓰인 명칭으로 북한 언어전문가 서정범 경희대 명예교수 등이 위 기사에서 언급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권력 장악이 마무리 된 후 반대파가 추방된 평양과 같은 곳은 꿈도 꾸지 못한 일이라고 한다. #
- 골든 베이비: 북한 주재 서방국가 외교관들이 김일성 동상이 금박으로 칠해진 것을 비꼬는 호칭.
- 김마두: '김일성은 마적단 두목'의 준말.
- 조선 히틀러: 나치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같은 독재자란 뜻. 둘 다 북한 집권 초기에 은밀히 입에 오르내렸다.
- 양다리 동무, 왔다갔다 동무: 중-소 분쟁 때 북한이 등거리 외교를 할 당시 붙여진 호칭.
- 왕포쟁이, 후라이 6단, 대포쟁이: 김일성은 입만 열면 거짓말만 한다는 주민들의 불만이 내포된 호칭들.
- 큰곰, 너구리, 메사구(입이 큰 메기) 등: 김일성의 외모에서 착안함.
- 송지떡(소나무 껍질떡) 장군, 죽장군 등: 북한 주민들을 제대로 먹여주지 못한 데서 오는 반발심으로 붙인 것이다.
- 1호 대상자: 숙청 제1호라는 뜻
- 김인백 동무: '김일성은 인간 백정'의 준말.
- 김피내: '김일성은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명수'에서 따온 준말.
10.2. 북한 입장에서[편집]
위 기사에서 언급된 국방연구원 북한연구학자들의 견해를 바탕으로 했으며, 옹호 목적으로 한 게 아니다.
- 김일성장군: 1945년 귀국 후 처음 불려짐.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이름을 더 큰 크기로 굵게 쓴다.
-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인민위원회 위원장: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민 환영대회 때 불려짐.
- 내각수상, 김일성수상: 1948년 북한 정권 수립 뒤 불려짐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1966년 직위 신설 후 사용됨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1972년 직위 신설 후 사용됨
- 수령: 정권 초기부터 일컬어짐. 1956년, 스탈린 격하에 놀라 일시 중단했으나 8월 종파사건으로 반대파를 모두 숙청한 이후부터 다시 사용 시작. 1970년대 중반까지는 '경애하는 수령'이 많이 쓰이다가 이후부터는 '위대한 수령'이 많이 쓰이고 있다.
- 대원수: 1992년 대원수 계급을 받으면서 사용됨
11. 관련 사건사고[편집]
- 김일성 가짜설
- 1986년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
- 김일성 암살설
12. 관련 문서[편집]
13. 관련 연구[편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일성' 항목
- 유순호, 『김일성 평전』(전 3권), 지원출판사. 2017~2018.
- 표도르 째르치즈스키(이휘성), 『김일성 전기』, 한울아카데미,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