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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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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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일보 보도 원문(한글화 및 띄어쓰기 교정)]

김일성 총 맞아 피살

휴전선 방송 "열차 타고 가다 총격 받았다"

전방 북괴군 영내에 일제히 반기[1]

올려

"군부 중심 심각한 권력 투쟁 진행 중인 듯"

전 전선에[2]

업적 찬양 방송..."김정일을 수령으로" 내용도 엇갈려

북괴 김일성이 총 맞아 피살됐거나 심각한 사고가 발생, 그의 사망이 확실시된다. 휴전선 이북의 선전 마을에는 16일 오후부터 반기가 게양되었으며 휴전선의 북괴군 관측소 2개소에선 이날 「김일성이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고 했고 4개소에선 「김정일을 수령으로 모시자」는 대남 방송을 했다.

또한 북괴를 방문 예정이던 몽고 등의 국가 원수 일정이 취소되었으며, 통상 김일성의 이름으로 외국에 보내던 메세지가 중앙위원회 이름으로 바뀌었다.

판문점에도 반기가 게양되었으며, 전방의 북괴군 영내에도 반기가 게양돼 있고 전 전방에 걸쳐 북괴군은 6.25를 일으킨 장본인인 김의 40년 업적을 찬양하는 방송을 하고 있다.

...여당의 한 관계자는 17일 오전 기자들과 만나 「오늘 오전 9시 45분 현재 확인 결과 관계 기관의 판단으로는 김일성의 사망이 거의 확실한 것 같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그 근거로 ▲지금 전방의 북괴군 영내에는 조기가 게양돼 있고 ▲판문점의 북측 지역에도 조기가 게양돼 있으며 ▲휴전선 일대의 대남 방송이 김의 업적을 계속 방송하고 있음이 아군 GP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어제(16일)에는 서부 전선 쪽의 북괴군 GP에서 「김이 열차 사고를 당했다」는 방송을 했고 ▲오늘은 전 전선에 걸쳐 김의 업적이 방송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 시간 현재 평양 방송 등 북의 공식 기관은 일체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이날 정부의 한 소식통은 김일성 신상의 사고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근거로 ▲현재 판문점의 북측 건물에 반기가 게양돼 있고 ▲휴전선의 북괴군 GP 2개소에서 「김이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4개소에서는 「김정일을 수령으로 모시자」는 내용을 대남방송을 통해 밝혔다는 사실 등을 제시.

이 소식통은 『따라서 김일성이 사망했거나 아니면 쿠데타에 의해 김이 인질로 잡혀 있는 상태에서 북괴군 내부가 상호 세력 규합을 하고 있는 등 권력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고 분석했다.

이 소식통은 『그러나 휴전선 부근에서의 북괴군의 특별한 병력 이동은 관측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1986년 11월 17일 일요일자 조선일보 호외



1. 개요
2. 전개
3. 북한의 공작?
4. 여담



1. 개요[편집]


KBS 영상실록 1986년 편의 관련 사건 영상

1986년 11월 16일 조선일보가 일으킨 사건이자 한국 언론계에 길이 남을 흑역사. 당사자였던 김일성은 7년 7개월 후인 1994년 7월 8일에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에 언론인 정운현은 1997년 저서 <호외, 백년의 기억들>에서 이 오보를 헤이그 밀사 사건 당시 대한매일신보이준 열사 분사 오보에 이은 한국 언론사 최대 오보로 뽑았다.


2. 전개[편집]


11월 14일 오산 공군기지 산하 미군 통신정보부대(NSA) 감청소에서 상황 근무를 서던 한 미군 병사가 이북에서 '임은 가시고...'라는 멘트와 함께 무거운 분위기의 음악이 흘러나오자 이를 장송곡으로 착각하고[1] 방송에서 '김일성 주석이 가셨던 길을 김정일 지도자가 따라가시고 있다.'라는 찬양시에서 가셨다는 표현을 김일성이 죽었다고 착각하면서 일어났다. 그 병사는 한국말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미묘한 뉘앙스가 서툴렀기에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그는 곧바로 미국 본토 NSA 본부에 확인 요청을 했는데, NSA의 상황병이 백악관CIA에 '확인을 요하는 정보'를 의미하는 두 번째 코드가 아니라 '확인 필(확인을 마친 정보)'을 의미하는 첫 번째 코드로 잘못 전송하는 두 번째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게다가 주일미군 사령부와 한미연합사령부에도 마찬가지로 김일성 사망이라는 메시지가 송신되고 말았다.

이를 바탕으로 11월 15일 일본 공안조사청은 "김일성이 암살됐고, 그를 암살한 군인들이 중국으로 도피했다"는 첩보를 입수했고, 이 소식이 증권가와 외교가에 전해져 관심을 끌던 중, 11월 16일 조선일보는 '북괴 김일성이 총에 맞아 피살됐거나 심각한 사고를 당했다'는 내용의 호외를 뿌렸다. 이 호외 기사는 세계적인 뉴스로 주목받았으며 조선일보는 처음엔 피격설이었으나 이틀 뒤인 18일부터 김일성 피격 사망이라고 단정해 보도한다. 신문 12면 중 7면을 김일성 사망 사건 기사로 채웠으며 <주말의 동경급전... 본지 세계적 특종>이라고 자뻑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당일 11월 18일 오전 10시 몽골 인민혁명당 서기장 잠빈 바트뭉흐를 영접하기 위해 김일성이 평양국제비행장에 나타나면서 세계적인 오보로 전락하고 만다.

암살설 전파 당일 전두환 대통령은 비상회의를 열었음에도 사망설에 대해 의심했으나, 다음날 오전 9시 국방부가 김일성이 총격으로 사망했다는 휴전선 전파 방송이 있었다고 발표해 김일성 사망설을 반쯤 공인하고 만다. 당시 정권은 무려 1,000여명의 구속자를 낸 10.28 건국대 항쟁[2] 직후인데다가, 국민들 사이에서 불붙기 시작한 직선제 개헌 운동 속에서 정권 유지를 위한 떡밥으로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는지 확인되지 않은 설을 그대로 공식적으로 풀어버렸다. 결국 군과 정부, 여당, 그리고 국민 모두가 낚인 꼴이 되고 말았다. 단 국방부 입장에서는 분명 '방송이 있었다'라고만 발표했음에도 이를 언론들이 확대 재생산했단 측면에서 억울한 측면이 없는 건 아니나, 정확한 확인을 거치지 않은 정보를 유포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면하긴 어렵다. 또 이기백 당시 국방부장관은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장군들의 이야기> 2권에서 야당 총재가 정재철 정무 제1장관으로부터 브리핑 받을 때 살을 덧붙여 설명했다고 증언했다.

다만 정보기관이었던 국가안전기획부 여러가지 전후 사정과 북한의 동향을 분석한 결과, 김일성이 암살됐다고 보기에는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다며 더 신중하게 이 문제에 접근할 것을 주장하며 상황을 좀 더 지켜볼 것을 제언했으나, 국방부나 언론 등의 기관을 통해 이미 정보가 새 버린 상황이라 이는 묵살되었다고 한다. 사망설을 사실상 공인해 버린 건 국방부였고,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안기부 측은 불만을 표했다.


3. 북한의 공작?[편집]


결국 20일에 국무총리였던 노신영은 기자회견을 갖고 이 오보가 '북한이 행한 고도의 책략이었다\'고 발표했다. 정부의 상황 판단 미숙에 대한 사과가 아닌 '이게 다 북괴 때문이다'는 식의 발표였고, 이 설이 어디에서 나왔고 어디부터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었다. 처음 오보를 낸 조선일보도 독자들에게 사과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수령의 죽음까지 고의로 유포하면서 그 무엇을 노리는 북괴의 작태에 서방 언론들은 정말 놀라고 있다. 정상적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집단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세계적으로 알린 셈이 되었다."고 강변했다. 훗날 이기백 당시 국방부 장관은 암살설 최초 유포자였던 미군 병사에 대해 미국 정부에 항의하려 했지만, 당시 국군 정보력이 미국에 의존해서 그런지 더 이상 항의조차 못하고 '북한의 대남술수 때문이다'는 식으로 해명해야 했다고 전했다.[3]

하지만 북한은 이 사건을 유포한 적이 없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바탕으로 유포한 건 조선일보였다. 아무리 북한이라지만 자기네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지도자 생사 문제를 갖고 장난을 치겠는가. 정말 적반하장격 주장이다. 그야말로 '(北)' 치고 장구 친 셈. 덕분에 김일성만 졸지에 오장원제갈량이 되었던 것이다. 조선일보는 그래 놓고도 오보 다음날 '김일성 살아 있다'고 정정기사를 썼다. 솔직하게 '살아 있다'라고 쓰는 것과, '(이제 와서 다시 보니 그땐) 살아 있었다(…고 하네? 할 수 없지 뭐. 근데 지금은 그새 또 죽은 상태여서 우리 신문 말이 맞을 수도 있잖아)' 중 어느 문장이 더 책임감 있게 느껴지는지 읽어 보자.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은 조선일보가 일으킨 사고가 확실하지만 국방부를 비롯한 대한민국 정부의 책임도 크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는 보도지침이 기승을 부리던 시대이며 조선일보의 기사가 정부의 심리전의 일환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조선일보의 보도를 확인한 국방부의 발표 역시 책임 문제를 피하기 어렵다. 그나마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려는 노력을 했던 안기부 역시 북한의 주장에 의심을 표하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긴 하나 결국 이렇게 문제가 비화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하기는 힘들다.

다만 이 사건 당시 일본 정부는 어렴풋이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후일 서울신문의 한 기자가 이 사건 파악에 대해 일본측 관료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일본측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이 남한 국방부에 의해 처음 발표된 직후 북한 전 지역의 통신이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고 한다. 이것은 북한 전역의 통신량을 감청 및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당시 몽골의 울란바토르와 북한 평양 사이에서 딱 한 건의 통신이 있었다고 한다. 통신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이 당시 울란바토르의 북한 대사관도 김일성의 생사 여부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울란바토르의 북한 대사관: 예정대로 진행합니까?

평양의 답신: 그래.

몽골측의 북한 방북이 이루어진 사실에 미루어 보면 이 통신의 내용은 북한 입장에서의 리얼리티를 더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울란바토르의 북한 대사관 : (남조선 언론을 보니 수령님께서 서거하셨다는데, 그렇다면 몽골측의 방조(방북) 일정도 취소해야 할것 같습니다만) 예정대로 진행합니까?(수령님께서 살아계십니까?)

평양의 답신: 그래(수령님께선 살아계시니 예정대로 진행해라).

일본 측에서는 이 통신 감청 내용을 바탕으로 김일성의 생존을 추측했고 얼마 뒤 이는 사실로 드러나게 된다.


4. 여담[편집]


  • 중앙일보는 당시 메이저 신문 중 유일하게 <김일성 피살설(說)>이라고 한 글자를 덧붙임으로써 가까스로 오보를 면했다. 당시 편집부는 위험을 무릅쓰고 '설'자를 고집해 2판도 그대로 나갔고, 3판 마감시간 임박 시기에 모스크바발 AFP 외신으로 바트뭉흐 몽골 공산당 서기장이 김일성을 만나러 방문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망설 기사 밑에 <타스통신, 김의 생존 시사>란 6단 컷짜리 기사를 실었다. 김일성 생존 확인 후 조시행 편집국 부국장은 1987년 8월에 한국기자상(편집부문)을 수상했다.[4]

  • 이 사건은 당시 국민들에게 안주거리가 되어 소주 매출이 급격히 올라 사회에 큰 영향을 남겼는데, 특히 주류업계에 따르면 소주 매출이 오보 당일인 16일과 오보임이 밝혀진 18일 두 차례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16일은 축배였고 18일은 고배였을 듯.[5]

  • 조선일보는 이후에도 북한은 김일성이 죽었다고 거짓 보도하는 알 수 없는 행태를 벌이고 있다고 적음으로써 오보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참으로 빠르게도 34년 만인 2020년 3월 4일자 신문에서 100주년을 맞아 오보를 인정하고 정정했다. ##

  • 2005년 MBC 특별기획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살짝 언급된다. 당시 안기부장으로 있으면서 이런저런 실책을 하던 장세동을 비난할 의도로 이 오보 사건이 언급되었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6 18:38:13에 나무위키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북한식 신스 음악은 서구권에서 듣기에 기괴하거나 우울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주로 지도자에 대한) 그리움을 주제로 한 노래들이 특히 이렇다.[2]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조. 뭐 이 시절에 규모만 작다뿐 비슷한 사건이 비일비재했다.[3] 원 출처: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장군들의 이야기 II: 장군들의 비망록> '이기백 장군 편' - 김문 저. 별방. 1998. p52.[4] 출처: <중앙일보 삼십년사(1995)> p373.[5] 원 출처: <격동의 현대사를 주도한 장군들의 이야기 II: 장군의 비망록> - '이기백 장군' 편(김문 글). 별방. 1998. p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