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철

덤프버전 :

파일:다른 뜻 아이콘.sv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동명의 북한 관료에 대한 내용은 김일철(테크노크라트) 문서
김일철(테크노크라트)번 문단을
김일철(테크노크라트)#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 {{{#!html }}}에 대한 내용은 문서
#s-번 문단을
#s-번 문단을
# 부분을
#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무력부장
김일철
金鎰喆|Kim Il Chol


파일:김일철.jpg

출생
1929년? 1930년?
평양?
국적
[[북한|

북한
display: none; display: 북한"
행정구
]]

군 복무
조선인민군 육군
조선인민군 해군
최종 계급
차수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2.2. 해군사령관 시절
2.3. 인민무력부장 및 제1부부장 시절
2.4. 숙청과 잠적
3. 사망과 복권
4. 경력
5. 여담



1. 개요[편집]


북한의 군인, 정치인.

해군사령관, 인민무력부장,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김정일 시대의 대표적 군인이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이력[편집]


북한 발표에서 2010년에 80세였으니 1929년, 혹은 1930년생으로 추정된다. 초급간부 양성을 위해 설립된 보안간부훈련소에 1947년 입교하여 해군 간부로 육성되었으며, 졸업 후에는 원산기지에 배치되어 6.25 전쟁 시기에도 지휘관으로 활약한 조선인민군 해군의 창군 원로 중 한 사람이다.

파일:external/ncache.ilbe.com/2406457755a95f5268778e1ffea4ef53.jpg
좌관급 군관 시절, 조선인민군 해군정복을 착용한 모습.

전후에는 만경대혁명학원을 간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만경대혁명학원은 대단한 고등교육기관이 아니라 중학교, 고등학교에 가까운 곳으로 애초에 20대는 나이 많다고 받아주지도 않는 곳이다. 따라서 전후에 만경대혁명학원에 갔다는 정보는 사실이 아닐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거나 1962년 소련 해군대학에 유학을 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귀국 후 해군사령부 부참모장(1968년), 참모장(1971년), 부사령관(1974년)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했다. 특히 1968년 해군사령부 부참모장으로 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을 진두지휘하여 북한 내에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이로 인해 1970년대에 후계자 수업을 받던 김정일의 해군학 교사 및 보좌역을 맡기도 했다. 이로 인해 김정일의 각별한 신임을 얻게 되어 한층 더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2.2. 해군사령관 시절[편집]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 및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82년에 중장에 진급, 4월에 최현 장의위원, 1984년 4월에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후 상장 계급[1]으로 해군사령관을 역임했으며, 1992년 4월 23일, 최고사령관 명령 0024호에 따라 태병렬, 조명선, 김룡연, 리종산, 리하일, 리병욱, 리봉원, 리동춘, 장성우, 조명록, 김영춘, 김봉을, 전재선, 박기서, 김리창과 함께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1995년 10월 7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조선로동당 창건 50주년을 기념하여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7년 4월 13일, 최고사령관 명령 0088호에 따라 전재선, 박기서, 리종산과 함께 차수로 진급했다. 뼛골까지 육방부조선인민군에서는 대장에서 차수로 진급하면 군종이 육군으로 변경되는데 이에 따라 김일철도 차수가 되면서 육군으로 군종이 변경되었다. 위의 차수 진급 후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조선인민군 육군 정복 차림이다.

2.3. 인민무력부장 및 제1부부장 시절[편집]


1995년 7월, 김봉률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김광진 장의위원을 지냈다.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 김광진이 사망하면서 4월에 해군사령관을 김윤심에게 물려주고 제1부부장으로 이동했으며 그 직후인 1997년 4월 13일, 최고사령관 명령 88호에 따라 차수로 진급했다.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9월 7일, 국방위원장 명령에 따라 최광 사후 공석이었던 인민무력부장 직함이 인민무력상으로 개편, 초대 인민무력상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진 알 수 없으나 2000년에 인민무력상이 인민무력부장으로 다시 환원되면서 2009년까지 10년간 인민무력부장으로 재임하게 된다.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2000년에는 남북국방장관회담의 북측 대표로 제주도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남북국방장관회담에서 만찬을 대접받으며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통일을 위해 평생동안 애쓰신 김일성 동지의 영면을 위해, 김정일 동지의 만수무강을 위해, 김대중 대통령의 건강을 위해, 조성태 국방장관의 건강을 위해,그리고 6.15 남북공동선언을 받들어 이번 회담에서 더 큰성과를 안아올 것을 기원하며 축배를 제의한다"라고 하였으며, 축배를 들때마다 기자들이 사진을 찍어대서 "저 분들이 요구하는 것은 벌이구먼"라고 농담을 했다. # 이때 옥돔찜을 비롯한 고급요리를 대접받았는데 소문에 따르면 이때 김일철이 장군님에게도 대접하고 싶다고 좀 싸달라고 했다는 말이 있는데 교차검증되는 기사가 없는 걸 봐서 와전이나 우스갯소리로 보인다. 이때 백록담에도 가보고 싶어했으나 시간이 없어서 들르지 못해서 아쉬움을 토로했다. #

하지만 이후 묘하게 직위가 낮아졌는데 2003년 8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는 재선되었으나 최고인민회의 11기 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서 위원으로 강등당했다. 2005년 10월, 연형묵 장의위원, 2008년 10월, 박성철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이후 2009년 2월 11일, 총참모장 김영춘이 국방위원회, 중앙군사위원회 공동결정에 따라 인민무력부장으로 보임해오면서 다시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으로 물러났다. 2009년 3월, 홍성남 장의위원을 지냈고 2009년 3월, 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최고인민회의 12기 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에 재선되었다. 2010년 4월, 김중린 장의위원을 지냈다.

2.4. 숙청과 잠적[편집]


그러다가 2010년 5월 13일, 국방위원회 결정 제06호를 통해 고령을 이유로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었음이 방송을 통해 알려졌다. 북한에서 내세운 이유는 정년인 80세가 찼으므로 은퇴한 것이라는데[2] 정작 역사상 북한에서 늙었다는 이유로 고위급 엘리트를 이런 식으로 쫓아내는 일은 없다. 농근맹이나 사로청같은 근로단체들의 수장의 경우에는 고령을 이유로 전임자가 해임되었음이 가끔 보도되긴 하지만 김정일 시대 국방위원회 위원들급의 고위직 인물들은 정말로 고령으로 은퇴한다고 해도 조용히 물러나거나 최고인민회의 혹은 당대회,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예우받으면서 퇴장한다. 북한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해임을 보도한 인물들은 대부분 숙청된 인물들이었다. 그나마 김정은 시기에는 고령으로 인한 은퇴가 일반적이 되었으나 김정일 시기에는 조명록의 예에서 보듯이 종신직이 흔했고, 세대교체가 일반화가 된 김정은 시대에도 늙었으니 필요없다는 식의 불명예스러운 공개적 해임은 생각할 수 없었다.[3]

강철환이 2015년 7월 북한지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분노한 김정일이 남한을 길들이기 위해 대청해전을 기획했지만 이것이 참패로 끝나고 해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자 정찰총국에 이를 만회하기 위한 복수극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정찰총국장 김영철은 천안함 공격을 제안했고 이에 김일철은 성공할 가능성도 낮고 남조선의 보복을 불러올 수 있는 무모한 작전이라고 반대했으나 정작 천안함 폭침이 성공하자 김정일은 김일철을 패배주의자로 몰아서 숙청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3. 사망과 복권[편집]


해임 이후 거취에 대한 추가적인 소식은 없었는데, 2017년에 방영된 <위대한 동지> 5편 김양점 파트에서 김일철이 김정일, 조명록과 함께 현지지도를 나가는 장면이 꽤 비중있게 재활용되었다. 역적 취급까지는 아닌 것으로 보이나 2022년 8월 25일자 조선중앙통신 기사 <우리 혁명무력의 핵심골간을 키운 위대한 동지애의 품>에서 김정일의 승계를 보위한 웬만한 장군들은 다 언급됐음에도 김일철은 일언반구도 되지 않는 등 그냥 은퇴해서 년로보장 받으면서 조용하게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2020년 6차 전국로병대회에 김일철로 추정되는 노인이 차수 계급장을 달고 참가한 것이 보도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2023년 9월 14일, 애국렬사릉에 시신이 안장되었다. 조선중앙통신은 "전 인민무력부장 김일철동지와 조선인민군 장령이였던 김석창동지,리봉죽동지는 오랜 기간 혁명의 군복을 입고 수령보위,조국보위의 제1선초소에서 투쟁함으로써 당과 인민의 기억속에 영생하고있다."라고 짤막하게 그를 언급하는 등 복권은 됐어도 대접 자체는 그냥저냥인 것으로 보인다. 김일철의 경우 묘비는 공개하지 않고 그의 영정사진과 훈장 및 유가족들만 보여주었는데, 따라서 정확한 생일과 기일, 안장명은 알 수 없으나 조선중앙통신에서 인민무력부장으로 소개한것을 봐서 인민무력부장 직함으로 안장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같이 묻힌 인물들이 2021-2023년 사이에 사망한 인물들이므로 대략 그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경우 주요 인사들이 사망하면 바로 알리지 않는 경우가 많아 언제 사망했는지 정확한 날짜를 알기 힘들다.

4. 경력[편집]


임기시작
임기종료
비고
조선로동당 6기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1980년 10월 14일
2010년 9월 28일?
6차 당대회에서 선거
3차 당대표자회에서 소환?[4]
조선인민군 해군사령관
1982년 6월?
1997년 4월?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으로 조동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
1997년 4월
1998년 9월 7일
인민무력상으로 승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무력상/인민무력부장
1998년 9월 7일
2009년 2월 11일
국방위원회 명령에 따라 임명
인민무력부장으로 직함 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무력부 제1부부장
2009년 2월 11일
2010년 5월 13일
숙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0기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1998년 9월 5일
2003년 9월 3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11기 1차 회의에서 퇴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0, 11, 12기 국방위원회 위원
1998년 9월 5일
2010년 5월 13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11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2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숙청


5. 여담[편집]


  • 김정은 시대에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진 국가계획위원장 김일철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동명이인이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6 18:45:22에 나무위키 김일철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북한 해공군은 규모가 작아 대장이나 상장이 참모총장에 해당하는 사령관에 보임된다. 차수 이상 계급으로 진급하더라도 전부 인민무력부 등 해공군사령부보다 상급 부대에서 근무하며, 옷도 지상군과 같은 것을 입는다. 결국 조선인민군 군복 복제에는 수관급 장성은 육군밖에 없다. 해군 차수나 공군 차수도 계급이 차수가 되면 무조건 육군 제복을 입게 된다.[2] 임밀히 말해서 북한 년로자보장법에 따르면 북한의 정년은 55세다. 다만 정년이 넘은 사람들도 본인이 원하면 더 사업할 수 있다고 되어있다.[3] 이런식으로 날아간 케이스가 김정은 시기에 신병을 이유로 해임된 총참모장 리영호가 있다.[4] 2010년 5월 13일에 이미 소환되었을 가능성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