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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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북한의 제2대 최고지도자, 독재자.
김일성의 장남이자 김정은의 아버지. 1972년 김일성에 의해 후계자로 낙점되며 정치 일선에 등장하였다. 1970년대 부터 이미 김정일은 실권자이자 2인자로 군림했다. 1991년에는 북한군 최고사령관의 자리에 올랐으며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제2대 최고지도자 자리에 올라 북한을 통치하였다.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 3년 간 ‘김일성의 유언대로 북한을 통치한다.‘를 기조로 삼은 유훈통치를 했으며, 1998년이 되자 명목상 국가수반인 김영남을 내세우고 자신은 그 뒤에서 실권을 잡은 채로 그림자 권력을 행사 했다.
고난의 행군으로 불리우는 북한 최악의 기근과 각종 대북제재로 흔들리던 북한 체제를 심화조 사건과 선군정치를 위시로 한 공포정치로 유지시켰으며, 외교적으론 미국을 직접 상대하며 미국으로부터 핵보유국의 지위를 인정받으려고 했다. 이러한 외교 기조는 김정은 시대에도 변함이 없는 것으로 평가 받는다.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통해 대북지원을 계속 받으려고 했다.
대남정책은 화전양면전술을 유지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김대중 그리고 노무현과 두 차례 남북정상회담을 가졌으며 남북화해무드를 이용해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으로 외화를 유치했다. 그와 동시에 대남 도발을 통해 남한을 위협하고 체제를 유지하려고 했으며, 그가 일으킨 대남 도발에는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제2연평해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전이 대표적으로 손꼽힌다.
경제적으론 제한적으로나마 개방 정책을 취하기도 했고 그 덕에 신의주와 라선시가 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전면적인 개혁개방이 북한 체제를 위협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고 근본적으론 폐쇄 정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한 대북제재를 우회해 불법적인 루트로 입수한 검은 돈을 사치품이나 핵과 미사일 개발에 집중 투자했다. 김정일의 통치자금은 국가 경제를 회복시키거나 굶주린 북한 주민들을 먹여살릴 식량을 구매하는데에는 거의 투자되지 않았다.
북한 주민들은 더 이상 김정일과 당이 자신들의 삶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배급제에 의존하지 않고 장마당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지배기간 동안 북한 경제의 시장화가 촉진되었다.
또한, 김정일의 지배기간 동안 외부 문물들이 북한 내부에 유입되면서 한국 영화, K-POP, 한국 드라마와 같은 남한의 대중매체들이 북한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외부 문물을 접한 북한 주민들은 더 이상 북한 당국의 선전을 믿지 않게 되었으며, 북한 당국의 각종 억압적 단속 정책에도 외부 문물들은 북한 주민 사회에 계속 유입이 되었다. 이는 현재의 김정은 시대에도 변함이 없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생전 조선로동당 총비서, 북한 국방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등의 직책을 겸임했고, 2011년에 사망하며 셋째 아들 김정은이 권력을 이어받았다.
2. 생애[편집]

2.1. 사망[편집]

3. 평가[편집]
독립운동가로서의 이력에 더해, 정권 수립 초반기에는 외부에 대한 치밀하고, 대담한 기만공작으로[8] 스탈린과 마오쩌둥을 당황시키기도 했을 정도로 외교에 있어 지능적이었던 아버지 김일성에 비해 투명하게 비판을 받았다. 집권 기간 굉장히 억압적이고 전체주의적인 통치를 했으며 자행한 일들의 잔혹성과 악랄함도 매우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20세기 최악의 대기근 중 하나[9] 로 꼽히는 고난의 행군의 최종 책임자이기도 하다.[10] 종합적으로 2차 세계 대전 이후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11] 악랄한 독재자가 비교적 드물었던[12] 탈냉전 시기에서는 한 손에 꼽을 정도의 독재자로 평가된다.
김정일이 집권한 1990년대는 소련 붕괴의 영향으로 북한이 고난의 행군이라는 최악의 경제 위기에 처해있던 상황이었는데, 김정일은 선군정치를 통한 내부 단속에만 공들여 5년간의 장기적인 기근으로 공식 수치로만 30~40만 명 가량의[13] 북한 주민들을 아사하게 만든 장본인이며 심지어 '인민이 배가 부르면 다른 마음을 먹는다.'며 기아 상황을 유도했다는 의혹도 있다.[14] 그러는 와중에 자신은 온갖 산해진미와 취미 생활을 즐기며 대단히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고, 기쁨조라는 전용 성노예 집단까지 만들 정도로 여색을 탐닉하던 그야말로 폭군의 전형이었다. 대외적으로 수많은 대남 도발과 특히 핵무기 개발로 전 세계에 악명을 떨쳤다.
개인적인 성격은 매우 심약하고 의심이 많은 편이라 정치범수용소를 운용하며 잦은 숙청을 벌였고, 암살에 대한 공포와 고소공포증 때문에 항공기 탑승을 극히 꺼려 전용 열차 태양호에만 의지해 외교 활동을 수행했다. 김정일이 북한 정상으로서 직접 방문한 나라는 중국과 러시아밖에 없으며, 남북정상회담도 평양에서 단 2회만 가졌을 뿐이라 은둔의 독재자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 본인 역시 이걸 의식했는지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난 과거에 중국도 갔고 인도네시아도 갔고 외국에 비공개로도 많이 갔는데 나보고 은둔 생활을 한다더라. 그런데 김(김대중) 대통령이 오셔서 은둔에서 해방됐다."며 농담을 했는데, 이는 공식 석상이라서 고스란히 영상 자료가 남아있다.[15]
4. 여담[편집]

4.1. 성격[편집]

5. 대중매체에서의 모습[편집]

6. 호칭 및 별명[편집]

7. 어록[편집]
"왜 우리 영환 맨날 나오는 것이 반복하는게 많고 도식적으로 영화 이야깃거리가 새것으로 나가자고 하는, 지향하는 것이 전혀 없단 말입니다. 도대체 왜 장면 장면마다 자꾸 초상난 집처럼 우는 것만 찍게 만드나! 우리 영화 안 우는 영화 안되겠나! 상가집도 아닌데 왜 이렇게 만드나? 그쪽은 대학생 수준인데 우린 이제 유치원인데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새로운 걸 바라지도 않아. 완고하다고."[16]
"내부에 있는 동무들이 특히 이번에 작전을 한 동무들이 특히 조직을 지휘하는데 총력을 다했습니다. 내 스스로 후회가 되는 건 내가 하려는 일을 구체적으로 애들한테 말을 안 해가지고 당신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저와 협력하려는지를 말입니다. '두 분이 꼭 필요하니까 데려와라.' 죄수처럼 맞죠? 죄수처럼 취급해가지고 그래서 서로 오해도 생기고..."
"내가 그런 걸 바탕으로 해가지고 우리 거하고 합쳐가지고 영화로 서양을 진출해야겠다. 우리는 그러니까 돈을 여기다 하겠다! 그래서 내가 신 감독에 대한 기대가 그래서 크다는 겁니다."
"그놈들이 부러워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지리나 스웨리예 그 다음에는 제네바...말하자면 중립국가를 표방한 나라를 댕기면서, 그렇게 구라파 댕기면서 이름을 알려야지..."
최은희가 몰래 녹취한 김정일의 발언. 신상옥에게 한 말이다. 김정일은 신상옥에게는 예의바른 태도를 지녔으며 항상 존댓말을 사용했다. #
"야이 새끼야, 네 눈에는 수령만 보이고 나는 안 보이더냐?!
김길선의 증언. 김정일이 당중앙 위원회에서 아버지 김일성과 같이 올라가려고 승강기 앞에 섰는데, 위에 볼일이 있던 수리공이 먼저 타 있었고, 그가 김일성에게만 깍듯이 인사를 하자, 극대노한 김정일이 김일성이 내린 다음 수리공에게 욕을 하고 발길질을 했다고 한다. 마침 승강기를 타려던 중앙당 간부들도 이 광경을 지켜봤다고.
"날 좋아하나?"
(후지모토 겐지 : "좋아합니다!")
"그럼, 내 볼에 뽀뽀하라!"
“(기쁨조와) 춤을 추는 것은 돼. 만지지는 말아. 만지면 도둑이야.”[17]
"병들고 노동력이 없는 인민들은 빨리 없어지는 게 내게는 편하다. 철통같이 뭉친 군대와 당원 3백만 명만 있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공화국은 건재하다."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
“너희들 그거 물개 자지인데 먹고 나서 집에 가서 몇 번 했는지 소감을 발표하라.“
이한영의 증언.
“네가 뭔데 내 흉내를 내느냐. 이 땅에서 세도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1978년, 장성택이 독자적으로 기쁨조를 선발하고 비밀 연회를 연 것이 발각되자 격분한 김정일이 장성택에게 한 발언. 이 때문에 장성택은 잠시 숙청당해 2년 동안 강선제강소 작업반장으로 쫒겨났다가 복권되었다.[18]
[19]
"내가 죽으면 너희들은 교수대에 매달려야 한다."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처형장면을 본 뒤 한 발언.#
''죽은 자만이 비밀을 지킨다."
974 경비부대 출신 "강진"의 증언. 김정일 자신이 기거하는 특각의 비밀이 외부로 새어 나갈것을 우려해, 경비대에게 그곳을 넘어 오려는 낌새가 보이는 자는 짐승일지라도 즉각 사살하라고 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
“영웅적 조선인민군 장병들에게 영광 있으라!”
1992년 열병식 당시 연설. 북한 주민들에게 공개된 김정일의 거의 유일한 육성 녹음이다.[20]
“영감!”
"제가 무슨 큰 존재라고, 아마 적들은 외신들, 그 다음에 저 구라파 사람들이 자꾸 뭐라고 말하냐면, "왜 은둔 생활을 하나? 은둔 생활하는 사람이 처음 나타났다." 난, 세상에 뭐 과거에 중국도 갔댔고 인도네시아도 갔댔고 외국에도 비공개로 갔댔고 헌데 나보고 은둔 생활을 한데? 그래서 김대통령이 오셔서 내가 이제 은둔에서 해방됐다. 하도 모르게 했으니까요."[22]
2000 남북정상회담 도중 발언. #
"신념과 의지가 굳세지 못하고 배짱이 없으면 온갖 풍파를 헤치며 나가야 하는 혁명을 할수 없습니다. 이것은 수령님을 잃은 다음 내가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책임지고 피눈물의 언덕을 넘으며 가슴에 새긴 철의 진리입니다."
"줴기밥은 (만드는 데 필요한 음식)감도 특별한 것이 필요 없고, 만드는 데 품도 많이 들지 않기 때문에 급히 길을 떠나야 할 때 준비하기 쉬워서 좋고, 가다가 아무데서나 펼쳐놓고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시간도 얼마 떼우지 않고, 현지 일군들이나 주민들에게 폐도 끼치지 않아서 좋습니다. 줴기밥은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이상적인 도중식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배고픈 줄 알아야 배부른 줄 안다.
인민들과 똑같이 생활하는 것이 좋습니다. 인민들이 조밥(좁쌀로 지은 밥)을 먹을 때에는 우리도 조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수령님의 뜻이고 인민들이 흰쌀밥에 고기국을 먹어야 우리도 흰쌀밥에 고기국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 당의 뜻이 아닙니까.
이제는 집에 오면 여관에 온 것 같고 열차에 올라야 집처럼 마음이 편해진다. 인민생활문제가 풀리기 전에는 언제 한번 집에 들어가 발편잠을 잘 것 같지 못하다.[23]
평양 시민들에게 남새(채소)와 과일도 신선한 것을 늘 떨구지 말고 공급하여야 합니다.
"인민은 줄면 줄었지 마르지 않는다. 땅이 있고 물이 있고 내가 있는 한 인민은 얼마든지 다시 불어난다." #
"당내에 끼어든 망나니들입니다. 법대로 처리하십시오."
1995년 강원도당 간부들이 부화방탕하게 산다는 것을 보위부가 보고하자 김정일이 내린 지시. 결국 사건에 연루된 간부들은 모두 총살당했다.
"이라크 반미 세력들이 자폭공격으로 미제 침략자들을 소멸시키고 있다. 우리의 경보병 부대와 저격부대도 이라크처럼 자폭공격으로 적들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미제에게 경고한다. 조선이 없는 지구는 깨여 버려야 한다는 우리의 배짱맛이 진짜 어떤것인가를 그렇게도 맛 보고 싶으면 지금보다 더한 별의별 미친짓을 다해도 좋다. 우리는 악의 제국, 전쟁과 불행의 원흉인 미국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세계의 정의와 영원한 평화의 긍지 높은 전리품으로 만들어 버릴것이다. 하여 이 증오의 심판으로 조국통일의 만세소리도 높이 울리고 미국이 없는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울것인가라고 한 인류의 소원도 성취해 주고야 말것이다.”
인민에 대한 최대의 사랑은 인민에게 건전한 사상정신적량식을 주는것이며 인민에 대한 최대의 죄악은 인민의 혁명의식을 마비시키고 사상적으로 타락시키는것이다.
2006년 6월 8일 로동신문 기사 《인민에 대한 사랑은 우리 당 선군정치의 핵이다》중
"인민들이 강냉이밥을 먹고 있는 것이 제일 가슴 아프다. 내가 할 일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우리 인민들에게 흰 쌀밥을 먹이고 밀가루로 만든 빵이랑 칼제비국(칼국수)을 마음껏 먹게 하는 것"
"나는 고난의 행군시기에 인민군군인들속에서 높이 발양되고있는 수령결사옹위정신과 육탄정신, 자폭정신을 혁명적 군인정신이라고 하였으며 전당과 온 사회가 혁명적군인정신을 따라배우도록 하였습니다. 전당과 온 사회에 혁명적군인정신을 따라배우는 기풍이 높이 발양되고 인민군대의 위력이 더욱 강화되였을 때 우리의 령도는 선군령도이고 우리의 정치는 선군정치라고 하였습니다."
"당신들의 아들딸과 손자들이 다 군대에 나가 있는데 당신들이 군량미를 보내주지 않으면 누가 보내주겠는가. 군량미를 보내주지 않으면 미국놈들이 쳐들어와도 싸워 이길 수 없다. 그러면 당신들도 다시 노예가 되고 당신들의 아들, 딸, 손자들도 노예가 된다. (중략) 우리 사람들에게 식량이 모자라기 때문에 하루에 4백50g만 먹고 나머지 식량을 군량미로 바치라고 하면 다 바칠 거다."
"옥에는 티가 있을 수 있어도 공산주의자에게는 티가 있을 수 없다."
김정일 노작 <<영화예술론>> 중
"부르죠아어용학자들은 립법권과 행정권, 사법권을 분립시키는것이 민주주의의 징표인듯이 묘사하지만 사실상 3권분립은 봉건전제주의를 반대하여 부르죠아지가 들고나온 주장의 하나입니다."[25]
"제국주의자들과 그 대변자들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여러가지 사상이 있게 되는 현상을 놓고 사상의 <자유>라고 떠벌이면서 그것이 마치 <자유세계>의 자랑인듯이 광고하고 있다."[26]
"자본의 권력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사상의 자유란 있을 수 없습니다."
"나에게서 그 어떤 변화를 바라지 말라!"
1996년 2월, 개혁개방을 거부하는 의지를 드러내며. # 사실 1996년 이전에도 쓰인 말이라고 한다.[28]
"현대전은 전자전이다. 현대전의 승리와 패배는 전자전을 어떻게 수행하느냐에 달려있다"
8. 관련 문서[편집]
- 김정일 장군의 노래
- 고난의 행군
- 제6군단 쿠데타 모의 사건
- 심화조 사건
- 송림 사건
- 기쁨조
-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 북한의 대남 도발 : 대다수의 도발이 김정일의 직간접적인 지령으로 인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