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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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부장관 (1948~1955)

초대
전진한
2대
이윤영
3대
허정
4대
최창순
5대
박술음


보건부장관 (1948~1955)

초대
구영숙
2대
오한영
3대
최재유

보건복지가족부장관 (2008~2010)

46대
김성이
47대
전재희





김종인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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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4대 보건사회부장관
김종인
金鍾仁 | Kim Chong-in


파일:KJI_SDA.jpg

출생
1940년 7월 11일 (83세)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
(현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거주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1]
본관
울산 김씨
현직
대한발전전략연구원 이사장
재단법인 보통사람들의시대 노태우센터 고문
재임기간
제24대 보건사회부 장관
1989년 7월 19일 ~ 1990년 3월 19일
노태우 정부 제3대 경제수석비서관
1990년 3월 17일 ~ 1992년 3월 30일
서명
파일:김종인 서명.svg
링크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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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김재열, 어머니 이필기[1]
형제자매
누나 김종은, 김종현
배우자
김미경
자녀
슬하 1녀
친인척
할아버지 김병로
매형 박봉환
학력
서울덕수국민학교 (전학)
광주서석국민학교[2][3] (졸업)
광주서중학교 (전학)
중앙중학교[4] (졸업)
중앙고등학교 (49회 / 졸업)
한국외국어대학 외국어학부 (독일어과 / 학사)
뮌스터 대학교 (경제학 / 학사)
뮌스터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석사 · 박사)[5]
병역
대한민국 육군 상병 귀휴전역[6][7][8]
종교
개신교 (장로회)천주교 (세례명: 알렉산델)
신체
178cm[9]
소속 정당

의원 선수
5[10]
의원 대수
11, 12, 14[11], 17, 20[12]
약력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제11대 국회의원 (전국구 49번 / 민주정의당)
제12대 국회의원 (전국구 32번 / 민주정의당)
국민은행 이사장
제24대 보건사회부 장관 (노태우 정부)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노태우 정부)
제14대 국회의원 (전국구 11번 / 민주자유당)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석좌교수
제17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2번 / 새천년민주당)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제20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2번 / 더불어민주당)
국민의당 개혁공동정부준비위원장
미래통합당 총괄선거대책위원장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여의도연구원 이사장
살리는 선거대책위원회 총괄선거대책위원장


1. 개요
2. 생애
5. 여담
6. 선거 이력
7. 소속 정당
8. 저서
8.1.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2012, 2017)
8.2.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2020)
8.3. 왜 대통령은 실패하는가(2022.1.28.)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kim_jong_in__.jpg


대한민국경제학자이자 정치인.

제24대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장관과 제11·12·14·17·20대 국회의원(모두 전국구·비례대표)을 지냈으며 더불어민주당국민의힘이라는 거대 양당 모두에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큰 영향을 끼친 원로 정치인이다.[2]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의 손자다.[3]

2010년대 들어 정치계에서는 보수와 진보 상관없이 어려운 일이 불어닥치면 거의 해결사 혹은 킹메이커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정치적 어려움이 있을 때 정치인들이 김종인을 찾아 도움을 구하고는 했다. 이른바 "정치권의 고액단타 과외선생".[4] 그가 승리를 이끌어낸 선거만 해도 새누리당 비대위원 시절의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제18대 대통령 선거, 더불어민주당 비대위 대표 시절의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그리고 미래통합당/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시절의 2021년 재보궐선거 등이 있다. 특히 2016년 20대 총선2021년 재보궐선거에서는 참패하게 된 정당들[5]을 이미지를 변화시키고 승리를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그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6]

그가 지나온 정치적 길목마다 중요한 순간과 인물이 많았기 때문에 “여의도 포레스트 검프”라는 별명도 있다. 김종인의 손을 거친 대통령만 박근혜문재인윤석열로 무려 세 명의 대통령이 그의 도움을 받았다. 새누리당의 2012년 총선, 대선 승리로부터 시작하여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의 사실상 초대 당대표로서 당을 재건해냈고 그 바탕에서 두 정당은 각각 전국선거 4연승[7], 3연승[8]을 이뤄냈다. 하지만 박, 문과는 대통령 당선 이후 의견이 맞지 않아 탈당했고, 이후 정치에 염증이 생겼는지 나중에 미래통합당 황교안 전 대표가 김종인에게 선대위원장 자리를 맡아달라 했음에도 처음엔 완강히 거부했었다. 이후 김종인의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가 출간되었는데, 회고록에서 김종인은 박, 문 두 사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뿐만 아니라 박근혜는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데다 자기 뜻대로 안 이루어지면 화를 내고, 동네 건달식 정치를 한다고 깠고, 문재인은 천하가 자기 것인 줄 알고 방자하게 굴고 겉과 속이 다르며 주변 인간관계가 복잡한 사람이라고 깠다. 아무래도 배신당했다고 느끼는 듯. 이 때문에 "내가 박 정권, 문 정권을 창출해 낸 바람에 국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줘 두 번 사과해야 한다"고 자조적인 셀프디스까지 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경우도 결국 앞서 박근혜, 문재인의 경우와 다르지 않았다. 20대 대선 당시 윤석열에 대해서는 김종인 "후보는 연기만 좀 해달라" 발언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아에 대선 기간 내내 갈등의 골이 깊어졌으며, 이후 국민의힘 선대위 집단 사퇴 및 해산 사건이 일어나 둘의 관계는 악화일로로 갔다. 결국,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윤석열 정부가 실패하면 또 사과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자조섞인 발언을 했다.#

미국독일의 주요 정치, 경제계 인사들과 인연은 물론, 친척들 역시 한국 경제계의 이곳저곳에서 활약 중이다. 미국의 공화당, 과거 서독 측 인사들과 연줄을 유지하고 있다. 레이건 때 국무장관 조지 P. 슐츠와 가깝다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 당시 연줄이 없어 발을 동동 굴렀던 한국 정계로서는 김종인의 역할을 기대했던 사람들이 있었다.[9]


2. 생애[편집]


1940년 7월 11일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신림리(현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에서 태어났다. 김종인의 조부는 가인 김병로로서, 가인은 면암 최익현의 부대원으로 을사의병에 참여했으며,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법조계 거물이다.[10] 또한 김종인의 아버지는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김재열인데, 그는 김종인의 소년기에 요절하였다. 큰어머니 고귀현을 통해 동아일보 가문과 연결된다.

광주서중학교 재학 중 이사로 상경하여 중앙중학교중앙고등학교(49회, 1959년 졸업)을 거쳐 한국외국어대학 외국어학부 독어과에 입학해 1963년 졸업했다.[11] 그해 제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 통합[12]을 주도하던 조부 김병로의 비서 역할로 정계와 연을 맺는다. 1964년에 조부 김병로가 사망하고 나서 독일로 건너가 뮌스터대학교에서 유학했다. 1969년 뮌스터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1972년에는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부전공분야는 재정학(공공경제학)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과 달리 사회민주주의가 발달한 독일에서 공부한 덕에 독일식 경제민주화에 대해 긍정적인 편이다.


파일:김종인 젊은시절.jpg

젊은 시절의 김종인
1973년 3월에 귀국, 불과 32세로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조교수가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서강대 학부생 시절에 김종인의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서강학파로 분류되나 선성장 후분배, 재벌 육성을 중심으로 한 압축 성장을 주장해온 남덕우 등의 서강학파 선배들과는 입장을 달리하는 2세대로 구분된다.(관련기사) 유신 때부터 박정희 정부에서 정책자문역할로 경제개발계획 수립에 참여해, 김재익과 함께 서독부가가치세를 배우러 출장을 다녀와 연구보고서를 올렸다. 이미 35세 노총각이던 김종인은 십수번 선을 봤으나 인연을 만나지 못하고, 이듬해에 김재익의 중매로 김미경(金美經) 교수와 결혼했다. 서로 말이 잘 통했다고 한다. 김미경은 김정호 전 한일은행장의 딸로 2018년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식품영양학과 명예교수이고, 처삼촌이 박정희 정부에서 재무부장관과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이다. 본인의 4촌 처남으로 노태우 정부 시절 건설부 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이진설이 있고, 대법관과 헌법재판소장을 지낸 윤영철이 있으며, 신민당 국회의원을 지낸 이택돈이 있다.관련기사

1977년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이었던 신현확의 반대를 무릅쓰고 처음으로 의료보험제도를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 김종인은 자신이 했다고 자신하고 있고, 직접 당사자인 남재희노동부장관 역시 김종인이 제안한 게 맞다고 확인해 주었다.

김종인은 훗날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 등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역대 대통령 가운데 스스로 경제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유일한 대통령"이라고 평가했으며, 2016년 1월 더불어민주당 대표로 전직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는 자리에서 “이러고저러고 말이 많지만 그분이 오늘날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끈 공로만큼은 누구도 부인을 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관련기사 김종인은 물론 그가 주장한 경제민주화는 시장경제를 주장하는 보수주의 경제이론이다.

1980년 국보위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전두환, 노태우민주정의당 창당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13] 그 후 1981년부터 1988년까지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1대, 제12대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낸다. 1987년 제6공화국 개헌 당시 경제민주화 조항을 직접 작성해 관철시켰다. 노태우 정부청와대 경제수석으로서 기업구조조정과 체질개선을 진두 지휘하는 한편, 재벌의 폭주를 견제하는 등 균형 잡힌 경제적 성과를 이뤄내려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 후보로 서울 관악구 을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낙선[14]한 후, 1989년 1월부터 7월까지 국민은행의 이사장을 지냈다. 그러다가 1989년 7월부터 1990년 3월까지 제24대 보건사회부 장관을, 1990년 3월부터 1992년 3월까지 2년간 청와대 경제수석을 역임했다. 청와대 경제수석을 그만둔 후 1992년 제14대 국회에서 민주자유당 소속으로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구속 사건/재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그러다가 1993년에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결국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으로 형이 확정되었다. 당시 김종인을 구속기소한 주임검사가 후일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한 대검 중수부 함승희 검사였다.## 이 사건은 김종인의 정치인생에 있어 유일한 아킬레스건이다. 이 사건으로 김종인은 오랜시간 동안 정치적 암흑기를 걷게 된다. 김종인은 이미 1992년에 3선 국회의원, 청와대 경제수석,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중량감 있는 정치인이자 관료였지만, 이 뇌물수수 전력은 이후 오랫동안 정치권이 그와 거리를 두도록 만들었다.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이 없었다면 90년대 후반에 국회 지도부(국회의장, 국회부의장)나 거대 정당지도부(총재, 의장, 대표 등)에 선출될만한 커리어였다. 2004년, 새천년민주당 소속 비례의원으로 4선 의원에 당선되지만, 이전과 같이 정치의 중심에 서거나 별다른 영향력은 없었다. 그가 소위 킹메이커로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려면 2012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김종인에게는 잃어버린 20년을 가져다 준 악몽과도 같은 사건이다. 현재도 김종인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가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으로 실형받은 전력을 가지고 공격한다. 홍준표는 심심하면 이야기한다. 홍준표는 "당시 함승희 주임검사의 요청으로 김종인을 취조해 자백을 이끌어냈다"[15][16]고 했는데, 함승희는 이를 부인했다.[17]

어쨌든 김종인은 2011년 한나라당(새누리당) 비대위 관련 문제로도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 직전 당대표였던 홍준표와 사이가 좋지 않다.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새누리당 비대위원이었던 김종인이 당시 홍준표의 지역구인 서울 동대문구 을을 거론하면서 당 대표를 사퇴한 사람에게 공천을 주면 안 된다고 발언한 바 있다. 당시 홍준표는 자신이 조사했다고 주장하는 뇌물 사건 피의자에게 공천받지 않으려고 했으나, 출마할 사람이 없어서 당에서 홍준표를 공천했다. 이후 2020년 김종인이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으로 거론되자, 홍준표는 뇌물 사건을 언급하면서 "이제 그만 공적 생활을 정리 하시고 정계에 기웃거리지 말라. 그만 하면 오래했다"고 김종인을 비판했다.#

그 후, 대한발전전략연구원을 창립해 스스로 이사장에 취임[18]해 정치와는 거리를 두며 오랜 기간 동안 야인으로 있다가[19] 2004년 3월에 새천년민주당에 영입되며 정계에 복귀했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면서 원내로 돌아오게 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행적으로 2007년 제17대 대선에서는 당적은 유지했지만 대통합민주신당정동영 후보를 지지했다. 그냥 단순한 지지가 아니라 정동영의 대선 후보 등록 회견 때부터 손잡고 옆에 서 있었다.#

이후 2008년 정권이 교체된 뒤 김종인은 경제 정책에서 우클릭만 거듭한 채 끝난 참여정부에 대해 쓴소리를 쏟아냈는데, '좌파신자유주의? 말장난하냐. 신자유주의는 실패한다. 노무현 정부가 무슨 좌파 정부냐? 기업한테 정부 기능을 기대하지 말라'고 인터뷰한 후 딱 두 달 만에 세계금융위기가 터졌다. 2008년에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고 다시 야인으로 있다가, 2011년 12월에 중도 확장을 노린 한나라당-새누리당박근혜 비대위원회에 영입돼 경제민주화 공약 설계를 맡기도 했다. 이준석은 한때 박근혜 정부정도전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당시 이회창, 이한구 등으로부터 김종인의 경제민주화는 좌클릭, 포퓰리즘이라는 공격을 받으며 당내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지만[20], 새누리당은 과반 152석을 차지하면서 총선에서 압승했다.#

그리고 2012년 9월부터는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의 경제민주화 의제와 공약은 2012년 12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에 크게 도움을 주었지만# 박근혜가 집권하자마자 팽당하고 경제민주화 공약은 바로 폐기됐다. 이용만 당했지만 그는 인터뷰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난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쿨하게 받아들였다. 2014년 12월에는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야인으로 지냈다. 대권 주자 안철수의 경제 멘토로 활동했다는 보도도 있었는데 2016년 1월 자신은 그런 적이 없으며 언론에서 지어낸 얘기라고 확인했다. 2016년 1월 20대 총선을 목전에 두고 문재인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영입 제안을 받았다. 곧 비상대책위원회 대표[21] 겸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추대돼 2월부터 더불어민주당의 수장이 된다. 더불어민주당은 9년간 패배만 거듭해 빈사상태에 빠져 있었고,[22] 안철수 전 공동대표가 2015년 11월 말 문안박 연대를 거부하고 혁신 전당대회를 역제안해 내홍에 빠졌다. 결국은 국민의당으로 안철수 이하 소속의원 21명이 나갔다. 문재인 대표는 '친노패권주의' 때문에 사방에서 공격받고 있었다. 그러나 김종인이 들어오자마자 사실상 탈당의 흐름은 끝이 났다. 당내 중도적 인사로 영향력이 컸던 박영선의 탈당을 막은게 결정적이었다.

비대위 초기에는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 박경미 홍익대 교수, 주진형 전 한화증권 대표 등의 인재들을 영입하면서 어수선했던 당을 잘 정비하는 듯 했으며, '친노패권주의'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데에 도움을 줬다. 하지만 비대위, 선대위를 모두 거머쥐고 절대적인 공천권을 휘둘러 문제를 일으켰다. 이후 선거 공천 과정에서 특정계파의 의원들만을 대상으로 한 공천 컷오프나 민주당이 우세한 지역에 측근을 공천했다가 경선에서 패배하는 등 문제점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이해찬정청래를 직권으로 공천 탈락시켰다. 친노의 손발을 자르고 자신은 비례 대표 2번에 공천하는 모습으로 큰 반발을 불렀다. 셀프 공천, 칸막이 공천으로 큰 욕을 먹었다. 선거 일주일을 남기고 각 당이나 언론은 새누리당의 과반 내지 180석, 그리고 더불어민주당의 역대급 참패를 예상하고 있었다. 더불어민주당이 100석만 가져와도 선전한 것이라 생각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나...#

2016년 4월, 20대 총선에서 123석을 차지하며 원내 1당이 되는 깜짝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수도권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하지만 호남은 국민의당에게 의석 대부분을 내준다. 대신 더불어민주당은 호남당이란 이미지를 벗고 전국 정당으로서 이미지를 얻었으며 부산, 경남에 발판을 마련한다. 2016년 5월 24일에는 대우조선해양 노조위원장을 만나 “대형 국영기업이나 대우조선해양처럼 1만 명 이상 고용하는 업체는 노동자가 경영을 감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종국에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23]을 다시 한번 하게 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총선 후 그는 의원내각제 또는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제기하면서, 추호선생[24], 전권노인네(...)[25] 등의 별칭을 얻는 등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과 친문 성향 지지층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당대표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데다가 반기문 추대설, 안희정충남지사 탈당 권유설 등이 퍼지면서 급속히 당내에서 힘을 잃는다.(김종인/2016년 참조) 2016년 8월 27일 새로 선출된 추미애 전 대표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비상대책위원회 대표직에서 퇴임하였다. 이후, 페이스북 계정을 신설했다고 한다. 요즘 정치권의 SNS 대세에 본인도 동참하기로 한 듯하다.

2017년 3월 27일 대선 출마를 기정사실화했고, 2017년 4월 5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그의 대선 목적은 내각제 개헌과 자신의 정치 활동의 최종 목표인 경제민주화임을 밝혔다.# 그러나 일주일 뒤인 12일. 국민들이 자신의 뜻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불출마를 선언하게 되었다. 2017년 4월 30일, 대선 레이스의 종반부에서 갑작스럽게 김종인은 내각구성권을 약속받고, 안철수 대선후보에 대한 지지 입장을 밝혔다. 이후 국민의당 개혁공동정부준비위원장을 맡았다. 대선 후보중 안철수, 홍준표, 유승민 후보를 모아 ‘반문재인 연대’를 구성하려는 모습으로 보였지만 3명 다 서로와의 연대를 거부했고 대선 결과는 문재인의 승리로 끝났다. 대선이 2주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대세에 변화를 주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대선이 끝난 뒤에는 국민의당 비대위원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이것도 박주선이 선출되면서 소문으로 끝났다. 경제민주화라는 만화 출판 행사 때 안철수가 방문하여 김종인을 만난 것을 볼 때, 국민의당과의 끈은 이어가고 있는 듯하다.

2020년 3월, 미래통합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반감과, 본인이 문재인 정부 탄생의 기틀을 마련 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이 크다고 한다.# 그러나 총선을 고작 2주를 남겨놓고 영입이 된지라 너무 늦게 영입되었다는 평이 많았다. 제아무리 김종인이라 할지라도 2주 안에 민주당으로 기운 대세를 바꾸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선거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공천을 황교안 지도부와 김형오 공관위가 사실상 망쳐놓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아직 미래통합당에 완전히 적응하지는 않은듯 자신을 더불어민주당이라고 자주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결국 이에 대한 우려가 현실이 되어 2020년 4.15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은 역대급 참패를 하고 말았다.[26] 개표 결과 103석으로 개헌저지선을 겨우 넘기며 김종인이 이끈 선거로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참패하였다. 다만 선거 2주 전에서야 겨우 합류해서 선거전략가로서의 면모보다는 선거운동원으로서의 역할이 더 많았다.[27] 총선 후에는 황교안을 비롯한 당내 지도부가 낙선으로 인해 공석이 되자 당내에서는 김종인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일각의 반발도 있었지만 원내지도부가 의원들의 여론을 수렴한 결과 찬성이 더 많았다며 강행했고, 김종인이 이를 수락했다.

4월 28일, 미래통합당 전국위원회에서 177명의 찬성으로 김종인 비대위 구성을 가까스로 추인했지만#[28] 당내에서 자꾸 나오는 반발에, 임기가 고작 4개월로 제한당한터라 자존심이 상한 탓인지 김종인 전 위원장이 사실상 취임을 거부했다.# 하지만 결국 5월 22일, 내년 재보선까지 비대위원장을 맡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당선인 84명이 찬반 투표에서 내년 재보선까지 비대위 체제를 운영하는 데 '압도적 찬성'을 보였으며, 김종인 본인도 "최선을 다해 당을 정상 궤도로 올리는 데 남은 기간 열심히 노력해보려고 한다"며 "당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데 온 힘을 쏟겠다"고 비대위원장직을 수락했다.#

4.15 총선 패배 이후 미래통합당에 대해 대대적 혁신이 필요하다고 일갈하며 1970년대생 가운데 경제 전문가가 보수의 대권주자로 나서야 한다고 하며 40대 기수론을 공식 선언하였다. 이에 처음엔 김종인 비대위에 대해 찬성하던 홍준표가 김종인 반대파로 태세를 전환하여[29],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을 언급하여 비판하였다. 정진석 21대 총선 당선인은 $ 페이스북으로 총선 직후 홍준표 본인이 직접 전화로 “김종인 만한 사람이 없다. 비대위원장으로 모셔야 한다. 정 대표가 김종인을 띄워달라”고 요청했었다는 것을 밝히며 “그때는 김종인 씨가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에 연루됐던 사실을 몰랐나”고 비판했다.

정치에 잔뼈가 굵은 인물답게 현재 대중들이 원하는 젊고 개혁적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기성 정치인보다 젊은 정치인을 중용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 다만 장제원, 김태흠, 박대출을 비롯한 당내 일부는 행보에 상당히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30] 한편 비대위원장 취임 후 계속 파격적인 이슈를 꺼내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진보 의제로 꼽히는 기본소득제를 꺼내들었고 박근혜 탄핵. 구속 및 이명박 구속에 대한 대국민 사과 검토와 호남 구애, 장외투쟁 자제 등 이전의 자유한국당이나 김종인 체제 이전의 미래통합당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기대를 높이고 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리얼미터의 지지율 집계에서 박근혜 탄핵 이후 처음으로 민주당을 뛰어넘는 성과를 거두었다. 민주당의 지속적인 문재인 정부/평가/경제/부동산 정책로 인한 반사이익이란 지적도 있지만 황교안 체제에서도 조국 사태를 필두로 하는 각종 권력형 비리 의혹 들의 호재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지지율을 기어이 넘지 못했던 것을 고려하면 김종인 체제의 중도 구애 및 좌클릭, 강경투쟁 노선 배격이 성과를 보고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보들에 대해 보수정당의 정체성이 희석된다고 반대하는 당 내부 의견도 상당하다. 하지만 얼마 못 가 8.15 집회에 미래통합당 현역의원, 지역당협위원장들이 참가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다시 지지율이 추락했다.

2020년 9월 2일, 김종인 비대위는 미래통합당의 당명을 국민의 힘으로 변경했다. 그 이후 별다른 이슈는 없었지만, 결국 9~11월간 두 달 정도의 침체기를 겪으며 당 분위기가 많이 다운됐다. 오히려 그의 과도한 좌클릭이 기존 보수층 이탈을 불러온 것은 물론이요, 그렇다고 더이상의 유입도 없는 등[31] 당이 침체 되었다. 이로 인해 지지율은 오히려 황교안 체제 이전 수준으로 역주행했다.[32]

그런데 12월이 되자 분위기가 반전되기 시작했다. 더불어민주당의 실책이 부각되며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심판론이 탄력을 받으며 2021년 재보궐선거와 대선 승리 기대감이 한층 높아졌다. 다만, 이낙연이재명 등 선명한 색깔을 가진 쟁쟁한 후보들이 많은 더불어민주당과 달리, 재보선과 대선 모두에서 국민의힘의 후보들이 빈약한 상황이다. 심지어 이들은 안철수윤석열에게도 여론에서 밀리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김종인은 자신이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며, 단일화를 하더라도 국민의힘 소속이 후보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보수 및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이 취할 수 있는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부정적 시선과는 별개로, 국민의힘 자체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팽배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장을 여전히 하고 있는 것은 현재 여론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들어맞으며 그의 안목이 맞음을 증명했다.

3월 23일 야권 단일후보 선출 결과 국민의힘 오세훈 후보가 선출되면서 자신의 뜻을 이루는데 성공했고, 4월 7일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국민의힘이 압승을 거두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4.7 재보선의 압승으로 1년도 채 남지 않은 22년 대선의 주도권은 더불어민주당에서 국민의 힘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22년 대선에서 국민의 힘 윤석열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국민의 힘은 2020년 총선의 충격적인 역대급 패배를 극복하고 집권당이 되었다. 김종인은 그가 재건한 정당은 결국 집권에 성공한다는 공식을 또 한번 증명해냈다.[33]


2.1. 정치 경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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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2016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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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2017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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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2020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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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2021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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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2022년[편집]


1월 초, 윤석열 후보가 계속적으로 지지율을 떨어트리는 발언을 하면서 2030세대에서도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면서 이재명 후보와 지지율 격차가 13.1%p까지 뒤쳐진 여론조사가 나온다.KBS-한국리서치 1월1차 여론조사

그제서야 위기감을 느낀 국민의힘 측과 윤석열은 킹메이커 김종인에게 전권을 주는 조치를 하고 이에 김종인은 선대위 해체 후 재구성이라는 극단처방을 내린다. 바로 이대남의 실망을 준 영입인 신지예와 새시대 위원회와 김한길 위원장을 쳐내고 친윤들마저 전부 내친 뒤 윤석열 후보의 대선까지 비서실장을 자처하며 윤석열 후보의 재정비를 위해 일정을 전부 중단시킨다.[34] 그러나 이 처방이 윤석열 후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속전속결로 이뤄진 것, 김종인만 남은 것에 대해 윤 후보는 매우 불쾌해하며 "이건 나에 대한 쿠데타"라며 조수진을 옹호하던 때와 다르게 화를 내었고 김종인을 되려 배제하겠다는 인터뷰를 하고 하룻동안 장고에 들어간다.

5일 오전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 해촉 예정이 발표되었다. 김종인의 윤석열 선대위 전면 쇄신 조치에 대한 윤석열의 조치인 듯. 5일 오전 김종인은 선대위원장 해촉 소식에 내 발로 나가겠다며 인터뷰 함으로써 사실상 김종인은 윤석열 캠프와 결별수순을 밟았다. 결국 이번 대선은 윤석열 주도로 운영하게 되었다. 한편, 이준석 대표의 경우 윤석열 및 친윤 의원들과 갈등을 빚은 점에서 김종인과 공통점을 공유하는데, 김종인이 주도한 선대위 개편안이 이준석과 논의된 것이기도 하고 김종인이 선대위원장에서 해촉되었듯이 이준석 또한 당대표 사퇴 압박을 받았으나 이후 윤석열과 극적으로 화해했다.

사실상 윤석열에게 ‘경질’당한 뒤 1월 5일에 그 동안의 일을 설명하면서 “그 정도 정치적 판단 능력이면 더 이상 나하고 뜻을 같이할 수가 없다”고 윤 후보를 작심하고 비판했다. 그는 격한 어조로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윤석열 당선’을 도와주는 유일한 사람이 나뿐이었다”며 “내가 무슨 목적으로 쿠데타를 하겠느냐”고 주장했다. 기자회견 중 윤석열을 윤씨라고 지칭하다가 곧바로 '윤 후보'라고 정정하기도 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지지율 상승 부진인 반면 윤석열은 이준석과 갈등 봉합 이후 청년층을 공략하며 이재명의 지지율을 뛰어넘거나 0.1%까지 따라잡는 조사가 나오며 위험해지자 더불어민주당 측에서 김종인에게 러브콜을 하고 있다. 1월 26일 즈음에 김종인은 이재명 후보가 나를 만나고자 한다면 만날수 있다고 말한 적도 있었고 1월 31일 김종인 측은 이야기는 안 했으나 더불어민주당 당대표 송영길은 김종인과 만나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김종인도 이재명 후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며 인터뷰했다.

2월 6일 김종인의 사무실에서 민주당 대선 후보인 이재명과 만남을 가졌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김종인은 회동과 관련해 "사람 한번 만난 것 가지고 뭘 그렇게 관심이 많으냐"며 "특별한 얘기 한 것도 아닌데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이재명 캠프 합류설에 선을 그은 것으로 해석된다.# 2월 10일 저서 '대통령은 왜 실패하는가'의 출판기념 청년 포럼 중 "어차피 양당 후보 가운데 한 명이 당선될 텐데 누가 되더라도 나라의 앞날이 암울하다"며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모두를 비판했다. 김종인은 "한쪽 후보가 당선되면 문재인 정부보다 더욱 폭주할 것이 명백하다"고도 했다.#

이후 20대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었다. 윤석열 캠프에서 나온 상태였기에 좋지 않게 끝났지만, 김종인의 선대위 해체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윤석열이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필수조건이었다.[35] 이준석의 재합류를 기점으로 이재명 후보에게 크게 밀리던 지지율이 급반등하기 시작했다. 불과 2주가 안 되어서 윤석열의 지지율이 이재명의 지지율을 역전하였다.[36]

윤석열의 당선에 큰 일조를 한 것은 분명하다. 윤석열 후보의 지지율이 이재명 후보에게 큰 폯으로 뒤지던 와중 김종인의 독단적인 선대위 해체가 지지율 상승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기 때문이다. 윤석열 지지율 하락의 주범인, 이준석을 비롯한 지도부와 윤석열 사이에서 벌어진 갈등은 김종인의 선대위 해체를 기점으로 줄어들었다. 물론 내부 갈등 소멸을 두고 김종인이 총대 매고 윤석열 계열 인사를 정리한 것이 원인이라는 시각과, 김종인과는 별개로 윤석열이 이준석과 화해하며 내부 갈등을 수습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 원인이라는 시각이 갈린다. 결과적으로 대선 승리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 물론 김종인은 예상치 못했을 수 있다.[37] 결국, 퇴출된 모양새가 되었지만, 당내 갈등의 요소로 지목되던 '윤핵관'과의 갈등은 소멸되었다.

이후 김종인계와 이준석계 인사들과 함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 배제되었다. 몇달 전까지 자신이 중심축으로서 활동했던 선대위의 또다른 뼈대인 김한길, 김병준이 임명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윤석열의 최측근이자 대선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충돌해왔던 장제원 등의 친윤에 의해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국민의힘 당적을 유지하고 있지만, 윤석열이 당선된 이상 친윤에게 계속해서 견제받을 가능성이 높다. 선거 결과가 나온 이후 윤석열 당선인에게 도와줘서 고맙다는 짤막한 전화가 왔다고 한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지만 여전히 변변찮은 자리 하나 받지 못했다. 스스로도 대선 이후로 중앙정치와 거리를 두면서 특별히 견제받을 일도 없고, 대신 정치 평론이나 관련 방송에 꾸준히 출연하고 있다.

"국민의힘은 뿌리가 대통령만 바라보는 집단"

지선 이후 국민의힘 내부에서 당권투쟁이 발발하자 친윤과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이준석 대표에게 힘을 실어주는 발언을 여러 차례 하면서 개혁을 지지하였다. 6월 말에는 윤핵관 대표 격인 장제원 의원이 주최하는 '대한민국 미래혁신포럼'에 참석해 강연하는 시간을 가지며 친윤 세력과 손을 잡는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으나, 본인이 그냥 가서 한마디 했을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강연 내용도 국민의힘은 뿌리가 대통령만 쳐다보는 집단 발언을 하는 등 당과 정권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 자리에서 장제원, 권성동, 정진석 등의 윤핵관들은 김종인을 정권교체의 1등 공신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7월 들어서 정부와 당 지지율이 쭉쭉 떨어지자 쓴소리의 강도가 그에 반비례해서 높아지는 중이다. 지지율 하락에 대해 "보통 심각한 상황이 아니다"라고 우려하거나 도어스테핑을 두고 "그게 소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논평하며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단순히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고 해결책도 같이 제시하지만 반영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38]

화제가 되고 있는 이준석 대표 징계건에 대해서는 이번 사태로 당이 치명상을 입었다면서 지지율이 상당히 많이 빠질 것이라고 예측했고, 진짜 그렇게 되고 있다. 이준석에게도 지난 일은 잊어버리는게 좋다고 조언했는데, 당초 법적대응을 준비하던 이준석이 그 말을 따르더니 알아서 주가가 올라가면서 정치 100단 김종인의 안목이 새삼스레 재평가가 되고 있다. 최근 분석 적중률이 거의 100%다.

그는 “나는 그 당(국민의힘)의 본질을 잘 안다. 내가 더 있기 싫은 정당”이라며 “지난해 4·7 재보궐선거 이후 당을 나온 것도 그 이유 때문”이라고 말했다. "무슨 놈집권당이 이러냐"고도 말했다.

국민의힘이 대통령의 뒷담화 사건으로 뿌리채 흔들리자 신나게 깠다.# 당이 비대위 체제로 돌입할 무렵 당 실세인 장제원, 정진석과 회동을 가졌다는 소식이 있어서 또 김종인 스카우트설이 돌았으나, 이후로 아무 언급도 없으면서 그냥 만나자고 하길래 만나주는 걸로 끝났다. 비대위 만들어서 뭘 하겠냐는 언급도 있어서 제안이 왔어도 거절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2.1.6. 2023년[편집]


2023년 11월 7일 오후에 국민의 힘 혁신위원회 인요한 위원장 측의 접견 요청을 받아들이며 회담을 나눴다. 회담 이후 인요한 위원장이 "김 전 위원장이 '당신 의사 아니냐'며 '처방은 참 잘했다'고 칭찬해주셨다."와 "환자가 약을 안 먹으면 어떻게 할거냐. 환자가 약을 먹어야 하고 실제로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며 민생을 비롯한 여러가지 조언을 받았다며 밝혔다.#

이에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은 김종인에게 "그 환자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이냐?"며 윤석열 대통령을 저격한 것 아니냐는 의도의 질문이었지만 김종인은 "내가 환자라고 한 것은 국민의 힘이다."며 이 질문을 일단 선을 그었다. 환자라고 지칭한 이유에 대해서도 "강서구 보궐선거에서 참패 이후 이를 반성하겠다고 혁신위를 출범시켜놓고 혁신위가 내놓은 안에 대해서 친윤계 의원들이 반응을 했냐"며 최근 인요한 혁신위가 친윤계들을 향해 험지출마를 요구했으나 반응을 보이지 않는 김기현 당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와 친윤계들을 비판했다.#


3. 평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종인/평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비판 및 논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김종인/비판 및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여담[편집]


  • 젊은 시절에도 체구 자체가 컸고 살집도 있었으나, 현재는 노화로 키가 줄고 젊은 시절보다는 갸름해졌다. 그러나 노령 남성치고[39] 풍채가 좋은 편에 속한다. 머리숱도 나이를 고려하면 비교적 풍성한 편.

  • 누군가가 김종인 자신을 당대표로 추천하는 내용으로 쓴 페이스북 글을 공유했다가 삭제했다. 그동안 김종인은 당대표에 대한 욕심이 없다고 밝혀왔는데, 이번 일을 통해 속마음이 드러난 것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후에 해명하길, 실수로 누른 것이며 그 글을 읽지도 않았다고 했다. '김종인을 당대표로' 페북 글 공유한 김종인 "잘못 눌렀다"

  • 보수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을 수시로 오갔음에도 불구하고 철새 정치인이라는 비판이 거의 없는 점은 특이하다. 오히려 각 정당에서 선거 때마다 모셔가려고 손을 내밀 정도이다. 오랜 정치 경력으로 원로로써 대접을 받고있다고 봐야한다.

  • 대선급 정치인을 제외하고는 가장 다양한 별명이 있다. 정치인들이 그를 지칭할 때는 전 위원장 또는 박사님으로 호칭하지만 대중들에게 회자되는 대표적인 별명은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 시절 붙은 '차르'로 반대당의 안철수도 인용한 적이 있다. 상술한 여의도 포레스트 검프는 물론 "추호도 ~할 생각이 없다"는 말투에서 딴 '추호노인'이나 항상 전권을 달라고 '전권영감' 같은 비야냥성 별명도 있는가 하면, "갓종인" "킹종인" 같은 긍정적 별명도 있다. 경제민주화 전도사라는 별명도 있었다. 보수, 진보 정권 모두에서 선거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경험으로 선거때마다 정당들은 그에게 손을 내밀어 킹메이커, '정치 기술자', '선거 기술자'라는 별명도 있다.

  • 2020년 6월 대선주자 후보로 백종원을 언급했다가 여론을 한번 들썩이게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인터넷 반응은 물론 여권, 야권 정치인들도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며 저격했지만, 그만큼 대중적이고 참신한 야당의 대권 후보나 새로운 선출방식을 기대하고 있다는 정도로 해석한 관점도 존재한다.#1#2

  • 독일 유학시절 교내에 한국인이 5명이었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그 당시 대학생 교통수단이 자전거였다고 한다. 대학교 입학하자마자 중고 자전거를 사려고 했는데 교내 한국인의 도움으로 얼마전 얼굴을 모른채 한국으로 귀국한 선배의 자전거를 물려받았다고 한다. 그 선배는 김수환 추기경이었다고 한다.[40] 그리고 또한 김종인은 베네딕토 16세 교수 시절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김종인은 물려받은 자전거를 박사과정 끝날 때까지 쭉 탔다고 한다.


  • 진한 오리지널 서울 말씨를 사용한다. 예시) "별로 헐 이야기가 없어요" " ~허거든요" 그가 호남 집안의 손자인데다가, 학창시절 역시 광주에서 보냈음에도 서울 말씨 구사하는게 신기할 따름. 야구 김성근 감독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 2023년 SNL 코리아에 출연했을 때 김아영이 MBTI가 뭐냐고 물어보는 것을 MB라는 사람에 대한 질문으로 알아듣는 바람에 화제가 되었다. 나중에 말하길 MBTI가 뭔지는 아는데[41] 뒤의 TI부분을 못 알아듣는 바람에 일어난 해프닝이라고 한다.

  • 독일의 시계회사 아 랑에 운트 죄네의 랑에1 모델을 갖고 있다. 독일 유학 당시 독일인 의사에게 받은 것이라고 한다.

6.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5,776,624 (35.6%)
당선 (49번)
초선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7,040,477 (35.2%)
당선 (32번)
재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관악 을

파일:민주정의당 글자.svg

34,752 (27.12%)
낙선 (2위)
[42]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7,923,718 (38.5%)
당선 (11번)
3선[43]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1,510,178 (7.1%)
당선 (2번)
4선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파일:더불어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6,069,744 (25.5%)
5선[44]


  • 전국구, 비례대표 의원만 다섯 번을 했다. 11대 총선, 12대 총선, 14대 총선은 보수정당 소속으로, 17대 총선20대 총선에서는 민주당계 정당 소속으로 당선됐다. 딱 한 번 나온 지역구 출마기록인 13대 총선에서는 이해찬에게 패배하며 지역구에서는 당선되지 못했다.[45] 비례대표가 초선 의원들을 위한 자리로 인식되는 한국 정치지형에서는 나름 특이한 이력이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당선을 통해 제20대 국회 최고령 국회의원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 다섯 번의 의원 생활 중에서 14대 국회의원 시절 한 번은 뇌물수수, 다른 한 번인 20대 국회의원 시절은 탈당으로 인한 의원직 상실로 의원 임기를 전부 지냈던 건 11, 12, 17대 뿐이다.


7.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민정당|
]]

1963
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1963
탈당

[[국민의당(1963년)|
파일:국민의당(1963년) 흰색 로고타입.svg
]]

1963 - 1964
창당

[[무소속|
무소속
]]

1964 - 1973
탈당

[[민주공화당|
파일:민주공화당_글씨만.png
]]

1973 - 1980
입당

1980 - 1981
정당 해산

1981 - 1988
창당

1988 - 1992
탈당

1992 - 1993
전국구 국회의원 후보로 영입

1993 - 2004
뇌물죄로 당선 무효 확정 후 탈당

2004 - 2005
입당
정계 복귀

2005 - 2007
당명 변경

2007
합당[46]

2007 - 2008
당명 변경

2008
합당[47]

2008
당명 변경

2008 - 2011
당명 변경 후 탈당

2011 - 2012
입당

2012 - 2013
당명 변경

2013 - 2016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2016 - 2017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로 영입

2017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 )
2017
공동개혁정부준비위원장으로 영입[48]

2017 - 2020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결별

2020
21대 총선
총괄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영입

2020 - 2021
당명 변경

( )
2021 - 2022
탈당
국민의힘 총괄선대위원장 활동

2022 -
정계 은퇴


8. 저서[편집]



8.1.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2012, 2017)[편집]



파일: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jpg

파일:결국 다시 경제민주화다.jpg
▲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 (2012년)
▲ 『결국 다시 경제민주화다』 (2017년)

2012년에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라는 책을 썼고 2017년에 이를 다시 수정, 재출간하여 『결국 다시 경제민주화다』가 나왔다. 경제에 관한 책인데 일반인이 이해하기는 쉬운 편이다. 저자가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재정학을 전공한 경제학박사이고 경제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한 경험도 있으나 정치인 활동이 길어서 그런지 경제학 학술서 같은 느낌은 아니다. 특히, 이 책에는 의료 보험, 재형 저축, 부가가치세 등의 도입 과정과 저자가 평생을 걸쳐 세 번이나 시도한 노사 관계 재정립을 위한 노동법 개정 등의 얘기가 담겨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저자의 풍부한 독서와 경험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역사와 원리에 비추어 시대마다 정치인이 해야 하는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 책을 통하여 저자의 경제민주화는 독일식 사회자유주의인 '질서자유주의'의 영향을 짙게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거대 경제 세력에 대한 정치의 견제 기능을 강조하는데 이는 시장가격기구를 신뢰하면서도 공정한 시장을 지키기 위해 국가 질서의 원칙을 강조하는 질서자유주의와 유사하다.


8.2.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2020)[편집]



파일:영원한 권력은 없다.jpg

▲ 『영원한 권력은 없다』 (2020년)
2020년에는 회고록을 집필했다. 박정희 정부에서부터 문재인 정부에 이르기까지 역대 정부에서의 경험과 평가를 담고 있다. 주로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사에 관한 이야기가 중심적인 내용이다. 특히 노태우 정부 시절의 이야기가 풍부히 담겨있으며, 상술하다시피 본인의 손을 거친 두 대통령, 박근혜문재인을 비판한 대목이 주목받기도 했다.


8.3. 왜 대통령은 실패하는가(2022.1.28.)[편집]



파일:왜 대통령은 실패하는가.jpg

▲ 『왜 대통령은 실패하는가』 (2022년)
킹메이커 김종인의 저서. 2022년 대선 기간에 출판된 도서이며, 당시의 역대 대통령들인 이승만~문재인의 빛과 그림자를 살핀다. 김종인이 대통령제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어서, 비판하지 않은 대통령이 없다.


9. 둘러보기[편집]
















[1] 출처.[2] 노태우 정부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 기여, 안철수의 초기 조력자, 2016년 더불어민주당의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로서 원내 제1당 확보 및 여소야대 정국 형성, 2021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재보궐선거 승리, 그리고 20대 총선에서의 최고령 당선인(만 75세)이다.[3] 상단 사진의 액자에 걸려있는 사진도 김병로 전 대법원장의 사진이다.[4] 뉴스톱 김준일 대표의 평이다.[5] 더불어민주당은 새정치민주연합 시절 계파 싸움으로 인한 안철수와 동교동계 의원들의 탈당으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웠고, 국민의힘은 전신 미래통합당이 탄핵 여파가 있었던 7회 지방선거의 참패와, 황교안 전 미래통합당 당대표를 비롯한 태극기 집회의 결과는 결국 180석으로 끝난 21대 총선에서의 역사적인 참패로 인해 개헌저지선만 지킬 정도로 오늘내일 하는 그야말로 끔찍한 상황이었다.[6] 여야를 가리지 않고 해결사 역할을 하다보니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는데, 일례로 2020년 총선 이언주 후보 지지 유세에서 옷 색깔만 바꾼 기호 2번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7]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선, 2020년 총선.[8] 4.7 재보선(2021년), 2022년 대선, 2022년 지선.[9] 당장 트럼프 캠프에서 대외정책 자문역을 도맡은 헤리티지 측 인사, 2017 CPAC에서 공화당의 고보수주의가 부활했다고 선언한 키노트 연사만 하더라도 김종인과 인연이 있다. 그 유명한 헨리 키신저와도 연락할 수 있다고 하니... 진보와 보수를 흑백으로 놓고 보다 보면 이런 김종인과 미국 보수와의 관계가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김종인의 세계관은 미국의 고전 리버럴, 고전 보수주의와 맞닿은 측면이 상당히 많다.[10] 위의 각주에 이미 설명되어 있듯이, 일제강점기 때 긍인 허헌, 애산 이인과 함께 독립 운동가들의 변호를 도맡아 하던 민족 변호사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다.[11] 중간에 군 복무를 마쳤다.[12] 그 결과 민정당, 민우당, 신정당이 통합하여 국민의당(1963년)이 탄생한다.[13] 후일, 이 점 때문에 전두환 정권의 부역자 취급을 받고 진보진영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재미있는 점은 보수인사들 역시 국보위 인사를 용인한다면서 김종인과 더불어민주당을 싸잡아 비난하고 내로남불을 운운했다는 것[14] 여담으로 김종인을 꺾고 해당 지역구에서 당선된 상대 후보는 평화민주당이해찬 후보였다. 이후 2016년 김종인이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을 맡던 당시 이해찬이 공천 과정에서 탈락하며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하게 되었는데, 항간에서는 본인이 공천 권한을 쥐는 위치에서, 이때의 앙금을 잊지 않고 떨어뜨렸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앙금이 아니었어도 선거구도상 불가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15] https://www.youtube.com/watch?v=Fe72dZ7VXOY&t=90s[16] https://www.youtube.com/live/EbDT_PdOYqU?feature=share[17] http://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0056398[18] 명칭은 거창하게 연구원이고 본인도 이사장 직함을 쓰고 있지만 사실 세종연구소처럼 예산을 두고 연구를 하는 싱크탱크라기 보다는 개인 사무실이라고 보면 된다.[19] 사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경제부총리 자리를 제시받았으나 본인이 전권을 가지지 못한다고 고사했고(당시 경제 몫은 자민련의 것이었기에 전권을 받지 못했다.), 2002년 16대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가 김종인을 국무총리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 적이 있지만, 막상 당선 후 없던 일이 됐다. 그래도 청와대로 불러 미안하다고 말은 했다고 한다. 본인도 쿨하게 받아들였다.[20] 이회창 "보수정당이라는 새누리당이 좌클릭하고 있다.", "새누리당은 복지포퓰리즘을 두고 민주통합당과 경쟁하느라 혼이 빠지고 있다.”#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 "정체불명의 경제민주화니 포퓰리즘 경쟁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21] 처음엔 비상대책위원장이었지만 이후 비상대책위원회 대표로 직함을 바꿨다. 선거 기간에는 위원장이 너무 여럿이라 헷갈린다는 이유였다.[22]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예외적으로 승리했긴 하지만 원래 지방선거란 여당의 무덤이라...[23] 사실 이는 김종인이 과거부터 이야기해온 '경제 민주화'와 관련이 깊은 제도다. 더 정확히 말해, 원래 궁극적 경제 민주화는 노동자가 경영에 온전히 참여하는 것이지만 단기간에 체계를 만드는 데 사회적 저항이 있는 관계로, 경제 민주화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그 이전 과도기 단계로 노동자의 경영 직접 감시권 보장을 이룩하는 제도를 주장해 왔다.[24] "~을/를 할 생각은 추호에도 없다"고 했다가 말을 여러 차례 뒤집은 데서 유래.[25] 항상 전권을 달라는 주장에서 비롯.[26] 그런데 이건 김종인의 능력을 아득히 뛰어넘은 선거였다. 시기상을 보면 코로나19가 초기대응 실패에서 후속대응으로 어느 정도 안정화 되면서 여당지지도가 높아진 것이 가장 컸고 미래통합당의 여러 막말사건도 일조했다.[27] 20대 총선 국면 때 총선 3개월 전 일찌감치 문재인 당시 대표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공천을 휘둘렀을 때와는 위상이 천양지차다.[28] 이 과정도 매끄럽지 않았는데, 오전 당선자 총회에서 격론 끝 무산, 오후 상임위에서 당헌 개정 무산에 이어 간신히 전국위에서 낮은 찬성률로 추인되었기 때문. 이마저도 한때 성원 부족으로 무산될 뻔 했다.[29] 홍 전 대표는 40대 기수론을 부정하는 정치인 중 한 명이다.[30] 미래통합당의 구심점이 될 인물이 없다는게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래서 소방수로 김종인을 세운 것인데 일부 의원들이 비난을 하는 이유는 김종인의 행보가 아예 맘에 안 들거나 무소속인 홍준표처럼 복당하여 자신의 발언권이나 영향력을 높이려 했던 자리를 김종인이 차지한 것에 불만을 가졌기 때문이다.[31] 국민의힘이 아무리 좌클릭을 해도 민주당 찍을 사람들은 찍는단 것이다.[32] 다만 민주당 지지율도 2019년엔 40% 내외가 기본이었지만, 최근엔 30% 중반 박스권에서 머물고 있기에 무당층의 증가라고도 볼 수 있는 부분이긴 하다.[33] 2012년 총선에서 김종인은 새누리당 비대위의 좌장으로서 승리를 거두었고, 2012년 대선은 김종인이 재건한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었다. 2016년 총선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의 비대위원장으로서 승리를 거두었고, 2017년 대선은 김종인이 재건한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었다.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는 국민의힘의 비대위원장으로서 승리를 거두었고, 2022년 대선은 김종인이 재건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었다.[34] 반 김종인 기류가 있는 가세연과 같은 극우 유튜버들은 집토끼들보다 중도를 포섭하는 김종인의 행보와 과거를 안 좋아하다보니 다 이긴 대선 졌다며 현실부정에 빠졌다. 일부 중립층도 꼭두각시화 아니냐는 인상을 받았다.[35] 이준석이 상임선대위원장직을 사퇴하고나서 계속 주장한 것이 선대위 해체였다.##[36] 제20대 대통령 선거/여론조사/후보 확정 후 문서 참고[37] 이준석 국민의 힘 대표는 22년 8월 17일 기자회견 중 "1월 초, 김종인의 해체급 선대위 재개편이 없었다면 대선 승리는 없었을 것"이라 말했다.##[38] 단적인 예시로 김종인은 "국민들이 왜 정권교체를 지지해 줬는지 돌아봐야 한다" 진단했지만, 윤석열은 "작년 4월에도 지지율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 원인을 잘 알면 어느 정부나 잘 해결했겠죠"로 대응하고 있다.[39] 나이가 들면서 근육 등이 감소하면서, 체구가 줄어드는게 일반적이다.[40] 김 추기경은 8년 동안 박사과정을 밟았는데 지도교수가 바뀌는 바람에 논문을 다시 써야했고 새 지도교수가 굉장히 깐깐했다고 한다. 그로인해 여차저차한 이유로 박사학위를 받지 못하고 귀국했다고 한다. 이 지도교수는 훗날 교황이 되는 '베네딕토 16세'이다.[41] 손자랑 상당히 친하게 지내며 소통을 자주 한다고 알려졌다.[42] 그가 치렀던 선거 중 유일한 지역구 출마이자 유일한 낙선. 상대가 공교롭게도 이해찬이었다.[43] 1994.9.9. 의원직 상실(뇌물수수).[44] 2017년 3월 8일 탈당으로 인해 의원직 상실.[45] 선거 당시 민주당계 정당이 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으로 갈라져 있긴 했으나 관악구 을이 민주당계 정당 강세 지역이고 거주민들 중 호남 지역 출신이 많음을 감안하면 4% 차이 패배는 나름 선전한 편이긴 하다. 다만 13대 총선이 관권에다 혼탁으로 개판 오분전 총선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게다가 전두환의 동생인 전경환이 새마을운동협회 중앙본부 회장을 맡은 것 때문에 노태우 지지율은 처음으로 20%대를 찍었고(임기 초에도 40%대 초반이었다.) 여당인 민주정의당 지지율이 20% 초반을 기고 있었다.[46] 중도개혁통합신당과 신설 합당.[47] 대통합민주신당과 신설 합당.[48] 19대 대선을 앞두고 국민의당 공동개혁정부준비위원장직을 맡았으나 입당하지는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