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성(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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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성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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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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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9 · 1990 ·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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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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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 1986 · 1987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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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 1991 · 1996 · 1997 · 1999


김주성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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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대우 로얄즈 영구 결번
파일:대우16번.jpg



대한민국의 축구인


파일:/image/076/2009/11/09/9bj74101_6.jpg

이름
김주성
金鑄城 | Kim Joo-sung
출생
1966년 1월 17일 (58세)
강원도 양양군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177cm
직업
축구 선수 (유틸리티 플레이어[1] / 은퇴)
축구 코치
축구 해설가
축구 행정가
소속
선수
대우 로얄즈/부산 대우 로얄즈 (1987~1999)
VfL 보훔 (1992~1994 / 임대)
코치
부산 아이콘스 (2000)
해설
MBC (2001~2005)
행정
대한축구협회 (2001 / 기술 위원)
대한축구협회 (2005 / 이사)
대한축구협회 (2005 / 국제부장)
대한축구협회 (2006~ / 기술 위원)
동아시아 축구 연맹 (2011~ / 사무총장)
국가대표
76경기 14골 (대한민국 / 1985~1996)
병역
병역 특례[2]

1. 개요
2.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은퇴 이후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3. 수훈
6. 김주성에 대한 언사
7. 사건 사고
8. 여담
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축구인.

현역 시절 부산 대우 로얄즈에서 활약하며 K리그 최초로 영구 결번[3]을 부여받은 선수로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 포지션에서 모두 K리그 베스트 XI에 뽑힌 유틸리티 플레이어였다. 현재까지 아시안컵에서 MVP를 수상한 마지막 한국인이며 아시아 올해의 축구 선수를 3연속 수상한 유일한 선수이기도 하다.[4][5] 또한 장발의 헤어스타일로 '삼손', '야생마'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2. 선수 경력[편집]


고등학생 시절에는 고교 상비군에 이름을 올렸지만 당시만 해도 쓸만한 선수정도로 평가받았지 대단한 유망주는 아니었다. 서울 지역의 명문 대학에도 진학할 수 있었으나 다른 축구부 동료 4명을 같이 받아주는 조건으로 조선대학교를 선택한 의리파. 당시 조선대 학생들 사이에서 김주성은 교내에 있는 돌계단을 공을 차면서 하루에 수십번씩 오르락내리락하던 미친놈으로 유명했다. 축구부 학생인건 알았지만 누군지는 몰랐던 무명 시절의 이야기. 결국 김주성이 스타 플레이어가 되고 나서야 학생들은 그제서야 그때 그 학생인 걸 알았다고.

1980년대 후반부터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는데 그때 생긴 별명이 아시아의 삼손, 야생마.

김주성은 1986년 올림픽대표팀과 월드컵대표팀 간의 친선경기에서 올림픽대표팀 에이스로서 맹활약하며 월드컵대표팀을 2:1로 무너뜨리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어 축구 팬들을 경악케 했다.

이후 차범근, 최순호, 허정무, 조광래, 박경훈 등 한국 역대급 선수진들이 가득한 월드컵 대표팀에 발탁되어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3경기 선발 출장 2경기 풀타임을 소화하였는데 그 당시 나이가 22살이었다. (주민등록상 나이는 20살) 이청용이 22살의 나이로 2010년 월드컵에서 4선발 1풀타임을 소화하며 한국 축구의 차기 에이스로 인정 받았던 것을 고려하면 김주성 또한 실로 대단한 재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김주성은 아시아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로 성장했다. 1988년 AFC 아시안컵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게 우승을 내줬음에도 대회 MVP는 김주성의 몫이었다. 그리고 1990년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우리나라가 11전 9승 2무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아시아 예선 우승으로[6] 90월드컵 24강 본선 진출권을 따냈고 팀의 에이스였던 김주성은 예선 MVP로 선정되었다. 현재도 아시아 역대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한 명이라 평가 받는 사우디의 레전드 마제드 압둘라는 동시대의 김주성에게 평가가 밀려 정작 당대 아시아 최고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이러한 높은 위상 속에서 김주성은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7]에 출전했다. 우리나라의 기대는 물론이고 유럽 클럽과 외신들까지 아시아 최고라 평가 받는 김주성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계 무대와 아시아 무대의 수준 차이는 컸다. 결국 3전패 22등으로 탈락했다. 월드컵 이전까지 한국의 에이스라 평가 받은 그는 "리틀 삼손이 아닌 리틀맨", "오히려 명단에서 빼는 게 낫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부진했고 유럽 클럽들도 자연스럽게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후 김주성은 동아시아 대회인 다이너스티컵을 우승하며 월드컵에서의 실패를 달랬다.

그래도 2년 뒤인 1992년 여름에 그는 독일 분데스리가VfL 보훔에 임대 계약으로 입단하며 유럽 진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무릎 부상으로 드리블의 위력이 약해진 탓인지 첫 시즌에 부진했고 팀의 강등을 막지 못했다. 2부 리그에서도 보훔은 우승을 차지하며 승격에 성공한 반면, 그의 활약은 평범했다. 독일의 대표적인 축구 매체 Kicker에서 매긴 그의 시즌 평점은 3.40이었다. Kicker는 1부터 5까지 평점을 매기며 숫자가 낮을 수록 평가가 높음을 의미한다.[8] 다만, 시즌 중에 부상이 있었고, 가능성을 보았는지 보훔은 그와 계약을 연장할 의사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어려움에 빠져있던 대우 로얄즈의 강력한 복귀 요청에 김주성은 2년 만에 다시 K리그에 복귀한다.

김주성은 1994 FIFA 월드컵 미국[9]에도 출전했다. 팬들은 전성기 머리를 휘날리며 필드를 달리던 '야생마' 김주성을 기대했지만, 전성기 때의 공격적인 롤이 아닌 공격형 미드필더로 주로 뛰었다. 참고로 이때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긴 머리도 잘랐다. 대표팀의 플레이메이커로 나서 여러 차례 찬스를 만들었으며 독일전에서 레인보우 플릭으로 슈테판 에펜베르크를 상대로 볼 키핑하는 등 중원을 누비며 활약했다. 이후 돌아와 다시 친정팀인 대우 로얄즈에서 뛰었다. 공격수였던 그는 인대 파열을 확진 받은 이후 주로 스위퍼로 뛰었다. 국가대표로 다시 뽑힐 정도로 완벽하게 포지션 변화에 성공하였고 1997년 부산에서 맹활약하며 수비수 부문으로 리그 MVP를 수상한다. 유상철과 함께 K리그 역사상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에서 베스트 일레븐을 수상한 단 둘 뿐인 선수이며 K리그 역사상 단 6명 있는 수비수 MVP 중 5번째 수상자이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선수 생활을 하며 윙어 - 공격형 미드필더 - 스위퍼로 포지션을 바꾸었고 3개의 포지션 모두에서 K리그 베스트 11에 뽑힌 20세기 아시아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다.

선수 초년엔 폭발적인 스피드와 개인기를 바탕으로 한 드리블로 상대 수비를 헤집고 돌파하는 것을 선호했다. 운동능력이 워낙 좋은데다 시야가 넓고 이동 트래핑을 잘해 수비수를 쉽게 제쳤다. 오른발잡이였지만 왼발도 잘 사용했고 빠르게 꽂히는 슈팅으로 공격을 마무리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중앙 및 측면을 가리지 않고 뛰면서 포스트 플레이나 공중볼 경합에 적극적이었으며 꽤 좋은 피지컬을 가지고 있고 점프력도 좋아 쉽게 밀리지 않았다. 김주성 한 명을 막기 위해 전담 마크맨을 두 명이나 두는 일도 흔했고 반박자 빠른 슈팅과 탁월한 패싱 능력으로 골과 도움을 가리지 않고 공격포인트를 쌓았다.

20대 후반에 들어서는 공격수에서 미드필더로 내려가 득점을 노리기보다는 경기를 조율하고 찬스를 만드는 플레이메이커로 스타일을 바꾸어 94년 월드컵에서 여러 찬스를 만들어내며 활약했다.

뿐만 아니라 경험이 쌓인 선수 말년에는 무릎 부상으로 인해 수비수로 포지션을 변경하게 되었지만 원래 좋은 편이었던 수비력을 기반으로 스위퍼로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K리그 베스트 XI에 3회 선정되고 MVP를 수상했다. 3개의 포지션에서 탑 플레이어로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로 축구센스, 축구지능, 스피드, 피지컬, 기술, 넓은 시야와 판단력, 수비력까지 갖춘 다재다능한 유틸리티 플레이어였다. 비록 고의적인 반칙과 더러운 플레이로 카드를 받거나 상대 선수, 심지어 심판과 언쟁을 벌이는 모습도 보이는 등 인성이 좋지 않지만 실력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여러모로 역대급 선수.


4. 은퇴 이후[편집]


은퇴 후 2000년부산 아이콘스에서 유소년 코치를 맡았으나 단 1년 만에 그만뒀으며 그 이후로는 현장에 나서지 않고 있다. 2001년 초부터 MBC 축구 해설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살짝 화제가 됐지만 같은 시기에 그것도 같은 MBC에서 해설을 하기 시작한 차범근에게 묻혔다.

실제로 친선 경기 같은 건 죄다 차범근에게 배정했기 때문에 2001년에는 컨페더레이션스컵의 타국 간 경기말고는 중계한 적이 없고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도 상대적으로 관심도가 떨어지는 타국 간의 경기를 주로 중계했다. 그러다가 차범근수원 삼성의 감독으로 부임한 2004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메인 해설 위원으로 활약했는데 2004 아테네 올림픽유로 2004, 그리고 2006 독일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등의 굵직한 경기를 도맡았다.

차범근의 해설 위원 활동 시기에 좀 묻혀서 그렇지 해설 자체는 매우 좋았는데 스타 플레이어 출신답게 경기의 맥을 상당히 잘 짚었고 상황 분석이 뛰어났다.[10] 뿐만 아니라 골이 터졌을 때의 반응도 차범근에 비해 감정을 적절하게 실었던지라 제법 재밌다는 반응이 있기도 했다. 어록은 "A에 대한 B"라는 특유의 말버릇인데 이를테면 슈팅에 대한 세기, 패스에 대한 정확성, 수비수에 대한 몸싸움 같은 식으로 대부분의 연결사를 에 대한으로 대체하는 버릇이 있었다.

2003년에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FIFA 국제스포츠관리자 과정'에 선발되어 FIFA 행정가 양성 과정에 입문해 2004년 연수를 마치고 귀국했고 연수 중에는 FIFA 홈페이지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5년대한축구협회의 국제부장을 맡게 되면서 해설 활동은 없는 상태다.

2011년 3월 동아시아 축구 연맹(EAFF)의 사무총장에 내정됐다. 2012 런던 올림픽 때에는 대표팀 사무총장을 맡았는데 문제는 일본과의 동메달 결정전 당시 발생한 독도 세리머니 문제로 당시 일본축구협회에 굴욕적인 사과 문서를 보낸 당사자로 지목 받으면서 국회에서 축협 회장이었던 조중연까지 책임이 올라가지 않기 위해서인지 먼저 보내고 후에 보고했다는 식으로 증언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굴욕이었기에 축협과 함께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었다.


5. 기록[편집]



5.1. 대회 기록[편집]






5.2. 개인 수상[편집]


  • 월드 XI: 1991
  • AFC 아시안컵 MVP: 1988
  • AFC 아시안컵 토너먼트의 팀: 1988
  • FIFA 월드컵 아시아 예선 MVP: 1990
  • 아시아 올해의 축구 선수[11]: 1989, 1990, 1991
  • KFA 최우수 선수: 1991
  • KFA 베스트 XI: 1985, 1986, 1987, 1988
  • K리그 MVP: 1997
  • K리그 영플레이어상: 1987
  • K리그 베스트 XI: 1987, 1991, 1996, 1997, 1999
  • K리그 공로상: 1999
  • K리그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XI: 2013
  • 다이너스티컵 MVP: 1990
  • IFFHS 세기의 아시아팀 (1901~2000)
  • 아시아/오세아니아 20세기의 팀: 1998


5.3. 수훈[편집]




6. 김주성에 대한 언사[편집]


"저는 김주성 선수라고 옛날에 어린 삼손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그분을 롤 모델 삼았습니다. 그분의 플레이를 보고 많이 배웠습니다."

안정환,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현했을 때 롤 모델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한 말.


"24시즌을 뛰며 많은 국내 선수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최고는 김주성 선배님이었습니다."

김병지


"다재다능한 쾌속 드리블이 가능한 선수. 긴 머리를 휘날리면서 스피디하게 드리블로 상대를 파괴하는 선수였고 오른쪽 측면에 세우건 왼쪽 측면에 세우건 양발을 거의 구분없이 사용하면서 크로스라든가 슈팅이라든가 굉장히 잘해내는 선수였다."

한준희


"제 이름을 지우기 시작한 선수예요."

최순호



7. 사건 사고[편집]


2017년 9월 14일,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에서 축구협회 비리와 관련해 황보관, 이회택 등과 업무상 배임 혐의로 입건됐으나 이듬해 검찰로부터 혐의 없음으로 사건은 종결됐다. 축구협회 전 직원, 공금 사용 관련 대부분 무혐의 처분 김주성을 비롯한 축구협회 임원들이 공금을 무분별하게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2011년부터 2012년까지 업무 추진비 명목으로 지급된 법인 카드로 220여 회, 1억 1000만원 상당을 업무와 무관하게 사용하였다고 하며 김주성의 경우 골프장에서 10여 차례에 걸쳐 법인 카드로 수백만 원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검찰조사결과 비리 혐의가 없는 것으로 인정되어 사건이 종결됐다. 위의 기사 참조.


8. 여담[편집]


  • IFFHS가 선정한 '20세기 아시아 최고의 축구 선수 순위'에서 차범근에 이은 2위를 차지했다.

  • IFFHS가 선정한 '20세기 아시아 축구 베스트 일레븐'에 미드필더 자리로 김주성이 선정됐다. #

  •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2010606350001300_P2.jpg
현역 시절엔 긴 머리 때문에 아시아의 삼손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행정가가 된 지금은 (야구 선수 박철순처럼) 짧은 머리를 유지하고 있다. 50대가 된 지 오래여서 그런지 머리숱도 적어졌다.

  • 파일:seibuh.png
세이부 컵 축구[12]에도 등장한 적이 있다. 김주성은 사용을 허락하는 대가로 많지는 않지만 계약금을 받았다고 한다.

  • 현역 시절 말년에 중앙수비수로 보직변경하고 나서 뛰던 시절에 이성남에게 축구화로 머리를 구타당한 적이 있다. 하필이면 그 머리를 밟는 장면이 KBS로 전국 중계가 되고 있었기에 데니스는 빼도박도 못하고 중징계 크리 당첨. 이성남 항목 참조.

  • 1990년대부터 축구를 봐왔던 사람들에겐 농구 선수 김주성보다 이 항목의 김주성이 보다 친숙할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김주성 부장님은 지금까지 열성 팬들과 편지를 주고받고 있다고 한다.

  • 부산 시기 말년에 같이 뛰었던 안정환과는 여러모로 연관이 많았다. 안정환은 어릴 적 자신의 우상이자 롤 모델이었던 선수로 김주성을 꼽았으며 안정환이 프로 데뷔 초기에 머리를 길렀던 이유도 김주성을 닮고 싶었던 마음에 긴 머리 헤어스타일을 따라할 정도로 존경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안정환이 같은 대우에 입단을 해서 몇 시즌 동안 같이 뛰었고 당시 신인 선수였던 안정환에게 팀의 레전드 선수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김주성은 그야말로 동경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여겨졌지만 그와 동시에 안정환은 자신의 롤 모델이기도 했던 김주성이 가장 무서웠던 선배로도 꼽기도 했다. 안정환은 자신이 부산 대우의 에이스가 되었던 시절, 당시 여자친구[13]와 서울에서 데이트를 하다가 멋대로 구단 훈련을 빠지고 다음날 복귀했는데 이 일로 결국 선배들에게 호된 질책을 받을 때 누구보다도 김주성이 가장 크게 혼을 냈다고 한다.

  • 안정환이 예전 마리텔에 출연하여 선배였던 김주성과의 일화에 대해 밝히기를, 훈련 중 무심결에 뒤쪽으로 을 뱉었는데 하필이면 그 때 바람이 불어서 그 침이 옆에 있던 김주성의 얼굴에 맞는 바람에 그에게 죽빵을 맞은 적이 있다. 그러나 안정환은 김주성을 너무나 존경했기에 맞아도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고 오히려 영광스러웠다고 밝혔다. 거기에 김주성은 당시 후배들이 뭔가 잘못하면 상의 탈의를 하게 한 다음 벽에 팔을 벌린 채 붙어 있게 시킨 뒤 등에다 다트를 던져 꽂아넣는 똥군기를 과시했다. 안정환 역시 본인도 많이 당했으며 아직도 등에 다트를 맞았던 자국이 남아있다고 한다. 안정환의 말로는 크게 다치지 않도록 위에서 아래로 던지지 않고 아래에서 위로 던지는 방식을 취했다고 한다. 근데 그렇게 아래에서 위로 던져도 꽂힌다고는 했다. 여담으로 1997년 도쿄대첩의 결승골 주인공으로 유명한 이민성도 당시 대우 소속이었는데 이민성은 숙소에서 안정환과 같은 방을 쓰던 당시 안정환이 잘 때 심하게 코를 곤다는 이유로 두들겨 패서 눈 근처에 멍이 들게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잘못해서 혼나는 건 그렇다 쳐도 정도가 심하다 볼 수 있는데 그 당시에는 이런 게 당연시되는 시기였음은 감안할 수밖에 없다.

  • CF에 출연하여 '스피드가 기술입니다'라는 광고카피를 유행시키기도 했다.


9.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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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좌측 윙어, 공격형 미드필더, 스위퍼. 투톱의 세컨드 스트라이커측면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로도 뛰었다.[2]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금메달[3] 16번[4] 1989~1991년 IFFHS 선정[5] 다만 IFFHS가 축구에 대해 전문성과 권위가 있는 단체인가에 대한 논란이 많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6] 준우승 진출은 UAE[7] 24개국 본선[8] 보통 KIcker의 선수 평점을 보면 2점대 중반이 MVP 수준, 그 이상부터 3점대 초반까지가 탑 클래스라고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독일 2부 리그에서 3년 간 활약했던 이재성의 평점은 3.40, 3.08, 3.12였다. 첫 시즌을 제외한 2년 동안 리그 탑클래스로 인정받고 분데스리가로 진출한 그를 볼 때 3점대 초반의 평가는 받아야 1부 리그에서 뛸 만한 활약이었다고 볼 수 있다.[9] 24개국 본선[10] 일례로 2002 월드컵 16강전 일본-터키전에서는 터키의 위미트 다발라가 일본 수비진이 우왕좌왕하던 사이 잽싸게 헤딩으로 골을 터뜨렸는데 이 모든 상황을 정확하게 캐치해냈다.[11] IFFHS 선정[12] 8,90년대 동네마다 있던 오락실 대부분의 게임제목으로 김주성 축구, 김주성과 붉은악마 등의 타이틀이 쓰였다. 심지어 어떤곳은 김주성의 분노라고 써붙이기도 했다는 전설이 있다. 나이지긋하신 형님, 삼촌들에게 물어보라. 이 게임에서 김주성이 나온 것은 한국-일본 버전이고, 다른 국제 버전에서는 한국과 일본, 미국 대신 스페인프랑스, 네덜란드가 들어간다.[13] 지금의 아내인 이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