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경(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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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준경(독립운동가).jpg

본관
강릉 김씨[1]

갑천(岬川)
출생
1924년 4월 22일[2]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하대리
사망
1973년 5월 5일 (향년 49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경찰공무원.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편집]


1924년 4월 22일 강원도 횡성군 갑천면 하대리에서 아버지 김연덕(金演德, 1895. 11. 1 ~ 1954. 6. 3)[3]과 어머니 초계 정씨(1894. 9. 12 ~ 1951. 1. 5)[4] 사이에서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1919년 당시 횡성군에서 일어난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른 바 있던 둘째 당숙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할 염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갑천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하던 중 1943년 일제에 의해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되어 중화민국 후난성 구이둥현(桂東縣)[5]에 배치되었다. 이후 허베이성 푸치현(蒲圻縣)[6]에 주둔하던 일본 제국 육군 3702부대에서 복무하던 중 1944년 11월 탈영에 성공했고, 이후 국민혁명군 왕루지(王陸基) 휘하 신편 제15사 유격대에 편입되었다.

1945년 2월 한국광복군 제1지대에 입대했고, 노재섭(盧在燮)·한장석(韓長錫) 등과 함께 제1지대 제3구대에 편성되었다. 그 뒤 국민혁명군 제9전구 사령부 정치부에 파견되어 포로 심문 및 일본군 문서 번역, 전단·표어·벽보 작성 등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국민혁명군 제15사단 유격대장의 요청으로 해당 부대 소속으로 유격활동에 종사하던 중 허베이성 스먼시(石門市)[7]에서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 직후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 대원들과 함께 장시성 펑청현(豊城縣)[8]에 집결했다가, 후베이성 우한시 한커우 지역에서 한국광복군 제1지대장 채원개의 지휘 하에 편입되었다. 1946년 귀국한 뒤 한국독립당 행정위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경찰대원 등으로 활동했다.

이후 경찰공무원에 입직했고, 경정 진급 후 1969년 강원소방과장, 1969년 8월 21일부터 1971년 8월 18일까지 제15대 장성경찰서[9]장, 1971년 8월 8일부터 1972년 6월 19일까지 제25대 횡성경찰서장을 역임했다. 경찰서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성실한 근무태도와 청렴결백함으로 인망이 높았으며 1973년 5월 5일 별세했다.

사후 광복군 경력을 인정받아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2019년 장성경찰서장 시절 작성한 수기집 "피는 살어있었다"[10]공개되어 광복군 당시 행적이 재조명되었다.

3.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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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운동인명사전. 한림공파(翰林公派)-상서공파(尙書公派)-횡성파(橫城派) 36세 경(卿) 항렬.[2] 음력 3월 19일[3] 자는 달삼(達三).[4] 정현국(鄭顯國)의 딸이다.[5]중화인민공화국 후난성 천저우시 구이둥현(桂東縣).[6]중화인민공화국 허베이성 셴닝시 츠비시(赤壁市).[7] 1947년 12월 26일 지금의 이름인 스자좡시로 이름이 바뀌었다.[8]중화인민공화국 장시성 이춘시 펑청시(豊城市).[9] 1981년 태백시가 설치되면서 1981년 7월 1일 태백경찰서로 이름이 바뀌었다.[10] 피는 살아있었다가 정확한 표기이나 본인이 작성한 제목 그대로 옮겨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