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규(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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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종범 · 2 황현수 · 3 권완규 · 6 기성용 · 7 나상호 · 8 이승모 · 9 김신진
10 지동원 · 11 강성진 · 13 고요한 · 14 임상협 (VC) · 17 김진야 (VC) · 18 황성민 · 19 김경민
20 김현덕 · 21 최철원 · 22 이시영 · 23 서주환 · 24 정현철 · 25 비욘 존슨 · 26 팔로세비치 · 28 김윤겸
· 30 김주성 (VC) · 31 서재민 · 32 조영광 · 35 백상훈 · 36 안재민 · 37 손승범 · 39 이지석
40 박성훈 · 42 박장한결 · 66 한승규 · 72 이승준 · 77 김성민 · 81 황도윤 · 88 이태석 · 90 일류첸코
91 강상희 · 94 윌리안 · 99 아이에쉬 · # 조영욱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기동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진규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명곤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황은찬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조성래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박혁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전상욱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정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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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 구단으로 임대 간 선수는 제외했습니다.




김진규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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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서울 코치
김진규
(金珍圭 / Kim Jin-kyu)
출생
1985년 2월 16일 (39세)
경상북도 영덕군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포지션
센터백
신체 조건
184cm / 80kg
등번호
전남 드래곤즈 - 36번[1], 6번[2]
주빌로 이와타 - 36번[3], 20번[4]
FC 서울 - 66번[5], 20[6], 6[7]
다롄 스더 - 20번
반포레 고후 - 19번
파타야 유나이티드 - 6번
파지아노 오카야마 - 33번
대전 시티즌 - 20번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28번[8], 5번[9], 36번[10], 4번[11], 6번[12], 3번[13]
소속
선수
전남 드래곤즈 (2003~2004)
주빌로 이와타 (2005~2006)
전남 드래곤즈 (2007)
FC 서울 (2007~2010)

다롄 스더 (2011)
반포레 고후 (2011)
FC 서울 (2012~2015)
무앙통 유나이티드 FC (2016)
파타야 유나이티드 (2016) (임대)
파지아노 오카야마 (2016)
대전 시티즌 (2017)
지도자
오산고등학교 코치 (2018~2020.06)
FC서울 코치 (2020.06~)
국가대표
42경기 3골
1. 개요
2. 클럽 경력
2.1. 전남 드래곤즈, 주빌로 이와타
2.2. FC 서울, 다롄 스더, 반포레 고후
2.3. 태국 진출, 파지아노 오카야마
2.4. 대전 시티즌
3. 국가대표 경력
4. 지도자 경력
4.1. 광주 FC 수석 코치 부임설
4.3. FC서울 코치
5. 플레이 스타일
6. 구설수
6.1. 심판 조롱 논란
6.2. 염기훈 살인태클 후 무징계 논란
6.3. 광주전 관중 상대 욕설 논란
7. 이야깃거리



1. 개요[편집]


"베컴이 차면 골키퍼가 쫄고, 김진규가 차면 관중이 쫀다."

김치우


대한민국의 전 축구선수로서 현재 FC 서울의 코치이다.


2. 클럽 경력[편집]



2.1. 전남 드래곤즈, 주빌로 이와타[편집]



2003년, 백지훈과 함께 전남 드래곤즈에서 데뷔하여, 2004년 AFC U-20 축구 선수권 대표팀 주장으로 선발되는 등 주목받다가 2005년, J리그주빌로 이와타로 이적하여 활약했다.

2006 FIFA 월드컵 독일 직후 박주영과 함께 이탈리아 세리에 A토리노 FC와 링크가 뜨기도 했지만 불발로 그쳤고, 2007 시즌, J리그 생활을 청산하고 친정팀 전남 드래곤즈로 복귀했다.


2.2. FC 서울, 다롄 스더, 반포레 고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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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 6호

전남에서 반 시즌 정도 소화한 다음 곽태휘와 트레이드되어 FC 서울로 팀을 옮겼고 매 시즌 20경기 이상 꾸준히 출전하며 주전으로 뛰었다.

2011년 FA로 풀리자 이적료 없이 중국의 다롄 스더로 이적해 안정환과 한동안 한솥밥을 먹었다. 때마침 스트라이커 정조국도 프랑스 오세르로 이적했기에 순식간에 주축 선수들을 잃은 서울 팬들은 격하게 분노했다. 그나마 정조국은 더 큰 무대로 간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김진규는 K리그보다 한 수준 아래로 평가 받는 중국 리그로 이적하여 팬들의 분노가 더 심했다. K리그 디펜딩 챔피언 팀의 주전 센터백이 중국 리그로 이적한 것이니 리그 격 운운하며 눈에서 불을 뿝는 팬들 많았고 이 때문에 그가 승부조작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K리그 이적이 불가능하게 되어 중국으로 추방된 것이라는 인신공격성 낭설까지 떠돌았다.

이후 2011년 7월, 반 시즌만에 중국 생활을 청산하고 J리그 반포레 고후로 이적했으나 역시 오래 머물지 못했고 2012년 계약이 만료되자 FC 서울로 돌아왔다. 팬들은 오랫동안 호흡을 맞췄던 아디나 김주영, 김동우 같은 팀 내 젊은 수비수들과의 조화를 기대했다.

여담이지만, 한동안 라이벌인 수원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줬다. 정확히 말하면 서울이 수원에게 맥 못 추던 윤성효 재임기때 약했다. 지금까지 수원을 맞아 자책골 2번과 함께 잦은 실책성 플레이를 보여주었으며, 2012년 첫 라이벌전에서는 결정적인 찬스에서의 헤딩슛이 골문을 크게 빗겨나가며 팀의 0:2 패배를 지켜봐야만 했다. 그래서 일부 수원빠들은 김진규를 상대로 "수원의 13번째 선수"로 비아냥대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진규는 일본 주빌로 이와타에서 뛰던 당시 수원과의 아시아 챔피온스리그 조별리그 경기에서 반칙으로 PK를 헌납한 적이 있었고, 요행이 골키퍼의 선방으로 체면은 살렸으나 얼마후 높은 공에 헛발질을 하며 나드손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는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8월 18일 벌어진 2012시즌 3번째 수원전에서도 페널티 박스안에서 파울을 범하며 페널티킥을 내줬고, 후반엔 공중볼 클리어링에 실패하는 결정적인 실책으로 실점의 빌미를 제공하며 0대2 완패의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2013 시즌 8월 3일에 열린 슈퍼매치에서는 몰리나의 프리킥을 헤딩 결승골로 연결시켜 팀에게 3년만의 슈퍼매치 승리를 안겼다. 자신의 자책골로 시작되었던 슈퍼매치 무승의 기록을 자신의 결승골로 끊어낸 것이다.

그리고 슈퍼매치에서 몇 번 안 좋은 모습을 보였을 뿐[14] 팀은 시즌 내내 꾸준한 모습을 보이며 우승했고 김진규와 아디가 버틴 수비진은 최소 파울로 최소 실점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우승에 큰 공을 세웠다. 시즌 종료 후 마음 편하게 상무에 입대해 13 시즌은 2부리그에서 시작할 줄 알았으나, 훈련소 입소 후 받은 재검에서 예전에 입은 오른쪽 무릎부상이 재발해 훈련소에서 나와[15] 수술을 마치고 재활에 들어갔고 FC 서울 전지훈련에 참가했다.

시즌 초반에는 수술 여파로 폼이 떨어졌고 파트너 김주영도 동반 부진하는 바람에 서울 수비진은 완전히 붕괴, 7경기 연속 무승의 원흉이 되었으나 시즌 중반 폼이 어느정도 회복되면서 다시 준수한 폼을 되찾았다. 십자인대 부상이후 주력이 예전만 못한 김주영 보다는 노련한 아디와 호흡을 맞출때 더 준수한 모습을 보여줬다. 팀의 주포 데얀이 부상 여파와 최용수 감독의 혹사로 12시즌만 못한 가운데 갑자기 공격본능을 폭발, 17라운드 성남전부터 21라운드 수원전까지 5경기 연속 공격포인트(5경기 4골 1도움)라는 진기록을 세웠다. 2012시즌까지 통산 172경기 9골을 기록하던 선수가 2013시즌 20경기에서 6골을 기록했다. 최종성적은 35경기 6골 1도움. 14시즌에는 기존의 김주영, 새로 영입된 이웅희와 함께 쓰리백을 이뤄 출전했다. 시즌 초반에는 적응에 애를 먹으며 고생했으나 시즌 중반이 되자 쓰리백에 훌룡하게 적응해 공격수들이 부진한 와중에도 좋은 폼을 보여주었다. 시즌 기록은 33경기 출장 2골 2도움.

15시즌에는 무난한 활약을 이어가다 4월 26일 광주전에서 왼쪽 종아리 근육파열 부상을 진단, 전치 10주를 끊었다. 회복하는 동안 빈자리는 신예 박용우와 경찰청에서 복귀한 김동우가 성공적으로 채웠고 이때문에 15시즌 후반에는 주전에서 완전히 밀렸다. 쓰리백의 중앙 수비수는 박용우와 오스마르가 상황에 따라 번갈아가며 담당하고 2개의 스토퍼 자리는 김진규보다 젊고 빠른 김동우와 김남춘, 이웅희가 맡고 있어 들어갈 틈이 없어졌다.


2.3. 태국 진출, 파지아노 오카야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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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아노 오카야마 시절.

15 시즌 종료 후 팀을 떠날게 확실시 되었다. 일단 동계훈련에도 참여하지 않은 듯 하며, 해시태그 중 하나가 백수로 써져있는데다가, 2016년 이적해온 주세종이 김진규의 등번호였던 6번을 물려받는 등 여러 상황으로 보아 이적이 확실시되는 분위기인 듯. 게다가 정인환의 영입과 김원식의 임대 복귀로 센터백으로서의 입지도 애매했던 상황이었고, 결국 태국 프리미어 리그로 떠나게 되면서 FC 서울과 이별하게 되었다. 이후 무앙통 유나이티드와 계약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얼마 되지 않아 파타야 유나이티드로 임대되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과거 황진성이 뛰었던 J2리그 파지아노 오카야마로 다시 이적했다. 김진규 본인이 인스타그램에 유니폼을 입고 올린 사진 파지아노 오카야마 공식 홈페이지 뉴스 그러나 팀이 1부리그 승격에 실패함에 따라 시즌 종료 후 다시 방출되었다.


2.4. 대전 시티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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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은퇴를 고려하기도 하였지만, 대전 시티즌에 입단하여 K리그 무대로 복귀하였다. # 이번 김진규의 영입은 대전시티즌 입장에서는 2007년 고종수 영입 이후 영입한 선수 중 가장 네임벨류있는 선수 영입였고, 그렇기에 많은 대전팬들로부터 큰 기대를 모았으며, 팀의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또한 시즌 전 미디어데이에서 개막전에서 자신이 프리킥을 차면 안산팬들이 긴장할 것이라 언급함과 동시에 출정식에서도 자신의 장기이기도한 프리킥에 대해 농담을 하며 2017시즌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안산 그리너스 FC와의 리그 첫경기에 선발 출전해서 노련함을 바탕으로 윤신영과 함께 나름 중앙 수비라인에서 준수한 활약을 보였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발이 느린 김진규와 윤신영 조합의 중앙 수비진들에게 있어 이영익 감독이 보다 더 공격적으로 나아고자 시도한 수비라인을 올렸던 것은 역부족이였고, 후반 막판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며 실점의 빌미를 제공하며 대전은 안산에게 2:1로 패했다. 이후 시즌 전반기동안 대전시티즌의 주전 센터백으로 많은 경기를 소화하고 있지만, 노쇠한 기운이 역력해 상대 공격수를 놓치는 장면이 자주 빚음과 동시에 앞서 말한 대로 발이 느리다는 단점을 그대로 보이며 아쉬움을 남겼다. 또한 6월 26일 서울 이랜드전 이후 심한 부상을 당해 사실상 시즌 아웃되었으며, 10월 29일 안산 그리너스 FC와의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모처럼 교체 출장하였다.


3. 국가대표 경력[편집]


각급 청소년 대표를 경험하고 성인 대표팀 데뷔는 조 본프레레 감독 부임 초기인 2004년 7월 14일 트리니다드 토바고 전에서 했다. 당시 같은 소속팀이었던 베테랑 김태영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주목받아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명단에 발탁되었지만, 8강 이란전에서 왼쪽의 이영표와 함께 시종일관 털리는 모습으로 수비불안에 일조하면서 3-4 패배로 탈락한다. 당시 이란 벤치를 향해 법규(!)를 난사하기도...



그 이후 2005년부터 박재홍, 박동혁과 함께 3백의 한 축으로 대표팀에 차출되면서 기회를 부여받았고, 2005년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동아시안컵 중국전에서 그림같은 프리킥 골을 성공시키기도 하였다. 2006년 딕 아드보카트 감독 선임 이후에도 대표팀에 눈도장을 받으면서 2006년 독일 월드컵에 주전 센터백으로 출장했다.[16]

핌 베어백 감독 재임 시절에도 부동의 국대 주전 센터백이었으나, 2007 AFC 아시안컵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베트남 포함한 성인 대표팀 무대, 올림픽 대표, K리그 등 수십 경기에 번갈아 가며 출장하며 굴려지다 부상으로 폼이 떨어져 고생했다. 허정무 감독 부임 이후 곽태휘, 조용형이 부상하면서 2008년 올림픽 대표팀 이후로 한동안 태극마크와는 인연이 없다가 최강희 감독이 부임한 12년 8월, 5년만에 마지막 태극마크를 달았다.


4. 지도자 경력[편집]



4.1. 광주 FC 수석 코치 부임설[편집]


2017시즌 종료 후 은퇴를 하고 광주 FC의 코치로 부임한다고 보도되었지만 이후 김진규는 인터뷰를 통해 광주 코치직 부임 이야기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코치 부임설을 부인하였다. 애초에 K리그팀 코치를 하려면 A급 자격증이 있어야하는데 김진규는 A급 자격증이 없기에 코치로 부임하는게 불가능했다. 또한 아래 언급될 2015년의 구설수를 생각해봐도 김진규가 광주에 오면 팬들이 가만히 있을리 없기도 하고.

이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광주에서 플레잉 코치 제안이 왔었지만 단독기사에서는 이를 수석 코치로 잘못 보도했다고 한다. 게다가 현역 생활 연장을 위해 태국 진출을 계획 중이었으나 해당 태국 팀에서 이 단독보도 기사를 접하고 '코치 영입 제의가 올 정도의 선수가 무슨 현역으로 오겠다는 것이냐'라고 화를 내 계약이 무산됐다고 한다.

결국 광주의 수석코치로는 김진규 대신 유경렬이 선임되었다.


4.2. FC 서울 U-18 코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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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됐든 예정대로 2017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고, 친정 FC 서울의 U-18 팀인 오산고등학교의 코치로 부임하면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

2018년 5월 20일 전북 현대와의 홈경기 하프타임에 은퇴식을 치르게 됐다.


4.3. FC서울 코치[편집]


2020년 6월 3일 FC서울이 김성재 수석코치, 윤희준 코치와 결별하고 FC 서울의 U-18 팀인 오산고등학교를 지휘하던 김진규 코치를 합류시켰다.


5. 플레이 스타일[편집]


거친 플레이와 구설수 때문에 가진 실력에 비해 저평가를 당한 선수인데, 본프레레부터 베어벡까지 대표팀 감독들의 변함없는 신임을 받으며 2006~08년도까지 대표팀 수비진을 책임졌던 선수로, 실력없이 거칠기만한 선수는 절대 아니었다.

전성기적에는 김태영의 뒤를 잇는 파이터형 수비수로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름을 날렸다. 타고난 피지컬을 바탕으로한 터프한 몸싸움과 대인마크가 트레이드 마크였으며 겉으로도 드러나는[17] 강력한 다리 힘에서 나온 롱패스를 활용한 공격전개가 K리그 기준으론 매우 우수해 귀네슈 재임기부터 최용수 재임기까지 늘 서울공격의 시발점 역할을 했다. 김진규가 노쇠화하여 떠난 이후 서울은 한동안 비슷비슷한 파이터형 수비수만 넘쳐나고 빌드업 가능한 센터백이 없어 공격전개에 고심했었다. 프리킥도 곧잘 찼는데 파워 자체는 엄청나게 묵직하지만 프로 데뷔 후 지금까지 딱 세 번 들어간 실로 부정확한 물건으로[18], 삼동현의 골과 함께 지구멸망의 징조로 불렸다. 골키퍼나 수비진이 아닌 골대 뒤 관중들을 두렵게 하는 프리킥으로 유명하다.[19] 그래서 김치우몰리나가 주로 찼다. 경험이 쌓이고 수비진 고참이 되고 나서는 라인을 조율하는 커맨더 역할도 수행했다. 또한 세트피스 상황에서 공격가담이 좋아서 13시즌에는 수비수면서 6골을 기록했다.

단점은 발이 느리고 순발력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얼마나 느렸냐 하면 대표팀 시절 100m 측정 기록이 13초 중후반대였다. 보통 스트라이커들의 주력이 못해도 100m는 12초대에 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를 직접적으로 수비해야 하는 센터백으로서는 매우 느린것이다. 이로 인해 일대일 돌파는 피지컬로 찍어 누르면서 잘막고도 체력이 떨어지는 후반전 막판에 공간침투를 잘 허용하여 실점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때때로 있었다. 즉 발이 빠르고 무게중심을 잘 활용하는 선수들에게 매우 취약한 면모를 보였다는 말이다. 헌데 FC 서울세뇰 귀네슈 시절부터 다이렉트 패스를 통한 공격축구를 모토로 삼고 주전 센터백인 김진규의 힘있고 빠른 롱패스를 활용하는 방안으로 수비진을 끌어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서울 감독들은 아디, 김주영, 이웅희 같이 발 빠르고 활동량 많은 센터백들을 파트너로 붙였다. 이 외에도 다혈질인 성격 탓에 불필요한 카드를 수집하거나 지나치게 거친 플레이로 눈총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도 있어 타 팀 팬들은 싫어했다. 성격 문제는 나이 들어 후배 수비수들을 리드해야 할 위치가 되고 나선 다소 나아졌다.

J리그에서 복귀한 2007년부터 2014년까진 명실공히 K리그 A급 수비수였다. 서울이 2007, 2009, 2012시즌 리그 최소 실점, 2010시즌 최소실점 2위를 기록하는데는 김병지, 김용대, 아디 등 뛰어난 동료들의 공도 컸지만 동료들이 바뀌는 동안에도 쭉 팀의 중앙수비 라인을 책임진 김진규의 공이 컸다. 여기에 최악의 스타트를 보였던 13 시즌에는 탁월한 공격가담으로 주포 데얀의 부상과 쓰리백으로의 전환 실패 여파를 딛고 일어서는데 크게 기여했다.


6. 구설수[편집]


거친 플레이와 다혈질적인 성격, 거기에다 소속팀까지 K리그 팬덤 내에서도 공공의 적 취급인 FC 서울 출신이라는 3박자가 겹쳐지면서 K리그에서 구설수도 많고 안티팬이 많기로는 사실상 박주영을 제외하면[20] 거의 1, 2위를 다투는 선수였다. 그래서 FC 서울 시절에는 사실상 FC 서울 팬들을 제외하면 모든 팀 서포터들이 거의 다 싫어하는 선수로 봐도 무방했다.[21][22]

하지만 선수로서의 마지막을 보낸 대전 시티즌 시절에는 과거와는 다르게 다혈적인 성격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오히려 동료가 거친 플레이를 하거나 심판에게 과격한 항의를 하면 주장이자 고참으로서 옆에서 말리고 진정시키도 하였다.

6.1. 심판 조롱 논란[편집]


2010년 경남 원정경기서 0-1로 뒤지던 후반 막판, 김진규가 거친 파울로 경고를 받았다. 김진규는 이에 항의하다 돌아서면서 손가락을 머리에 갖다대고 빙빙 돌리는 제스쳐를 했는데 이걸 주심이 보고 바로 경고 한 장을 더 꺼내서 김진규는 퇴장당하고 만다. 사실 주심이 뻔히 보고 있는 앞에서 그런 제스쳐를 한다는 것은 대놓고 주심을 모욕하겠다는 의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저게 쓸데없는 짓해서 퇴장당하냐?"라고 좋게 보는 관중들은 아무도 없었다.


6.2. 염기훈 살인태클 후 무징계 논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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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시즌, 득점도 기록하는 등, 무난한 활약을 보여주다가 4월 18일 슈퍼매치와 4월 26일 광주전 두 경기 연속 논란을 일으켰다. 슈퍼매치에서는 큰 점수차로 뒤지고 있던 상황에서 염기훈 선수의 왼쪽 무릎으로 향하는 살인적인 태클을 시도하였고 이에 서정원 수원 감독이 흥분하여 레드 카드를 안 준 심판에게 강하게 항의하였다. 보러가기 보면 알겠지만 당연히 퇴장이 나와야 했고 추가적인 징계까지 감수해야 할 심각한 태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심은 단순 경고로 넘어갔고, 사후 분석을 통한 사후 징계도 내려지지 않았다. 김진규의 살인태클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퇴장감이고 감독 최용수도 명백한 퇴장감이라고 인정했다. 사후징계 잘 주기로 소문난 연맹은 이미 김종혁 주심이 경기중에 카드를 주는 판단을 했기 때문에 추가징계는 없다는 황당한 논리의 병맛스러운 결과를 내놓는다.

참고로 경기중 주심의 징계 판정이 있었으면 추가징계는 주지 못한다는 룰은 연맹 룰에 전혀 없다. 그런 병맛 룰이 있는 것은 전세계적으로도 영국 FA뿐이다.


6.3. 광주전 관중 상대 욕설 논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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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광주전에서는 후반 교체투입 후 후반 5분여 만에 근육 이상을 호소하며 쓰러졌는데 이를 광주 서포터스 측에서 돌을 던진 것으로 오해, 관중석으로 쌍욕을 시전하였고 한참 후배인 이웅희가 다가와 입을 급하게 막았다.보러가기 하필 이때 광주의 원래 홈경기장 광주월드컵경기장의 시설보수 관계로 목포축구센터에서 경기가 치러졌는데 종합경기장인 광주월드컵경기장과 달리 목포축구센터는 피치와 관중석이 밀착된 전용구장이기 때문에 김진규의 욕설은 관중들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그가 당한 부상과 똑같은 것을 경험한 선수들의 증언에 의하면 마치 돌 같은 걸로 맞은 듯한 충격이 있다는 걸로 보아서 오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관중석에 쌍욕을 날린 건 도저히 실드가 불가능한 상황[23]. 그 이후의 대처가 논란을 더욱 가중시켰는데 28일까지 SNS질이나 하며 놀면서 그 어떤 사과도 하지 않다가 29일이 되어서야 사과문을 게재하였는데 안 그래도 늦은 대처에 시선이 곱지 않은데 내용이 문제였다.

대충 "난 크게 잘못한 거 없고 너네가 유발한 감이 있지만 그래도 사과하라니까 사과한다."라는 식의, 사과문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글이다. 선수가 팬들에게 욕설을 퍼부은 사상 초유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연맹 측에서는 증거로 삼을 만한 녹취록이 없다는 어처구니 없는 핑계를 대며 선수에게 징계를 내리지 않았다. 이래서 한웅수는 언제나처럼 개까임을 먹었다.

이 사건 이후 한교원, 이범영이 논란이 일어날 짓을 하게 되자 구단에서 자체 징계를 내려 자필 사과문도 쓰게 했는데, 그들의 사과문은 김진규에 비해 훨씬 진심어린 사과라는 점에서 논란이 재점화되기도 했다. 네 그래도 잘못은 잘못이십니다. 그 와중에 하필 해당 경기에서 왼쪽 종아리 근육파열 부상을 진단, 전치 10주를 끊었다.

회복하는 동안 빈자리는 신예 박용우안산 경찰청에서 복귀한 김동우가 채웠다. 이에 따라 15시즌 후반에는 주전에서 완전히 밀린 모양새. 쓰리백의 중앙 수비수는 박용우와 오스마르가 상황에 따라 번갈아가며 담당하고 2개의 스토퍼 자리는 김진규보다 젊고 빠른 김동우와 김남춘, 이웅희가 맡고 있어 들어갈 틈이 없어졌다.

2016년 4월 27일, 아이러브사커 국내토크방에는 광주의 이종민이 문제의 영상을 공유한 포스팅에, 김진규가 "아주 동생 이미지 한번에 보낼려고 대단한 광주주장이구먼 ㅋㅋ"이라는 댓글을 단 페이스북 캡쳐가 올라와 한동안 빈축을 샀다. 해당 페이스북 게시물 원본은 이후 삭제. 이종민이 어떤 의도로 해당 영상을 공유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2018년 9월, 상주 상무에서 전역하고 팀에 복귀한 김진환과 여름의 소식을 알리는 광주 FC의 페이스북 게시물이 올라오자 이들과 동기인 울산 현대의 김태환이 '한마디 해도 되나요?'라고 댓글을 달았고, 이 김태환의 댓글에 갑자기 김진규 본인이 출몰하여 '넌 빠져있어 울산 페이스북가서 너의대해서 좀말해도되나?ㅎㅎㅎ'라는 장난성 댓글을 남겼다. 당연히 열받은 광주 FC 팬들의 집중포화가 쏟아졌고 얼마 안 가 김진규 본인이 댓글을 삭제했다.

7. 이야깃거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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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년부터 가수 홍진영과 약 1년 간 연인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2007년 5월 결별하였다고 한다.

파일:20132031388020753.jpg



  • 2012년 수원 삼성과의 FA컵 16강전에서 오장은에게 파울을 범하면서 둘이 크게 충돌한 적이 있는데, 놀랍게도 이 둘은 2017년과 2018년, 나란히 대전 시티즌의 주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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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3~2004[2] 2007[3] 2005[4] 2006[5] 2007[6] 2008[7] 2009~2010, 2012~2015[8] 2004 AFC 아시안컵 중국[9] 2004.12~2005.1[10] 2005.3~2005.6[11] 2005동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2005.8[12] 2005.10~ 독일 월드컵~2006.11, 2008, 2012[13] 2007, 2007 AFC 아시안컵[14] 사실 안 좋았다고 하기도 뭐한게 실수가 좀 있어서 그렇지 경기 전체를 보면 꾸준했다. 특히 라돈치치-스테보라는 장신 트윈 타워를 저지하는데는 김진규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15] 이 뜻밖의 병역면제로 혜택을 입은 선수가 경남 FC의 이용기. 밀렸다가 김진규가 빠지면서 남은 자리에 들어갔다.[16] 첫경기 토고전에선 김진규-김영철-최진철의 쓰리백이었고, 윙백인 이영표와 송종국도 수비적인 플레이로 일관해 전반전 내내 공격이 안 풀렸다. 두번째 프랑스전에는 김영철이 최진철과 중앙 수비진을 꾸렸고, 마지막 스위스전에는 다시 김진규와 최진철이 중앙수비 조합을 이뤘다.[17] 다리 힘이 중요한 축구선수들 중에서도 키에 비해 허벅지가 두꺼운 걸로 유명하다. 맞는 바지가 없어서 36인치를 억지로 입는다고. 그래서 붙은 별명이 힘진규, 허벅진규.[18] 그나마 한번도 2013 아챔에서 베갈타 센다이의 골키퍼가 알을 까서 들어간 골이다.[19]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보러가기.[20] 박주영은 경기 외적으로 논란이 많아서 그렇지, 경기 중에 사고치는 일은 거의 없다.[21] 김진규 이전에 악명이 높았던 게 같은 팀의 김한윤과 이청용이지만 이청용은 풀시즌 겨우 2년 뛰고 해외 진출했고, 김한윤은 선수 생활 내내 일관되게 거칠었던 선수를 FC 서울이라서 싸잡아 매도했던거라 서울에서 이적하고 난뒤엔 빠르게 표적에서 벗어났다. 이게 굉장히 웃긴게 분명 부천 시절부터 거친 플레이가 잦았는데 부천 시절엔 조용하다가 서울로 옮기자, 연고 이전팀에서 뛴다는 이유 하나로 하나하나 집어내서 강조하는 바람에 이미지가 망가졌던 케이스다. 서울을 떠나 3년간 부산과 성남에서 뛸 떄에는 하던 플레이는 그대로였는데 갑자기 찬양이 늘었다.[22] 얼마나 안좋았냐면 이충성이 청대에 있을 시절에 조롱을 했던 선수가 김진규라는 루머가 돌았는데 당시에 사람들이 아무 의심도 안하고 그걸 받아들였을 정도였다.[23] 프리미어리그의 리오 퍼디난드의 경우 관중이 던진 동전을 맞고 피부가 찢어지는 상처가 났지만 관중석에 욕은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