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만(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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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형 김진구도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전처 삼척 김씨 김세영(金世榮)의 딸 김숙자(金淑子)[3] 의 소생인 그의 장남은 DB그룹을 창업한 김준기 회장이며, 차남[4] 은 제16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택기. 김택기의 전 부인이 이철승 전 국회부의장의 딸이다. 또한 농심그룹 신춘호 회장과 사돈이며, 신춘호의 차남이자 농심그룹 내 율촌화학 부회장인 신동윤의 장인이다.
2. 생애[편집]
2.1. 정치 활동 전[편집]
1918년 11월 11일 강원도 삼척군 북삼면 송정리(현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 송정동)[5] 에서 아버지 김항경(金恒卿)과 어머니 풍천 임씨 임성재(任聖宰)의 딸 사이의 4남 4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으로 유학하여 나니와상업고등학교와 도시샤대학을 졸업하였다. 리츠메이칸고등상업학교를 다니다가 3학년 때 중퇴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상공일보, 강원일보, 북삼화학공사 등을 경영했다.
2.2. 정치 활동[편집]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고향인 강원도 삼척군 지역구에서 당선되었다. 같은 해 대한민국 국회 상공위원장을 역임한 뒤 1957년부터 강원일보 사장을 역임했고,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자유당 소속으로 같은 지역구에서 선출되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다가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5.16 군사정변 이후 1963년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삼척군 지역구에서 제6대, 7대, 8대 국회의원에 연이어 당선되었다. 1967년에는 공화당 원내총무로 임명되어 1971년까지 역임했다. 1969년 김성곤, 길재호, 백남억 등과 함께 반 김종필 4인 체제를 형성하여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대통령비서실장 등과 3선 개헌을 주도했으며 1971년 김성곤, 길재호 등과 10.2 항명 파동을 주도해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1973년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제9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같은 해 제9대 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되어 3년 간 역임하였다. 이 때 같이 국회부의장을 역임한 신민당 이철승 국회의원과는 한 때 사돈지간이었다. 1975년에는 동곡문화재단을 설립하여 이사장직을 맡았다. 1978년 민주공화당 공천을 받지 못하자 무소속으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강릉 지역에서 민주공화당 김효영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6] 1979년 6월 최치환, 이후락, 변정일, 김수, 박용기, 함종빈, 박정수, 정휘동, 임호, 임영득, 한갑수, 홍성우, 권오태, 윤재명 등과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였다.
2.3. 10.26 사건 이후[편집]
그러나 그 해 10.26 사건 이후 민주공화당에서 정풍 운동을 주도한 박찬종, 남재희, 오유방, 정동성에 의해 이후락과 함께 정풍 운동의 대상으로 지목되었고,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하자 부정축재자로 몰려 103억의 재산을 헌납당했고, 이후 민주공화당을 탈당하여 신군부의 협박으로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7선을 마지막으로 정계를 은퇴하였다.
2.4. 말년과 사망[편집]
2001년 민족중흥회 회장을 지내고, 2005년 6월 신군부의 협박으로 헌납한 부동산(현재의 서초동, 양재동 일대)을 돌려 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이겨 97억 8천만원을 배상받았다.#
2006년 5월 10일 사망하였다.
3. 선거 이력[편집]
4. 소속 정당[편집]
5. 둘러보기[편집]
[1] 대한민국건국십년지에는 2월 11일생으로 기재되어 있고, 강릉 김씨 대동보에는 6월 24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해당 부분, 해석).[2] 대보공-평의공-감찰공파. 37세 진(振) 항렬. 강릉 김씨 대종회장을 지내기도 하면서 숭의재, 숭렬전, 대종회관, 평의공파조비 건립 등 종중의 일에 지성을 다했다.[3] 1922년 3월 26일에 태어났고, 1970년 9월 19일에 사망했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으며, 거기에 비석과 갈석도 같이 있다.[4] 형과 어머니도 같다.[5] 인근의 단봉동·용정동·이도동과 함께 강릉 김씨 집성촌이다. 김진선 전 강원도지사도 이 마을 출신이다.[6]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때 당선한 선거구는 강릉시, 명주군(현재 강릉시의 읍, 면지역), 삼척군이라 결론은 삼척 지역에서 꾸준히 당선된 거다.[A] A B 삼척군[7] 제9대 총선에서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은 3년 임기로 2번 나눠서 선출했다. 김진만은 1기만 선출되었으며, 1기 당시 전반기 국회부의장이었다.[B] 강릉시-명주군-삼척군[8] 민주공화당 김효영 후보와 동반 당선.[9] 79.6.7: 민주공화당 입당
80.3.21: 민주공화당 탈당
80.7.4: 의원직 사퇴[10] 제3~6대 국회의원 선거벽보는 확인 되지 않고 있다. 이는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벽보 보존의 필요성을 못 느껴 선거벽보를 보존하지 않은 것이 그 원인으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을 비롯한 1950년대 부터 정치를 시작한 원로 정치인들의 선거벽보 상당수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11]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
80.3.21: 민주공화당 탈당
80.7.4: 의원직 사퇴[10] 제3~6대 국회의원 선거벽보는 확인 되지 않고 있다. 이는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벽보 보존의 필요성을 못 느껴 선거벽보를 보존하지 않은 것이 그 원인으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을 비롯한 1950년대 부터 정치를 시작한 원로 정치인들의 선거벽보 상당수를 확인할 수 없게 되었다.[11]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