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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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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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8대: 육군총참모장 / 9대~현재: 육군참모총장





역임한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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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9대 육군참모총장
김진영
金振永 | Kim Jin-young

파일:20130423023512_2.jpg
출생
1938년 7월 3일 (85세)
경상남도 통영군
(現 경상남도 거제시)
본관
김해 김씨 #

홍산(洪山)
재임기간
제8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1990년 12월 ~ 1991년 12월 3일
제29대 육군참모총장
1991년 12월 6일 ~ 1993년 3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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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부산고등학교 (졸업 / 10회)
충남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
경력
인하대학교 초빙교수
자유민주연합 전임고문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17기)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61년 ~ 1993년
최종 계급
대장 (대한민국 육군)
최종 보직
육군참모총장
주요 보직
육군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육군3사관학교
수도방위사령관
육군교육사령관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12.12 군사반란 가담
2.3. 좌천
2.4.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2.5. 문민정부 출범 이후 경질
2.6. 전역 이후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군인, 내란사범. 군 내 사조직 하나회의 주축 중 1명으로 12.12 군사반란에 가담했다. 이후 장래에 육군참모총장이 될 것으로 확신되는 출세 가도에 올랐으나 강직한 성격[1]과 전두환계와 노태우계의 암투로 2번이나 좌천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1991년 육군참모총장에 올랐으나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 일성인 하나회 해체 숙군 작업의 첫 대상이 되어 물러났다.[2]


2. 생애[편집]



2.1. 초년기[편집]


1938년 7월 3일 경상남도 통영군(현 경상남도 거제시)에서 태어났다. 부산고등학교를 졸업[3]하고 1961년 육군사관학교 제17기로 임관하였으며 육군사관학교 17기의 대표화랑[4][5]으로 졸업하여 장래가 촉망받는 장교였으며 허삼수, 허화평이 김진영과 동기다.

그러나 김진영은 군내 사조직 하나회의 주축 멤버가 되었고 회장 전두환의 직계 심복 중 1명이 되었다. 김진영은 전두환의 수도경비사령부 30대대장 시절 중대장이었고 전두환의 육군참모총장 수석전속부관 시절 그는 휘하에서 함께 총장을 모시는 전속부관이었으며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시절에는 작전담당관으로서 여러차례 전두환과 함께 근무하여 인연이 깊었다. 월남 파병 시절 전두환의 최고 충복이 되는 장세동을 전두환에게 소개해준 것도 김진영이었다.


2.2. 12.12 군사반란 가담[편집]


1979년 대령 시절 수도경비사령부 소속으로 청와대 근위 부대인 33경비단의 단장이 되었는데 33경비단은 30경비단과 함께 현 수도방위사령부 제1경비단의 전신으로 대통령의 친위대와 같았다. 30단장과 33단장은 대통령의 총애와 신뢰를 받는 보직으로 앞으로 미래가 보장된 군사 정권의 꽃보직 중 하나였다.[6] 30경비단과 33경비단은 수도경비사령부의 주요 실병력으로서 반란군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애쓸 부대였으나 30단장 장세동과 33단장 김진영은 하나회 두목 전두환이 일으킨 12.12 군사반란에 뛰어들었다.

파일:attachment/10120703115115.jpg
10.26 사건 후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된 장태완 소장(오른쪽 찻잔 든 이)이 부임 나흘만인 79년 11월 20일 청와대를 지키는 근위부대인 수도경비사령부 제33경비단을 초도순시, 단장인 김진영 대령으로부터 부대현황을 브리핑받고 있다.
그리고 이 사진이 촬영되고 3주 후, 브리핑을 하던 대령은 브리핑을 받던 지휘관을 배신한다.

30단장 장세동과 더불어 반란군 지휘소가 차려진 경복궁[7]을 지켰다. 반란 진압에 나선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은 자신의 직속 부하인 장세동과 김진영이 직속 상관과 국가를 배신한 것을 알고 격노했다. 진압군 총지휘관 윤성민 참모차장 등 다른 장성들이 진압 과정에서 우유부단한 면모[8]를 보이는 가운데 장태완만은 보안사의 뒷공작[9] 속에서도 고군분투하며 반란 진압에 애썼다.

장태완은 수도경비사령부 주요 실병력 중 30경비단은 반란군의 베이스였기 때문에 동원할 수 없었기에 김진영이 부재 중인 33경비단의 전차 부대를 끌어와 경복궁으로 진군하려 했다. 전차 소리를 듣게 된 반란군은 위기 상황에 빠졌으나 부대장인 김진영이 직접 나서 33경비단 소속 전차 부대를 제지하고 회군시켜 진압군을 무력화시키는데 일조했다.[10] 반란군이 동원한 부대는 차곡차곡 서울에 진주하여 국방부, 대한민국 육군본부, 특전사령부, 중앙청 등을 점령하는 가운데 진압군은 어떠한 부대도 동원하지 못해 결국 반란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때 김진영은 자타가 공인하는 미래의 육군참모총장으로 부상하게 된다.

대한민국을 장악한 하나회의 주축 멤버, 최고 권력자 전두환의 직계 충복, 군사 반란의 공신, 생도 시절부터 인정받아온 자질 등 김진영의 화려한 미래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하나회 동기들이자 반란의 1등 공신들인 허화평, 허삼수가 정계로 진출하고 1기수 선배인 장세동도 대통령경호실장이 되어 군을 떠나게 됨으로써 군 내에 김진영의 경쟁자가 될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더욱 그러했으나 육군참모총장으로의 길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2.3. 좌천[편집]


김진영은 하나회 세상이었던 전두환 정부노태우 정부에서 각각 1번씩, 2번이나 좌천을 당하게 된다. 12.12 군사반란 이후 수도경비사령부 작전참모,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역임한 후 단연 육군사관학교 17기 최선두 주자로 사단장에 보임되어 수도기계화보병사단[11]을 맡았다. 1번째 좌천은 그의 강직한 성격 때문에 빚어졌는데 1985년 12대 총선에서 전두환 정권의 부정 선거 지시를 거부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당시 야당 신한민주당의 돌풍이 거세지자 전두환 정권은 총선을 앞두고 총력전을 펼치며 휘하 장병들에게 여당 투표를 반강제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김진영은 2기수 하나회 선배로 '민따로'라고 불릴만큼 자신의 길을 걸었던[12] 20사단장 민병돈의 제안으로 같이 지시를 거부했고, 총선이 야당의 신승으로 끝나자 전두환은 격노했다. 20사단과 수기사단 모두 충정 부대[13]로 진급 코스였으며[14] 둘 다 전두환의 직계였기에 승승장구가 예정되어 있던 그들은 사이좋게 좌천되었다.

결국 한직인 육군3사관학교장으로 쫓겨났고 민병돈은 준장 보직인 육군본부 정보참모차장으로 좌천되어 처음으로 눈물밥을 먹어야 했다. 와신상담하던 김진영은 1987년 12월 군사정권 최고 요직 중 하나인 수도방위사령관으로 임명되며 권력의 핵심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당시 전두환은 노태우에게 정권 이임을 앞두고 있었고 앞으로도 상왕처럼 군림하며 퇴임 후에도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임기 말 마지막 군 인사에서 자신의 직계들을 군의 실세 자리에 깔았다. 그런 의미에서 전두환계 하나회의 중간 보스 중 1명인 김진영에게 대통령의 친위대 격인 수도방위사령관을 맡긴 것이다.

당연히 노태우는 이에 분통을 터뜨렸고 당장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노태우 정권 출범 이후 전두환의 직계들을 차례차례 제거하기 시작했고 김진영은 이번에는 정치적 흐름 때문에 좌천의 길로 빠지게 된다.


2.4.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편집]


노태우 정권 출범 이후 야권과 국민들의 전두환 정권에 대한 심판 요구에 대한 노태우 정부의 유화적 스탠스[15]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야권의 심판 요구를 좌시하지는 않겠다는 군 내 강경파 장성의 위협 발언[16]이 언론에 보도되었는데 대체적으로 발언자는 김진영으로 추측되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일단 김진영은 군 내 기반이 두터운 만큼 노태우는 김진영을 후순위로 두고 다른 전두환계들부터 차근차근 제거하기 시작했다.

6월에 전두환계 육군참모총장 박희도가 해임됐고 12월에 전두환계 보안사령관 최평욱이 좌천당했으며 결국 1989년 3월 김진영도 수도방위사령관에서 쫓겨나 한직인 교육사령관으로 2번째 좌천길에 오른다. 다시 눈물밥을 먹는 동안 17기 동기 이문석이 노태우의 직계 군맥으로 중용되면서 출세 가도를 달리더니 자타공인 17기 최선두 주자 김진영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불사조처럼 김진영은 부활했는데 6개월 뒤 2차 진급으로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에 오른 것이다. 비록 1군사령관을 거머쥔 이문석에 비해 뒤쳐졌지만 대장 진급에 성공함으로써 '왕년의 김진영이 돌아왔다'는 평에서 알 수 있듯이 간신히 육군참모총장으로의 길을 다시 확보할 수 있었다. 어느덧 임기 말에 접어들던 노태우는 퇴임 후를 생각했는지, 분열된 하나회[17]를 수습하려 했는지 전두환계 하나회와 노태우계 하나회의 조화를 도모했다.

하나회와 군 내에 기반이 두터운 김진영을 버리기에는 부담스러웠던 것 같고 강직하던 김진영 역시 이 때는 눈물밥 2번 먹고 사람이 유해졌는지 노태우에 대한 충성 의사를 밝혔다고도 전해진다. 이후 이문석과의 육군참모총장을 둔 경쟁에서 마침내 승리하며 1991년 말 제29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했다.[18]

무엇보다 육군참모총장 인사를 앞두고 하필 이문석이 에 걸렸는데 극비리에 수술을 받았고 초기 암이어서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건강 문제 때문에 육군참모총장은 무리가 되었다. 이진삼과 이문석 모두 일단 군을 떠난 뒤 대신 장관으로 내각에 입각했다. 이렇듯 반란 직후만 해도 순탄하게 육군참모총장이 될 것 같던 김진영은 2번이나 좌천을 이겨내고 파란만장하게 육군참모총장에 올랐지만 숙청탄 1발이 남아 있었다.


2.5. 문민정부 출범 이후 경질[편집]


1992년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비록 하나회의 정적이었던 김영삼이지만 3당 합당에 따라 같은 여당 민주자유당 내에서의 정권 교체였고 정권 안보와 직결된 모든 요직을 독점해 군을 하나회가 확고하게 장악한 상황에서 하나회를 건들 경우 쿠데타를 우려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김영삼이 하나회를 곧바로 숙청하지는 않을 거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김진영은 김영삼과 같은 거제도 출신이라 더욱 그러했다.[19] 그러나 김영삼은 취임 12일째인 1993년 3월 8일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임기 극초반인데다 아직 상반기 정기 군 인사 시기[20]도 3개월이 남아 아무도 예측못한 시점에서 사전에 의논도 없이 국방부장관 권영해와 조찬 자리에서 육군참모총장 김진영과 기무사령관 서완수를 경질할 것을 지시했다. 역사에 남을 하나회 대숙청 작업의 시작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김영삼은 하나회 출신 군인들을 싸그리 밀어버렸다.

권영해는 즉각 경질 절차에 들어갔고 오전 동안 자신의 운명은 꿈에도 모른 채 육군본부에서 참모들과 주간 업무 회의를 하며 지시를 내린 후 총장실로 돌아온 김진영은 이번에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최후의 숙청탄을 맞게 되었다. 김진영은 해임 조치를 반발없이 받아들였으며 2번이나 숙청당한 경험이 있어서 강철 멘탈로 거듭났는지 육군참모총장 해임 소식을 듣고도 전역식에서 덤덤하게 2분도 걸리지 않는 짤막한 전역사를 깔끔하게 남긴 뒤 군을 떠났다.[21]

그렇게 그는 하나회 대숙청의 첫 타자가 된 육군참모총장으로 역사에 남았다. 군인으로서의 자질을 자타가 공인한 대표화랑 출신이었지만 악성 사조직인 하나회의 손을 잡았기에 결국 정치군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고 그러하기에 정치적으로 3번이나 숙청을 겪어야 했던 그의 파란만장한 군 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후임 육군참모총장은 육사 동기이자 비하나회 출신인 연합사 부사령관 김동진이 임명되었다.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이던 박관용과 부산중학교 동기 동창이었는데, 김영삼은 혹여 보안이 새나갈까 박관용에게도 숨겼다고 한다. 김진영이 해임당한 후 며칠 뒤 위로차 만난 박관용에게 김진영이 "해임 며칠 전에도 나에게 무한한 신임을 보였는데 닷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라고 묻자 박관용은 "군인인 네가 정치인의 뜻을 어떻게 알겠냐"라고 말했다고 알려졌다.


2.6. 전역 이후[편집]


이후 전두환,노태우와 함께 역사 바로세우기로 인해 1995년부터 검찰 수사 대상이 되었으며,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동년 12월, 두 대통령 및 장세동,박희도와 함께 김영삼에 의해 특별 사면되었다. 이후 정계를 은퇴하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한 김진영은 전역 이후 군인 본연의 자세를 지켜야 한다며, 일체의 정치 활동을 자제하고 안보 분야 연구와 기독교 선교활동에 전념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역 이후에는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에서 방문 교수로 2년간 지냈고 군선교연합회에서 비전2030본부장을 16년간 역임하였다. 현재는 2021년 10월에 창립된 한미자유안보정책센터(KAFSP)의 초대회장을 맡고 있다. 취임 당시 사진

2021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그의 빈소에 방문했다.#

3. 여담[편집]


  • 독실한 개신교(순복음교회) 신자(장로)이며 #, 예비역 장성의 모임인 성우회 14대 회장을 지냈다.
  • 수경사 30대대 중대장 시절 부대 내에서 미인대회가 열렸는데 수상에 실패한 어느 참가자가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할때 뛰어들어 구출했는데 기껏 구출했더니 역정을 내자 바로 폭풍싸다구를 날려가며 자살을 막은 적이 있었다. 그 참가자가 바로 훗날 부인이 되었는데 부인은 비록 미인대회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훗날 참모총장 사모님이 되면서 인생역전이 이뤄진 셈이 되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 1996년 MBC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는 배우 이정웅이 연기했다.



5. 둘러보기[편집]


12·12 군사반란 주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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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D {{{-2 ※ 단 우국일 [[준장|{{{#FFF 준장}}}]]은 군사반란 주동자로서 사진을 찍은 것이 아니라 [[국군보안사령부|{{{#FFF 국군보안사령부}}}]] 참모장 자격으로 사진을 찍은 것이다.[*A 비 하나회 였던 우국일 준장이 12.12 군사반란 당시 한 일은 연희동 요정에서 접대업무를 맡았을 뿐 접대를 제외한 모든 상황에서 그는 결백한 인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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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보기 ]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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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2.12 군사반란에 가담했던 면모와는 달리 의외로 휘하 장병에게 여당을 찍으라고 강요하라는 전두환의 명령을 거부하는 등 무조건적인 예스맨은 아니었다.[2] 1993년 3월 8일 기무사령관 서완수 중장과 함께 유선전화로 경질 통보됐다.[3] 허삼수, 언론통폐합 등을 주도하여 전두환괴벨스라 불린 허문도와 부산고 10기 동기생이다. 12.12 군사반란 이후 신군부가 집권하자 허문도의 부탁으로 그를 전두환에게 소개했다.[4] 육군사관학교 교수와 훈육 장교 등이 성적, 품성, 지휘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가장 우수한 생도에게 주는 상이다. 성적 수석 졸업은 '대통령상'으로 육군사관학교 17기의 수석 졸업자는 김진영이 숙청되자 대신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된 김동진 장군이다.[5] 시초에는 주로 성적 하위자들이 모여 만든 하나회는 후배 기수의 대표화랑들 영입에 열을 올려 많은 대표화랑들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김진영을 뺀 모두는 말로가 나빴는데 주로 20기 이하 대표화랑들이 하나회에 영입되었다가 정작 본인들이 장군의 반열에 오를 때 하나회 시대가 끝나면서 군생활도 끝난 케이스들이 많다. 살아남는다고 해도 요직이 아닌 한직으로 간 케이스가 많으며 숙청 당시 영관급이었던 30기 이하도 역풍을 같이 맞았고, 결국 하나회 20~36기 사이에 대장으로 예편한 사람은 10명도 안 된다는 후문이 있다.[6] 손영길, 전두환, 이종구, 고명승, 장세동, 김진영을 비롯한 실세들은 박정희 정권 시절부터 이 보직을 독점했다. 전두환 정부노태우 정부에서도 당연히 후임들이 이 자리를 독점했다.[7] 청와대의 최근접 경비를 맡았던 30경비단의 본부가 경복궁 내 북단에 있었다.[8] 병력을 동원해 유혈 사태를 일으키지 않기로 반란군 세력과 신사 협정을 맺고 그걸 믿어서 출동시킨 9공수여단을 회군시켰다. 물론 반란군은 신사 협정 따위는 무시하고 계속해서 병력을 동원해 승기를 굳혔다.[9] 도청을 통해 수도경비사령부가 유사시 동원 가능한 서울 인근 사단들을 출동시키지 못하게 했다. 30사단장 박희모는 회유에 넘어가 반란군에 대놓고 길을 열어주며 협조했고(갑종장교 출신인 박희모는 이후 끝까지 살아남아 1985년에 합참 전략기획본부장(중장)까지 오르고 예편했다.) 26사단장 배정도(배정도는 12.12 사건 당시의 행보 때문에 살아남았으나 더 이상 진급하지는 못 하고 국방대학원 학장을 끝으로 1983년에 소장 예편하였다.)는 저녁 회식에서 보안부대장의 술 공작에 넘어가 자고 있었고 수기사단장 손길남은 침묵했으며 20사단장 박준병은 반란군에 가담 중이었다.[10] 자신에 대한 사살 명령이 내려진 와중에 직접 뛰쳐 나갔다. 말 그대로 역적 행위이지만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다소 비장하게 묘사된다. 김진영이 부하에 대한 인망이 진짜로 높았는지 죽음을 무릅쓰고 전차를 막고도 무사히 회군에 성공시켰다.[11] 지금도 메이커 사단 중에서도 가장 앞 번호의 사단으로, 소장 1차 보직 중 상당한 요직으로 뽑힌다. 현 최장식 사단장 이전까지는 전원 육사 출신만 부임했던 사단 중 하나다. 이외에 제1보병사단도 그렇다.[12]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자기 길만 가는 성격이었다. 12.12 군사반란 때는 서울과 멀리 떨어진 사단에 앉아 있는데다가 휘하부대와 통째로 훈련나가 있어서 엮이지 않았고, 5.18 민주화 운동 때도 별다른 일을 안 해서 책임이 없었다. 심지어 6월 민주 항쟁 당시에는 강제진압 명령이 내려올까 봐 보안사령관하고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을 정도. 그가 책임질 만한 일이라고는 육사 교장으로 좌천된 후 대통령 노태우에게 항명한 것 정도다. 12.12 때와 5.18 때 하나회 전두환계임에도 계획을 전혀 모를 정도로 자기 갈길만 간 셈.[13] 유사 시 서울로 즉각 동원할 수 있는 부대들이며 쿠데타를 늘 염려해야 하는 군사 정권에서는 당연히 요직이고 진급 코스가 된다.[14] 별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정예부대인 수기사단장은 지금도 요직이다.[15] 노태우는 자신들을 전두환 정권과 차별화하려 했고 상왕으로 군림하려는 전두환과 전두환의 세력들을 숙청할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제5공화국 심판 분위기가 확대되는 것을 사실상 방관했다.[16] 좌천된 일화들에서 알 수 있듯이 역대급인 민병돈만큼은 아니어도 강직한 성격이었다. 논란이 되었던 발언은 "야당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추궁을 고집하면 그들이 공약한 정치 보복 배제에 위배된다. 그런 식으로 캔다면 김영삼, 김대중인들 온전하겠는가? 적당한 선에서 자제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야당의 태도에 제동이 걸리지 않으면 모처럼 마련된 이러한 좋은 상황이 파국으로 흐를 수도 있다."로 상당히 강경한 발언이었다.[17] 전두환계 하나회에 대한 숙청으로 인해 노태우 정권에서는 전두환계 하나회와 노태우계 하나회 간의 권력에 대한 암투가 벌어졌다.[18] 노태우는 비록 이문석이 자신의 직계였지만 김진영을 버리는 것은 부담스러웠고 전임 육군참모총장이 노태우 직계인 이진삼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인맥이 군을 독점하고 있다는 비판을 신경썼다는 의견이 있다.[19] 민정계면서도 신민주계에 속하는 김기춘 또한 김진영과 같은 거제도 출신이었다.[20] 과거에는 6월과 12월에 정기 군 인사를 실시했다. 이 때 이후로 4월과 10월로 바뀌었다.[21] 그에 비해 하나회 선배 박희도는 노태우에게 숙청당해 육군참모총장에서 해임당했을 때 전역식에서 부들부들 분노에 떨면서 불만이 가득 섞인 전역사를 남긴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