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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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웅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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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51번
김경호
(1995~1997)

김진웅
(1998~2004)


김덕윤
(2005)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8번
박석진
(2004.7.13.~2004)

김진웅
(2005)


정홍준
(2006~2010)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51번
김대익
(2006~2007)

김진웅
(2008~2010)


김기태
(2011)


A대표팀 참가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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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mage/076/2010/10/22/2010102201002217100108581.jpg
김진웅
金鎭雄 | Kim Jin-woong

출생
1980년 2월 20일 (44세)
대구광역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옥산초 - 경운중 - 대구고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8년 고졸우선지명 (삼성)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1998~2010)
지도자
대구중학교 야구부 코치 (2017~2018)
영문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19)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20~2021)
병역
공익근무요원 (2005~2007)

1. 개요
2. 선수 경력
2.1. 데뷔, 그리고 짧았던 전성기
2.2. 비운의 시작
2.3. 몰락
3. 은퇴 후
4. 여담
5. 연도별 성적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삼성 라이온즈의 야구 선수. 새가슴을 언급할 때 TOP 10에 꼽히던 선수.

입단 당시에는 김시진, 김상엽, 박충식 등의 뒤를 잇는 삼성 라이온즈프랜차이즈 에이스가 될 것이라 할 정도로 촉망받는 강속구 투수였으나[1] 우여곡절 끝에 선수 인생이 끝나 버렸다. 입단 초기 비슷한 강속구 새가슴으로 팬들의 우려를 사던 배영수가 펠릭스 호세의 참교육 이후 흔들리지 않는 배짱을 갖춘 진정한 에이스로 거듭난 것과 비교해 보면 아쉬움이 남는 선수이다.

여담으로 학창시절 및 프로 데뷔시절 김수경라이벌이었다는 것이 과거 팬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두 선수 모두 연고지 팀의 고졸우선지명을 받아 입단했을 때 계약금도 적지 않게 받았었다.


2. 선수 경력[편집]



2.1. 데뷔, 그리고 짧았던 전성기[편집]


삼성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입단, 데뷔 시즌인 1998년에는 불펜으로 뛰며 3승 4패 ERA 3.17에 그쳤지만[2][3], 프로 2년차인 1999년 11승을 기록하였다.[4] 2000년에는 무려 15승을 거두며 명실상부한 에이스로서의 입지를 굳혔으며 2년 연속 170이닝 이상 소화했을 정도로 이닝 소화력도 좋은 편이었다.[5] 2001년에도 11승을 기록하여 3년 연속 두 자리수 승을 거두며, 향후 삼성을 대표하는 에이스로 성장할 거라는 기대와 함께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2001년 당시 삼성의 김응용 감독은 허약한 중간계투진의 강화를 위해[6], 구위가 좋다는 이유로 시즌 중 김진웅을 마무리로 돌렸고, 그로 인한 후유증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임창용이 2001년부터 선발투수로 전향하면서 외국인 투수 벤 리베라가 삼성의 마무리 역할을 하고 있었으나, 구단이 조금 불안한 모습을 보였던 리베라를 퇴출하고 용병을 교체하면서[7] 김진웅은 선발에서 중간계투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뒤 선발에는... 무려 갈베스가 있었다[8][9][10]


2.2. 비운의 시작[편집]


2001년 삼성 라이온즈는 정규 시즌을 우승하고 한국시리즈에 먼저 진출하게 된다. 삼성의 상대는 대놓고 열세로 보여지던 두산 베어스였고 모두가 삼성의 우승을 점치던 상황.

하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 보자 있는 건 줄곧 얻어맞기만 하는 삼성의 투수들 뿐. 특히 김진웅은 나오는 족족 털리며 새가슴 인증을 제대로 한다. 가장 심각했던 건 4차전으로, 6점차로 앞서고 있던 상황에서 옵션 챙겨먹고 지네 나라로 야반도주했다가 다시 끌려온 발비노 갈베스와 함께 한 이닝 12실점을 합작했다. 이 때의 평균자책점무려 130에 육박할 정도였다.

그 동안 계속 새가슴으로 지적[11]받아오던 것이, 이 해 한국시리즈의 떡실신이 기폭제가 되어 이후 멘탈이 완전히 무너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결국 이 때의 후유증으로 2002년에는 시즌 첫 승을 완봉승으로 장식했으나, 그것이 그 해의 처음이자 마지막 승리였고, 얼마 안 가 당시 비밀번호에 빠지기 시작하던 롯데를 상대로 9회 2사 후 최다점수차 역전패라는 참사를 일으키는 등 부진한 모습을 보인데다가 부상까지 겹치며 중도 아웃되며 단 1승에 그친 채 그대로 시즌을 마감해버렸고, 영광의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 때 김진웅은 아예 엔트리에 없었다.

2003년과 2004년에는 배영수와 함께 삼성 선발진에서 로테이션을 돌며 2년 연속으로 정규 이닝을 채우고 9승씩 거두며 부활하는 기미를 조금 보이기도 했으나, 여전히 KBO 포스트시즌에는 최악의 모습을 보여 줬다. 2003 시즌에는 준 플레이오프 선발로 나왔다가 SK 와이번스에게 털렸고,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3차전에 선발 등판하여 6이닝 3실점으로 호투하며 데뷔 첫 포스트시즌 승리를 거두었으나, 한국시리즈 최고의 명경기 중 하나로 뽑히는 9차전에 선발로 나와 2이닝만에 5실점을 하며 조기 강판되는 등 약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여담으로 3차전, 5차전에서는 고교 시절부터 라이벌이었던 김수경과의 대결에서 1번 이기고 1번 비겼다.

2005 시즌 초반에 팔꿈치 부상을 당하며 시즌을 마감했다. 그리고 이게 그의 1군 커리어가 마지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토미 존 서저리를 받은 후 병역을 치르기로 하고 그 해 말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였다.

그러나 이 때 삼성 라이온즈 구단에서는 팔꿈치 수술을 받은 그에게 사회복무요원이 아닌, 1년 재활 후 상무 입대를 권유했다.[12][13] 이유는 김진웅이 자기관리를 잘 못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었기에, 구단에서는 관리가 엄격한 상무가 최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진웅은 구단 측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팔꿈치 수술을 받아서 1년 간 재활하는 바에는 빨리 입대하여 병역과 병행하고 싶어서 사회복무요원 입대를 강행한다.

하지만 토미 존 서저리 경험자라서 어거지로 등급을 높여 상무에 지원해봐야 어차피 떨어졌을 것이란 의견도 있는데 이러면 또 1년을 더 날려야 한다.당시 경찰 야구단이 새로 생긴 팀이라서[14]지원률이 무시무시했을 가능성도 높았기에 차라리 이 편이 나았을 가능성도 높다.

그리고...


2.3. 몰락[편집]


2008년, 김진웅은 삼성라이온즈로 복귀했지만 공익근무요원 복무 기간동안 자기관리가 되지 않아 잔뜩 살이 찐 상태가 되어 있었다. 이대로는 공을 던질 수 없어 당연히 살을 빼야 했지만 무릎 부상으로 인해 제대로 살을 뺄 수도 없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그에게는 스모선수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붙게 된다. 김진웅의 사례는 상무보다 공익근무요원(현 사회복무요원)으로 가는 것이 낫다는 주장의 적절한 반례가 되었다.

소집해제되어 복귀한 이후 단 한 번도 1군 로스터에 등록되지 못한다. 2009년에는 연봉이 1억 3,500만원에서 3,500만원으로 폭풍 삭감을 당하기도 했다. 일부 삼성라이온즈 팬들은 매년 부활을 예고하는 기사에는 등장하지만 정작 한 번도 1군에서 모습을 비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KIA/LG 강철민 선수의 별명 사이버 투수에서 착안한 별명인 사이버 스모선수로 부르기도 했다. 줄이면 사스

2009년~2010년 2년 연속 결국 한 번도 1군에 올라오지 못했고, 2010시즌 후 임동규 등과 함께 방출 통보를 받았다. 그의 나이 겨우 30세. 데뷔 초 받은 기대, 임팩트와 활약에 비하면 너무 빠른 은퇴[15]였다.


3. 은퇴 후[편집]


2013년에는 같이 방출된 임동규와 마찬가지로 사회인야구에서 활동했다. 2013년 통산 기록

2017년에는 대구중학교 야구부 코치로 있었고 2019년에 영문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를 맡았다. 여전히 살을 못 뺐다 2020년에는 경북 예천군의 예천리틀야구단 감독을 맡았으며 2020년 말 황재규 코치의 후임으로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로 부임했으나 오래 가지는 못 했다.


4. 여담[편집]


같은 팀 선배들이였던 오상민, 노장진 등처럼 사생활막장인 천재형 선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야구는 밥벌이로 하고 자기 하고싶은 일 다 하면서 인생을 즐기는 것 같은 마이페이스형 한량 오상민과 길들일 수 없는 골치덩어리에 천방지축 막가파인 노장진과 달리 이 쪽은 그야말로 무개념에 분위기 파악 못하는 철부지에 심약해서 건드리면 땡깡부리는 일명 노진구 같은 스타일.

이와 같은 성향은 경기에서도 의심의 여지없이 드러나는데, 즐기는 한량답게 배짱 넘치는 투구로 어떤 상황에도 긴장한 표정 하나 안 보이고 항상 자신만만했던 오상민과 가끔 불질을 할때도 맞으니까 혼자 돌아서 한 가운데에다가 냅다 '한번 더 쳐보시지' 라고 말하는 듯한 빠른 공을 던져대는 노장진과 달리, 잘 던질 땐 분위기타서 얼굴이 희희낙낙, 주자 나가면 심장이 콩닥콩닥 갈피를 못잡다가 나중에 볼넷을 주거나 자신의 불질로 인해 연속으로 실점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결국 얼굴이 붉어지며 눈물이 그렁그렁 하는 모습[16]이 매우 확실하게 드러났다. 이런 면모에서 보듯 밀리다가도 한번씩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던 둘과 달리 김진웅은 한번 밀리면 속절없이 계속 밀렸다.

프로 입단 3년차가 되던 2000년에 친구와 놀러 가야 한다는 이유로 팀 소집을 무시한 적이 있다고... 결국 이 일로 당시 코치였던 류중일에게 엄청 맞았다고 한다. 그 온화한 성격의 류중일 감독이 코치 시절 노장진과 함께 손찌검을 한 둘 뿐인 선수[17]. 결국 이러한 성격이 소홀한 자기 관리로 이어지고 말았고, 나아가 그의 선수 생활까지 일찍 끝내 버렸다.

비슷하게 우완 강속구 에이스로 기대받았던 후배 배영수와 비교되는데, 이쪽은 2006년의 오버 피칭과 성급한 복귀로 인해 구속이 10km나 감소[18]하는 혹독한 시련을 맞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노력한 결과 2014년까지 주전 선발로써 제 역할을 다했고 마지막 선수 생활에는 불펜 역할로도 최선을 다하며 우승반지를 총합 8번 (2002, 2005, 2006, 2011, 2012, 2013, 2014, 2019(두산))이나 획득하며 노력의 대가를 누린 반면, 김진웅은 말 그대로 가능성에서 멈춘 채 우승 반지 하나 없이[19] 쓸쓸하게 KBO를 떠나고 만다.

투수들이 군경팀 입대보다는 사회복무요원으로 병역을 이행하는 게 낫다는 주장의 반례로 흔히 인용되기도 한다.


5.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승률
ERA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WHIP
1998
삼성
28
76⅔
3
4
0
-
0.429
3.17
62
7
46
55
27
27
1.41
1999
34
171⅔
11
13
0
-
0.458
5.40
173
23
89
144
115
103
1.53
2000
32
173⅓
15
(5위)
7
1
0
0.682
(3위)
4.93
183
23
72
136
(5위)
99
95
1.47
2001
43
141
11
7
12
2
0.611
3.96
132
14
63
129
(5위)
65
62
1.39
2002
18
50⅓
1
4
3
0
0.200
6.97
59
9
24
60
40
39
1.65
2003
32
153⅓
9
11
1
0
0.450
4.05
151
19
75
99
75
69
1.47
2004
35
135⅓
9
7
0
2
0.563
4.32
126
12
83
99
73
65
1.54
2005
12
19⅔
1
1
1
0
0.500
4.58
14
6
11
15
10
10
1.27
2006
군복무(공익근무요원)
2007
2008
1군 기록 없음
2009
2010
KBO 통산
(11시즌)
234
921⅓
60
54
18
4
0.526
4.59
900
113
463
737
504
470
1.48

완투, 완봉기록
연도
완투
완봉
1999년
2완투
0완봉
2000년
2완투
1완봉
2001년
1완투
1완봉
2002년
1완투
1완봉
KBO 통산
6완투
3완봉

6. 관련 문서[편집]


[1] 이후 삼성의 에이스 계보는 배영수-윤성환으로 이어진다.[2] 김진웅이 중간계투로 시작한 것과는 달리 고교 시절 라이벌인 현대 김수경은 첫 해부터 선발투수 자리를 꿰차고 12승을 거두며 신인왕과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영광을 동시에 누리게 된다.[3] 데뷔 해였던 1998년에 열렸던 플레이오프 당시 특유의 구위로 인해 신인으로서 기대 이상의 피칭을 하여 삼성팬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기 시작했다.[4] 11승 13패. 이때 평균자책점이 5.40에 육박해 운이 좋았던거 아니냐 할 수 있지만 1999시즌은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타고투저 시즌이라 5점대 방어율도 준수하다고 평가받는 시즌이었다.[5] 다만 이해에도 평균자책점이 4.93으로 전년도의 타고투저 영향이 남아있는 걸 감안하면 그래도 높은 편에 해당된다.[6] 2001년 당시 중간계투진을 살펴보면 김현욱, 박동희, 라형진, 정현욱 등이 있었는데, 김현욱을 제외하면 모두 평균자책점이 높은 편이었다. 그리고 박동희는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화끈하게 불을 지르고 이듬해 웨이버 공시되어 방출당했다.[7] 2001년 시즌을 앞두고 영입되어 마무리를 맡았던 리베라는 6월 초에만 20세이브 이상을 올렸을 정도로 스타트가 좋았지만 전반기에만 무려 58이닝을 소화하며 무지막지하게 굴려졌다. 이로 인해서인지 6월 이후로는 구위가 급격히 저하된 상태였고, 허리에 부상을 안고 피칭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자유계약으로 방출할 경우 타팀으로 이적해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판단하여 타 팀이 영입하는 걸 막기 위해 임의탈퇴로 공시한 뒤 잔여연봉을 모두 지급하는(보통 임의탈퇴 공시될 경우 잔여연봉을 지급하지 않는다) 편법을 써서 퇴출시켰다.[8] 그래도 갈베스는 5월 중 영입되어 바로 특급 활약을 보였고 2001 시즌 승률왕이 되었다. 하지만 시즌 막바지에 갑자기 집안 사정을 들어 모국으로 귀국한 뒤 돌연 잠적해 몇 차례나 귀국을 연기했고, 어찌어찌해서 다시 데리고 왔으나 운동을 쉬어서 몸이 덜 만들어져서 그런지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 불쇼....로 인해 갈베스는 삼성 라이온즈의 팀 분위기를 다운시켜 버린 X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팀 분위기가 다운되면서 KS 우승을 놓쳐 버린 게 14년 후 똑같은 팀을 상대로 벌어지고 말았다.[9] 그런데 갈베스는 리베라의 대체 용병이 아니라 시즌 초 퇴출당한 살로몬 토레스의 대체 선수다. 리베라의 대체 선수는 내야수 카를로스 바에르가.[10] 이 시기 삼성구단은 김진웅을 정규시즌 중 중무리로 쓰며 시즌 중 보직전환에 이어 선수 관리에 문제점을 드러냈다. 물론 선수 본인도 이후 체중이 급격히 불어나는 등 자기 관리에 소홀했던 부분이 겹쳐있다.[11] 엄밀히 새가슴이라기보다는 컨트롤의 기복이 심했던 측면이 이후 자기관리의 실패와 결합된 구위저하와 혼합되어 이렇게 해석된 측면이 있다. 사실 스터프가 온전했던 데뷔 초에는 특별히 포스트시즌에 약한 선수는 아니었다.[12] 비슷하면서 정반대인 경우가 대구고 3년 후배 현대유니콘스 투수 손승락인데, 군 팀 입대를 거절하고 사회복무요원으로 입대한 김진웅과 달리 손승락은 2006 시즌을 마치자마자 토미 존 서저리 수술을 받은 뒤 1년간 재활을 마치고 2007년 경찰청에 입대했다. 수술과 병역으로 4년 간 1군 공백이 생겼지만, 제대 후 복귀 시즌인 2010년에 히어로즈의 마무리를 맡아 바로 세이브왕에 오르며 포텐이 터지는 등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이후 꾸준히 히어로즈의 뒷문을 지켜 주었고 2013년~2014년 2년 연속 세이브왕에 오르며 오승환을 잇는 KBO 리그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자리매김했다.[13] 손승락의 경우에도 당시 경찰 야구단이 인지도가 약해서 구단이 상무 입대를 권하였으나 본인이 경찰 야구단으로 간 것인데, 사실 따지고 보면 의경 기수 생기는거 말고는 별 다른 건 없다.[14] 경찰청은 4급까지 지원 가능했다.[15] 고원준의 선배격 되는 케이스이기도 하다. 고원준도 음주운전 및 관리실패와 혹사가 겹쳤다. 김진웅도 본인 관리실패도 있지만 2001년 시즌에 시즌 중 보직전환 및 젊은 선수를 중무리로 고용하는 등 삼성라이온즈 구단 및 코칭스태프의 선수관리에 문제가 없지 않았다.[16] 다만 이는 2001년 한국시리즈 이후 구위마저 저하된 뒤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땀을 많이 흘리는 타입이었을 뿐 2000년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도 선발 등판하여 호투했고 또한 삼성팬들이 주목하기 시작한 때가 1998년 플레이오프였다. 이로 미루어 특별히 새가슴이어서가 아니라 구위가 매우 뛰어났지만 자기관리미흡과 코칭스테프의 부적절한 관리의 결합으로 저하된 구위로 맞은 2001년 한국시리즈 및 그 직후 시즌부터의 구위상실로 마인드가 무너진 탓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17] 스프링캠프 도중 밤새 마시고 숙소로 돌아오다 감독에게 걸린 양용모에게도 손찌검했지만, 아직 현역 선수로 활동하던 백인천 감독 시절에 벌어진 일이었다. 화가 난 감독을 진정시키기 위해 팀 내 최고참으로서 대신 나선 것.[18] 구속 내려가는 게 좋은 투수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특히 우완 강속구 투수에게는 매우 치명적이다.[19] 노장진은 2002년, 오상민은 2002년, 2005년, 2006년에 우승 반지를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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