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1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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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철(1898).jpg

이명
김천근(金千根)
출생
1898년[1] 9월 6일
경상북도 경주군 남도면 수영포[2]
(현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 수렴리)
사망
1978년 3월 21일 (향년 79세)
경상북도 경주시 황오동 자택[3]
학력
경주 계남학교 (졸업)
대구 계성학교 (졸업)
일본 슈케에학교 (졸업)
주오대학 전문부 (법학 / 3학년 / 중퇴)
묘소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소현리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
2. 생애
3. 선거이력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전 정치인이다. 199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1898년 9월 6일 경상북도 경주군 남도면 수영포(현 경주시 양남면 수렴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주군 경주면 성건리(현 경주시 성건동)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일찍이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이후 경주 계남학교[4]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슈케에(主計)학교를 졸업하고 주오대학 전문부 법과를 다니다가 3학년 때 중퇴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11일부터 12일 이틀에 걸쳐 경주군 경주면 노동리(현 경주시 노동동) 교회당에서 목사 박내영과 장로 윤기효(尹琪涍) 등의 주도로 이튿날인 13일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박문홍의 집에서 태극기 300여 개를 만드는 등 준비를 하다가 일본 경찰에 사전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며칠 후 15일 그는 박봉록(朴鳳祿)·서봉룡(徐鳳龍) 등과 함께 경주면 장날에 장터에 모인 다수의 군중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15일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5]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4개월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경주 계남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신간회 경주지부장으로 활동하였다.

8.15 광복 이후 미군정청 경주군 고문을 역임하면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에서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경상북도 경주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일민구락부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안용대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자유당 안용대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의당 후보로 경상북도 경주시-월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이상무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78년 3월 21일 경상북도 경주시 황오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였으며, 199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3. 선거이력[편집]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경상북도 경주군 갑)
대한독립촉성국민회
15,333표 (40.11%)
당선
초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북도 경주군 갑)
일민구락부
2,829표 (7.0%)
낙선 (4위)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북도 경주군 갑)
무소속
15,116표 (33.18%)
당선
재선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경상북도 경주시-월성군)
국민의당
1,988표 (2.19%)
낙선 (6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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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896년으로 기재되어 있다.[2]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경주군 경주면 성건리(현 경주시 성건동)으로 본적이 기재되어 있으나, 수형인명부에 따르면 양남면 수렴리가 출생지라고 한다.[3] 당시 자택의 주소지는 황오동 359-7번지였는데, 2007년 3월 이곳 일대가 쪽샘유적지구에 편입되어 현재는 발굴 조사 중에 있다.[4] 1939년 경영난으로 폐교되었다.[5] 또는 경주지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