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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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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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축구 감독


파일:2022김태완.png

이름
김태완
金泰完 | Kim Tae-Wan

출생
1971년 6월 1일 (52세)
정부 직할 부산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180cm
직업
축구 선수 (센터백 / 은퇴)
축구 감독
군무 사무관 (계급 미상 / 퇴임)[1]
소속
선수
한일은행 축구단 (1994)
상무 축구단 (1995~1996 / 군 복무)
대전 시티즌 (1997~2001)
코치
상무 축구단 (2002 / 트레이너)
광주 상무 불사조 (2003~2010)
상주 상무 피닉스-FC (2011~2015)
상주 상무 FC (2016 / 수석 코치)
감독
상주 상무 피닉스 (2011 / 감독 대행)
상주 상무 FC (2017~2020)
김천 상무 FC (2021~2022)
기타
한국프로축구연맹 (2023~ / TSG 위원)
국가대표
없음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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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파일:김태완서명.png
학력
동래중학교 (졸업)
동래고등학교 (졸업)
홍익대학교 (학사)
종교
개신교 (예장합동)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4. 지도자로서의 평가
5.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감독. 2017년부터 2022년까지 상무 축구단 감독을 맡았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중앙 수비수였다.


2. 선수 경력[편집]


파일:Screenshot_2017-09-26-23-27-25-1.png

동래고등학교와 홍익대학교를 졸업한 후 실업 팀인 한일은행 축구단에서 1년 간 몸담고 상무에 입대해 군 복무를 수행했으며, 입대 후 곧바로 1회 세계 군인체육대회에 출전하기도 하였으며, 4강전 승부차기에서 실축하면서 한국은 아쉽게 4강 문턱을 넘지는 못했다.

제대 후 1997년 대전 시티즌의 창단 멤버로 입단하며 프로 무대에 입문한 그는 1998년에 대전의 2대 주장으로 선임되었으며, 팀의 중앙 수비의 핵심 자원으로 활약하며 팀의 2001년 FA컵 우승을 이끌었다.

2001시즌 후 구단으로부터 유소년 지도자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하고 대전 구단을 떠났으며, 새로운 소속팀을 알아봤으나 당시 에이전트가 없던 김태완은 해외 이적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고, 동남아 지역 팀과 어느 정도 이야기는 해봤지만 마음에 와닿지도 않았다고 한다.#


3. 지도자 경력[편집]



3.1. 광주 상무 불사조-상주 상무 피닉스-FC 코치[편집]


2002년부터 상무가 광주에 연고지를 정하고 K리그에 참가하면서 상무는 당시 프로 리그에 출전하기 위해 선수 정원을 25명에서 44명으로 늘렸고, 그러면서 필요한 코치 수도 덩달아 늘면서 이강조 감독의 부름을 받아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상무의 코치로 취임해 15년 동안 코치로 활동했고, 2011년 3월에 정식 군무원이 되었다.[2] 시즌 중반 이수철 감독이 승부 조작 사건으로 군 검찰에 의해 구속당하자 감독 대행으로 팀을 이끌었다. 2013 시즌과 2015 시즌에는 박항서 감독을 잘 보좌하며 K리그 챌린지 우승 및 승격을 이끌었으며, 2016 시즌에는 조진호 감독을 잘 보좌하며 팀의 사상 첫 상위 스플릿 A 진입을 이끌었다.


3.2. 상주 상무 FC 감독[편집]



3.2.1. 2017년, 2018년[편집]


2017 시즌을 앞두고 조진호 감독이 부산 아이파크 감독으로 취임하며 자리를 옮기게 되자, 조진호의 후임으로 상주 상무의 감독으로 승격했다. 김태완은 2002년부터 15년 동안 상무에서 활동하며 상주시, 구단, 국군체육부대 간 운영 체계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선수와 소통 능력이 뛰어나다는 게 감독 선임 이유였다. 상무 구단으로는 5년 만에 현역 대한민국 군무원이 감독자리에 올랐다.[3]

3월 4일 강원 FC전을 통해 감독 데뷔전을 치렀으나 1:2로 패했고, 12일 전남 드래곤즈전에서 3:1 승리를 거두며 감독 데뷔 이후 첫 승을 거두었고, 연이어 펼쳐진 울산 현대전에서 연승을 거두었다.

김태완은 애초에 4-3-3 포메이션을 선호하는 듯했지만 팀이 상대를 압도하는 경기가 적어진 팀 사정상 5-4-1을 주로 사용했으며, 그 외에도 5-3-2, 4-4-2 등 포메이션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주로 측면에서 짧은 패스를 통해 만들어 나가거나 크로스를 통한 득점을 노리는 편이며, 김호남, 주민규 ,김태환으로 구성된 쓰리톱으로 공격을 풀어가는데 이들을 앞세운 빠른 역습이 상당히 위협적이였다. 반면 너무 측면을 지향하는 탓에, 안 풀릴 땐 한없이 답답해진다는 흠이 있었다.

또한 본래 수비 라인을 상당히 끌어올리는 편이었는데 날이 갈수로 점차 수비 라인이 낮아졌지만 강한 전방 압박은 계속 유지해 왔다. 하지만 매번 선수단이 대거 바뀌고 제대 시즌만 내면 주전 선수가 대량으로 빠져나가는 군경 구단의 특정상 조직력이 좋지 못하다는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고 끝내 리그 11위를 기록하며 승강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됐다.

그러나 여름구덕에서 열린 승강 PO 1차전에서 부산 아이파크에게 찬물을 끼얹으며 기선을 제압했고 에서 열린 승강 PO 2차전 승부차기고경민의 실축으로 끝내 부산 아이파크를 이기며 K리그1에 잔류했다.

이어 2018년에도 군경 구단의 한계를 극복하고 다시 한번 K리그1에 잔류시킨다. 그것도 승강 PO 그런 거 없이 잔류에 성공했다.


3.2.2. 2019년[편집]


2019 시즌에는 리그 초반 9경기 동안 4승 2무 3패로 강등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위 스플릿 경쟁을 하는 비범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이는 잠깐에 그치지 않고 10월 33라운드까지 이어졌으며, 2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 없이 잔류를 확정지었는데, 백3를 기반으로 3명의 중앙 수비수들이 번갈아가면서 공격에 가담하면서 미드필더의 숫자를 늘려주는 변화무쌍한 전술을 들고나오면서 상승세의 이유였으며, 특히 김영빈, 권완규 등 센타백으로서는 신장이 크지 않은 선수들을 과감하게 기용하면서 전술적 다양성을 더해갔다.

권완규는 원래 오른쪽 수비수였기에 중앙 자리에서 과감한 공격 가담이 익술할지라도 센터백 출신인 김영빈의 왼쪽 오버래핑은 상당히 신박했으며, 백3 중앙에는 김경재라는 신예를 키워냈고, 김경재 이외에도 김영빈, 권완규 등의 수비자원들의 주가가 상승했다.


3.2.3. 2020년[편집]


2020 시즌을 앞두고 교통 사고로 일부 선수가 부상을 당하면서 U-22 룰을 가동할 수 없어 교체카드 활용에 핸디캡을 안게 되었고, 울산 현대와의 개막전에서 4:0 완패하며 불안한 시작을 알렸지만 강원과의 2라운드에서는 2:0 승리를 거두며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다.

울산전에서 상대 진영에서부터 적극적인 전방 압박으로 덤비다가 이청용, 윤빛가람, 신진호를 중심으로 한 울산의 빠른 빌드업과 김인성, 김태환의 개인 속도, 주니오의 결정력에 잇달아 당했던 상주는 강원전에는 수비 위치를 조정했는데, 1차 압박 저지선의 위치를 하프라인 부근에 형성했다. 강원도 울산처럼 3자 플레이나, 측면과 배후 공간을 노리는 전환 패스로 정확하고 빠른 공격 전개를 만들어 나가는 팀이었다. 거기에 당하지 않기 위해 냉정하게 압박 위치를 조정하고, 최전방부터 수비까지 3선의 간격 유지를 신경 썼고, 이로한 수비 위치 조정으로 병수볼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7라운드 서울과의 홈경기에서 김진혁이 결승골을 넣으면서 1:0으로 서울을 이기며 서울을 4연패로 빠뜨렸다. 8라운드 성남과의 원정경기에서 후반 90분에 문창진이 페널티킥 결승골을 넣으며 1:0으로 성남을 이겼다.

이후 9월 상주 상무 사상 두번째 파이널 A그룹에 안착시키는데 성공했다.


3.3. 김천 상무 FC 감독[편집]



3.3.1. 2021년[편집]


올해부터 상무팀이 상주 상무가 아닌 김천 상무 FC로 이름이 바뀌었다. 연고지도 함께 바뀌면서 신생팀으로 간주되어서 K리그2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2021년 김태완이 제시한건 행복 축구였는데, 선수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축구만큼은 마음껏 펼쳐 보이는 것을 우선 목표로 뒀고, 치열한 전쟁터를 놀이터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의 모토였다.

부상자에 전역자와 신병이 합류하는 등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 개막 2경기에서 1무1패로 주춤했고, 3월까지 1승1무2패로 부진했지만 4월 들어 2승1무1패로 조금씩 분위기를 바꿨고 6월부터 힘을 내기 시작했고, 착실히 승점을 쌓으며 리그 선두권을 달리기 시작했고, 6월 K리그2 4경기에서 전승을 거두면서 6월 리그 이달의 감독에 선정되었다.#

7월 3일 대전 하나 시티즌전 4:1 승리로 리그 5연승을 거두었다.

특히 7월 10일 FC 안양과 20라운드 이후 14경기 연속 무패의 상승세를 이어오며 K리그2 부동의 선두 자리를 쭉 지켜왔으며, 10월 17일 부천 FC 1995전 승리로 K리그2 우승과 1부 리그 승격을 확정지으며, 감독 커리어 처음으로 우승을 경험하게 되었다. 정규시즌 종료 후 K리그 어워드 2021K리그2 감독상을 수상했다.

3.3.2. 2022년[편집]


22시즌 초반 차곡차곡 승점을 쌓았지만 군대팀 특성상 조직력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5~6월 9경기 무승을 기록했다.

가까스로 승리를 챙겼지만 또 다시 4경기 무승에 허덕였고, 2022시즌 김천의 공격을 책임진 공격수 조규성을 비롯한 주전 선수 상당수가 전역으로 시즌 중반 팀을 떠나기까지 하며 강등권을 허덕였다.

10위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리그 최종전까지 패하며 리그 11위를 확정, 친정팀 대전 하나 시티즌과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다.

수원 삼성과의 경기는 애초에 권창훈이나 고승범같은 주전을 많이 빼고 로테이션을 돌린 경기였다. 아무래도 라인을 끌어올릴 수원 삼성에 맞춰 스피디한 선수들을 적절히 배치하였고 실제로 이영재, 김경민 등이 이 전략을 깔끔히 수행했지만, 아무래도 공격력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평이 많다.

그러나 플레이오프 1차전인 대전 원정에서 선제골로 앞서가다 1:2로 역전패했고, 이후 김천 홈에서 0:4로, 총합 1:6으로 대패를 당하며 K리그2 강등이 확정되었다.

시즌 종료 후 2022년 11월 23일 상무에 군무원 퇴직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상무에서의 긴 감독 커리어를 마치게 될거란 보도가 나왔다.#

최근 국방부에서는 국군체육부대 각 부서 감독이 장기적으로 팀을 맡으면서 정체에 빠진다는 점에 우려를 표했고, 장기 근속자인 김태완 감독도 최근 부대로부터 이와 관련한 압박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4]

무엇보다 다수의 K리그 팀이 현재 오퍼를 넣은 상태라고 하는 만큼 김태완 본인도 새로운 도전을 원했던 것으로 보이며, 12월 9일에 정식 사임하며 21년 만에 상무를 떠났다.[5] 후임은 정정용이 선임됐다.

어차피 연금도 수령하고 20년 이상 상무에서 군무원으로 근무한 만큼 더 이상 미련이 남을 가능성도 낮고, 감독으로써는 최전성기인 50대에 접어든 만큼 굳이 압박이 아니더라도 타 프로 팀에서 지도자 경력을 만드는게 훨씬 이득이다.[6]

이후 인터뷰를 보면 군경 구단의 특성상 꾸준한 전력을 갖추지 못하고 이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 싶으면 선수 절반이 전역하고, 또 신병이 들어오면 처음부터 팀 전력을 다시 다지는 일을 반복하는 일에 지치고 열정이 식었다고 하며, 그러한 이유로 그전부터 상무를 떠날 생각이었다고 한다.

퇴임 이후에는 잠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며 휴식을 취할 예정이라고 하는데, 해외로 나가 세계 축구가 어떤지를 보고 싶다고 한 것을 보아 변수가 없는 한 최소한 23시즌 전반기는 보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3.4. 야인 시기[편집]


하지만 휴식을 취할 것과는 다르게 2023시즌 TSG(기술위원)으로 활동을 재개했다.#

거주지의 경우 그대로 국군체육부대가 있는 경북 문경에 두는 듯 하다.[7]

2023년 4월 17일 이병근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결국 경질되었고 수원 삼성 블루윙즈 의 유력한 차기 감독으로 거론되고 있다. 만약 부임이 확정된다면 2010년에 지휘봉을 놓은 차범근 이후로 약 13년만에 非 수원 출신의 감독이 지휘봉을 잡게 된다.[8] 그러나 후속 기사로 김병수 감독이 부임한다는 단독보도가 나오면서 부임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아무래도 2022 시즌 강등 당한 감독이라는 점에서 감점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결국 김병수가 수원에 부임하며 감독직이 공석이 될 가능성이 높은 천안과 김두현 대행 체제인 전북에도 이름이 오르내렸나 가능성은 적은 상태였다.

유튜브 채널 슛 포 러브에서 기획하는 국뻥투어에 출연했다. 전현직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선수들의 닮은 꼴을 모아 팀을 꾸려 아마추어 축구 대회에 나가는 컨텐츠인데, 김태완 감독은 상무 감독 시절 별명에서 딴 펩 관물대올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한편 2023년 8월말 소문에 의하면 안익수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자진해서 사퇴하면서 공석이 된 FC 서울의 감독 후보군에 오르고 있다고 한다. 성사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4. 지도자로서의 평가[편집]


퇴임한 2022년까지 김기동과 더불어 K리그 최고의 지략가로 꼽혔다.[9]

군인들이 모인 상무의 특성상 스쿼드 변동이 잦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꾸준히 성과를 보여주었으며 성장이 정체된 유망주나 폼이 떨어진 선수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데도 일가견이 있다.

특히 센터백 출신인데도 공격수를 잘 키우는 것으로 유명한데 원 소속 구단에서는 터질 듯 말 듯 애매한 모습을 보이던 공격수들이 상무에 가서 살아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때문에 미필인 공격수가 부진하면 빨리 군대 가서 관물대올라의 지도를 받으라고 닦달하는 것이 일종의 밈처럼 자리잡았을 정도.[10]

그때그때 입대하는 선수들의 성향이 전부 같을 수는 없으므로 상무의 감독은 전술에 고집을 부리기 보다는 다양한 전술을 상황에 맞춰 사용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대한민국 최고 수준이다.

측면 크로스를 통한 타켓 스트라이커의 득점, 윙어의 주력을 활용한 간결한 역습 전개, 수비진과 중원에서 풀어나가는 빌드업 등 다양한 공격 세부 전술을 보여주고 있으며, 현대 축구에서 가장 강조되는 부분인 윙백의 공격적인 움직임을 통한 측면 플레이 역시 자주 볼 수 있다.

단점으로는 수비 시 하프 스페이스 부분에서의 수비 조직력이 자주 흐트러진다는 부분을 지적받기도 하지만 계속 전략을 바꿔야 하는 구단 사정상 용인될 만한 수준이다. 다만 김태완이 능력있는 감독이긴 하나 너무 과대평가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일단 그가 맡았던 상무는 일반적인 프로 구단이 아니기도 하고, 상무에 지원해 합격하는 선수들은 리그에서 어느 정도 검증된 이들인데 그런 선수들을 데리고도 2022시즌 강등을 막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드러났다는 평가도 있다.

때문에 김태완의 감독으로서의 역량은 그가 군인팀이 아닌 프로 구단의 감독을 맡고 나서 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5. 여담[편집]


  • 워낙 용모가 범상치 않아서, 처음 보는 사람들은 "역시 군경 구단이라서 행보관이 K리그 감독을 하는구나"라는 오해를 한다고 한다(...). 게다가 상무에 워낙 오래 있어서 그런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파일:Screenshot_20210312-131033_NAVER.jpg

  • 2018년 개장한 대전 시티즌 뮤지엄에 가면 선수 시절의 모습을 볼 수 있다.#[11] 위의 사진처럼 한 때 금발로 염색하기도 했다. 다만 본인의 언급에 따르면 저때 이후로 탈모가 심해져서 아예 밀어버렸다고 한다.

  • 2021년 두피 문신을 해서 이마 라인이 다시 살아났다.

  • 대전 시티즌 선수 출신으로는 최초로 프로 구단 감독이 되었다.[12]

  • 군무원 연금을 수령하려면 20년을 근무해야 하지만 연금 제도 개편으로 10년 이상 근무자도 수령이 가능해지면서 연금 수령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상무 감독 재직 기간과 과거 용사로 복무했던 기간을 합치면 10년을 넘기 때문이다. 그리고 2022년에는 이와 상관없이 용사 시절을 제외하더라도 트레이너 시절부터 상무에서 근무한 지 20년이 넘었기에, 이전 기준에서도 수령이 가능하다.[13]

  • 상무에서 선수로 뛰던 시절에는 최고참이 김도훈이었다고 하며, 분대장을 했다고 한다. 분대장 훈!

  • 본인의 별명 펩태완, 관물대올라에 대해 과분한 별명이라고 했으며 별명을 지어준 분은 진짜 얼굴을 한번 보고 축구화라도 선물로 주고 싶다고 하였다. 다만 실제로는 위르겐 클롭을 더 좋아한다고 한다.

  • FM에서 히든 능력치가 "17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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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2년 12월 30일이 정식 퇴임일로 현재는 민간인이다.[2] 다만, 김태완은 처음부터 상무에서 코치 생활을 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현역 선수 생활을 은퇴할 생각도 전혀 없었고, 할 일도 없으니 반쯤 마지못해서 코치 일을 시작한 것이었다고 한다.[3] 이강조 감독 이후 이수철 감독, 박항서 감독, 조진호 감독 모두 군무원 대우는 받았지만, 임기제 군무원이었다.[4] 국군체육부대는 각 부서 감독이 오랜 시간 팀을 맡아오고 있는 것과 관련해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5] 공식적으로는 군무원 임기 및 계약이 종료되는 2022년 12월 30일까지 감독 업무를 맡고, 계약 만료에 따라 자연스럽게 팀을 떠난다고 한다.[6] 무엇보다 기간에 비해 진급도 잘해서 30년 넘게 근무해도 달기 힘든 사무관을 달고 퇴임하게 되었다.[7] 상무 생활을 20년을 하다 보니 아예 정착한 듯 하며 새로운 팀 감독을 맡게되지 않는 이상 이사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8] 최성용, 주승진은 P급은 있지만 아직 라이센스 잉크도 안 마른 초보이고(심지어 주승진은 감독대행시절 총체적 난국이라 불렸을만큼, 수원 팬들도 극히 싫어하는 지도자다.), 김병수는 전술도 괜찮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만 강원 시절 호불호가 세게 갈렸으며, 김도훈은 성적은 제일 좋으나 전술이 단조롭고 베테랑을 선호하며, 실점이 적긴 하지만 그만큼 수비적인 편이라 수원과는 안 맞는다. 무엇보다 김도훈이 울산 시절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김도훈의 지도력보다는 최고수준의 선수단과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 평가받는다. 대표적으로 2020시즌의 아챔 우승.[9] 2023년에는 이정효가 광주를 2부에서 끌어올린 후 혜성처럼 등장해 김기동과 양대 산맥이라 평가 받는다.[10] 대표적인게 조규성이다. 물론 전북에서도 촉망받는 유망주였지만 상무에 다녀온 후 스텝업을 해서 리그에선 득점왕을 차지하고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 무대에서 멀티골을 터뜨리는 등 대활약으로 유럽 진출까지 노리는 스타덤에 올랐다.[11] 대전 시티즌 뮤지엄은 대전월드컵경기장 내부에 있다.[12] 두 번째가 고종수 감독, 세 번째가 박충균 감독, 네 번째가 김길식 감독이다.[13] 기간제 혹은 계약직 공무원도 일정 기간 근무하면 수령 가능하며, 남성의 경우 병역 의무를 마쳤다면 저 기간 또한 합산됨과 동시에 호봉도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