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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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澤榮
1850년(철종 1) ~ 1927년 (향년 77세)

1. 개요
2. 생애
3. 독립운동가로서의 삶


1. 개요[편집]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화개(花開), 자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 당호는 소호당주인(韶濩堂主人)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협력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2018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택영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하고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2. 생애[편집]


김택영은 1850년(철종 1) 개성부에서 통사랑(通仕郞) 개성부분감역(開城府分監役)을 지낸 김익복(金益福)과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윤희락(尹禧樂)의 딸 사이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형 김윤영(金潤榮)이 있었고, 아래로 동생인 김한영(金漢榮)과 김호영(金浩榮)이 있었다.

그는 1891년(고종 28) 증광시 진사시에 2등 11위로 급제하였다.# 1894년 편사국 주사[1]가 되었고, 1895년에는 중추원 서기관 겸 내각 기록국 사적(史蹟) 과장이었지만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런 행적 때문에 김택영은 한국 사학사에 이름을 올리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일본에서 작성된 서양식 역사서의 번역에 가까웠다는 비판을 받는다.[2]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중국에 망명, 북경 통주(通州)[3]에 기거한다. 친하게 지냈던 중국인 계몽운동가의 소개로 한묵림서국이라는 중국의 출판사에서 근무하며, 학문연구, 시작, 조선문화예술작품 정리, 한민족 역사저서 편찬 등 다양한 일을 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독립운동가와 교류하기도 했다. 1927년 국공합작의 실패로 조선독립의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자결하였다. 이건창과 함께 구한말 2대 천재라 불린다.



3. 독립운동가로서의 삶[편집]


대한제국의 망국을 직감하고 낙담하여 을사조약이 성립되기 바로 전 해였던 1909년 중국에 망명했다. 중국에서 계몽운동가, 지식인, 기업가였던 장지안과 인연이 닿게 되었고, 그의 권유로 한묵림서국(翰墨林書局)이라는 출판사에서 일하게 된다. 한묵림서국에서 일하는 동안 한민족이 남긴 예술품, 문화적 자산들을 기록 및 정리하여 문헌으로 남겼다.

1909년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자 안중근의 영웅적 면모에 감격하면서 안중근을 주제로 수많은 지를 지어 남겼다. 오늘날까지 전해져내려오는 안중근 관련 시조 중에서 안중근보국수사(聞義兵將安重根報國讎事)는 단연 으뜸으로 꼽히고 있다. 1910년 한일병합(경술국치)의 사실이 알려지자, 상복을 입고 곡을 하면서 망국의 설움을 토해내면서도 일제에 대하여 비분강개 했다. 그의 절친한 벗 황현(黃玹)도 망국의 분노와 고통을 못이기고 단식 끝에 절명하자 1912년 매천이 남긴 여러 저술작품들을 한묵림서국에서 정리하여 출판했다. 김택영이 정리하여 출간한 매천의 작품 중에 오늘날 국사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매천야록(梅泉野錄)이 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김구를 비롯한 다양한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중화민국정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와달라고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중국에 망명해 있는 동안 우리 민족의 역사에 관한 다양한 저술과 한민족 영웅들에 관한 전기를 저술하여 출판했고, 이는 식민지배를 받던 당시의 한반도 국내에까지 유입되었다. 그가 직접 집필 또는 편찬했던 많은 문예작품들은 식민지배체제하의 한민족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2018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독립유공자로 지정,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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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편사국은 갑오개혁 이후 역사를 편집하여 엮는 의정부의 한 국(局)으로, 역할은 말 그대로 역사를 기록하는 것. 편사국에는 참의 한 사람, 주사 네 사람을 두었다.[2] 그가 집필한 역사집략에는 조선이 중국의 분가였다는 모화사상이나 신공황후의 신라정벌 등 일본서기를 인용한 임나일본부 등이 실려있는데, 사실 당시의 조선인들의 역사인식이랑 지금의 한국인들의 역사인식이랑은 좀 차이가 있다.[3]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퉁저우(通州)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