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렬

덤프버전 :


파일:정부상징.svg
파일:부총리 겸.svg>
파일:기획재정부장관.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 펼치기 · 접기 ]
재무부장관 (1948~1994)

초대
김도연
제2대
최순주
제3대
백두진
제4대
박희현
제5대
이중재


제6대
김현철
제7대
인태식
제8대
김현철
제9대
송인상
제10대
윤호병


장도영 내각


송요찬 내각


박정희 내각

제11대
김영선
제12대
백선진
제13대
김유택
제14대
천병규
제15대
김세련

김현철 내각


제16대
황종률
제17대
박동규
제18대
이정환
제19대
홍승희
제20대
김정렴

제21대
김학렬
제22대
서봉균
제23대
황종률
제24대
남덕우
제25대
김용환


제26대
김원기
제27대
이승윤
제28대
나웅배
제29대
강경식
제30대
김만제



제31대
정인용
제32대
사공일
제33대
이규성
제34대
정영의
제35대
이용만

제36대
홍재형
제37대
박재윤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1961~1994)

송요찬 내각


박정희 내각


김현철 내각

초대
김유택
제2대
송요찬
제3대
김현철
제4대
김유택
제5대
유창순

김현철 내각


제6대
원용석
제7대
김유택
제8대
장기영
제9대
박충훈
제10대
김학렬

제11대
태완선
제12대
남덕우
제13대
신현확
제14대
이한빈
제15대
김원기


제16대
신병현
제17대
김준성
제18대
서석준
제19대
신병현
제20대
김만제


제21대
정인용
제22대
나웅배
제23대
조순
제24대
이승윤
제25대
최각규

제26대
이경식
제27대
정재석
제28대
홍재형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 (1994~1998)

초대
홍재형
제2대
나웅배
제3대
한승수
제4대
강경식
제5대
임창열

재정경제부장관 (1998~2001)

초대
이규성
제2대
강봉균
제3대
이헌재
제4대
진념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 (2001~2008)


초대
진념
제2대
전윤철
제3대
김진표

제4대
이헌재
제5대
한덕수
제6대
권오규

기획예산처장관 (1999~2008)


초대
진념
제2대
전윤철
제3대
장승우
제4대
박봉흠
제5대
김병일

제6대
변양균
제7대
장병완

기획재정부장관 (2008~2013)


초대
강만수
제2대
윤증현
제3대
박재완
제4대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 (2013~현재)


초대
현오석
제2대
최경환
제3대
유일호
제4대
김동연
제5대
홍남기

제6대
추경호
임시정부 재무부장




역임한 직위
[ 펼치기 · 접기 ]









파일:김학렬.jpg

출생
1923년 3월 1일
경상남도 고성군
사망
1972년 3월 21일 (향년 49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10-21
본관
경주 김씨
재임기간
제21대 재무부 장관
1966년 9월 26일 ~ 1966년 12월 27일
제10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1969년 6월 3일 ~ 1972년 1월 4일

[ 펼치기 · 접기 ]
배우자
옥남
자녀
슬하 3남 1녀
학력
부산상업학교 (졸업)
원산상업학교 (졸업)
주오대학 전문부 (졸업)
경력
제1회 고등고시 행정과 합격
경제기획원 차관
재무부 장관
정무수석비서관
경제수석비서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파일:external/dimg.donga.com/73228331.2.jpg
포항종합제철 기공식에서
왼쪽부터 당시 포항제철 사장 박태준-대통령 박정희-경제기획원 장관 김학렬.

1. 소개
2. 생애
3. 이모저모



1. 소개[편집]


한국의 전 경제관료. 전임자인 장기영, 후임자인 남덕우 등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경제개발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2. 생애[편집]


1923년 경상남도 고성군에서 태어났다. 부산상업학교와 원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일본 주오대학을 졸업하였다.

1950년 제1회 고등고시 행정과 외무직(현 외교관후보자 선발시험)에 응시하여 외무직 1회 합격자가 되었다. 1952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미주리 대학교 등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유학을 마치고 나서는 재무부와 경제기획원 등에서 근무하였다. 1963년 경제기획원 차관을 역임하였다. 1966년 재무부 장관, 대통령비서실 산하 정무수석비서관, 경제수석비서관 등을 역임하였다.

1969년에는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에 임명되었다. 문서 상단의 사진에도 나오듯, 그의 경제부총리 재임 시절에 포항제철이 건설되기 시작했고, 이를 필두로 한국의 경제개발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고도화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편으로는 1970년 신임 서울특별시장양택식서울 지하철을 건설해야 한다고 하자, 김학렬은 서울로의 인구 집중, 물가 상승 등을 이유로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후락 당시 주일대사가 지하철 건설은 세계적인 추세라고 하면서 양 시장의 손을 들어주자 지하철 건설 쪽으로 결정되었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은 그후 4년만인 1974년 개통되었다.

1972년 1월 지병인 췌장암 치료를 위해 부총리 직에서 퇴임하였고, 불과 2개월 만인 3월에 향년 49세로 사망하였다. 김학렬의 부고(訃告)를 듣자 박정희는 남몰래 통곡하였고 애증의 관계였던 장기영[1]은 김학렬의 빈소를 가장 먼저 찾아 병풍 뒤의 그의 시신을 한동안 바라본 이후 "그는 개발연대의 순교자였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3. 이모저모[편집]


  • 이름의 학() 때문에 별명이 쓰루였다.[2] 마침 꼬챙이처럼 호리호리한 체격이 학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 김수환 추기경과는 태평양 전쟁 말기에 학도병 동기로 징병된 인연으로 생전에 둘은 아주 막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 살아생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욕쟁이여서 장관 재임 시절 뭔가 수틀리는 일이 있으면 서슴없이 현란한 육두문자 스킬을 발휘했다고 한다.[3] 그와 같이 일하던 공무원들은 불같지만 뒤끝은 없었던 김학렬의 성격을 이용하여 뭔가 일이 생기면 그의 화가 풀릴 때까지 잠적하거나 만약 붙잡혔더라도 온갖 욕설을 뒤집어 쓸 지언정 평온한 태도로 듣고만 있으면, 김학렬은 제풀에 지쳐 잠잠해 졌다고... 후일 장관까지 지낸 어느 관료의 회고에 따르면 재무부 간부들이 모인 회의에서 열받은 김학렬이 자신에게 마구 쌍욕을 퍼붓는데도 개의치 않고 싱글벙글 미소만 짓자, 김학렬은 어이가 없었는지 자리에 앉더니 뜬금없이 볼펜으로 탁자를 두들기며 남진의 '가슴 아프게'를 불렀다고 한다.
  • 김학렬의 3남이 김영수 이스트우드 컴퍼니 CEO다. 이 사람이 방용훈 부인 자살 사건의 피해자 이미란씨의 형부로 처제의 억울한 죽음을 풀기 위해 방씨 일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 1966년 일본 도쿄에서 아시아개발은행 창립총회가 열렸을때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참석하여 화제가 된 적있다.#
  • 걸핏하면 주먹을 휘두르던 거친 성격의 박종규 경호실장도 김학렬에게는 깍듯하게 대했다고 한다.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7 00:48:32에 나무위키 김학렬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장기영이 경제부총리일때 김학렬은 차관이었다. 둘다 대통령의 신임이 대단한데다 저마다의 능력과 개성이 뚜렷하여 지위고하를 초월하는 라이벌 의식이 대단하였다고 전해진다.[2] 鶴을 일본어로 쓰루라고 훈독한다.[3] 단순한 쌍욕이 아니라 식량자급률에서 시내버스 요금에 이르기까지 각종 수치를 인용해가며 별별 창의적인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