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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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한종 선생.jpg

자 / 호
경수(敬受) / 일우(一宇)
본관
김녕 김씨[1]
출생
1883년 1월 14일[2]
충청도 대흥현 이남면 소대리
(현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솟티마을)
사망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
묘소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3.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
대한뉴스에 방영된 순국 기념비 건립 모습
구한말에 의병 활동을 하고 일제강점기에 국내 무력 투쟁을 전개한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1883년 1월 14일 충청도 대흥현 이남면 소대리(현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신흥리 솟티마을)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김재정(金在貞)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을사의병 당시 의병장 민종식 휘하의 소모관(召募官)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의병활동에 참여했고, 1906년 5월 홍주성 탈환에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의병들은 끝내 일본군에게 패배, 김한종은 의병들을 자신의 집에 피신시키며 훗날을 도모한다.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고 김한종은 동료들과 함께 지방을 시찰하는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 경찰이 가택수사를 하며 실패로 끝난다. 계획이 실패로 끝난 뒤 1917년, 김한종에게 독립운동가 박상진이 접근한다. 그의 권유로 비밀 결사 단체인 대한광복회에 가입하고 충청도 지부장이 된다. 또한 박상진, 채기중과 함께 대한광복회를 이끌며 본격적인 활동에 나선다.

김한종은 충청도 곳곳에 지부를 세우고 과거 의병 세력들을 중심으로 단체를 키워간다. 그리고 독립군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활동을 활발히 벌여 170만원의 군자금을 모으기도 했다. 170만원을 현재 가치로 따지면 100억원 상당.

한편 군자금 모집 도중 이를 거부하는 부호들 중 성품이 나빠 악덕으로 자자한 인물이나 일경에 밀고하는 등의 친일 부호들을 처단하기로 한다. 1917년 11월에는 경상도의 부호 장승원을 암살하고, 1918년에는 친일 부호였던 박용하도 부하를 보내 처치한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인해 단체의 존재가 탄로나면서 동료들과 함께 체포당하고 만다.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살인 교사, 공갈, 살인, 강도, 살인방조 등의 혐의로 사형선고받았으며, 이에 공소하였으나 1919년 9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공갈, 살인, 방화, 강도, 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 공소가 기각되었다. 그는 상고까지 했지만 1920년 3월 1일 고등법원에서 앞서 2심에서와 같은 혐의들에 대해 상고심이 파기되면서 사안이 대구복심법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1920년 9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공갈, 살인, 방화, 강도, 범인 장닉, 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고 다시 사형선고내려졌으며, 1920년 11월 4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공갈, 살인 등의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면서 결국 사형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마침내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했다. 사후 공적이 인정되어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3. 참고 자료[편집]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169~17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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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1919년 9월 22일 2심 판결문에는 1월 10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