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규(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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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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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29-31대 경상남도지사
김혁규
金爀珪 | Kim Hyeok-kyu


파일:200702050500053_1.jpg

출생
1939년 8월 1일 (84세)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아막리[1]
본관
김해 김씨[2]
재임기간
제27대 경상남도지사 (관선)
1993년 12월 28일 ~ 1995년 3월 29일
제29-31대 경상남도지사 (민선)
1995년 7월 1일 ~ 2003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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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아내 이숙자, 딸 김성신[1]
종교
개신교
학력
부산동성고등학교 (4회 / 졸업)
부산대학교 (행정학 / 학사)
창원대학교 (경영학 / 석사)
병역
면제
소속 정당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7
경력
내무부 지방국 재정과 주사
뉴욕 경제인협회장
뉴욕 한인회 이사장
대통령비서실 사정제1비서관 (문민정부)
제27대 경상남도지사 (관선)
제29-31대 경상남도지사 (민선 1·2·3기 / 민주자유당·한나라당)
제17대 국회의원 (비례대표 4번 / 열린우리당)
대통령비서실 경제특별보좌관 (참여정부)
제17대 국회 규제개혁특위 위원장
한국배구연맹 총재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
더불어민주당 특임촉탁위원


1. 개요
2. 생애
3. 논란
4. 소속 정당
5. 선거 이력
6. 여담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기업인, 정치인. 제27, 29-31대 경상남도지사.

34년 만의 첫 민선 경남지사이자 유일한 3선 연임 경남도지사이며, 문민정부 초창기에 임명직 도지사까지 포함하면 총 네 번이나 했다. 다만 마지막 임기 중에 중도사퇴했고, 첫 당선 당시 임기가 3년에 불과해서 다른 3선 연임 도지사 및 시장(김진선, 최문순 전 강원지사, 이의근, 김관용 전 경북지사, 심대평 전 충남지사, 이시종 전 충북지사, 박맹우 전 울산시장)들에 비해서는 재직 기간이 짧았다.


2. 생애[편집]


1939년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아막리에서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모의 도움을 받으며 유년기를 보냈다.

본래 김해 한얼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재단비리에 항거하는 학생시위를 주동하다가 퇴학당했으며, 이후 부산동성고등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했고, 이어 부산대학교 행정학과에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등에서 관료로 일하다가 사표를 제출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 가발 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그리고 뉴욕 한인경제인협회 회장, 뉴욕 한인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 때 김영삼과 인연을 맺었다고.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며 사조직인 나라사랑실천운동본부 총괄기획실 실장을 역임하였다. 1993년 김영삼 정권이 출범하자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사정제1비서관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말부터 1995년 초까지 관선 경상남도지사를 역임하였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경상남도지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경상남도지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경상남도지사에 출마하여 전 남해군수인 새천년민주당 김두관 후보를 꺾고 당선되며 3선에 성공했다.[3] 2, 3회 둘 다 74%라는 경이로운 득표율을 보였다.[4]

그런데 2003년 12월, 차기 총선 출마를 선언하고 경상남도지사직을 사퇴했다. 동시에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4번을 받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총선 이후 노무현 대통령에 의해 국무총리 지명자로 거론됐으나, "철새를 총리로 임명하려 한다"는 한나라당의 반대에 밀려 좌초되었고,[5] 국무총리직은 이해찬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2005년 프로배구 주관 협회인 한국배구연맹(KOVO) 초대 총재를 역임하기도 했다.

2006년 2월 18일에는 열린우리당 임시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2007년 8월, 공중분해 직전인 열린우리당이 대통합민주신당과의 합당을 결의할 때 김원웅, 허경영[6] 등과 함께 '열린우리당 지킴이'를 자처하며 끝까지 합당을 반대하였다. 관련기사

하지만 열린우리당이 해체되자 대통합민주신당 합류를 거부하고 돌연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탈당한다. 또 이회창 후보가 민주당에 합류해야 한다는 포부를 밝혔다.[7]

이후 이회창을 따라 자유선진당 창당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중도에 탈당하며 선진당을 떠났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여담으로 그가 활동했던 자유선진당의 일부 조직은 민주당으로 넘어갔다.

은퇴 후에도 옛 동지 혹은 지역 후보를 돕거나 고문을 맡거나 하는 다른 정치인들과는 다르게 김혁규 지사는 정계 은퇴 이후엔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조문을 마지막으로 공직이나 정치판에는 얼굴을 비추지 않고 있다. 애초에 지방 행정가 이미지가 크기 때문이기도 하고 밑의 논란이 크게 작용한 듯.

2022년 2월 5일, 김종부 전 창원부시장이 오후 자신이 펴낸 책 ‘김종부, 통영의 미래를 말하다’ 출판기념회를 열었을 때 미국에서 축하 영상을 보냈다고 한다.# 현재 미국에 거주중인 것 같다.

3. 논란[편집]


2011년, 전기자동차 사업에 뛰어들어 에코넥스라는 회사에 회장으로 취임을 하고 본인의 사업을 홍보했는데 # #, 알고보니 이 회사는 3700여명의 투자자들을 속여 687억을 갈취한 사기 회사였다. 애초에 전기자동차와 관련된 기술력과 자본금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2010년 초부터 전기자동차 선도도시로 발돋움하겠다는 영광군에 터를 잡고 투자자를 모집했던 것. #

이 때문에 결국 김 전 지사도 투자자들에게 사기혐의로 피소당하고 말았다. # 고소인 황 모씨(57)는 김 전 지사가 대표 등의 다른 범인들 4명과 함께 총 주식판매액 약 40억원 중 30~40%를 에코넥스로부터 리베이트 명목으로 챙겼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혁규 전 지사가 사기행각을 공모한 사실이나 이를 통해 이익을 본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 범인들은 정치인들의 방문이나 활동하는 장면을 사진이나 영상에 담아 투자자를 유치하는 데 이용했는데, 정황상 김혁규 전 지사도 이렇게 일방적으로 피해를 본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 아무 것도 모르고 얼굴마담 명예회장으로 영입되었다가 졸지에 화를 입은 케이스.

여담으로 박준영전남지사도 2011년 2월 에코넥스와 투자협약을 맺어 그해 4월 친환경에너지 박람회장의 이 회사 부스를 찾았었다.[8]


4.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992 - 1995
정계 입문

[[신한국당|
파일: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

1995 - 1997
당명 변경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1997 - 2003
합당[9]

[[무소속|
무소속
]]

2003
열린우리당 합류를 위한 탈당

[[열린우리당|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

2003 - 2007
입당

[[대통합민주신당|
파일:대통합민주신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07
합당

[[무소속|
무소속
]]

2007 - 2008
탈당[10]

[[자유선진당|
파일:자유선진당 흰색 로고타입.svg
]]

2008
입당

[[무소속|
무소속
]]

2008 - 현재
탈당
정계 은퇴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5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상남도지사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1,177,397 (63.84%)
당선 (1위)
초선
1998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939,358 (74.64%)
재선
2002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920,706 (74.50%)
3선[11]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열린우리당|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

8,145,824 (38.26%)
당선 (4번)
초선[12]



6. 여담[편집]


  • 미국 뉴욕으로 이민 후 가방 장사가 대박이 났고 한인회장까지 역임했다. 이 당시 도미 후 생활고에 시달리던 태진아를 도와줬고 이 때의 인연으로 태진아는 지금도 김혁규를 아버지라고 부른다. 김혁규는 태진아의 양아들인 조유명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섰고 # 태진아는 김혁규 후원회장을 맡았으며 김혁규의 선거운동에도 적극 따라다니며 홍보를 했다.

  • 관선과 민선으로 경상남도지사를 역임했다는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문민정부 시절 관선 경남지사를, 지방자치제 부활 이후 민선 경남지사를 3선이나 역임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4선 광역자치단체장이다. 이와 같이 관선, 민선 모두 같은 지자체장을 맡은 사례로는 고건 전 서울시장, 안상영 전 부산시장, 강운태 전 광주시장, 조해녕 전 대구시장, 염홍철 전 대전시장, 심대평 전 충남지사, 이원종 전 충북지사, 이의근 전 경북지사, 우근민 전 제주지사 등이 있다.

  • 김맹곤 전 의원과의 인연이 깊은데, 김맹곤 의원은 김혁규 도지사 재임 시절에 경남개발공사장을 지냈으며 이후 2004년 그를 따라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뱃지를 다는데 성공했다. 김맹곤 의원은 2018년 암으로 타계.

  • 박지원과 비슷한 나이와 이력으로 비슷한 시기에 정계입문을 했다. 두명 모두 미국에서 뉴욕 한인경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정계 입문전부터도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1980년대 후반, 박지원은 DJ휘하에서, 김혁규는 YS라인에서 정치를 시작했고, 결국 한명은 국정원장, 다른 한명은 경남지사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한번도 같은 정당에서 정치한 적은 없다.


7.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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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임자 안상영 사망 (2004.2.4)[2] 전임자 박태영 사망 (2004.4.29)[3] 전임자 김혁규 사퇴 (2003.12.15)[4] 전임자 우근민 지사직 상실 (공직선거법 위반) (2004.4.27)





파일:열린우리당 흰색 2차 로고.svg 파일:열린우리당 로고타입.svg 제17대 국회 비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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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C]
김영대[C]
[B] A B C 임기 중 사퇴.[C] A B C 승계.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7 04:30:31에 나무위키 김혁규(정치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2] #[3] 아이러니하게도 이 때 맞붙었던 김두관과는 불과 1년 만에 같은 당 후보로 재회한다(...)[4] 이 당시만 해도 경남은 대구·경북에 버금갈 정도로 보수정당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5] 근데 한나라당의 후신 새누리당은 나중에 김혁규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역대급 철새인 이인제를 영입하며(...), 내로남불이 되고 만다. 여담으로 이인제는 한나라당 소속이었던 적이 없다.(1997.10.10. 신한국당 탈당, 1997.11.21.~2012.2.13. 한나라당 존속, 2012.11.16. 새누리당 입당.) 그러나 이인제는 입당 이후, 무조건 선거를 망치는 선례를 남기고 마는데, 그 선거가 바로 이인제가 유일하게 대선을 제외한 선거에서 패배한 기록을 남기는 20대 총선7회 지방선거이다(...)[6] 우리가 아는 그 허경영이 맞다. 당시에는 열린우리당 당원으로서 대선 예비후보로 등록해놓은 상태. 당연히 컷오프가 된 이후 탈당하면서 독자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그 이후의 일은 아시는 대로다.[7] 이 당시 정동영 보다 이회창의 득표율이 높게 나올거라는 말도 많았고 실제로 이회창은 양당 후보의 중도표를 상당 부분 갉아 먹었고, 정동영의 대선 참패에 큰 일조를 했다. 이후 행보는 알다시피 이회창은 대선 패배 후 충청권 지역정당인 자유선진당을 창당하였고, 아이러니하게도 한때 자민련-국민중심당 등 충청권 지역정당 소속이었던 이인제민주당에 갔다...가 또 탈당한다(...)[8] 또한 입건된 인물 가운데 판매수당 1억원 이상을 챙긴 임모(59) 영업부사장은 인기 TV 드라마에 출연했던 탤런트였다.[9] 통합민주당(1995년)과의 합당.[10] 신당 합류를 거부했으나 비례대표 의원직을 유지해야 하는 관계로 2007년 말에야 탈당했다.[11] 2003.12.15 탈당 및 지사직 사퇴 (17대 총선 출마).[12] 2007.10.15 의원직 사퇴 (대통합민주신당 당내 갈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