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준(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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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준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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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삼성 썬더스 영구 결번
No. 10 김현준








서울 삼성 썬더스 No. 10
SEOUL SAMSUNG THND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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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준
金賢俊

출생
1960년 6월 3일
사망
1999년 10월 2일 (향년 39세)
경기도 성남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신체
183cm
선수 시절 포지션
스몰 포워드, 슈팅 가드[1]
학력
광신상업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응용통계학 / 학사)
실업 입단
1983년 삼성전자 농구단
현역 시절 등번호
10 (서울 삼성 썬더스 / 영구 결번)
소속
선수
삼성전자 농구단 (1983~1995)
감독
수원 삼성 썬더스 (1997 / 감독 대행)
코치
삼성전자-수원 삼성 썬더스 (1996~1999)

1. 개요
2. 상세
3. 플레이 스타일
4. 여담




1. 개요[편집]


대한민국농구인.

광신상고와 연세대 응용통계학과를 졸업하고 1983년부터 1995년까지 삼성전자(現 서울 삼성 썬더스) 소속으로 뛰면서 '전자슈터'라는 별명을 얻은 삼성의 간판 스타였다. 이충희와 개인으로도 구단으로도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1980년대 농구대잔치의 인기를 이끌었다.


2. 상세[편집]


농구대잔치 사상 최초로 개인 통산 5천 득점을 돌파했다. 당시 통산 5천 득점을 돌파했던 선수는 그가 유일하고 라이벌이었던 이충희는 4천 점대 중반까지 득점 후 은퇴하였다.

'저렇게 던져도 돼?'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별별 기묘한 형태의 슛을 던지면서 그걸 집어넣었던 선수.

1991-92 농구대잔치 챔피언 결정전에서 만난 기아자동차(현 울산 모비스 피버스)와의 3차전에서는 심판의 판정에 항의하다 3연속으로 테크니컬 파울을 당해 5반칙으로 물러난 일도 있었다.[2] 그 덕에 기아자동차 선수들이 돌아가면서 3연속 자유투[3]를 던진 후 공격권을 가졌다.[4]

문경은(현 KBL 경기본부장)이 연세대 3학년 때 이미 삼성전자로 진로를 결정하고 계약서에 사인했는데, 당시 문경은은 긴 말 필요없고 돈 상관하지 않고 오직 김현준만 보고 삼성행을 결심했다고 한다.[5][6][7]

문경은이 들어온 후 삼성전자가 1994-95 농구대잔치 종합 순위 8위로 결승 토너먼트에 진출하여 8강전에서 종합 순위 1위였던 연세대학교와 맞붙었는데, 이 당시 그의 화려한 은퇴를 위해 후배들이 고의에 가까운 반칙 작전으로 연세대학교 선수들을 다치게 할 정도였다.[8] 하지만 챔피언결정전에서 만난 기아자동차에게 다시 패하면서 김현준은 정든 코트를 떠나게 된다. 이때 0-2로 마지막에 몰린 3차전에서 71-72로 뒤지던 후반전 34초를 남기고 3점슛을 성공하면서 74-72로 뒤집었던 그 슛은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3차전은 삼성에게 유리한 편파 판정이 계속 되었던 경기로 당시에도 크게 문제가 되었었다.

그렇게 화려했던 선수 생활을 마감한 후 소속 팀의 코치로 활동하던 중, 1999년 체육관으로 출근하기 위해 백궁역(현 정자역)에서 택시를 타고 가던 중 4중 교통사고[9]에 휘말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39세.

이후 그가 삼성전자 시절에 썼던 등번호 10번이 서울 삼성 썬더스에서 영구결번이 되었고, 당시 10번을 달고 뛰던 주희정이 30번으로 등번호를 바꿨다. 현재 서울 삼성 썬더스에서는 그를 기리기 위해 2000년부터 "김현준 농구 장학금"을 마련해 매년 우수한 고등학생 농구 유망주들을 선정해서 전달식을 열고 있다.

2012년까진 남동생인 김효준 삼성물산 상무가 시상을 맡아왔지만 하술할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그의 딸 두 명이 시상을 맡아주고 있다.

사족이지만 그의 큰딸은 2011년에 결혼해 자녀를 두었다고 한다. 만약 살아있었다면 꽤 이른 나이에 할아버지가 된 셈이다.

김현준 사후 13년 뒤인 2012년 6월 6일에는 김현준의 동생 김효준도 페루에서 발생한 헬기 사고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10]


3. 플레이 스타일[편집]


이충희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면서 슈터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3점 슈터라는 이미지와 달리 이충희나 김현준은 3점슛 제도를 성인이 된 후 접했기 때문에 3점슛 자체를 많이 던지지도 않았고 성공률 또한 다른 선수들에 비해 높지도 않았다(김현준은 특히 3점슛 규정이 생긴 1985년부터 통산 1407개의 3점슛을 성공시켰는데, 경기당 평균 5.9개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보통 한 시즌 3점슛왕을 차지하는 프로농구 선수의 3점 슛 갯수가 경기당 2개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두 배 이상, 세 배 가까운 놀라운 수치다.[출처] ‘슛도사’ 이충희 vs ‘전자슈터’ 김현준|작성자 카노). 하지만 농구대잔치 최초 5000득점을 달성하고 국내 무대에서는 이충희에 버금가는 업적을 쌓고도 이충희에 이어 슈터 2인자라는 평을 들은 이유는 국제무대에서의 활약이 이충희 보다 적었던것도 있고 플레이 스타일에 있어서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11]

이충희나 허재처럼 빠른 기동력을 가진 선수는 아니었고 드리블도 허재나 이충희처럼 낮으면서도 빠르게 하는 스킬이 부족해서 김현준의 드리블은 높고 약간 불안정했다. 또한 백코트가 느린 대표적인 선수 중에 하나였는데, 이는 기동력, 순발력이 떨어지는 스타일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으로, 상대의 턴오버 시 주워먹기도 많이 했지만 팀수비에 부담을 주는 면이 있었다. 실제로 88년 올림픽 영상들을 보면 그런 장면을 많이 볼 수 있다. 이 당시 김현준은 슛감이 별로 안 좋았는지 슛 미스가 많았는데, 반대로 백코트가 느려서 주워먹기를 많이 하면서 최종 슛성공률은 준수했다. 이런 유형의 단신이면서 느린 어중간한 신장에다 단독 리딩이 안되는 슛터 타입 선수로는 나중에 정인교, 이광재가 이어받게 된다. 엄밀히 말하면 정인교와 이광재는 김현준의 하위 호환.

하지만 이충희보다 농구 센스가 좋아 마크맨에게 덜 묶이는 편이었고 패스에도 능해 농구대잔치 통산 어시스트 712개로 3위 기록을 가지고 있다.[12] 마찬가지로, 국제전에서 포인트 가드 역할은 허재가 맡았지만, 경기당 평균 어시스트는 김현준이 가장 높았다. 하지만 이는 당시 엄격한 룰에 의한 기록 때문이고, 실제로는 허재가 가장 많은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문제점도 있었는데 키가 작고 파워와 운동 능력이 약하다보니 수비나 리바운드를 잡아내는 데에 있어서도 한계가 뚜렷했고 장신숲을 뚫고 돌파 또한 불가능했다. 이점이 작지만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순발력이 좋으며 여러루트로 득점을 스스로 만들수 있는 이충희에 비해 평가가 떨어지게 된 원인.

또한 김현준이 활약하던 시기의 국내 농구는 센터가 너무 활용되지 않았고 대부분 들러리나 서주는 장승같은 존재였다. 그러다보니 국제대회에 나가면 센터들이 힘을 못썼고 슈터들의 그날 활약상에 따라 경기 결과가 결정이 났다. 거기에 특정 스타들의 팀별 영향력, 출신 대학별 존재감 등이 탄탄하다보니 최상의 베스트5도 짜기 힘들었다. 고려대-연세대, 현대-삼성의 라이벌 구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충희, 김현준을 모두 비슷한 비중으로 써야만 했다. 안 그랬다가는 난리가 났기 때문. 둘은 포지션이 같기 때문에 둘 중에 컨디션이 더 좋은 선수를 쓰면 되었고 나머지 자리에는 리딩 가드, 수비스페셜리트 등을 넣어서 밸런스를 맞추는게 더 강팀을 만들 수 있는 구성이었다. 장신 슈터도 아닌데 단순히 공격력만 믿고 둘을 동시에 중용하는 시스템으로 가다가는 괜스레 평균신장만 깎이고 수비에서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 경기를 제외하곤 국제대회에서 두 선수는 기대만큼의 시너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4. 여담[편집]


동시대 라이벌이자 최고의 슈터였던 이충희는 머리도 늘 대충하고 나와 지저분해보이고 유니폼도 상의를 늘 빼서 입고 팔을 아무렇게나 걷어부치는걸로 유명했다면, 김현준은 포마드라도 바른건지 강철 가발인건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늘 한올의 흐트러짐도 없는 아주 단정한 머리스타일에다 복장도 교과서같이 단정해서 이점이 많이 비교되기도 했다.

뭉쳐야 쏜다에서 어게인 농구대잔치를 개최했을 때 많은 네티즌들이 출연하지 못해 아쉬운 선수로 꼽았다. 당시 출전팀에 연세대가 있었으니 출연이 가능한 신분이었고, 라이벌 고려대팀에는 이충희도 나왔는데 유독 이충희가 더 쓸쓸해 보였다는 이유가 김현준의 부재때문이라는 평가가 많았다.[13] 만약 김현준이 현재까지도 살아있어서 출연했다면 김현준은 이충희 다음으로 고령자였다.

김현준이 뛰던 삼성전자 농구단과 같은 그룹의 야구단동명이인의 선수가 기대를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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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0년대 당시에는 180cm대 초중반이 스몰 포워드인 경우가 많았고 센터도 키가 190~193cm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이상하지 않다. 본인 스스로도 은퇴 직후 인터뷰에서 자신의 포지션을 스몰 포워드라고 분명히 밝혔으며 다만 농구 대잔치 붐 세대 이후 자신의 신장은 사실 가드를 봐야 하는 신장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선수 생활 말년에는 슈팅 가드를 본 건 맞다.[2] 당시 상황은 강을준이 파울을 범해 개인 파울이 생기게 되자 강을준이 항의를 하여 테크니컬 파울을 얻었고, 주장이었던 김현준이 이에 항의를 하자 심판이 김현준에게 연속으로 테크니컬 파울을 주면서 김현준은 5개의 파울을 받고 퇴장당한다.[3] 정확하게는 강을준의 개인 파울 + 강을준의 테크니컬 파울 + 김현준의 3개의 테크니컬 파울에 의한 5번 연속으로 자유투 2개를 던졌다. 그래서 기아 선수들이 던진 자유투는 모두 합하면 10개(!). 그 10개를 다 던진 후 공격권까지 가진 것이다.[4] 당시 농구 규칙은 상대 팀 선수가 테크니컬 파울을 당하게 되면 테크니컬 파울 하나 당 자유투 2개를 부여하고, 5반칙 퇴장당할 때까지 계속 테크니컬 파울을 줄 수 있었다. 5반칙 퇴장 후에도 계속된다면? 그때부터는 벤치 테크니컬 파울을 준다. 1회당 자유투 2개 + 공격권.[5] 김현준과 문경은은 광신상업고등학교(현 광신방송예술고등학교) 및 연세대학교 선후배 관계다. 그것도 있지만 당시 대학 농구 최강이던 연세대의 정책이 최강 팀을 구성하던 농구부 선수들을 한 팀에 몰아줘서 전력 불균형을 초래하기보다는 여러 팀에 골고루 분배해서 실업팀들이 공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자는 취지이기도 했다. 물론 당시 대우증권(현재 프랜차이즈는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로 승계)처럼 신생팀 창단의 경우는 대량으로 몰아주기도 했지만. 문경은을 삼성전자로, 이상민을 현대전자로 보내면서 기아의 독주가 계속되던 실업 농구의 판도를 바꾸려 했던 것도 있다.[6] 그 외에 연세대 출신인 방열이 기아자동차의 주축 선수들에 의해 축출된 불편함 감정도 이때까지 영향을 끼쳤던 걸로 보인다.[7] 참고로 이 시절에는 실업팀 한 팀이 한 학교의 선수들을 마치 전속처럼 몰아서 받는 것이 관례였다. 중앙대는 기아자동차, 경희대는 기업은행 등. 그러면서 마치 고등학교 선수가 대학을 갈 때처럼 스타급 선수 한명에 실력이 비교적 처지는 동료 선수 몇명이 패키지처럼 딸려가는 것이다. 그 동료들은 2~3년 농구부에 있다가 그만두고 모기업의 일반 사원으로 전직하는 것이다.[8] 당시 8강전은 3전 2선승제였는데, 1차전에서는 연세대에게 76-85로 졌지만 2차전을 81-70으로 이긴 후 맞이한 3차전에서 전반 종료 1분여를 남기고 삼성의 박상관서장훈의 뒤통수를 강타하여 서장훈이 전치 2개월의 중상을 입었고, 연세대 포워드 구본근이 호흡곤란을 일으키면서 산소 마스크를 쓴 채로 구급차에 실려가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서장훈이 당한 이른바 상관타 사건에 가려져서 그렇지, 2차전에서도 삼성의 김승기우지원의 얼굴을 두 차례나 때려 퇴장을 당하기도 했다. 서장훈 역시 삼성 선수의 팔꿈치에 눈을 맞아 부어오르기까지 했다.[9] 중앙선을 넘어온 그랜저 승용차에 받혀 택시가 전복되면서 머리를 크게 다쳐 그 자리에서 사망.[10] 동생 김효준이 사망하기 8개월 전인 2011년 10월 5일에 김현준의 부친도 세상을 떠났다. 링크[11] 당시 현대와 삼성은 슈터 2명에게 공격을 몰아주는 전술을 썼었다. 그렇다 보니 쌍포가 침묵하면 경기에 크게 졌고, 상대팀에서는 쌍포를 수비해서 어느 점수대 이하로 묶어버리면 이길 수 있었다.[12] 1위는 782개의 허재[13] 실제로 김성주가 "이충희의 라이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주저없이 "지금은 작고했지만 김현준"이라 답했을 정도. 하지만 방송용 내지는 고인 예우 차원의 멘트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충희는 평소 김현준을 자신의 아래라고 봐서 라이벌로 취급하지 않았을 정도로 이충희와 김현준의 실제 사이는 좋지 않았다. 이충희가 김현준의 작고 당시 빈소에 오지 않아서 많은 농구인들에게 비난을 받았던 것은 꽤나 유명한 일. 만약 김현준을 라이벌이라고 진심으로 인정한것이라면 시간이 지나면서 생각을 바꾼것일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