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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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기(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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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채, 제명
(a): 29기 중에서 유일하게 개그콘서트에 출연하지 못했다.




김형곤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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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BS 로고(1984-2023).svg 코미디대상 대상
-[1]

김형곤
(1987년)


심형래
(1988년)

파일:백상예술대상로고(1).png
파일:baeksangartsawards4.png
TV부문 남자 코미디연기상
제31회
(1995년)


제32회
(1996년)


제33회
(1997년)

이창훈
(폭소대작전)

김형곤
(세상 엿보기)


김국진
(테마게임)

제33회
(1997년)


제34회
(1998년)


제35회
(1999년)

김국진
(테마게임)

김형곤
(쇼 행운을 잡아라)


남희석
(좋은 친구들)




김형곤
金亨坤 | Kim Hyung Gon


파일:/image/144/2006/07/27/6a2889d.jpg

출생
1960년 5월 30일
경상북도 영천군 영천읍 (現 영천시)
사망
2006년 3월 11일 (향년 45세)
서울특별시 광진구 자양동 혜민병원[1]
묘소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은마길 129 청아공원[2]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본관
김해 김씨 (金海 金氏)[3]
신체
168cm[4], 85kg[5], 평균 100kg[6], O형, 265mm
가족
형 김형준, 남동생 김형진, 김형섭
아들 김도헌(1992년생)
학력
서울무학초등학교 (졸업)
장충중학교 (졸업)
중경고등학교 (졸업)
동국대학교 (국어교육학 / 학사)
종교
불교
데뷔
1980년 TBC 개그콘테스트 은상
취미
골프, 독서
별명
날으는 돈까스, 공포의 삼겹살

1. 개요
2. 생애
2.1. 사망
3. 시사개그의 대부
4. 정치 활동
4.1. 선거 이력
4.2. 소속 정당
5. 성소수자 지원 활동
6. 똥군기 논란
6.1. 또 다른 면
7. 수상



1. 개요[편집]


1980~1990년대에 활동한 대한민국코미디언이다.

시사 코미디에서 맹활약하였다. 통통한 체형을 코미디에 이용하기도 했는데, "김형곤" 하면 바로 '공포의 삼겹살'이었다. 당시 대 유행어가 되고, 지금도 김형곤은 모르더라도 "공포의 삼겹살"이란 표현은 널리 쓰이고 있다. 스스로 '전국 비만인 협회' 회장을 자처했을 정도다... 원래는 보통 체형이였다가 개그맨이 되기 위해 일부러 살을 찌웠는데 나중에는 살이 안 빠져서, 굉장히 후회했다고 한다.

형 김형준은 연극배우[7], 동생인 김형진[8]은 미술법 전문 미국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2. 생애[편집]


1960년 5월 30일 경상북도 영천군 영천읍(현 영천시)에서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상경하였고, 서울무학초등학교와 장충중학교, 중경고등학교,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9] 대학교 재학 중 1980년 TBC의 개그 콘테스트에서 은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개그맨 생활을 시작했다.[10]

김형곤은 1980년에 데뷔하자마자 뚱뚱한 몸에 동그랗고 귀여운 얼굴, 재치있는 입담으로 젊음의 행진, 젊은이의 토요일 등에서, 장두석과 함께 워낙 비싸요~ 라는 유행어를 탄생시키며 인기를 모았고, 그 다음해 영화도 찍었다. 이 당시 활동했던 개그맨들 중 가장 돋보였던 세 명이 바로 주병진과 김형곤 그리고 MBC에서 활약한 서세원이었다.

김형곤을 기억하는 이들은 주로 KBS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많이 아는데, 잠깐이긴 해도 MBC에서도 활동했으며 이 시절에 앨범도 냈다. <어허! 그것 참>이 이 시절에 부른 노래. MBC에 나와 이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선배 MBC 개그맨들이 이 노래에 맞춰 뮤직비디오같이 나와서 가사 대로 뜀뛰기하고 그렇게 지쳐서 헥헥하다가 노래부르던 김형곤 보고 "아니, 당신이 한번 뛰어봐!"라고 화내고 노래부르던 김형곤이 무안해 하던 개그씬이 나오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KBS에서 본격적으로 유머 1번지의 <회장님 회장님 우리 회장님>[11]과 <탱자 가라사대>[12], <꽃 피는 봄이 오면> 등의 코너에서 시사 개그를 선보이면서 사회적인 붐을 일으켰다.

그러나 김형곤의 거침없는 시사개그와 풍자에 위기감을 느낀 전두환 군부가 그를 협박하여 방송 코너가 해체되고 한동안 연예활동을 중지했다. (사실은 더 일찍 해체될 수 있었는데 간신히 살아남았다고 한다.)

전두환 군부의 협박 어쩌고는 전혀 사실이 아닌게, 회장님 코너는 전두환 재임시부터 노태우 재임시까지 오랬동안 방영되었고, 그 후속인 탱자 가라사대와 꽃피는 봄이 오면 등 김형곤의 시사 개그도 윗선의 태클이 전혀 없이 잘만 방송되었다. 오히려 대한민국 건국이래로 지금까지 대통령에 대해서 마음껏 개그소재로 과하다시피 삼던 시절이 노태우 재임기이다. 즉 그냥 군사정권은 독재였다는 프레임을 씌우기 위한 날조 선동 중의 하나이다. 방송이 방영된 날짜만 확인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민주화 이후 지금까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보수우파 정권시기에는 대통령 풍자와 비판을 얼마든지 하지만, 진보좌파 정권시기에는 정권 아부성의 개그를 제외하면 정치가 개그소재로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노태우 때도 문재인 때도 항상 같았다.

TV 활동이 금지당한 후부터는 주로 소극장에서 스탠드 업 코미디 공연을 했다. 대학로에서 '곤이랑 아트홀' 이라는 공연장을 운영했고[13], 이 외에도 강남 등지에 공연활동을 했는데 스탠드 업 코미디 공연을 하던 당시 노태우 정권 때 대통령방귀뀌는 스타일이라는 개그를 했다가 국가안전기획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대통령과 부하들이 회의를 하는데 방귀를 뀌면 어떻게 할까라는 조크였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방귀를 뀌면 당당하게 "괜찮아, 임자도 뀌어." 하고 전두환 대통령이 뀌면 부하들이 "각하, 제가 뀌었다고 하겠습니다."라면서 자기가 전두환 대신 덮어쓰고 노태우 대통령이 뀌면 괜히 자기가 뀌어놓고서 부하한테 "네가 뀌었제?" 하니까 부하들이 "제가 각하 방귀 대신 뀌어줍니까?"라면서 맞먹는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물태우라고까지 불린 노태우의 유약한 리더쉽을 풍자한 것이었는데,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이를 문제시하며 "각하 방귀뀌는 걸 네가 봤냐?"며 김형곤을 추궁했다. 물론 공식적으로는 김형곤이 공연한 술집과 바에서 음란 퇴폐쇼를 했다[14]는 명목으로 대표[15]를 구속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후에 자신의 공연에서 "아니, 내가 대통령 방귀 뀌는 걸 꼭 봐야 개그를 할 수 있단 말이야? 그게 어디 대한민국 안기부가 나설 일인가?"라며 회고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러한 해방적 분위기는 노태우가 당선 이후 "날 개그프로 소재로 써도 좋다"라고 말한 탓이 크다. 이는 안기부의 과잉충성 내지는 노태우의 말바꾸기이며 1989년 문익환 목사의 방북으로 공안정국이 형성된 이후 안기부가 과거 모습으로 회귀한 것도 작용했다.

90년대에는 정치인으로서 활동하다가 2000년 정계에서 은퇴한 이후 다시 코미디언으로 컴백했다. 주로 극장 공연 위주로 활동하다가 2003년 폭소클럽으로 코미디 프로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으며 폭소클럽의 코너 <스페셜 클럽 2>에서 녹슬지 않은 시사개그를 선보이며 크게 인기를 끌어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이후 각종 뮤지컬 및 개그공연의 연출 및 대본작성을 맡으며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특히 2005년 대학로에서 올린 <엔돌핀 코드>는 '웃음학 강의'라는 컨셉으로 높은 예매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선행 실천에도 적극 앞장섰는데, <엔돌핀 코드> 공연의 일부 수익금을 백혈병과 소아암으로 투병 중인 어린이들을 위해 기부했으며 병원에 찾아가 어린이들에게 직접 싸인을 해주고 목도리와 모자를 선물하기도 했다.

또 저서와 음반 발매를 하기도 했는데 자서전 격인 <김형곤의 엔돌핀 코드>와 그의 스탠딩 코미디 강의를 모아놓은 <김형곤 폭소클럽 시리즈> 등이 있다. 2006년 상반기에는 한국 코미디언 최초로 카네기 홀에서 공연할 예정이었다.

말년에는 체중을 감량하는데 성공하여 그간의 뚱보 이미지를 탈피하기도 했다. 자신의 다이어트 비법을 공개하며 큰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직접 다이어트 캠프도 운영했었다.


2.1. 사망[편집]


그렇게 활발히 활동 중이던 2006년 3월 11일, 자택 인근 헬스클럽에서 운동과 사우나를 한 뒤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던 도중 갑작스러운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향년 46세. 그가 사망한 원인은 흔히 토일렛 쇼크(Toliet Shock)라고 불리는 증상으로, 고혈압이 있는 사람이 화장실 등에서 갑자기 힘을 주면 뇌혈관의 혈압이 일시적으로 급상승하는 위험한 증상이다. 단순 어지럽기만 하면 다행이지만 심한 사람들은 아예 의식이 끊기는데, 김형곤은 순간적인 쇼크 증상으로 쓰러져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처음 속보 기사는 축구를 하다가 사망했다는 것으로 나왔는데, 배우 허준호의 아버지인 허장강이 이 사유로 별세했기 때문에 오보한 것으로 보인다.

김형곤이 다이어트를 시작하게 된 이유도 갑작스러운 비만으로 인해 찾아온 성인병과 고혈압 등을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사우나를 먼저 한 뒤 운동을 하는 안 좋은 습관도 원인이었는데, 수분을 빼는 위주로 가는 체중감량은 몸에 무리가 상당히 간다. 사우나를 한 뒤 혈압이 갑자기 올라 쇼크가 왔던 것.[16]

빈소에는 이경규, 서세원, 유재석, 강호동, 송해, 박준형, 유세윤 등 수많은 코미디언들이 조문했으며 원로 코미디언 구봉서도 고령의 몸을 이끌고 조문하였고 정치권에서 인연을 맺었던 이인제박진 등도 빈소에 조문했다. 특히 영국에서 유학 중이던 외동아들이 급히 귀국해 빈소에서 오열하는 모습이 그대로 카메라에 잡혀 안타까움을 더하기도 했었다.[17][18] 영결식은 코미디 협회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여러 코미디 프로에서 김형곤과 호흡을 맞췄던 이용식은 크게 오열했다. 사후 시신은 연구용으로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 카데바로 기증되었으며, 연구가 끝난 이듬 해 화장되어 청아공원에 안치되었다.

명랑히어로 두 번 살다 이경규 편에서 이윤석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경규가 당시 김형곤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굉장히 슬퍼했다고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둘이 대학교 동갑내기 동창이기도 한데 이경규는 방송에서, 김형곤은 무대에서 활약했으면서도 서로를 미워하고 상처 준 일이 있었던 모양. 김형곤 사망 후 이경규가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울면서 술을 마시다 정신을 잃는 바람에 술집 점원이 이윤석에게 전화했다고 한다.

개그콘서트에서 봉숭아 학당이 다시 부활하면서 초대 선생님이었던 김형곤의 봉숭아 학당 복귀가 유력했으나 김형곤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결국 이뤄지지 못했다.


3. 시사개그의 대부[편집]


말년에 출연하던 폭소클럽에서도 시사개그를 선보였던 대한민국 시사, 풍자 개그의 1인자였다. 그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이후 대한민국 풍자개그와 시사개그의 명맥은 사실상 끊겼다란 것이 정설로 통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에 김구라가 인터넷으로 김구라 황봉알의 시사대담이라는 시사개그를 시작하여 다시 시사개그가 부활하나 싶었지만, 김구라의 시사개그는 아픈 속을 긁어준다기보단 단순한 사회에 대한 반발심을 자극하고 거친 욕설로 불만을 토하는 데에 지나지 않아 수준미달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거기다 김구라의 개그는 시사가 아닌 남들이 꺼리고, 터부시되는 걸 건드리는 게 본질이라서 그다지 시사개그를 하는 사람이라고 보기엔 힘들다. 자세한 것은 김구라 항목으로.[19] MBC에서 유행한 삼자토론 등의 배칠수/전영미 위주의 시사개그도 모두 성대모사에 더 가까웠다.[20][21]

그러다 SNL 코리아의 방영을 기점으로 시사개그의 맥이 다시 이어지는 듯했지만, 그마저도 단순한 패러디에 가까웠다. 그러던 것이 여의도 텔레토비를 접으면서 섹드립이랑 GTA 드립에 더 집중하고 시사개그 역시 시사개그라고 쓰고 시사대담이라고 읽는 식으로 안 그래도 수준미달인데 그보다 더 퇴화한 모습을 보여주는 등 기대 이하로 침전하게 되었다.

그나마 2010년대에 이르러 개그콘서트가 제대로 된 시사개그를 좀 하나 싶었지만 당시 서수민 PD에 대한 반감[22]이 심한 시기라 호응도가 적었고, 거기에 인터넷 정치 커뮤니티 활성화와 <나는 꼼수다>류 시사풍자 인터넷방송이 인기를 끌면서 얼마 안 가 SNL 코리아와 동일한 테크를 타면서[23] 사실상 시사개그의 명맥은 김형곤 사후에는 끊긴 거나 다름없다.


4. 정치 활동[편집]


1989년, 당시 영등포구 을에서 재야 단일 후보로 출마한 고영구 후보[24]를 지지하면서 처음으로 정치권과 엮이기 시작했다. 당시에 야권 후보를 지지하는 연예인들은 음양으로 불이익을 받았기 때문에 김형곤의 이러한 행보는 매우 용기있는 행동이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는 보수 정당 후보였던 민주자유당김영삼 후보를 따라다니며 유세지원을 하였다.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여당후보였지만 군사정권에 큰 반감을 가진 사람이었다. 당선 후 하나회를 쓸어 버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김형곤이 김영삼을 지지했던 것도 크게 이상하진 않다고 할 수 있다. 김형곤 뿐만 아니라, 당대의 수많은 진보 성향 인사들이 이 점때문에 김영삼을 일제히 지지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국민신당 이인제를 지원했다.

군사정권에 의해 탄압받던 대중의 아픈 속마음을 달래준 일과 군사정권에 의해 억압받았다는 두 가지 경력으로 1997년 명예친선대사에 선정되었으며 1999년에는 자유민주연합의 명예총재특별보좌역을 역임하여 당시 개판이던 자민련의 이미지 개선에 일조하였다.

파일:15076126662746.jpg

16대 총선이 있었던 2000년 성동구[25]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자민련 공천을 받았으나 김종필 총재의 독주에 반감을 가지고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한 것으로, 결과는 3위로 낙선. 12,258표를 얻어서 8.6% 득표를 했으며, 기성 정치인이 아닌 무소속 후보 치고는 적잖은 득표긴 하다. 당선자는 새천년민주당임종석. 이후 정치권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정치인들과 친분은 계속 유지했었다.


4.1.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성동

[[무소속|
무소속
]]

12,258 (8.66%)
낙선 (3위)



4.2.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자유민주연합|
파일: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svg
]]

1999 - 2000
정계 입문

[[무소속|
무소속
]]

2000 - 2006
탈당
정계 은퇴
사망


5. 성소수자 지원 활동[편집]


한편 우리나라 트랜스젠더들에게는 대부 격으로 추앙받던 사람이었다. 그가 운영하던 술집과 성소수자들인 게이와 트랜스젠더들이 많이 모였다. 김형곤이 트랜스젠더들의 양지 진출과 연예인 지원을 많이 도와 주었기 때문이다. 이것과 관련해서 본인이 방송에서 가끔 자기는 게이는 아니지만, 소수자로서 음지에 숨어사는 그런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실제로 자주 트랜스젠더 바 등에서 토크쇼를 진행하기도 했고, 연예계의 중견인 그가 지원했기 때문에 TV 등을 통해 일반에 트랜스젠더에 대한 호의적인 시선이 많이 생기기도 했다. 또한 이태원동에서 하하호호라는 트랜스젠더들이 댄서로 일하는 극장식 바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의 사후로는 이전처럼 그쪽 문화와 성소수자들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보내는 유명인이 적어졌다는 견해도 많았다.


6. 똥군기 논란[편집]


김형곤은 개그계의 똥군기 선두주자였다. 서세원, 주병진, 김정식, 이성미, 이경실 등과 더불어 성깔 드럽고 군기를 수시로 잡은 무서운 코미디언 중 하나였으며, 개그우먼들도 결코 예외없었다. '공포의 삼겹살'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도 이런 그의 행실 문제 때문이다. 당시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고 넘어갈만도 했지만 1985년 최양락을 폭행한 건과 1991년 서인석을 폭행해서 다치게 한 사건은 뉴스에서 보도될 정도로 일이 커졌다.

80년대 당시는 사회전반적으로 군기가 강했고 선배가 후배를 때리는 게 일상이어서 후배들은 폭행을 당해도 후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억울함을 호소하지 못하고 참아야만 했던 사회 분위기였다. 이처럼 선배가 후배를 폭행하는 사건이 터져도 어지간하면 검찰이나 법정까지 가지 않고 쉬쉬해야 했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김형곤은 그 정도가 심해 무려 2번이나 후배 폭행으로 검찰에 넘어가서 언론 보도까지 된 것이다. 즉, 당시 개그맨들 사이에 벌어지는 단발적 폭행과는 차원이 다른, 매우 심한 구타를 했다는 뜻이다. 후술될 내용대로 집단폭행은 일반적인 일대일 폭행과는 수사와 사법에서 다루는 태도가 많이 달라서 폭력이 일상화된 시대에도 금기시되던 행동이었다.

1985년, 최양락을 집단폭행[26]으로 반 죽여 놓는 바람에 법정공방까지 이어진 적이 있었다. 발단은 김형곤이 고용한 운전기사가 그만 둘 때가 되자 김형곤이 계약을 더 하려 했으나 대우 문제라도 있었는지 그 운전기사가 재계약을 안 하려 헤서 김형곤이 설득 중이었는데, 그러는 사이 최양락이 그 기사와 접촉하여 자신의 운전기사로 고용해버린 것이었다. 이에 분노한 김형곤은 감히 선배를 바보로 만들었다며 최양락을 욕하곤 하였는데, 최양락은 아무 말도 못하고 무서운 선배라고 소문나 있던 김형곤을 피해 다니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예 김형곤이 최양락 보고 나오라고 전화를 했고, 참다 못한 최양락이 김형곤에게 반말을 하자[27], 분기탱천한 김형곤이 혼자도 아니고 동료 개그맨들 여럿을 최양락의 집에 데리고 가서 최양락을 단체로 무참하게 폭행한 것이다. 최양락이 운전기사까지 고용할 정도면 당시 최양락은 더 이상 과거의 쩌리[28]가 아닌 네임드로 발돋움했을 때이며, 실제로 최양락이 잘 나가기 시작하던 1985년에 발생한 사건이다.

그러나 정작 최양락은 문서에서 보면 알듯이 입사 1년차부터 선배들에게 반말로 까불다가 호되게 얻어맞던 일이 워낙에 잦아 당시 개그계에서는 최양락이 김형곤에게도 까불어서 맞았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에 김형곤의 저런 모습을 이해한다는 반응이 절대적이었다.[29] 그래서 당시에는 김형곤에 대한 동정표가 많았고, 최양락 본인도 워낙 저지른 전과도 화려해서 결국 합의하고 넘어갔다.[30]

하지만 김형곤이 최양락을 때린 사건은 다른 선배들이 때린 사건과 결이 다르다. 일단 최양락이 사적으로 김형곤에게 깐족거리다가 맞은 게 아닌데다 그 사건들처럼 최양락이 무명이던 시절이 결코 아니며, 반말을 하기 전에 먼저 갈군 쪽도 선배 김형곤이다. 또한, 일대일의 단순 폭행도 아니고 다른 동료 개그맨 여럿까지 동행시킨 채 최양락의 가택에서 폭행한 집단폭행 사건이다. 게다가 김형곤은 최양락을 개끌듯 강제로 집 밖으로 질질 끌고 나와서 두들겨 팼다. 다른 사건들은 가만히 있던 선배에게 최양락이 충동적으로 까분 거지만, 이건 최양락이 정당한 행위를 한 것에 김형곤이 선배의 체면을 내세워서 주변 개그맨 선후배들에게 최양락에 대한 욕설과 뒷담화[31]를 하였고, 무서운 선배라 욕을 먹던 와중에도 참고 지내던 최양락이 악감정이 쌓인 상태에서, 김형곤이 다시 따지려고 전화를 하자 참다 못한 최양락이 마지막으로 반말로 깐족거려 때린 것이다. 그것도 굉장히 잔인하게 끌고나와 때린 것이다. 즉, 김형곤은 아예 최양락을 사람 취급조차 안한 것.

그러고도 1991년에는 스탠딩 코미디의 대가인 동료 개그맨 서인석을 폭행하는 또다른 사고를 쳤다. 당시 김형곤이 서인석에게 자신이 운영하던 코미디클럽에 계속 나올 것을 요구했으나, 서인석은 수입이 적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에 김형곤은 서인석을 폭행해 앞니를 부숴버렸고 전치 4주의 상해를 입혔다. 김형곤은 서인석이 예정된 녹화 시간에 나오지 않는 등 불성실한 태도 때문에 버릇을 고치고자 손찌검을 했다고 해명했다.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은 6개월 출연정지를 당했고, 서인석도 소속사 이전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똥군기의 스케일이 워낙 크다 보니 되려 김형곤에게는 2006년에 사망한 게 복이 될 지경이다. 과거에 나쁜 행동을 했던 연예인들이 2020년대에 이르러서 인터넷을 타고 돌아서 네티즌들이 그걸 갖고 놀리고 방송국에는 왜 출연시키냐고 방송국 공식 홈페이지 게시판에 쳐들어가서 마구 항의하는 시대가 되었다. 일례로 양원경의 경우, 양원경의 말로홈런으로 유튜버가 되었지만 댓글에는 순 "유재석 왜 때렸냐", "왕영은이 진행하는 프로에 나와서 왜 프로를 망쳤냐" 이런 식의 댓글이 달렸으며 속풀이쇼 동치미에서 양원경을 출연시키자 "저 사람 왜 출연시켰냐"면서 MBN 홈페이지 게시판에 항의하는 등 나타나기만 하면 항의를 해댔고 조형기의 경우는 역시 방송국에 "살인을 한 사람을 왜 출연시키냐"는 항의가 빗발치고 조형기 역시 동네형TV로 유튜버가 되었는데 온통 "음주운전"이나 "살인" 같은 말로 조형기를 조롱하는 댓글들로 도배가 될 지경이었다. 그 외에도 김병만이나 류담 역시 사이버 렉카들의 맛있는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방송에 나오지 않고 있다. 그나마 정웅인 정도만 비록 사이버 렉카들에게 시달릴 지언정 아직 방송 활동은 하고 있다.[32] 김형곤은 일찍 죽어서 되려 이런 꼴을 안 당했던 것이다. 만약 김형곤이 현재도 살아 있었다면 "최양락 왜 때렸냐", "때려도 집에 있는 사람을 주거침입까지 해가며 밖으로 끌고 나와 때렸냐?", "저게 깡패지 코미디언이냐?" 같은 구설수에 시달렸을 것이다.


6.1. 또 다른 면[편집]


다만 김형곤이 마냥 폭력만 휘둘러대는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2013년 개콘 700회 특집에서 유재석의 추모 멘트를 보면, 군기를 심하게 잡는 것과 별개로 후배들을 챙길 때는 확실하게 챙기는 면이 있었다.

조원석의 경우 무작정 개그맨이 되고 싶다고 그가 운영하는 극장을 찾아갔을 때, 김형곤은 바로 조원석에게 전화번호를 줬다고 한다. 개그맨 시험에 여러차례 낙방했던 조원석에게는 김형곤의 존재만으로 의지가 되었다고 밝힌 바 있으며, 개그맨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많은 조언과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또 최희성이 무명으로 사는 것을 생전 매우 안타까워해서 코너 대본까지 짜놨으나,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협업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후 조원석과 최희성은 MBC 개그야에서 최국별을 쏘다로 단순간에 인기 개그맨이 되었고, 이후 조원석은 예능 프로에서 김형곤과의 일화를 종종 얘기하곤 했다.

사실 코미디계에서도 양원경이나 류담처럼 배푸는 것 없이 군기와 폭력으로만 후배들을 다스렸던 사람들은 코미디언으로서의 명성과는 별개로 인품적인 평가를 좋게 못 받고, 오래 롱런하지 못했다. 코미디도 결국 사람이 같이 일하는 것이다 보니...

즉, 소위 똥군기를 잡는다고 소리를 듣던 사람들 상당수가 대부분 군기와 더불어 후배들에게 배푸는 것도 상당해 명망이 좋은 인물들이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김병만이 있다. 김병만 역시 군기를 심하게 잡았다는 것으로 굉장히 유명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후배들을 챙겨줄 때는 확실하게 챙겨줬던 스타일이라 그를 따르는 후배들이 굉장히 많다. 김병만이 개콘에서 잘 나갈 때는 '김병만 라인'도 있었다고 한다.


7. 수상[편집]


수상 연도
시상식
부문
작품
1987년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인기상
유머 1번지
87 KBS 코미디연기대상
대상
1996년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남자 코미디연기상
MBC 세상 엿보기
1998년
KBS2 쇼! 행운을 잡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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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4년 여성전문병원 '김상태산부인과'로 개원. 1982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1985년에 종합병원으로 전환되면서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하였다.[2] 2006년 사망 직후 가톨릭대학교에 시신이 기증되었고, 연구가 끝난 뒤 2007년 11월 정식으로 장례식을 치루고 화장한 뒤 안치되었다. 이은주, 길은정, 생전 동료였던 양종철도 이 곳에 안치되어 있다.[3] 본인과 형제 이름의 돌림자가 곤(坤)이 아니라 형(亨)이니 삼현파 22세손, 수로 70세손이라고 단정짓지 말 것. 애초에 김해 김씨 사람들 중에선 파를 알 수 없는 사람이 대다수다.[4] 1996년 당시에 이용식과 같이 카메라에 잡힌 걸 보면 서로 비슷했다.[5] 2002년 기준이며, 왕년에는 115kg.[6] 하지만 한꺼번에 30kg을 감량한 것이 아니라 1~2년 운동하여 감량했었기 때문에 사인을 무리한 다이어트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7] 연극배우 활동 이전에는 삼성전자 상무로 재직하였다.[8]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캠퍼스 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하고 일리노이 공과대학교 법학대학원에서 미술법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미술법 전문 미국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강사, 한국과학기술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강사, P&G 미국본사 전략기획실 연구원, 외교통상부 한미자유무역협정 통상전문관·자문위원, 영화진흥위원회 국제법률담당 등을 역임했다.[9]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취득한 교원 자격증도 있다고 한다. 2004년 12월 18일 SBS <학교전설 - 받아쓰기 대회> 26회 외국인 특집 편에서도 본인이 스스로 알렸다.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만큼 2급 정교사 자격증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만약 개그맨이 되지 않았다면 일선 학교의 국어교사가 됐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10] 같은 TBC 출신들로는 서세원, 주병진, 김학래, 장두석, 이성미 등이 있다.[11] 개그콘서트 코미디 40주년 특집에서는 김준현이 회장님역을 맡았다.[12] 초반에는 '꽁자 가라사대'였다.[13] 컬투가 데뷔 전 김형곤이 운영하던 코미디 극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고 하며, 1998년 김형곤의 대학로 극장을 컬투(당시는 컬트삼총사 시절)가 인수해서 공연장으로 썼다.[14] 밑에 말한 트랜스젠더 댄서들이 나왔다는 이야기.[15] 당연히 김형곤이지만 서류상으로는 김형곤의 아내였다.[16] 발살바 효과 문서 참조. 이와 관련된 판례도 있는데, 2008년 대법원은 집무실에서 휴식 중에 변을 보다 발살바 효과로 급사한 노동자에 대해 업무상 재해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놓았다.[17] 김형곤은 아내와 이혼한 뒤 아들을 홀로 영국에 유학보냈다. 한밤의 TV연예에서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을 인터뷰를 통해 표현하기도 했을 정도.[18] 참고로 아들에게는 사망 사실을 알리지 않고, 그냥 아빠가 아파서 입원한 걸로 말한 뒤 데리고 왔다.[19] 또한 아래에도 나와 있듯이 김형곤은 성 소수자를 지원하는 등 그쪽으로 의식이 깨인 인물이었으나 김구라, 황봉알 등은 트랜스젠더 연예인인 하리수를 심하게 욕하는 등 편견에 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김구라만 보면 채널 돌리는 사람들이 꽤 있다.[20] 이 맥은 최양락 라디오의 "삼김" 개그 등으로 이어졌다.[21] 김형곤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개그맨들은 문화검열이 삼엄한 시기에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치인 모사 등을 특기로 가진 경우가 많은데(대표적인 예가 엄용수), 이는 김형곤이 주도한 코너에서 시사풍자가 많았고 그 맥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특기가 필요했기 때문. 코너의 캐릭터도 정치인과 유사한 포지션의 성격을 잡아주는 경우가 많았다. 반대로 지금은 그런 특기를 살리기 위해 시사개그를 선보이는 주객이 전도된 형태가 되었다.[22] 이유없는 반감이 아니라, 정치적인 편향성이 있었기에 호불호가 갈릴 수 밖에 없었다.[23] 물론 지상파라 섹드립은 덜하다.[24]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초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후에 참여정부 시절에 국가정보원장을 역임한다.[25] 당시엔 성동구 선거구가 갑/을로 분구되지 않았다.[26] 그것도 최양락의 집에 쳐들어가서 동료 개그맨들과 함께 최양락을 붙잡아서 집 밖으로 강제로 끌고 나와서 무차별적으로 폭행했다. 폭행 사건 중에서도 죄질이 상당히 나쁜 편에 속한다.[27] 전화로 김형곤이 "양락이 너 집에 있냐?"고 말하자 최양락이 "어 양락이 집에 있어!"라고 반말을 했다고 한다. 김형곤은 "뭐? 너 지금 선배한테 반말하냐?"라고 하자 최양락이 "어 반말해!"라고 답했고, 김형곤이 잠시 침묵하다가 "그래? 야 너네집 예전에 내가 가본 XX동 거기 맞지?"라고 하자, 최양락이 "어 그래 거기 맞아!"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자 전화가 끊겼고 몇십분 뒤 김형곤이 동료들과 단체로 찾아와서 폭행했다. 이것도 최양락이 과거 해피투게더에 나와서 김형곤이라고 실명만 대놓고 언급하지 않았을 뿐 직접 다 말한 대화 내용과 폭행 내용이다. 진짜 엄청나게 죽도록 맞았다고 한다.[28] 다른 사건들은 1981년 ~ 1982년 위주의 사건이다. 최양락이 신인 중에서도 생무명이던 시절.[29] 개그계에서 똥군기랑 거리가 멀고 후배들을 엄청 아껴줘 수십년을 존경받던 그 인성 좋은 임하룡조차도 최양락이 저렇게 심하게 까부니까 더 이상은 참다 못해서 욕설을 날린 것도 모자라 폭력까지 휘둘렀을 정도였다. 그나마 임하룡은 주먹이 아닌 마시던 우유를 최양락에게 집어던져 최양락이 우유투성이가 된 수준의 가벼운 일이었다. 다른 깐족 건으로 담배를 빼앗긴 이홍렬은 신발로 최양락의 머리를 후려쳤다. 훗날 이홍렬이 밝힌 바로는, 최양락은 키가 크고 자신은 키가 작아서 신발을 써야 머리를 후려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30] 그리고 우습게도 최양락은 4년도 안 가 분풀이 차원에서 똑같이 후배 하상훈을 무참히 구타해 병원에 입원시켜버렸다. 하상훈은 네로 25시에서 최양락에게 대드는 '얼떨리우스' 캐릭터를 맡았는데 실제로도 최양락에게 많이 대들었는지 선배들에게 당한게 많아서 폭력만은 쓰지 않던 최양락이 하상훈을 무참히 구타했다.[31] 기사 내용 상으로 주변 개그맨들끼리도 소문이 나서 어느 정도 알았다고 하니 김형곤이 뒤에서도 최양락에 대해서 수시로 뒷담화를 하고 다녔을 확률이 높다.[32] 정웅인은 학창시절에 거하게 똥군기를 부렸고 졸업한 후에는 끊었지만 양원경은 활동기간 내내 똥군기와 싸움을 일삼았다. 조형기의 경우 한 번의 잘못이지만 문제는 그게 음주운전 + 살인이라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