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민(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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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서울특별자유시장
김형민
金炯敏 | Kim Hyung-min


파일:김형민 시장.png

출생
1907년 5월 12일[1]
전라북도 익산군 춘포면 봉개마을
(現 전라북도 익산시 춘포면 봉개마을)
사망
1998년 5월 2일 (향년 90세)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 42호
본관
김녕 김씨

눌정(訥丁)
재임기간
초대 서울특별자유시장
1946년 9월 28일 ~ 1948년 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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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전주신흥학교 (보통과·고등과 / 졸업)
이오라니 고등학교[1] (졸업)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교육학 / 학사)
미시간 대학교 (교육학 / 석사과정 수료)
약력
송도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
3.1 석유상사 대표이사
제4대 경기도 경성부윤
초대 서울특별자유시장
충무로 대한극장 대표이사
서훈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1. 개요
2. 생애
3. 업적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초대 서울특별자유시장.


2. 생애[편집]


식민지 조선 전라북도 익산군 춘포면 봉개마을에서 태어났으나 부친의 사업 때문에 완주군 삼례로 이사했다. 눌정 김형민의 태생지는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어전리 738번지, 새주소로는 삼례읍 어전리 신평길 42-6이다. 아버지가 삼례읍내에서 한약방을 경영하여 눌정은 어려서부터 삼례에서 생활하였고 1916년부터 1918년까지 삼례영신학교에 다녔다. 전주신흥학교에 진학하여 보통과와 고등과를 졸업하고, 광주 숭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후 하와이의 이오라니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에서 교육학 학사과정을 거치고, 미시간 대학교에서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미국 유학파였던 김형민은 수업 시간에 친미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1943년 일제에게 돌연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10월에서야 풀려난다.

8.15 광복 직후 석유상사인 3.1사를 만들어 운영했는데 이 때 미군정 책임자인 존 하지 중장으로부터 경성부윤(서울시장)을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당시 김형민의 나이는 겨우 38세였는데, 무려 지금까지도 최연소 시장 기록을 지키고 있다.[2] 하지 중장의 삼촌이 웨슬리언 대학교에서 김형민과 함께 수학하던 동창이었고, 그게 인연이 되어 경성부윤으로 추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 중장의 추천 이야기는 그가 38세에 경성부윤이 된 이유에 대한 몇 가지 설 중 하나다.

1948년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스스로 시장직에서 물러나 본업이었던 삼일사 사업에 매진한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했으며 1998년 5월 2일 서울삼성병원에서 숙환으로 사망하고 고향 익산에 안장되었다가 2003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3. 업적[편집]


갑자기 젊은 나이에 경성부윤으로 취임한 그가 앞장서서 추진한 일은 지명 속 일제 잔재 청산. 일본식 행정구역 명칭들을 전부 한국식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정(町)동(洞)으로, 통(通)[3]로(路)로, 정목(丁目)을 가(街)로 고쳐 서울시의 행정구역명을 지금의 형태로 바꾸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바는 서울이라는 지금의 명칭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서울은 한성, 경성 등으로 불렸으나 김형민은 서울이라는 명칭을 강하게 주장하여 지금의 명칭이 굳어지게 된 것이다. 당시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 우남시, 즉 이승만의 호를 따서 명명하자는 의견이 강하게 있었는데도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김형민 시장은 우남시에 극구 반대하고 서울시라는 명칭을 밀어 붙였다. 하마터면 4.19 혁명 터지고 수도 명칭을 수정하여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우남이라는 이름은 이승만 본인조차도 반대했을 정도로 아부성이 강한 제안이라 실제 우남시가 되었을 확률은 적다. 또한 한글학자인 최현배 등은 이 '서울'이라는 도시명에 크게 반발하기도 했다. 고유명사로의 의미 이동이 거의 이루어진 지금에야 '서울'이라는 도시명이 자연스럽지만, 원래 '서울'은 보통명사로 '수도'라는 뜻이니, 당시로서는 어색했을 만 하다. 누군가 서울시의 명칭을 '수도시'로 바꾸자고 주장한 것을 들었을 때의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4] 어찌됐든 이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울'이라는 도시명을 확립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다.
[1] 음력 1907년 4월 1일[2] 두 번째로 젊은 시장은 40세의 김현옥 제14대 시장이었다. 김현옥 시장이 취임할 때까지 역대 시장들은 윤태일 시장을 제외한 전원이 김형민 시장보다 연상이었다.[3] 지금의 행정구역 단위인 통(統)과는 이름만 같다.[4] 하지만 수도라는 보통명사를 고유명사 지명으로 삼은 사례가 없지는 않다. 바로 옆 나라 일본교토부 교토시. 교토의 한자 표기가 京都로 그 자체가 수도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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