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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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매체에서
4. 참고문헌



파일:1984년 김환.jpg

1. 개요[편집]


북한의 정치인, 테크노크라트.


2. 생애[편집]


1929년 량강도 김형직군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만경대혁명학원 졸업 경력을 생각하면 이것보다는 좀 더 젊을 것으로 추정된다. 좋은 집안 출신으로 전사한 빨치산 김혁의 아들이며, 김일의 조카사위였다. 만경대혁명학원 졸업 이후 김일성종합대학 화학공학부에 진학했으며 6.25 전쟁 중에 김일성 친위중대 제1소대장으로 복무했다. 전쟁 중 동독으로 유학하여 라이프치히 대학 산하 칼 마르크스 공대를 졸업했다.

귀국 후 1961년 내각 중공업성 화학공업연구소 연구원을 지냈으며 1963년 함흥공업대학 분석화학구좌 교관으로 이동했다. 1967년 과학원 함흥분국 고열화학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그러다가 내각에 들어와 1968년 방직제지공업성 부상에 임명되었고 1972년 1월에 자신이 '화학공업부문의 책임일군'으로 일했다는 회고를 봐서는 이후 화학공업상, 적어도 화학공업성 부상에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이 채택되고 정무원 체제가 자리잡히면서 화학공업부장에 임명되어 남흥청년화학련합기업소 건설 사업을 추진하였다. 1976년까지 재임하다가 원동구에게 물려주었다.

1974년 10월,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으며 1976년 3월에 남일 장의위원, 5월에 홍원길 장의위원, 9월에 최용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1977년 6기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되자 대의원, 자격심사위원, 중앙인민위원에 선출되었다. 그의 승진가도는 계속 이어져 1978년 9월에 정치위원회 위원, 비서국 비서로 선출되었으며 1978년 9월, 한익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 겸 비서국 비서로 유임되었다.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예산심의위원장에 선출되는 한편, 4월 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김일성 칠순 기념 김일성훈장을 수훈받았다. 1982년 4월에는 최현 장의위원,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 1983년 9월, 김일대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3년 6월 15일부터 17일까지 진행된 조선로동당 6기 7중전회에서 비서국 비서에서 해임되어 정무원 부총리로 옮겼다. 이에 대해서는 1978년 비서국 비서에 오른 것 자체가 연형묵이 1977년에 일으킨 성추문 때문에 잠시 해임된 것의 땜빵으로 들어왔기 때문이고, 연형묵이 복권되면서 물러난 것이라는 분석이 있었다. 1984년 3월에는 김일 장의위원, 4월에 오백룡 장의위원을 지냈고 1986년 2월 5일부터 8일간 진행된 조선로동당 6기 11중전회에서 공진태, 홍성룡, 안승학이 정치국에서, 연형묵, 안승학, 김중린이 비서국에서 해임되면서 리근모, 계응태와 함께 다시 비서국 비서로 기용되었다. 1986년 4월, 김좌혁천세봉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86년 10월에 모잠비크에 특사로 파견되었다.

1986년 12월 8기 최고인민회의가 소집되자 정무원 화학 및 경공업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1987년 3월 19일, 화학 및 경공업위원장에서 소환되어 김달현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화학 및 경공업담당 부총리에 임명된다. 하지만 김일성 종합대학 교수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조명철의 증언에 따르면 1987년, 생산성 향상을 위해 가족 단위 영농을 해보자는 과학원의 제안을 최영림을 통해 김일성에게 올렸다가 자본주의 반동파라고 욕을 바가지로 먹고는 정치국에서 쫓겨났다고 한다.[1] 1987년 8월, 박영순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8년 2월 1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다시 정무원 부총리 겸 화학 및 경공업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8년 6월 2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화학 및 경공업위원회가 화학공업부와 경공업위원회로 분리되자 다시 화학공업부장을 맡았고, 1988년 11월에 동독을, 1989년 9월에 소련을 방문하였다.

1990년 5월, 9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정무원 부총리 겸 화학공업부장에 유임되었다. 1991년 12월 18일, 화학공업부장에서 해임되어 주길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강명도의 주장에 따르면, 북한경제의 파탄을 경고하면서 개혁개방을 주장했다가 김일성의 노여움을 사서 안주청년화학공장 노동자로 하방되어 개처럼 굴렀다고 한다. 하지만 1년 만에 주길본이 숙청되면서 1992년 12월 11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정무원 부총리 겸 화학공업부장에 재임명되었다. 이때 김일성이 김환이 맞았다고 김환을 추켜세우면서 사과했다고 한다. 강명도의 주장에 따르면 김정일과도 사이가 나쁘지 않다고 했으나, 스스로도 김환이 술먹고 놀줄 모르는 사람이라서 김정일 측근 반열에는 끼지 못했다고 했다. 현성일의 분석에 따르면 김환은 김정일과 그닥 친분이 없는 테크노크라트 출신으로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한 이후 차차 권력에서 멀어졌다. 1994년 7월, 김일성강희원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5년 조선로동당 창건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고 1996년 2월, 리승기 장의위원을 지냈다. 다시 1997년 10월에 김정일 총비서 추대를 위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이후 동정보도는 없었으며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부총리에서 해임된 것으로 보인다. 2008년 9월, 김일성 숭상글인 <남흥땅에 대화학공업기지가 일떠서기까지>를 집필하였으며, 이후 2008년 말에서 2009년 초에 사망했는지 2009년 5월 28일에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조선중앙통신은 "오랜 기간 당과 국가의 중요직책에서 사업하였던 정무원부총리 김환"이라고 김환을 호칭하며 나름 좋게 말해주었다. 하지만 지방직이라도 뭔가를 한 홍시학과 달리 그저 정무원부총리로만 안장된걸 봐서는 부총리 해임 이후 뭔가 일을 했던 것은 아닌 걸로 보인다.

2023년 7월 27일 열병식에서 친위중대 상징종대가 행진할때 김환의 초상화도 있었다.

3. 매체에서[편집]




4. 참고문헌[편집]


  • 통일부 정보분석국, 북한의 주요 인물 자료집 2000(서울: 통일부, 2000)
  • 현성일, 북한의 국가전략과 파워엘리트: 간부정책을 중심으로(서울: 선인,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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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로 당시 북한의 주요 행사 주석단 보도를 보면 1987년부터 김환을 정치국 위원으로 보도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