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시마 시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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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시마 시게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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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시리즈 우승 반지
1961
1963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94
2000



1963년 일본시리즈 MVP
도바시 마사유키
다네모 마사유키
(도에이 플라이어스)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조 스탠카
(난카이 호크스)
1965년 일본시리즈 MVP
조 스탠카
(난카이 호크스)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바타 이사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9,70년 일본시리즈 MVP
다카다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나가시마 시게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스에츠구 다미오
(요미우리 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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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시마 시게오의 기타 직책 역임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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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역대 감독
오타가키 고조[1]
(2000 시드니)

나가시마 시게오
(2004 아테네 예선)

나카하타 키요시
(2004 아테네 본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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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자이언츠 No.3
나가시마 시게오
長嶋 茂雄 / Shigeo Nagashima

생년월일
1936년 2월 20일 (88세)
치바현 인바 군 우스이 정[1]
국적

포지션
3루수
투타
우투우타
학력
사쿠라 제1 고등학교 - 릿쿄대학
소속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958~1974)
지도자
요미우리 자이언츠 플레잉코치 (1972~1974)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1975~1980, 1993~2001)

1. 개요
2. 선수 시절
2.1. 총평
3. 은퇴 이후
4. 기타
5. 일화들
6. 가족 관계
7. 선수 성적
8. 감독 성적
9.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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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자이언츠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前 야구 선수이자 감독[2]


2. 선수 시절[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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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3]

대학 졸업 후 동기이자 언더핸드 스로 투수로 유명한 스기우라 타다시와 당초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할 예정이었으나 결국 나가시마 혼자만 교진군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릿쿄 대학의 합숙소 식당에서 스기우라의 난카이 입단 제의에 거절했다는 것을 고백하기도 하였다. 이후 스기우라는 그대로 난카이에 입단했고, 나가시마는 시범 경기 도중 난카이의 감독인 츠루오카 카즈토에게 직접 찾아가 난카이 입단을 거부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 이에 츠루오카 감독은 "간토 출신 사람은 간토 지방 연고팀에 들어가야지"라고 웃으며 쿨하게 사과를 받아들였다. 대학 졸업한 해인 1957년 11월 20일부로 요미우리에 전격으로 입단하면서 등번호는 치바 시게루가 달았던 3번으로 배정을 받았고, 계약금은 당시 최고 금액이었던 1,800만엔이었다.

릿쿄대학의 중심 선수로 도쿄 6대학 리그에서의 맹활약했던 것을 발판 삼아 입단 당시부터 '골든 보이(ゴールデンボーイ)', 또는 '허리케인(ハリケーン)'이라는 별명이 붙여지는 등 많은 기대를 받았다. 1958년 4월 5일, 개막전인 고쿠테츠 스왈로즈와의 경기에서 3번 타자로 선발 출장해 개막전 데뷔를 완수하였지만, 고쿠테쓰의 에이스 투수인 가네다 마사이치로부터 4타석 연속 삼진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고[4], 다음날의 경기에서도 역시 상대 투수였던 가네다에게 삼진을 당했다. 그러나 2일 후인 4월 7일 고쿠테쓰전에서 첫 안타를 기록하는 것을 시작으로 4월 10일의 다이요 웨일스전에서 첫 홈런을 기록하여 본래의 힘을 발휘했다. 시즌 도중부터 현역 시절 4번 타자로 활약하면서 감독으로 지휘봉을 잡은 가와카미 데쓰하루를 대신하는 4번 타자가 되면서 팀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19일에 행해진 히로시마 카프전에서 신인 신기록(당시)이 되는 28호 홈런을 때렸지만, 1루 베이스를 실수로 밟지 않은 바람에 결국 홈런이 취소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당시 기록은 투수 땅볼이었다). 만약 1루 베이스를 밟았다면 신인으로서의 「트리플 스리(타율 3할, 홈런 30개, 30 도루)」의 기록이 달성될 수 있었다. 덧붙여 나가시마는 다음 9월 20일에 있은 오사카 타이거스전에서 28호 홈런을 기록하여 신인 신기록을 달성했다.[5][6]

이로써 데뷔 첫 해인 1958년 시즌의 타격 성적은 홈런 29개, 92타점, 3할 5리의 타율과 153안타였다. 타격왕 타이틀 자리를 놓고 오사카 타이거스타미야 겐지로와 경쟁하였지만, 타미야는 시즌 종반에 결장이 잦았고 전 경기 출장을 계속하던 나가시마는 타율을 까먹으며 최종적으로 타격 2위인 3할 5리에 그쳤다. 그러나 나가시마는 시즌 최다 안타를 기록하는 한편 도루 부문에서도 리그 2위인 37개를 기록하여 신인왕 타이틀을 석권했다. 153안타는 2019년 한신 타이거즈의 신인 외야수 치카모토 코지가 159안타로 갱신하기 전까지 반세기 넘게 센트럴리그 신인 최다안타 기록이었다. 34개의 2루타 역시 센트럴 리그 신인 최다 2루타 기록이었으나 2021년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마키 슈고가 35개로 경신했다.

1962년에는 팀 내 절친한 사이이자 동고동락을 하며 지내온 오 사다하루가 홈런왕과 타점왕 등 연거푸 타이틀을 기록하여 오 사다하루와 함께 팀 타선의 주축이 된 일명 ON포(오 사다하루와 나가시마의 영문 이니셜)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로 인해 메이저 리그인 뉴욕 양키스미키 맨틀로저 매리스가 MM포에 비유되기도 했다. 나가시마는 이 애칭의 표현대로 요미우리의 간판 4번 타자로 맹활약을 했다. 1965년~1973년에는 오 사다하루, 다카다 시게루, 시바타 이사오, 가네다 마사이치, 호리우치 츠네오, 모리 마사히코 등과 함께 팀의 일본 시리즈를 9년 연속 우승(일명 V9)하는 쾌거를 이루어내 팀의 우승 멤버 중 한 명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1971년에 통산 6번째의 타격왕 타이틀을 획득한 이후 이듬해인 1972년에 갑작스런 타격 부진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타석수를 늘리는 등 부진을 극복하려고 생각한 카와카미 감독은 나가시마의 타순을 1번으로 하는 등 특단의 대책을 세웠지만, 결과적으로 타격 21위인 2할 6푼 6리의 타율과 27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또, 14년간 팀의 감독을 맡은 카와카미의 후계자로서의 기대가 커지면서 코치를 겸임하는 등 현역 은퇴 후의 진로가 정해졌다.[7] 1972년~1973년에는 2년 연속 골든 글러브 상을 수상했고, 프로 선수로서의 나가시마는 타격뿐만 아니라 3루수로서의 수비도 큰 주목을 받았다.

1974년 10월 12일, 주니치 드래곤즈가 리그 우승을 제패하면서 팀은 10년 연속 리그 우승과 더불어 일본시리즈 진출-우승에 실패했지만 나가시마는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8] 그 후 10월 14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리그 우승팀 주니치와의 더블헤더 1차전에서 홈런을 기록, 이것이 자신의 현역 생활 마지막 홈런(통산 444호)이었다. 은퇴 기념식에서 "저는 오늘 은퇴하지만 우리 자이언츠는 영원히 불멸입니다!(私は今日引退をいたしますがわが巨人軍は永久に不滅です)"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은퇴전 전체영상 또, 대졸 출신으로서의 통산 2471안타는 일본 최다 기록을 수립해 개인 통산 2186경기 출장, 2471안타, 444홈런, 1522타점, 타율 3할 5리의 통산 성적을 기록해 선수 생활을 은퇴하여 가와카미 감독의 사임으로 차기 감독으로 취임했다. 선수 시절 센트럴 리그 최우수 선수(MVP)를 5차례 석권한 것을 포함해 1959년~1961년에는 센트럴 리그 타이 기록인 3년 연속 타격왕에 등극하는 위업을 달성, 일본 시리즈 MVP를 일본 프로 야구 사상 4차례를 석권하는 등 요미우리의 대표적인 간판 타자로서의 숱한 대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2.1. 총평[편집]


팀 동료이자 잠재적 라이벌이었던 오 사다하루, 카와카미 테츠하루와 함께 일본 야구를 대표하는 선수이자 인기로는 그들조차도 넘어서는, 일본 야구 사상 최대의 슈퍼 스타였다. 그의 대중적 인기는 놀라울 정도여서[9] 선수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본의 국민적 영웅으로 대접 받고 있다. 그의 등번호 3번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영구 결번이다.[10] 통산 성적은 오 사다하루, 장훈, 노무라 카츠야 등에게 밀리지만 최고 명문팀의 중심 타자로 그들을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고, 박수칠 때 떠나는[11] 은퇴를 했다는 점에서 조 디마지오와 비슷한 점이 많다. 별명은 ''미스터 베이스볼'. 위 별명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전설, 스탠 뮤지얼의 별명이기도 하다. 또는 '미스터 자이언츠'. 이 별명은 요미우리 사상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그를 기념하는 말이다.[12]

1958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해 데뷔 첫 해에 153안타, 29홈런, 92타점으로 타격 3관왕에 오르며 신인왕을 수상. 스타덤에 올랐다. 그의 3루 수비는 발군이었고, 1974년까지 타격왕 6회, 홈런왕 2회, 타점왕 5회, 베스트 나인(한국으로 따지면 골든글러브) 17회를 수상했다. 베스트 나인 17회도 대단한 기록이지만,[13] 타격왕 6회는 충격과 공포 수준. 한국프로야구에서 장효조양준혁이 4회, 이대호가 3회인 것에 비교하면 대단한 기록. 그러나 장훈이 7회, 특히 이치로가 7년 연속 타격왕을 달성하면서 이 기록은 깨졌다. 물론 장훈과 이치로는 홈런왕은 한 번도 달성한 적 없다.


3. 은퇴 이후[편집]


1974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뒤, 이듬해인 1975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취임해 두 차례에 걸쳐 감독을 지냈고, 5번의 센트럴 리그 우승과 2번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끈 뒤 2001년 은퇴했다. 이 후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다가 2004년 3월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야구계를 떠났다.

다만 1970년대의 1기 감독 시절 땐 각각 6-1-1-2-5-3의 성적을 찍었는데, 그 V9으로 대표되는 자이언츠의 전성기에 비하면 그닥 좋다곤 볼 수 없었다. 특히나 취임 첫 해인 1975년의 창단 이래 최초의 리그 꼴찌는 그야말로 나가시마에겐 빼도박도 못하는 흑역사. 덤으로 이 해 10월 15일엔 홈구장에서 4-0으로 떡실신당하며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첫 리그 우승을 허용한다.[14] 이게 어느 정도나면 1975년 말 일본 언론사들이 꼽은 올해의 10대 뉴스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이 시기에 일어난 사이공 함락, 킬링필드의 시작, 지명타자 제도 도입, 한큐 브레이브스일본시리즈 V1, 히로시마 도요 카프센트럴리그 V1를 모두 묻혔다.[15] 즉 나가시마는 교진의 역대 감독 중 유일하게 최하위를 기록했다[16]. 게다가 이는 간사이의 경쟁팀이자 안 죽이고 못 사는 앙숙 관계인 한신 타이거스보다도 더 먼저였다[17]. 그 덕택에 이 해엔 여러 모로 안 좋은 기록을 많이 찍었다. 양대 리그 이래 구단 역사상 최악의 승률이자 유일한 3할 승률인 .382와, 구단 사상 최고 기록인 우승팀과의 게임차 27게임, 무엇보다도 이해 찍은 팀 안타 987안타'''는 현재까지 마지막 일본 프로 야구의 3자릿수 팀 안타 기록이다

그래도 다음해와 그 다음해인 1976~1977년 2년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했으나, 문제는 일본시리즈에서 과거 V9 시절 5차례나(67~69, 71~72) 일본시리즈 우승의 제물로 삼았던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2년 연속으로 깨졌다. 그 뒤론 재임 기간 내내 한 번도 리그 우승을 하지 못하고, 거기다가 지휘력에 관한 논란과 여러 구설수까지 나오게 되며 결국 나가시마는 1980년에 해임된다.[18]

그 뒤 해설가 등으로 일하다가[19] 1993년 다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감독이 되었다. 그 뒤 사임하는 2001년까지 리그 3-1-3-1-4-3-2-1-2위[20]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1997년을 제외한 나머지 연도 때 팀을 전부 A클래스로 올려놨다. 거기다 1994년, 2000년엔 1기 감독 시절 이루지 못한 일본시리즈 우승도 했다.[21][22][23]

1975~1980 1기 감독 시절에는 등번호로 90번,[24] 1993년부터의 2기 감독 시절에는 자신의 현역 시절 영구 결번 3번이 두 개 들어간 33번을 사용했다.[25] 2000년부터는 히로시마에서 강타자 에토 아키라를 영입할 때 그가 히로시마에서 쓰던 33번을 넘겨주고 자신은 현역 시절의 3번을 사용했다. 스프링 캠프에서 현역 시절과 똑같은 3번이 박힌 유니폼을 점퍼 속에 최대한 숨기다가 3번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 보고 싶다는 여론이 고조될 때 '짠~' 하고 공개를 해서 당시 전 일본이 장안의 화제였다. 나가시마의 현역 시절을 기억하고 있던 올드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감격 두 배의 순간.[26]

2001년까지 감독직을 은퇴함과 동시에 종신 명예 감독으로 승진했고, 수석 코치로 후계자 수업을 받은 하라 타츠노리가 나가시마로부터 감독을 물려받아 2002년부터 2003년, 2006년부터 2015년, 2019년부터 현재까지 감독을 맡고 있다[27] 2016년 시즌부터 2018년 시즌까지 타카하시 요시노부가 교진군의 감독을 맡았다.

2013년, 제자인 마쓰이 히데키와 함께 일본 최대의 영예인 국민영예상을 수상했다. 나가시마가 22호고 마쓰이가 23호다.

실명으로 타이거 마스크 II세에 등장한 적이 있다. 또한 사무라이 자이언츠에도 카와카미 감독과 왕정치 그리고 가네다 마사이치와 더불어 등장한 적이 있다.

2021년에는 2020 도쿄 올림픽 개막식에 오 사다하루, 마쓰이 히데키와 함께 성화 봉송자로 나섰는데, 거동조차 불편한 모습이어서 많은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한국 나이로 86세의 고령인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나가시마보다 불과 4살 연하인 오 사다하루는 상대적으로 정정해 보였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성화를 전달하기 위해 이동할 때도 마쓰이 히데키의 부축을 받고 이동했다.


4. 기타[편집]


현역 시절 한신 타이거즈에이스 무라야마 미노루와는 불꽃 튀는 라이벌 관계로 유명했다. 나가시마는 무라야마를 상대로 통산 302타수 85안타, 타율 0.281, 21홈런, 39삼진을 기록했는데, 무라야마에게 프로 통산 1500 탈삼진(1966년 6월 8일), 2000 탈삼진(1969년 8월 1일)을 헌납하기도 했다, 사실 이 라이벌 관계는 무라야마가 고교 졸업 후 릿쿄 대학이 자신의 영입을 거부한 것에 대해 원한을 품은 것을 릿쿄대의 스타인 나가시마에게 발산한 것에서 비롯된 것인데, 정작 나가시마는 당초 무라야마에게 아무런 해코지를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가시마와 무라야마는 인간적으론 서로 호감을 넘어서 존경하는 사이였고, 무라야마는 평소에 나가시마를 언급할 때 언제나 이름에 "상(さん)"을 붙이며 예우하였으며, 나가시마 또한 무라야마에 대해 "그는 나에게 한 번도 빈볼이나 위협구를 던진 적이 없다. 무조건 정면 승부였다"라면서 대놓고 그의 인간성을 칭찬하길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1998년 8월 22일, 무라야마가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나가시마는 원정 경기 중임에도 먼 길을 마다않고 빈소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고인을 애도한 바 있다.

요미우리뿐만 아니라 프로야구계에서 큰 형님 격이다 보니 선수들부터 코칭 스태프까지 물론 무슨 고민이 생기면 나가시마에게 먼저 조언을 구하는 경우가 많다. 나가시마가 하는 말이 거의 맞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호시노 센이치에게 일본 프로 야구 인기 상승을 위하여 한신 감독 자리를 권유한 사람이 바로 나가시마 시게오.

나가시마 등장 이후 일본 만화나 게임에서 '3루수=장타자'라는 등식이 자주 나온다. 대표적인 예로 터치닛타H2히데오. 실황 파워풀 프로야구 2016의 파워페스모드에서도 체감할 수 있다. 3루 강타자는 오오조라, 반도, 토죠, 후쿠야, 라이고우, 사장 등등 무수하게 나오지만 1루 강타자는 결승전인 서강대학에 나오는 키요모토와 타키모토밖에 없다. 그마저도 이 둘의 서브 포지션의 3루수. 1루 자원의 부족은 후속작인 2018에서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폭발! 온천 부글부글 대작전 사건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해당 항목 참조.

소년 선데이의 창간호 표지를 장식하였다.

김일융을 삼성에 입단시킬 때 도움을 줬는데, 삼성이 고마움의 표시로 진돗개를 선물을 줬다고 한다.

G-SHOCK 최상위 모델 MR-G에서 나가시마를 기리는 모델을 200개 한정으로 2019년 11월에 출시했다. #

요미우리의 상징과 같은 사람이지만 의외로 어렸을 땐 오사카 타이거즈의 팬이었다고 한다. 후지무라 후미오 플레이를 보고 야구 선수가 되기를 결심했다고 한다. 어릴 때 팬심이 담긴 채 똑같이 한신 빠돌이로 자랐던 호시노에게 한신 감독 수락을 권유했으니 흠좀무.

2021년 3월 2일, 도쿄돔을 방문하여 선수들과 만났다.





5. 일화들[편집]


야구 선수 외적으로도 독특한 캐릭터성으로 유명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건망증과 기상천외한 언어 생활, 그리고 4차원적인 성격을 꼽을 수 있다. 건장한 체격, 호남형의 외모와는 달리 하이톤의 목소리로 여자 같이 사근사근하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우스꽝스러운데, 말의 내용도 정체불명의 의성어의태어, 상황에 맞지 않는 외국어의 남용, 앞뒤 안 맞는 문장들로 범벅되었기 때문에 그의 언어는 예능 프로그램의 소재로 이용되곤 했다. 그의 기행들을 몇 가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선수 시절 감독이자 팀의 대선배 출신인 카와카미 테츠하루에게 "헤이 보스"라고 했다가 크게 혼난 적이 있다.

  • 위의 카와카미 감독과의 또 다른 일화. 카와카미 감독이 선수들에게 프로 의식을 심어주기 위한 교육의 일환으로 선수단에게 스모 경기를 보게 하고 감상문을 쓰게 했다.[28] 다른 선수들은 경기에 대한 감상 등을 빼곡히 적었는데, 나가시마는 "알겠습니다" 한 문장만 적었다고 한다 카와카미 감독은 후에 절대 안 잊혀지는 감상문이라고 술회했다.

  • 비싼 돈 주고 BMW 승용차를 구입했지만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지 않고 '핸들이 무거운데?'라고 생각하며 달리다 엔진에 불이 붙어 열흘도 안 돼 폐차시켰다.

  • 위의 사건 이후 구단에서 선수 보호 차원으로 나가시마에게 운전을 금지시키고, 선배의 차를 타고 출퇴근할 것을 지시. 그러던 어느 날, 선배의 차를 타고 귀가하던 나가시마는 집에 도착하자 운전을 해준 선배를 보며 말했다. "얼마예요?"

  • 경기를 마치고 집으로 가야 하는데 자기 집을 몰라서 당황한 나머지 공중전화로 자기 집에 걸어 가정부에게 말했다. '우리 집 주소가 뭐였죠?'

  • 후배에게 만 엔짜리를 주고 음료수를 사오라고 하고, 후배가 음료수를 사오고 거스름돈을 주자 놀란 눈으로 물어보며 하는 말. "어? 잔돈이 있었어? 내가 천 엔짜리 주지 않았던가?"[29]

  • 팬과의 대화를 하다가 한 열혈 팬이 "저는 나가시마 선수와 생일이 똑같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생일이 몇 월 며칠이신데요?"라고 했다.

  • 생일에 홈런을 친 동료 선수에게 '난 생일에 홈런를 친 적이 없어'라며 부러워했다. 그러나 위 프로필에 나와있듯 나가시마의 생일은 비시즌 기간인 2월이라 생일에 벌어진 경기에서 홈런을 칠 일이 있을 리 만무했다. 다만 이 일화는 기행이라기보단 비시즌이 생일이라 팬들 앞에서 생일날에 홈런을 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것에 가깝다.

  • 경기 중 타임을 요청하고 고토 코지[30]대타로 출장시키기 위해 "대타 고토!"라고 외쳤다. 문제는 고토가 이때 이미 루에 나와 있는 주자였다. 주자를 대타로 보내려 한 셈

  • 성적 부진으로 해임되고 13년 뒤인 1993년에 다시 요미우리 감독에 올랐을 때 소감을 묻는 기자들에게 한 말. "나는 12년 간 "누전"하고 있었습니다.

  •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예선 때 일본 대표팀 감독임에도 한국 대표팀 선수들의 타격을 봐준 적이 있다. 나가시마의 건망증 탓에 팀을 혼동해서 한국 팀 선수들을 가르쳤다는 얘기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우스갯소리이고, 애초에 나가시마는 자기 팀이건 다른 팀이건 가리지 않고 타격에 대해 가르쳐 주는 것을 좋아하는 야구인이다. [31] 타격 지도 시에는 매우 열성적으로 가르치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해주는 게 아니라, 알 수 없는 의성어를 써가며 자신만이 갖고 있는 감각을 전달해주려 애쓰기 때문에 지도 받는 타자는 뭔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 불펜에서 투수에게 몸을 풀라고 하고는 경기가 끝날 때까지 투수 교체를 하지 않아, 불펜에 있는 투수가 주구장창 연습볼만 던지다 어깨에 과부하가 걸려 실신. 나가시마는 그제서야 자기가 투수 교체를 준비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32]

  • 어느 경기에서 투수에게 포크볼을 던지라는 지시를 했는데, 문제는 상대팀도 보란 듯이 검지와 중지를 벌려 포크볼 던지는 시늉을 하며 투수에게 "포크야 포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당연히 포크볼을 노리고 들어온 상대팀 타자에게 홈런을 맞았고, 홈런을 맞자마자 나가시마는 분을 못 참고 덕아웃에서 사라져버렸다,

  • 번트 작전을 실행한답시고 대놓고 번트하는 흉내를 내며 "대타! 타카다![33]"를 외쳤다. 당연히 상대팀이 이런 어이없는 작전에 넘어갈 리 없었고 결국 번트 실패. 그러나 나가시마는 자기가 대놓고 번트 흉내를 냈다는 것도 눈치채치 못했는지 "사인이 읽히고 있는 건가!"라고 진심으로 경악했다.[34] 거의 똑같은 일화로 대타를 내세우면서 "번트! 도이[35]!"라고 외친 적도 있었다.

  • 타격 지도에 관한 지론: "공이 '븃' 하고 날아오면 '바싱' 하고 친다." → 한국식으로 번역하면 코치를 하면서 선수에게 "공이 '휙' 날아오면 '딱' 하고 때리면 돼"라고 말하는 식이. 이러니 당연히 못 알아들을 수밖에 없다.[36]

  • 아테네 올림픽 감독 중 일본 팀이 위기에 처하자 투수 교체를 시도. 누가 나갈까 코치들에게 물어보며 덕아웃을 둘러보던 중 오노 유타카가 눈에 띄자 "음, 오노, 오노 나가라!"고 외침. 그런데 오노 유타카는 대표팀의 투수코치였다. 코치 보고 등판하라 외친 셈이다.
등판 지시를 받은 오노는 당연히 "감독님, 전 던질 수 없습니다."라 대답했는데, 이 대답을 들은 나가시마의 답변은 "에, 오노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거냐?" 간신히 정신줄을 잡고 있던 오노가 다시 "미스터, 저는 코치라서..."라고 대답하자 나가시마는 "코치는 못 던지는 거야?"라고 답변하며 오노를 더욱 황당하게 만들었다.

  • 요미우리의 에이스 마키하라 히로미가 1994년 5월 18일, 후쿠오카 돔에서[37] 열린 対 히로시마 도요 카프 전에서 퍼펙트 행진을 벌이자 선수들을 불러서 "마키하라가 부담감을 느끼지 않게 퍼펙트 얘기는 하지 말자."고 선언. 그런데 나가시마는 마키하라까지 불러서 그 얘기를 하고 있었다.[38]

  • 대학교에서 영어 시험을 보는데 "I live in Tokyo(나는 도쿄에 살고 있다.)"를 과거형으로 바꾸는 문제가 있었다. 나가시마가 쓴 답은 "I live in Edo. (나는 에도에 살고 있다.)" live의 과거형인 lived를 써야 하는데, 메이지 유신 이전 도쿄의 이름이던 에도를 쓴 것이다. 한국식으로 하자면 'I live in Seoul'을 'I live in Hanyang(Hanseong)'으로 쓴 셈이다.[39]

  • 1973년 골든 위크경기장에 아들 카즈시게를 데리고 갔는데, 집에 와 보니 아내가 "카즈시게는 어딨어요?"라고 물었다. 즉 아들을 데려온 것을 잊어먹고 경기장에 두고 왔다[40] 경기장으로 돌아가 보니 아들은 다행히 심판실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다는 후문이다.

  • 매일 가던 사우나를 아침 8시에 감. 참고로 그 사우나의 개점 시간은 오전 11시. 근데 일단 들어가긴 들어갔다.

  • 사우나에 가서 샤워를 한 뒤 거품 씻는 걸 잊고 그대로 욕탕에 들어갔다. 당연히 욕탕은 거품 범벅.

  • 일본인들 사이에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기행이라면 일명 나가시마 먹기로 불리우는 그의 묘한 식습관. 수박을 사서 자른 다음에 양 손에 수박을 들고서 끝부분만 한 입 먹고 버리는 엉뚱한 짓을 했었다고 한다.

  • 1기 감독 시절 원정 경기 참가를 위해 우에노역에 차를 타고 갔는데, 차 시동을 끄지도 않고 내려서 그대로 가버린 것도 모자라 집에 올 때도 차를 타지 않고 돌아오는 사고를 친 적이 있다. 집에 돌아오고 나서야 시동을 끄지도 않은 채 차를 두고 온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 발언 도중 뜬금없는 의성어, 외래어를 남발하는 걸로 소문났지만, 그 중 '하나(ひとつ, 히토츠)라는 단어를 수도 없이 남발한 걸로 유명해서 어떤 행사에 참석했을 당시 질문 시간 때 한 꼬마에게 "그거 말버릇이냐"며 일침을 당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나가시마는 "제 흉내를 내는 분이 계시네요. 그 분의 하나의(ひとつの)"라고 화답했고, 좌중이 웃음바다가 되었다는 후문이다.

  • 그러나 위에 적은 일화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드는 가장 압권인 일화가 존재하는데, 본인 이름을 나가시마 시게루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 외 다양한 일화는 이곳을 참조. 대체 이렇게 맹한 사람이 어떻게 감독으로서 우승까지 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생길 정도의 일화들이 많다. 이제 아흔을 바라보는데 치매 생기시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41]

음반 레코딩에 참여한 적이 있다. 1993년에 발매된 ZYYG, REV, ZARD&WANDS의 싱글 '果てしない夢を'에 게스트 보컬로 참여한 것. 후반부의 후렴구를 반 소절 정도 부른 게 전부지만 임팩트는 강렬하다. 싱글 앞표지 구석에도 조그맣게 사진이 실렸는데, 레코딩 중에 찍었는지 마이크 앞에서 헤드폰도 착실히 끼고 있다.

스포츠토토의 도입에 반대했다.


6. 가족 관계[편집]


파일:external/thumbnail.image.rakuten.co.jp/img58429446.jpg

자녀는 2남 1녀를 두었으며, 장남인 나가시마 카즈시게(長嶋一茂)도 야구선수로 활동했었다. 아버지를 따라 릿쿄대학을 졸업하고[42] 1987년 드래프트에서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1순위로 지명되었으나 나쁜 컨택과 불성실한 훈련 태도로 노무라 카츠야 감독에게 찍혀[43] 백업만 전전하다 1993년 아버지가 감독으로 다시 부임한 요미우리에 트레이드되었다. 그러나 요미우리에서도 센트럴리그 3만호 홈런을 친 것 외엔 활약이 미미했고 1996년 수비 코치였던 도이 쇼조에게 폭언을 하는 등[44] 아버지 이름에 먹칠만 하다가 결국 1996년 시즌 종료 후 아버지에게 직접 방출 통보를 받으면서 그대로 은퇴했다.

은퇴 후엔 야구 평론가 및 배우로 활동 중이다. 특이사항으로 2002년 3월에 개봉한, 한신 타이거스를 소재로 한 '미스터 루키(ミスター・ルーキー)'[45]란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출연한 적이 있었다. 또 다른 사건은 2012년 12월에 터졌는데(2014년 8월 말 주간문춘에 의해 공개), 카즈시게의 딸이 여배우 에스미 마키코(江角マキコ)의 딸과 불화가 있어 마키코가 매니저에게 지시해 휴가를 간 카즈시게의 집에 온통 낙서를 하게 한 일이 있다. 이 일은 이전에도[46] 구설수로 말이 많았던 마키코의 몰락에 결정타가 된다. 여담으로 유명 드라마인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 이노가시라 고로 역에 기용될 예정이었으나, 원작자 쿠스미 마사유키가 난색을 표해서 무산되었다고 한다.

카즈시게는 가톨릭 신자이다. 세례명은 파울로로, 2018년 예능 프로에 출연하면서 밝힌 사실이다.

MAGIC KAITO 11화에 출연해 홈런을 때려낸 일이 있다.

차남인 마사오키는 환경문제 연구가, 딸인 미나는 스포츠 캐스터를 맡고 있다.

자녀들간의 불화가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폐렴, 황달로 입원한 아버지를 두고, 장남인 카즈시게(55세)와 차녀 미나(53세)의 대립이다. 미나가 병실을 지킬 동안 카즈시게는 한 번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으며, 아버지의 건강 상태를 주변인으로부터 듣고 회복됐다고 판단하여 하와이로 출국했다고 한다. 남매의 대립이 표면화된 것은 2009년으로, 아버지의 기념품과 추억의 물건들을 카즈시게가 마음대로 매각한 것에 미나가 격노했고, 카즈시게가 대표를 맡고 있는 회사에서 '나가시마 시게오' 상표권을 가족 몰래 등록했던 것이 발각되었다. 남매의 관계는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으며, 이런 소동이 일어난 뒤 미나는 "내가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나가시마 집은 안된다"며 변호사를 선임했다고 한다. 카즈시게는 "원래 우리 집은 제각각입니다. 저는 중학교 때부터 집에서 살지 않았고 동생도 미국으로 갔습니다. 동생의 행방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동생(장녀)도 1년에 한 번 만날 뿐입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는 제각각이므로 원래의 가족과는 단절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했다.


7. 선수 성적[편집]


파일:NPB 로고.svg 나가시마 시게오의 역대 NPB 기록
연도
소속
경기
타석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득점
타점
도루
볼넷
삼진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WAR
1958
요미
우리

130
550
153
34
8
29
89
92
37
36
53
.305
.353
.578
.931
10.4
1959
124
526
150
32
6
27
88
82
21
70
40
.334
.426
.612
1.038
10.9
1960
126
524
151
22
12
16
71
64
31
70
28
.334
.422
.542
.964
8.8
1961
130
543
158
32
9
28
84
86
14
88
34
.353
.456
.652
1.108
11.8
1962
134
584
151
38
5
25
69
80
18
51
61
.288
.354
.522
.876
8.6
1963
134
577
163
28
6
37
99
112
16
86
30
.341
.437
.657
1.094
12.1
1964
133
566
144
19
6
31
81
90
13
96
34
.314
.433
.584
1.017
9.6
1965
131
560
151
23
5
17
70
80
2
50
42
.300
.363
.467
.830
6.1
1966
128
543
163
31
3
26
83
105
14
58
39
.344
.413
.586
.999
8.9
1967
122
515
134
25
3
19
65
77
3
37
37
.283
.334
.468
.802
4.7
1968
131
569
157
21
4
39
80
125
8
66
74
.318
.398
.613
1.011
8.2
1969
126
546
156
23
3
32
71
115
1
38
58
.311
.359
.556
.915
6.9
1970
127
525
128
22
2
22
56
105
1
40
52
.269
.320
.462
.782
3.2
1971
130
547
155
21
2
34
84
86
4
59
45
.320
.395
.581
.976
7.5
1972
125
520
119
17
0
27
64
92
3
63
34
.266
.352
.484
.836
3
1973
127
530
130
14
0
20
60
76
3
37
35
.269
.318
.422
.740
3.4
1974
128
476
108
16
1
15
56
55
2
24
33
.244
.288
.387
.675
0.5
NPB 통산
(17시즌)

2186
9201
2471
418
74
444
1270
1522
190
969
729
.305
.379
.540
.919
124.4


8. 감독 성적[편집]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승률
정규시즌
포스트시즌
1975
요미우리
130
47
76
7
.382
리그 6위
-
1976
130
76
45
9
.628
리그 1위
JS 패배
1977
130
80
46
4
.635
리그 1위
JS 패배
1978
130
69
49
16
.570
리그 2위
-
1979
130
58
62
10
.483
리그 5위
-
1980
130
61
60
9
.504
리그 3위
-
1993
131
64
66
1
.492
리그 3위
-
1994
130
70
60
0
.538
리그 1위
JS 우승
1995
131
72
58
1
.554
리그 3위
-
1996
130
77
53
0
.592
리그 1위
JS 패배
1997
135
63
72
0
.467
리그 4위
-
1998
135
73
62
0
.541
리그 3위
-
1999
135
75
60
0
.556
리그 2위
-
2000
135
78
57
0
.538
리그 1위
JS 우승
2001
140
75
63
2
.543
리그 2위
-
총계
1982
1034
889
59
.538
JS 2승3패­


9. 관련 문서[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