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야마 노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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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야마 노리오
永山則夫(ながやま のりお | Norio Nagay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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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나가야마 노리오 (永山則夫(ながやま のりお)
국적
[[일본|

일본
display: none; display: 일본"
행정구
]]

출생
1949년 6월 27일
일본 홋카이도 아바시리시 호인
사망
1997년 8월 1일 (향년 48세)
일본 도쿄도 카츠시카구 코스게 도쿄구치소
직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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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하코다테와 중학교 (졸업)
메이지대학 부속 나카노 고등학교 (중퇴)
활동 기간
1971년 ~ 1997년
묘소
없음[1]
부모
아버지
어머니
배우자
나가야마 와미 (1980년 결혼 - 1990년 이혼)[2]
장르
소설, 번역
데뷔작
무지의 눈물 (1971)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와 범죄
2.1.1. 나가야마 기준
2.2. 문학 작가로서
2.3. 사형 집행
3. 저작
3.1. 수필
3.2. 소설집
3.3. 소설



1. 개요[편집]


일본연쇄살인범소설가.

1968년부터 1969년까지 연쇄 피스톨 사살 사건[1]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옥중에서 독학으로 문학을 공부해 작가가 되어 여러 권의 수필과 소설을 냈다. 1997년에 교수형이 집행되어 세상을 떠났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와 범죄[편집]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949년 홋카이도 아바시리시[2]에서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도박에 빠진 아버지 때문에 집안이 망한 데다 5살 때인 1954년에는 어머니가 가출해 버리는 등 어렸을 때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6살 때인 1965년 도쿄로 이주해 일을 시작했지만 어떤 일도 오래 지속하진 못했다.

1968년 주일미군 막사에서 몰래 훔친 권총[3]으로 도쿄, 교토, 하코다테시 인근 나나에초, 나고야에서 4명을 쏴 죽였다.[4] 이 사건에 대해 1965년에 일어난 소년 소총마 사건의 영향을 받았다는 의견이 있다. 1969년 체포되었고[5] 1979년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981년 도쿄 고등재판소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지만 1983년 최고재판소는 양형이 부당하다는 이유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도쿄 고등재판소로 환송[6]했고 파기환송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90년 최고재판소에서 사형이 확정되었다.
파일:external/userdisk.webry.biglobe.ne.jp/124987440955916319952_crm0804070314003-p1.jpg
체포 당시의 나가야마 노리오


2.1.1. 나가야마 기준[편집]


이때 일본 최고재판소가 그 유명한 나가야마 기준(永山基準)을 발표했다. 범죄의 성질, 동기 등 9가지 항목을 기준삼아 형량을 판별하는데 이 9가지 항목은 다음과 같다.

  1. 범죄의 성질
  2. 범행의 동기
  3. 범행의 형태, 특히 살해 방법의 집요성, 잔학성
  4. 결과의 중대성, 특히 살해된 피해자의 수
  5. 유족의 피해감정
  6. 사회적 영향
  7. 범인의 연령
  8. 전과
  9. 범행 후의 정상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바로 피해자의 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4명 ~ 대량 살해: 사형 선고 확정.[7]
  • 2명 ~ 3명 살해: 명백한 정상참작 사유가 없으면 사형 선고 확정.[8]
  • 1명 살해: 사형을 반드시 선고해야 할 정도로 지나치게 명백한 가중사유가 없는 한 종신형 혹은 10년 이상의 징역형.

제정된 이후로 기준이 변경이나 수정된 적은 없다. 김전일 시리즈 등의 일본 추리 작품에서 4명 이상 살해한 범인이 대부분 비극적으로 자살하는 클리셰가 생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참고: 사형/국가별 현황/일본

2.2. 문학 작가로서[편집]


이때까지의 모습은 단순한 연쇄살인마에 불과했지만 교도소에서 복역하면서 제2의 인생을 살게 되었는데 독학으로 작가가 된 것이다. 1971년 수필집 '무지의 눈물'과 '인민을 잊은 카나리아'를 발표했다. 그리고 인세는 모두 피해자 유가족에게 전달했다. 1983년 소설 '나무다리'로 19회 신일본문학상을 수상했다. 1990년 작가 아키야마 슌, 가가 오토히코의 추천을 받아 일본 문예가 협회에 입회를 신청했지만 협회 측에선 연쇄살인마였던 사람을 받아들일 순 없는지라 거부했다. 이에 항의해서 나카가미 겐지,[9] 가라타니 고진, 츠츠이 야스타카 등이 협회를 탈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특이하게도 감옥에 있는 동안 서신을 주고받았던 여자와 옥중 결혼을 하였다.

1975년 아다치 마사오가 《약칭 연속살인범》이라는 제목으로 나가야마랑 인터뷰해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공개했다. 촬영 자체는 1969년에 했으나 공개가 늦어졌다고.

사형 집행 1년 전인 1996년독일 자를란트 주 작가동맹이 그의 가입을 승인했다.


2.3. 사형 집행[편집]


1997년 8월 1일, 48세의 나이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사형을 놓고 '사카키바라 사건의 범인이 미성년자로 범죄에 비해 낮은 형량을 받게 되자 많은 비판이 일게 되었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나가야마를 사형 집행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또한 최고재판소에서 제시한 '같은 환경에서 자란 다른 형제들은 잘 자라 적절한 성인이 되었으므로 그의 환경적 특수성을 감안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도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살인을 저지르는 지경까지 간 사람은 나가야마 노리오 한 명뿐이라지만 실제 그의 형제들의 삶은 여러모로 적절한 성인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며 상당히 불우하고 비참했다. 당시 그의 큰 형은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다 결국 사기죄구속되어 복역 중이었고 둘째 형은 일용직을 전전하는 불안정한 삶을 살다 완전히 행방불명되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으며 막내 여동생은 정신질환자로서 생을 마감했다.

사형 집행 당일, 나가야마 노리오의 작품의 팬들이 사형 집행을 막으려 했으나 결국 집행되었다. 노리오는 평소 접견을 온 자신의 지인들에게 사형이 집행된다면 격렬히 저항할 것이라고 밝혔다고 했는데 교도관 등 입회자 여럿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그 말대로 맞은 편 동에서도 들릴 정도로 크게 절규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처절하게 저항했다고 한다. 유해는 구치소에서 곧바로 화장되었는데 인수자가 있을 경우 시신을 보여주고 외부 장례식장에서 시신을 염하여 장례를 먼저 하는 것이 일반적임에도 절차를 무시하고 구치소 내에서 곧바로 화장 처리한 것은 혹시 노리오의 난동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폭행이 동반돼 골절상 등 공개할 수 없는 불미스러운 상처가 남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다. 이후 그의 유골을 인수한 국선변호사의 주재로 장례가 치러졌고 전 아내가 그의 고향 홋카이도에 접한 오호츠크 해 앞바다에 흩뿌렸다.

사후 변호사들에 의해 나가야마 어린이 기금이 창설되었고, 그의 작품으로 거둔 인세는 일본이나 다른 나라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 쓰이고 있다.

3. 저작[편집]



3.1. 수필[편집]


  • 《무지의 눈물》(無知の涙, 1971년)
  • 《인민을 잊은 카나리아들》(人民をわすれたカナリアたち, 1971년)
  • 《사랑인가―무인가》(愛か-無か, 1973년)
  • 《동요기1》(動揺記1, 1973년)
  • 《반―데라야마 슈지 론》(反-寺山修司論, 1977년)


3.2. 소설집[편집]


  • 《나무다리》(木橋, 1984년) - 제19회 신일본문학상 수상작
  • 《버려진 아이 놀이》(捨て子ごっこ, 1987년)
  • 《어째서, 바다》(なぜか、海, 1989년)
  • 《이수》(異水, 1990년)


3.3. 소설[편집]


  • 《소련의 방랑예술인》(ソオ連の旅芸人, 1986년)
  • 《사형의 눈물》(死刑の涙, 1988년)
  • 《꽃》(華,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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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지만 범행에 사용된 권총은 리볼버였다.[2] 오호츠크 해 근처의 소도시로 얄궂게도 일본에서 악명 높은 아바시리 형무소가 이곳에 있다.[3] 룀(Röhm) 사의 RG10이라는 22구경 소형 리볼버로 당시 미국에서 13달러 쯤, 현재 물가로도 100달러도 안 하는 조잡한 싸구려 권총이다. 미국 현지에서는 흔히 새러데이 나잇 스페셜로 지칭되는 종류인데, 아마 어느 군인이 사적으로 가지고 다녔던 모양.[4]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대도시들에서 범행을 저질러 수사에 혼선을 주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런데 도쿄도와 나고야는 일본 3대 도시이며 교토 역시 옛 수도 겸 주요 대도시지만 하코다테는 다소 의외의 지역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하코다테는 홋카이도에서 처음으로 형성된 근대 도시였으며, 미일수호통상조약에 따른 초기 개항지 중 하나가 되었을 정도로 한때 번영하던 곳이었다. 20세기 초반까지는 홋카이도의 제1도시였으며, 이후에도 제2차 세계 대전 시기까지는 삿포로시아사히카와시와 대등했다. 그러나 위 두 곳이 지리적, 군사적 중요성 및 자원 획득 등의 이유로 집중 개발이 이루어지며 급격하게 격차가 벌어져 제3도시까지 밀려났고 현재는 일본에서 가장 빠르게 인구감소가 진행되는 중핵시가 되었다. 어쨌든 이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는 아직 세이칸 터널이 착공하기도 전이었다. 때문에 삿포로의 도시 규모가 더 큼에도 불구하고 아직 혼슈에서 접근하기에는 어려운 곳이었으며 하코다테 역시 키타도호쿠 지역에서는 아오모리와 함께 중심도시였다.[5] 이 때의 나이는 19세 10개월로 범행을 저질렀을 때는 미성년자였다.[6] 여담으로 대한민국이었다면 나가야마 노리오는 사형을 면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대법원은 검사가 양형부당만을 이유로 상고할 수 없도록 하고 있기 때문(62도32판례 이후 일관된 입장)이다.[7] 특히 대량살인은 사형을 피할 수 없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조건 사형은 아니고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동기나 정신적 문제가 있다면 사형을 선고하지는 않는다고 한다.[8] 특히 묻지마 살인 유형이면 100% 사형 선고를 받는다.[9] 부라쿠민 출신으로 알려진 소설가. 한국에도 1978년에 방문해서 판소리나 가면극 등을 취재하기도 했고 서울을 무대로 하는 소설 『이야기 서울』(物語ソウル)이나 에세이 『춤추는 서울』(輪舞する、ソウル)을 쓰기도 했다. 김지하윤흥길과도 교류했고, 1985년 신쇼샤에서 『한국현대단편소설』을 편찬하는 등 한국 문학을 일본에 소개했다. 1992년에 향년 46세로 사망했다. 그의 소설은 한국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는데 1981년에 《이야기 서울》이 《서울 타령》이라는 이름으로 한 번 번역된 적이 있고 1993년에 봉선화가 한겨레출판사에서, 2001년에 고목탄(枯木灘)이 문학동네에서 번역 출판된 것이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