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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羅貫中
나관중 | Luó Guànzhōng


파일:attachment/나관중/luo13.jpg
중국 산시성에 세워져 있는 나관중의 동상.

성씨
나 (羅)
이름
본 (本)

관중 (貫中)

호해산인 (湖海散人)
생몰연도
1330년? ~ 1400년
직업
소설가

1. 개요
2. 이름
3. 생애
3.1. 출생에 관해
3.2. 행적
3.3. 소설가로서
4. 논란
4.1. 관점
4.2. 전투 규모가 과장되었다?
5. 기타
6. 같이보기



1. 개요[편집]


원나라 말기, 명나라 초기의 인물.

중국 고전소설의 걸작 삼국지연의의 작가다. 그의 작품은 중국 문학의 한 획을 그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동아시아 최고의 베스트셀러다. 또한 《수호전》의 편저에도 관여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에 따르면 중국사대기서 넷 중 둘과 관련된 셈이다.


2. 이름[편집]


명(名)은 본이고, 자(字)는 관중이다. 명(名)이 한국에서 주로 이름으로 번역되고 자(字)는 그냥 자로 번역되는데, 자(字) 역시 이름이다. 좀 더 정확히는 명(名)으로 부르면 반말 내지는 하대에 가깝고, 자(字)로 부르면 존칭 내지는 예의바른 호칭이다.[1]

자(字) 역시 이름이므로 중국사에 자(字)로 더 알려진 경우도 흔하다. 관중, 오자서, 항우, 소정방, 왕소군, 장제스(장개석) 등등. 현대에는 골치아프니까 名이건 字건 그냥 더 알려진 명칭을 쓰는 것이 보편적이며 이는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3. 생애[편집]



3.1. 출생에 관해[편집]


나관중의 출생지에 대해 흔히 조운이 태어난 상산이나 관우가 태어난 하동 등으로 추정하지만[2] 소설 삼국지통속연의에 보이는 북방지리에 대한 재현 오류[3][4]로 미루어 볼 때 남쪽 지역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있었다. 일설에는 동부에 있는 장시성 여릉 출신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2010년대에 한국에서 나관중의 고향을 찾아봤는데 산시 성 타이위안시 진중 치(祈)현에 있는 마을인 허완(河灣)촌에 나씨종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전까지는 타이위안(태원, 太原) 치현에서 50km 떨어진 칭쉬(淸徐)현이 고향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어쨌든 본토에서 이렇게 추정하고 있는 것이나 전해지는 일화들을 봐선 북방출신, 그중에서도 산시성 타이위안 출신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3.2. 행적[편집]


친구이자 머나먼 친척인 주서(周敍)[5]와 같이 과거 시험을 치렀는데, 주서만 합격하고 나관중은 떨어졌다. 이에 다시 과거 시험을 치렀지만 또 다시 떨어졌고, 이후에도 계속 과거 시험을 치렀지만 끝내 합격하지 못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산서성 태원 일대에서 가문의 생업인 소금장사를 했으나, 천성이 게을러서 그랬던 건지 장사도 제대로 하지 못해 결국 흐지부지되었다.[6] 그러다 보니 자신이 살던 곳의 근처 찻집에 드나들며 하루하루 놀고먹으면서 가문의 재산을 까먹고 살았다.

당시 그 찻집에서는 삼국지를 바탕으로 한 삼국희곡(三國戱曲)을 매일같이 공연해 나관중은 이 삼국희곡을 즐겨 들었는데, 어찌나 많이 들었는지 달달 외우는 수준까지 도달해 이를 토대로 삼국지연의를 집필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가문에서 쫓겨나 족보에도 나관중의 이름이 지워져 둘째 아들을 외지로 보냈다는 기록만 남았다고 하며, 이에 연구자들은 정부에 항거한 이들이 많이 나오는 작품인 수호전을 지은 것 때문으로 추측하고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말년에는 은거하면서 지냈다고 한다.

그의 생존 시기는 원나라 말기~명나라 초기 시대이며, 사망한 년도는 확실히 1400년이다. 다만 탄생년도만 불분명할 뿐이다. 삼국지연의 이외에도 여러 작품의 저자로 추측되고 있지만, 과거에 탈락하고 한량처럼 살았다는 점 이외에는 밝혀진 바가 많지 않아서 확실한 것은 거의 없다. 천성이 게으르고 과거 공부를 못해서, 즉 개인의 문제로 관직에 탈락했을 뿐이지[7] 원나라 때문은 아니거니와, 애초에 하등 상관도 없다. 명나라가 1368년에 건국됐는데, 그로부터 32년씩이나 지나서야 나관중이 죽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천성이 게으르고 과거 시험에 합격할 만한 실력이 없었기에 오히려 천수를 누렸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당시 명나라 조정에선 홍무제가 하루가 멀다하고 자신의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신하들을 수천에서 수만 명 단위로 죽여댔고, 심지어 재야의 재능있는 선비들도 과거에 응시하지 않으면 충성하지 않는다는 구실로 끌려가서 처벌을 받는 살벌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과거에 합격했다던 주서가 행복할 수 있었을까?

나관중은 오히려 과거 공부에 소질이 없었기 때문에 재야에서 문자 그대로 소설 창작에 열과 성의를 쏟아붓다시피 했고, 홍무제가 죽은 뒤에도 2년 동안이나 더 살 수 있었다. 과거 시험에서 여러 번 낙방하여 실력이 없다는 것도 공식적으로 검증되었을 것이므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는다고 처벌받지도 않았을테고 말이다. 어찌보면 거듭된 낙방이 오히려 복이 된 셈.

또 그는 과거 공부나 생업에는 게으르고 재능이 없었어도, 역사와 각종 재담과 민담에 관심이 많고 패관문학에도 재능이 있어서 그것을 통해 현대에도 널리 알려진 문학작품인 삼국지연의수호전 등을 남길 수 있었다. 유명세를 따지면 당대의 벼슬하던 다른 선비, 아니 들보다 더 많이 이름을 알렸으며, 영향력도 아득히 뛰어넘었다.

이렇듯 당대에는 전혀 유명하지 않은 인물이었지만 그의 작품은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고전이 되어 나관중이라는 이름은 역사에 남게 되었다. 서양에서 흔히 삼국지연의를 소개할 때 동아시아에서 셰익스피어와 같은 영향력을 끼친 소설이라고 소개한다. #

또는 일리아스를 쓴 호메로스로 비유되기도 한다.# 오히려 당대부터 속된 패관의 문장을 정리해 적절한 문장으로 교정했다는 명성도 얻었으니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더 대단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3.3. 소설가로서[편집]


당연하지만 소설가로서의 능력은 출중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민담이나 사서에 나오지 않는 나관중의 창작들이 곳곳에 들어가있는데, 굉장히 흥미진진한 부분들이 많다.

예로 황충의 경우 정사에서는 그냥 용맹한 장수였다는 정도만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 더해 정사 촉서 비시전에서 관우가 "대장부는 평생 노병(老兵)과 같은 대열에 있지 않는다!"라고 일갈하며 황충을 평가절하한 일화도 있으므로, 그 공적에 대해 낮게 평가할 소지도 없지 않다.

그러나 나관중은 이런 인물에 명궁이라는 캐릭터성을 부여한 데다가, 문맥상 '쓸모 없는 병사'를 의미하는 '노병'을 '노익장'으로 버프하여 늙어서야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난 노장이라는 캐릭터를 부여하고, 정사상 위 발언자인 관우와 맞붙게 하는 방법으로 강렬한 캐릭터로 재탄생시켰다.

그와 같은 재창조에 가까운 캐릭터 설정은 대중의 큰 호응을 얻어 현대에도 중국에서 황충은 노익장을 비유하는 대표적인 표현으로 쓰이고, 유선의 아명인 아두는 바보를 의미하는 말로 널리 쓰이고 있다.

조조의 캐릭터 구축은 그의 소설가로서의 재능이 가장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강약을 조절하면서 간교하고 잔인하면서도 때때론 영웅다운 카리스마를 보이는 복잡하면서도 매력적인 인물로 만들어낸 그의 솜씨는 후대의 창작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예를 들면 동탁 암살에 직접 나섰다는 창작을 넣어 정의로운 면모를 부각했다가, 직후에 여백사 일족의 몰살 장면을 곧바로 배치하여 조조의 캐릭터성을 하나로 보기 어려운 굉장히 입체적인 악역으로 구성했다. 또한 갈증으로 허덕이는 병사들에게 매실밭이 근처에 있다는 정보를 흘려 행군을 수월하게 한 일화(망매해갈)와, 군량이 부족해질 때 군량 총담당관이 무고함을 알면서도 횡령범으로 몰아 처형함으로써 병사의 사기를 높이는 데 쓰는 등 심리전에 탁월한 위인임을 표현할 때에도 긍정적/부정적인 기사를 두루 활용하는 치밀함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서주 대학살이나 관도대전 후의 포로 생매장 등 비이성적인 잔인한 학살에 관한 부분은 삭제하거나 대폭 축소하여 악역으로서의 카리스마를 떨어뜨리지 않음과 동시에, 동승 일당의 모의 실패에 대해서는 일족을 멸하고 관련자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모습만큼은 가감없이 보여줌으로써, 한황실 부흥의 기치를 내세우는 유비와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상극이자 일생에 걸친 호적수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위의 여백사 장면에서는 진궁을 등장시켜 각자의 신념을 충돌시키고, 사수관 전투에서는 관우에게 직접 술을 따라주는 장면을 삽입한 부분은 각 인물의 핵심적인 캐릭터성을 강하게 충돌시키는 지점으로, 이후에 일어나는 사건의 당위성과 설득력을 강하게 부여하고, 그 자체로 이후 사건의 복선을 만들어낸다.


4. 논란[편집]



4.1. 관점[편집]


삼국지연의를 지은 것 때문에 한동안 촉빠라서 위나라조조를 깠다느니, 역사왜곡을 했다느니 하는 비판을 받았다. 최훈도 그를 '저도의 유비빠'라고 평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관중이 촉빠라는 비판은 정말이지 얼토당토않고, 오히려 나관중이야말로 조조에 대한 재평가를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이다.

일단 삼국지연의 집필 이전부터 중국 민중은 촉한에 대해 옹호적이었고, 조조위나라는 원래 평판이 나빴기 때문에 삼국지연의도 선역의 유비, 악역의 조조라는 구도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러나 연의에서 나관중은 최초로 위와 촉의 서사적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으며, 그 결과 조조는 드디어 단순한 악당에서 벗어나 팬이 생길 건덕지가 있는 인물이 된다. 한때 유행하던 조조 재평가론도 나관중이 조조를 입체적 매력을 가진 명품 빌런으로 묘사해주지 않았으면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연의에서 조조를 많이 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오히려 나관중은 역사서에 없는 내용을 조조에게 붙여준 것이 엄청나게 많다. 특히, 동탁을 암살하려 칠성검도를 꺼냈다 튄 이야기는 정말로 나관중이 난데없이 창작해 낸 이야기이다. 원래 역사상으로 동탁에 대응하며 떠오른 이는 원소인데, 나관중이 이 시기의 원소 간지를 전부 조조에게 넘겨서 원소를 노답으로 만들면서까지 조조를 띄워줬다.

거기에대가 "내가 천하를 배반할지언정 천하가 나를 배반하게 할 수는 없다" 같은 희대의 명대사까지 손수 붙여준다. 물론, 정사에도 비슷한 의미의 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사실 그건 "내가 남을 해쳤으면 해쳤지, 먼저 남에게 당하지는 않겠다."는 투의 피해망상 범죄자 냄새가 나는 졸렬한 발언이었다. 나관중은 이 말의 스케일을 키움으로서 조조를 감히 천하까지 노리는 최종보스로 만든 것이다.

반면에 조조의 대표적인 악행으로 꼽히는 관도대전 이후 원소군 포로 생매장은 통으로 삭제했으며 거꾸로 오히려 원소와 내통한 조정 신료들을 용서해주는 일화를 소개하면서 천사의 편집을 해준다. 그 밖의 조조의 악행도 통삭제시키거나, 스케일을 줄이거나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식으로 천사의 편집은 계속된다. (다만 서주 대학살만큼은 백성을 살육했다고 언급한다.)

여기에 관우를 흠모하는 조조의 우정 묘사도 나관중이 처음으로 시도한 것으로, 그 이전의 작품인 삼국지평화에선 조조는 관우가 자신을 떠나려하자 분노해서 계략으로 그를 잡으려 하고, 화용도에선 관우의 고뇌같은거 없이 그냥 갑자기 자욱하게 안개가 끼여서 조조가 도망가는 식이라, 아무런 케미가 없다. 즉 그냥 잔인한 악당이었던 조조에게 인재를 아끼는 통이 큰 면모를 부여한 것도 나관중이다.

여기까지 읽어 보면 알겠지만 당시 조조에 대한 인식에 비해서 조조를 말도 안되게 띄워준 셈이다. 이러한 관점을 민간설화에서 차용한 것으로도 볼 수 없는 것이, 삼국지연의의 전신인 삼국지평화에서도 조조는 그저 동탁 mk-2 정도의 수준에 불과하다. 나관중은 당시 섭렵 가능한 거의 모든 민간설화나 여러 역사 책에 흩어져서 묘사된 내용을 전부 그러모아서 연의를 저술한, 당시의 삼국지 최고 전문가이기에 이러한 서술 경향은 어디서 베껴온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관중의 철저한 의도 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촉 진영 역시 관우를 속이는 유비라거나, 장판파에서 장비를 20여 기만 따라온 이유가 장비에게 맞아죽기 싫어서라고 표현하는 등 시각에 따라서는 오히려 나관중을 촉까 위빠로 볼 수도 있다. 분명 촉 장수들의 활약을 늘려 준 부분도 있지만, 원래 엄청난 영웅이었던 유비는 전공이 전부 삭제되거나, 남의 전공으로 둔갑당했고 한술 더 떠서 유비를 상당히 위선적이고 무능한 사람으로 보이도록 묘사하고 있다. (이는 노신도 지적한 사실.)[8] 제갈량 역시 처음 느껴지는 포스는 소설 쪽이 더 강할지 몰라도 소설 속의 제갈량은 하나하나 따져보면 의외로 역사 속의 제갈량보다 허접하며[9], 유비 못지 않게 위선자에다가 권신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렇게 촉의 비판적인 서술도 골고루 균형있게 수록해서 입체감을 살린 것은 나관중이 처음이다.

이와 더불어 나관중 이전에 쓰여진 삼국지평화에선 아예 역사왜곡을 해가며 억지 해피엔딩/촉한 승리 엔딩을 만든 데 비해[10] 나관중은 촉한이 멸망하고 결국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한 것으로 끝낸다. 이후 후삼국지 같은 물건들에 비하면 나관중은 최대한 역사적 사실이 허용하는 내에서 책을 저술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도 삼국지연의와 정사 삼국지를 구별 못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만큼 나관중이 역사적 사실에 어느정도 치중하며 저술했다고 볼 수 있다.

단 연의의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제갈량, 조운, 관우를 매우 존경한 것은 사실이다. 특히 관우의 경우에는 나관중 본인은 관우가 죽는 장면조차도 묘사하지 않을 정도로 존경했던 것 같다. 명나라대의 나관중본에서 관우는 죽지 않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하늘의 부름을 받아 신이 되어 승천한다. 청나라 시대에 모종강본이 나오면서 관우가 죽는 장면이 추가 된다.[11][12] 단 당시 민간에서 인기가 있었던 장비는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나관중이 촉빠라는 후대의 인식과는 달리 삼국지연의 출간 이후엔 나관중본 연의의 촉까 경향이 중국 대중들에게 거북함을 주어, 시장에서 그러한 서술이 소폭 완화된 모종강본으로 판본이 대체되는 결과가 나타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영웅논담 때도 나관중본에서는 유비가 번개를 무서워하며 치졸한 변명을 하고 조조는 이를 보고 한심해 하는 데에 비해, 모종강본은 유비가 "번개가 치면 군자도 두려워했다 합니다."라고 멋들어진 변명을 하면서 조조를 감화시키는 등 유비에 대한 분칠이 더 심하다. 심지어 모종강본에서는 조조가 관우를 시험하기 위해 유비의 부인들과 함께 지내게 했더니 관우가 밖에 서서 밤을 지내는 장면까지 추가되었고 제갈첨등애에게 항복할까 고민하는 장면도 삭제되었다.

즉, 굳이 따지자면 나관중은 "영웅쟁패" 위주로 썼고, 모종강은 진정한 "숭유반조"(=촉빠위까)의 입장을 견지했다. (단, 모종강본이 나관중본의 관점을 전부 부정한 건 아니다.) 삼국지가 울고있네에 따르면 일본에서 "조조가 삼국 제일 영웅"이라고 하자, 중국 측에선 비웃은 게 일본은 나관중본이 알려지고 중국은 모종강본이 대중적이어서라는 썰도 있다.

한마디로 촉빠위까는 모종강모성산인데 엄한 나관중만 덤터기를 뒤집어 쓰는 것이다.[13] 국가를 가리지 않고 오늘날 대중들이 알고 있는 삼국지연의는 대게 모종강본의 내용을 기초로 하지만, 저자에는 나관중이라고 쓰여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나관중이 촉빠였다는 오해를 산다.

오나라에 대해서 말하자면, 여기손책의 일화를 보고 확인해보자. 추가로, 손책이 진등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갔다가 몇 천의 군대에게 발린 적이 2번 있는데 이것도 없앴다. 다만, 이것은 진수도 기록하지 않았으며, 확실하지도 않다. 하지만, 나관중이 엄청난 양의 민간설화나 야사들을 참조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관중이 의도적으로 삭제했을 수도 있다.

손권의 경우는 간발의 차이로 이득을 본 편인데, 나관중은 연의에서 손권의 아량과 군주로서 도량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많이 추가하여 수성의 군주 이미지를 분명하게 했다. 합비에서의 추태는 실제에 비해 스케일이 작아진 데다가, 그것마저 손권에 대한 손오 무장들의 충성심이 주로 묘사되었고 손권의 대표적인 치부인 이궁지쟁[14]이나 여일 등용도 묘사하지 않아서 이미지 하락을 막아주었다.

다만, 손권의 아버지 손견의 경우 손해를 본 유명한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화웅을 벤 것이다. 연의에서는 손견군이 벤 화웅을 관우가 베었다고 묘사했지만, 실제 역사에서 관우와 화웅은 평생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사실 화웅은 원래 유명한 무장도 아니고 연의에서 관우가 죽였기 때문에 유명해진 무장이어서 이 공을 넘겨 준 걸 가지고 크게 손해 보았다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또 정사에서 동탁 진영은 손견을 원소, 원술, 유표와 함께 위협적인 인물로 평가했는데 연의에서는 용맹있는 장수로서만 조명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다만, 정사에서 원술의 객장이었던 손견을 당당히 독립세력으로 묘사했기에 오히려 이득이라고 할 수 있다.

주유의 경우, 주유 최대의 공인 적벽대전도 제갈량의 동남풍으로 승리한것으로 묘사되었으며[15] 조인과의 치열한 싸움인 남군에서의 공방전도 제갈량의 계략으로 성을 탈취당해서 피를 토하는 장면으로 각색되었다.

특히 적벽대전 당시 유비군과는 비교가 안 될 큰 세력인 오나라의 2인자인 주유가 제갈량을 시기질투할 이유도 없고 "기생유 하생량"[16]이라고 한탄할 이유가 전혀 없다.

또한 개인의 선호 문제는 어쩔 수 없는 것인지 관우를 죽이거나 그를 적대하여 상대적 전적이 좋은 장수들은 말로가 좋지 않다(...)는 공통점이 있다. 관우를 죽인 마충은 미방에게 잠중에 목이 잘리거나, 강릉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주유, 육항처럼 대도독의 자리에까지 올라간 주연이 조운에게 죽어 일찍이 퇴장하는 등 푸대접하는 인물들이 있다. 후술할 서황도 아래에 나오듯이 정말 허망한 죽음을 맞았으며, 조인도 정사에 비해 꽤나 너프되었으며, 마충 그리고 주연을 제외하고도 꽤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오나라 장수들이 많다. 방덕 정도를 제외하고는 관우와 싸워서 이득을 본게 없다.[17]

이처럼 나관중은 삼국의 비중을 대략 균등하게 맞춰 주면서 소설의 재미와 깊이를 최대한 살렸다. 물론 그래도 오의 비중이 위와 촉에 비하면 살짝 낮긴 하지만 삼국시대 내내 위나라와 촉나라의 대립이 짙었음을 감안하면 어쩔 수 없긴 하다. 애초에 또 역사적으로도 조비의 칭제, 유비의 칭제에 비해 손권의 칭제는 다소 평가가 낮은 감도 있고...

애당초 편향된 서술이라는 지적들은 삼국지연의는 한 개인에 의해 창작된 것이 아니라 남송시대까지 전해오던 삼국시대에 관한 모든 역사, 전설, 민담, 신화들이 집약된 거대한 전집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주장들이다.


4.2. 전투 규모가 과장되었다?[편집]


관도대전, 적벽대전, 이릉대전를 비롯해 여러 전투의 규모를 실제보다 몇 배나 더 부풀렸다고 비난하는 경우가 있는데, 연의는 역사서가 아니라 엄연한 소설이며, 나관중 자신이 "삼국 연의" 라는 명칭을 직접 붙였다. 소설의 재미를 위해서 과장이 들어가는 것은 현대나 옛날이나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전근대에서 정사, 소설을 막론하고 단위가 과장되는 것은 상당히 많았다.[18] 이것은 통설처럼 중국인이 허풍이 많아서가 아니라, 당시 통계의 개념이 없었던 때인데다가, 비교적 정확한 계산을 할 수 있던 주판이 중국에 도입되거나 발명된 시기가 송원대이고, 그 이전의 산법에서는 100이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그냥 많다는 개념으로 만, 십만, 백만이라는 수를 별 구분 없이 쓰곤 했다. 그러니 호왈이 당연시되던 시기였다. 그 외에도 아군의 병력을 부풀리는 건 적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준다는 목적도 있다.[19]

더욱이 중국 총 인구가 5천만 남짓이던 후한 말과 달리 나관중이 살았던 원말명초에는 이미 중국 인구가 1억에 달해서 수십만 대군은 기본이고 정말 백만대군이 동원되거나 호왈로는 800만 대군을 일으키는 경우도 간혹 볼 수 있었으므로 이정도 과장을 곁들이지 않았으면 당대 독자들에게 대전투의 감흥을 전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5. 기타[편집]


  • 아무래도 장수는 전사해야 멋지다고 생각했는지 작중 죽음이 바뀐 장수가 몇 있다. 서황이 가장 잘 알려진 예이고, 태사자도 그렇게 묘사되었으며[20] 장억의 경우도 연의에서의 죽음이 더 비장하다. 단 서황은 맹달 따위에게 허망한 죽음을 맞기도 했기에 비장하게 죽었다고 볼 수도 없다.[21][22]
가장 대표적인 건 학소. 병에 걸려 다 죽어가면서도 병사를 지휘하며 제갈량의 군대를 막다가 사망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비장함 그 자체. 덕분에 삼국지 게임 내에서 능력치가 상승했다.
  • 평요전수호전의 저자로도 추정된다. 엄밀하게 말하면 수호전의 일반적 저자로 취급받는 것은 나관중의 스승설도 있는 시내암인데, 양산박 108명이 모으는 장면(약 70회본)까지만 시내암의 창작이고 이후 방랍 토벌전이나 요나라와의 전쟁은 나관중의 창작이지 않을까 하는 청나라 시대의 문예비평가인 김성탄의 의심이 있었다.[23] 그런데 시내암 자체를 가상인물 취급하는 입장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전체가 나관중의 창작이라고 본 설도 있다. 다만 이 가능성은 낮은 게, 수호전에서 노지심이 선장을 만들 때 관우의 청룡언월도가 81근이라는 언급이 있기 때문이다. 아시다시피 삼국지연의에서 청룡언월도의 무게는 82근으로 나오므로 같은 작가의 작품일 경우 왜 설정이 다르게 나오는지 설명하기 어렵게 된다.
  • 정사에 없는 에피소드는 흔히 나관중의 창작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대부분은 삼국지평화, 화관색전, 조만전 같은 별로 안 유명한 출전이나 민담들에서 먼저 나온 내용들이 많다. 또한, 배송지주에서 슬며시 언급된 이야기에 살을 붙여 넣거나 한 경우도 많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정말 인지도가 없는 민담이나 책까지 일일이 찾아내서 써먹은 걸 보면 나관중의 삼국지에 대한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봐야 한다.
  • 인천 지하철의 화장실에 있는 액자에 "사고팔았던 사이는 거래가 끝나면 모든 것이 끝나지만. 주고받았던 사이는 그 주고받음이 끝나도 이어지는 그 무엇이 있다."가 나관중이 쓴 말로 나오는데, 나관중판이 아니라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 조조가 유비와 자신의 차이를 고찰하며 독백하는 부분이다.
  • 코에이에서 만든 게임 징기스칸 4의 시나리오 4(1370년)에서 중국 대륙의 재야 장수로 나온다. 유명인임에도 천성이 게으르고 과거를 볼 실력이 없는(......) 나관중의 실정을 반영했는지 정치51/전투26/지모68 이라는 능력치를 주었지만 사실 이정도 능력치면 웬만한 과거합격자들 뺨치는 능력치라는게 함정. 특기가 문화 하나인 수수한 능력치로 등용하면 그냥 대상 무역을 돌려서 도시 문화를 올리는 정도로만 쓸 만하다.
  • 한국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 나관중 소령(신영균 扮)도 이 사람에게서 딴 것이다. 물론 나관중 소령은 정말 성이 '나', 이름이 '관중'인데 이 사람은 성이 '나', 이름이 '본'이고 자가 '관중'이니 정확히 말하면 이 사람의 성과 자를 딴 것이다.
  • 임용한은 나관중을 두고 "촉빠도 위빠도 아닌 관중빠"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정사를 다루는 영상에서 연의에서의 차이점을 얘기할때는 종종 나관중이 독자들이 읽고 싶은 것이 낭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각색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아예 나관중을 각색의 천재(5분 10초대)라고 극찬할 정도로 높게 평가한다.
  • 정사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와 달리 명나라 때 사람이라 삼국지 관련 게임에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레이터 역할로 간혹 등장하는 정도. 하지만 모에화의 마수는 피할 수 없었다#[24]


6. 같이보기[편집]



[1] 예를 들어 정사 삼국지 제갈량전을 보면 유비는 제갈량을 자(字)인 공명으로 부르는데 이는 제갈량이 유비의 부하였음에도 유비가 제갈량을 공경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에 정사 삼국지 마속전을 보면 유비가 그냥 명(名)인 마속으로 부르는데 이는 유비가 마속을 하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2] 이것은 관우나 조운에 활약에 대해 '같은 고향 출신이라서 띄워준 게 아닌가?' 하는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지연의에 내용에 대한 민담 외에도 삼국지연의 창작에 대한 민담도 많은데 이런 의문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3] 대표적으로 화웅여포가 있던 호뢰관과 사수관은 실제로는 같은 관문의 다른 이름이며(후한대에는 사수관으로 불렸다) 소설에 나오는 관우의 천리행 행로는 그대로 가면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가게 된다. 다만 이와 같은 오류들은 어쩌면 무지의 결과가 아니라 의도된 각색일 수도 있다. 가령 호로관과 사수관은 중간보스 화웅과 스테이지 보스 여포를 순차적으로 등장시키기 위한 설정일 수도 있는 것이다.[4] 그러나 당시 낙양은 여덟 개의 관문으로 보호 받던 지역으로(여담으로 사수관은 여기에 속하지 않았다) 낙양 동쪽에서 낙양으로 진군할 경우 사수관의 서쪽에 선문관이라는 관문이 존재했다. 즉, 낙양에 대해 잘 몰라서 단지 무지해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5] 이 사람은 삼국지에 나오는 주유의 후손이라고 한다.[6] 현대의 고시낭인들도 큰 꿈을 갖고 고시를 준비하다 실패하고 다른 일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원래 품었던 꿈과의 괴리 때문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경우가 흔한데, 이와 비슷한 케이스일 가능성이 크다.[7] 물론 당시의 과거시험이라는 게 정신나간 수준으로 어려운 시험인 데다 애초에 뽑히는 이도 극소수로, 보통 사람들보다 아주 똑똑한 사람들조차도 떨어져 나간다는 건 감안해야 한다.[8] 정말 의도적으로 위선자 컨셉을 잡은 건지, 아니면 근현대에서 이렇게 해석이 된지는 불명. 일단 루쉰도 '위선자 같다'라고 했지 확정짓지는 않았다.[9]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면 전투에 있어서 기책, 책략 등은 한신과 맞먹을 정도로 과대평가되었으나 정치적인 능력인 내정과 관련된 부분은 과소평가되었다.[10] 유비의 친척으로 설정된 유연의 아들 유총이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그때까지 살아있던 헌제가 이를 보고 만족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만일 이 때까지 헌제가 살아있었다면 서진 멸망 당시에는 120세가 넘는다(...) 이러느니 차라리 유총이 헌제 후손을 다시 찾아내 한나라를 재건했다는 설정이 더 나을 지경[11] 모종강은 관우가 손권 앞에 붙들려왔을 리 없다는 배송지의 평가와 달리 손권과 대면하는 장면을 만든다.[12] 가정본 일부에는 관우안량을 참수할 때 묘사도 안량이 관우가 이야기하러 오는 줄 알고 방심했기 때문으로 나오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안량 방심 대목은 나관중의 서술이 아닌 후에 추가된 것으로, 모종강은 관우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가볍게 삭제한다.[13] 사실 모종강도 조조에 대해선 악인이지만 웬만한 위선자들보단 조조가 훨씬 낫다든가 하는 식으로 조조가 단순한 악한이 아닌 대단한 악인이라는 식으로 평가한다.[14] 그냥 손화와 손패를 두고 분란이 일어나 손권이 손화는 쫓아내고 손패는 처형했다 정도로 묘사되지 구체적인 진행과 피해는 묘사되지 않는다.[15] 정사에서 제갈량은 외교적인 부분밖게 기록되지 않았다.[16] "이미 주유를 낳았거늘 제갈량을 왜 또 낳았는가"[17] 그 외에도 육손, 장료가 언급되는데 육손은 어디까지나 여몽에게 꾀병을 내서 관우를 안심시키라는 계략만 진언했지 직접 관우와 대적한 적이 없으며, 장료도 최대한 관우와 조조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에 가까웠지 관우와 크게 대적한 일은 없다.[18] 서양 최초의 사서라고 할 수 있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만 봐도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많다.[19] 사기 같은 사서를 보면 실제 병력 얼마를 얼마로 부풀려서 호왈했다는 기록도 나온다.[20] 태사자 같은 경우는 인상적인 초반 등장에 비해 이후 큰 역할을 못하고 일찍 죽어버렸기에 충분히 이해되는 묘사다.[21] 궁지에 몰린 맹달이 홧김에 대충 쏜 화살이 서황의 이마에 맞는 것으로 나왔다. 작중 맹달의 성품과 행실을 보면 전형적인 소인배며 궁술이 강조된 적도 없다. 그런 맹달의 조준도 안된 눈먼 화살에 이마를 정통해서 죽었다는건 모욕에 더 까깝다. 오죽하면 모종강도 왕년에 번성에서 관평을 핍박했으니 지금 업보를 받는거라며 멘트를 달았다.[22] 다만 장비의 경우 아무래도 부하를 함부로 대하고 술술술거리는 성격을 집어넣었다 보니 어쩌면 "아무리 존나 센 사람도 이런 짓하면 캐망" 이라는 이미지를 넣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23] 70회본의 뒷부분의 내용이 산만하기 때문인데, 그래도 수호전 초기 판본은 100회본으로 알려져있고, 70회본은 김성탄이 편집한 것이다. 또 김성탄이 수호전을 70회본으로 편집하는 과정에서 무단으로 고친 부분과 창작한 부분이 있어서 비난의 목소리가 있다.[24] 해당 게임에서 나관중이 자신을 '나관중'으로 소개하는데 정확히는 잘못이다. 자는 높이는 표현이므로 스스로를 말할 때는 보통 자를 쓰지 않는다. 예외적으로 정사 삼국지 촉서 장비전에서 장판파 부분을 보면 장비가 "내가 장익덕이다. 앞으로 나와 생사를 겨루자."(身是張益德也, 可來共決死)라며 조조군을 상대로 자(字)로 자신을 부르는데, 이는 오늘날 한국어로 의역하면 "내가 장비님이다. 앞으로 나와 생사를 겨루자."고 스스로를 높여 상대를 도발하는 표현이다. 이렇게 특별한 경우에나 쓰이고 일반적인 경우에 자로 자신을 소개하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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