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니아 연대기

덤프버전 :



나니아 연대기
The Chronicles of Narnia

파일:나니아 연대기.jpg

장르
판타지, 아동문학
작가
C. S. 루이스
삽화가
폴린 베인스
옮김이
햇살과나무꾼
최초 발행
1950년 10월 16일
국내 출간일
2005년 11월
권 수
전 7권
출간 기간
1950년 10월 16일 - 1956년 9월 4일
출판사
제프리 블레스 (1-5권)
더 보들리 헤드 (6-7권)
하퍼 콜린스 (현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시공주니어

1. 개요
2. 시리즈
2.1. 한국어 번역본
2.2. Susan of Narnia(나니아의 수잔)
3. 특징
3.1. 기독교적 색채
3.2. 작품 내의 플라톤 철학
6. 평가
6.1. 기독교계의 입장
7. 미디어 믹스
7.1. 영화
7.1.2. 넷플릭스 실사 영화 시리즈
7.2. 드라마
7.3. 애니메이션
7.4. 게임



1. 개요[편집]


나니아 연대기는 영국의 시인이자 수필가, 비평가, 소설가인 C. S. 루이스의 총 7편의 판타지 소설 시리즈다. 사실 명석하며 신랄하기까지한 저서들로 유명한 루이스가 어린 아이들을 위해 만든 시리즈다. 때문에 스토리상 전투나 전쟁에 대한 묘사를 세밀하게 표현하지 않는 대신 캐릭터들의 성장과 소통에 중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전세계적으로 1억 2,000만부가 팔렸으며, 현재까지는 사자와 마녀와 옷장, 캐스피언 왕자, 새벽 출정호의 항해영화화되었고 넷플릭스에서 판권을 사 다시 영상화가 진행중이다. 연대순이 아닌 출판연도 순으로 제작하는 것으로 보인다.


2. 시리즈[편집]


나니아 연대기 (The Chronicles of Narnia)
연대기 순
출판 연도
영화화 연도
마법사의 조카 (The Magician's Nephew)
1955년 (6)
-
사자와 마녀와 옷장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
1950년 (1)
2005년
말과 소년 (The Horse and His Boy)[1]
1954년 (5)
-
캐스피언 왕자 (Prince Caspian)
1951년 (2)
2008년
새벽 출정호의 항해 (The Voyage of the Dawn Treader)
1952년 (3)
2010년
은의자 (The Silver Chair)
1953년 (4)
사전 작업 중
최후의 전투 (The Last Battle)
1956년 (7)


표에서 알 수 있듯 시리즈의 시간 순서와 출판 순서가 다르다. 가장 잘 알려진 국내 번역본인 시공주니어 네버랜드 클래식 시리즈에서 시간 순서로 배열해 출간했는데 영화는 (지금까지는) 출판 순서대로 만들어지고 있다보니 혼란을 겪는 독자들이 많다. 외국에서도 이 문제를 가지고 말이 많은 듯. 누구는 출판 순서로 봐야 한다고 하고 누구는 시간 순으로 봐야 한다고 하고… 처음 출판됐을 때 이 시리즈에 넘버가 따로 붙어 있지 않았고, <사자와 마녀와 옷장> 출판 전에도 이미 시리즈의 집필은 거의 다 완성돼 있었기 때문에 더 혼란을 줬다. 작가 루이스도 이 문제에 명확한 답을 내리지는 않았다. 독자인 한 아이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는데, 여기서 독자가 주장한 대로(시간 순서대로) 읽어도 좋을 것 같다고는 말하지만 어떤 순서로 읽든 정말 상관 없다고 끝맺는다. 출판 순서 또한 의도된 게 아니었다고 한다.

다만 더 자주 쓰이는 건 출판 순이다. <사자와 마녀와 옷장>이 가장 대표적으로 루이스의 기독교적 세계관을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하고,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쓸 때만 해도 루이스는 후속편을 고려하지 않았었다고 한다.[2] 소설을 면밀히 읽었을 때도 <사자와 마녀와 옷장>이 <마법사의 조카>의 후속편이라는 느낌보다는 <마법사의 조카>가 <사자와 마녀와 옷장>의 프리퀄 같다는 느낌이 더 크다. 영화화도 출판 순서대로 되고 있다.

집필 순서는 <사자와 마녀와 옷장>, <캐스피언 왕자>, <새벽출정호의 항해>, <말과 소년>, <은의자>, <마지막 전투>, <마법사의 조카>였으며[3] 루이스가 집필을 완료한 날짜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사자와 마녀와 옷장>을 메인 스토리로 가장 먼저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출판 순서대로 읽었을 때는 <사자와 마녀와 옷장>에 나왔던 커크 교수와 옷장이 <마법사의 조카>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 등의 떡밥이 회수되어 흥미로울 수 있다. 반대로 작품 자체의 시간 순으로 읽었을 때는 나니아가 만들어지고 발전했다가 멸망하는 모습을 차례대로 지켜보며 말 그대로 하나의 연대기를 관통하며 지켜보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2.1. 한국어 번역본[편집]


1987년 성바오로딸 수도회 출판사에서 나르니아 이야기[4]라는 제목으로 최초 정발한 바가 있으나 이후 절판되었다. 일본에서 해당 명칭으로 번역되어 발매되었는데, 바로 앞에 오류로 보이는 나르니아라는 표기법도 일본에서의 발매명인 'ナルニア国物語'의 나루니아(ナルニア)라는 표기법을 그대로 읽은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일본어 중역판이 대부분이었던 출판 시점을 생각해본다면 더욱 그럴듯하다. 각권의 순서는 시간대가 아니라 출판 순으로 되어 있다.

한길사에서도 90년대 중반경 낱권으로 발매된 바 있다. 이상하게 사자와 마녀와 옷장의 경우에는 '사자와 마녀'로 제목을 줄여서 내놨는데, 수도승을 '승려'로 번역하는 등 예스러운 번역이 특징.

이후 2001년 시공주니어에서 폴리 베인즈의 삽화까지 수록하여 펴낸 7권짜리 책과, 이를 단권화한 엄청 두꺼운 양장본이 출판되어 한국에선 이 버전이 제일 대중적이다. 2005년 영화판 개봉을 즈음하여 성바오로딸 수도회 출판사에서 절판되었던 나르니아 이야기의 개정판을 다시 출간했으나 시공주니어 판에 밀려서 곧 절판되었고 지금은 희귀본이 되었다.


2.2. Susan of Narnia(나니아의 수잔)[편집]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사망으로 집필되지 못한 나니아 연대기의 8번째 책. 최후의 전투 이후의 시간대를 다뤘을 것으로 보이며, 주인공은 수잔 페벤시.

왜 수잔만 따로 취급되는지 의아해할 수도 있는데, 이는 마지막 권에서 지구에서 나니아를 방문한 사람 중 수잔만이 유일하게 아슬란의 나라[5]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구에 남았기 때문이다. 수잔이 아슬란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확실하게 나온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는 수잔이 나니아를 어릴 적의 환상으로 생각하고 믿지 않게 되었으며, 현실에 집착하게 된 것이 원인으로 지목되곤 한다.[6] 이는 후에 서술될 플라톤 철학, 특히 플라톤의 동굴 비유와 강한 접점이 있다. 수잔은 아슬란을 통하여 나니아가 진짜 현실임을 배웠음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진짜 현실 세계의 그림자와도 같은 지구의 생활에 더 녹아 들어가버린 것이다. 이것이 수잔이 나니아에 들어가지 못한, 또는 "않은"[7] 결정적 이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아슬란의 나라에 들어간 지구인은 수잔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의 페벤시 남매, 유스터스, 질 폴과 나니아의 창조를 지켜본 디고리 커크, 폴리 플러머, 앤드루 외삼촌, 마부 총 9명과, 후에 따로 불려온 마부의 부인까지 10명이다.

언뜻보면 수잔이 버림받은 것같지만 루이스는 '수잔이 아슬란의 나라에서 완전히 쫓겨난 것은 아니며, 이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라고 말했는데, 이 책에서 그 내용을 다루게 될 예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8] 본인이 아이들에게 남긴 편지에 따르면 연대기를 마무리할 정말 멋진 이야기가 떠올랐던 것으로 보이지만, 루이스는 이 작품을 시작하기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9]

어쨌거나 루이스가 의도했던 결말은 수잔도 아슬란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었던 걸로 보인다.


3. 특징[편집]



3.1. 기독교적 색채[편집]


저자 루이스는 매우 독실한 성공회 신자로, 세계의 멸망과 구원, 대속제, 구세주의 시련과 같은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작품 내에서 강하게 드러나 있다. 루이스의 책을 읽어보면 정말 성서의 일화를 오마주한 내용이 수두룩하게 나온다. 기본적으로 아슬란을 예수의 위치에 두고 생각하면 쉽게 찾아낼 수 있는데, 그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 작품 전반에 걸쳐 나오는 아담의 아들과 하와의 딸이라는 호칭.[10]
  • 디고리 커크가 따낸 사과.[11] → 성경에서는 선악과라고 부르며 하느님처럼 될 수 있다는 얘기로 뱀이 여자(하와또는 이브)를 꾄다. 소설 속에서 사과를 몰래 따먹은 다른 세계의 여왕은 자신이 아슬란처럼 될 수 있다고 소리치는 점에서 성경에서 따왔다고 할 수 있다.
  • [12]을 통해 세계를 창조하는 조물주. (마법사의 조카)[13]
  • 죄인을 위해 대신 죽어 죗값을 치르고 부활 (사자와 마녀와 옷장)
  • 선행이든 죄이든, 자신이 한 일 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말과 소년)
  • 적을 피한 광야 체험 (말과 소년, 캐스피언 왕자)[14]
  • 믿는 자만이 신을 볼 수 있다.(캐스피언 왕자)
  • 처음엔 못됐으나 개과천선하는 인물[15](새벽 출정호의 모험)
  • 가면 돌아올 수 없는 천국으로 생각되는 신세계 (새벽 출정호의 항해)
  • 신이 내린 표지를 의심없이 믿고 따라야 한다.(은의자)
  • 아마겟돈을 연상케 하는 마지막 전투와 종말 이후 선택받은 자들만이 천국에서 조물주와 같이 산다.(마지막 전투)[16][17]
  • 성경 속 괴물인 레비아탄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바다뱀 괴물(새벽 출정호의 항해)

찾아보면 더 많지만 당장 눈에 띄는 것이 이 정도다. 루이스가 썼던 기독교 변증서에 비해서 훨씬 고민이나 사려 깊음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나니아 연대기의 주제는 결국 '구원은 오직 구원자인 아슬란(기독교의 신과 예수의 은유)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는 것이고, 이 신앙은 <은의자>편에서 드러난 것과 같이 무조건적이고 의심없는 것어야 하며, <최후의 전투>편에서 드러난 것처럼 아슬란에 대한 신앙(기독교 신앙의 은유)이 없는 이들은 이 구원의 길에서 버려진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적인 부분을 잘 녹여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처음부터 자신의 조카들을 위한, 즉 어린이를 위한 동화로 썼으므로 어린이의 입장에서 어려운 개념 따위는 없다.

필립 풀먼이 이런 나니아연대기의 강한 종교적 경향성을 강하게 비판하며, 나니아 연대기의 안티테제황금나침반 삼부작을 쓴 사실은 유명하다.[18] 그 때문인지 나니아 연대기에 드러나는 강한 종교적인 주제 의식에 거부감이 드는 독자들 중에 황금나침반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는데, 황금나침반은 무신론에 입각해서 쓰여진 작품으로 비기독교적이라기보다는 반기독교적인 면이 강하다. 환상 문학 중에 명작으로 인정받는 작품들 가운데, '어스시의 마법사' < '반지의 제왕' < '나니아 연대기' 순으로 기독교적인 색채가 강하다.


3.2. 작품 내의 플라톤 철학[편집]


그래서 이 시리즈를 이야기할 때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기독교적인 세계관'과 '플라톤 철학'.

기독교적인 세계관은 위의 내용만 보고도 대강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슬란을 예수[19] 정도로 보고, 아슬란을 따르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기독교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나니아에 온갖 생명체가 다 있는데도 정작 왕이나 여왕은 인간만 되는 것도 이런 측면이다. 기독교 철학으로 보면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가 있기 때문으로 보면 될 것이다.

인간만이 왕이 되는 모습은 플라톤 철학의 일면이기도 하다. 플라톤의 '철인 정치'가 그런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 철학에 따르면 이상적인 국가에서 국민들은 각자 타고난 성향에 따라 계급이 정해져 있고, 각 계급에 속한 사람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임무만을 다한다. 다른 계급의 임무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 그러니 나니아에 사는 온갖 생명체들이 왕 될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 전투를 보면 '동굴의 비유'로 대표되는 이데아론을 보여준다. 나니아가 멸망하자 아슬란이 모든 생명을 데리고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데, 그 세상은 나니아와 비슷하지만 훨씬 더 아름다운 세상이라고 서술된다. 그러자 그곳에 간 동물들 중 하나가 '왜 이제까지 나니아를 사랑했는지 알겠어요! 나니아가 이곳과 닮았기 때문이었어요.'라고 한다. 즉, 여태까지 작품에 등장한 나니아는 아슬란이 이끌고 간 '진짜' 나니아의 그림자(동굴에 비친 그림자)였던 것이다.

덧붙이자면 플라톤 철학에 나타난 위와 같은 요소는 기독교가 사상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도입한 요소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나니아 연대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현대 기독교 알레고리로 가득 찬 기독교적 장르 문학이라는 뜻이다. 첫 작품인 사자와 마녀와 옷장은 예수의 도래와 수난, 죽음과 부활을 아슬란을 통해 재현한다. 새벽 출정 호의 항해에서는 나니아에 올 수 없게 된다는 점에 상심하는 루시에게 자신은 다른 세계에서도 만날 수 있지만 다른 이름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기독교 교리나 문화적 배경에 지식이 있는 독자라면 훨씬 재미있게 볼 수 있다. 다만 얼마나 많은 요소들이 종교 상징인지 깨닫는다면 오히려 순수한 재미를 덜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첫 작품은 복음서를 한번 본 느낌이 들 정도.


4. 등장인물[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나니아 연대기/등장인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세계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나니아 연대기/세계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평가[편집]


절친한 벗 톨킨의 반지의 제왕과 더불어 고전 판타지 명작의 대표격으로 손꼽힌다. 대중적인 인기나 평가는 하이 판타지의 바이블이라고까지 불리는 반지의 제왕에 미치지 못하지만, 작가의 생동감 있는 필력이나 기독교 알레고리들을 판타지적으로 아주 매력있게 투영해 낸 세계관은 분명 걸작 소리를 듣기에 모자람이 없다. 특히 현대 판타지 문학 계보도를 그리자면 톨킨과 더불어 1세대에 속하는 작품인지라, 오늘날의 작가들이 흔히 물려받은 판타지적인 유산(톨킨, D&D, 기타 등등)과 무관하게 역사, 신화, 전설 등을 독자적으로 엮어 내는 개성이 돋보인다. 단지 기독교 알레고리를 전달하기 위해 판타지라는 당분을 첨가한 수준인 여타 기독교 판타지와는 격이 다르다.

흔히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그리고 어스시 연대기를 세계 3대 판타지라고 일컫는데, 이런 류의 몇 대 뭐가 다 그렇듯이 딱히 명확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세 작품 모두 독창적이고,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큼 인기 있고 영향력이 강하다는 점에서는 동일하게 묶을 수 있다. 실제로 영미권에서 현대 판타지 장르에 대한 개괄식의 글에는 거의 예외 없이 반지의 제왕과 더불어 이 두 작품이 언급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현대 판타지 문학사를 쓴다면 이들의 이름만큼은 절대 빠질 수 없다는 것.

서사와 주제의식 자체가 종교적 관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보니 기독교에 부정적인 독자나 비평가들은 그 부분에 감점을 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의 일부 기독교 신자들은 판타지니까 감점을 주고 보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강한 종교적 성격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긴 하지만, '판타지 동화'의 관점에서 보면 경쟁 상대가 거의 없고, '기독교 아동 문학'으로 시선을 돌려 보면 이 작품이 단연 독보적인 위상과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 실제로 영미문화권기독교 가정에서는 아이들에게 '다윗과 골리앗' 수준의 유아용 성경이야기들을 웬만큼 들려주고 나서, 그 다음 단계로 읽어주는 책 정도의 위치를 가지고 있다.

작가인 루이스는 애초부터 아동들을 대상으로 눈높이를 맞췄기에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시니컬함이나 잔인함 등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는 아동들을 얕보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충분히 진지하고 생동감 있는 묘사들로 세계관의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명랑하고 발랄한 구석도 있지만 사람도 막 죽어나가고 어리석음이나 탐욕에 대한 묘사도 결코 유치하지 않다. 그야말로 동화풍의 모험으로 가득찬 새벽 출정 호의 항해에서도 캐스피언과 에드먼드가 황금에 눈이 멀어 서열로 기 싸움을 하고 칼부림 직전까지 가는 등 아이들에게 현실을(?) 일깨워 주는 대목이 있고,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미지의 공포에 대한 묘사는 어느 성인용 문학 못지 않다.

세계관 곳곳에 숨어있는 기독교의 오마쥬, 동심을 불러 일으키는 동화적 풍경과 능수능란한 서술 방식[20]에 심취한다면 이 소설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4권까지는 말 그대로 논스톱으로 읽어제낄 수 있다.

반면 이 작품이 기본적으로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쓰여진' 작품이라는 점은 이 작품의 강한 종교색에 비추어 볼 때 오히려 비판받을 여지가 많은 문제점인데 오히려 이것이 작품에 대한 비판을 방어하기 위해 오남용되고 있다고 볼 여지도 있다. 사실 합리적으로 생각하자면 '어떠한 신조나 신념, 또는 주의주장'을 상대에게 전달하고 설득할 경우 그 상대가 '판단능력이 완성되어 옳고 그름을 스스로 가릴 수 있는 성인'인 경우보다 '아직 판단능력이 완성되지 않은 아이'일 경우에 훨씬 조심스럽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은 명백하다. 성인이라면 주장의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지만 아직 판단능력이 완성되지 않은 아이라면 그러한 주장의 문제점이나 모순, 오류등을 파악하지 못하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버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이스의 경우, 성인을 상대로 쓴 기독교 변증서에서는 상당한 합리성과 세심한 논지 전개, 일부 영역에 대해서는 높은 객관성이나 개방성까지 보여준 데 비해 아동을 독자로 상정한 나니아 연대기에서는 오히려 우악스럽고 난폭해 보이기까지 하는 기독교 일방주의와 차별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는 것. 비판적으로 본다면 반론할 능력이 있는 성인을 대상으로 쓴 책에서는 논리적인 태도를 보여주지만 아이들을 대상으로 쓴 책에서는 기독교적 관점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려고 든다는 비판도 가능한 부분이다. 즉 나니아 연대기 자체는 아이들에 눈높이에 맞춰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교훈을 전하도록 구성된 이야기이긴 한데, 작중에서 이렇게 전달하는 '교훈'이 언제나 보편적인 것은 아니며, 이러한 '교훈'에 논란이나 비판의 여지가 있을 경우 나니아 연대기 특유의 교훈적 동화 구성에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것.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집필될 작품일수록 이런 논란의 여지가 많아지는 경향을 보이는 편이다. 전반부에 속하는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 <새벽 출정호의 항해> 까지는 기독교적 관점에 기반한 것이기는 해도 비교적 보편적인 도덕적 교훈을 주제로 삼기에 큰 문제는 없다고 받아들여지지만[21] <은의자> 에서는 실용주의적인 신식 교육에 대한 거부감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며, 후기작인 <말과 소년>이나 <최후의 전투>에서는 특정한 인종, 문화, 종교에 대한 혐오가 노골적으로 터져나오는 것. 정리하자면, 아이들에게 올바른 품성을 도야하기 위한 도구로 동화가 사용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나니아 연대기에 속하는 일부 작품에서는 동화를 통해 아이들에게 '나쁜 짓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특정 인종, 문화, 종교를 혐오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루이스의 절친한 벗이었던 톨킨은 나니아 연대기의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강하게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을 선호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주제 의식을 알기 쉽게 드러내는 글은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나 쓰는 거라고. 그래서 본인의 오랜 설정과 연구의 결실을 소설의 형태로 드러낸 것이 반지의 제왕(…)이다. 물론 반지의 제왕은 기독교적 소설은 아니다.[22]

책 뒤에 있는 연대표를 보면 피터:14살, 수잔:13살, 에드먼드:12살, 루시:10살, 유스터스:16살, 질:16살까지 나니아에 갔다.가장 나니아에 많이 간 루시는 가장 적은 나이에 못 오게 되었으며 유스터스와 질은 마지막인 7편에서도 주위에서 나니아에 갈 수 있는 걸로 취급한다.


6.1. 기독교계의 입장[편집]


일반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기독교적 판타지 소설' 또는 '기독교 아동 문학'으로 널리 추천되는 작품이다. 그러나 근본주의적인 장로교인들 중에는 아무리 기독교적인 작품이라고 해도 마녀나 반인반수 등이 등장하니 멀리해야 한다는 부류도 있고, 작가가 성공회 신자라고[23] 경계를 하기도 한다. 반대로 해리 포터 시리즈 같은 소설을 반기독교적이라며 매도하는 개신교인들 중에 그래도 같은 개신교인이 쓴 나니아 연대기가 그나마 낫다며 추천하는 경우도 있다.

판타지를 종교적으로 따지는 자체를 비웃는 기독교인들도 있다. 고인이 된 만화가 김지은은 기독교 판타지라는 말부터가 코미디라고 깠다. 참고로 김지은은 열성적인 개신교도에 가족이 목사였지만,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를 종교적으로 까는 것부터가 코미디이며 이에 반목하여 기독교 판타지를 쓰는 게 어이없다면서 2000년 초반에 유니텔 만화동호회에서 의견을 보였다.

여담으로 이 책을 한국에 냈던 출판사 중 하나인 성 바오로 출판사는 가톨릭 성바오로딸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출판사다. 이쯤 되면 읽는 걸 권장하고 있다고 봐도 될 듯하다. 사실 작가인 C.S.루이스는 나니아 연대기를 차치하고서라도 '스크루테이프 편지', '순전한 기독교' 등 교파를 초월한 근본적인 기독교에 대한 호교론을 여러 편 집필한 작가이기 때문에 그의 책은 성 바오로 출판사에서 대부분 취급하고 있었다가 현재는 개신교계 출판사인 홍성사에서 출판하고 있다.

6.2. 인종차별 논란[편집]


나니아 연대기의 치명적인 단점은 인종차별 논란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실제로 '말과 소년'의 경우, 동양인=야만인으로 일반화하고 그들의 도시인 타쉬반을 퇴폐적으로 묘사하는 등, 당시의 인종차별 묘사까지 그대로 가져왔는데 이것이 논란의 주요 핵심이다. 그 외에도 1930년대~1940년대에 쓰여진 소설이라 지금 기준으로 보면 약간 수용이 안 가는 묘사도 몇몇 있다. 예를 들어 5권의 유스터스와 페미니즘, 신식 교육에 대한 묘사는 이런 미치광이 교육 같으니라고! 라는 수준이다. 이는 비슷한 시기 루이스의 친구기도 했던 톨킨에 의해 쓰인 반지의 제왕에서도 인종차별 논란이 존재하는 것을 연상케 한다. 아래는 논란에 대한 의견들.

  • 옹호론
하지만 둘 다 가상의 악의 왕국을 심판하는 내용의 판타지 소설이고, 권선징악의 스토리를 위해 주인공들과 대칭에 있는 세력은 반드시 악해야만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며, 이런 인종에 대한 차별이나 편견, 그리고 가부장적인 묘사와 남성우월주의적인 시각 등은 사실 현대의 소설들에도 간간히 나타나고 있음을 상기해보면 이런 인종차별 논란은 이들 소설이 학문적으로 분석될 정도로 유명하기 때문에 걸리는 시비라고 볼 수도 있다. 쉽게 말해서 애초에 이런 소재의 소설은 보는 관점에 따라 태클 걸 거리가 무궁무진하며, 당장 인간과는 명백히 다른 종임과 동시에 독립된 문화권임을 명시한 오르크의 경우에도 몽골인이나 아랍인을 야만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는 시비에 휩싸이는 형편이다.
작가와 작품의 괴리가 나는 이유는, 권선징악형 소재의 판타지 소설 자체가 '착한 편 VS 나쁜 편' 구도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쁜 편'은 마지막엔 자비 없이 처단해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악할 수밖에 없고 현실의 온갖 부정적인 소재로 점철되곤 한다. 이런 구도로 나가다보니 당대의 부정적인 시선이 가미되기도 하는 것이다.
"세계 전역에서 백인들의 범죄가 '하늘에까지 악취를 풍기고' 있습니다. 대학살, 조약 파기, 도적질, 유괴, 노예 삼기, 강제 이송, 채찍질, 폭력, 구타, 강간, 모욕, 놀림, 가증한 위선이 그 악취를 이룹니다."
루이스의 저서들 중 하나인 기독교적 숙고[24]에선 오히려 백인들의 범죄가 악취가 날 정도라고 서술한다.

  • 비판론
내가 읽어본 모든 책들 중에서 가장 흉물스럽고 해롭다.("one of the most ugly and poisonous things I have ever read.")

필립 풀먼
다만, 이 문제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나니아 연대기와 루이스에 대한 인종차별 논란은 반지의 제왕과 톨킨에 대한 인종차별 논란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점이다.
옹호론에서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사우론의 수하인 오르크들도 아랍인(또는 오스만 제국)이나 몽골을 야만적으로 묘사한 것이라는 시비에 휩싸인다'고 주장하는데, 그런 식으로 따지면 오크가 소련볼셰비키, 또는 히틀러 수하의 나치를 은유하는 것으로 읽었다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톨킨 자신은 자신의 작품이 이런 식으로 알레고리적 관점에서 해석되는 걸 혐오했으며, 오르크는 특정한 대상이라기보다는 악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인간인 이스터링 역시 "난쟁이처럼 도끼를 사용한다", "전차몰이족이 그들의 일부이다"처럼, 특정 문화권을 연상하기에는 무리인 것들 뿐이다. 하라드림들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북아프리카인들이 연상되기는 하지만, 반지전쟁 이전에는 악역이 아니었다가 사우론에게 속아넘어간 듯한 서술, 그리고 곤도르인들과의 전투에서 객사한 하라드림 전사들에 대한 동정적인 서술이 나오는 걸로 어느 정도 무마가 가능하다.[25] 결국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오르크들은 영국과 서유럽 기준으로 동쪽에서 온 침략자[26] 이미지를 다 한 번씩 뒤집어 쓴 적이 있는 셈이다. 이는 작중에 등장하는 오르크의 이미지가 현존하는 특정한 문화권을 직접적으로 암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롭게 현실의 이미지를 투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톨킨은 최소한 특정한 문화권이나 인종을 직접적으로 비하했다는 논란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으로, 인종차별 논란 역시 주로 작품의 해석을 두고 벌어진다. 또한 톨킨 자신도 작품 외적으로 수차례에 걸쳐 아파르트헤이트 등의 인종차별 정책에 강하게 반대하는 입장을 밝힌 바 있고, 작품 내적으로도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세력이나 인종들이 현실이나 실제 역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읽히기를 원치 않는다는 입장 역시 수 차례 밝힌 바 있다.
즉, 톨킨의 작품들은 직접적인 비하 논란에 휘말린 것은 아니고, 간접적인 비하 논란에 대해서도 톨킨 자신이 어느 정도의 해명을 제공한 상태에서 이해 가능한 부분이 어디까지인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나니아 연대기와 루이스는, 일단 논란 자체가 직접적인 비하 문제로 인해 발생했다는 점에서 문제의 차원이 다르다. 예를 들어, 사막 국가인 칼로르멘의 경우 피부는 까무잡잡하고 모발은 검은색인 사람들이 사는데, 그 땅의 남자들은 수염을 기르고 언월도로 무장하며 머리에는 터번을 얹고 다닌다. 그리고 화폐에는 초승달 무늬를 새겨놓고 산다. 이 사람들이 과연 현실의 어떤 문화권을 연상시키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27] 그런데 칼로르멘인들을 잔인하면서도 비열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면, 이는 명백한 비하로 여겨질 소지가 다분하다.
또한, 칼로르멘인들이 믿는 신인 타슈는 인신공양을 요구하는 사악한 신이며, 따라서 연작의 마지막 이야기인 최후의 전투에서 타슈와 아슬란을 동일시하는 태도 역시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행태가 된다. 물론, 칼로르멘인이라고 모두 다 사악할 리는 없으니 최후의 전투의 종반부에서 한 젊은 칼로르멘 군인이 아슬란에게 구원받기는 하는데, 이는 그 청년이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타슈의 이름을 부르며 타슈를 숭배했더라도 실제로 그 청년이 믿은 것은 악한 신인 타슈가 아니라 선한 신인 아슬란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또한 특정 종교에 대한 비하로 여겨질 소지가 매우 다분하다.
본작에서 칼로르맨인들은 명확하게 유색인종을 연상시키고,[28] 따라서 타슈를 신앙하는 칼로르맨인들의 종교는 명백히 이슬람교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작중에서 타슈는 사악한 신이고 타슈 신앙은 사악한 종교로 묘사된다는 점에서 타 종교에 대한 비하라는 비판이 발생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스는 타 종교(이슬람을 연상시키는 타슈 신앙)을 믿는 이에게도 구원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묘사했고, 이에 대해 루이스보다 더 강경한 배타적 종교관을 가진 일부 기독교인들이 '오직 기독교 신앙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부정하고 다른 종교를 믿더라도 올바르게 살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는 종교다원론적 태도'라고 공격했고 루이스는 '단순히 다른 종교를 믿고 선하게 살았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를 믿었지만 선하게 살았기에 최후의 심판 전에 아슬란(사실상 기독교의 하느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대답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작가인 루이스 자신이 뚜렷한 대답을 내놓지도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나니아 연대기의 인종차별이나 특정 인종, 특정 종교에 대한 비하는 가볍게 여기기 힘든 문제이다. 권선징악적인 구도의 이야기에서 나쁜 편을 확실히 악하게 묘사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특정한 문화권과 인종, 종교를 연상시키는 소재들이 잔뜩 사용되었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시대적 상황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나니아 연대기는 20세기 중반의 작품이다. 현대와 같은 정치적 올바름 개념이 널리 퍼진 시대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문화상대주의는 보급된, 즉 함부로 남의 문화를 조롱하거나 모욕하는 것이 잘못된 태도라는 인식 정도는 확립된 시대였다. 이 점에서 같은 기독교 종파들에게는 개방적이었던 루이스였지만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영화판에서는 칼로르멘이 언급만 되었고, 아직 별다른 칼로르멘인도 등장하지 않아서 일단은 그나마 논란이 될만한 소지가 없다.[29] 만약 말과 소년이 영화화된다면 제작 단계에서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할 듯하다.


7. 미디어 믹스[편집]



7.1. 영화[편집]



7.1.1. 2005년 ~ 2010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나니아 연대기 실사영화 시리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반지의 제왕 영화 대박에 힘입어 영화로도 나왔다.


7.1.2. 넷플릭스 실사 영화 시리즈[편집]


2018년 10월 3일 넷플릭스가 나니아 연대기 소설 일곱 권 전체에 대한 영상 사업권을 획득했다. HBO왕좌의 게임이 흥한 뒤로 더 위쳐 시리즈처럼 판타지에 관심을 가지고 아마존의 반지의 제왕 드라마 시리즈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 매튜 알드리치가 영화 시리즈 총감독을 맡는다. 그런데 이후 소식이 뜸하다.

2022년 11월 14일, 그레타 거윅이 감독직을 맡기로 결정했다.# 2024년 촬영할 것이라고 한다.#


7.2. 드라마[편집]


1967년에 영국 ABC 텔레비전에서 제작하고, ITV에서 방송한 10부작 흑백 드라마가 있다. 하지만 현재는 1화와 8화만 남아있다.

1988년에 영국 BBC에서 드라마화되었다. 참조 국내에서도 리뷰를 찾아볼 수 있는데 소설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끌어간다. 다만 88년이다 보니 아슬란 등의 특수분장이 매우 충격적이다.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링크 <캐스피언 왕자>(1) 링크 <캐스피언 왕자>(2) 링크 <새벽 출정호의 항해> 링크 <은의자> 링크


7.3. 애니메이션[편집]


1979년에 미국 CBS에서 제작한 장편 애니메이션판. 감독은 빌 멜렌데즈. 참조 링크 이 애니메이션은 에미상 애니메이션 프로그렘 부문을 수상했다.


7.4. 게임 [편집]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17 20:48:38에 나무위키 나니아 연대기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패번시가의 아이들이 나니아를 다스리던 시절의 이야기이므로 위치상 2권의 외전격이다.[2] "When I wrote The Lion I did not know I was going to write any more." - Dorsett, Lyle (1995), <C. S. Lewis: Letters to Children>.[3] Lyle Dorsett의 <C. S. Lewis: Letters to Children>의 옮긴이 각주 참고.[4] 나니아의 철자는 Narnia이다. r를 '르'로 읽으면 나르니아가 되긴 하며 미국에서 만든 영화를 보면 다들 '날니아' 비슷하게 발음(다만 배우 대부분은 영국인이다)한다. 하지만 영국책이기 때문에 r발음이 탈락해서 결과적으로 발음은 나니아에 더 가깝다.[5] 이 세계관에서의 일종의 천국 비슷한 개념이다.[6] 수잔을 제외한 나니아 방문자들이 아슬란의 나라로 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마지막 권에서 나니아와 관련한 일로 모두 모이려다 기차 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때 일부 인원은 기차에 타고 역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나머지 인원은 역으로 나와 있었다. 나니아를 믿지 않는 수잔은 이들과 함께 있지 않았기에 혼자 살아남았다.[7] 수잔의 자유의지로서 선택하였던 결말이다.[8] 이는 성경의 예수의 재림(rapture)때 믿는 자들이 승천한 이후 지구상에 남은 자들(remnants)의 구원을 위해서도 신이 따로 계획을 세워두었다는 요한 묵시록의 구절을 연상시킨다.[9] 어떤 의미에서 보면 나니아 연대기는 미완결 상태로 끝났다고 봐도 된다.[10] 한국 개신교 한정 이브→하와[11] 사실 실제 성경에선 아담이 따낸 선악과가 무슨 종류의 과일인지 나오지 않는다. 일단 통상적으로 사과라고 알려져 있다. 이는 라틴어로 사과가 악이라는 단어와 발음이 비슷해서라고 한다.[12] 정확히는 노래[13] '기독교에서는 '말씀'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창세기의 천지 창조에서 인간 이외의 모든 것은 '있으라'라는 말만으로 자동 생성되었다고 서술된다.[14] 신/구약 모두에서 광야는 고통을 겪고 성장하는 장으로 묘사된다.[15] 돌아온 탕아[16] 다만 주인공 일행 중 한 명은 들어가지 못했는데, 들어가지 못한 이유도 곱씹어보면 기독교적 색채가 강하다.[17] 다만 작가에 따르면 들어가지 못한 사람도 영원히 못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한다. 이에 대한 뒷이야기가 있는데, 안타깝게도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작가가 사망하는 바람에...[18] 황금나침반은 "신"은 사실 자신을 창조주라고 속이는 일개 천사에 불과하다는, 기독교의 세계관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내용이 배경이 된다. 그 "신"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이 황금나침반의 주된 이야기다. 이런 파격적인 사상을 가진 필립 풀먼이었지만, 추후 '나는 성공회 소속 무신론자다.'라며 기독교계를 향한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신이 없다고 생각하며 세속주의와 인문주의를 강하게 지지하지만, 문화적 배경으로서의 기독교도 동시에 존중하겠다는 것. 이러한 유연한(?) 태도를 성공회측에서도 관대히 받아들인 덕에, 현재는 성공회와 큰 마찰 없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19] 성부 하느님이 아니라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모델이라 한 것은, 아슬란이 '신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이다. 자칭 바다황제의 아들이라고 칭한다. 물론 모티브가 모티브이다 보니, 본질적으로는 바다황제와 같을 수도 있다.[20] 중간중간 괄호 안 작가의 설명이나, 장면 바꾸기, 인물 서술이 파트리크 쥐스킨트와 비슷하다. 물론 시대상으로 이쪽이 앞선다.[21] 엄밀히 말하면 <새벽출정호의 항해>에서도 유스터스 스크러브에 대한 묘사에서 '아이는 (어른이 보기에) 아이다워야 한다' 는 형태의 동심 에 대한 환상을 강요하는 점등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 간단히 말해 '아이는 동화나 이야기책을 읽어야지, 정보서적 같은 실용적인 책은 아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책이다' 라는 작가의 견해를 독자들에게 주입하기 위해 실용적인 책을 읽는 유스터스를 찌질이로 묘사해버린 뒤 '찌질하던 유스터스가 배려심과 용기를 가진 좋은 아이로 거듭나는 과정'을 '동화적인 이야기를 시시하다고 여기던 유스터스가 동화적인 영웅담에 푹 빠지게 되는 과정' 과 등치시켜 버렸다는 것. 당연히 '아이는 아이답게 동화같은 이야기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작가 개인의 취향일 뿐 보편적 도덕은 아니다.[22] J. R. R. 톨킨은 매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작품 안에서 그리스도교적 영향을 찾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으나, 톨킨은 자기 작품에 대해서는 내내 '이야기는 이야기로 즐기고, 내 작품에서 알레고리 운운하지 말라'는 쪽이었다.[23] 성공회도 엄연한 개신교다. 더군다나 세계적으로는 개신교 중에서 제일 많은 신자가 소속되어 있는 교파이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교세가 너무 작아 낯설기도 하고, 주류인 장로회와 비교하면 교리적 차이가 꽤 있어서, 다른 개신교 종파들과는 별도인 것처럼 취급되기도 한다.[24] 기독교적 숙고(Christian Reflections), 홍성사판 220p[25] 여기에 덧붙여서 곤도르인들이 서유럽 백인으로 묘사되지 않는 것도 한몫 한다. 로한인들은 백인으로 묘사되지만 이들은 애초에 모티브가 톨킨의 모국인 영국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26] 모르도르의 위치가 동쪽이다.[27] 차라리 논쟁의 여지가 있다면 일단 직접적인 비하라는 것은 인정하고, 그 수준이 어느 정도에 이르렀는지를 두고 논쟁하는 것이 더 의미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작중 설정에서 순수한 나니아 세계 출신의 인간은 없고, 모든 인간들은 지구에서 건너간 이들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니아의 모든 인간들은 영국인인 프랭크와 헬렌의 후손들이다. 이에 비해 칼로르멘인들의 기원은 작중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외견상의 인종부터 그 문화까지 명백하게 다른 칼로르멘인들은 다른 기원, 즉 현실의 아랍/이슬람 문화권에서 건너간 이의 후손이 아니냐는 추측 역시 설득력이 잇는 것. 따라서 '단지 명백하게 아랍인을 연상시키는 인종/문화집단을 만들어놓고 그들을 비하 대상으로 삼은 것인가?', 아니면 '진짜 아랍인의 후손을 등장시켜놓고 그들을 특정하여 비하 대상으로 삼은 것인가?'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쪽이 차라리 의미있을 것이다.[28] 게다가 이름 자체가 상당히 거시기한데, 우연의 일치일수도 있겠으나 영어로 유색인종을 뜻하는 "coloured"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인종 분리 정책 등을 펼칠때 사용한 단어이기 때문에 비하하는 의미가 강했으며 현재로써는 완전히 사장된 단어이다.[29] 영화 3편에서 론제도에 있는 노예시장에서 칼로르멘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나왔다.